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 장 ◦ 통 ◦ 신
부활하라 조수원 열사여!
장 영 길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 대표)
무엇이 조수원 동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1991년 전노협사수투쟁으로 이어지는 대우정밀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당시 병역특례해고자(이하 병특자)였던 조수원 동지
역시 다른 200여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사측의 대량징계의
일환으로 해고되어 곧바로 수배생활이 시작되었다. 4년여의
수배생활로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병역기피자로 몰려 복직은
물론 다른 직장생활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병특자들은
노동자 생활의 원칙을 지키며 상황을 극복하고자 38일 간의
아사단식, 끝없는 농성, 장기 기증식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마다하지 않고 투쟁해 왔다. 1995년 4월에는 박형규
목사를 비롯한 수백여명의 재야인사, 언론인, 정치인 등의
서명으로 국회에 청원을 내어 병특자 해결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세 당사자인 병무청, 해고 사업장의 사업주, 병특자
간에 합의안을 제출하라는 권고안이 채택되었다. 이에 그동안
수배자의 신분으로 병무청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다른 동지의
입을 통해서만 병무청의 의견을 들어왔던 상황에서 직접 나서서
해결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큰 기대를 갖고 12월 15일
병무청을 찾아 갔다. 그러나 병무청의 답변은 한마디로 “군대를
가라” “병무청의 기물을 부수거나 담당자들을 폭행해 징역을
살고오면 그때는 문제를 풀어주겠다” “학생들은 시끄럽고
솔직히 겁난다. 그래서 풀어줬지만 너희들 노동자들은 하나도
겁안난다. 마음대로 해봐라” “지금까지는 봐주었지만 계속
버티면 지명수배를 해서라도 군대를 보내겠다”는 등 참을 수
없는 모욕만 듣고 돌아왔다. 이러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견디기
어려운 좌절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투쟁의 배경과 목표
3년여의 수배생활을 해온 여의도 민주당사 내의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이하 전해투) 산하
수많은 해고자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재야인사 및 각
노동단체들로 구성된 전해투 지원대책위원회, 민주노총 등
전노동계는 당일(12월15일) 고 조수원 동지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집결하여 곧바로
「병역특례해고노동자고조수원동지장례대책위원회」
(이하 장대위)를 구성하고 투쟁에 돌입하였다.
장대위에서는 우선 국회의 권고안을 묵살한 병무청과 문제해결을
방치한 신한국당 그리고 원인 제공자 대우그룹을 공격의
대상으로 선정하고 일단 ① 병특자 군문제의 완전해결 및
병역악법개정 ② 고 조수원 동지의 명예회복 ③ 전국
해고노동자의 원직복직을 당면투쟁의 목표로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하였다.
투쟁의 전개와 내용
투쟁의 시작은 비보를 접하고 달려온 전해투 동지들과 대우정밀
일반 해고자 및 복직자 그리고 민주노총 수도권에서 비상동원된
동지들을 중심으로 12월 16일 오전 10시에 병무청 타격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일 150여명 동지들의
복수에 찬 눈길에는 병무청 사수에 나섰던 전경들은 이미 싸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격렬한 항의에 전경들이 밀려 병무청 현관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조수원 동지를 살려내라는 외침은 고자세로
일관했던 병무청 관계자들을 굴복시켰다. 다음날이
일요일이었지만 밤새 준비해서 만든 선전물을 들고 지하철 및
가두로 선전전을 전개하였고 더욱 강도 높은 투쟁이 필요하다고
공감한 전해투 동지들과 대우정밀 일반 해고자, 복직자는
결사대를 구성하여 신한국당 앞에서 쇠사슬 농성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12월 18일 오전부터 시작하여 35명 전원이 연행당한
저녁때까지 조수원 동지의 영정을 들고 쇠사슬로 전원이 묶여
아스팔트에서 연좌결사투쟁을 전개하면서 대우정밀 조합원들의
파업투쟁에 앞서 선도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후 21일 병무청 항의 대규모집회, 23일 서울역 대중집회, 24일
명동성당 계단 앞 쇠사슬농성, 힐튼호텔 앞 집회, 대우센터 앞
집회, 대우정밀 조합원들의 대규모 상경투쟁, 거리 선전전,
김우중 집 타격투쟁, 대우정밀 사장 권오준 집 타격투쟁 등이
전개되었고 그밖에 강도 높은 투쟁도 준비되는 등 간결하며
집중적인 투쟁이 배치되었다.
투쟁과정에서 드러난 권력과 자본의 태도
5,6공 시대의 민주화투쟁으로 수형생활을 하게 되어 군대에 갈
수 없었던 학생들의 문제를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구시대청산의 하나로 해결한 바 있었던 병무청
실무자(동원소집국장, 징병모집과장 등)는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는 대부분 생활이 어렵고 부모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인지 항상 일방적이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었다.
