[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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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의 과정 및 평가 2
 기획: 투쟁평가/

현장에서 미래를  제113호
이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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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투쟁평가/

철도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의 과정 및 평가 2


이철의 /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쟁취·철도매점 파업투쟁 승리, 철도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조직국장

* 이 평가서는 공대위나 서울지방본부에서 검토하거나 총괄한 평가서가 아님을 밝힙니다. 공대위는 평가회 때 나온 다양한 의견들을 여과 없이 자료집에 수록하기로 하였으며, 이 평가서도 그 방침에 따라 작성한 것입니다. 평가와 관련한 다른 의견들은 각 단위 평가서와 자료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필자 주



부산역 집회와 그 이후

12.17 6차 결의대회를 서울지역본부 앞에서 열었다. 서울지역본부에서 연 이유는 정규직의 구조조정 분쇄투쟁과 결합하기 위해서였다. 18일에는 부산지역에서 공공연맹 부산지역본부 및 활동가들, 여승무원들이 부산역 집회를 열어 투쟁을 전국화하고자 했다. 이 집회에는 최명호 집행위원장과 서열 여승무원 2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이 집회에 대하여 철도노조 부산지방본부가 규탄성명서를 내는 등 강력히 반발하여 부산의 분위기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부산지방본부는 “공공연맹 부산지역본부가 부산지방본부와 의논도 없이 집회를 강행하였으며 패권주의적 사업작풍을 보였다.”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의 여승무원들은 지지엄호할 단위를 전혀 찾지 못하게 되었고 사측의 면담 및 탄압에 노출되었다. 이후 부산 여승무원들은 소수가 개별적으로 농성장을 방문하는 등 음성적인 활동 외에 활로를 찾지 못하였다.

20일 철도청, 본부조합과 여승무원 문제에 대하여 교섭했으나 결렬

12월 16일 철도청 일반철도사업본부장은 본부조합에 전화를 걸어 교섭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철도청측과 2차 교섭이 철도청 구청사(현 철도시설공단 건물)에서 열렸다. 철도청에서 이천세 일반철도사업본부장을 대표로 하는 교섭단과 본부조합에서 유치상 사무처장, 김학경 운수분과국장 등이 참여했다.

<여승무원 정규직화 관련 노동조합 요구안>

1.2003년 4.20 철도 단체협약 부대합의서 『현장인력충원』과 관련하여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는 하반기 직무진단결과(2005년 10월말까지)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한다.

2.2004.12.31자로 계약해지 예고된 새마을호 여승무원 31명은 2005년 10월말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한다. (단, 31명중 퇴직자는 제외)

이날 교섭은 상황 및 분위기에 밀린 철도청측 교섭단이 이같은 내용을 잠정합의로 해서 양측의 입장을 조정하기로 합의했으나 청측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 끝내 결렬되었다. 이날 교섭은 노동조합과 청측의 입장이 가장 접근했던 것이었다. 투쟁동력이나 주변의 상황이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던 교섭이어서 교섭단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1항 때문에 철도청측이 결렬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즉 “당시 근무자에 대하여는 정규직화 할 수 있으나 보직은 할 수 없다”는 방침을 이때 비로소 확인하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철도청의 반응은 “4.20합의는 보직의 정규직화이지 근무했던 사람을 정규직화 하라는 게 아니다.”는 등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나 이날 교섭 뒤 철도청 관계자들 대책회의에서 “보직의 정규직화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입장이 확인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후 투쟁은 끝내 이벽을 돌파하지 못한 채 1차 투쟁국면을 정리하게 되었다.

12.16 공대위 스티커 부착투쟁(전동차, KTX, 일반열차)
12.17 서지본 ‘구조조정 분쇄 투쟁결의대회’ 및 6차 결의대회(서울지역본부)
12.18 부산지역 결의대회(부산역 14:00) 공공연맹 및 부산지역 활동가 결합 이화여대 조순경 교수 등 여승무원 성차별, 비정규직 차별로 국가인권위 진정서 제출
12.20 2차 노사교섭(18:00 구청사) 잠정합의로 노조측 요구안 노사공동 작성
12.21 7차 결의대회, 공대위 야간스티커 부착투쟁
12.23 본부조합 철도청에 항의성 공문(노사합의 불이행 및 불성실 교섭관련) 발송
12.24 8차 결의대회, 비정규직 특보 발행
12.28 9차 결의대회, MBC ‘아주 특별한 아침’ 촬영, 야간스티커 부착투쟁, 철도청 답변공문 전송
12.30 오전 06시 KTX 열차 집중 스티커 부착투쟁, 철도청 수정요구안 제시, 10차 결의대회, 공대위 송년회
12.31 철도공사 출범전야제 23:00 규탄집회


투쟁의 고갯길에서 농성을 배치하다.

지방본부 및 공대위는 이 시기가 투쟁의 고비라고 판단하였다. 비록 잠정합의였지만 철도청이 요구안에 가장 접근한 안을 내놓았던 것, 언론의 집중보도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점, 투쟁주체인 여승무원들의 사기가 가장 높은 시기인 점, 공사전환을 앞두고 철도청 관료들의 처지가 불안한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지방본부 및 공대위는 21일부터 서울역에서 제한적으로 농성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서울지방본부는 오전 10시 30분부터 15시까지 서울역에서 집회 및 농성프로그램을 배치하고 철도청을 압박했다. 스티커 작업도 더욱 집중하여 이날 야간스티커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24일에는 새벽 06:00부터 서울역에서 KTX에 “고속철도 땜질정비”를 내용으로 하는 폭로성 스티커를 집중적으로 부착했다. 그러나 철도청은 이미 전열을 정비하여 더 이상 밀리지 않았다. 철도청은 본부조합측과 요구안에 대하여 조정을 거듭하였으나 12월 27일 “4.20당시 근무했던 여승무원 27명(퇴직자 제외)을 하반기 직무진단결과에 따라 정규직화를 이행하자.”고 하여 대폭 후퇴된 답변을 공문으로 보내왔다. 즉 “보직은 더 이상 거론할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서울지방본부 및 공대위는 더욱 강도 높은 실천을 벌이기로 하는 한편 12월 31일 “철도공사 출범전야제”에 항의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서지본과 공대위는 주 2회 결의대회를 비롯하여 스티커 부착투쟁을 쉴 새 없이 벌이는 한편 본부조합을 통해 철도청을 계속 압박했다. 그러나 철도청은 교섭에는 임하되 보직문제에 대하여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 교섭은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한편 철도청은 12월 28일 계약해지 되었던 여승무원들 중 역무로 재계약을 희망한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에 대하여 전원 새마을호 여승무원으로 재계약했다. 정규직화 이행이 투쟁의 실제과제로 된 것이다. 12월 31일 23:00 철도공사 출범 전야제가 서울역 대합실 앞 광장에서 열렸다. 신광순 철도청장을 비롯한 철도청 고위관리자들과 관계인사들이 참석한 이날 전야제에서 서울지방본부 간부들을 중심으로 항의투쟁이 벌어졌다. 방송차량으로 “해고자 복직 없이 철도공사 출범 없다.” “철도청은 새마을호 정규직화 약속을 즉각 이행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지방본부 간부들과 해고자 일부가 합세하여 단상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이날 출범 전야제에는 철도공안, 관리자 등 100여명이 나와 서지본의 투쟁에 대비했다. 전야제가 끝나고 철도청은 KTX 첫 열차 출발에 앞서 홈에서 기념식을 벌이려고 했으나 지방본부 간부들 및 해고자들의 항의에 밀려 불발되었다. 지방본부 간부 및 해고자들은 홈에 모여 구호를 외치고, 열차에 스티커를 붙이며 격렬하게 항의하여 청장이 도망치듯 역사를 빠져 나갔다. 연말부터 철도 해고자들은 서울역에서 복직을 요구하며 서울역에서 철야농성 중이었는데 이날 항의투쟁에는 결합하지 않기로 결정한바 있었다. 그러나 홈에서 항의집회에는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기념식을 무산시킨 것이다.

