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의 현재적 의미
최 갑 수
연구위원
4․19가 일어난 것이 1960년이니 벌써 40여 년이
흘렀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그것을 4월 혁명이 갖는 역사적 성격의 규명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논의가 다소간 추상적이고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 민중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일에
시사해줄 무엇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4월 혁명이 있은 직후, 당시 한 역사학자는 그것을 서구의
시민혁명과 비교하고는 “반독재의 민주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주로 혁명 당시에 나온 선언문이나 참여자들의
기록을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가 4월 혁명의 이념임을
보여주고는 중요하게도 4월 혁명의 이념에는 “주권재민이나
기본적인 인권과 제자유의 보장만”이 아니라 “법 앞에서의
평등과 권리향유의 평등, 그리고 기회균등과 능력에 대한 공정한
문호개방 이외에 경제적 평등의 원리가” 들어있다고 지적하여
4월 혁명을 고전적인 부르주아혁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사실 4․19가 벌어져서 그것의 성격을 규정할 필요가
생겼을 때, 그것이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이나 1919년의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그것들과는 달리 기존
정치질서를 무너뜨리는, 우리의 현대사에서는 유례가 없는
새로움을 지닌 사건임은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그것과 유사한 사건이 다른 나라에 있었는지, 있다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탐색
속에서 서구의 혁명사를 전공했던 위의 연구자는 4월 혁명을
시민혁명의 한 부류로 보는 견해를 제출했고 이후 그것은 국내의
학계에서 주도적인 해석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그간 혁명해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발전과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4월 혁명의 좌절과 오랜 군사독재,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가능케 한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과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사태발전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미완의 혁명’인 4월 혁명과 뒤의 두 항쟁 사이의
관계이다. 필자는 후자가 전자의 미진함과 한계를 극복하여
혁명의 과업을 마무리지어 적어도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이룩했다고 평가하며 이 점에서 그 셋을 묶어 하나의
부르주아혁명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긴다.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혁명관 자체의 부침이다. 16세기 말~17세기 중엽의
네덜란드혁명, 17세기 후반의 영국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19세기 세 번째 4분기의 독일혁명, 이탈리아의
통일, 일본의 명치유신, 러시아의 1905년의 혁명 등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부르주아혁명으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역사관이
1970년대 이후에 학내외적으로 거센 도전을 받아 특히 영미의
학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사회주의혁명의
전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부르주아혁명관이 전체적으로
존재근거를 상실했다고 보지 않으며 여전히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을 야기한 적극적인 계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논의의 전개과정은 명확하다. 먼저 부르주아혁명의
역사적 성격을 살펴보고 그것에 견주어 4․19혁명의 의의를
확인하고 끝으로 그 현재적 의미를 성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부르주아혁명과 근대성
우리말로 ‘시민혁명’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시민권의
소지자들의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세력인
부르주아지의 혁명, 즉 ‘부르주아혁명’을 뜻한다. 이를
일본인들이 번역할 때 부르주아지를 ‘부르그(bourg)의
주민’으로 해석하여 ‘시민혁명’으로 옮겼던 것이다. 우리말
용례야 어찌되었던 간에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용어는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이끌었거나 적어도 혁명의 결과가
부르주아지에게 유리한 것이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역사적으로
그 부르주아지가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느냐 하는
점이 언제나 뜨거운 논쟁점이 되곤 했지만 부르주아혁명은
적어도 부르주아지라는 사회세력의 존재와 그들과 혁명과의
모종의 밀접한 관련성을 전제한다.
