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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생태학

현장에서 미래를  제81호
존 벨라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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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본질
자본주의와 생태학

* 2002년 6월 15일에 시카고에서 열린 사회주의 2002년 회의(Socialism 202 conference)에서의 연설문임.

존 벨라미 포스터




사회적 자본관계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모순적인 것이다. 이들 모순은, 비록 자본주의의 내적 운동법칙에서 유래하지만, 일반적으로 체제 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현상들로까지 확장되면서, 자본의 무자비한 확장의 결과로 전체 생물계와 그 내부 모든 것의 본래의 모습을 위협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그리하여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뜨거운 논쟁의 주제로 되어 왔다. 이 논쟁의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는, (1) 자본주의 하에서 생태위기는 반드시 경제위기를 초래하는가, 그리고 (2) 자본주의 사회 심장부의 생태적 모순은 어느 정도인가이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 바는 맑스로 돌아감으로써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맑스의 생태 분석에 있어서 관건적 요소의 하나는, 내가 ꡔ맑스의 생태학ꡕ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의 물질대사 균열론(theory of metabolic rift)이다. 인간 생존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자연적 조건들로부터의, 자본주의 사회 속의 인간의 물질적 소외(material estrangement)를 파악하기 위해서 맑스는 인간과 대지 간의 물질대사 관계의 균열이라는 개념을 채용했다. 그러한 균열이 표현되는 한 방식은, 토지로부터 대량의 주민의 분리로부터 성장한 자본주의 하에서의 도시와 농촌의 극단적인 분리 속에 있다.
19세기의 농업화학자들, 특히 리비히(Jutus von Liebig)는 식품과 섬유의 도시로의 수출을 통한―질소, 인, 칼륨과 같은―토양 영양소의 손실이 토양 영양소의 순환을 교란하여 자본주의적 농업을 잠식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도시들을 쓰레기로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적 농업이었던) 영국의 고도농업은 이성적인 생산형태를 이루고 있었다기보다는, 토양에 미치는 그 효과 때문에, 리비히에 따르면, “약탈 체제(robbery system)”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이렇게 쇠퇴하는 토양의 생산력에 대해서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처음에는 유럽대륙으로부터 골분(骨粉)과 페루로부터 구아노(새의 분비물)을 대량으로 수입하는 것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합성비료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합성비료는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갈수록 광범위하고 보다 복잡한 물질대사의 균열이 일어나서, 오늘날의 농업과 공업의 특징인 자연-사회관계의 심각한 엇물림을 초래하게 되었다.
맑스는 이러한 물질대사의 균열이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상징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자주 인용되고 있는 글에서 그는, 자본주의가―토지와 노동자라고 하는―영구적인 부의 원천의 생명력을 약화시켰다고 말했다. 물질대사 균열의 문제는 단지 토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맑스는 지속가능성―동일한 혹은 “개선된” 상태로 후세대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대지(earth)의 보존과 필요한 경우의 “회복”―에 관한 설명을 전개하여, 토양 영양소의 순환, 오염, 위생상태, 살림 벌채, 홍수, 사막화, 기후 변화, 산업 폐기물의 재생, 종의 다양성, 생물종의 상품화, 그리고 기타의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 진화론에 관한 진지한 연구를 통해서 그는 공진화(共進化)의 개념으로 나아갔다. 맬더스(Malthus)와의 갈등은 그로 하여금 “과잉인구”(맬더스가 아니라 맑스가 사용한 용어)의 (자연적이 아닌) 역사적 원천을 고려하게 하였다. 원시적 축적에 관한 분석을 통해서 맑스는 자본주의의 구성상의 모순으로서 토지로부터의 노동자들의 분리를 지적했다. 그의 경제학 비판은 일체의 생활의 상품화와, 사용가치에 대립한 교환가치에 기초한 끝없는 축적의 지배적 역할을 강조했다. 16세기 독일 농민전쟁의 혁명적 지도자인 토마스 뮌처(Thomas Mntzer)를 인용하면서 맑스는 주목했다. “물 속의 물고기, 대기 속의 새, 땅 위의 식물 등 모든 피조물들이 재산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역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된다”(Mntzer, Collected Works, p.335; Marx and Engels, Collected Works, vol.3, p.1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태사회주의자들의 써클에서는 맑스가 제공한 풍부한 생태학적 통찰력을 강조하기보다는, 맑스로 하여금 완벽한(full-fledged) 생태학적 맑스주의를 전개시키지 못하도록 한 그의 분석의 주요한 단점들이라고 규정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풍조가 되어 왔다. 