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인티파다
최근 팔레스타인 유혈 사태의 배경과 전망
송 기 철/편집위원
1. 들어가면서
2000년 가을 제 2차 “인티파다”(봉기)가 시작된 이래 이미
22,000여 명 의 사상자를 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유혈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2002년 초 이스라엘은 2만여 명의
정규군 병력과 탱크, 그리고 F16 전투기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주요 도시와 난민촌에 무차별적인 “반
테러” 보복작전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야기된 중동전쟁의 발발
위기는 최근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국제적 압력과 미국 정부의
중재시도, 그리고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부터의
부분적인 철수로 일단 진정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의 자살폭탄테러는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은 이에 혹독한 보복으로 맞서고 있다. 피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테러공격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불특정 다수에 대한 자살폭탄테러의 형식을 띄면서
집중적으로 행해지고, 또한 서방언론들은 이슬람 근본주의로
세뇌된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이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자살폭탄테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제2의 인티파다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듯 싶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이러한 피의 악순환은 종식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망은 지금으로서는 이스라엘의 극우 샤론 정부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정책, 잇따른 자살테러사건들로 인해
최악의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민감정, 그리고
미국의 중재노력에 대한 의구심을 고려해볼 때 지극히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사태의 전개는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미국에 대한 항공기 자살공격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전쟁 후 무력에 의한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축출을 선언했던 미국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수행의
최대 변수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의
팔레스타인 유혈사태의 원인과 배경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사태발전을 가늠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2. 미국과 팔레스타인 유혈사태
2001년 1월 부시 행정부의 등장은 미국의 세계정치전략, 또는
적어도 그 방식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의미했다. 지난 가을,
뉴욕의 세계무역센타에 대한 이슬람 전사들에 의한 항공기
공격과 아프카니스탄에서의 반-텔레반전쟁은 미국의 더욱 강화된
군사적 패권주의정책 극적인 표현이자 결과였다. 부시 행정부의
세계정치전략의 변화는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가
클린턴 정권 이후 북미관계의 급속한 냉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면, 팔레스타인의 유혈사태의 악화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북미관계의 개선을 통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방지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미국의 최대 외교적 현안이었다. 2000년 12월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의 북한방문은 북-미간의
관계개선과 한반도 평화정착에 걸림돌이 되었던 주요문제에 대한
일괄타결의 가능성을 보인 것이었다. 또한 클린턴 정부는 2000년
여름 이스라엘의 바락 수상과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간의 캠프데이비드 협상의 실패 이후에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반도
문제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의 적극적인
행보에는 분명 낮 뜨거운 성추문 사건들을 제외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클린턴 대통령의 8년간의
외교적 성과를 매듭짓기 위한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 한반도 문제와 팔레스타인 문제 모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해결 가능성이 커 보였고, 이는 1980년대 말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이후 클린턴 행정부 아래 미국정부가
비교적 일관되게 추진해온 세계정치의 결과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1993년 북한의 핵위기가 빌리 카터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으로 극적으로 해소된 후 북한의 핵사찰
수용, 북한의 경수로 건설에 대한 지원, 미국의 페리
프로세스라고 일컬었던 대량살생무기의 확산방지와 북한의 개방
유도정책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6․15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그 어느 때 보다도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북-미
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기대를 높게 했다. 이러한 한반도의 긴장
완화는 초기 강경한 대북정책 이후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일관되게 추진되어온 포용정책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도
1990년대는 궁극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던 시기였다.
1993년과 1995년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스라엘은 여러 아랍연맹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또한 각국의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재건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오슬로 프로체스”라고 불리우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외교적, 정치적, 사회적 준비작업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한 최종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2000년
9월의 캠프 데이비드 이-팔 정상회담과 2001년 1월 홍해 연안의
작은 도시 타바에서 열린 양측의 실무협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을 통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 가능성은 예기치 못했던 제2차 인티파다의 발발과
2001년 2월 이스라엘 노동당의 총선 참패, 그리고 아리엘 샤론
수상이 이끄는 극우 연립정부 수립 이후 유혈사태로 이어지면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간 듯한 상황이 되었다.
