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현장에서 미래를 > 연재-기획 > 목록보기 > 글읽기

 
미국 노동운동의 위기: 배제된 선택들
 실리주의의 원조: 미국노조운동 위기논쟁5

현장에서 미래를  제113호
Elly Leary

기획
미국 노동운동의 위기: 배제된 선택들


미국 노동운동의 위기: 배제된 선택들

**) 원문출처: http://www.monthlyreview.org/0605leary.htm


Elly Leary / 번역 박용준 연구원




현재가 노동계급과 그 동맹 세력(자본주의의 억압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매우 힘든 시기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노동계급에게는 정치 정당이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한 곤란에 직면했을 때 이를 도와줄 사회적 서비스는 갈수록 파괴되고 있고, 그나마 몇 남지 않은 귀중한 제도적 장치, 그 중에서도 특히 노조는 가차 없는 공격에 제압당한 것 같다.

몇 가지 사실을 고려해보자. 연방정부가 지정한 최저임금($5.15)은 7년 동안 고정된 상태이며 현재 연방빈곤기준의 61%까지 떨어진 상태이다.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인구가 4,500만 명에 이르며, 의료보험에 가입된 경우에도 보험료가 33%, 본인 부담액이 49% 인상되어 대부분의 임금 인상분을 잠식하고도 남는 상태이다. 31개의 ‘적색 주[red states]’(2004년 선거에서 조지 부시에 투표한 주) 가운데 ‘일할 권리[right-to-work]’가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주는 22개 주에 불과하다. 지난 7년 동안 제조업 전체 일자리는 12%가 감소한 반면, 노조에 가입된 일자리 수는 같은 기간에 66%가 감소했다. 현재 노조가입률은 13%를 겨우 넘기고 있다. 민간 부분의 노조가입률은 일반적으로 노조가입률이 낮았던 시대로 간주되어 왔던 1920년대보다도 낮은 상태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잠시 뒤로 물러나 어떻게 이러한 논점에 이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엘라 베이커[Ella Baker]가 설득력 있게 표현했듯이,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내가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면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노동 문제 연구자들은 위기의 시발점을 1970년대로 보고 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2차 대전 후 ‘합의’ 체제가 와해된 시기이다. 그러한 합의의 중심에는 무언의 합의, 즉 노동 측에서 냉전체제의 유지를 지원하면 자본 측에서는 노동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겠다는 합의가 있었다. 물론 그러한 합의는 비백인 노동자에게는 거의 해당이 없는 사항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느 노동 계층보다도 많은 이득을 거두었던 백인 노동자들은 1970년대에 이르러 자신들의 생활 방식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제조업 분야 노조에 소속된 유색인 노동자들, 주로 아프리카계 흑인 노동자들에게만 ‘합의’의 수혜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의’의 와해를 위기로 보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오해이며, 지나친 단순화가 아닐까 한다. 노동운동이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 동안 노동운동은 위기와 난국의 시기에 직면하여 여러 차례 선택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이처럼 상이한 선택들이,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가 배제한 선택들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초래했는가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선택은 매우 중요하고 서로 연관된 쟁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논의의 진행을 위해 이 글에서는 이 세 쟁점들을 분리해서 다뤘지만, 현실에서 이 세 요소는 서로 교차하면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각 부분의 단순한 합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문제인 백인 패권주의를 살펴보자. 미국에서 백인 패권주의는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백인 패권주의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계급 문제와 분리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백인 패권주의에 관해 따로 논의를 진행하더라도 그 윤곽과 동학이 가부장제 및 계급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도 결정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역사가인 로빈 캘리[Robin Kelley]가 말했듯이, “인종주의에는 사회적 성[gender] 구분이 작용하고, 성차별주의에는 인종적 구분이 작용하며, 계급 차별은 자본주의에 의해 재생산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연결된 문제점과 억압점들을 하나로 묶어 깊이 분석해야 할 더욱 복잡한 상황 중 일부 중요한 지표만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 1: 백인 패권주의에 대항하지 않기

근대 노동운동의 태동기, 남북전쟁 후 최초의 전국 노조 NLU(National Labor Union)가 형성되었을 때 가입 자격에 대한 선택 과정이 있었다. 다소 험악한 토론 끝에 NLU는 과거 노예 신분이었던 자는 가입을 허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실 NLU의 다수파는, 공화당 의회에 의해 통과된 1863년 징집법, 즉 부자들이 돈을 내고 군역을 면제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 징집법에 반대하여 북부 노동자들을 끌어 모았던 ‘카퍼헤드[Copperheads: 북미산 독사]’, 즉 남북전쟁 이전의 연방 회복을 지지하는 북부 민주당원들로서 남부에 동정적인 사람들이었다.

