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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와 사적유물론의 기초 개념

현장에서 미래를  제76호
마키노 히로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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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환경문제와 사적유물론의 기초 개념*

1)


마키노 히로요시(牧野廣義)/阪南大學 敎授




오늘날 격동과 변혁의 시대에 사적유물론의 발전이 한층 더 요구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환경문제는 사적유물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한층 심화시켜야 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해문제․환경문제와 씨름하는 가운데 사적유물론 분야에서도 연구가 진척되고 축적되어 왔다. 또한 근래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환경윤리학이나 환경철학 분야에서도 다양한 이론이 제출되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환경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서 파악하는 관점이 약해서, 인간과 자연을 추상적으로 대립시키는 환경윤리학이나, 생산력의 발전이나 과학기술의 발전을 한결같이 부정적으로 보는 논의도 있다. 또한, 그러한 논의를 비판하고 환경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서 파악하는 ‘사회파 에콜로지(ecology: 생태학)’에도 환경문제를 평화나 민주주의,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운동과도 결합시켜 다루려고 하는 ‘정치적 에콜로지’나, 에콜로지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결합시키는 ‘사회적(social) 에콜로지’, 에콜로지․페미니즘․사회주의 운동의 결합을 주장하는 ‘에코․페미 사회주의’, 에콜로지라는 관점에서 맑스주의를 재편성하는 ‘에코 맑스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전개되고 있다.1)

환경문제와 이론적으로 씨름하는 데에서도, 또 다양한 에콜로지 사상과 함께 하고 연대하는 데에서도 나는 사적유물론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사적유물론의 기초 카테고리를 검토함에 있어서 특히 환경문제와의 관련을 의식하면서 그 현대적 의의를 논하고자 한다.



1. 사적유물론의 정식을 이해하는 관점

맑스는 ꡔ경제학비판ꡕ(1859)의 ‘서문’에서 “나에게 분명해지고, 일단 획득되고 나서는 내 연구에서 길잡이 역할을 했던 일반적 결론은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사회와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서술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사적유물론의 정식(定式)이라고 불린다. 거기에는 사적유물론의 기초 카테고리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인간은 그들의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지로부터는 독립적인 제 관계, 즉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들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실제적인 토대여서,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이 토대에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조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제약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의 어떤 단계에 이르면, 그것들이 그 동안 그 내부에서 운동하고 있던 바의 기존의 생산관계들과, 혹은 단지 그것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소유관계들과 모순되기에 이른다. 이들 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형태로부터 그 질곡으로 일변한다. 그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나타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격히 변혁된다. 이러한 변혁들을 고찰할 때에는 언제나 물질적인, 자연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생산조건들에서의 변혁과, 거기에서 인간이 이 충돌을 의식하게 되고 또 그 충돌을 싸워 해결하게 되는 바의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형태들, 간단히 말하면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로 말하자면, 아시아적, 고전고대적, 봉건적 및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경제적 사회구성체가 진보해 가는 단계로서 들 수 있다.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최후의 적대적 형태이다. 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 적대라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생활 조건들로부터 생기는 적대라는 의미인데, 부르주아 사회라는 태내에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은 동시에 이 적대의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이 사회구성체와 더불어 인간 사회의 전사(前史)는 끝난다.”2)


이하에서는 이 사적유물론의 정식(이하에서는 ‘정식’이라고 부른다)에 나타나 있는 기초 카테고리의 내용을, ꡔ자본론ꡕ을 필두로 한 맑스와 엥겔스의 고전도 참조하면서, 검토하고자 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환경문제와 관계가 깊은 것에 한정하고 싶다. 그 때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고찰한다.

첫째로, 사적유물론의 카테고리는 어느 것이나 추상적인 이론적 개념이다. 그러나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도 있듯이 맑스의 관점은 현실 세계를 인간의 살아 있는 실천과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나 사회적 관계들을 인간의 실천에 의해서 부단히 형성되고 또 변혁되는 것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적유물론의 추상적인 이론적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언제나 구체적인 인간적 실천이나 사회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추상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개념을 분리시키지 않고 상호 연관 속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로, 사적유물론의 카테고리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나 사회현상에 관해서, 이것은 어디에 들어가고 그것은 어디에 들어가는 등으로 분류하여, 그 한 쪽으로부터 다른 쪽으로의 규정적 관계를 논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은 사회와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길잡이’이고,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인간의 물질적 생활의 생산을 기초로 하여 분석하기 위한 개념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한 복잡한 카테고리에 걸쳐서 이해되는 수도 있을 것이고, 카테고리간의 규정관계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로, 환경문제와 관련해서는 맑스는 젊었을 때부터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서 파악하여, ‘자연주의=인간주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3) 엥겔스도 젊었을 때부터 영국의 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조사하여 그들이 대도시의 환경 오염 등에 의해서 건강을 파괴당하고 생명을 빼앗기고 있음을 고발하였다.4) 또한 엥겔스는 맑스가 소개한 농학자 프라스(Fraas)의 ꡔ시간 속에서의 기후와 식물계, 양자(兩者)의 역사ꡕ(Klima und Pflanzenwelt in der Zeit, eine Geschichte beider)5) 등도 참조하면서, 이전의 역사에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가 산림파괴 혹은 경작지나 목초지의 황폐화 등을 초래했음을 지적하여, “자연은 우리에게 복수한다”고 경고하였다.6)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파악이 사적유물론 속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를 간파할 필요가 있다.



