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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타이어노동조합 민주화 투쟁 그 성과와 과제

현장에서 미래를  제8호
박응용

현 ◦ 장 ◦ 통 ◦ 신

한국타이어노동조합
민주화 투쟁
그 성과와 과제


박 응 용 (한국타이어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 의장)


한국타이어 노무관리상태와 노동조합

한국타이어는 1946년 일제가 만주 침략을 위해 군수기지공장으로 만든 조선타이어를 미군정의 적산불하를 받아 효성그룹 계열사로 설립된 공장이다. 영등포(신도림)공장 준공 이후 역대 정권들의 갖은 특혜 속에 성장을 하다가 1979년 연간 2300만개의 레디알 타이어 생산능력을 갖춘 대전시 대덕구 신탄진 공장을 준공하였다. 그 뒤 한국타이어는 전남 광주의 금호타이어와 함께 국내 타이어 생산과 판매, 수출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여 왔다.
규모는 노동자(사무, 관리직 포함) 6,000여명, 연간 매출액 8,700억원, 설비자산 5,000억원이며 공장은 영등포, 인천, 신탄진(대전), 금산 등지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데 그 중 대전공장이 주력공장으로 생산의 70%를 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타이어 노무관리상태는 군대의 병영을 방불케 하였다.
공장장(상무이사)이라는 사람이 생산현장의 청소가 불량하다고 노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산과장, 부장 등을 폭행하고 끌고 다니는 정도이다. 그러니, 현장노동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상사에게 얻어 맞은 과장, 주임, 반장들의 노동자들에 대한 폭언, 폭행은 일상화되어 근로기준법은 물론 산재, 강제잔업, 강제출근 등 노동자들의 모든 권리가 박탈된 전근대적 노무관리가 뿌리갚게 자리잡고 있는 사업장이다.
한국타이어 노동조합은 1962년에 한국노총 산하인 전국화학연맹 한국타이어 지부로 출발하였다.
그후 정치적 억압과 자본의 전근대적 노동통제로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87년 전국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조의 민주적 개편을 위한 움직임이 끊임없이 있어 왔다.
또한 노동조합의 운영과 체계는 전체 조합원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노조가 운영되도록 소수 대의원 대회가 총회를 대신하고 있다. 물론 위원장은 대의원 대회에서 간접 선출되고 영등포, 인천, 신탄진, 제원 지부의 지부장은 놀랍게도 위원장이 임명한다.
조합비는 약 3억에 달하는데 지난 95년 6월투쟁 때 창고 속에 감춰졌다 발견된 조합비 사용영수증에 의하면 조합비가 각 기관의 뇌물, 회사측 간부들의 뇌물 비용으로 사용되고 한발 더 나아가 그들 요구에 따라 충실하게 노동통제 비용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동안 수 십년간 적립되어 온 수 십억에 달하는 각종 적립금이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갔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타이어 노조민주화 투쟁의 배경과 쟁점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에 대한 노력은 설립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오다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그 무수한 시도가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국타이어 어용노조의 존립근거가 되는 자본과 그것을 엄호하는 국가권력 즉, 총자본의 노동자 지배와 수탈을 하나의 고리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투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하나의 투쟁을 배치하더라도 총체성에 근거하여 투쟁을 배치했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90년 정련과에서 발생한 산재(사망)사고를 계기로 일어났던 한울회 투쟁이 그 좋은 예이다. 자본의 집중적 탄압으로 일부는 해고되고 일부는 회사측 관리자로 변절되었으며 수많은 사고자와 권고사직자를 내면서 투쟁은 좌절되었다.
좌절의 또다른 이유는 노조민주화 투쟁을 이끌어 가고 헤쳐나가는 주체인 현장 노동자 대중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작업현장과 생활 속에서 생기는 노동자 대중의 절박한 요구인 근로조건 개선과 경제적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여 투쟁을 조직하고 올바른 때에 투쟁을 배치했어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요구는 그 중요성에 비하여 낮은 강도로 제기되었다. 그래서 조합원 대중의 철저한 신뢰와 동의를 구하지 못하는 고립된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본의 철저한 탄압과 감시, 통제로 인해 90년 이후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은 소위 3무 - 무권리, 무조직, 무투쟁의 조건속에서 대전공장의 경우 폭행, 폭언, 테러, 산재은폐, 강제근로 등으로 말미암아 3,000천명의 조합원 중 연 1,000여명이 사표를 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무법천지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무수한 패배의 쓰라린 경험을 피맺힌 교훈으로 삼고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은 오뚜기처럼 일어섰다.
