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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정국과 보수(제도)정당의 이합집산

현장에서 미래를  제82호
송태수



2차 결선투표제 도입을 위하여
송 태 수/ 연구부위원장


대선정국과 보수(제도)정당의 이합집산



1. 들어가는 말
대선정국을 맞아 주기적 관행처럼 굳혀진 제도정당의 이합집산과 ‘철새 정치인’의 ‘민족과 국가’ 혹은 ‘역사’와 같은 거창한 단어로 포장된 탈당-입당의 변을 경험하고 들어야 했다. 우리는 또 다시 보고 듣고 있다. 정치권의 선거 전후의 이합집산은 선거는 물론 정당정치구도 전반을 일거에 뒤바꾸는 이변을 속출했다. 그 결과 한국의 정당사는 ‘합당과 분당의 변주곡’이고, 80년 이후 이는 ‘3 김’의 대통령을 향한 집념의 실현 과정이었다.
“합당과 분당의 변주곡”으로 점철된 한국 정당사를 80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간략하게 살펴보고, 지난 97년 대선과 올 대선국면의 전개양상을 비교하면서 제도정당과 정치인들의 이합집산 행태와 그 원인을 알아본다. 이러한 합당, 분당, 통합, 분열 등의 이합집산의 원인을 선거제도의 문제로 좁혀서 분석한 후, 대안으로 대선에 2차 결선투표제를 도입할 필요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2. 한국정당사: 합당과 분당의 변주곡
선거에 즈음한 보수정당의 이합집산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85년 2․12 총선(제12대)이다. 당시 정치권은 5공화국 출범 직후인 81년 11대 총선에서 창출된 집권 민정당과 민주한국당(민한당), 한국국민당 3당구도였다. 여기에 민추협을 주축으로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난 인사들이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총선을 25일 앞둔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을 결성해 무려 67석을 석권하면서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35석을 얻은 민한당은 ‘관제야당’ 시비와 잇단 의원들의 탈당으로 해체되었다.
1980년 이후 대선국면에서 정당의 이합집산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DJ), 김영삼(YS), 김종필(JP)이 각자의 출신지역을 기반으로 야권분열 상황을 연출하면서 시작되었다. YS와 DJ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통일민주당은 분열, DJ는 자파 세력을 이끌고 나와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결국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한 통일민주당과 호남에 기반한 평민당, 그리고 충청권을 텃밭으로 한 JP주도의 신민주공화당으로 찢겼다. 이러한 3김으로의 분열 속에서 치러진 87년 대선은 군부 등 기득권 층과 대구․경북에 기반 한 민정당의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어 35% 대통령이 출현했다. 그러나 지역당 구도는 88년 4․26 총선(13대)에서 이들 3개 야당에게 지역에 기반 한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여소야대’ 국면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집권 민정당은 여소야대 국면 타개를 위해 90년 제2야당으로 입지가 축소된 YS의 통일민주당 세력과 제3야당인 JP의 신민주공화당을 규합한 ‘3당 합당’을 통해 정계개편을 이뤄내고(민주자유당: 민자당), YS는 이에 대한 대가로 대권을 보장받았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김정길 의원 등은 3당 합당을 거부, YS와 다른 길을 선택하여 DJ가 이끄는 통합야당인 민주당에 몸을 담는다. 그리고 1992년 3월 24일의 14대 총선은 민자당과 민주당, 그리고 같은 해 연말의 대선을 겨냥해 창당된 통일국민당(국민당; 총재: 정주영)의 3파전으로 치러진다. 국민당은 ‘3김’ 정당으로의 분열, 다시 대권을 향한 목적으로 추진된 YS의 민자당 입당 등 ‘3김’ 중심 정치권의 야합에 실증을 느낀 유권자층의 지지에 힘입어 37석을 획득, 제2야당의 위치를 다졌다. 1992년 말에 치러진 대선에서 YS는 대권을 잡는 데 성공했고, 패배한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96년 4․11 총선(15대)을 앞둔 시점에서 또 한 차례 대규모 이합집산이 있었다. 대선 패배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DJ의 정계복귀가 그 원인이었다. 1995년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DJ가 정계복귀 움직임을 보이자 민주당의 이기택 대표는 대표직 사수로 배수진을 치며 저항했다. 이부영, 제정구, 유인태, 박계동, 이철 의원, 노무현, 김정길 전의원 등 민주당 잔류파와 힘을 합쳐 당을 사수했다. 결국 DJ는 김영배, 김상현, 이해찬, 김원길 의원 등 지지세력을 이끌고 분당을 감행, 1995년 9월 6일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야당의 분당사태는 15대 총선에서 YS가 이끄는 집권 신한국당에게 139석이라는 안정의석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최초의 수도권 승리라는 영예도 동시에 안겨줬다. 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데 그쳤고 민주당은 지역구에서 단 9명만 당선되었다. 이부영 의원을 제외한 이철, 유인태, 박계동 등 민주당 잔류파 현역의원들이 대거 낙선했다.