2. 인간생활의 사회적 생산

맑스는 ‘정식’의 서두에서 “인간은 그들의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라고 말함으로써 우선 ‘인간생활의 사회적 생산’에 주목한다. 이 관점과 그 내용을 우리는 ꡔ독일 이데올로기ꡕ7)에서의 ‘현실적인 개인들’과 ‘인간의 현실적인 생활과정’으로부터의 출발과 겹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생활수단을 생산하기 시작하자마자 자신을 동물로부터 구별하기 시작한다 … 그들의 생활수단을 생산함으로써 인간은 간접적으로 그의 물질적 생활 자체를 생산한다”(pp.17~8; 김 58~9). 다름 아니라 이러한 생활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생활양식’이다. 생활양식에는 의식주의 생활수단의 생산, 그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 그리고 생산물의 분배와 소비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러한 ① 생활수단의 생산과 물질적 생활 자체의 생산을 “전체 역사의 근본조건으로서의 역사적 행위”로 한 위에서, ② 새로운 욕구의 생산, ③ 생식(生殖)에 의한 인간 자체의 생산과 가족, ④ 사회적 관계, 즉 협업과 인간 상호의 연계가 “근원적인 역사적 관계의 네 개의 계기, 측면”으로서 확인된다. 이것이 사회와 역사의 유물론적인 해명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생활의 사회적 생산”의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의 의식, 다른 인간들과의 교통이라는 요구로부터 생겨난 언어의 의의, 다양한 의식 형태들이 논해지는 것이다.

사적유물론에서의 ‘생산’의 개념은 이렇게 단지 생활수단이나 노동수단의 생산이라고 하는 협의의 생산에만 머물지 않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분배나 소비도 포함한 ‘물질적 생활의 생산’이나 ‘인간 자체의 생산’ 등을 포함한 ‘인간생활의 사회적 생산’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ꡔ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ꡕ의 서문에서 “유물론의 견해에 의하면, 역사를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은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하지만 이 생산과 재생산은 그것 자체 또한 이중적 성질의 것이다. 한편에서는 생활수단의 생산, 즉 의식주 용품의 생산과 그 생산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 그것이다”라고 하여, “두 종류의 생산”을 논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그 비중은 다르지만, “노동의 발전단계”와 더불어 “가족의 발전단계”가 사회적 제도들을 제약한다고 하였다.8) ‘정식’에서의 ‘인간생활의 사회적 생산’은 이상의 것을 포함시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식’에서는 ‘인간생활의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 ‘토대’와 ‘상부구조’ 등,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카테고리가 논해지고, 그 뒤에서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제약한다”고 하여, 새삼스럽게 ‘생활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매듭지어지고 있다. 이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은 ‘인간생활의 사회적 생산’과 대응하고, 이것이 ‘생활과정 일반’을 제약한다. 결국 그것은 ‘사회적 생활과정’9) 전체를, 따라서 ‘정치적 생활과정’이나 ‘정신적 생활과정’을 제약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서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총괄된다. 이는 사회나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하는 가장 기초적인 관점을 서술한 것이다. 이렇게 ‘정식’의 카테고리들은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규정적인 것과 피규정적인 것, 구조적인 것과 과정적인 것 등이 상호 관련을 지으면서 중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3. 노동의 생산력,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

다음에 ‘생산력’이란 무엇일까? 생산력은 우선 ‘노동의 생산력’이다. 그러므로 우선 노동에 관해서 보기로 하자.

맑스에 의하면, 부의 원천은 자연과 노동이다. ꡔ자본론ꡕ10)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그 생산에서 단지 자연 자체가 하는 대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단지 소재의 형태를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형태를 바꾸는 이 노동 자체에서도 인간은 부단히 자연력에 의해서 조력을 받고 있다. 노동은 그리하여 그것에 의해서 생산되는 사용가치의, 소재적(素材的) 부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가 말하는 것처럼, 노동은 그 부의 아버지이고, 땅은 그 어머니이다”(① p.73; MEW, Bd.23, SS.57~8). 또한 노동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용가치의 형성자로서는, 유용노동으로서는, 노동은 모든 사회형태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의 존재조건이고,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Stoff-wech-sel)를, 그리하여 인간의 생활을 매개하기 위한 영원한 자연필연성이다”(같은 곳; MEW, Bd.23, S.57). 나아가, “노동은 우선 자연과 인간 사이의 한 과정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자연과의 자신의 물질대사를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다”(② p.304; MEW, Bd.23, S.192).

여기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생활수단을 직접적으로 획득한다든지, 소재의 형태를 바꾸어 이용하고 소비한다든지 한 후에, 다시 배설물이나 폐기물로서 자연에 되돌리는 과정이다.11) 노동은, 인간과 자연의 이러한 물질대사를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매개하고, 구제하고, 통제하는 한 과정”이어서, 노동수단을 이용하여 인간의 목적을 노동대상 속에 실현하는 ‘합목적적 활동’(① p.305; MEW, Bd.23, S.193)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의 규정은 그 일면에 불과하다. 맑스는 앞의 노동 규정에서 “사용가치의 형성자로서는”이라든가, “우선”이라든가, “노동과정의 단순한 계기들”이라고 한정함으로써 그 추상적 분석 수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결국 현실의 노동도,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도 결코 ‘사회형태로부터 독립적인’ 것일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과정은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에 편입되었고, 자본이 ‘죽은 노동’(이미 노동이 대상화된 기계 등)으로써 ‘산 노동’(노동력)을 흡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은,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도 역시 언제나 각 시대에 특유한 “사회적 생산 유기체”(① p.133; MEW, Bd.23, S.93)에 의해 규정받으면서 행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사회적인 그리고 생명이라는 자연법칙에 의해서 강제된 물질대사”(⑬ p.1421; MEW, Bd.25, S.821)인 것이다. 그리고 환경문제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과의 물질대사나 노동이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규정을 받는가이고, 또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그것이 어떻게 교란되고 파괴되는가이다.12)

다음으로, ‘노동의 생산력’에 관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의 생산력은 여러 사정에 의해서, 특히 노동자의 숙련의 평균도,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 가능성의 발전단계, 생산과정의 사회적 결합, 생산수단의 규모 및 작용능력에 의해서, 나아가 또 자연적 관계들에 의해서 규정된다”(① p.68; MEW, Bd.23, S.54). 이 ‘자연적 관계들’에 의한 규정에 관해서는, 같은 분량의 노동으로도 풍작 때와 흉작 때, 광산이 풍부한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성과가 좌우된다고 설명된다. 나아가 맑스는 자연적 조건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보다 많이 혹은 보다 적게 발전한 사회적 생산의 자태를 별도로 하면, 노동의 생산성은 늘 자연조건들에 매어 있다. 이들 조건들은 모두 인종 등과 같은 인간 자신의 자연과 그를 둘러싼 자연으로 환원될 수 있다. 외적인 자연조건들은 경제적으로는 두 개의 커다란 부류로, 생활수단으로서 자연적 풍부함, 그러니까 토지의 비옥도나 고기가 풍부한 하천 등과, 힘이 좋은 낙차, 항해 가능한 하천, 수목, 금속, 석탄 등과 같은 노동수단으로서의 자연적 풍부함으로 나뉘어진다”(③ p.877~8; MEW, Bd.23, S.535).