마침내 94년 10월 지금까지 싸워 온 동지들은 지난 시기의 투쟁과 패배의 경험, 40년에 걸친 노예노동, 현 어용노조의 성격, 현장 노동형제들의 절박한 요구, 지역적, 전국적인 국가권력의 개입과 통제의 형태들을 총체적으로 검토하여 한국타이어 조건에 알맞는 조직과 투쟁을 세워 나가기 시작하였다.
94년 11월 7일 충남 공주에서 지금까지 투쟁하여 온 대전공장 동지 16명이 모여 각 현장의 조직과 투쟁요구들을 점검하기 시작하고 향후 조직의 성격과 위상, 그리고 구체적 투쟁의 방법 등에 합의하였다.
첫째, 지금까지 벌어진 한국타이어의 모든 투쟁과 조직경험을 일반화하여 이를 근거로 전체 한국타이어에서 제기되고 있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지도할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한다.
둘째, 의식적, 조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조의 민주적 개편요구는 현실성이 없으므로 그에 선행하여 현장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인 강제근로, 산재은폐, 폭력, 테러에 투쟁을 집중한다.
셋째, 기만적이고 노동귀족적인 기존 어용노조를 유지시키는데 강력한 지원세력인 자본과 권력에 공세적 투쟁을 전개한다.
이상의 결론에 모두가 동의하였고 1995년 1월 18일 ‘한국타이어 노동자 대회’를 개최하여 성공적으로 치루게 되면서 이것이 옳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우선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노민추)를 건설하기 이전에 투쟁을 통해 이를 위한 조직적, 의식적 준비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러한 원칙 아래 1995년 2월 12일 마침내 한국타이어 ‘95년 선거대책본부’를 결성하고 공주에서 결정된 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95년 선거대책본부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 절망과 회의에 빠져 있던 한국타이어 주력공장인 대전공장 노동자들에게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하였다.
투쟁은 위력적이었다. 바람 한 점 없이 철통같던 현장에 회사측의 비인간적 노무관리, 폭행, 테러, 산재은폐, 강제노동를 규탄하는 유인물이 하얗게 덮였다. 이 작업은 처음에는 해고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해고자들의 정문투쟁은 완강하였다. 죽을 힘을 다해!
강제노동과 비인간적 대우에 시달려 오던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에게 이 투쟁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결정적 계기로 되었고 그동안 침묵하던 언론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에 실리고 텔레비젼 뉴스에 비치면서 사회문제화되자 결국 대전지방 노동청은 한국타이어 사장 홍건희 외 18명을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회사측에 대하여 강제근로, 산재처리 회피, 폭행 등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면서 32건에 달하는 시정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어떤 투쟁도 조합원의 요구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어떠한 조직도 조합원의 요구와 이를 탄압하는 적에 대한 총체적 파악과 규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이 투쟁을 통해서 얻은 자신감으로 이후 민주파 대의원이 노동조합 내부로 진출하는 성과를 얻었고, 이를 탄압하는 자본에 대한 응징으로 18일 간에 걸쳐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핵심적 쟁점인 노조활동 보장과 위원장, 지부장 직선제를 전면에 내걸고 드디어 6월 투쟁이 터져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많은 요구(노조민주화 요구)를 담아낼 조직건설이 투쟁을 통해 요구되고 있었다.
95 한국타이어 대의원 선거대책본부는 대의원 선거 직후 모든 투쟁의 성과와 경험을 집중하고 총화하여 1995년 6월 12일 드디어 ‘한국타이어 노조민주화 추진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위원회는 한국타이어 노동자의 요구와 노예노동의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왔던 노조의 어용화, 귀족화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투쟁에 들어갔다.
첫째, 70년대 노무관리방식의 노예노동을 막아내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정통성과 민주성이 보장되도록 조합원들의 지지와 참여로 위원장, 지부장을 직선으로 선출하여 강력한 집행부를 건설하여야 한다.
둘째, 이러한 집행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사협조적인 노동귀족주의에 근거한 규약, 단체협약, 취업규칙이 철폐되어야 하고 노조활동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규약, 단체협약, 취업규칙을 쟁취해야 한다.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출범 일주일 후인 6월 21일 한국타이어 노동자 착취의 밑뿌리를 뒤흔드는 6월 농성투쟁이 터져 올라왔다. 노동자를 노예나 일하는 기계쯤으로 여기는 그 도도하던 한국타이어 자본가들은 마침내 무릎을 꿇고 아직은 비록 형식적이고 부족하지만 노조활동 보장, 징계철회 등 7가지를 보장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의 전개 과정과 특징