철도청은 이날 집회를 핑계로 지방본부 간부 대부분을 업무방해 등 혐의로 경찰에 고소고발 하였고 KTX 스티커 부착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서울역 농성에 대한 업무방해 청구 등 각종 고소고발을 남발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투쟁도 철도청의 방침을 바꾸지 못하고 정규직화 이행투쟁은 해를 넘겨 지난한 투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4. 철도공사 특채방침으로 투쟁대오를 뒤흔들어

연말부터 특채방침 흘려

철도청이 여승무원 특채방침을 슬슬 흘리기 시작한 것은 04년 연말의 일이었다. 12월 29일 여승무원 간담회 때 심각한 의논거리가 되었고 30일 송년회에서 내부동요에 대한 단속이 있었다. 철도청의 특별채용이 “여승무원 투쟁을 교란하기 위한 것이며 여기에 개별적으로 응시할 경우 투쟁대열이 심각하게 흐트러질 것”이라는데 의견을 함께 했으나 “특채가 실시되면 여승무원들이 동요할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철도청의 특채가 비록 여승무원뿐만 아니라 운수직 경력자 특채이긴 하지만 이것이 여승무원 투쟁을 교란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에 여승무원, 공대위, 지방본부 등 모두가 공감했던 것이다.

1월 3일 여승무원 특별채용에 대한 공대위의 의견서가 채택되었다. 공대위는 의견서에서 “경력자 특채에 응시자가 있으면 투쟁주체사이에 단결이 깨지게 될 것이며, 투쟁의 명분이 약화되어 주장의 파괴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견서는 또 “여승무원들이 단결만 유지하면 서지본 및 공대위는 끝까지 이 투쟁을 책임지고 마무리할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1월 4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11차 결의대회가 열렸다. 오후 4시에는 서열 여승무원 총회가 열려 철도청의 특별채용과 관련하여 “전원 거부한다.” 는 결의를 이끌어 내었다. 1월 5일에는 철도청 감사관실에서 12월 31일 철도공사 출범식 전야제 항의집회와 관련하여 김정민 본부장 외 집행간부 7명에 대하여 출두명령서를 보내왔다. 지방본부는 전원 거부하기로 방침을 세웠으며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출두요구서를 발부하였다. 지방본부에서 끝내 거부하자 공사는 출두요구서 대신 고소고발로 방침을 바꿨다.

05. 1. 3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 한겨레 특집보도
1. 4 11차 결의대회, 공대위 회의, 여승무원 특채관련 총회 (16시)
1. 5 철도공사 서지본 간부 8명 출두요구서 발부
1. 6 여승무원 특채관련 2차 총회, KTX 스티커 부착관련 고양차량 관리단 손해배상 청구 예고공문 전송
1. 7 06:00 서울역 스티커 발부투쟁, 12차 결의대회
1.11 13차 결의대회, 공대위 회의 ,야간 스티커 투쟁
1.14 14차 결의대회
1.18 서열,부열 여승무원과 공대위 간담회(14:00 부산) 금강화섬 일일주점 참석
1.19 서울역 집회자제요청 공문 발송
1.20 서열 여승무원 간담회
1.21 15차 결의대회, 공대위회의, 야간스티커 부착투쟁
1.24 여승무원 총회(14:00 서열)
1,25 16차 결의대회
1.28 17차 결의대회, 06:00 서울역 스티커 부착투쟁
1.31 철도공사 경력직 자격증 특채공고

여승무원 투쟁은 11월 25일 공대위 첫 집회를 시작으로 급격히 상승하였으나 12월말을 고비로 점차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12월 18일 여승무원 재계약 뒤 긴장이 떨어진 점, 철도공사가 특별채용으로 투쟁 주체를 뒤흔들었던 점, 12월말을 고비로 철도공사가 전열을 정비하여 적극 반격에 나선 점, 철도청의 반격을 무력화하고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투쟁전술의 전환을 가져오지 못한 점, 특별채용을 놓고 여승무원 내부에 점차 분열이 확대된 점등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여승무원들은 또한 지도부 사이나, 여승무원 상호간 갈등이 고조되어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12월 28일 공대위 송년회에서 노출된 이 갈등은 끝내 해소되지 못하고 전임 회장이 투쟁대열에서 이탈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여승무원 투쟁의 지도부는 처음에 장순옥 회장이 열성적으로 투쟁에 임했으나 결혼으로 인해 윤은선을 직무대행으로 선출하였으며 나중에는 윤은선 회장, 권정은 비상대책위 위원장으로 역할을 나누게 된다. 한편 철도노조가 12.3 특별단체교섭 체결이후 조직이 급격히 무력화되고 비민주적인 임금교섭으로 현장의 불만이 고조되어 서울지방본부 및 새마을호 투쟁에 결합했던 활동가들이 임금협약 인준투표를 요구하는 활동에 전념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월 18일에는 부산지역의 2차 결의대회를 계획하였으나 부산지방본부와 공공연맹 부산본부, 부산지역 활동가들 사이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간담회로 대체하였다. 이날 서울에서 여승무원 2명과 최명호 집행위원장, 부산 여승무원 3명과 부산지역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이날 간담회를 앞두고 부산역에 부산지역본부 노정과, 감사관, 열차팀장 등이 삼엄한 감시를 하여 부산의 활동이 어려움에 부딪쳤음을 보여 주었다. 이날 간담회에서 “부산 여승무원 간담회, 노동조합 가입 등 할 수 있는 일부터 진행하자.”고 합의하였으나 진행되지 않았다. 지방본부와 지부 등 엄호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부산 승무원들이 투쟁에 나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장 강화노력도 불발, 계속 하강국면으로