최근 팔레스타인 사태와 관련하여 미국의 역할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전면적인
중동전쟁의 발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오슬로
프로체스 중단의 원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내부저항
세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책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2001년 9․11일 사건 직후 아랍진영을 안심시킬
목적으로 중립적 자세를 취했던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공격이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면서 곧바로 사론정부의 강경정책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로 선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 공격을 범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으로 치장하면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샤론 정부의
강경정책의 목적과 지향점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서는 우선
오슬로 프로체스와 그 문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오슬로 협약으로부터 제2차 인티파다까지(1993~2000년
2월)
1993년 9월 13일 체결된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제1차 오슬로
협약은 1세기 이상 계속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간의 피로
얼룩진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을 대표한 PLO는 양 민족의 문제를 무력이
아닌 평화적 방법, 즉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해결할 것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대가로 1967년 6일 전쟁 이후 점령하고 있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의 단계적인 철수와 준 국가적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의 설치를 수락했다. 제1차 오슬로 협약은
중동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과도기적 합의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협약 자체에 명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립을 통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 공존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되었고, “두 개의 국가”와
“평화와 영토의 맞교환”이라는 대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양 민족간의 역사적 대타협의 배경은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에 따른 국제정치적 지형의 변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으로 비유되었던 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로 표출된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의 실패, 걸프 전쟁기간 중 이스라엘에 대한
이라크의 스쿠드-미사일 공격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팔레스타인 분쟁의 새로운 양상과 이를
둘러싼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였다.
오슬로 협약은 유대인들에게는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이래
지속되고 있는 아랍세계와의 전쟁상태의 종식과 평화, 그리고
팔레스타인에게는 19세기말 터키와 영국에 대한 해방투쟁에서
시작된 민족해방운동의 꿈, 즉 독립국가의 건설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의 실현은 이스라엘인에게 있어서 그들의 건국이념인
시오니즘의 최종목표, 즉 성서에 근거한 “대 이스라엘” 건설의
포기와 팔레스타인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역사적 영토의 3/4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양 민족의 평화적 미래는 자신의 역사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오슬로 프로체스는 적어도 1995년 11월,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타협을 이끌어낸 이착 라빈 이스라엘 수상이 한 유대인
근본주의자에 의해 암살되기까지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보였다. 가자지구와 서요르단 연안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30여 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한
아라파트와 PLO의 주도로 과도적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했다. 1995년 9월 체결된 제 2차 오슬로 협약에 따라
가지지구와 라말라, 헤브론, 여리고, 베들레헴 등의 도시들은
팔레스타인 단독 자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밖의 서요르단
연안의 지역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동관리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양측은 팔레스타인 독립국의 수립을 비롯한 모든
현안을 5년 이내에 타결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조속한 시일 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최종적인
평화협상이 마무리되리라는 기대에는 라빈 수상의 암살 충격과
1996년 6월 네타냐우가 이끄는 리쿠드 연합의 보수우익 정권의
등장, 그리고 1997년 봄부터 시작된 서요르단 지역 내 유대인
집단거주지의 건설과 함께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 정부의 방조 내지는 지원 아래 이루어진 유대교
광신주의자들의 집단 거주지 건설은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스라엘 이주자들과 팔레스타인 주민과의 물리적 충돌
속에 자국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이스라엘 군이 다시 등장했고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간의 오슬로 협약의 해석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되었다.