이상에서 명백한 것처럼, ‘노동의 생산력’이란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인간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 능력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간결하게는 “자연 제어 능력”13)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생산력의 발전 정도는, (1) 노동하는 인간의 숙련,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력, 협업이나 분업의 발전, (2) 재료, 원료 등의 노동대상 및 개간된 토지 등의 풍요도나, 도구나 기계 같은 노동수단의 발달 정도 등, 이미 인간 노동의 성과인 생산수단의 풍요도와 발전의 정도, (3) 자연적 조건으로서의 자연의 토지, 하천, 바다, 생물자원, 광물자원, 에너지원, 기후조건 등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노동 생산력의 규정은 생산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을 사상(捨象)한 것이다. 현실의 생산력은 ‘정식’에서 말하는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이고, 그것은 예컨대 ‘자본의 생산력’처럼 사회적인 규정을 받은 것임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은 뒤에서 고찰하자.



4. 생산관계와 계급관계

다음으로, 생산관계란 생산에 있어서의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생산관계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소유하는가 하는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이다. 이러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는 공동소유의 관계와 사적소유의 관계가 있다. 사적소유를 보장하는 소유권은, 법률적으로는 어떤 인간에 의한 어떤 물건의 독점적인 점유를 승인하여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적 소유권의 본질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가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타인의 노동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다고 하는 점에 있다. 이것이 계급관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정식’에는 확실히 ‘계급’이라고 하는 말이 없지만, 그러나 ‘생산관계들’이나 ‘소유관계들’이라는 말에는 계급관계가 함의(含意)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생산관계는 소유관계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맑스는 ‘정식’에서 생산관계들이란 소유관계들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생산관계들’의 ‘단순히 법률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들’이 ‘소유관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생산관계에는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기초한 지배․복종의 관계, 착취․피착취의 관계, 부의 분배관계만이 아니라 생산에 관해서 누가 결정권을 갖는가라고 하는 관계나 노동하는 인간 상호의 협업․분업의 관계, 관리․지휘노동과 직접적 노동 등의 관계들이 포함될 것이다.14) 따라서 분업이나 협업이 생산력의 요소가 된다고 해서 이를 생산관계로부터 제외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는 역사적인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여 성립하는데, 이 소유관계 하에서 조직되는 생산관계로서의 분업이나 협업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력 발전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레닌은 “위대한 창의(創意)”(1919) 속에서 사회주의는 계급의 폐절(廢絶)을 목표로 하는 것임을 서술하고, 그를 위한 노동자 계급의 임무를 논하면서 계급이란 무엇인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계급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체제 속에서 점하는 그의 지위가, 생산수단에 대한 그의 관계(그 대부분은 법률에 의해서 확인되어 성문화되어 있다)가, 사회적 노동조직 속에서의 역할이, 따라서 그들이 처분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을 받는 방법과 몫의 크기가 타자와 다른 사람들의 커다란 집단이다. 계급이란 일정한 사회경제제도 속에서 점하는 그 지위가 다름으로써 그 가운데 한쪽이 다른 쪽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인간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다.”15) 이러한 역사적인 사회적 생산체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 노동조직에서의 역할, 부의 몫에서의 차이, 그리고 노동의 착취․피착취라고 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계급관계는 계급사회에서의 생산관계 그 자체이다.

5. 생산양식에 관하여

이상과 같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양 측면을 포함하는 것이 ‘생산양식’이다. 맑스는 ‘정식’에서는 “아시아적, 고전고대적, 봉건적 및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경제적 사회구성체가 진보해 가는 단계로서 들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ꡔ자본론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산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든, 노동자와 생산수단은 언제나 생산의 요소이다. 그러나 한쪽도 다른 쪽도 서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단지 가능성으로 보아서 그러할 뿐이다. 무릇 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결합이 실현되는 방식과 양식(Art und Weise)이 사회구조의 다양한 경제적 시대를 구별한다”(⑤ p.62; MEW, Bd.24, S.42). 이것이 맑스의 생산양식 규정이다. 결국 생산양식이란 “생산과정의 인적 요소인 노동자와 물적 요소인 생산수단의 결합이 실현되는 방식․양식”16)이다. 그리고 그 결합의 방식․양식에 따라서 생산력이 실현된다. 그와 동시에 그 결합의 양식 자체가 그 시대의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의해서 규정되고 실현된다. 따라서 이러한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양 측면을 포함하고, 그 사회의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양식에 관해서, 그것은 (A) 노동과정의 기술과 조직의 결합양식으로서의 노동양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생산관계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견해17)나, (B) 생산양식이란, ① 일정한 노동과정적 양식과 일정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통일한 것이고, 이것이 본래의 생산양식이지만, ② 이 현실의 생산양식 속에서 사회적 생산관계의 측면을 사상(捨象)하고 노동과정적 측면만을 취해서 이것을 생산양식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견해18)도 있다. 그러나 나는, (C) 노동자와 생산수단을 결합시키는 방식인 생산양식은 언제나 생산관계를 포함하고, 일정한 생산관계 내부에서의 생산력의 운동․결합형태라고 하는 견해19)를 지지하고 싶다.