제임스 오코너(James O'Connor)가 편집하는, 생태사회주의자들의 대표적 잡지인 ꡔ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Capitalism, Nature, Socialism)ꡕ에서, 앨랜 루디(Alan Rudy)는, “맑스 생태학의 한계는 … 맑스가 ‘물질대사의 균열’을 자본주의의 위기 경향에서의 중요한 계기로서 이론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적은 오코너에 의해서 보다 완벽하게 주장되어 왔는데, 맑스는 농업 내부에 “생태 파괴적인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러한 생태 악화가 자연적 생산조건의 손상으로 인해 “특정한 유형의 경제위기, 즉 자본의 과소생산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그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하여 맑스는, 생태학적 비용의 증대가 어떻게 수익성의 감소와 축적위기에 기여했는가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추론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의 분석은 그리하여 오코너가 “생태적 맑스주의(ecological Marxism)”이라고 명명한 개념틀에 미치지 못했다. Alan Rudy, “Marx's Ecology and Rift Analysis,” Capitalism, Nature, Socialism 12 (June 2001), p. 61; James O'Connor, Natural Causes (New York: Guilford Press, 1998), pp. 160, 165, 173. 여기에 인용된 오코너의 서술과 같은 맥락에서, 루디는 맑스에 가했던 동일한 비판을 나(J.B. Foster)에게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이 명확히 하는 것처럼, 나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오코너 자신의 이론적 기여는―자본의 생산조건 훼손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대해서 특정한 형태의 경제위기를 만들어내는가, 혹은 오코나가 “자본주의의 제2의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을 논증하면서―맑스가 여기서 하지 못했던 것을 하려는 시도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잉여가치율의 상승과 그 결과 발생하는, 잉여가치의 혹은 상품과 용역의 판매를 통한 이윤의 실현에 대한 장벽과 결부된 “제1모순” 혹은 경제위기 경향에 시달려 왔는데, 이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 때문이라고 그는 논한다. 이러한 제1모순이 수요측에서 (즉, 이윤 실현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경제위기를 의미한다.
그런데 오직 이 제1모순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가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조건의 잠식과 결부된 제2모순을 경시해 왔다고 오코너는 논한다. 그는 맑스의 분석으로부터 유용하게도 세 유형의 “생산조건”을 끌어낸다. (1) 인간 노동력의 재생산과 결부된 인적 생산조건, (2) 외적 자연적 생산조건 (산림, 유전, 관개, 새들, 등), 그리고 (3) 일반적 공적 생산조건 (즉, 인공적 환경, 예컨대, 도시적 기반시설을 포함한 도시들)이 그것이다. 이들 모든 요소로 하여금 생산조건이게끔 하는 것은 그것들은 자본에 의해서 생산되지 (혹은 전적으로 생산되지) 않고, 폴라니(Karl Polanyi)의 용어를 빌면, 오히려 “의제상품(fictitious commodities)”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는―아무리 그것이 사실상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취급하고 싶어도―인간이나 심지어 그 노동 능력조차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적 자연 또한 생산하지 않는다. 인공적 환경은,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으로 가치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공간적 시간적 요인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본은 그리하여, 일정 정도 자연적 희소성을 의미하고 경제체제가 본래대로 혹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들지 않은 형태로 유지할 수 없는 바의 자연적 생산조건에 그 생산을 의존하고 있다. 이들 생산조건의 악화는, 비용 (혹은 공급) 측면에서 이윤을 압박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용을 증대시킨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제2모순”이다. 조엘 코블(Joel Kovel)은 그의 책 ꡔ자연의 적(The Enemy of Nature)ꡕ에서, 오코너와 동일하게, 자본이 갈수록 커다란 규모로 자신의 생산조건을 악화시키는 데에서 일어나는 생태위기를 “철의 필연성”으로서 언급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자연적 생산기반을 오염시킴으로써, 혹은 간접적으로는 환경으로 방출된 비용을” 다시 내면화함으로써 “이러한 악화는 수익성 자체에 모순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라고 그는 언급하고 있다. Kovel, The Enemy of Nature (London: Zed Press, 2002), pp. 39-40.