교착상태에 빠진 평화협상에는 네타냐우 수상의 실각과 라빈
수상의 정책 계승을 표방했던 에후드 바락의 이스라엘 노동당
정권의 등장 이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협상 당사자간의 절대적인 힘의 불균형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2001년 6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바락과 아라파트 간의 정상회담에서 이스라엘 측이 제시한
협상안에서도 나타났다. 바락은 이스라엘 점령지의 96%로부터의
철수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분할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아라파트는 바락의 제안이 그 동안 이스라엘 사회의 금기사항의
하나이자, 팔레스타인 난민문제와 함께 평화협상의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예루살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일보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라파트의
단호한 태도에 놀란 바락은 캠프 데이비드 협상의 실패 이후 그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의 “통큰 제안”을 거부한 아라파트에게
돌렸다. 심지어 그는 아라파트가 비로소 “가면을 벗고”,
오슬로 프로체스를 실패의 위기로 몰아 넣었다는 비난을 서슴지
안았다. 그러나 최근 캠프데이비드 협상의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게 되면서 바락의 제안은 당시 빗발치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라파트에 의해 수용될 수 없었던
것임이 밝혀졌다. 9,5%의 요르단 연안과 약 10%의 요르단
계곡의 이스라엘로의 편입과 “장기 임대”를 담고 있던 바락의
제안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통제가 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의 의지가 관철되는 경우 서요르단
지역은 두 개의 커다란 이스라엘의 정착촌의 띠로 세 동강 나게
되고, 또한 이스라엘은 자국으로 헤브론과 키리안으로 통하는
도로에 대한 관할권을 요구했는데 이는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뜻하는 것이었다. Alain Gresh, “The
Middle East: How the peace was lost”, Le Monde
diplomatique(영어판), Sept. 2001. http://Mondediplo.com
캠프 데이비드 협상이 결렬된 것에 따른 심각한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 속에서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의 절충점을 찾기 위한 실무 협상이
계속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2000년 가을 제2차 인티파다의
불씨를 당긴 샤론 리쿠드 연합의 당수에 의한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전과 알 악사 회교사원의 “방문”이 이루어졌다. 예언자
모하메드의 발자국이 있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와 이란의 메디나와 함께 회교의 세계 3대 성지 중의 하나로
샤론의 “방문“은 이스라엘과의 협상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실망과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진압과 자살테러 공격이 이어졌다.
샤론의 의도된 도발 직후 순식간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팔레스타인의 봉기가 일어났고, 이스라엘 군의 무차별적인
보복과 연이은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 테러가 뒤이었다. 이러한
유혈사태의 와중에서도 오슬로 프로체스를 살리기 위한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 대표간에 마지막 노력이 있었다. 2001년 1월,
수개월간에 걸친 비밀협상 끝에 타바에서 체결된 양측의 합의가
그 결과였다.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을 위한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중재안 (Clinton Plan)과 2001년 1월 27일 이-팔 정부대표의
타바 공동선언은 Le Monde diplomatique의 중동사태에관한
자료집에 수록되어있다. http://Mondediplo.com/focus/middleeast
새로운 팔레스타인 평화안은 바락의 제안보다 진일보한
“클린턴 플랜”에 기초한 것으로, 특히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370여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팔레스타인 실향민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공시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48년
당시 이스라엘 영토 내에는 최소한 70만명의 아랍계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의 건국과 수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으로 이웃
아랍국가들로 흩어졌는데, 지금 이들의 후손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실향민의 수는 레바논과 시리아에 각각 40만명,
그리고 요르단에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140여 만명에
이르는 것을 추정되고 있다.
양측이 실향민의 귀향과 보상을 포함한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천명한 것은 오슬로 프로체스의 새로운 돌파구가 열렸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측 대표단은 결국 2001년 1월 27일
단지 선언적 의미만을 갖는 합의안에 서명했고, 열흘 뒤 실시된
이스라엘의 총선에서 노동당이 참패하고 리쿠드연합의 샤론이
집권했다.
샤론은 2000년 9월의 의도된 도발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제2의 인티파다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오슬로 프로체스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1986년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대학살자의 책임자인 그는 집권 후 아직도 1948년 시작된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정당성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샤론은 계획적인 도발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분노와
절망을 극에 달하게끔 했고,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 테러는
이스라엘 국민과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한 빌미를
제공했다.
4. 팔레스타인인의 절망과 이스라엘인의 공포.