‘선대본’과 노민추의 강력한 공세적 투쟁에 일시적으로 허둥거리던 자본과 권력기관, 어용집행부는 전열을 정비하고 대대적이고 총체적인 탄압공세를 시작하였다. 투쟁에 어떤 형태로든 관계했던 조합원을 회유, 협박하면서 그들은 사업장 전체를 지옥으로 몰아갔다.
자본은 가장 먼저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꺾기 위해 대우조선, 동국제강, 포철에서 악명을 떨쳤던 보안사 출신의 민주노조 파괴 해적 부대인 ‘다물단’ 교육을 전 조합원에게 무려 32억을 들여가며 차례대로 실시하였다.
이 땅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과 민주적 투쟁을 빨갱이로, 불순분자로 몰아 그 씨를 말려 왔던 악마의 이데올로기가 머리를 쳐든 것이었다. 회사측은 임금을 파격적으로 인상하였다.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 많은 떡고물을 던져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본은 기존의 어용집행부로는 조합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노조를 개편하되 개량화하였다. 조합원들의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 되어 투쟁이 집중되었던 대상을 개별화시키기 위해 주력공장(대전)의 지부장과 총무부장을 재빨리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前) 지부장과 총무부장 보다 더 교활하고 더 효과적으로 조합원들을 속이고 무력화하기 위한 것으로 정낙훈을 지부장으로 박창모를 총무부장으로 앉혀 놓으려고 협잡질을 진행하였다.
자본은 현장을 보다 효과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노사협력팀, 인력관리팀 등등 괴물들을 설치하고 수 십년간 이 땅의 노동자를 짓밟아온 정보기관원, 노동청, 노동위, 검찰 등의 행정관료들과 예전 느슨했던 관계를 더욱 긴밀히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타이어 노조 민주화 투쟁에 국가권력이 직접, 간접으로 개입하면서 탄압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노동위원회는 사측에 의해 자행된 부당 노동행위를 접수받고 그 특유의 매끄러운 혓바닥과 본질을 전도시키는 능숙한 실무능력을 발휘하여 앞에서는 사측의 잘못을 인정하며 뒤에 가서는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를 정당화시키고 노사 협조주의에 기초한 화해와 합의를 종용하였다. 교활함과 비열함, 그리고 잔인함으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왜곡시켜 결국 노민추가 제기한 16건의 부당노동쟁위 구제신청을 모조리 기각시켰다.
노동청은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투쟁이 완강하고 사회여론화되자 시정명령을 내리고 홍건희 외 18명을 입건, 송치하면서도 결국 불구속으로 처리하면서 사측과 어용 집행부가 빠져 나갈 방법을 그때그때 알려주는 교활하고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결국 그들은 고통과 절망을 박차고 일어나 투쟁하는 수 천명의 조합원들을 앞에서는 달래는 척 하면서 뒤로는 회사측과 어용노조에 힘들이지 않고 짓밟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가 막힌 탄압방법으로 양비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경찰과 검찰이 79년 대전공장 설립 이후 오랜 세월 자본에 의해 저질러졌던 탈법적 노동자 탄압을 그동안 묵인, 방조해 온 것 하나만으로도 이는 범죄 행위에 해당된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탈법적이고도 파렴치한 노동범죄와 노동자를 고통과 신음 속에 헤메도록 한 범죄사실이 무려 60여건이나 고소, 고발되었는데도 검찰과 경찰은 기가 막히게도 이들을 무혐의 처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검찰과 경찰은 평화적으로 농성중이던 박희태, 노주호 동지를 연행 , 구속하였고 노민추 의장을 수배하며 18명의 노민추 동지들을 재판에 회부시켰다. 한국타이어 5,000 조합원들은 이제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무엇이, 누가, 어떻게 우리들을 노예노동의 사슬에 묶어 놓고 있었는가를.
자신들의 튼튼한 배후 조종자였던 자본과 권력이 총공세로 나오자 어용집행부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중앙집행위원회란 것을 열어 노민추 대의원과 조합원 11명을 제명시키고 전체 대의원 64명 가운데 대전공장 대의원 42명이 결의하여 확정한 단체협약(안)을 돈 몇푼 더 얻어내는 굴욕적 단체협약으로 둔갑시켜 짓뭉개버리고 일방적으로 날치기 통과시켜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다.
우리의 5,000 조합원과 노민추 동지들은 이 엄청난 총자본의 탄압속에서도 투쟁의 의지를 꺾지않고 있다. 왜 그럴까?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첫째,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은 평균근속년수가 10년 이상이어서 회사측의 전근대적 노무관리로 인한 노예노동의 실상을 뼈에 사무치게 겪고 있었고 그 속에 기생하는 기만적 어용노조 집행부의 비열함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95년 한국타이어 노민추 투쟁이 폭발적일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마른 솜에 물 스며들 듯 투쟁공간을 통하여 약 800권의 노동법 해설서가 읽히고 30만장 가까운 선전물이 투입되었으며 6월 농성기간 중에 각종 집회에 참가한 인원은 3000명을 넘어섰다. 즉 노민추의 건설은 억압과 수탈, 기만에 가득찬 한국타이어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노동자들의 사고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둘째, 노민추 회원 어느 누구도 구속이나 공권력의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탄압은 이를 지켜보고 있는 5,000 조합원을 스스로 각성시켜 이 투쟁이 단순히 돈 몇푼 올리거나 어용노조를 개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배후에는 엄청난 물리력과 권력을 동반한 억압기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고 바로 이들을 투쟁의 첫번째 대상으로 삼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자각을 갖게 되었다.