3. 대선 정국에서 제도정당의 이합집산: 1997년 그리고 2002년
1) 1997년 대선
2002년 겨울 정치권의 모습은 1997년 말 대선을 앞둔 제도권 정치세력의 이합집산과 너무나 닮음 꼴을 띠고 있다. 1997년 여름 이회창은 신한국당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7월 말 아들 이정연의 병역비리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데도 이를 반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신한국당 내 민주계 내에는 “이회창으로는 안 된다”라는 입장이 비등해졌다.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이들 민주계는 ‘반(反)DJP연합론’ 등 명분을 쌓다가 이회창 축출시도-탈당 등의 수순을 밟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물론 다른 변수의 개입 등으로 탈당까지 가지는 않았다. 이인제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대권의지를 굽히지 않고 국민신당을 결성,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독자 출마를 강행했다.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 후보에게 10% 안팎의 차이로 뒤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초 민주계의 집단탈당의 위기에 이른 신한국당은 전․현직 청와대 출신 인사들이 국민신당을 돕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청와대 신당 지원설’이 며칠 동안 정치권을 뜨겁게 달군 결과, 11월 중순 이후 이회창 후보는 지지율 2위 진입을 실현하는 대약진을 이룬다. 상승세를 타고 있던 이회창 후보 지지율은 불어닥친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 한파로 급제동이 걸리자 서둘러 ‘옷을 바꾸어’ 입었다. 11월 21일 신한국당(대표: 이한동)과 민주당(총재: 조순)이 이회창 대통령후보 겸 명예총재, 조순 총재, 대표 이한동 체제의 한나라당으로 합당한 것이다. “한나라당 창당이 애국적 결단이었음을 12월 18일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사에 당당히 기록하자”는 당 총재의 변에서도 확인하듯이 대선을 겨냥한 이합집산의 결과로 한나라당은 태동되었다.

2) 2002년 겨울
2002년 말 대선정국에서의 정당 및 국회의원의 이합집산을 살펴보자. 50일에 걸친 ‘16부작 주말 드라마’의 연출 끝에 국민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 추이는 ‘홍3’ 비리로 급락했다. “노무현으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비등해지면서 지난 10월 14일 전용학 이완구 의원이 한나라당에 전격 입당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민주당과 자민련에서 탈당한 의원은 24명이다. 민주당을 탈당한 김원길(서울 강북갑), 박상규(인천 부평갑) 의원이 11월 26일 오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중 7명은 한나라당에 입당해, 한나라당은 의석수 147석의 거대야당이 되었다. 민주당은 92석, 자민련은 10석이다. 불과 한달 사이에 한나라당 의석은 7석이 늘었고, 민주당은 20석, 자민련은 7석이 줄었다. 의원직을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 제명을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탈당 계열에 낀 전국구 의원 3명까지 민주당의 전국구인 최명헌, 장태완, 박상희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출당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전국구의원의 경우 자신이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하지만 당에서 출당조치를 내리면 의원직은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함하면 27명이나 자발적 ‘철새’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민주당 탈당사태의 첫 테이프를 끊은 전용학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이회창 후보의 집권을 통한 정치 안정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라고 생각한다”라며 역사적 소명으로 자신의 행태를 포장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의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자민련 소속이던 이양희, 이재선 의원이 지난 11월 15일 한나라당 입당 기자회견을 하면서 밝힌 소감이다.