ꡔ자본론ꡕ 속의 ‘생산양식’ 개념에 관해서,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곳의 이해가 문제로 된다. 즉, 노동시간의 연장에 의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는 “자본은 당장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대로의 기술적 조건들로써 노동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따라서 자본은 직접적으로는 생산양식을 변화시키지 않는다”(② p.541; MEW, Bd.23, S.328). 그러나 협업, 분업, 매뉴팩춰, 대공업에 의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는 “자본은 노동과정의 기술적 및 사회적 조건들을, 따라서 생산양식 그 자체를 변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③ p.550; MEW, Bd.23, S.334). 이러한 곳들에서 ‘생산양식’의 ‘변화’나 ‘변혁’은 분명히 직접적으로는 노동양식의 변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부터 다른 생산관계로의 ‘변화’나 ‘변혁’은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양식’ 개념에는 생산관계는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앞에 있다. 맑스는 매뉴팩춰나 대공업에 의한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분석하고, 이것들을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하나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생산양식은 그 방법, 수단, 조건 그 자체와 더불어, 처음에는 자본의 밑으로의 노동의 형식적 포섭을 기초로 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성립하고 형성된다. 이 형식적 포섭에 대신하여 자본의 밑으로의 노동의 실질적 포섭이 나타나는 것이다”(③ p.874; MEW, Bd.23, S.533). 즉,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자본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기술적 조건들로써 노동을 종속시키는 ‘자본 아래로의 노동의 형식적 포섭’을 기초로 하고, 여기에서부터 노동과정의 기술적 및 사회적 조건들을 변혁시킴으로써 ‘자본 아래로의 노동의 실질적 포섭’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생산양식 그 자체의 변혁’은 단지 노동양식만의 변혁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생산과정을 지휘하는 자본의 ‘전제’ 형태들의 발전(③ p.577; MEW, Bd.23, S.352)이기도 하고, 또한 공장 속에서 노동자를 부분기계(部分機械)의 부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공장 전체에 대한, 즉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어찌할 도리 없는 종속이 완성되는”(③ p.730; MEW, Bd.23, S.445) 것이기도 하다. 즉, 여기에서의 생산양식의 변혁은, 노동양식의 변혁을 통해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철저한 지배를 확립하고, 자본 아래로 노동을 실질적으로 종속시키는 생산관계의 변혁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종 노동양식을 의미한다고 이해되는 앞의 ‘생산양식’ 개념에도 당연히 생산관계는 전제되어 있고, 또한 내용적으로도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은 현대 기술혁신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할 것이다.



6.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응과 모순

1)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응

이어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응과 모순의 관계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우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응이란 무엇인가? 맑스는 ‘정식’에서 우선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산관계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여 성립하는,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력이 생산관계와는 독립적인 성격을 갖고, 생산관계와는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롭게 성립한 생산관계는 ‘생산력들의 발전 형태들’로서 생산력을 역으로 규정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동시에 생산력은 생산관계에 의한 다양한 각인(刻印)을 받는다. 이미 본 ‘생산양식’이라고 하는 개념은 이러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밀접한 관련도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의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 아래에 노동자를 종속시키면서 어디까지나 자본의 잉여가치의 증대를 목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산력의 증대가 반드시 노동자 개인의 노동 능력의 증대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매뉴팩처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따라서 자본의 사회적 생산력의 풍부화는 노동자의 개별적 생산력의 빈약화를 조건으로 하고 있다”(③ p.628; MEW, Bd.23, S.383). 그리하여 협업에 의한 노동자의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휘도 어디까지나 자본의 잉여가치 생산의 수단으로서 자본에 의한 지휘와 관리에 의한 것이고, 나아가 자본의 ‘전제’ 형태 하에서 자본에 종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사회적 노동자로서 전개하는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이다”(③ p.580; MEW, Bd.23, S.353).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의 생산력은 실로 ‘자본의 생산력’인 것이다.

그런데 ꡔ자본론ꡕ에서는 ‘생산력에 조응하는 생산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이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① p.9, p.139 등; MEW, Bd.23, S.12, S.96 등)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앞에서도 본 것처럼, 생산양식의 변혁에 수반하여 자본에 노동자를 실질적으로 종속시키는 생산관계의 변혁이 진행된다. 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의 재생산 과정은 끊임없이 자본-임노동이라고 하는 생산관계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아가 거기에서는 한편에서 거대한 부가 자본으로서 축적되고 자본의 집중과 집적이 진행되는데, 다른 한편에서 노동자 계급의 “빈곤,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무지, 난폭, 도덕적 타락의 축적”(④ p.1108; MEW, Bd.23, S.675)이 진행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의 발전 등에 의해서 ‘공장법’ 등의 노동조건에 대한 법적․사회적인 규제도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ꡔ자본론ꡕ에서는 실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의 운동이 해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정식’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응”을 수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인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여 맺어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형성되어 발전하는 것이고, 이에 조응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도 재생산되며, 또한 더 한층 자본주의적으로 변혁되게 되는 것이다.20)