문제는 우리가 흔히 부르주아혁명으로 분류하는 사건들 가운데
부르주아지가 주도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걸맞는 근대사회와
국가를 이룩한 예가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도시 부르주아지가
확고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부르주아적’ 성격이 뚜렷했던
유일한 예는 최초의 부르주아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혁명뿐이며, 아마도 초기의 프랑스혁명(1789~91년)
정도를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고유한
의미의 부르주아혁명이 매우 드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도
흔히 부르주아혁명 운운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부르주아혁명이 많은 이들에게 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분석적 개념이요 일종의 이상형적 개념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마르크스의 ‘이중혁명’이 그러했다. 그는 근대세계의 형성을
거시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동질적인
움직임으로 파악하여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결합시켰고, 그럼으로써 자본가계급과
부르주아지를 동일시하여 혁명적 부르주아지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는 그가 프랑스 왕정복고기 자유주의사가들의
혁명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는 부르주아지와
귀족을 대립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부르주아혁명관을 그대로
답습했고, 이는 다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러시아 혁명가들을
통해 정교화되어 혁명사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즉
프롤레타리아혁명을 구상했던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부르주아혁명은 독자적인 이론화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부정형으로 간주되어 부르주아지-노동계급의
이분법이 그대로 귀족(특권계급)-부르주아지의 이분법으로
굳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고정관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혁명이
일어났던 각국의 사회구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나라에 따라 쉽지 않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둘째, 부르주아지의 계급성이 혁명의 과정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고전적인 부르주아혁명으로서
프랑스혁명이 준 역사적 경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혁명 초에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파리 민중의 지원에 힘입어 ‘법률혁명’을
이룩하였고 ‘1791년의 헌법’으로 입헌군주제를 설정하여
혁명을 끝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특권계급의 완강한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동원된 민중이 혁명과정에서 꽤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여 한때는 부르주아혁명의 성과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이 야기되었다. 이에 부르주아세력은 힘을 합쳐
민중을 억압하였고 끝내는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나폴레옹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이후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경험이 모든
혁명세력의 인식지평을 지배하였다. 예컨대 1848년 3월 혁명의
독일에서처럼 초기에 혁명에 적극적이던 중간계급의 구성원들이
민중세력이 개입할 낌새를 보이자 곧 보수화하여 기존의
특권세력 편에 가담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물론 독일 부르주아세력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한 극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후 부르주아혁명의 과제를
담당하게 되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이나
농민이었다. 부르주아지가 없는 부르주아혁명이 이렇게 해서
나타났던 것이다.
셋째, 따라서 일반적으로 부르주아혁명의 정체성은 그
주체보다는 그것이 수행했다는 역사적 과업, 즉 ‘근대성’의
획득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부르주아혁명이 거의 예외 없이
이룩해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민국가’의 구축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주창한 것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에서 민주화와 산업화의
요구가 부르주아혁명을 통해서 결합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것이 프랑스혁명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의 진정한 내용이라고 본다. 즉 프랑스가 강력한 국민의
면모와 조건을 과시한 것이 인권혁명을 통해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막강한 국력으로 인하여 부르주아혁명이 곧 ‘부국강병’에
이르는 첩경으로 여겨졌고,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여러 나라의
지배층들이 스스로 ‘위로부터의 혁명’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럴 경우 그것은 대개 민주화의 요구는 무시한 채 산업화를
위한 제도적 틀을 만드는데 그쳤으며, 따라서 특히 제3세계에서
전자의 요구는 사회주의혁명을 통해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비적인 고찰을 통해 우리는 부르주아혁명의 성격을
규정짓는 네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역사적 고찰은 피하고
기본적인 윤곽만을 제시해 보자. 첫째, 봉건제와 자본주의의
관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적 관계와는 사뭇 달라,
양자는 사적 소유제라는 공통의 정의를 통해 사회구성 속에서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물론 봉건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소유는 서로 매우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양자를 관통하여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를 나누는 구분선은 존재해본 적이 없다.