1870년대에 이르러 국지적 또는 지역적 영향력을 갖거나 활동 범위가 전국에 이르는 여러 노동조합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노조들은 인쇄공이나 철공 등 주로 직능 또는 직종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이러한 노조의 다수에는 사회주의 정당 또는 반자본주의 정당에 소속된 사람들이 회원과 지도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조와 정당들은 한결같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었다. 동부와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주된 차별 대상이었으며 서부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가 자행되었다. 이 나라 미국의 노동 활동가들은 대부분 노조 라벨 부착 관행의 인종차별적 기원을 알고 있다. 여송연 제조업체 노조들은 중국 이민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을 막았으며, 중국 이민 노동자들이 생산한 제품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해 자신들의 제품에 노조 라벨을 부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노동자당[Workingmen's Party]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1870년대 초부터 1890년대 초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과 1905년부터 1918년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은 모두 백인 패권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대항이라는 측면에서 더 낳은 결과를 남겼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미국노동총동맹(AFL)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좀 더 포용력 있는 노동운동을 이룩하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AFL은 흑인과 아시아인을 배제하는 정책을 열렬히 추진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를 뚜렷이 보여주는 예는 20세기 초 캘리포니아 사탕수수밭에서 탄생한 일본인/멕시코인 노조[Japanese Mexican Labor Union]의 사례이다. 애초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멕시코인과 중국인 하청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켰지만 1902년 ‘중국인이민금지법[Chinese Exclusion Act]’의 시행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도급 체제를 통해 일본인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게 되는데, 하도급 노동자들의 세력이 커져 임금과 노동 조건이 상승할 것을 두려워한 ‘사탕수수협회[Sugar Beet Association]’에서는 하도급 체제를 통한 고용을 거부하고 임금을 삭감했으며 통제를 강화했다.
예상과 달리 일본인 및 멕시코 이민 노동자와 하도급 노동자들은 노동 단체를 결성하여 파업을 전개함으로써 경영진에 타격을 주고 결국 모든 요구 사항을 쟁취했다. 곧 이어 ‘일본인/멕시코인 노동자 협회’(JMLA)는 AFL에 인가를 신청했다. 당시 AFL 의장이던 새뮤얼 곰퍼스[Samuel Gompers]는 아시아인은 조합원이 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인가를 허용했다. JMLA는 격분하여 그 인가를 거부했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은 특권을 우리가 스스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들과 우리 자신, 그리고 노동조합주의의 대의에 거짓된 행동이 될 것이다.”

1930년대에 최초의 전국 노동법(유명한 와그너 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 노조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노조 설립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은 불법 모의 혐의로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의회에서 필요한 표를 확보하기 위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딕시크라트[Dixiecrats]’와 타협해야 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노예를 소유한 남부 대농장주들의 후손(일명 ‘농장주 지배[plantocracy]’)으로서 남부 민주당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딕시크라트는 농업노동자와 가내노동자를 가입 범위에서 제외하는 조건으로 노동조합의 합법화에 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 타협으로 인해 남부 지역 흑인 노동계급의 대다수가 합법적 노조의 권역에서 제외되었다. 애초에 이 타협은 과거 노예 출신자와 그 후손들을 빈곤과 종속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아이티 등 출신의 이주민 농업노동자들이 그 피해를 부담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2차대전 후 산별노조(CIO)가 주도한 대대적인 남부 조직화 운동, ‘딕시작전[Operation Dixie]’의 실패를 지적해야 한다. 딕시작전의 실패를 불러온 기본적 실책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자동차 공장과 제철소의 조직화에 효과적이었던 북부지역의 전략을 남부 문화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이 그대로 이식하려 했던 점, 그리고 일반적으로 북부 출신 조직가의 손에 맡겼던 점.