2)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이렇게 서로 규정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모순되게 된다. 그러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식’에서는 생산관계들이 ‘생산력들의 발전형태로부터 그 질곡으로 일변하는’ 것, 혹은 경제적 생산조건들 및 상부구조에서의 ‘충돌’이 몹시 심해지는 것, 나아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들이라고 하는 ‘개인들의 사회적 생활조건들로부터 생기는 적대’로서 표현된다. 이러한 모순에 관해서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서는 ‘생산력’이 ‘파괴력’으로 된다고 되어 있다. “생산력들의 발전 속에서, 현존의 관계들 하에서는 오직 해를 끼칠 뿐 더 이상 어떤 생산력들이 아니라 파괴력들(기계와 화폐)에 불과한 생산력들과 교통수단이 출현하는 단계가 나타난다”(p.49; 김 p.121). 결국, 팽대한 기계나 화폐 등이 오히려 ‘파괴력’으로서 작용하는 단계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파괴력’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자본주의 하에서는 과잉생산에 의한 경제공황의 주기적 폭발은 ‘파괴력’으로 된 생산력임과 동시에 ‘생산력의 파괴’이다. ꡔ공산당 선언ꡕ에서는 부르주아 사회는 자신이 지하로부터 불러낸 마력(생산력)을 자신이 제어할 수 없게 된 마술로 비유된다. “수십 년 전부터 공업 및 상업의 역사는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지와 그 지배의 생존조건들인 근대적 생산관계들에 대해서, 근대적 소유관계들에 대해서 근대적 생산력들이 반역한 역사이다 … 상업공황들에서는 생산된 생산물만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생산력들까지도 그 대부분이 규칙적으로 파괴된다 … 무엇에 의해서 부르주아지는 공황들을 극복하는가? 한편에서는 대량의 생산력들을 어쩔 수 없이 파괴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시장들을 정복하고, 또 낡은 시장들을 하층 더 철저하게 이용함으로써이다.”21) 그리고 이러한 ‘생산력의 파괴’가 일어나는 공황의 필연성의 해명이 ꡔ자본론ꡕ의 과제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파괴력’으로서의 생산력, 혹은 생산력의 파괴는 노동자의 노동능력의 파괴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노동능력의 부분화․일면화, 노동의 강화와 노동시간의 연장에 의한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인 황폐화가 진행되고, “국민의 생명력의 근원”(② p.406; MEW, Bd.23, S.253)이 침해된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는 이윤추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공장의 안전설비나 폐기물 처리 시설 등에 관해서 “불변자본 사용에서의 절약”(⑧ p.147; MEW, Bd.25, S.87)이 이루어진다. 이에 의해서 노동환경이 악화되고, 노동재해가 일어나고, 또한 유해한 폐기물이 배출되어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원인으로도 된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 계급의 ‘빈곤, 억압, 예속, 착취’가 증대되는데, 여기에서 역으로 “끊임없이 팽창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그 자체의 기구에 의해서 훈련되고, 결합되고, 조직되는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또한 증대해 간다”(④ p.1306; MEW, Bd.23, S.791). 이는 실로 ‘정식’이 말하는 ‘충돌’이나 ‘적대’의 발전이다. 이렇게 해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계급투쟁의 격화로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나아가, ‘파괴력’으로서의 생산력, 혹은 생산력의 파괴는 토지를 위시한 자연력의 파괴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에 의해서 대중심지에 집중되는 도시인구가 더욱더 우세해짐에 따라서 한편에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적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물질대사를 교란시킨다. 즉, 인간에 의해서 식료 및 의료의 형태로 소비된 토지성분의 토지로의 회귀를, 따라서 지속적인 토지 비옥도의 영구적인 자연조건을 교란시킨다”(③ pp.867~8; MEW, Bd.23, S.528).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 하에서는 자연 파괴와 노동력 파괴는 동시에 진행된다. “대공업과 공업적으로 경영되는 대농업은 함께 작용한다. 전자는 보다 더 노동력을, 따라서 또 인간이라는 자연력을, 후자는 보다 직접적으로 토지라는 자연력을 황폐화시키고 파멸시키는 것을 통해 양자가 본래 구별된다면, 그 후의 진전에서 양자는 서로 손을 잡고, 농촌에서도 역시 공업제도는 노동자들을 무력화시키고, 공업과 상업 쪽은 토지를 고갈시킬 수단들을 농업에 공급한다”(⑬ pp.1421~2; MEW, Bd.25, S.821).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 즉 토지 및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 및 결합을 발전시킨다”(③ pp.868~9; MEW, Bd.23, SS.529~30). 이렇게 ꡔ자본론ꡕ에서 주로 ‘대공업과 농업’ 간의 관련에서 파악된, 인간이라는 자연력과 토지라는 자연력의 파괴는 자본주의가 한층 더 발전하는 가운데 ‘노동 생산력’을 규정하는 자연적 조건의 파괴,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의 교란에 의한 인간의 생존조건 그 자체의 파괴로도 되어온 것이다.22)

이상에서처럼, 경제공황, 노동능력의 파괴, 계급대립의 격화, 자연파괴가 진행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의 생산력이 그 ‘파괴력’을 더욱더 증대시키거나 생산력 그 자체에 대한 ‘파괴력’으로 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있어서의 질곡으로 일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환경문제의 본질이기도 하다. 즉, 사적유물론은 환경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맑스 시대 이후 자본주의는 더욱 발전하여 선진국에서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씨스템이 환경파괴의 커다란 요인으로 되어 있다. 또 다국적기업의 발전도상국으로의 진출에 의해서, 선진국에서 초래된 것과 마찬가지의 ‘공해의 수출’이 이루어진다든지 난개발에 의해 산림파괴나 대기오염․해양오염 등이 심각화하고 있다. 그 점에서 종래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혁은 한층 더 중대한 과제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및 자본주의의 근본모순

그런데 엥겔스는 ꡔ반(反) 듀링ꡕ이나 ꡔ공상으로부터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ꡕ에서,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으로서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취득의 모순’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 근본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대립’으로 되어 드러나고, 또 ‘개개의 공장 안에서의 생산 조직과 사회 전체 속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 사이의 대립’으로서 나타나며, ‘이들 두 개의 현상형태’로부터 ‘자본의 축적에 대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인 것으로 하고, 또 “공황에서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취득의 모순이 폭력적으로 폭발한다”고 한다.23)

여기에서 엥겔스가 말하는 ‘사회적 생산’이란 ꡔ자본론ꡕ에서 말하는 ‘자본의 생산력’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사회적 결합이고, ‘자본주의적 취득’이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하에서 노동의 성과가 자본가에 의해서 취득되는 생산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취득의 모순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취득의 모순’의 현상형태로서 다시 자연환경 파괴를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24)