그러나 이들이 여론의 뭇매를 각오하면서까지 ‘철새’가 되는 길을 선택한 진짜 이유는 차기 국회의원 당선을 위한 편한 방편의 선택에 있다. 이들 ‘철새족’ 24명을 지역별로 구분해보면 서울 5명, 경기 9명, 인천 1명 등 수도권 출신이 15명으로 대다수이고, 그 다음으로 충청권이 7명이며, 강원․전북이 각각 1명이다(시사저널, 2002년 1월 28일). 이들 철새 정치인들이 속한 지역구의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24개 지역구에서 지난 6․23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자치단체장 27명(3개의 지역은 복수의 시․군으로 이루어진 지역구)의 소속 정당은 한나라당에 17명, 민주당 3명, 자민련 7명이다. 즉 한나라당 후보 당선률이 70% 이상인 것이다. 광역의원의 분포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지역구에 할당된 광역의원 74명 가운데 한나라당 공천으로 당선된 사람이 52명(70.2%)이나 된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각각 10명씩만 당선시켰을 뿐이다(무소속 2명). 다시 말해 이들 지역구에 철새 정치인들의 지역기반이 급속히 붕괴된 것이다. 따라서 대선과 같은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차기 당선에 유리한 조건의 당적으로 옷을 바꿔 입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당적변경은 지역기반의 변화 외에도 집권여당 소속 의원이 될 수 있다면 플러스α(알파)로 누릴 수 있는 이점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중 초선의원은 9명, 재선 10명, 3선 이상 5명이다. 즉 의원들의 ‘철새’ 행각은 초․재선과는 무관하게 일반적인 현상인 것이다.

3) 후단협과 제3세력
지난 10월 4일 민주당 내에는 반노무현(반노) 및 비노무현(비노) 진영 소속 의원 34명이 모여 “대선 승리를 위해 후보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탈당 불사를 외치며 후보단일화 세력규합에 나섰다. 이른바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단협의 애초 계획은 노 후보측에 단일화를 압박하면서 노 후보측이 끝내 거부할 경우 단계적으로 탈당한다는 것이었다. 후단협의 출범으로 민주당은 노무현 후보의 선대위와 단일화 세력으로 사실상 양분됐다. 후단협을 중심으로 민주당에는 탈당 도미노 사태가 벌어졌다. 11월 4일 후단협 소속 의원들 11명이 집단 탈당한 데 이어 8일 원유철 의원, 다음날에는 사무총장인 유용태 의원과 장성진 송영진 의원이 추가 탈당했다. 노․정 후보 단일화가 급물살을 타고 추진되자 더욱 좇기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민주당을 탈당하고 중부권 신당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진 이인제 의원과 정균환 총무 박상천 최고위원 등 호남 중진 4~5명이 가세할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다(뉴스위크, 2002년 11월 20일).