2001년 7월 1일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하마스 단원 한 명이
텔아비브 해변의 한 디스코에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했다. 20여
명의 이스라엘 청소년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이 사건은
제2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이래 발생한 60여 건의 자살폭탄테러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이러한 거의 무차별적인
자살폭탄 테러는 주로 젊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그리고 이슬람
지하드 단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9․11 테러사건의
충격 속에 많은 서구언론들은 팔레스타인 유혈사태를
팔레스타인의 과격테러분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는 분명히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서방세계의 일방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최근의 유혈사태의 밑바닥에는 무엇보다도 팔레스타인
인들의 극도의 절망감과 분노,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인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태의 전망을 위해서도 이에 대한
몇 가지 원인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자지구와 서요르단강 연안은 1km2에 525명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민촌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다하이쉬라는 난민촌에는 1km2에 1만 1천명이
밀집해서 살고 있다. 4m 이상의 철조망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정상적인 교육과 일자리란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당한
생계 수단이 없는 경우 유엔 난민기구의 식량 배급으로 연명하는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에게는 일자리라고
해봐야 대부분 이스라엘 지역의 비정기적인 것들이 고작인데,
이나마 잦은 국경봉쇄와 엄격한 검색을 통과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고, 이것이 이스라엘 군과의 잦은 충돌의 원인이
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인들이 처해있는 참담한 현실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2000년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구금상태에 있거나, 불공정한
군사재판에 회부된 팔레스타인의 수가 모두 3,350명에 이르고,
불법적인 처형 또한 최소한 18건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리는 여기서 집단적인 자살테러의 원인에 대해,
이스라엘의 언론인으로 대안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아브네리의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한 사람이 자살을 한다면
우리는 그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수천명의 사람들, 심지어 자식과 아내가 있는 사람들까지 자살에
이끌릴 수 있다면 이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삶을
죽음보다 힘든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삶이 인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Spiegel Online 인터뷰, Dec. 20, 2001. http://www.spiegel.de
인티파다의 원인이 오슬로 프로체스의 결과에 대한 실망과
팔레스타인인의 참담한 현실에 있다면, 샤론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 정책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홀러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다.
이스라엘인에게 있어서 유사시의 평화보다 안전이 우선이라는
원칙은 절대 절명인 것이다. 아랍인들과의 끊임없는 전쟁,
중동지역에서의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유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러한 원칙에 그 뿌리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안전은
아랍세계가 대량살상 무기를 갖게 됨에 따라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1991년 골프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스쿠드 미사일
공격은 1993년의 역사적 타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을
다른 이유에서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는 510만명의 유대인과 410만명의 아랍인 살고
있다. 이 숫자는 2010년에는 역전될 것이며, 2020년에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의 숫자가 각각 670만명과 810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샤론을 중심으로 하는
“대-이스라엘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닥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대인의 대대적인 이주와 팔레스타인의 대대적인
추방이라는 두 가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
방안은 범세계적인 반유대주의가 폭발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고, 다른 방안도 전면적인 중동전쟁과 같은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실현 불가능한 해결책이다.
5. 맺는 말
범세계적인 반유대주의의 폭발은 샤론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중동의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불사하는
것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보수주의 샤론
정권의 현실적인 목표는 팔레스타인의 내분을 조장하고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을 꺾는데 있다. 그러나 1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무력시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아라파트는 건재하고 있고,
자살폭탄테러는 계속되고 있다. 샤론의 정책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 사회는 끊임없는 유혈사태의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깊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전체 인구의 1/4 정도를 차지하는 아랍계
이스라엘인들의 동요에 대한 우려 또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샤론과 대 팔레스타인 강경주의자들은 그들의 대-이스라엘주의
정책의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예측불허의 팔레스타인 사태는
이라크에 무력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의 족쇄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시행정부로부터 ‘정직한’ 중재자의 역할을
기대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이스라엘
정보부 신베트(Schin Beth)의 책임자였던 아미 아야론이
표현했듯이 “이스라엘은 단지 폭력의 언어만을 이해한다”는 데
있다. Alain Gresh, “The Middle East: How the peace was
lost” 인용.
최근 집계에 따르면 제2차 인티파다 기간 중 사망자 수는
2,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있다. 1,5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망자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 “국가테러”의 희생자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무고한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자수를 줄이는 것이 국제사회의 시급한 책무일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