2월 1일 공대위회의를 열어 투쟁방향을 의논했다. 교착되어 있는 국면을 전환하기 위함이었다. 임금교섭 뒤 조합은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고 공사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어떤 교섭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런 상태에서 여승무원 관련 교섭도 신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사측의 고소고발 등 반격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투쟁주체는 특별채용문제로 흔들리고 있었다. 지방본부는 임금교섭과 관련하여 본부조합과 대립하였고 인준투표를 요구하는 활동에 집중하여 여승무원 투쟁은 “최소한의 국면만 유지한다.”는 방침이었다. 즉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두 달 이상을 끌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2월 1일 회의에서는 서울본부가 주도하는 집회방식의 변화와 현장순회를 결의하였으나 둘 다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현장순회는 약화된 여승무원 동력으로 순회할 사람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현장의 분위기도 임금교섭의 후유증으로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현장순회는 2월 4일 한차례 시도한 뒤에는 거의 진행하지 못하였다.

2 .1 18차 결의대회, 공대위 회의
2 .2 금강화섬 집회 참석(여승무원 2명) 여승무원 간담회
2 .3 여승무원 총회
2. 4 동대위 현장순회 (20명 참여, 3개조)
2.11 여승무원 특채공고 접수(11-14일간)
2.12 여승무원 총회(서지본) 10명 참석, 조직정비 권정은 비대위 워원장으로 선출, 조직(박미애) 선전(이선영) 선전차장(이지영)
2.13 여승무원 총회 6명 참석,
2.14 철도공사 자격증 특채 입사원서 접수 (8명 접수) ,외 11명대상 긴급 총회개최
2.17 서열 여승무원 총회(5명 참석)
2.20 특채 필기시험(8명중 7명 응시, 권정은 응시포기)

여승무원들 분열 가속화, 철도공사 반격이 강화되다.

특별채용을 둘러싸고 여승무원들 사이에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특히 권정은 비대위 위원장이 원서를 접수한 것을 가지고 비판하는 분위기가 강화되었다. 전후과정을 놓고 볼 때 권정은 비대위 위원장은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되어 원서를 접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이탈하는 여승무원들 사이에서 매우 힘들어 했으며, 정작 필기시험은 포기하였다. 투쟁대오가 흔들린다고 판단한 철도공사는 집회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2월 22일 집회에서 서울역 부역장은 철도매점 박창수 조직국장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고 가볍게 밀치자 대합실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을 빌미로 공안이 출동하여 박창수 조직국장을 연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 철도공사 고위관리자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서울역 서부역에 위치한 공안 사무실 앞에서 항의집회를 벌였으나 공안은 끝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공안은 48시간이 임박한 24일 오전에 이르러서야 박창수 조직국장을 석방하였다.

3월 6일 여승무원 총회를 소집했으나 4명만 참석하여 9일 다시 소집하기로 하였다. 3월 1일에는 서울열차 사무소장이 권정은 비대위 위원장을 면담하고 “집회에 참석하지 말 것이며 여승무원 투쟁을 중지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단호하게 거부하는 권 비대위 위원장의 태도에 “계속 집회에 나가면 해고하겠다.”고 하여 집행위원장이 소장을 면담하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소장은 3월 1일과 2일 두 차례에 걸쳐 권정은 비대위 위원장을 면담하고 “계속 집회에 나가면 근로계약서 7조 서열소장과 계약직 여승무원 사이에 맺은 근로계약서 7조 2항 “불법으로 집단행동을 하거나 철도청 또는 소속의 질서를 문란케 한 때” “회사의 정당한 업무지시에 불응한 때” “승무원으로서 품위를 손상시킨 때 또는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철도청 또는 소속의 명예를 실추시킨 때”
에 의거 해고하겠다.”고 협박하고 두 차례에 걸쳐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경고장을 발부했다. 경고장은 권정은 비대위 위원장 외에도 여승무원 2명에게 차례로 발부했다. 소장과 사무소는 또한 문자메시지를 보내어 압박하기도 하였다. 또 여승무원과 인척관계인 직원을 통해 압박을 하는 등 간접적인 탄압을 지속했다. 3월 8일에는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불안정노동 철폐연대 주최로 서울역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는 양경규 공공연맹 위원장을 비롯하여 100여명이 참석하였으나 정작 여승무원들은 2명만이 참석했다.

2.22 공대위 20차 집회, 철도매점 박창수 조직국장 철도공안 연행, 구속영장 신청
2.23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서열 7명중 6명 합격)
2.25 적성검사에서 여승무원 2명 탈락, 엄길용, 최명호등 간부 6명 철도공사로부터 고소고발 당함
2.28 철해투 서울역 농성 해제
3. 1 21차 결의대회
3. 8 여성의 날 집회(서울역 광장)
3.10 공대위 수련회
3.15 23차 집회, 차량과 공동집회
3.16 국가인권위원회 비정규직관련 입법안 청문회, 여승무원 대표참석(14시 국가인권위)
3.18 서열사무소장 권정은 비대위원장 3차 해고협박
3.22 24차 결의대회,
3.29 최세영 국장 연행, 철야농성 시작
3.31 최세영 조직국장 석방

계속되는 탄압, 그러나 꿋꿋이 버티다.

3월 10일 공대위는 안면도에서 공대위 수련회를 열어 결속을 다졌다. 20여명이 참석한 수련회에서 참가자들은 벽깨기, 뒷풀이 등을 하며 흥겹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정작 투쟁의 당사자인 여승무원들은 권정은 비대위 위원장만 참석하여 아쉬움을 샀다.