이들 후단협의 상당수 의원들은 독자적인 신당 추진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대부분은 노무현 후보불가론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정몽준으로 단일화될 경우 이 진영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았었다. 즉 정몽준 후보로 단일화될 경우 ‘중부권 신당파’들은 국민통합21과 당대당 통합을 거쳐 대선에 참여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들의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이한동 후보가 주도하고 있는 하나로 국민연합, 국민통합21과 민주당 일탈세력을 묶어 사실상 4자연대 통합신당을 만들어 수도권과 충청권은 물론 호남권 인사들까지 망라하는 전국정당의 창당이었다. 이 구상 밑바탕에는 대선 및 2004년 총선을 겨냥한 면밀한 포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인제 의원 주변에서는 텃밭이었던 충청권을 무대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퍼져 나왔다. 충청권 인사들은 오래 전부터 이인제의 결단을 채근해왔다. 마침내 12월 1일 이인제는 “이번 불법도청 파동을 지켜보며 여론조작을 일삼는 부패한 패권추구세력의 국정농단을 더 이상 방관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민주당 탈당을 선언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번 대선에서 부패한 세력과 급진 과격세력의 집권연장 기도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시련을 맞게 될 것”이라는 망언까지 했다.
이인제가 미적거리자 일부 인사는 전용학 의원의 뒤를 이어 한나라당 입당을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 충청권 인재풀(pool)은 이미 포화상태이며 기존 조직과 마찰을 우려한 한나라당 지도부가 시기 조율을 명분으로 이들의 발걸음을 차단했다. 일부 인사들은 한나라당에 입당하더라도 2004년 공천을 보장받기 힘들다는 얘기까지 한다. 자민련 잔류 의원 및 이한동 전 총리 등 무소속 의원들과 연대, 대선 후 정계개편과 차기 총선을 겨냥한 독자 신당창당은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차선책인 셈이다.(주간동아, 2002년 11월 28일)
현재 곱지 않은 국민여론이 이들 후단협 의원들의 행동을 자제하게 할 뿐이다. 단일화가 급물살을 타면서 제3세력의 입지는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 여론 역시 부정적이다. 한 여론조사 결과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후보단일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며 탈당한 데 대해 공감하느냐’는 질문에 77.8%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이인제 의원이 중부권 신당을 창당하는 것에 대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응답이 87%나 되었다고 한다.(시사저널, 2002년 11월 28일) 압도적으로 반대여론이 높기 때문에 수면에 떠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후보 단일화를 위한 탈당이라는 애초의 명분을 접고 신당을 창당할 경우 ‘경선 불복’ 세력의 집합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실리를 좇는 이들의 행보에 대해 철새행각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보를 결정하는 것은 대선이 아니라 바로 2004년 총선인 것이다.
‘마약’과 같은 국회의원 금배지야말로 선거를 전후한 시기, 특히 대선국면마다 주기적으로 불어오는 이합집산 광풍의 원인이다. 한 중진 의원의 말을 들어보면 그 ‘마약’이 어느 정도 좋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관이나 청장 같은 자리는 1년 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4년은 기본이고 8년, 12년 동안 장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골치 아픈 일도 많지 않고 장관처럼 책임을 질 일도 없다. 국회의원처럼 좋은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시사저널, 2002년 11월 28일) 이런 좋은 자리를 위해 정치권을 떠도는 사람이 수백 명에 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의 가장 큰 특권은 법제의 권한이다. 이들의 의지에 따라 특정 계급․계층이나 지역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고, 담당 분야의 정책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면책특권과 불체포 특권을 누리며, 자주적인 활동을 보장받는다. 최근 면책특권은 대통령 후보 저격수를 자처하는 일부 의원들의 충성도구로 악용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불체포 특권에 대한 비판은 더욱 거세다. 15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서상목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해서 열여섯 차례나 ‘방탄 국회’를 열었다. 국회는 ‘범법자의 피신처’가 된 것이다.