그러면, 자본주의의 모순의 표현인 경제공황과 환경문제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에코 맑스주의’의 제임스 오코너는, 환경문제는 ‘자본주의의 제2모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로의 단일하지 않은 두 개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의 제1 모순은, 맑스가 명백히 한 것처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과잉생산 공황을 야기하고, 이러한 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에서의 생산의 사회화가 진전된다. 동시에, 이 모순은 생산의 사회화에 접합한 생산관계의 사회화를 요구하는 것이고, 이러한 변혁의 담당자로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어 증대된다고 한다. 그에 비해서, 자본주의의 제2 모순이란 생산력․생산관계와 생산조건들(외적 자연조건, 노동력, 사회적 생산의 공동적․일반적 조건) 사이의 모순이다. 이 생산조건 들 중에서 특히 자연조건의 고갈이나 파괴가 중대한 문제로 된다. 여기에서 과소생산의 위기가 일어나고, 이 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는 보다 계획화된 자본주의로 진전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의한 스스로의 생산조건들의 파괴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요구가 생기고, 또한 그 활동의 담당자로서 환경보호운동 등의 새로운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이 전진하여 생산조건들을 규제하도록 국가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발전한다는 것이다.25)

여기에서, 오코너가 환경파괴를 자본주의의 모순으로서 파악한 것은 중요하다. 그렇긴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있어서 과잉생산 공황에 의한 위기와 자연환경 파괴에 의한 과소생산의 위기는 밀접히 관련된 것일 것이다. 즉,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에 의해서 무질서한 생산․소비․폐기가 이루어지고, 자원․에너지원(源)을 낭비하는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이 양쪽의 위기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초에 생산의 사회화에 의한 생산력의 증대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의한 자본주의적 취득 사이의 모순이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으로부터 오코너가 말하는 두 개의 모순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7.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및 계급투쟁에 관하여

또한, 여기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과 계급대립․계급투쟁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과 계급투쟁과의 관련에 관해서, 종래의 설명에서는, “사적유물론의 기본적 내용은 주로 생산력․생산관계로 설명되고, 그 후에 양자의 모순이 계급사회에서는 계급투쟁으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식으로, 계급투쟁은 현상형태로서 보완적․주석적(注釋的)으로 논의된다. 이러한 설명에서는 아무래도 계급투쟁이 제이의적(第二義的)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26)고 하는 비판이 있다. 이는 사적유물론에 대한 종래의 설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중요하다. 그러면,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이미 보았듯이, ‘정식’에서는 확실히 ‘계급’이라고 하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데, 그러나 ‘생산관계들’이나 ‘소유관계들’이라는 말에는 계급관계가 함의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생산관계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것은 계급관계이다. 게다가 계급관계는 착취관계이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생산관계가 설령 생산력의 ‘발전형태들’이고 아직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현재화(顯在化)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계급대립․계급모순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 때문에 계급투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정식’이 말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충돌’이나 ‘적대’는, 이미 보았듯이, 계급대립․계급투쟁의 격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계급대립․계급투쟁의 격화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현상형태’로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한가, 부적절한가? 그것은 ‘현상’이라고 하는 카테고리의 이해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헤겔은 “본질은 현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본질은 현상의 배후 혹은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현존재(現存在)하는 것임에 의해서 현존재는 현상적인 것이다”27)라고 하여, 현상은 본질의 표현이고 본질이 직접적인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현상이 본질을 왜곡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ꡔ자본론ꡕ에서는, 자본으로부터 이자가, 노동으로부터 임금이, 토지로부터 지대가 각각 생겨나는 것과 같은 현상은 “경제적 관계들의 소외된 현상형태”라고 파악되고, 맑스는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다”(⑬ p.1430; MEW, Bd.25, S.825)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계급대립․계급투쟁의 격화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 점에 대해서, 앞에서 보았듯이,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근본모순’과 그 ‘현상형태’의 관계로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엥겔스가 마하는 ‘근본모순’인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취득의 모순’은 자본주의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더욱이 자본주의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생산력 파괴, 노동력 파괴, 자연 파괴로서 나타나고, 그것들은 어느 것이나 계급투쟁을 격화시킨다.  이상과 같은 것으로부터 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과 계급대립․계급투쟁의 격화의 관계를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본질을 불명확하게 하는 것도, 거꾸로 현상을 경시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 계급대립․계급투쟁의 격화라고 하는, 실제로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이론적으로 해명되는 사회의 본질을 명시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본질적 현상형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계급대립․계급투쟁을 ‘제이의적인 것’으로서 것의 일면성은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셋째로, 그러나 동시에 계급대립․계급투쟁의 격화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등의, 단순히 경제적 관계들에서의 모순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정식’에는 생산관계들의 총체, 즉 사회의 경제적 구조인 ‘실제적 토대’에서의 모순만이 아니라 이에 조응하는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에서도, 또 사회적 의식형태에서도 ‘충돌’이 결판나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즉,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또는 철학적인 형태들, 간단히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은 인간이 경제적 생산조건들에서의 충돌을 의식하고, 이 충돌을 결판내는 장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계급투쟁이 토대만이 아니라 상부구조에서도 결판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계급투쟁은 경제투쟁, 정치투쟁, 사상투쟁이라고 하는, 사회구조 전체에 걸친 넓이를 가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계급투쟁의 격화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현상형태로서만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한 것으로 된다. 계급투쟁의 발전의 독자적 성격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넷째로, 사회의 경제구조인 토대와 상부구조가 서로 규정하면서, 경제관계를 기초로 한 현실의 사회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경제적 사회구성체’ 내지 ‘사회구성체’이다. 그리고 ‘사회혁명’의 시기에는 경제적 기초의 변혁과 함께 상부구조 전체가 붕괴되고 사회구성체 전체가 변혁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혁명’을 수행하는 것은 실로 계급투쟁이다. 거기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에서의 모순으로서, 사회변혁의 객관적 조건과 객관적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계급투쟁은 사회구조 전체에 걸친 싸움으로서 사회변혁의 주체적인 원동력으로 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계급대립․계급투쟁은 생산관계에서의 착취관계로부터 직접적으로 생긴다. ②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우선 경제적 생활에서의 계급대립․계급투쟁의 격화로서 현상한다. 이 점에서, 계급대립․계급투쟁의 격화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본질적인 현상형태이다. ③ 그러나 계급투쟁은 경제적 조건들을 둘러싼 충돌에 머물지 않고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나 이데올로기 등 사회의 전체 구조에 걸친 싸움이다. ④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사회변혁의 객관적인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계급투쟁은 사회변혁의 주체적인 원동력이다.



