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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운동과 경제주의

현장에서 미래를  제80호
김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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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단계 노동운동:
진단과 모색 III


김혜란
노동조합운동과 경제주의

신병현
노동자 조직과 관료주의

박영균
현 단계 노동운동과 노동자계급 정치의 임무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은 지난 7월호부터 “현 단계 노동운동: 진단과 모색”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 첫 번째에서는 투쟁동력, 투쟁전술 그리고 투쟁평가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었으며 두 번째에서는 현장활동가들의 민주노조운동과 현장활동에 대한 고민을 들어보았습니다.
이번 “현 단계 노동운동: 진단과 모색” 세 번째에서는 좀 더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글들이 실려있습니다. 이번 특집에 실린 세 글을 통해, 흔히들 말해지기는 하지만 명확히 와닿지는 않는 개념들인 경제주의, 개량주의나 관료주의에 대한 이론적 내용들과 함께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계급 정치운동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집 : 현 단계 노동운동, 진단과 모색 Ⅲ


김 혜 란/사무처장


특집 현 단계 노동운동: 진단과 모색 Ⅲ
노동조합운동과 경제주의



민주노총이 4․2 총파업을 사실상 철회시키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현 상황에 대한 우려로부터 노동조합운동의 관료주의, 개량화, 조합주의, 경제주의, 노사협조주의 등을 둘러싸고 심각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대체로 현장에서는 “민주노총과 대기업노조 지도부들이 관료화, 개량화되면서 운동이 활로를 찾지 못하고 개별기업의 울타리에 머물고 있는 것”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배경에 대해서는 98년 현대자동차 투쟁의 실패, 기업별노조의 한계, 임단협 중심의 노조활동, 개량주의 세력의 노사협조주의, 교섭위주의 실리주의 등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양할 뿐만 아니라 용어사용도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부는 대중동력의 부재를 한탄하고(투쟁동력부재론), 대중은 지도부의 무능과 비민주성(관료주의)을 개탄하는 분위기 속에서 투쟁도 협상도 혼미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기존의 노동조합 운동에 대해 심각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활동가가 ‘대중이 변했다’, ‘현장이 안 움직인다’고 하면서 대중의 뒤에 숨거나, 지도부가 눈앞에 보이는 조합원들의 즉자적인 요구를 등에 엎고 연대와 투쟁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발본적인 점검과 반성 위에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지만 사태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본 글에서는 우선 경제주의, 개량주의, 전투적 경제주의, 노동조합주의 등은 무엇을 말하는지부터 정리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경제주의자가 경제주의를 비판하는 괴이한 경우도 있거니와 조합 간부들조차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1. 개량주의(수정주의), 경제주의, 노동조합주의
경제주의는, 1890년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격심한 논쟁이 촉발되면서 레닌이 일반화한 용어인데 당시 레닌이 경제주의라고 본 경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짜르정부가 여전히 폭압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에서 짜르정부를 타도할 가망은 거의 없지만 경제투쟁에서는 중요한 성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의 한푼의 임금이 불확실한 장래의 어느 때에 실현될 사회주의라는 꿈보다는 더욱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주장은 불가능한 혁명사업에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경제투쟁과 목전의 실제적인 요구에 주의를 집중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 조직들을 더 많이 건설하고 보다 강력한 경제투쟁을 해나가는 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와 같이 노동자가 경영자와 정부로부터 경제적 양보를 얻는데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정치투쟁보다 경제투쟁이 노동자계급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칭하여 경제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들의 사상을 표현하는 경제주의는 개량주의의 러시아판 변종으로서 노동운동에서 경제투쟁만을 중시하고 혁명투쟁이나 정치투쟁은 부정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경제주의는 노동조합이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투쟁은 외면하고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과 같은 경제투쟁에만 매달리는 경향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경제주의라고 규정을 내리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어디까지가 경제투쟁이고 어디서부터가 정치투쟁인지 그 경계선이 모호할뿐더러(예를 들어 ‘주40시간 노동’ 같은 것) 요구는 분명 임금인상이지만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탄압으로 공격의 화살이 개별기업의 자본가와 더불어 국가에게도 향해지는 상황이 일반적인 경우, 의식은 정치투쟁까지 나가 있지만 제반의 조건(일례로 한국의 경우 분단상황, 레드 콤플렉스, 파업을 불온시 하는 사회적 통념 등) 때문에 강제된 경제투쟁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 마찬가지의 이유로 정치적 요구는 매우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언급될 수밖에 없는 경우, 지도부의 요구가 곧 조합원 대중이 실제로 느끼고 동의한 것일 수 있는냐는 의문까지 포함하여 단적으로 그 당시의 투쟁을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으로 뚜렷이 구별할 수 없다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87년 대투쟁을 아직까지 ‘전투적 경제주의’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제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정치적 지향성을 갖는 조합운동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이 문제는 이 정도 지적하는 것으로 여기서 잠시 보류하고 일단 개량주의로 넘어가 보자.