4. 선거제도와 정치행태
대선 혹은 총선을 전후 한 시기 정치인이나 정당 이합집산의 원인은 무엇보다 제도정당체계가 국민정당(Catch-All-Party) 중심이고 이념정당이 부재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거의 모든 국민정당의 정책은 거의 비슷하여 차별성을 찾기 힘들다. 대선을 앞두고 정책대결 부재 상황의 문제점이 지적되곤 한다. 실제 정책대결을 유도해보려 하면 제도정당의 후보들은 모두 ‘모범답안’을 내놓고, 가능한 이념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현실적 실현 가능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정책리스트에 올려놓을 뿐이다. 따라서 공약(公約)은 말 그대로 공약(空約)으로 남게 된다. 예를 들어 노무현 후보는 초기에는 재벌개혁에 큰 무게를 두는, 재벌 처지에서는 탐탁치 않은 후보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탓인지는 몰라도 노후보측은 ‘좌파망령’을 떨치기에 진땀을 흘리고 있고 향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친재벌․기업적 성향을 보이는 이회창 후보의 정책은 우파 후보임을 덜 부각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서민적’인 것으로 변할 것으로 예측된다. 가능한 모든 사람, 계층을 만족시키려 들기 때문이다. 특히 6․25 이후 이념적으로 절반만 그 분출구가 확보된 상태의 역사적 경험은 대중들로 하여금 이념적인 의식을 마비시켜 탈이념적인 판단․의식을 강요하고 있다. 후보들의 정책은 모두 ‘모범답안’이지만 동시에 모두 ‘답안’이 아닌, 즉 비현실적인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이 허용되고 있는 속에서 앞으로 후보들의 정책은 더욱 유사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제도정당 및 정치인의 이합집산의 두 번째 원인으로는 ‘금배지’만을 추구하는 국회의원․정치인들 개개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유리한 조건을 찾아 쉽게 당적을 옮기도록 용인해주는 제도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이 문제는 대중매체에서나 냉소적 비판자들에 의해서 유권자들 혹은 ‘한국인의 망각증’의 문제로 잘못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망각증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철새’ 정치인에게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강제할 수 없는 제도의 문제이다. 앞서 봤듯이 선거철만 되면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한 정당의 수명이 한 선거 기간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민대중의 망각증을 탓할 수 없다. 게다가 이른바 ‘민주’세력 중에서 제도정치권에 무원칙하게 진입한 ‘인사’들도 이러한 과정에서 유권자들로 하여금 제도정치권에 대한 판단에서 혼란을 초래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들 ‘민주 인사’들은 거대 제도정당들이 계속해서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원칙없이 기성 정치인들과 똑같이 이들의 이합집산에 편승하여 자신의 정치수명을 연장하여 왔다. 젊은 ‘피’, 깨끗한 ‘피’를 수혈한다는 명분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입당한 ‘민주세력’은 이들 기성 제도정당의 ‘분식(粉飾)’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결과 대중들은 정당정치로부터 새로운 정치의 출현에 기대를 건 유권자들로 하여금 혼돈과 뒤이은 지역할거주의에의 함몰을 방치․방조하였다 하겠다.
오로지 차기 선거에서 ‘금배지’를 다시 달기 위한 개인적 판단에 따른 이합집산의 과정을 그나마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서 막을 수 있다면 이는 한국 정당정치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제도(Institutions)는 습관의 세트, 정해진 순서, 규칙, 규범 및 법 등으로서 개인간의 관계를 조정하거나 인간행위를 방향 지우기도 한다. 제도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행위에 하나의 특정한 규칙성이나 예측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불확실성을 감소시켜주고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를 줄여준다. 조직(Organizations)과 차별성을 찾아본다면 제도는 ‘행위의 구속성을 비전제적(非專制的)으로 조정하는 메커니즘’이라 한다면 조직은 ‘전제․전횡적’ 조정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즉 제도는 내화된 가치나 규범 등을 통해서 행위를 안으로부터 각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자의 관습적 인식으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전횡적인 것으로 여기는 순간 이는 제도라기보다 조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즉 제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점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제도의 변화․변경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도의 적극적 역할이나 그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도의 제정․수립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 결과에 따라 인간의 행태나 사고방식은 영향받는다 하겠다. 