3월 15일 구조조정에 항의하는 차량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 참석자가 너무 적어 공대위 성원들을 붙여서 서울지역본부에서 합동집회를 진행했다. 투쟁주체인 여승무원들은 비대위 위원장이 혼자 집회에 참석하거나 2명이 번갈아가며 결합하는 악조건이었지만 공대위 결합대오는 꾸준하여 전체규모는 50-60대오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금강화섬 노동조합 상경투쟁으로 연대투쟁을 진행했고 나중에는 학생들이 주력대오가 되었다. 철도매점 파업투쟁 이후에는 철도매점이 집회의 주력대오가 되었다. 권정은 비대위 위원장은 서열 소장등 관리자들로부터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꿋꿋이 버텨 나갔다.

3월 29일에는 집회 뒤 스티커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최세영 조직국장을 연행하였다. 최국장은 스티커를 붙이려 대합실 문을 나서는 순간 진을 치고 있던 공안원 50-60명에게 연행되었다. 공안원들은 집회 사회를 맡았던 최국장을 점찍어 둔 것처럼 둘러싸고, 팔을 꺾는 등 순식간에 제압하여 연행한 것이다. 최국장 연행으로 김정민 서울본부장은 긴급회의를 열어 석방 시까지 서울역 대합실 농성을 결정했다. 이틀간 철야농성이 진행되고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최국장이 석방되었다.

고비를 넘기고 전열을 재정비하다.

임금협약 인준투표 국면이 끝나고 소강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철도공사로서는 고소고발과 연행등 강공이 이어졌으나 별다른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또한 김세호 전청장을 필두로 신광순 사장, 왕영용 본부장등이 유전개발 사건으로 차례로 구속되어 노무관리 체계가 허물어진 측면도 있었다. 공대위와 서지본은 투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여승무원과 접촉을 늘리고 고비를 넘기기 위해 애를 썼다.
공대위는 중단되었던 스티커 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정규직과 공동집회를 통해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정규직과 공동집회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또한 공대위는 집회 때마다 파업투쟁중인 철도매점과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철도매점은 강제용역전환과 계약기간 축소, 노동조건 개선, 노조활동 보장 등을 내걸고 2월 16일부터 파업투쟁에 들어가 있었다. 처음에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과 별개로 진행되었으나 화요집회에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대투쟁 국면으로 바뀐 것이다.

이시기 여승무원들은 3-4명이 투쟁에 결합하였으며 점차 특별채용으로 인한 갈등국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기화되는 투쟁에 지쳐 투쟁전망이 희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방본부도 여승무원 투쟁의 부담을 벗고 일상활동을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지방본부는 “여승무원 투쟁에 과도하게 집중한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노동조합 홈페이지에는 악의적인 비난 글이 계속 게재되었으며 예산도 04년 서울본부 투쟁사업비로 충당했는데 예산외의 지출이었다. 철도공사는 유전개발 사건으로 동요하고 있어 이시기에 밀어 붙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지방본부 집행부 회의에서는 투쟁을 단기간에 마무리하는 데는 대부분 동의했다. 그러나 농성투쟁으로 매듭지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판단이 엇갈렸다. 농성기간에 대하여도 일치되지 않았다. 투쟁주체인 여승무원들이 장기화되는 투쟁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결국 농성은 가능하면 일주일 정도로 단기간에 매듭짓자는 것, 어떤 일이 있어도 농성장을 지키며 단호하게 투쟁하는 것 등 방침이 결정되었다.

서지본과 공대위는 5월 3일 농성투쟁을 결의했다. 처음에는 장기농성보다 단기간의 집중농성을 결의했으나 교섭이 교착되며 결국 장기농성으로 이어졌다. 공대위는 농성을 위해 관련단체와 투쟁방향을 알리며 결합강화를 요청하였고 여승무원들을 차례로 면담하며 투쟁참여를 호소하였다. 스티커, 몸벽보, 보도자료, 플래카드 등 실무작업을 거쳐 5월 3일 예정은 단기간이었으나 기나긴 서울역 대합실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4.1 공대위 회의(21시 서지본), 야간 스티커 부착투쟁
4.5 26차 결의대회, 야간스티커 부착투쟁, 여승무원 3명 참석, 이철의 신임집행위원장 선출
4.7 철도 비정규직 모임과 현장순회
4.12 27차 결의대회, 뒤 수색역 서울차량과 공동집회, 스티커 부착투쟁
4.14 서열지부장, 여승무원 대표 본부조합 위원장 면담
4.18 본사 실무팀(김인호 부장등 2명, 이찬복 부본부장, 최명호 집행위원장)
4.19 28차 결의대회
4.22 서열 여승무원 총회,. 비정규모임 현장순회
4.27 여승무원 일제면담 (5.3농성투쟁 대비), 연대단체 간담회 진행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철도 비정규직 차별철폐/ 유전게이트 관련자 퇴진!
<선언문> 서울역 철야농성에 들어가며

우리는 오늘 5월 3일 10:30분부터 서울역 대합실 철야농성에 들어갑니다. 철도공사는 전 사장, 현 사장, 주요 본부장등 경영진 대부분이 유전게이트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유전게이트는 졸속, 비리, 정치권 연루의혹 등 구시대적 비리경영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경영진의 전원 퇴진 및 대대적인 수술을 요구합니다. 요금인하/ 학생 및 노인의 할인/ 저렴한 열차의 확대 등 철도교통 공공성 강화를 요구합니다.
철도공사는 이미 합의한 “새마을호 여승무원의 정규직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 감사관실 출두요구가 합의사항 이행요구에 대한 그들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새마을호 여승무원과 관련한 노사합의 이행을 요구합니다. 철도공사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고용불안과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은 고통받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계약의 도중해지/ 근무평정에 의한 재계약/ 병가사용에 따른 계약해지 등 노예와 같은 계약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공사 신규자의 60퍼센트로 묶여 있습니다. 고용, 후생복지, 임금, 노동조건 등 모든 조건에서 비정규직은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모든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합니다. 정규직화에 대한 계획을 세울 것을 요구합니다.
철도공사는 불법파견을 일삼고 있습니다. KTX 여승무원, 구내입환 기관사 등 현행 노동법에 파견이 금지되어 있는 업종에 계약직 노동자들을 불법으로 파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불법파견을 시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들을 공사에 직접 고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철도가 공사로 전환된 뒤 고위 경영진은 살판이 났습니다. 수없이 설립되는 자회사는 모두 철도 고위 경영진이나 퇴직 경영진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동자는 고용불안과 노동조건 악화로 착취당하고 고위층만 살찌는 부익부/빈익빈의 현장이 바로 철도공사입니다.
우리의 이 같은 요구는 매우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들은 매우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뒤따르더라도, 그 어떤 부도덕한 탄압이 뒤따르더라도 우리는 이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철도에서 일하시는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 동지들, 서울역을 이용하시는 노동형제들의 성원과 지지를 호소 드립니다.