‘개량’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사회변혁(혁명)을 부정하면서 점진적인 개선을 통해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상태의 개선을 뜻한다. 보통 전자를 개량주의라고 말하고, 후자를 혼돈을 피하기 위해 개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개량주의가 사회변혁을 부정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를 대립적․적대적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 협조적, 타협적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개량주의는, 1899년 독일의 베른슈타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는데, 그는 혁명에 호소하지 않고 평화적․개량주의적 수단에 의해서도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당시 유럽에서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던 맑스주의 사상을 수정하였다. 이로부터 ‘수정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개량주의’가 사용되는데, 베른슈타인은 경제적 영역에서 노동자가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주요한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꼽았다. 그리고 정치적 영역에서는 사회주의적 의원을 선출하여 의회에 들여보냄으로써, 또 사회주의적 법률을 통과시킴으로써 민주적 사회주의를 향한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고 정치(사회주의 의회)를 통한 경제의 조직화(국유화 등)를 주장한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런 사상을 현재는 통칭 사민주의라고 부른다. 과연 베른슈타인은 옳았을까? 노동조합과 의회정당이 노동자계급의 조건을 점진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사회주의 사회가 올 수 있을까? 독일에서 현재까지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베른슈타인의 사상은 희망사항으로만 남아있다고 할 수 있겠다.

레닌은 개량(개혁)은 사회변혁을 꿈꾸는 혁명가에 의해서도, 점진적 사회진보를 바라는 개량주의자에 의해서도 추구되지만 개혁 그 자체에 만족한다거나 점진적인 변화만을 지향할 경우 지배계급의 권력기반을 침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개량투쟁이 유의미하려면 무엇보다도 지배계급의 권력기초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개량주의적 변화는 지배계급의 권력기초를 그대로 두는 것이며, 그 권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지배계급에 의한 양보일 뿐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변혁(혁명)의 지향아래 추진되는 개량과 개량주의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개량은 내용과 획득 방법이 다르다고 보았다. 1905년 1일 8시간 노동제의 요구도 의회연설과 항의, 청원에 국한되는 행위가 아니라 대중의 실제적 행동을 통해 획득하는 한 찬성했다. 즉, 대중투쟁에 기반하지 않고 의회에서 8시간 노동 ‘법률제정’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상황에서도 적용 가능하다. 당면한 이익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 이익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는 무관하거나 심지어 역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에 반하는 개량투쟁을 심심찮게 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전판으로 사용했던 현대자동차의 완전고용협약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또, 투쟁 없이도 얼마든지 조합원이 손해보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며 조합원이 따라오지 않아도 교섭으로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서울지하철노조의 사례가 있다.
경제주의와 개량주의는 모두 노동조합 투쟁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둘 다 노동조합의 투쟁은 경제투쟁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경제주의는 사회변혁을 정면으로 부정함으로써, 개량주의는 의회주의 정당에게 정치투쟁의 역할을 넘김으로써.
개량주의와 경제주의가 연결되는 고리중 최악의 경우는 경제투쟁을 개량주의적 방식으로 하는 것일 터이다. 만약 어떤 노조 집행부가 임금인상을 조합원의 단결과 투쟁은 무시한 채 오로지 위원장의 정치적 협상력을 통해서 하고자 한다면 그런 집행부는 대중을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어미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듯이 임금인상을 물어다 주면 받아먹는 수동적 대상으로 조합원을 전락시킨다. 이러한 집행부를 우리는 개량주의라고 불러 마땅하다. 노조의 투쟁은 실적을 올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에서는 경영자에 대해, 사회 전체적으로는 자본가 계급에 대해 승리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도 임금인상만큼 중요하다.

