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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당]에서

현장에서 미래를  제76호
노중기

[열린 마당]에서


노중기




민주노조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민주노총의 발전파업 합의문에 분노하는 많은 노동대중과 생각을 같이 하면서도 ‘합의문’은 민주노총 내의 일부 활동가의 주관적이고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을 거라고 자위했습니다. 밤잠을 설치면서도 민주노총의 입장에서 절박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거니, 혹 실수했거니 생각했습니다. 위기를 새로운 교훈으로 만들어내었던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실천, 그 수많은 활동가들을 기억에서 되살려 위안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금속연맹 박훈 동지의 글 속에서 그런 가능성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읽은 ‘남긴 것’은 문제가 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것이라는 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합의문’의 배경은 보다 뿌리가 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비판’은 전체 민주노조운동이나 민주노총 전체에 대한 판단과 비판은 아니란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민주노조와 민주노총 속에서 해방된 삶과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도 싸우고 있는 많은 동지들에 대한 비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우선 저는 우리가 지난 30년 동안 외쳐왔던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총’에서 왜 하필이면 ‘민주’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주’이름을 버릴 수 없기에 구속되고 죽었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무엇이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구별해 왔는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긴 것’은 완벽한 패배와 오류를 성과로 견강부회,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전인수라는 박훈 동지의 해석은 정확합니다. 정당한 투쟁에 목숨걸고 나선 ‘조합원에게 민형사상 책임과 징계’를 ‘합의’해주는 노조는 ‘조합원의 이해를 대표하는 민주노조’가 아닙니다. 또 ‘이미 투쟁은 오래 전에 접어야 했다’며 파업종결을 위해 교섭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감옥에 있는 위원장까지 동원하여 역사적 총파업투쟁에 나서자고 1,000만 노동자에게 ‘거짓말하는 노조’는 더 이상 민주노조가 아닌 것입니다.
‘노사화합’과 ‘발전산업의 미래’를 운위하며 ‘법과 원칙’을 준수한다는 반노동자계급적 합의문을 국가와 자본에 당당히 써주는 노조는 더 이상 ‘민주노조’가 아닌 것입니다. 주로 전경련이나 경총, 노동부와 대통령이 쓰던 말을 ‘민주노총’이 공식적으로 합의문에 써주고 발표한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2. ‘남긴 것’은 금번 발전파업이 ‘국민여론전’이며, ‘매각의 부당성을 알리는 투쟁목표’를 가진 투쟁이었으므로 성공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남긴 것’의 ‘국민’이나 ‘국민여론’을 앞세우면서도 ‘조합원 여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노조운동의 원리와 그 계급적 기초를 철저히 부인하는 반노동자적 태도입니다.
노조운동은 ‘국민’이 아니라 ‘노동자계급대중’을 자기 대중으로 삼는 운동입니다. 조합원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결집하지 않고 지도부가 먼저 ‘국민의 정서’를 파악해서 결정하는 운동, 그것은 민주적 운동이 아닐 뿐만 아니라 노조운동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자체가 국가와 자본의 논리입니다. ‘국민의 정서가 (공무원)노조나 파업에 대해 거부감이 있으니 (공무원)노조나 파업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조선일보와 정부 발표문에서 보던 논리를 노조가 주장해서야 되겠습니까. ‘국민여론과 함께 하는 노동조합주의’라도 창시할 판입니다.
집단이기주의로 보는 국민의 따가운 시선이 있다는 흔한 반론을 내놓겠죠. 그러나 노조운동은 원칙적으로 ‘집단 이해’를 대표하는 운동이며 ‘철밥그릇’을 만드는 운동입니다. 그 철밥그릇을 만들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살 수 없다는 원리는 자본주의사회의 ‘헌법’과 ‘노동법’이, 그래서 국가와 자본이 공공연히 인정한 사회의 기본원리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인정되지 않는다면 인정하도록 투쟁해야 합니다. ‘사회를 밝혀주는 빛나는 철밥그릇 만들기운동’,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민주노조운동이었습니다.
일례로 반상회까지 하면서 국민들이 말리던 용공좌경의식화집단의 노조운동, ‘전교조나 민주노총’의 노조운동은 투쟁을 통해 만들어 온 것이지, 말로 국민을 설득해서 이룬 것이 아니란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요? 민주노조운동은 투쟁으로 국민의 인식을 바꿔온 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역사 앞에서 민중적인 그래서 진정으로 ‘국민적인’ 운동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득해야 하는 현재의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따름입니다. 그것도 1,300만 노동자들의 구심, ‘민주노총의 교선실’을 상대로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운동원칙입니다만 우리 운동 속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1998년 1기지도부의 정리해고 직권조인은 그 대표적인 사태였습니다. 저는 이후 민주노조 진영이 노선에 관계없이 전체적으로 직권조인사태를 철저히 반성하였고 원칙을 다시금 확인한 줄 알았습니다. 조합원에게 공지되지 않거나 그 의사에 반하는(그것이 비합리적인 것일지라도) 의사결정은 (그것이 아무리 합리적이더라도)원천무효라는 민주주의의 원리 말입니다. 저의 심각한 착각이었음을 이제 절감합니다. 또 저에게 주어진 일말의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남긴 것’의 반노동자계급적 인식에 대해 다시 한번 자세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안감은 있었어도 한 달 동안 전력공급에 큰 문제가 없어 천만다행이었다’뇨? 무슨말입니까? 그런 생각이라면 전력공급 중단을 목표로 하는 파업이야기를 애초에 꺼내지 말았어야죠. ‘파업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원만한 노사관계를 이룰 수 있는 대등한 노사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립니다. 이 사회의 수많은 지식인, 원로, 단체가 ‘파업이 재발하지 않는 길을 찾고’, ‘발전파업을 노동문제로만 인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서명하고 연대하고 뛰어다녔다구요? 도대체 무슨 개뼉다귀같은 헛소리입니까?
저는 이런 세계인식의 기본틀을 보면서 ‘국민에게 끼친 피해를 정중히 사과드리며’, ‘(파업이라는) 불행한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노사화합을 바탕으로 발전산업의 미래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약속하는’ 합의문이 나온 맥락과 배경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긴말 할 것 없이 그냥 간단히 자본과 김대중 정권에 투항한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투항이 승리라고 주장하시죠. 하기야 ‘투쟁동력이 없다고 판단하였다’라는 상투적, 가식적 표현보다는 솔직하니 이해하기에는 좋습니다.
계급운동의 기초가 계급적 적대성과 계급적 자주성, 그리고 투쟁을 통한 연대성의 확보라는 교과서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하는 저의 심정은 현재 매우 비참합니다. 현실을 생각하라고요? 그러면 저는 이제까지 배운 것, 가르친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그걸 저한테 요구하십니까?