2. 너무 어려운 과제이며 백인 노동자들이 전혀 노조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백인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것을 거부한 것.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백인 패권주의에 대한 정확하고 솔직한 평가는 극히 어려운 과제이다. 그것은 남부 출신 작가 릴리언 스미스[Lillian Smith]가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듯이, ‘백인 패권주의라는 마약’의 기초 요소를 이루는 계급, 사회적 성, 종교 등이 섞인 복잡하고 가변적인 혼합체를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CIO는 오로지 경제적 문제에만 초점을 맞춰, 인종이나 백인의식의 문제 또는 비백인들이 노조 내에서 수행할 역할에 관한 논의를 회피했다.

이와 같은 핵심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를 두려워한 것이 ‘딕시작전’에서 직물 공장을 목표로 삼은 이유의 일부가 되었다. 직물 공장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백인이었다. 1934년 대파업 당시 지독한 진압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제너럴 모터즈사 경영진의 미시건 주 플린트 공장 운영 방식이 온화하게 보일 정도로 남부 지역 공장 도시에 대한 직물 공장주들의 통제가 혹독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물 공장이 남부 조직화 운동의 대상이 된 것이다.
1940년대 초반 조직 활동이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담배 산업(남부의 또 다른 주요 산업) 부문에서 조직화에 실패했다는 것은 백인 패권주의 문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CIO가 얼마나 몸을 사렸는지 잘 보여준다. 담배 산업의 노동력은 여러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6년 12월까지, FTA(Food, Tobacco, Agricultural and Allied Workers of America-CIO: 미국 식품/담배/농업 노동자와 CIO의 연합체)는 총 62건의 딕시작전 활동에 관여했으며 그 가운데 52건에서 성공을 거둬 1만25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켰다.
3. ‘좌익’ 또는 ‘극좌’로 분류되는 조직가 또는 현장 활동가들을 모두 숙청, 축출한 것. 가장 우선적 축출 대상이 바로 FTA였다. 이 조직의 지도부와 남부 지역 조직 활동가들은 주로 여성과 유색인 남성이었으며 이들 중 다수가 공산당에 가입해 있었다. 이들을 모두 축출한 결과, 보수적 인종관과 반공산주의 의식을 가진 백인 남성들이 딕시작전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다수는 남부의 조직화 방식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 중 아무도, 딕시크라트가 통제하는 백인 패권주의 체제 또는 그 바탕을 이루는 가부장제적 토대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문제 2. 지역 공동체 노동조합주의의 패배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은 산업 부문뿐만 아니라 지역에도 기반을 두고 조직화를 수행했다. 노동기사단은 전국의 여러 도시에 직업의 종류와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지부’를 만들었다. 여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멕시코인 등이 노동기사단에 포함되었으며 지도부 역할을 수행했다. 1886년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서 노동기사단 연례 총회가 열렸을 때 노동기사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의원들이 모든 호텔과 극장에 입장할 수 있도록 요구했고 성공적으로 관철시켰다. 그러나 기사단은 중국인들을 배제했다.

기사단은 토지개혁과 교육, 공제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친목 행사를 개최하고, 노동자들에게 협동조합을 구성하도록 독려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기사단은 여러 곳에서 모든 노동계급과 진보적 활동의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새로운 멕시코 기사단[New Mexican Knights]’은, 멕시코인 지도부의 지휘 아래, 인민당[People's Party]의 형성을 도왔으며 이 당은 여러 해 동안 지역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기사단의 소멸로 인해 AFL은 ‘합법적’ 노동조합 운동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의 임금과 특정 작업장의 노동 조건에 국한된 이들의 경제적 조합주의 정책[“bread and butter”]은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따라서 CIO의 형성은 절실한 균형추였던 셈이다. CIO의 조직 활동은 대부분 대량생산 업종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러한 업종에는 대규모 이주민 노동력(주로 동유럽)뿐만 아니라 일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이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CIO의조직가들은 사교클럽, 장례부조회, 교회 등등과 같은 인종적/민족적 공동체 조직에 크게 의존했다. 많은 CIO 조직가들이 이러한 조직을 통해 모집되었다.

딕시작전 이전 남부에서 수행된 CIO의 조직 활동은 이와 마찬가지로 지역 공동체와 작업장을 모두 중시하는 조직 방식에 의존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윈스턴세일럼의 FTA 22 지구는 이러한 방식이 작업장과 지역 공동체에서의 운동을 모두 강화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47년 초, 이 지구에서는 시의원 후보 세 명을 내고 활발한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 세 명 모두 당선되었으며 이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케네스 윌리엄즈[Kenneth Williams]의 득표 수는 윈스턴세일럼의 역대 시의원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재건시대[Reconstruction] 이후 최초의 흑인 시의원이었다.