노동조합주의는, 경제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을 말한다. 다시 말해, 옛날이나 지금이나 경제투쟁의 주요한 수단인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 임금인상, 노동조건의 개선을 도모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간주하고, 조합원의 단결력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해야 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한국의 노동조합법에는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유지․개선하고 근로자의 복지를 증진함으로써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과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한국의 노동법이 지향하는 이념은 노동조합을 노동조합주의에 묶어두는 데에 있다. 노조의 목표가 경제주의적인 테두리에 머물게 되면 필시 (기업/국가)경쟁력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노조의 기능과 역할을 이익집단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개량주의, 경제주의, 조합주의에 대한 정의는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다. 다만, 용어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면 개량주의, 경제주의, 조합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상으로(사상적 기반으로 보면, 개량주의에서 경제주의가 나오고, 경제주의에서 조합주의가 나왔다고 볼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노-자 간의 계급적 적대관계를 부정하고(탈계급화), 노동조합을 경제투쟁의 범위로 한정시키려 하며(탈정치화), 눈앞의 개량투쟁에 더 큰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2. 87년 이후 한국의 개량주의, 경제주의
1) 운동노선에서 나타나는 개량주의, 경제주의
87년 이후 한국에서의 개량주의는 전투적 조합주의를 비판하는 데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1년 현대자동차노조의 성과배분투쟁이 실패로 끝나자 일부 학계에서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진보적 노사관계론’ 그들의 주장은, 그간의 노동조합운동은 전투적, 비타협적, 정치지향적이었고, 그래서 투쟁일변도적이었는데 합리적 정책대안의 제시 없는 투쟁노선은 국민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것으로써 이제 이러한 노선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극복의 방향으로는 “인간적이며 민주적이며 생산적인 노사관계”를 주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임금인상 중시형 운동을 지양하고 노조의 경영참가 등 전체 노동자를 아우르는 사안의 해결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대표적인 논자로는 김형기).
이나, ‘참여적 노사관계론’ 등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노동조합운동이 고립을 자초하는 투쟁일변도의 투쟁방식에서 벗어나 정책참여적 활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 뒤 이러한 경향은 민주노총이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들고 나오자 ‘사회적 합의주의’ 이들의 주장은 “우리나라 노동조합운동이 새로운 도전을 이겨내고, 전체 노동자 대중과 국민에게 꿈과 희망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으로 사회적 조합주의를 정립해야 한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이해 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국민적 과제에 관심을 갖고 전체 사회의 이익과 국민생활 옹호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으로, 이를 위해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이라는 슬로건 아래 사회개혁을 주요 투쟁과제로 정식화했다. 더불어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 노사정 3자 기구를 통한 정책참가와 경영참가를 중시했다. 그들은 노동과 자본은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시장’을 통한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협조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기업과 시장은 둘 다 중요한 자본주의 경제 구성단위”이기 때문에 “시장원리의 남용을 규제하고, 그 폐해를 고쳐 가는데 노조의 힘이 투여되어야만 고용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으로 압축된다(이상 ꡔ노동사회ꡕ 25호, 51호~55호. 논자로는 김동춘, 김유선, 김영두, 박원순, 박태주 등).
로 부활하고, 비슷한 시기에 김영삼 정부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그 이론적 바탕으로 ‘참여와 협력에 기반한 신노사문화’ 참여와 협력에 기반한 신노사문화는 ‘고능률생산’을 패러다임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와 같은 계급타협 모델을 제시하면서 노동조합이 노개위(김대중 정부 때에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생산에 협력하여 민주적, 인간적, 생산적 노사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와 같은 신노동정책의 목적은 계급타협의 외형을 빌려 국제경쟁력 강화의 논리에 노동개혁을 종속시키는 정책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에 있었다(대표적인 논자로는 배무기, 이원덕).
를 제시하자 정부산하 연구단체, 일부 진보진영의 학계, 일부 노동계가 휩쓸려 들어갔다. 그리고 최근에는 97년 경제위기 사태가 벌어지자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리해고제 등을 둘러싸고 합리적, 노동참여적, 사회통합적 구조조정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어차피 최선(정리해고 철폐)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정리해고 피해최소화)이 현실적이라는 입장으로 노동운동을 압박했다.
노사동반자 관계, 계급타협 모델을 중시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중앙집중적 노조의 존재, 노동자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의 존재, 이 양자 사이의 긴밀한 관계, 강력하고 효율적인 중앙정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보완하는 사회복지제도 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중앙집중적 노조는 지도부의 분열이 없고 최고대표조직이 구성원에 대하여 통제력이 강한 산별노조를 말하고, 정당은 의회주의 정당을, 이 양자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경제투쟁은 노조가 정치투쟁은 정당이(또는 경제투쟁은 개별기업이나 산별노조가, 사회적 투쟁은 총연맹이) 한다는 역할분담론을, 강력하고 효율적인 중앙정부는 노사정위원회의 참여 등으로 구체화된다.
또한, 조합주의적 계급타협 모델을 주장하는 자들은 잘 조직된 이익집단(노조), 민주주의적 기치에 기초한 시민사회의 확고한 형성(천민자본주의 탈피), 중립적이고 효율적인 관리자로서의 정부의 존재를 갈망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권은 총(독점)자본의 정권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권의 대노동운동 정책은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의 저지와 무력화를 겨냥하고 있다.
현실은 계급타협을 추진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힘도, 조직도 취약하다는 점을 애써 외면한다.
노자관계의 적대성을 인정한다면 계급타협은 노동자계급의 조직력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노동자의 소비수요를 증대시켜 실업을 해소하려면(소비수요의 증대->고용증대->실업해소) 실질임금의 상승과 함께 자본가의 태도를 규제․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실질임금이 상승하여 착취율이 저하될 때까지 자본가가 생산이나, 고용을 축소하는 행동을 취할 수 없게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도록 자본가를 강제하려면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힘이 그만큼 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정치적․계급적으로 훈련하고 묶어세우기도 전에 타협의 장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노동자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동참시키는 길이다. 합리적 구조조정론이나, 참여적 구조조정론은 은연중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바람직하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보게함으로써 노동자가 그 개편을 지지하거나 묵인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서, 노동자의 투쟁은 그 피해를 사후적으로 최소화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주장은 노동운동을 자본종속적인 운동으로, 노동조합을 이익집단 수준의 운동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나아갈 방향은 그러한 공세에 모든 수준, 모든 측면에서 저항하면서 위기를 만들어낸 근본원인을 해결하고 사회구조의 발본적인 개편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투쟁을 자주적인, 보다 높은 수준의 계급적․정치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 노동자계급을 사회발전의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상승시키는 길이 바로 현 단계 노동조합운동이 나아갈 방향이다. 김세균, 「노동운동의 탈계급화-탈정치화를 위한 최근의 시도들에 대한 비판」,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98년 10월호.