오코너는 제1모순을 “전통적 맑스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언급하는 한편, 그가 “생태적 맑스주의 이론(ecological Marxist theory)”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러한 “제2모순”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다. 제1 및 “제2” 모순은 양자 모두 경제위기 경향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양자 모두 역사의 현시점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은 비용의 증대에서 기인하는 “제2모순”이, 그리하여 공급측의 경제적 모순이 현재 지배적임을 암시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리하여 자신의 생산조건을 손상시키는 데에서 생기는 자본의 과소생산과 결부된 경제위기 경향에 빠져 있다. 이러한 경제위기 형태는, 오코너의 용어에 의하면, 체제의 내적 혹은 계급적 적대보다는 외적 혹은 자연적 장애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주장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것이 현대의 급진적 사회운동의 성장과 결부되어 있는 방식이다. 제1모순은 계급에 기초한 노동운동과 결부되어 있는데, 아직도 존재하고는 있지만, “제2모순”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에 비해 쇠퇴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운동에는 세 가지의 일반 유형이 있으며, 각각 다른 유형의 생산조건 잠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오코너는 주장한다. 육체의 정치(politics of the body)와 관련된 페미니즘과 같은 운동은 인적 생산조건의 잠식에 의해 발생했고, 본래의 환경운동은 외적․자연적 생산조건의 잠식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도시운동은 일반적․공적 생산조건의 잠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제2모순” 명제의 위력과 그것이 사회주의적 (그리고 비사회주의적) 사상에 대해 영향력을 갖는 이유가 이제 명확히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생태적 희소성과 경제위기, 사회변화를 위한 새로운 운동의 성장의 관련을 간명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그 본래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이러한 접근법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자본주의의 “제2모순”을 생태적 맑스주의의 규정적 명제로 언명함으로써 생태학계의 사회주의적 분석가들을 어떻게 분열시켜 왔는가에 대해서는, “ꡔ맑스의 생태학ꡕ 혹은 생태적 맑스주의”라는 제목으로 ꡔ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ꡕ지에 실린 최근의 논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ꡔ맑스의 생태학ꡕ이라는 용어는 표면상 내 책의 제목을 가리키고 있지만, 비판가들이 제출한 주장의 본질은, 그 책에 기술되어 있는, 생태학에 대한 맑스의 여러 기여는 다름 아니라 그것들이 오코너의 “제2모순”에 의해 대표되는 바와 같은 “생태적 맑스주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맑스는 생태위기가 어떻게 자본주의에 축적위기를 낳는가를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그의 분석은 불완전하고 비체계적이며 발전되지 못했다고 지적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여 루비가 표현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의 생태위기의 역할에 관한” 맑스의 “분석은 불충분한” 채 남아 있다. Alan Rudy, contribution to “Marx'x Ecology or Ecological Marxism,” Capitalism, Nature, Socialism 12 (September 2001), p. 143.