2005년 5월 3일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쟁취및 철도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농성투쟁 시작- 초반교섭 뒤 끝내 국면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5월 3일 10시 30분 “31차 결의대회 및 농성투쟁 선포식”을 갖고 서울역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이날 서울역측에서 서울역 대합실 집회 장소에 의자를 배치하고 부역장 등 관리자들이 출동하여 집회개최를 저지하려 했다. 이들을 간단히 제압한 뒤 의자를 치워 농성장소를 만들었다. 출구 쪽에 “새마을호 여승무원은 1인승무 철회로 인한 인력충원 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4.20합의사항을 대형 플래카드로 만들어 게출했다. 바닥에는 깔개를 깔아 농성장을 꾸미고 “유전게이트 관련자를 전원 구속하라.” 등 4개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여승무원들 참여도 늘어 그동안 3, 4명이 집회에 참여하다가 농성장에 10여명의 여승무원들이 차례로 방문하거나 결합하였다. 파업투쟁중인 철도매점 노동자들도 농성을 함께 하기로 하여 40여명이 참여, 이들이 농성투쟁의 주력대오가 되었다.

5월 4일 철도공사 대전지역본부 건물에서 실무교섭이 있었다. 본부조합에서 허호 운수분과국장, 이철의 집행 위원장, 이종규 편집국장이, 공사측에서 권순직 영업처장 등 3인이 참석했다. 이날 교섭은 진척이 있어서 노동조합측 요구안이 대체로 수용되는 분위기였다. 즉 “계약해지 대상자였던 27명은 6월말까지 정규직화하고 나머지 여승무원은 별도로 교섭하자.”는 요구를 교섭장에서는 공감하되 돌아가서 의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요구는 04년 12월 교섭과 약간 달라진 것이었다. 04년 12월에 노동조합은 “27명은 10월말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하되 나머지 여승무원들은 직무진단결과를 거쳐 10월말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즉 시기적으로 6월까지 당겨서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사측은 노동조합의 이런 요구안을 끝내 거부하여 농성이 장기화되게 된다.

농성 초기에는 매일처럼 약식집회를 진행하다가 나중에는 화, 금요일 집중집회로 전환되었다. 야간 스티커 투쟁과 서울역 본선열차 스티커 투쟁이 강화되었으며 대형스티커 투쟁을 많이 하였다. 대형스티커는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약속이행” “철도매점 노조탄압 중지” “합의사항 이행” 등 3종을 제작하여 진행하였다. 나중에는 “철도매점노조 탄압중지, KTX 여승무원 불법파견 시정, (구)홍익회는 여승무원 1인당 100만원을 중간착취하고 있습니다.”는 스티커를 제작하여 사용했다. KTX 여승무원들이 새마을호 여승무원 스티커 도배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5월 10일 구 철도청 청사에서 교섭을 가졌다. 철도공사 본사에서 김해수 일반 철도사업 본부장을 비롯한 3인,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백성곤 사무처장, 허호 운수국장, 이철의 집행위원장이 교섭대표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공사측 김해수 교섭대표는 “22명 외에는 정규직화 할 수 없다. 4.20당시 근무한 여승무원만 정규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조합에서 동의하지 않아도 22명의 정규직화 절차를 이행하겠다.”고 하여 교섭은 결렬되었다. 노동조합은 “4.20 합의는 당시 근무자 및 보직에 대한 정규직화이다. 노동조합은 현재 근무하고 있는 새마을호 여승무원 112명에 대하여 전원 정규직화를 요구하겠다.”고 주장했다.

김해수 본부장은 “04년 7월 4일 당시 박길원 수석부위원장, 김학경 운수분과국장과 새마을호 여승무원 보직을 역무쪽으로 전환하는 것을 구두합의 했다.” 05.6.10 철도공사는 노동조합에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관련 설명”이라는 문건을 보내 이같은 입장을 공식화했다. 공사는 이 문건에서 “기관사 1인승무 철회로 인한 1,481명, 고속철도 소요인력 670명등 총 3,949명 증원을 관계부처에 요구했으나 1,349명만 확보되어 이행할 수 없었다.”고 밝히고 “04.7월에 노동조합과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정원(102명)을 타 직무로 전환하는 것을 구두합의 했다.”고 밝혔다.
고 계속 강변했다. 노동조합은 “근거 없는 주장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이후 다시는 노동조합과 공사측 사이에 교섭은 진행되지 않았다.

05. 5. 3 서울역 농성 시작, 농성투쟁 선포식, 문화공연
5. 4 10:30 철도매점 결의대회, 대전 실무교섭
5. 5 10:30 결의대회, 애간 스티커 작업
5. 6 결의대회
5. 7 결의대회, 서울역 본선열차 대형스티커 작업
5. 9 공대위 회의 “철도매점보다 먼저 타결할시 공대위는 매점투쟁에 계속 결합한다.”
5.10 집중 결의대회, 본사와 교섭결렬(철도청 구청사)
5.13 집중결의대회, 지여본부및 공안 100여명 스티커작업 저지차 동원
5.16 연맹 투쟁사업장 대표자 회의 (“품앗이 집회, 공동스티커 작업 진행”)
5.18 본사 감사 여승무원 면담 시도, 저지지침으로 무산시킴
5.23 한겨레 ‘왜냐면’ 기고 ‘유전게이트 사건과 한손에 쥔 다섯 개의 떡‘
6. 3 집중집회