임금인상 중시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 역시 경제위기 이후 전반적으로 삶의 질과 생존권이 후퇴된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는 사회변혁적 투쟁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행하는 ‘가장 기초적인 최소요구 투쟁’이다. 따라서 설령 노조가 다른 투쟁은 제대로 조직하지 못할지라도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조직해야 하고 조직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할 노조운동의 일차적인 과제이다. 김세균, 위의 글.
그러나 위의 논자들은 조합원 대중의 일상적 경제적 요구와 투쟁을 ‘조합주의’ ‘경제주의’ 등으로 비난하고 도외시하면서, 현시기 대중의 상태를 한 걸음이라도 더 진전시키는 사회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은연중에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면서 투쟁의 힘을 정부와 자본이 양보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시킬 것을 요구한다. 사회개혁투쟁이든 정치투쟁이든 노동자들의 생존을 지키는 경제투쟁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투쟁이어야지 그러한 과제를 비껴간다고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비록 일부 대기업노조에서 개량주의적, 경제주의적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대공장노조가 투쟁을 통해 국가와 자본에 대항하는 가능성과 능력을 키워왔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대기업노동자를 경제적 이기주의로 몰아세우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 노동조합운동을 통째로 경제주의로 몰면서 총노동의 전선이 실종된 상황에서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힘겨운 투쟁을 유지하고 있는 저항과 대항의 힘을 보지 않는다. 쓸데없는 ‘전투주의’라고 비난할 뿐이다. 이러하다보니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계급이기주의적 투쟁이거나, 애초에 불가능한 투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투쟁을 경제적 이기주의로 몰아세우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눈으로 보는 자의 반노동자적 관점이다.

