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정치판 비판의 함정
채 만 수
부소장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치판은 지금 그 추악함과
파렴치함을 더해가고 있다. 선친은 일제 식민지 총독부의
검찰관리를 지냈고 본인은 대법원 판사와 감사원장, 총리 등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과 영화를 누려온 명문 이회창
가(家)의 ‘병역비리’를 둘러싼, 높으신 분들의 진흙탕
개싸움이 그렇고, 모든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어떻게든 권력을
유지하려는 민주당 중심의 ‘신당 창당’ 놀음과 그 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파열음이 그렇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암투과정에서 빚어진 두 차례에 걸친 총리청문회와 인준거부
파동도 이 사회의 상류층, 지배계급 문화의 추악함을 드러내주는
한마당 볼거리였다.
“후안무치하다”거나 “파렴치하다”, 또는 “철면피하다”는
말은 너무나도 모욕적이어서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날 저들의 노는 꼴을 보면서, “후안무치”나
“파렴치”, “철면피”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총리 인준 청문회와 인준 거부 파동
두 차례에 걸친 총리 청문회와 인준거부 파동을 보자.
장상 씨의 경우, 어떤 ‘여성계 인사’가 “7개월짜리 총리
하겠다는 욕심에 40년 쌓아온 명예를 하루아침에 날려
버렸다”며 개탄했다는 가십이 있다. 장대환 씨의 경우 그런
가십을 들어본 바 없지만, 그를 ‘아끼고 존경하는’ 그 주변
사람들 역시 충분히 그같이 개탄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총리서리에 임명되자 그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도 “저 사람은 또
무슨 망신당하려고 나섰나?” 하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들 주변의 그러한 개탄은 비뚤어진 것이다. 개탄해야
할 것은 ‘명예’가 “날아가 버린” 사실이 아니라 온갖 위선과
거짓, 그리고 탐욕 위에 쌓아온 ‘명예’ 혹은 ‘명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청문회가 폭로하고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의 삶과 문화를 점철한 그러한 위선과 거짓, 탐욕, 그리고
후안무치한 변명과 은폐, 정당화 바로 그런 것이었지 않은가?
물론 그 위선과 기만, 그리고 탐욕은 그들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상류층 혹은 사회 지도층이라고 부르는 우리
사회 지배계급의 일반적․보편적 문화인 것이다. 장대환
씨만 해도 장상 씨 인준 거부에 난처해진 청와대가 백방으로
물색한 ‘비리 없는 (혹은, 적은) 분들’ 중의 한 분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청와대측은 “앞으로 총리 시킬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겠느냐”며 ‘허탈’해 하고
있단다(ꡔ한겨레ꡕ, 2002년 8월 29일).
물론, 두 장씨의 ‘비리’를 파헤쳐 폭로하고 인준을 거부한, 저
근엄하기 그지없는 의원님들 역시 위선과 거짓, 탐욕에서
자유로운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서는, 나아가
실제로 범죄적일 만큼 위선과 거짓, 탐욕에 몸을 의탁하지
않고서는 여의도 의사당의 의원님으로서의 입신출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이 사회의 정치구조니까 말이다. 실제로 저들이
적어도 정치자금 관련법이나 선거법, 따라서 또 세법 등과
관련하여 사실상 전원이, 정범이든 공범 혹은 종범이든,
범죄자라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그러니, 만일 청문회 현장에 예수가 임석했다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물론 그 말에 슬금슬금 꽁무니를 뺄 만큼 순진한
위인들이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총리 인준 청문회를 통해서 두 장씨의, 그리고 좀
일반화하자면, 이 사회의 소위 상류층, 지도층들의 위선과 거짓,
탐욕의 일면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들 의원님들의, 그리고
언론의 못지 않은 위선과 거짓, 그리고 탐욕 덕이었던 것이니,
위선과 거짓과 탐욕 만세!
이회창 가의 ‘병역비리’
이회창 가의 이른바 ‘병역비리’ 문제로 오면, 저들의 위선과
거짓은 정말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형태로 드러난다.