8.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혁

맑스는 ‘정식’ 속에서 “부르주아 사회라는 태내에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들은 동시에 그 적대의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이란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형성되는 노동자 계급의 운동, 사회변혁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민주주의적인 사회제도 등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분히 발전함으로써만 ‘인간적 사회’28) 즉 공산주의 사회의 전사(前史)에서의 마지막 적대적 형태인 부르주아 사회를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ꡔ자본론ꡕ에서는 “자본독점은, 그것과 함께 그 아래에서 개화한 이 생산양식의 질곡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그것들의 자본주의적 외피와는 조화할 수 없게 되는 어떤 한 점에 도달한다. 이 외피는 분쇄된다. 자본주의적 사유의 조종이 울린다”(④ p.1306; MEW, Bd.23, S.791)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자본독점 하에서 개화한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라고 하는 생산양식과 자본독점이나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라고 하는 생산관계의 모순이 지적되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와의 모순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ꡔ자본론ꡕ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이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이 해명되는데, 이 조응관계가 동시에 모순관계로도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구체적 형태임과 동시에, 엥겔스가 말하는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취득의 모순’과도 밀접히 연관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 속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및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는 변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변혁과정에서 당면한 과제로 되는 ‘자연필연성의 왕국’에서의 인간의 자유의 실현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보고 있다. 즉, “사회화된 인간, 연합한 생산자들이, 어떤 맹목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되듯이 자신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에 의해서 지배되는 대신에, 그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 통제 하에 두는 경우, 결국 최소한의 힘을 소비해서 그리고 자기의 인간적 본성에 가장 잘 어울리고 가장 적합한 조건 하에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경우이다”(⑬ p.1435; MEW, Bd.25, S.828). 이는 장래의 사회화되고 연합한 인간에 의해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가 합리적으로 규제되고 공동으로 제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더욱이 그 물질대사가 ‘힘의 최소한의 소비’로 ‘인간적 본성(인간적 자연)’에 최적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는 이 ‘필연의 왕국’을 토대로 하여, 나아가 노동시간의 단축에 의한 자유시간의 확대를 ‘근본조건’으로 하여 ‘필연의 왕국’의 저편에 ‘인간적인 힘의 발달’, 즉 인간의 정신적․신체적․사회적인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진짜 자유의 왕국’이 실현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의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관점으로도 될 것이다. 또한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도 말하고 있다. “보다 높은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에 대한 개인 개인의 사적소유는, 바로 어떤 인간에 의한 다른 인간의 사적소유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의 사회 전체도, 하나의 국가 전체도, 아니, 동시대의 모든 사회를 일괄한 것일지라도 토지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토지의 점유자이고 용익자(用益者)일 뿐이며, 그들은 좋은 가장(boni patres familias)으로서 그것을 개량하여 다음 세대에 남겨주지 않으면 안 된다”(⑬ pp.1352~3; MEW, Bd.25, S.784). 여기에서는 지구와 대지에 대한 사적소유의 폐지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사회 전체조차도 토지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하여, 토지에 대한 인간의 ‘세대간 윤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테드 벤튼은 ‘에코 맑스주의’ 이론가들이 행한 작업은 다음과 같은 4영역에 걸쳐 있다고 말한다. 즉, ① 사적유물론의 개념이 수정되고 발전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관한 맑스주의의 이론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 생산에 관한 에콜로지적[생태주의적: 번역자]인 쇠퇴와 위기에 관한 설명이 제출되었다. ② 사회주의에 대한 구상이 다시 수정되고, 에콜로지적인 차원에 정당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③ 환경철학에서 맑스주의 내지 사회주의의 규범적인 준거처를 발전시킨 것. ④ 사회주의 구상의 재정의는 활동의 담당자와 전략문제에 대한 관심을 긴급하게 요구한다. 그것은 환경보호를 위한 사회운동들, 조직들, 당파들에 대한 이해, 좌익과 녹색 정치활동의 새로운 제휴의 전망, 나아가 기타 페미니즘, 인종차별반대운동 등 자립적인 사회운동과의 관계 등이다.29)

그러나 에코 맑스주의가 비판하고 수정하는 ‘맑스주의’는 실제상으로는 옛 쏘련형의 맑스주의일 것이다.30)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오늘날의 시점에서 계승․발전시킨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지구의 환경․자원의 유한성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되고, 환경보호의 중요성이 사회주의의 전략적인 목표로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환경문제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는 중대한 문제의 하나로서, 그것을 민주적으로 변혁하는 과정에서도 평화나 민주주의, 인권의 실현을 지향하는 운동 등과 결합하여 광범위하게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인 것이다. 

한/노/정/연


번역: 채만수(부소장)


* 편집자 주: 이 글은 牧野廣義, 「私的唯物論の基礎槪念: 環境問題とのかかわりで」(ꡔ經濟ꡕ, No.33, 1998년 6월호, 新日本出版社)의 번역입니다. 원문의 제목대로 사적유물론의 기초 개념을 재확인하면서 환경문제가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 그 근본적인 모순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히고 있는 글이므로, 특히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1) 현대유물론의 입장에서 환경 사상을 논한 것으로서는 岩佐茂 ꡔ環境の思想: エコロジーとマルクス主義の接點ꡕ 創風社, 1994年 참조. 또, 牧野廣義 「環境倫理學と民主主義: 加藤尙武氏の環境倫理學の批判」 阪南大學學會編 ꡔ阪南論集, 人文․自然科學編ꡕ 第32卷第4號, 1997年 3月, 同 「環境思想と社會」, ꡔ大阪經濟法科大學論集ꡕ, 第67號, 1997年 3月 참조.