다음으로, 노조운동을 전투적 조합주의 또는 전투적 경제주의라고 비판하는 논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런데, 이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점검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인데,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어떤 자는 급진적 요구투쟁에서 탈피할 것을 지적하는 반면, 다른 자는 경제투쟁에서 벗어나 정치투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이 둘을 뒤섞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례로, 98년에 한겨레21에 ‘노동운동에 쓴약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글에서는 노동자의 생존권적 요구를 계급이기주의이자 현재의 실정(국가적 경제위기)에 맞지 않는 사회변혁적 요구라고 몰아세우면서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적, 정치적 관심으로 초점을 옮길 것을 주문했다. 이 말이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려면 ‘사회변혁적 요구’라는 말을 빼거나 ‘경제주의’라는 단어를 삭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변혁적 요구=전투적 경제주의’가 돼버린다. 어쨌든, 이러한 어려움을 감수하고 그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에 초점을 맞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투적 조합주의를 비판하는 논자들이 말하는 전투적 조합주의란, 전투적 파업투쟁으로 임금인상을 따내는 노선으로 본다. 즉, 파업과 같은 과격한(?) 투쟁방식으로 임금인상과 같은 경제적 요구를 쟁취하는 것이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들이 촉구하는 노선의 전환은 가능한 한 비폭력적 방식으로 임금인상과 같은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사한 주장으로, 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김동춘, 박태주) 그 사례로, 87년 대투쟁 당시 노동자는 군부정권의 청산과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표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작업장에서의 자신의 행동은 “외부세력의 사주를 받지 않은” 순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을 논거로 들면서 이러한 경향을 전투적 경제주의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전투적이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온건하였고, 오히려 정치적 구호를 내거는 것을 기피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까지 이어져서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은 탈정치성, 이념적 온건성, 비타협성 등이 문제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제출하고 있는 것이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이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이 과연 그러하였는가는 둘째치고서라도,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의 핵심은 노자동반자 관계를 전제로 한 국가 수준에서의 노조의 정책 개입력의 증대이다. 개량주의와 경제주의가 기본적으로 1) 노-자 간의 계급적 적대관계를 부정하고, 2) 노동조합을 경제투쟁의 범위로 한정시키려 하며, 3) 눈앞의 개량투쟁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들은 1)은 받아들이되 2)와 3)은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이 개량주의가 아닌 것처럼 은폐한다. 하지만 경제주의와 개량주의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는 본질적인 원인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모순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개량주의자도 정치투쟁을 할 수 있고, 경제주의자도 높은 수준의 개량투쟁을 지향할 수 있다. 핵심은 이러한 투쟁이 어떠한 방향하에 무엇을 위한 투쟁이냐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경제주의자가 ‘전투적 경제주의’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을 경제주의라고 비판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2) 현장투쟁에서 나타나는 개량주의, 경제주의
2001년 7․5 파업철회, 2002년 4․2 파업철회의 배경에 자동차 노조가 있었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대기업노조는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 그러나 한국의 노조운동을 이끌어야 할 이러한 노조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나타난 모습은 분명 우려할 만한 것들이다. 물론 이런 경향이 대기업에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오, 자동차노조에서 최초로 보여진 것도 아니다. 다만, 대기업노조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그동안 민주노조운동을 선도해 왔던 중요성 때문에 사례를 거기에서 드는 것이다.
97년 기아자동차의 부도와 함께 당시 노조집행부는 회사살리기 운동을 전개했다. 98년에 현대자동차노조는 38일간의 격렬한 투쟁 끝에 직권조인의 형태로 정리해고에 합의했다. 그 뒤 2000년에는 비정규직 도입을 전제로 완전고용협약을 체결하였으며, 2001년 노조위원장 선거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성과급문제가 선거 쟁점이었다. 99년이래 서울지하철노조는 임금인상, 승진 등을 전제로 구조조정을 수용하였으며, 아직까지 노사협조에 기반한 상생(相生)전략을 주장한다. 기타 사업장에서도 고용만 보장된다면 노사협조도, 무분규선언도, 비정규직 도입도 마다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경제위기 이후 노조투쟁의 쟁점이 고용안정으로 옮아가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사태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무조건 짤라내고 본다는 식의 김대중 정부와 자본의 무자비한 구조조정 때문이었다. 게다가 실패 이유야 어떻든 총연맹의 파업투쟁도, 단위 사업장의 파업투쟁도 조합원들은 열심히 동참했으나 결과적으로 패배하면서 자본의 정리해고는 막을 수 없다는 패배의식과 함께 노조도 나의 고용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마당에 개인적으로라도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노조를 압박한 결과이다. 결국 조합원으로서는 여기서 밀리면 완전히 길바닥에 나 앉을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노동자 의식은 점점 더 회사가 잘돼야 고용도 보장되고 성과급도 나온다는 조합주의 의식에 갇혀져버렸고, 이러한 의식은 지도부가 조합원의 즉자적 요구에 계속 부응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기업별노조로 쪼개진 상황에서 교섭력이 강한 노조가 이러한 조합원의 정서에 영합하면서 눈앞의 이익을 쫓게되자, 기왕의 고임금층만이 더욱 기득권을 유지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조합원은 또다시 독점적 지위가 지속되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는 모습으로까지 나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처지가 좋고, 조합에 가입해 있는 사람들만의 고용안정으로 귀결됨으로써 노동자 내부를 분할시켜 계급적 통일성 해체하는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많은 노동자에게 빡빡한 삶 속에서 개인적 살길을 향해 달려가게도 하지만, 동시에 현존하는 사회․경제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조합원이 생산량이 증대해도, 거꾸로 물량이 줄어도 고용불안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라고 토로하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이미 조합원들은 경제투쟁만으로는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인하고 있다. 오로지 보다 높은 임금과 보다 안정된 일자리만을 위한 운동은 탈출구 없는 악순환에 그들을 묶어 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3. 개량주의는 왜 발생하는가
이 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노선에서 나타나는 개량주의와 현장에서 나타나는 개량주의가 왜 발생하는 지에 대해 앞서 지적한 내용을 포함하여 다시 한번 간략히 요약해 보았다.