농성투쟁 소강 속에 지속여부 놓고 진통

2차 교섭이 결렬된 뒤 투쟁은 지루하게 지속되었다. 농성투쟁만으로 본사를 더 이상 압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지방본부 집행부내에서는 농성투쟁 지속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5월 3일 농성을 시작할 때는 그 주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주말에 회의를 열어 1주일을 더 진행하자는 결정을 했으나 그 다음 주가 되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5월 13일 집행부 회의에서 교육국장과 집행위원장을 농성장에 배치하고 나머지 간부들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간부들은 당직일정을 짜서 농성장에 돌아가며 결합하기로 결정했다. 농성 지속여부를 놓고 벌인 논란은 지방본부 집행간부 일부를 교체하는 원인이 되었다. 농성비용도 문제가 되었다. 비정규 사업비가 따로 책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쟁사업비 만으로 비용을 처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진통은 근본적으로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이 장기화된데 따른 것이었다. 농성 초기에 분명한 방침이나 전망을 세우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세운 계획에 따라 농성투쟁에 들어간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5월 24일 늘어나는 농성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본부조합에 지원을 요청했다. 서울지방본부 집행부가 농성에서 철수하고 전담자만 두게 되었으므로 당연한 요구이기도 했다. 철도매점본부와 서울지방본부가 같은 지방본부이고 농성주력이 철도매점본부로 바뀐데 따라 본부조합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철도매점본부, 서울지방본부, 본부조합 연석회의에서 서울본부와 철도매점본부는 “본부조합의 농성장 결합, 농성비용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농성비용지원만 결정된 것이다. 농성투쟁 교착을 뚫기 위해 공대위와 철도매점본부는 연대투쟁에 적극 결합했다. 경찰청 고용직 노동조합, 현대기림 노조 등 공공연맹 산하 노동조합들과 전국 비정규직 연대회의 산하 노조 등에 주로 철도매점 본부 조합원들이 연대투쟁에 결합했다.

6월 6일 토요일 저녁 일곱시,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지민주, 노래공장, 윤미진 등 노동가수들과 율동패 선언, 경찰청 율동패 등 노동조합 문화패들이 공연을 맡았다. 그리고 공대위, 철도매점, 경찰청, 하이텍 알시디 코리아 등 투쟁하는 사업장의 노동자 80여명이 참석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무덤덤했지만 서울역 등 철도공사 관계자들의 반응은 신경질적이었다. 이미 철도공사는 서울역장을 시켜서 서울역 농성 및 집회, 스티커 등 투쟁전술에 대하여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한 상태였다. 문화제는 그 뒤에도 두 차례에 걸쳐 더 진행되었다. 7월 2일 열린 2차 문화제는 서울역에서 전원을 끊어 역사 앞 광장에서 열렸다. 파업 중인 해태제과 일반노조 조합원 700여명이 함께 하여 매우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05. 6. 6 서울역 농성장 ‘작은 음악회’ 개최
6.10 본사 조합에 여승무원 정규직화 계획공문 발송, 집중집회, 여승무원 투쟁속보 발행
6.15 철도매점 수련회, 서울역 공안 이철의, 김상노 폭력혐의로 연행, 서울역 공안분실 점거 뒤 석방
6.20 서울열차 여승무원 자격증 소지조사 시도, 공대위 거부지침으로 무산시킴
6.21 철도매점 교섭 (회사 “노동조합 불인정, 해고자 4명 3개월 뒤 복직”주장으로 10분 만에 퇴장)
6.23 철도매점 대자보 부착작업 시작
6.24 서울열차사무소 여승무원회 권정은을 회장으로 선출, 집중집회, 여승무원 특채공고
6.25 23:00 서열 계약해지된 여승무원 총회, 특채 전원 응시키로 결정, 공대위 회의

22명 정규직화 기정사실화, 철도매점파업으로 국면 넘어가

6월 10일 철도공사에서 노동조합으로 ‘4.20 합의사항(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 전환) 이행관련 알림’이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공문은 “합의당시 근무 중이던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현재 22명, 퇴직자 제외)을 2005. 6월말까지 채용절차를 이행하고 결원발생시 순차적으로 임용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노동조합은 이에 대하여 “철도청의 주장은 사실을 왜곡한 것이며, 합의에 따라 102명 전원을 정규직화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여승무원들의 투쟁동력은 급격히 소멸되었다. 22명 정규직화가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서울지방본부나 공대위도 이런 분위기였으나 철도매점 파업투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쟁점이 되지는 않았다.

6월 15일 농성의 주력이던 철도매점본부가 1박 2일 예정으로 강화도 수련회를 떠났다. 이날 저녁 농성장은 몇 안되는 철도 활동가들과 공대위 관계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날 취객이 시비 끝에 플래카드를 잡아떼는 사건이 발생했고 말리는 과정에서 취객의 옷이 찢어졌다. 서울역 관리자들과 철도 공안원은 이 취객을 부추겨서 철도공안에 고소를 하게 한 다음, 저녁 8시경 철도공안은 이철의 집행위원장과 해고자 김상노를 전격 연행했다. 이 사건으로 비상 집결한 공대위 관계자들과 학생들, 서울지방본부 간부들은 서울역 공안분실을 점거하여 농성했다. 새벽 두시 경에 연행자들이 석방되어 상황은 끝났으나 철도공안은 경찰에 관계자들을 고발조치했다.

6월 21일 철도매점 교섭이 열렸으나 10분 만에 결렬되었다. 이 교섭은 본부조합이 공사를 압박하여 열린 것이었다. 철도유통 경영진은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고, 해고자 4명은 3개월 뒤에 복직하자.”고 주장하여 철도매점본부 교섭위원들이 10분 만에 퇴장하여 결렬되었다.

6월 24일 철도공사에서 새마을호 여승무원, 해고자, 순직유가족에 대한 특별채용 공문을 노동조합에 발송했다. 25일 23:00에 서울열차 해당 여승무원들은 총회를 열어 전원이 특별채용에 응시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지방본부와 공대위는 “4.20 당시 근무하지 않은 4명을 제외하였고 나머지 여승무원에 대한 언급이 없는 상태에서 특별채용시험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시했지만 05.6.28 공대위 성명 “우리는 철도공사의 기만적인 특별채용시험을 강력히 규탄한다.” 가운데
총회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6월 28일 공대위 회의는 여승무원 총회의 결정을 바탕으로 하여 성명서 발표와 철도매점 투쟁이 있으므로 현재의 투쟁을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지만, 여승무원 투쟁은 사실상 정리국면에 들어가고 철도매점 투쟁에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6.28 집중집회 뒤 서울지역본부 차량집회 결합, 여승무원 원서접수, 서울역 업무방해등 형사건 재판
6.30 여승무원, 복직예정해고자, 순직유가족 적성검사. 여승무원 2명, 유가족 1명, 해고자 1명 적성검사 탈락, 검사자들 연수원 항의농성 끝에 재검
7. 2 2차 문화제 개최(서울역앞 광장)
7. 4 적성검사 관련자 회의
7. 5 화요 집중집회, 공대위 11차 회의-공대위 명칭변경
7. 6-8 연수원 항의집회, 대전 해고자 농성 돌입, 여승무원 2명 적성검사 합격
7. 7 연대스티커 야간작업
7.12 공대위 집중집회
7.20 여승무원 역무발령 반대 공문 본사에 발송
7.21 철도매점 4인, 연대대오 3명등 7명 단식투쟁 시작, 19:00 결의대회
7.29 본부조합 백성곤 사무처장, 전평호 철도매점 전본부장 단식투쟁 시작
8. 1 여승무원 22명 역무발령
8. 5 철도매점 합의타결