1946년 CIO의 계획은 조직 노동자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과 함께 제출된 이들의 계급적 요구 사항의 내용은 노조에 소속된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를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 ‘30시간 노동에 40시간 급료’(수만 명의 퇴역 군인의 재취업을 돕는 동시에, 전쟁 중 이들의 일자리에 들어가 있었던 여성과 소수 민족 노동자들이 급료 수준이 좋은 노조 가입 노동자로서의 고용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 전 국민 공공의료보험제,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간당 25센트(현재 물가로 약 3.25달러)의 급료 인상 등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CIO의 공동 전선은 1946년 가을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 United Auto Workers]의 월터 로이터[Walter Reuther]가 제너럴모터즈와 합의를 체결해버림으로써 붕괴되었다. 월터 로이터의 합의로 인해 미국 사회에서는 기업 보조식 의료 보험 제도가 고착화되었으며 수십 년간 전 국민 공공의료보험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문제 3: 자본주의와 제국에 대항하지 않기

2차 산업혁명의 강화와 1870년대 금융 시장 붕괴는 노동기사단이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지역 공동체에 뿌리박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강령 중 일부는 ‘강도귀족[robber barons]’이 판치는 산업 시대 이전의, 보다 소박한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들은 ‘협동적 공동체[cooperative commonwealth]’를 원했다. 사파티스타 방식의 협동조합[cooperatives]과 틈새 경제[niche economics]가 노동기사단의 협동적 공동체와 매우 유사하다.

노동기사단이 붕괴되자 다른 두 개의 노동 연합조직이 부상했는데, 하나는 AFL이고 다른 하나는 IWW였다. IWW는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IWW 창립 총회 전문(前文)에는 다음과 같은 대담한 발언이 담겨 있다. “노동계급과 고용주 계급은 공통점이 없다……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것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IWW는 자본과의 타협이라 하여 노조협약 자체를 반대했다.

IWW는, 작업장에서든 지역 공동체에서든 직접적 행동을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전 세계 노동자들이 패할 수밖에 없는, 고용주들 간의 전쟁으로 규정하여 반대한 것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들은 투옥, 추방 등 정부의 철저한 탄압에 직면했다. AFL은 자본에 협조적인 입장을 취하고 IWW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노골적으로 방조하면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또 다른 중요한 선택이 이루어졌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루어진 것이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백인 패권주의에 대항하고 여성 지도자의 양성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태는 ‘딕시작전’과 동시에 발생함으로써 그 실수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숙청 사태 이후 CIO와 AFL의 통합과 냉전체제에 대한 타협이 신속히 이루어진다.

여러 해 동안 AFL-CIO의 국제 관계는 냉전 체제와 명확히 그 궤를 같이 했다. 쿠바 혁명에 대한 대응으로 1962년 설립된 AIFLD(American Institute for Free Labor Development)은 국제 부서를 통해 소위 ‘자유 노조’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전 세계의 자생적 노조운동을 분쇄했는데 그 가운데 다수가 반자본주의적 운동이었다.

존 스위니 체제의 AFL-CIO가 이러한 활동에서 많은 부분 손을 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과는 미약하다. 예를 들어, 차베즈를 민주주의와 노조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한 베네주엘라 석유 산업 노조를 지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AFL-CIO가 지원하는 그 노조의 실제 구성원이 석유 시설에 배치되어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고용주와 감독자들이라는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의 공식적 ‘국제 관계’는 미국 중심적 오만에 의해 더럽혀졌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상호 협력과 지원 또는 '노동 연대' 등의 미사여구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현재의 담론에는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관점에 근거한 다양한 동력과 배경, 조건 등에 관한 실질적 분석은 없다.

마지막으로, 민주당이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지향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추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노조운동 내부에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확고부동한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대외 관계와 정치,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문화, 따라서 사회적 통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배체제(현재는 자본주의)가 강력할수록 그 문화가 더욱 지배적인 것이 되어 사회적 통제를 위해 힘에 의존할 필요성이 줄게 된다. 문화는 ‘양질의’ 미술과 음악 또는 대중문화보다 훨씬 큰 개념이다. 문화는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가, 무엇이 ‘상식적인 것’, ‘정상적인 것’, ‘도덕적 가치’, 옳고 그른 것으로 통용되는가의 문제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문화는 민주주의, 평등, 자유 등과 같은 관념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현재 노조운동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좋은 조직이란 어떤 조직인가에 관한 관념으로까지 연결된다.