① 노동자계급의 관점 부정
자본주의 체제의 대립적․적대적 노자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
② 서구 사민주의 전략의 수용
노조는 경제투쟁, 정당은 정치투쟁을 담당하는 것으로 기계적으로 분리
③ 노동조합 자체의 한계
노동조합만으로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전화시키는 조건들, 노동자를 빈곤과 실업에 빠지도록 운명지워 놓은 조건들을 제거할 수 없는 현실
④ 정치운동의 빈약
80년대 이후 정치조직이 사라지면서 노동운동이 전적으로 노동조합에게 일임되었던 역사의 반영
⑤ 고성장-저실업의 경험
일정한 물질적 양보는 노조운동 내에 경제주의적 경향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를 제공
⑥ 투쟁의 실패
패배의식 속에 계급타협적 운동노선이 투입될 여지를 제공
⑦ 기업별노조체계
투쟁력이 강한 노조와 약한 노조간에 불균등 심화
⑧ 국민적 호응에 대한 과도한 집착
노동자 요구와 국민적 요구를 분리하려는 시도
⑨ 신자유주의를 옹호했던 시민단체와의 연대
노조를 이익집단화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귀결
⑩ 개량주의적 조합지도자의 출현
전체 노동자의 요구와 주장을 집행한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자본과의 협상과 타협을 명분으로 계급적 갈등을 절충