여승무원 22명 역무발령, 철도매점 합의타결로 투쟁정리

6월 28일 여승무원에 대한 특별채용 원서접수가 있었다. 이날 권정은 비대위원장은 여승무원의 희망직종을 ‘열차승무’로 기재하여 시비가 있었으나 저녁 6시 마감시간 직전에 접수했다. 희망직종 시비는 여승무원들이 역무발령을 원치 않는다는 상징적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6월 30일 여승무원, 해고자, 유가족에 대한 적성검사가 있었다. 이날 여승무원 2명, 해고자 1명, 순직 유가족 1명이 적성검사에서 탈락하는 사건이 있었다. 적성 검사자들은 즉시 연수원 적성검사실 앞에서 항의농성을 벌였으며 탈락자들이 재검키로 하고 해산했다. 철도공사의 적성검사 탈락조치와 관련하여 본부조합에서 대응책을 논의한 결과 공대위는 부곡 연수원에서, 해고자들은 대전 본사 앞에서 항의농성을 하기로 결정했다. 7월 6일부터 3회에 걸쳐 부곡 연수원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해고자들은 대전 본사 앞에서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7월 8일 적성검사에서 탈락하여 재검에 들어간 여승무원 2명(박미애, 박지혜)이 합격했다. 해고자들은 적성검사에 불응했다.

7월 5일 화요집중 집회 뒤 공대위는 회의를 열어 명칭을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쟁취 및 철도매점 파업투쟁 승리, 철도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로 변경했다. 서울역 농성이 사실상 철도매점본부가 주력이 되어 진행한 것 치고는 뒤늦은 결정이었다. 이날 오후에는 철도유통 앞에서 본부조합 주최의 4차 총력결의대회가 열렸다. 7월 7일 장기투쟁 사업장 공동명의의 연대스티커 작업이 진행되었다. 본래 공공연맹 산하 조직들 사이에 검토되었으나 철도노조 본부의 반대로 무산된바 있어 장기투쟁 사업장들이 독자적으로 진행하였다. 경찰청, 새마을호 여승무원, 철도매점본부, 경마진흥노조, 하이텍 알시디 코리아 등이 함께 진행하였으며 비용은 서울지방본부, 철도 2개 현장조직이 주로 분담하고 철도매점본부, 경마진흥 노조가 분담하였다.
7월 8일 여승무원 2명이 적성검사에서 합격했다. 8월 1일에는 여승무원 22명이 전원 역무 쪽으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지방본부 및 공대위는 마지막으로 여승무원의 역무발령 거부를 투쟁 주체에 타진했지만 국면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로써 04년 11월 하순부터 진행된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이 사실상 정리되었다.
공대위는 철도매점본부의 파업투쟁 승리를 위해 결합하였다. 번갈아가며 농성장을 지켰으며, 농성장 프로그램을 나누어 맡았다. 그리고 단식투쟁 진행시에는 릴레이 단식으로 투쟁을 받쳤다. 공대위와 철도매점본부는 서울역 농성장을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요구중심에서 철도매점본부의 분위기로 바꾸었다. 플래카드를 바꿔 걸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던 것이다.

7월 20일 철도매점본부 단식투쟁 시작 때 공대위는 “투쟁이 청산적으로 흐를 수 있다. 시기상조이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을 내었으나 투쟁 주체의 결정을 존중했다. 7월 21일 나승안 본부장 직무대행을 비롯하여 철도매점본부 4명, 조합 비정규 국장, 공대위 집행위원장, 해고자 김상노 등 7인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7월 29일 본부조합 백성곤 처장, 전평호 매점본부 전 본부장이 동조단식에 들어갔다.
8월 5일 철도매점본부가 합의타결을 하여 171일만에 파업투쟁을 종료했다. 서울역 농성에 들어간 지 95일, 단식투쟁 17일만의 일이었다.


Ⅲ. 쟁점과 관련한 평가

1. 공대위 구성 및 의사결정구조와 관련하여

1) 공대위 구성

공대위 구성과 관련하여 평가회에서 좀 더 폭넓게 구성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올바른 지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구성당시에는 “끝까지 책임지고 실천할 수 있는 단위”라고 판단되는 곳에 주로 제안하였다. 철도 비정규직 운동이 출발점에 있는 점, 철도 정규직의 비정규직에 대한 계급적 단결의식이 미약하여 투쟁동력을 주로 공대위에 기댈 수밖에 없음을 감안한 것이었다.

2) 공대위 의사결정 구조와 관련하여

공대위 의사결정구조는 특채응시여부, 역무발령에 응할지의 여부는 투쟁주체 본인들의 결정이 필요한 부분은 서울열차 여승무원들의 총회에 따랐다. 대중추수주의로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농성시작이나 중요한 전술의 변화 등 중요방침은 서울지방본부 집행부회의에서 주로 결정하였다. 공대위에서 “공대위는 몸 대주기만 해야 하느냐?”는 비판을 받았고, 정당한 비판이라고 판단한다. 한편 투쟁방향이나 전망은 공대위 회의에서 많이 의논하였다. 서울지방본부 간부들 사이에 “결정은 공대위에서 하고 서울지방본부는 받치기만 하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교섭은 교섭권이 본부조합에 있기 때문에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교섭에서 투쟁 초기의 쟁점은 “보직의 정규직이냐, 자연인의 정규직이냐?” 하는 것이었다. 서울지방본부와 본부조합 실무자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었다. 이 문제는 점차 본부조합과 통일되었고 사정을 잘 아는 서울열차 사무소 소속 간부가 실무를 맡으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2. 선전기조와 관련하여