그러나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이란 반드시 자본주의하에서의 경제위기론으로 직결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맑스주의적 생태 분석이 발전된 견해로 이해되는 범위는 그것이 특정 경제위기론을 만족시키는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는가? 문제가 이런 식으로 틀지워질 때 슬며서 기어들어 오는 일정한 경제주의와 기능주의가 있다. “제2모순” 개념의 모든 요점은, 생태 훼손이 일단 자본주의에 경제위기로 형식을 바꾸기만 하면, 직접적으로는 생산조건의 잠식과 결부되어 증대하는 생산비용을 억제하려는 자본의 시도를 통해서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체제로 하여금 외부적인 것들을 내부화하도록, 즉 자본이 외부화를 추구해온 사회적 환경 비용을 지출하도록 강제하는―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을 보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미는―사회운동의 시도를 통해서, 피드백 메커니즘이 작동된다고 하는 것이다. 명백한 가정은, 생태적 원인에 기인하는 경제위기가 좌파에게 어떤 기회, 말하자면 승산이 있는 기회―나아가 좌파로 하여금 계급에 기초한 노동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간의 동맹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피드백 메커니즘은―적어도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는―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독일 녹색당이 말하는 것처럼, 마지막 나무가 베어졌을 때에야 체제는 더 이상 먹을 돈이 없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고―그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Elmar Altvater, “Ecological and Economic Modalities of Time and Space,” in Martin O'Connor, ed., Is Sustainable Capitalism Possible? (New York: Guilford Press, 1994), pp. 88-89 참조.
가장 난잡한 생태 파괴의 한 가운데에서(자본을: 역자) 축적하는, 환경의 악화로부터 (예컨대 폐기물 처리산업의 성장을 통해서) 이윤을 버는, 그리고 인간사회에게도 세계의 대부분의 생물들에게도―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지구를 계속 파괴하는 자본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심화되고 있는 생태 문제의 위험성은 그 체제를 재조직하게 하는 내적 (혹은 외적) 규제 메커니즘을 그 체제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심각하다. 산업순환에 비견될 수 있는 생태순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가까운 순환이론은 폴라니(Karl Polanyi)의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의 이론인데, 이 이론은 “의제상품들”(생산조건들)을 규제하려는 자본주의의 시도와 결부된 규제-탈규제라는 정치적 순환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이중운동은 하지만 “제2모순” 이론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고 있다.

환경에 가해진 손상은 그것이 주로, 본질적으로 그 체제와 합체되어 있는 자연적․물리적 환경의 요소들을 정의상(定義上) 포함하는 바의 생산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믿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아마존의 산림은 자본에게 단단한 목재와 기타 자원을 공급해 왔을 터이지만, 그 산림의 대부분은 최근까지 자본주의의 생산조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외부에 존재해 왔다. 열대밀림에 살고 있다고 생각되고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멸종 위협을 받고 있는 모든 생물종의 50퍼센트는 대부분 전지구적 축적과정에 합체화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대부분은 등록되지 않은 채, 아직도 과학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구상의 생명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하면서 엄청나게 엷어져온 오존층의 경우를 들면,―마치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바의 생명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단지 경제의 전제조건이기라도 한 것처럼―그것을 억지로 생산조건의 분석에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것은 명백히 오류일 것이다.