우리는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노동자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자본가와 엄청난 싸움을 통해서만 획득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획득물에 안주하는 순간 역사의 반동은 시작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는 어떻게 안주해왔는가? 노동조합 속으로 모든 투쟁을 몰아넣는 것으로, 노동조합운동 속에서 자본주의 자체의 변혁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그러한 투쟁을 조직하는 활동을 주춤하는 것으로 역사의 반동을 허용했다. 따라서, 현단계 노동운동은 투쟁의 정치주의적, 경제주의적 양편향과 노동자정치의 개량주의적 지도라는 질곡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런데, 대중조직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이러한 투쟁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중심에 서는 정치조직의 건설이 필수적이다.


4. 개량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원칙
이제 마지막으로 현장투쟁에서 개량주의가 발호하는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개량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단련시켜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1) 소수 노동자의 조건만을 개혁하는 방식은 노동자의 단결을 해치고, 노동자계급의 통일성을 붕괴시킨다. 2) 개혁이 투쟁으로 획득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지거나 거래에 의해 얻어지게되면 그 개혁은 노동자 의식의 타락을 가져온다. 3) 개혁을 다른 요구와 맞바꾸는 방식으로 하게 되면 획득한 개혁에 대해 자부심도 사라지고, 맞바꾼 요구는 어느 순간 다시 쟁취해야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해결해야 할 과제와 힘이 두배로 느는 결과를 초래한다. 4) 노조간부들이 노동자들의 경제주의에 바탕을 둔 즉자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순간 조합원은 손에 잡히는 이익이 없으면 더욱더 움직이지 않는 행동관성을 갖게 된다. 5) 자본가는 내어준 개량을 언제든지 되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획득한 개혁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순간 언제든지 빼앗긴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투쟁은 1)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장될 수 있는 방향으로, 2) 광범위한 노동자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3) 노동자 계급의식을 고양시키는 목적 하에, 4) 협상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쟁취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다시 압축하자면, 노동조합의 투쟁은 누구를 위한 요구인가가, 어떤 방식으로 획득되었는가와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의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지금 민주노조운동은 상당히 어려운 시기에 처해있다. 그러나, 파업철회, 월드컵 열풍 속에서도 6만여 조합원이 임단협을 쟁점으로 파업에 돌입하였다. 더 이상 ‘총파업을 남발한다고 질책하면서 파업위주의 투쟁노선을 변경시킬 것’을 충고하는 썩은 소리에 귀기울이지 말자. 오히려 앞으로의 총파업은 800만명에 이르는 비정규직이 제외된 상태에서 생산에 타격을 주지도 못하는 파업이 아닐 수 있도록 온힘을 기울이자.

사회는 운동으로 변화하고, 운동은 사람이 한다고 말한다. 계급운동의 전망아래 노동조합을 자리잡게 하는 운동도 무엇보다 실천하는 활동가를 요구한다. 그 실천하는 활동가는 아마도 자기 자신과 더불어 옆의 동지를 함께 변화시키는 투쟁에 돌입한 사람일 것이다. 한/노/정/연

2002-10-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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