투쟁의 결과, 그 성과와 과제

한국타이어 95 선대본 그리고 노민추 투쟁이 남긴 성과는 한국타이어 노동조합 역사상 처음으로 조합원 중심의, 전체 조합원의 공감과 동의 속에 투쟁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 취약지구란 오명을 안고도 40년 노예노동과 30년 어용노조의 지배구조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들은 결국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는 공권력 개입을 요청하였고 이것은 그만큼 투쟁이 폭발적이었고 강력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투쟁과정은 5,000 조합원의 뇌리 속에 깊숙히 자리잡혀 있다. 총회소집투쟁, 설문조사투쟁, 어용집행부 찬반 투표에서 전체 90%가 동의할 정도로 노조민주화는 필연적인 대세임을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다.
한편 지역적으로 - 제조업을 중심으로 - 대전 충청지역에서는 아래로부터 즉,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노조 운동과 투쟁을 묶어세운 구심사업장이 뚜렷이 없었다. 노동운동의 취약지구, 불모지 충청지역의 노조운동이 전국의 노동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진군하기 위해서는 구심이 필요하다. 구심이 없었을 때는 이러한 문제는 그 만큼 더디게 올 것이란 사실이다.
또한 대전지역의 경우 한국타이어 투쟁이 대전지역 노동운동의 한계와 과제를 극명히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투쟁이 터져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견해와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협소한 이해로 인하여 적절한 연대투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엇이, 어떠한 요인이 대전지역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아 왔던가는 한국타이어 투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가 한국타이어는 물론 대전지역 전체 민주노조운동진영의 과제로 남아 있다.
전국적으로 87년 노동자 대투쟁, 전노협 건설 그리고 투쟁을 통한 민주노총 건설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남기는 투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한국 노동운동의 최대 과제인 민주노총 강화와 산별노조건설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아직도 반민주적 어용노조 진영이 건재를 과시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취약지구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민주노총 가입 노동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기만적이며 반민주적인 어용노총 아래서 민주노조를 갈망하고 있다. 이 중요한 문제를 전체 민주노조진영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한국타이어 노조 민주화 투쟁이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모든 노동자들은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선진적인 민주 노동자의 조직적 단결체인 민주노총의 뜻과 염원이 명실공히 전국 1천만 노동자와 함께 호흡하는 범노동자적 운동으로 그 폭과 깊이를 더해 갈 수 있으려면 취약지구 어용노총 산하 조직에서 투쟁의 깃발을 올린 한국타이어 투쟁의 시사점과 염원을 담아내야 한다.
앞으로 한국타이어 투쟁은 험난한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5,000 조합원과 전국 천만 노동자의 가슴속에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염원이 살아있는 한 한국타이어 투쟁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취약지구와 어용노총 산하의 그 어떤 노동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끝으로 한국타이어 노조민주화 투쟁 속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성과는 총자본의 엄청난 탄압과 그에 맞선 투쟁 속에서 노동자만이 꽃 피울 수 있었던 고귀한 동지애였다. 그것은 내 동지가 구속되고 해고되며 탄압받는데 두 눈 멀쩡히 뜨고 당할 수 없다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려오는 노동자의 처절한 절규이며 사랑이었다. 내 형제들이 저임금, 강제노동과 비인간적 무권리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수수방관하는 것은 노동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살을 뜯는 죽음보다 못한 치욕이라는 가슴 벅찬 동의였다.
한국타이어 노조민주화 투쟁은 총자본의 완강한 탄압을 뚫고 전진하고 있다. 구속의 철창 속에서, 수배의 거리에서, 해고의 정문 투쟁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우리는 절대 무릎꿇지 않을 것이다. 결코 과거의 노예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주면 주는대로 시키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기계이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끝내 우리 자신의 노동조합을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건설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지역이 취약하고 어용노총 산하 노조가 많다는 멍에를 쓰고 있는 대전 지역 노동형제들 또한 함께 투쟁의 길을 달려 나갈 것이다. 한/노/정/연

1996-02-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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