행위나 사고의 원인을 제도에서 찾을 수는 없다. 단지 제도를 통해서 행위자의 행태나 사고방식이 특정 방향으로 촉진․저해될 수 있다. 제도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선 국회의원 선거의 문제와 다음 대통령 선거의 문제 두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대선은 국회의원 선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탈당한 민주당 전국구 최명헌, 장태완, 박상희 의원이 ‘금배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민주당에게 자발적 ‘탈당’ 이 아니라 ‘출당’을 요구하면서 당적을 옮기려는 행태에서 확인하듯이, 현재의 전국구 의원제도는 제도정당의 보스에게 전형적인 ‘국회의원 매직’을 보장해주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의 정책이나 입장과는 무관하게 매매․거래되고 있는 의원직이기 때문에 차기 선거에서 또다시 안정적으로 조금 싼 값에 살 수 있는 조건을 대선국면에서 마련해보려는 발버둥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행 전국구의원제도는 이를 보장해주고 있다. 각 정당이 현행 전국구 선거제도를 국민의 뜻과는 관계없이 세 모으기를 하거나 자리안배를 하는 차원에서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유권자들은 각 정당의 전국구 비례대표의원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 지역구 의원을 찍으면 그것이 곧바로 전국구 의원선출로 연결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당내 계보의 보스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연장시켜줄 뿐이다. 따라서 1인2표의 정당명부제가 절실하다 하겠다. 이념정당의 부재상황에서 후보자 개인에 대한 직접투표 외에 정당명부에 투표할 수 있는 1인2표제를 도입함으로써 정당 및 정책에 대한 지지도를 가능하게 하여 정당 중심의 선거가 정착돼야 한다.
다음으로 대선 차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자. 2차 결선투표가 없는 단순다수 선거제는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 표현행위를 왜곡시키고 있다. 현행 선거제도에서 유권자는 자신의 정치의사를 단순히 표현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는 자신의 정치적 지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한 표를 정치현실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방편까지 고민하여 투표해야 한다. 즉 사표방지심리로 표현되는 유권자 행위가 이러한 기표행위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제도가 유권자로 하여금 기표행위에서 자신의 정치의사 표현이 유의미한 것이 되도록 고민, 죽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제도의 극단적 폐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유권자의 정치의식의 바른 형성․표현을 억압하는 것이다. 물론 총선이나 지방자치에서의 정당지지 성향과 대선에서의 그것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지난 6․23 지방자치선거에서 약 8%에 이르던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당지지율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그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표방지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단순다수제가 거대 정당에 유리하며 양당구도를 촉진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2차 결선투표가 치러지지 않는 상황에서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서 ‘금배지’에 목을 매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집권 가능성이 높은 정당에로의 기회주의적 이합집산은 당연하다. 변화하는 유권자의 ‘표심’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차 결선투표제를 도입함으로써 적어도 대선국면에서 ‘민심’ 운운하며 해쳐모여하는 이합집산의 명분을 가급적 제공하지 않는 방향으로의 선거법 개정을 필요로 한다. 즉 대통령 선거에서의 단순다수 선거제는 대선국면에서의 무원칙한 이합집산과 제도정당 중심의 ‘부익부, 빈익빈’ 논리의 관철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로 악용되어 왔다. 그 동안 한편으로 집권여당은 여당 프리미엄을 극대로 누리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 지역할거주의에 의하여 정치생명을 유지해 왔던 제도권 정치인들은 대선패배에 따른 기득권 박탈이 두려워 결선투표제 입법을 거부해왔던 것이다.