이들 모두는, 생산조건과 자본주의의 “제2모순”에 초점을 맞추는 주장에는, 모든 것을 특정 경제위기론이라고 하는 폐쇄된 상자에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생태위기의, 그리고 심지어는 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충격의 전체적인 범위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일정한 자본주의의 환경문제 배제 경향(맑스가 말했듯이, “나중에야 알게 뭐냐”는 주의 하에 움직이면서 전체 생물계를 거대한 쓰레기통으로 이용하고 동시에 어느 정도는 한나의 생태체계에서 다른 생태체계로 도망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구가 많은 부분 “자본에 주어진 무상의 선물”로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것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어떤 전망도 없는데, 이는 자본주의가 많은 면에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환경보호국(EPA)이 발행한, 지구 온난화에 관한 부시 행정부의 ꡔ2002년 기후 행동 보고서(Climate Action Report, 2002)ꡕ를 참조하면,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을 예증할 수 있다. EPA는 지구 온난화로 대표되는, 생명과 생활조건에 대한 위험을 인정했지만, 미국에서 환경 훼손은 산속의 눈이 녹는 것 등에서 가장 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업의 생산조건과 관련된 곳에서는 지구 온난화가 실로 전반적인 농업생산성을 증대시킬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환경 훼손과 경제적 생산조건의 훼손 사이에는 이렇게 분명한 연관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표준 경비․수익 분석을 거쳐서), 지구 온난화의 정도를 감소시키는 조치들을 취하기보다는―왜냐하면 이들 조치들은 생산비를 증대시킬 것이기 때문에―지구 온난화가 진행되는 대로 거기에 적응하는 정책을 합리화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당연히, 환경 파괴를―그것이 자연이나 사회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은 비용으로 되더라도―자동적으로 자본 자체의 비용 증대로 전화시키는 어떤 자연적 피드백 메커니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운동이 자본주의를 “규제”함으로써 그 훼손을 억제하려 한다 해도, 그것이 비용 측면에서 이윤을 심각하게 압박하여 자본으로 하여금 개혁하도록 강제하리라는 아무런 보증도 없다―혹은, 그것이 환경 파괴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사실상 제공하지 않을 것이란 아무런 보증도 없다. 그리하여, 기본적으로 그러한 원인에서 가까운 장래에 생기는 경제위기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이렇게 생태학적으로 유도된 경제위기론에는 경험적인 문제 역시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논리적으로, 자연적 희소성과 결부된 원료비용 및 기타 비용의 증대가 이윤을 잠식하고 경제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윤율의 저하경향에 관한 고전적 이론에 반영되어 있는 것처럼, 이러한 요소는 19세기의 축적위기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자연적 희소성과 결부된 그러한 비용을 낮추는 것은 자본에게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비용이 오늘날 체제 전체에 심각하고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라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맑스가 그 시대에 이미 지적했던 대로, 석탄 자원의 소진이 마침내 석탄의 비용을 증대시킬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에 생산은 자주 에너지 비용의 저하로 증대된다. Karl Marx, Theory of Surplus Value, Part 3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1), p. 368. The Economist 지에서 지적된 것처럼, “현재 확인된 석유 매장량은 30년 전보다 많다. …석유 부족에 대한 두려움이 투자를 자극하여 보다 개선된 석유 생산방법과 보다 효율적인 엔진을 개발하도록 했다.” The Economist, “Working Miracles: Can Technology save the Planet?”, July 6-12, p. 13.

오염을 감소시키는 문제 또한 자본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지우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업 경영자들에 대한 설문조사에 의존하고 있는 정부의 평가는 환경 비용의 증대에 염려하고 있지만, 이러한 유형의 증거는 환경 비용이 현실적으로 총 이윤을 압박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아주 신뢰할 만한 토대는 아니다―그리고 이윤을 압박하고 있는 임금 비용에 대한 기업 경영자들의 끊임없는 불평 이상으로 심각하게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 실제로 나는―시간 부족 때문에 여기서 길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자본주의의 주요 경제위기 경향은 아직도 착취율의 증대이고 따라서 이윤의 증대와 잉여가치 실현의 불가능성―오코너가 제1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생태적 맑스주의를 규정하는 한 방법으로서의―자본주의의 “제2모순” 개념이 갖는 또 다른 난점은 그것이 일단 한번 들어가면 피하기 어려운 이중적인 경제 전망을 우리에게 강요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엔 두 가지 모순(둘 모두 경제위기 경향이다)이 있어서, 하나는 내적이고 주로 계급투쟁으로 나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이고 주로 생산조건의 잠식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모순은―제1모순에서 생기는, 전통적이고 계급에 기초한 운동과, “제2모순”에서 나오는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두 형태의 사회운동을 만들어 낸다. 자연히 이는 두 유형의 운동간의 두 모순의 결합력에 기초한 동맹을 암시한다. 그러나 “제2모순”이 현재 지배적이고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운동이 보다 더 활기차고 중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분석과 전략에서는 계급에 기초한 운동은 종속적인 역할을 하는 경향을 띤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생태적 맑스주의는 분명히 노동에 기초한 계급투쟁을 부차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는 접근법이다. 이런식으로 그것은 운동을 (기존의 분열에 또 하나의 이론적 덮개를 더하면서) 인위적으로 분열시키고 희망의 장을 축소시키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고 있는 코블이 ꡔ자연의 적ꡕ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생태사회주의적 변혁(ecosocialist transformation)에는 어떤 특권적 작인(agent)도 없다”―계급의 봉기가 필수적인 관건인 것은 아닌 것이다(p. 218). 제2모순 명제에 대한 이와 비슷한 비판에 관해서는, Paul Burkett, “Fusing Red and Green,” Monthly Review 50 (February 1999), pp. 47-56 및 그의 Marx and Nature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9), pp. 193-97 참조.