따라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사회계급 내지
신분으로서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에 일련의 타협이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 이를 ‘부르주아혁명에 대한
위로부터의 중첩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둘째,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결코 특권계급과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대립적 관계를 수반하지 않는다. 전통사회가 농촌에
다수의 무산농민층을 필요로 하고 또 갖고 있듯이 자본주의 역시
무소유의 임노동자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따라서
귀족-부르주아지의 갈등 아래 농촌과 도시에 광범위한 민중층의
공존은 자본주의의 성장이 야기한 사회적 대립과 갈등에 내재한
것이다. 그 결과 혁명적인 위기는 그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
언제나 삼각 내지 사각관계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즉 이행을
위한 정치적 격변에 민중이 개입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도
아니고 외부의 요인 때문도 아니다. 이를 ‘부르주아혁명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중첩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셋째, 따라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지
내에서 소수를 구성할 뿐이다. 자본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들과 유사한 생활방식을 지닌 관료, 법률가, 전문직업인들이
그 역할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들이 부르주아지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또한 부르주아지는 그 아래의 소부르주아지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부르주아지는 하나의 사회집단으로서
어떤 선험적인 내적 통일성을 갖지 않으며 사회구성상 사뭇
이질적인 구조를 갖는다. 이를 ‘부르주아혁명에 대한
안으로부터의 중첩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넷째, 자본주의는 일정 영역에 재생산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국가를 필요로 한다. 복수적인 정치적
단위는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상부구조를 이룬다. 이행을 위한
정치적 격변에서 지배블록은 외국의 상응하는 세력과 경쟁해야
하며 이것이 부르주아혁명을 외부에서 규정하게 된다. 이를
‘부르주아혁명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중첩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렇듯 봉건제의 유연한 적응능력(상부), 예측 불가능한
민중계급의 존재(하부), 부르주아지의 다양성(내부), 경쟁국가의
압력(외부) 등의 요인이 봉건특권계급과 산업자본의 투쟁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근대성의 획득을 향한 부르주아혁명의 길은
사회구성이나 국제환경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고 하겠다.
사실상 역사상 등장했던 부르주아혁명은 크게 보아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16~18세기에 일어났던 것으로서 이
시기에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상업적이거나 농업적이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이 네덜란드,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혁명들이다. 다른 하나는 19세기에 산업혁명을 경험한 뒤에
일어난 것들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것이 독일의 통일,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미국의 남북전쟁, 일본의 명치유신
등이다. 이 점에서 1848~49년의 일련의 혁명의 실패는 두
혁명계열을 가르는 분수령의 역할을 한다. 중요한 것은 후자의
혁명들이 대체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반면에 전자의
혁명들은 엄청난 혁명적 동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는 두
계열의 혁명들이 처해있던 자본주의 공간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한다. 즉 후자의 혁명들에서는 당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닌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 힘과 그로 말미암아 사회적 변화를
추동해 내는 자생적인 힘이 상대적으로 그 혁명들의 정치적
추진력을 제한할 수 있었던 반면에, 전자의 혁명들에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를 운반할 수 있는 불가항력의 경제적
동력이 여전히 결여되어 있는 상황에서 구질서에 대한 정치적인
정면공격이 절실하게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전자의
혁명들에서 ‘국민’이니 ‘인민/민중’이니 ‘인권’이니 하는
통합적이면서 보편적인 구호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4월 혁명: 옆으로부터의 혁명
4월 혁명과 광주항쟁 그리고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일련의 변혁운동을 뭉뚱그려 부르주아혁명으로 볼 수
있을까? 필자는 위의 세 움직임이 각기 의회민주주의의 회복,
군부의 퇴진, 민주헌법의 쟁취라는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민주화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여 형식적이나마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룩해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혁명의 역사적 과업의
일부를 수행했다고 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4․19를
포함하는 세 항쟁에서 뚜렷한 주체세력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대학생들과 일부의 민중이었다.