ꡔ한겨례ꡕ의 정연주 논설위원의 말처럼, 이회창
씨의 두 아들의 ‘병적기록표’ 상에 나타난 수많은 잘못된
기록들이 정말 순수한 행정착오일 확률은 “100억분의 1”,
“1,000억분의 1”보다도 적어서 “사실상 0으로
수렴”하는데도, 그리고 병역면제 청탁과 함께 두 아들의 어머니
“한인옥 여사로부터 2,000만원을 받았다”는 녹음증언이
엄존하고 간접증언 또한 다수인데도, “결단코 결백하다”고
강변하는 파렴치한을 보니까 말이다. 그리고 또한, 5년 전에는
그 병역비리를 공개적으로 고발․규탄하면서 이회창 씨의
대통령 후보 사퇴를 요구하던 자들(한나라당의 서청원 대표,
안택수 의원 등)이 이제는 그것이 정치공작이라며 그 은폐공작을
총지휘하고, 한때나마 재야 민주화운동과 변혁적 노동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자들(이재오, 김문수 등)이 저들의 주구가
되어 광분하고 있는 후안무치한 꼴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우리는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저들을 똑바로 보면서 맘껏
경멸하자.
그런데, 이른바 ‘병역비리’를 둘러싼 저들의 진흙탕 개싸움을
보면서 우리는 그 싸움 속에 숨겨진 함정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름 아니라 몰계급적인 국가주의, 애국주의의 강화가
그것이다.
‘병역비리’를 둘러싼 저들의 개싸움은, 그 ‘비리’ 혹은
범죄를 폭로하여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쪽이나, 그것을
‘정치공작’일 뿐이라며 없었던 것으로 은폐함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모면해보려는 쪽이나, 양쪽 모두 이른바 ‘병역의무’
혹은 징병제를 극히 당연 혹은 신성(?)하고 자연법적인 것으로
전제하면서, 그러한 전제 혹은 사고기반 위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마지못해 그것을 왜곡된 형태와 논조나마
보도하고 있는 거대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그 ‘병역비리’를
사실상 규탄․고발하고 있는 ‘진보언론들’이나
사회단체들도 모두 그러한 동일한 전제 혹은 사고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이 싸움은 그것을 관전하는 대중에게 “병역의무는
신성하다”는 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 관념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은연중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함정이다.
사실 ‘신성한 병역의무’라는 함정은 애초부터 너무나도 넓고
깊다. 그리하여, 예컨대, 최근 등장하고 있는 일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도 그것이 갖고 있는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단지 “대체복무”로 그 ‘거부’를
보상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주의․매국주의가 이 개싸움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혐오하고 규탄하는 것이 이회창 씨의 두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혐오․규탄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의 자식들에게는
‘신성하다’며 강제 징집하여 학대하고, 그리하여 ‘평화시’인
현재에도 연간 700여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내면서도 자신들의
자식들은 갖은 방법을 다 써서 빼내거나 빼내려고 궁리하는
위선과 이중성, 그렇게 해서 빠진 것을 은폐하려는 철면피함,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 살 구멍을 만들어 놓고 “전쟁 한 번
하자”고 떠드는 섬뜩함이다. 저들의 개싸움을 보는 우리의
관점은 국가주의나 애국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어야
하고, 저들 지배계급 인사들의
위선․이중성․파렴치를 폭로하는 것이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계급지배도구로서의 국가 자체의 본질과 기능을 보다
더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개혁 신당?
무슨 ‘개혁세력을 통합’하고, ‘국민을 통합’할 신당?
새삼스럽게 언급한다는 게 역겹기는 하지만, 아무튼 민주당
각파의 ‘신당 창당’ 놀음 또한, ‘꼴보수’는 꼴보수대로,
‘개혁파’는 개혁파대로, 그리고 민주당 밖에서 ‘국민후보
지키기’를 하겠다며 용을 쓰는 있는 ‘개혁주의자들’은 또
그들대로, 정말 가관이다. 하지만, 꼴보수주의자들의 놀음이야
정말 눈곱만큼도 언급할 가치나 필요도 없으니까, 이른바
‘개혁파’ 혹은 두루 ‘개혁주의자들’의 그것에 대해서만
간단히 얘기하자.
며칠 전 MBC의 한 토론 프로그램에는 민주당의 정대철, 정균환,
정동영 등 3정 의원님들이 초청되어 정치가 특유의 고성능 혀를
놀려 ‘신당’의 필요성을 강변․선전했는데, 그러는
가운데 정대철 왈, 그 동안 DJ가 만든 신당이 5개, YS가 만든
신당이 4개, JP가 만든 신당이 4갠가 5개이고, 대~한민국
정치사에 명멸한 정당의 수가 2백 5십 몇 개라든가, 5백 2십 몇
개란다. 바로 저들 ‘정치 지도자님들’께서 얼마나 파렴치하게
거동해오셨는지를, 입만 열었다 하면 “존경한다”는 ‘국민’을
실제로는 얼마나 우습게 보고 우롱해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지표다.