여기서 나의 목표는 “제2모순” 이론의 중요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나 그것이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태문제의 중요한 측면들을 조명했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이런 방식으로 유용하게 바라볼 수 있는 부분적인 위기들이 존재한다. 또한 나는 생태적 사회주의에 대한 제임스 오코너의 커다란 공헌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내 의도는, 자본주의가 제기하는 생태적 모순의 전체 규모를 탐구하기에는 너무나 경제주의적이고 너무나 협소하고 너무나 기능주의적이며 너무나 경제적 이중론으로 기우는―그리고 물론 너무나 비변증법적인―, 맑스주의적 생태문제 분석을 전개할 위험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맑스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오코너의 “제2모순” 이론이 시사하는 식의 생산조건의 잠식의 예를 19세기에서 찾고자 한다면, 토양으로부터 그 영양소를 약탈함으로써 야기된 농업의 위기보다 더 좋은 예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토양의 위기는 184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인식되고 있었고, 오직 제멋대로 처음에는 토지에 살포할 골분을 찾아서 유럽의 전장과 지하묘지를 파헤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나중엔 페루에서 대량의 구아노를 수입하는 것을 통해서 해결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최초의 합성비료들이 개발되어 맑스 시대에 이미 사용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질소 비료가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맑스는 그리하여 이러한 토양의 위기가 발생시킨 생태 비용의 증대와 축적에 대한 장애를 강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맑스는 그렇게 하는 대신, 이러한 토양의 위기가 반영하고 있고, ―합성비료의 예처럼, 기술이 잠정적인 치료법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그의 용어에 의하면 자본주의하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보다 거대한 생태 문제인 물질대사의 균열을 강조했다.
맑스는 자신이 인식한 생태문제가 어떻게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는가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절박한 것으로 보았던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에 대한 직접적 영향을 논하지도 않았다. 맑스는 결코 생태 비용을 자본주의 하에서의 경제위기의 잠재적인 원천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는 물론 잘못일 것이다. 예컨대, 이윤율의 저하경향을 다루면서 그는 원료비용의 증대를 일반적인 수익성 위기의 잠재적 요인으로 보았다. Michael Lebowitz, “The General and Specific in Marx's Theory of Crisis,” Studies in Political Economy, no. 7 (Winter 1982), pp. 9-13 참조.
그렇게 하는 대신 이 분야에서 그는 주로―그리고 갈수록―지속가능성의 문제에, 그리고 인간사회와 자연의 물질대사의 (인간 노동의 조직을 통한) 합리적인 규제에 관심을 가졌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하나의 중심 문제였다.
실로, 맑스와 엥겔스가 생태문제를 명확히 부르주아 사회의 협소한 지평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당면한 목표도 초월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도 바로 그들이 도시와 농촌간의 적대적 관계의 해소를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열쇠로서 무척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현존의 운동을 너무나 뛰어 넘는 미래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전락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조심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푸리에(Fourier)나 기타 일부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처럼― 지속가능한 사회를 창출하려는 시도에서 자연의 소외를 다룰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늘날 생태 위기는 반자본주의적 봉기에 관한 우리의 전망 속에서―맑스가 인식하지 않았고 못했던 정도로―보다 거대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의 생태학적 제 특징에 관한 우리의 전반적인 전망은 사실상, 도시와 농촌간의 적대적 관계의 해소라는 발상을 통해서, 그리고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공동체적 사회에 기초한 지속가능한 생산을 통해 물질대사의 균열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통해서 맑스 자신이 전망했던 것보다 더 급진적이지 못하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ꡔ유토피아로부터의 뉴스(News from Nowhere)ꡕ에서 도시와 농촌간의 관계를 재조직한다는 발상을 발전시켰을 때, 그는 알게 모르게 맑스의 정신에 아주 가까웠다.