1960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이 남한의 부르주아혁명기는
학생들이 변혁운동을 이끌었던 기간과 정확히 일치하며 그
이후에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동자 계급운동과 시민운동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우리의 변혁운동이 ‘주체 없는 부르주아혁명’,
아니 차라리 ‘학생운동 중심의 부르주아혁명’이라는 특수한
면모를 갖게 되었을까? 이의 해명을 위해서는 보다 거시적인
전망이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에서 1990년에 이르는
30년간은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극심한 산업화의 시기로서 남한
사회는 그야말로 미증유의 격렬한 변동을 경험하였다. 1960년
당시 64%에 달했던 농민층이 1970년에 45.7%, 1980년에 31.3%에
이르고 1990년에는 17.5%로 떨어졌다. 반면에 ‘근로계급’은
도시빈민층을 포함하여 1960년의 15.5%에서 1970년에 24.9%,
1980년에 28.5%, 1990년에는 36.8%에 이르렀다. 도시화율 역시
1960년에 28%에서 1970년에 41.1%, 1980년에 57.2%, 1990년에는
74.4%로 급증했다. 산업구조의 추이 역시 동일한 변화를 보이며,
1인당 GNP는 1962년에 87불에서 1970년에 252불, 1980년에
1,592불, 1990년에는 5,659불에 이르렀다. 남한이 겪은 이
30년간의 변화가 서구 같으면 대략 한 세기가 넘는 기간에 걸쳐
일어난 것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우리 사회의 역동성은 이미
세계사의 차원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정말이지 우리는 아직도
이 역동성의 너비와 깊이, 더 나아가 그 심원한 의미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것이 솔질한 고백이다.
위의 변화가 4․19를 포함하는 세 변혁운동의 성격에 대해
갖는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이
확인되어야 한다. 첫째, 4월 혁명이 일어날 당시 우리 사회에는
불완전하나마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으로 말미암아 이렇다할
만한 지주계급이 사실상 부재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심대하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농업사회였던 남한에 지주계급의 부재는 변혁운동에 농민이
가담하는 것을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안정되고 여유 있는
지배적인 주체세력의 형성을 저해하였다. 사실 토지개혁을 통한
지주계급의 해체는 그 자체가 전통적인 지배층의 무능력과
허약함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울러 그것은 저항세력의
구조화를 막아 저항주체의 형성을 제약하였다. 그렇다고 도시에
전투력을 갖춘 전통적인 민중층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산업노동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부르주아혁명에 대한 위와 밑으로부터의 중첩결정이 부재했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러한 데에는 한국전쟁의 영향이 컸다. 전쟁은
해방 직후의 변혁공간을 종식시키고 남한에 냉전을 뛰어넘는
체질화된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하게 뿌리내리게 하였다. 아울러
그것은 민족대이동을 불러 전통적인 토착사회를 종식시키고
유동성이 강한 평등사회를 만들어냈다. 사실 ‘6․25
동란’은 그 어떤 혁명도 이룩해내지 못했던 ‘조건의 평등’을
구현하였고 이것이 세계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교육열과 더
나아가 사회적 역동성을 자극하였다.
둘째, 4월 혁명은 말할 것도 없이 나머지 두 항쟁 역시 요구와
구호에서 기본적으로 수세적이고 방어적이었다. 이는 적어도
형식법적으로는 기본권의 보장이나 시민적 평등, 또는
의회민주주의라는 시민혁명의 성과가 정부의 수립과 함께
주어졌던 결과이다. 여성참정권의 도입이 예컨대 프랑스에 비해
단지 3년여밖에 뒤지지 않았음은 해방공간이 지녔던 진보성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후의 운동은 변화하는 현실에 걸맞는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30년에 걸치는 투쟁의 기반 위에서 6월
항쟁이 도달한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1980년의 ‘서울의 봄’이나
1960년이 아니라 1948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도된 현실은
지배세력의 부재와 그 공백을 채웠던 친일세력의 정통성
부재에서 비롯하였다. 독자적인 물적 기반을 결여한 이들은
국가를 먹이대상으로 하면서도 정통성 부재로 불투명한 국가의
배후로 숨었고, 이들의 뒤를 이은 국가독점자본 역시 국가의
그늘에 기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이나
항쟁의 주역들 역시 국가주의와 반공주의를 탈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운동의 사회적 주체가 부재했던 만큼 주장이
체계성과 구체성을 결여하게 마련이었고 언제나 “젊은 학도의
불타는 정의감에서 유발된 것”이었다. 그러기에 기존 권위에
대한 항의가 일정 수준에 이르러 법과 현실의 간극이 메워지는
상황에 도달하면 더 이상의 사태발전은 과격이요 “폭도의
난동”이었다. 이러한 보수성은 부르주아혁명에 대한
안으로부터의 중첩결정이 부재했던 결과이다.