4. ‘성과’, ‘(합의가) 성과를 굳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무엇이 성과인지도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 도대체 어떤 성과를 따냈습니까?
‘한길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서 국민여론이 돌아서고, 현정부 임기 안 ‘발전소 매각’이 실질적으로 물 건너갔다구요? 또 발전소 매각문제의 ‘불씨’를 남겼다구요? ‘민주노총을 배제한 주5일근무 추진 계획’, ‘공무원노조 허용문제’, ‘노사정위원회의 진로’ 등 정부의 정책의도나 계획에 차질이 왔다구요? 얼쑤, 잘나가고 있습니다. 민주노총!
‘임기 내에 무리하게 강행하면 다시 미증유의 파업이 터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구요?
또 4․2 총파업 ‘준비’가 역사를 새로 쓴 연대투쟁으로 이후 노동운동의 기풍을 새롭게 하는 활력소라구요? ‘총파업 ‘준비’가 90년대 노동운동에 퍼져있던 기업별 노조주의와 임단협 투쟁 중심의 활동 기풍을 크게 쇄신했다’고요? ‘가스노조, 철도노조 민주노총 가입과 가입추진 등 민주노조운동을 강화시키는 큰 성과’? 가관입니다. 속된 말로 ‘잘났어, 정말!’입니다.
이런 논지에 관해서 하나 하나 비판하는 것도 챙피한 일입니다. 다만 민주노총과 발전산업 홈페이지 게시판에 한 번만 들어가보라고 이야기하고 싶군요. 성과를, 실리를 억만 금 얻으면 뭐합니까.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을 버리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이 어용, 한국노총이라고 공공연히 지탄받고 있습니다. 게시판에 쏟아지는 비난을 보고서도 ‘남긴 것’ 같은 글을 쓸 수 있는 민주노총이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금번 민주노총의 ‘합의’는 그야 말로 ‘노동운동에 역사를 새로 쓴’ 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지독히 협소한 ‘경제주의’와 ‘실리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노동시간 단축, 공무원노조 합법화, 조직 확대, 여론 선전의 성과 등 실리가 실현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다 좋습니다. 다만 이런 실익을 얻고서도 계급적 연대, 특히 조합원대중과 지도부의 연대, 신뢰가 손상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안한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미증유의 파업에 나선 5천, 60만 노동대중’을 바보로 만든 민주노총에게 앞으로 다가올 미증유의 파업은 결단코 없습니다. 이렇게 계급적 적대의 선명한 의식과 투쟁이 없다면 그게 바로 ‘한국노총’입니다. 이제 한국노총과 통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요!
요컨대 적어도 이번 [합의]에서 만큼은 민주노총이 5천 발전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1,300만 노동대중을 철저하게 속이고 기만하고 배신한 것입니다. 또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견강부회하려 날뛰는 ‘남긴 것’에 민주노조운동의 진짜 위기가 숨어있다는 생각입니다.