맑스가 그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생태적 모순에 관한 우리의 분석을 어떤 특정한 경제위기론과 합체될 수 있는 것에 제한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경제위기론은 과도하게 강조될 수 있고, 심지어 물신화될 수 있다. 일례를 들자. 오래 동안 다양한 종파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다양한 특정 경제위기론을 내세움으로써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경향을―즉, 주변부를 착취하려는 체제 중심부의 충동을―설명하려는 시도에 매달려 왔다. 그런 모든 견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내가 보기에, 요점을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는 이런 저런 경제위기의 산물이 아니고 (또한 그 중요성이 그것이 다시 경제위기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있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이 역사적 전개된 것처럼, 이윤추구 그 자체처럼, 바로 그 체제에 필수적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제국주의는 지구화하는 힘처럼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산물이고, 맑스 자신이 제국주의를 다룬 한에서 그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였다. 경제위기는 어떤 경우에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경제위기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제국주의의 전체 실상을 보려고 한다면, 이는 그 핵심적인 본질을 흐릴 뿐이다.
생태 악화의 경우 우리는 자본주의의, 제2급이 아닌, (그리고 단지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닌) 제1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환경 악화는 (대부분 그에 의존하는) 이윤 추구 자체처럼 자본주의에 필수적이다. 또한 환경문제를 대체로, 그 중요성이 그것이 자본주의에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정도에서 나온다는 의미의 경제적 프리즘을 통해서 봐서도 안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했던 것처럼, 노래하는 새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그것이 직접적으로 자본주의나 그 생산조건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체제의 무자비한 팽창과정에서 그들의 서식처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정당하게도 이러한 현상을 경제위기와 연관시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들 무방비한 작은 생명들”이라고 부른 것들이 파괴되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멈춘 것도 아니다. Rosa Luxemburg, Letters (Atlantic Highlands, N.J., Humamnities Press, 1993), 202-03 (Luxemburg to Sonja Liebknecht, May 2, 1917).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 하에서는 그러한 파괴를 줄일 수 있도록 경제가 조직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경우 변화를 요구하는 그녀는 논거는, 일관되게 유물론적이었지만, 경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맑스주의적 분석의 궁극적인 힘은 결코 주로 그 경제위기론이나 심지어 그런 식의 계급투쟁 분석에 있지 않았고, ―변증법적이고 끊임없이 우연적인 과정으로서만 진실로 이해될 수 있는― 인간 및 자연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 속에 보다 깊게 존재하고 있다. 이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주요한 소외된 지성의 산물인 사회과학과 자연적․물리적 과학간의 분열을 비환원론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결론에 대신하여, 다윈 이후 가장 위대한 진화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던 스티브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최근의 사망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굴드는―그가 자신의 최후의 저작인 ꡔ진화론의 구조(The Structure of Evolutionary Theory)ꡕ에서 말한 것처럼―그의 아바지의 “무릎 위에서” 맑스주의를 배운 맑스주의자였다. 그는 또한 유물론자였고, 의식적인 변증법적 사상가였고, 구상화와 환원론의 비판가였고, 진화 이론가였고, 생태문제의 분석가였고, 자연 및 인간 존재의 거대한 우연성의 옹호자였으며, 인간의 자유의 옹호자였다. 그야말로, 내가 보기에,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생태적 맑스주의자였다. 한/노/정/연

번역/노동과환경연구팀

2002-1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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