5. 대통령 선거에서 2차 결선투표
대통령을 직선으로 선출하는 나라들에서도 선거방법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 하나는 단순다수 선거제(First-Past-the-Post), 즉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가 당선되는 방식으로, 우리나라의 현행 선거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2차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경우인데, 이에 따르면 직선투표에서 과반수(또는 나라마다 상이하게 40% 혹은 45%) 이상 등의 다수를 얻은 후보가 없을 때 2차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아시아 국가들(한국, 대만, 몽골, 필리핀)이나 중동국가들(이란, 예멘)에서만 이를 채택하지 않을 뿐,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한 다수의 국가들은 결선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와 브라질에서 이 결선투표제에 따라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2차 결선투표제를 실시하는 나라들에서는 대부분 1차 투표보다는 2차 결선투표에서 당선자가 결정된다. 경험적인 사례를 통해서 봤을 때 1차 투표에서의 득표순위와 2차 결선투표에서 득표순위 사이에는 상관관계를 찾기 어렵고 오히려 역의 관계의 결과도 자주 나온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올해의 선거를 제외하면, 드골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 2위를 하였다가 결선투표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지난 1995년 4월의 선거에서는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이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였으나 5월의 2차 투표에서는 우파의 자크 시락이 52.67%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제의 문제점 중 근원적인 것의 하나는 대통령제의 기본적인 특징, 행정부와 의회 사이의 권력분립으로부터 나온다. 의회는 행정부로부터 그리고 행정부는 의회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에 의해 직접 선출되는 의회의원들 또한 민주적 정통성을 향유한다. 입법부와 다수당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당이 아닐 경우에는 대통령과 의회 중에서 누가 더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의 문제가 생긴다. 대통령제는 근본적으로 대통령과 의회라는 이원적인 국민적 정통성 위에 서 있으며, 대통령 또는 의회 어느 편이 더 정확하게 국민을 대표하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민주주의 원리도 없다. 이러한 점은 미국에서 분리정부(divided government), 프랑스의 동거정부(cohabitation), 한국의 여소야대 정국에서 종종 교착상태가 초래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정통성의 기반이랄 수 있는 선거에서의 지지율이 단순다수 선거제로 인해 너무 낮은 상태로 선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예를 들어 노태우 대통령은 36.6%를 얻었음―이에 비해 너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하겠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다른 차원에서의 권력분점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본고의 주제와 관련해 볼 때 2차 결선투표제 도입은 이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정당 간 정책연합의 가능성을 2차 결선투표 전에 분명히 밝히고 이에 대해 유권자의 지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구성될 중앙정부의 성향에 대해 예측 가능한 상태에서 유권자가 지지를 표명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당연하다.


후기: 노무현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11월 16일 새벽,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는 단일화에 합의한 후 여의도 한 포장마차에서 소주로 ‘러브 샷'을 했다고 한다. “이제야 좀 선거다운 선거를 보겠군!”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의 단일화 합의 소식이 알려진 후 “정치권 안팎에서” 나온 반응이라고 한다.(시사저널, 2002년 11월 28일) 한편으로 놀라움과 다른 한편 단일 후보가 등장함에 따라 대선 구도가 급변한 데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이후 24일 노무현 후보가 확정되자 한나라당은 ‘시간아, 빨리 가 다오!’에서 ‘시간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라 한다. 이회창 후보가 지지율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후보단일화 후 지지도의 변화를 보면 이해가 된다. 게임의 규칙이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선 출마자의 부분적 합의에 따른 변칙운용의 결과라 하겠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대선 출마자 개인적 판단에 따른 변칙운용(야합)은 집권 후 또 다른 야합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국민은 이번처럼 두 후보의 ‘결단’(=야합)에 의해서 가능한 경우에만이 아니라, 매 선거마다 흥미진진함과 관심으로 ‘선거 축제’를 즐김과 동시에 이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형성을 가능케 할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 대부분의 대통령제 국가에서 2차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국민의 실질적인 정치의사의 표현과 그에 기반한 국정운영의 실현은 1차적으로 제도적인 결선투표제가 입법화되어 2차 결선투표에서 후보자간의 정책연합 및 정부구성에 대한 내용이 심판받는 과정이 확보돼야 가능하다. 2차 결선투표제 도입은 과반득표 대통령의 출현을 항시 가능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준하는 정통성을 균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정치의 악폐인 지역분열구도의 해체와 정당과 정치인의 정책과 정치적 입장에 대한 국민적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노/정/연

2002-1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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