5. 또 제 눈에 가시처럼 걸리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노사정위원회 문제와 ‘민주노총 배제’라는 표현입니다. ‘민주노총 배제전략’을 돌파하는 ‘실질적인 노정교섭’을 확보한 성과가 있었다구요. 그렇군요. 많이 배웠습니다.
노사정위에서 ‘민주노총이 배제되니’ 실리 찾는데 어려움이 많군요. 또 찾을 실리는 많은데 교섭할 데가 마땅치 않으니 금번 노정교섭-합의는 확실히 성과인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 배제전략은 사회적으로 큰 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을 정부가 얻었겠습니다. 그려. 이제 노정사위원회를 만들든지, 노정위원회라도 만들어야 하겠군요. 참여할 준비는 다 되신 것 같네요. 이번 노정교섭 참여에서 성과가 많았으니까요. TV에서 보니까 역량있는 노동브로커들도 많이 데리고 다니시던데요. 98년 5월에 봤던 노정교섭이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성숙하게 변모했다는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금번 교섭을 보니 정부의 전략이 바뀌었군요. ‘민주노총 배제전략’에서 ‘민주노총 포섭전략’으로. 정부가 ‘사회적 대가’를 치르고 많이 배웠군요. 노사정위원회 불참 선언이 계속되었으나 노동연구원 주최 각종 토론회(노사정위의 방향 등)들에 대표가 그렇게 열심히 참여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다. 역시 김대중 정부는 노동정부군요. 재빨리 알아채리고 포섭전략으로 나온 걸 보면. 그래요. 민주노총이 포섭되니 ‘노동자계급대중 전체가 나락에 떨어지는군요’. 이제 곧 노사정위에 들어가 산업평화 선언이라도 하시겠군요. 월드컵도 다가오니.
포섭전략이나 배제전략이나 반노동계급전략인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노사정위원회를 거부했던 것은 그 형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자유주의적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무조건 노사정아닌 노정교섭만 따내면 성과라고 보는 무지함에 또 한번 놀라고 있습니다.

6. 금번 합의는 민주노조운동의 지난 10년 성과를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노사화합주의, 법과 원칙의 법물신주의와 투항주의, 직권중재제도와 중노위판정의 중립성과 객관성, 경영권 개입불가원칙 등을 한꺼번에 세트로 수용했습니다. 민주노총의 원칙으로 말입니다. 이것도 성과입니까?
마지막으로 파업에 관한 기본 관점이 도대체 엉터리입니다.
파업은 협상을 위한 도구로 설정이 되어있으며 ‘후유증’을 낳는군요. 그 성패는 협상결과의 실익 여부에 있군요. 또 불법파업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하며, 어쩔 수 없을 땐 징계와 형사처벌, 민사 손배를 자청해야 하는 것이로군요. 그것은 국민을 위해 불행한 사태이며 재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파업의 원인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대화부족’에 있군요. 그렇죠. 징계, 손배 때문에 ‘더 끈기있는 대화자세’가 요구되고 ‘정부가 뒷수습을 잘 해야’ 하는군요.
도대체 이와 같은 얼치기 파업론과 정세인식이 금번 ‘발전파업’을 뒷받침한 논리라니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지도부에서 37일 파업이 가능했다면 투쟁에 나선 노동대중이 또 한번 존경스럽다는 생각입니다. 발전파업이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7. 민주노총의 책임있는 당국자의 답변을 정식으로 기대합니다

2002-05-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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