시쳇말로 “그 밥에 그 나물”인데, ‘헤쳐모여! 헤쳐모여!’,
‘신당’을 만들고 또 만들어본들 무어가 달라지겠는가? 정권이
바뀌고 바뀌어도 그 타령인데 말이다.
게다가 이번엔 더욱 가관. 재벌 정주영 가의 귀공자 정몽준을
받들어 모셔오는 것이 민주당 내 주류나 비주류 모두의 내심의
최대의 목표란다. 오~ ‘붉은악마’의 위대함이여! 저들 기라성
같은 (개혁)정치가들의 철면피함이여!
사실, 체제 전체가 그러한 것처럼 오늘날 이 사회의 정치적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위상을 구축하고 유지해온 핵심적 수단은
물론 억압적 폭력이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에서 다양한 허위
이데올로기로써 보완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대는 바야흐로
‘자유민주주의’ 혹은 ‘민주공화정’의 시대, 혹은
최소한이라도 그것을 흉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국민정당’이니 ‘개혁’이니 하는 언설도, 수십 번 수백 번의
‘신당’ 놀음도 바로 그러한 허위의 이데올로기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러한 언설과 놀음을 동원하여 그들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저들 지배적인 정당들의 탐욕스러운 (독점)자본가 계급성
그것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서 저들은 한편에서는 정말 장기간
‘계급’이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면서 노동자․농민의
자주적인 정치적 결사를 감옥과 죽음의 벌로써 억압해 왔고,
고비마다 ‘개혁’이라는 말로 치장하면서 무언가 과거의 잘못된
것과는 절연하는 양 ‘신당’을 만들어 대중을 기만해 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저들은 노동자․민중을 기만하고 그 저항과 투쟁을
압살․억압하여 강고한 착취의 성(城)을 구축한 위에서,
그토록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싸움과 암투를 벌이고 있다. 그
성주 자리를 놓고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그 성주 자리, 즉 정권에는 노동자․민중으로부터
착출하는 거대한 잉여가치의 정치적 처분권이 수반되고, 그
싸움에 그것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 처분권은 비록
제국주의에 예속된 것이고, 따라서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결코
작은 이권이 아니며, 더구나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최대한의
것이다. 그러니 그 싸움이 치열하고 추잡할 수밖에.
저들이 농하는 ‘개혁’이라는 말의 내용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해 왔다. 그리고 때로는 ‘사회정화’니,
‘숙정’이니, ‘정풍’이니 하는 등등의 말들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정부나 민주당 내외의 ‘개혁파’나
‘개혁주의자들’, 혹은 ‘개혁 신당’을 주장하는 자들이
‘개혁의 지속’이나 ‘확대’를 주장할 때 그 현실적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김대중 정권에 의한 ‘개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서, 다름 아니라 오늘날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진보언론’, 수많은 ‘진보
지식인들’이 ‘개혁의 부족’, ‘개혁의 실종’을 개탄하면서
‘개혁’과 ‘개혁 신당’을 촉구하고 있고, 일부는 발벗고
나서고 있다. 그들의 계급적 본성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 아니면,
코미디 혹은 함정일 뿐이다.
그런데, 코미디 혹은 함정은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죄측 어디쯤인가에 역시 ‘개혁’을 외치는 또 한마당의 황당한
코미디, 위험한 함정이 있으니, 저 착취의 성을 허무는 대신에
‘선거’라는 결투를 통해서 그 성주 자리를 차지,
노동자․민중을 위해 멸사봉공하겠다는 기사(騎士)들이다.
진보정당! 그들의 기상(?)이 전혀 가상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기적이 일어나 성주 자리 꿰찬들 그 성에는 여전히
착취와 억압의 깃발이 높이 휘날릴 것인즉, 아~ 이 일을
어찌하랴?
사족 하나, 기적? 옛날 옛적에 그 유명한 헤비급 프로복서
알리와 헤비급 프로레슬러 이노끼 간에 ‘무승부’로 끝난,
‘세기의 격투’라는 흥행쇼가 있었다. 기적이란 정색을 하고
이노끼가 프로권투의 룰대로 싸워 알리를 이기는 것, 혹은
프로레슬링의 룰대로 싸워 알리가 이노끼를 이기는 것, 뭐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