셋째, 주체의 부재는 그대로 미국의 존재를 외면하거나
문제시하지 못하는 부르주아혁명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중첩결정으로 연결되었다. 이미 해방공간에서부터 남한의
정치세력들은 좌․우익을 불문하고 미국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다. 미국에 대한 이 유례 없는 ‘자아몰입’은
풍요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과 투항을 말하는 동시에 분단체제의
승인과 수용을 뜻한다. 4․19가 진정으로 혁명적이었음은
그것이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했기 때문이며, 광주민중항쟁의
변혁성 역시 민중자치의 실현과 함께 미국의 정체 폭로에 있었던
것이다. 6월 항쟁 역시 군부독재와 미국의 관련성에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하지만 과연 민주화의 외침이 분단체제의
극복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그간 우리
사회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주체의 형성에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4월 혁명의 현재적 의미
이제 4월 혁명의 의의를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자.
1950년대 후반부터 이승만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57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경제원조가 줄어들자 한국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미국 잉여생산물의 도입으로 농촌사회는
피폐해지고, 산업화의 정체로 도시는 빈민과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아울러 같은 시기에 냉전체제는 군사적 대결 위주에서
사회경제적 경쟁 중심으로 옮겨갔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들의
경제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경제적 침체와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미국과
갈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대내외적인 위기에 봉착하여
이승만 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더욱 물리력과 정치조작에
의존하였으며, 민중의 불만은 팽배해 갔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골적이고
대대적인 선거부정을 자행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 3월과 4월에 걸쳐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민중항쟁이
벌어졌다. 이 항쟁으로 말미암아 이승만 정권은 4월 26일에
마침내 무너졌다. 4월 혁명은 선거부정에 대한 반발을 넘어
이승만 독재체제에 대한 총체적인 불만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4월 혁명은 기본적으로 학생혁명으로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할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했다.
혁명의 결과는 ‘하야’ 직전 이승만이 임명한 인물이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청산의 대상인 여당의원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기존의 국회에서 개헌을 통해 신정권을 창출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혁명이라면 당연히 있을법한 구체제의 청산은
문제제기조차 벌어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집권당은 구 집권당과
비교하여 친일이나 친미의 성향, 또는 반공주의에서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4․19를
항쟁으로 보고 있으며, 혁명도 아닌 것을 혁명으로 보는데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혁명’도 혁명이거니와 분단과 냉전의 엄혹한 틀
속에서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현대사에서
획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4․19는 이제껏
억눌려왔던 여러 요구들이 분출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공간을
열어주었다. 과연 4월 혁명의 참으로 혁명적인 면모들이 여러
부문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이 분괴한 직후부터
교원노조운동을 필두로 하여 각종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었다. 7월의
총선거에서 참패한 혁신정당들도 4개의 정당으로 재편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직작업에 착수했다. 학생운동 역시 처음에는
학원민주화운동, 신생활운동, 국민계몽대운동 등 계몽운동
차원에 머물렀지만, 11월에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의 발기를
계기로 하여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는 통일운동으로 전환하였다.
4월 혁명은 1961년에 접어들면서 민중혁명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여 단순한 민중생존권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고 민족통합을 추구하였다. 급기야 2월에 대부분의
혁신정당과 민족․민주운동단체가 참여하는
‘민족자주통일협의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5․16쿠데타의 발발에는 이러한 민중운동의 고양에 대한
지배블럭의 불안감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이렇듯 4월 혁명은 정권교체의 수준을 넘어,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는 제대로 된 나라를 이룩할 수 없으며 사회적
주체 없이는 진정한 해방과 독립이 있을 수 없다는 근대국민국가
건설의 과제를 제기하고 또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다. 4월 혁명의
비극은 이 사회의 지배집단이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그 공백을
학생과 일부 민중이 메울 수밖에 없었다는데 있다. 이후 우리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양 측면에서 꽤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건만, 과연 근대적 주체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해결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이번 ‘발전노조’의 파업은
그러한 과제조차 노동운동의 몫으로 남아있음을 말해준다.
시민혁명의 성취를 지양하는 과업이 4․19혁명의 기대지평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