2) 맑스 ꡔ經濟學批判ꡕ 武田․遠藤․大內․加藤譯, 岩波文庫, pp.13~15(김호균 역, ꡔ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ꡕ, 중원문화, 1989, pp.7~8; MEW, Bd.13, SS.8~9). 또한, 맑스 및 엥겔스의 저작으로부터의 인용에서 번역은 적당하게 변경하고 있다.


3) 맑스, ꡔ경제학․철학 초고ꡕ, 城塚․田中譯, 岩波文庫, p.131 등 참조.


4) 엥겔스, ꡔ영국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상태ꡕ 참조.


5) 맑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1868년 3월 25일자 편지(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42, Progress Publishers, 1987, p.558) 참조.


6) 엥겔스, ꡔ자연의 변증법ꡕ 1, 菅原仰譯, 國民文庫, p.238.


7) 맑스․엥겔스, ꡔトイツ․イデオロギ-ꡕ, 服部文男監譯, 新日本出版社. 이후 인용은 페이지만 표시한다(이 번역에서는 김대웅 번역의 ꡔ독일 이데올로기 Iꡕ, 두레, 1989의 페이지도 [: 김 22] 식으로 병기한다).


8) 엥겔스, ꡔ家族․私有財産․國家の起源ꡕ, 土屋保男譯, 新日本文庫, p.8. (김대웅 역, ꡔ가족의 기원ꡕ, 아침, 1985, p.6).


9) 나는 여기에서의 ‘사회적’(sozial)은 ‘사회혁명’(soziale Revolution)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를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싶다.


10) 맑스, ꡔ資本論ꡕ, 新書版, 新日本出版社. 인용에서는 이 번역본의 분책 번호와 페이지를 기록한다(이 번역에서는 MEW[맑스․엥겔스 저작집]의 권 번호와 페이지를 병기한다).


11) 林直道 씨는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란, 인간 쪽에서 보면 인간 집단이 (1) 자연의 몸속에서 자원을 퍼내서 가공하고, (2) 이를 부(富)로서 소비하고, (3) 다시 배설물을 자연에 환원한다고 하는 운동이다”(林直道, ꡔ私的唯物論と經濟學ꡕ 下, 大月書店, 1971年, p.10)라고 서술하고 있다.


12) 吉田文和 씨는 맑스에게 있어서의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검토, 노동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이어서, 이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는, ① 자연법칙과 사회로부터 이중의 규정을 받고, ② 그 교란에 의해서 환경파괴가 생기며, ③ 그 극복을 위해서 그 ‘재건’ ‘합리적 규제’ ‘공동적 통제’가 제기된다고 말하고 있다(吉田文和, ꡔ環境と技術の經濟學: 人間と自然の物質代謝の理論ꡕ, 靑木書店, 1980, 第2章 참조).


13) 置鹽信雄, ꡔ現代資本主義と經濟學ꡕ, 岩波書店, 1986, p.3.


14) 置鹽信雄은 생산관계에는 (i) 생산에서의 협동관계 (협업, 분업), (ii) 생산수단의 소유관계, (iii) 생산에서의 결정자와 피결정자의 관계, (iv) 노동을 담당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의 관계, (v) 생산물의 처분관계 등이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置鹽信雄, 앞의 책, p.4).


15) ꡔ레닌전집ꡕ(일본어판) 제29권, p.425.


16) 林直道, 「私的唯物論と“生産樣式”の問題」, ꡔ科學と思想ꡕ 제13호, 新日本出版社, 1974, p.138.


17) 芝田進午, ꡔ人間性と人格の理論ꡕ, 靑木書店, 1961, p.82 등 참조.


18) 林直道, 앞의 논문, p.139 등 참조.


19) 中村靜治, ꡔ生産樣式の理論ꡕ, 靑木書店, 1985, p.23 등 참조.


20) 이 문제를 논한 것으로서, 大野節夫, ꡔ生産樣式と所有の理論: ꡔ資本論ꡕにおける一般的結論ꡕ, 靑木書店, 1979, 제1장 「資本主義的生産樣式と對應する生産諸關係」, 참조.


21) 맑스․엥겔스, ꡔ공산당 선언ꡕ, 服部文男 譯, pp.51~2.


22) ‘생산력 파괴’나 인간자연과 토지자연의 파괴에 관해서는, 吉田文和, 앞의 책, 제3장, 梅垣邦胤, ꡔ資本主義と人間自然․土地自然ꡕ, 勁草書房, 1991 등 참조.


23) 엥겔스, ꡔ空想から科學へꡕ, 寺澤恒信 譯, 國民文庫, pp.90~102.


24) 林直道 씨는 1970년대 초에, ‘자본주의의 기본적 모순’으로부터 생기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발전’과 ‘전반적 과잉생산 공황의 주기적 폭발’과 함께 “이 기본적 모순은 나아가 제3의 현상형태를 갖는다. 심각한 공해문제의 발생을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林直道, ꡔ私的唯物論と經濟學ꡕ 下, p.15)고 주장했다.


25) Cf. James O’Connor, “The Second Contradiction of Capitalism”, in Ted Benton (ed.), The Greening of Marxism, The Guilford Press, 1966.


26) 林直道, 앞의 책, pp.57~8.


27) 헤겔, ꡔ小論理學ꡕ 下, 松村一人 譯, 岩波文庫, p.55.


28)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0에서도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사회(부르주아 사회)이고,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적 사회 혹은 사회적 인류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인간적 사회’는 ꡔ전집ꡕ(일본어 번역판) ‘사항색인’에서도 “진실로 인간적인 사회로서의 공산주의”라고 이해되고 있다 (ꡔ전집ꡕ 별권 4, p.163).


29) Cf. Ted Benton (ed.), 같은 책, p.104.


30) 역자 주: 이 문장은 명백히 일본공산당의 ‘반쏘주의적’ 편향의 표현이다. 올바르게는 “… 실제상으로는 에코 맑스주의자들 자신이 돈키호테식으로 주관적으로 구축한 자신들의 ‘맑스주의’일 것이다”라고 기술해야 할 것이다.


2002-05-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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