노조와 같은 제도를 포함하여 미국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기에 미국 자본주의 문화가 규정하는 틀에 제약된다. 예를 들어 현재 노조 관련 논쟁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표현의 대부분은 ‘시장 점유율’ 확보를 논할 때 동원되는 표현과 거의 똑같다. 조직 구성과 관련된 제안들은 자본주의 기업에서 통용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효율성 증대를 위한 합병과 통합, 책임성 확보를 위한 고위층으로의 권한 이동, 조직적 강령의 본보기를 제시하고 최상층 지도부가 개발한 기획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동원하기 위해 전국적 차원에서 카리스마적인 인물(전부 백인 남성!)에 터무니없이 의존하는 점 등등. 주요 제안 중 어느 것도 이러한 자본주의 문화 헤게모니를 배경으로 하는 하향식, 지도자 중심 집단이라는 지배적 조직 모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회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는 시기에는 대항문화의 관념이,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확고한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직은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상향식 의사 결정 구조를 특징으로 하며, 집단 중심적 지향을 가진 서민 출신 지도자가 육성된다. 또한 지역 공동체, 그리고 보다 큰 범위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운동에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대항 문화적 모델에서는 여러 쟁점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는 현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달리 표현하여, 노동계급의 힘을 키우기 위한 조직 구성의 문제가 계급(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을 축으로 전개된다면, 그 해결책은 백인 패권주의와 가부장제를 둘러싼 문제들도 동시에 포함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시종일관 제시하려 했듯이, 인종과 계급, 사회적 성의 문제는 서로 뗄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 어느 한 문제가 다른 문제들도 풀 수 있는 열쇠를 쥐게 될 따름이다.

여하튼,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올바로 결합하고 서로 얽혀 있는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조직이야말로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계획하고 통제하는 규율에 따른 행동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개개인이 비판적 사상가이자 균형 잡힌 인류의 한 사람으로써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을 나는 '해방적 조직'이라 부른다. 그러나 번번이, 이러한 조직은 선택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이 노동운동의 일부가 되었던 경우, 그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IWW의 행동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12년 1월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의 ‘아메리카 양모 회사’[American Woolen Company]를 상대로 2만3천 명이 10주 동안 벌였던 동맹 파업이다. 로렌스는 전형적인 공장 도시였다. 이 파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조사에 따르면 거주만 8만5천 명 가운데 약 6만 명이 직물 산업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었으며 ‘아메리카 양모 회사’는 가장 많은 직원을 거느린 회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 때문에 이 파업을 기억하고 있다. 폴란드 여성들이 이 동맹 파업을 주도했다. 경찰이 여성은 구타하거나 수감하지 않을 것이라 잘못 생각하여 피켓라인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이 여성 파업 참가자들은 유명한 파업 구호를 고안해 낸다. “우리에겐 빵도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하다[We want bread but we want roses too].” 그러나 이들이 파업 불참자들을 대한 독특한 방법은 덜 알려져 있다. 특히 남성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공유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두드러지는 것은 22가지 언어를 서로 달리 사용하는 24개의 인종/민족 집단을 하나로 단결시킨 혁신적 조직화 방식이다. 각 언어 집단과 인종/민족 집단을 대표하여 협상 위원회에 올라온 대의원 수만 거의 300명이었다.

또 다른 사례가 지역 노조의 건설과 유지를 둘러싸고 인종, 계급, 사회적 성의 문제가 충돌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대지의 소금[Salt of the Earth]’을 통해 영상으로 재현된 바 있다. 이 사건은 ‘광산/제작소/제련소 노동자 국제 노조[International Union of Mine, Mill and Smelter Workers]’의 멕시코 출신 광부들이 1950년 10월부터 1952년 1월까지 거대한 아연 채굴회사를 상대로 파업을 전개한 사건이다. 이 파업은, 그리고 이 영화의 촬영 또한, 매카시즘과 소수의 영국인들이 무자비한 방식으로 지배하는 기업 도시를 배경으로 수행되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대규모 퇴거 조치가 강제되고 백인 패권주의와 성차별주의로 가득찬 회사 및 법률 집행 기구의 악행들이 자행되었으며, 결국 지역 공동체 차원의 파업으로 확대된다. 여성들이 여기에 대대적으로 참여하여 기존에 자신들에게 부여되었던 역할과 의식을 바꾼다. 그리고 주변 광산의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지원 투쟁을 벌인다.