선전물은 스티커 7종, 시민선전물 2종, 대형스티커 4종, 새마을호 투쟁속보 4호, 여승무원 내부선전물 4호, 기타(서울지방본부 속보 등) 2종이 발행되었다. 선전기조와 관련해서는,
- 비정규직 투쟁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내용보다 시민캠페인과 같은 내용들(유전게이트, 고속열차 보수품 유용, 철도서비스 등)이 주가 되었다.
- ‘여승무원의 눈물’과 같은 스티커는 “불쌍한 여성노동자”와 같은 식으로 접근했다.
- 투쟁속보 발행 등이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 실무를 공대위에서 나누어맡지 못하였다.
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비정규직 투쟁의 정당성보다 시민 캠페인성 주장들은 투쟁전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할 것이다. 주로 집회나 스티커 작업 위주로 투쟁이 진행되다 보니 철도 경영진을 압박하기가 어려웠다. 철도가 공공사업장이란 점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비판이라고 판단한다. 투쟁속보 발행이 안정적이지 못했던 점은 초기 공대위에서 역할을 나누어 맡았으나 담당자가 바뀌는 등 안정적인 집행력을 확보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공대위 참가단위가 철도투쟁 외에도 여러 투쟁에 결합해 있어 실무가 사실상 집행위원장에게 집중되어 안정적인 실무력을 갖추지 못한 점도 있다.

3. 투쟁전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투쟁전술을 구사하였다.

- 화요 집중집회(초기 및 농성시기에는 화, 금 집회)
- 대합실 농성
- 스티커 작업 및 열차내 선전물 배포작업
- 민원 ; 초기에 정부부처 등에 청원성 민원제기
- 현수막 ; 서울역 및 주요역사에 여러 플래카드를 걸었다.
- 역사 내 대자보 작업
- 서명운동
- 고소고발 등 법적대응
투쟁전술을 결정지은 것은 상황을 감안한 것이다. 즉 처음 한 달을 넘긴 뒤 여승무원들이 심하게 동요하였고 투쟁에 결합하는 사람이 소수가 되었다. 그리고 서울본부나 공대위가 투쟁을 주도하였고 여승무원들은 소극적 참여에 머물렀다. 이점은 공대위 회의 때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여승무원들의 참여도나 주도성을 높이기 어려웠다. 여승무원 의식을 높이기 위한 교육사업을 제대로 배치하지 못한 점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투쟁주체가 집회장소나 농성장소를 서울역 대합실로 한 것은 서울역이 갖는 상징성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점을 감안한 것이다. 투쟁의 주력이 공대위에 결합한 학생이나 연대투쟁 대오이다 보니 과감하고 강도 높은 투쟁전술을 배치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스티커나 대자보 등은 열심히 작업하여도 하루를 넘기기 어려웠다. 철도차량기지나 역에서 청소용역 노동자들을 시켜 모두 제거해 버리는데 정규직 노동조합 지부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가 걸린 스티커였다면 그렇게 함부로 제거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투쟁전술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사측이 내성을 갖게 한 점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Ⅳ. 총괄평가 및 전망

정규직화 하기로 한 여승무원들에 대한 부당해고 반대에서 시작한 투쟁이 사실상 정리되었다. 단체협약을 완전히 이행시키지 못하고 미완의 투쟁으로 끝난 것이다. 해고통보를 받았던 31명 가운데 27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으나 5명 1명은 바꿔치기 되었다. 03.4.20 당시 근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근무하다가 역무계약직으로 일하던 사람이 대신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은 계약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보직을 정규직으로 돌려놓지 못하였으므로 여승무원직은 여전히 전원 계약직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이 투쟁은 성과보다는 한계가 두드러진다.
왜 이런 한계에 부딪쳐야 했을까? 첫째, 정규직과 연대투쟁을 끌어내지 못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다. 대중조직인 서울지방본부 집행부가 결합했지만 사실상 집행부만의 결합에 지나지 않았다. 철도노조 전체가 04.12.3 특별단체교섭 이후로 침체된 분위기가 된 것도 배경이 될 것이다.

둘째, 해고된 여승무원이나 나머지 여승무원 전체를 묶어내지 못한 데 있다. 서울, 부산, 영주, 순천 등 전국적으로 31명이 해고되었지만 투쟁은 서울에서 책임져야 했다. 부산은 한차례 집회 이후에는 전혀 결합하지 못했다. 영주, 순천은 소수라서 결합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부산을 계속 결합하도록 하려면 부산열차 사무소 지부의 태도가 결정적이다. 지부나 지방본부가 소극적이다 보니 여승무원들이 고립되었다. 초기 이 투쟁을 방관하거나 사실상 적대적이었던 본부조합의 일부 간부들이나 운수 쪽 지부장들의 태도가 그 배경이 되었다. 투쟁이 소강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정비하는 4월경 나머지 여승무원들을 묶어내지 못한 것은 잘못이다. 투쟁이 장기화되는데 따른 부담과 자신감 부족이 그 원인일 것이다.

셋째, 투쟁주체인 여승무원들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던 점, 끝내 소수만 남기고 투쟁에서 이탈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사측에서 더욱 여승무원들을 고립시키고 각개격파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계속하게 되었다. 교육사업 등 의식을 높이기 위한 작업이 부족했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조직의 유력한 지도부가 투쟁을 이끌 경우 소극적이거나 의존적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도 판단한다.

이러한 한계들은 있지만 이 투쟁에서 최소한의 원칙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투쟁을 책임지려 했던 서울본부나 공대위의 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적당히 절충하지 않았던 태도를 지킨 결과 나머지 여승무원들 대부분의 믿음을 얻고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철도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유형 무형의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성과도 있다. 아직 실천으로 증명하지는 못하였지만 철도노조가 대의원 대회에서 비정규직 사업을 주요사업으로 정하고 예산을 배정하게 되었다.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 및 철도매점 투쟁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철도 운동이 비정규직에 대한 온정적이고 시혜적인 접근이 아니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차별을 철폐하고 정규직으로 나아가는” 원칙적인 입장을 갖게 된 것도 성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법, 철도 비정규직 투쟁이나 운동은 첫 단추를 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도 05년 정기단체협약에서 ‘보직 및 현재 근무자의 정규직화’를 다시 의제로 제기하였다.

앞으로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만 특화시켜서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후배 승무원들이 자주적으로 투쟁을 결의하고 치고 나오거나, 또다시 해고사태가 벌어지면 어쩔 수 없겠지만 싸우고자 하는 철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묶어서 단결투쟁 하도록 조직해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 똑같은 일을 하는 KTX 여승무원들과 묶어서 싸울 수 있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역무계약직이나 수송원등 운수직들과 묶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머지 직종과 묶을 수 있는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지만 계기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5-10-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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