영화에서는 파업 참가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내부적 모순이 모든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다. IWW에서 파견된 백인 조직가는 (당시의 표현 방식에 따르자면) ‘공산주의가 지배적인’ 노조에 속한 사람이면서도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낸다. 또한 멕시코계 남성과 영국계 남성의 가부장제 문제가 중심에 배치되어 있다. 데비 로젠펠드[Debby Rosenfeld]가 1976년 발표한 뛰어난 평문의 표현을 빌리면,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지배 계급의 통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항한 이러한 투쟁은 한 줄기로 모여 융합된다. 때때로 이들은 서로 충돌한다. (또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충돌하는 경우, 광상 공동체는 서로를 적대하여 분열한다. 이들이 하나로 융합될 때, 단결이 이루어진다.”

다행히 이러한 해방적 조직은 오늘날에도 노동운동 내부에도 존재한다. 일부 지역 노조들은 실제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 CWA(미국통신노조)에 통합된 IUE(Internati- onal Union of Electrical Workers)의 GE 항공기 엔진 노조 지부처럼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은 과거의 반공산주의 정서를 극복하고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JwJ (Jobs with Justice)의 여러 지부들도 이러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기사단과 IWW의 전성기와 같은 지배적인 조직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다른 부문, 특히 노동자 센터[worker center]에서는 이 모델이 탄탄한 거점을 확보해왔다. 노동운동의 위기에 관한 논의에서 이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요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노동운동의 쇄신을 위한 해답을 전체 노동자 중 13%에 불과한 조직 노동자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지만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향후 방향에 관한 토론을 수행할 때, 우리는 우리가 거쳐 온 역사를 상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운동 쇄신을 위한 해결책으로서 제시되는 여러 전략과 기획을 평가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할 5가지 사항을 질문 형태로 정리하면서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노동운동 쇄신을 위한 전략은 일반 노동자, 특히 여성과 유색인의 능력과 지도력을 어떤 방식으로 강화하고자 하는가?
모든 형태의 절대적 지배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노동계급의 진정한 단결을 위해 역사적 장애물들(백인 패권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에 대한 차별 등)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장기적 관점에서, 해방적 조직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노동과 지역 공동체를, 마찰 없이 서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묶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참고 문헌

다음은 이 글의 작성에 활용된 유용한 참고 자료들이다.

사탕수수 노동자에 관한 참고 -
Tomas Almaguer, Racial Fault Line: The HistoricalOrigins of White Supremacy in Californi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
Philip Foner, Organized Labor and the Black Worker, 16191973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76)
로렌스 공장 파업에 관한 참고 -
Philip Foner, History of the Labor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vol. 4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5)
Barbara Griffith, The Crisis of American Labor: Operation Dixie and
the Defeat of the CIO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88)
Michael Goldfield, The Color of Politics: Race and the Mainsprings
of American Politics (New York: New Press, 1997)
Michael Honey, Southern Labor and Black Civil Rights, Organizing
Memphis Workers (Champaig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3)
Robert Korstad, Civil Rights Unionism: Tobacco Workers and the
Struggle for Democracy in the Mid-Twentieth Century South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3)
Jon Quaccia, "National Endowment for Death Squads? The AFL-CIO and
the NED," Against the Current, 2004
Peter Rachleff, Black Labor in Richmond: 18651890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84)
Deborah Rosenfelt, "Ideology and Structure in Salt of the Earth,
"Jump Cut: A Review of Contemporary Media, no. 12/13, 1976,
http://www.ejumpcut.org/archive/ onlinessays/jc12-
13folder/saltofearth.html.

2005-10-28 00:00:00

의견글쓰기 프린트하기 메일로 돌려보기
이 글에 대한 의견보기  다른글 의견보기
아직 올라온 의견글이 없습니다


| 목록보기 | 윗글 | 아랫글 |

(구)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00-272) 서울시 중구 필동2가 128-11 상전빌딩 301호   Tel.(02)2277-7957(팩스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