또한 그들은 병특자들의 문제를 풀어줄 경우 병특자들을
마음대로 통제해 왔던 지금까지의 관행이 깨어져 더이상 통제가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한 자본가들이 압력을 행사해 오면
자기들의 신분을 걱정해서 복지부동의 자세 그리고 관료주의
등으로 노동자의 인권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해 왔었다.
그리고 막 당명을 바꿔 신한국당이 된 민자당의 당직자와
국회의원은 국민의 소리를 듣는 정당이라는 당사의 간판과는
다르게 만나주지도 않았다.
한편 자본가들(대우그룹, 풍산그룹)은 병특자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자신들은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병무청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떠넘기기식의 발언만을 일삼아
왔다. 그러나 조수원 동지의 죽음으로 전노동계가 분노에 차서
들고 일어나자 그동안 만날수도 없었던 병무청장이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서는 모양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다가 12월 23일 서울역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고 병무청
타격투쟁이 진행되자 허겁지겁 우선 병특 당사자의 군문제를
완벽하게 풀고 다음에 있을 임시국회에서 병특자가 안고 있는
악법조항을 개정하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집권여당의 국방위원장 황명수 의원 역시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등 재야단체 및 노동단체로 이루어진 대표단과의 면담을 통해
병무청장을 질책하는 등 조금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문제 해결이
약간 진전되었다. 그러나 자본가들(대우그룹)은 반성은 커녕
협상자체를 연기시키거나 장대위 대표단과의 면담을 거절하는 등
기만적인 작태로 일관했었다. 적어도 김우중 집 타격투쟁,
명동성당 계단 앞 쇠사슬 농성, 김우중의 처가 회장으로 있는
힐튼호텔 타격투쟁, 김우중 수배전단 수십만부 배포 등 견딜수
없는 강도 높은 투쟁이 전개되기 전까지는 기만적인 작태로
일관하면서 대우정밀 조합원들의 투쟁을 약화시키고 전체적인
흐름을 바꾸고자 온 힘을 기울였었다.
여기서 대우측의 기만적인 작태를 몇가지만 제시한다.
12월 23일 병무청이 항복하던 날 협상 대상자를 대노협으로
끝까지 고집하면서도 대우정밀 권오준 사장이 없다는 이유로
실질협상을 기피 하였고, 크리스마스 전날인 12월 24일 명동성당
앞에서 쇠사슬 농성을 돌입하여 엄청난 비난이 그룹쪽에
가해지자 실질협상에 겨우 응해왔으며, 12월 25일 협상 중
당일에 협상이 타결될 것으로 판단하여 12월 27일로 장례를
예정하고 장대위가 집회신고를 하자 타결단계에 있던 협상을
갑자기 중단하고 지금까지의 합의사항을 전부 거두어 들인다며
결렬선언을 하였다. 그 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투쟁전선을
무너뜨리려는 기도를 획책하였다.
풍산그룹의 경우는 대우에서 타결되는 내용에 준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다가 장례가 치루어지자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고 이사 개인의 의견으로 그룹에 건의해 보겠다는
이야기였다고 발뺌을 하고 있어 복직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투쟁과정에서 나타난 몇가지 문제점
부분적으로는 불만이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는 동지들의 적극적
참여와 일사불란한 대응이 있었기에 이번 투쟁을 승리로 이끌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굳이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일부 조직 가운데 제한된 몇
사람이 강도 높은 투쟁이 필요한 시점에서 투쟁기획팀과 동의도
없이 경찰과 일방적으로 협상을 해버려 전체의 투쟁기조를
상실한 예가 한 번 있었고, 대우정밀 조합원들이 상경투쟁을
시작할 때 조합원들의 침식을 미리 준비하고 매끄럽게 진행하지
못한 점 등이 지적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전해투 평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대표단이 지나치게
협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태도를 보여주어 적들에게
일정정도 농락을 당했다는 점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지적이다.
1996년 1월 3일 대우측의 항복으로 협상이 타결되어 이제는
정권과의 해결점으로 병특자들의 수배해제 및 병역특례법 개정을
앞두게 되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당사자들의 문제 해결과 전국
7만이 넘는 병특자의 숙원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에 장대위는 조수원 동지에 대한 명예회복이 일부나마
가능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장례식을 1월 5일은 서울에서, 1월
6일은 부산에서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후
조수원 동지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 병원 영안실 주위에
2,500여 경찰들이 완전봉쇄를 하는 추태가 나타나 발인이 1월
5일 오후에야 이루어졌다. 게다가 조수원 동지가 3년 이상을
기거하던 여의도 민주당사 내의 전해투 농성장조차 가보지
못하고 혜화동 대학로에서 노제를 끝으로 부산으로 가야했다.
영결식장인 대우정밀 앞에서도 회사 안팎이 모두 경찰로
둘러싸인 채 영결식을 마치고 밤늦게야 장지인 양산 솥발산에서
장례를 끝냈다. 이 과정에서 역시 지나치게 저자세의 협상으로
많은 동지들의 불만이 표출되었음을 인정한다.
노동해방열사 고 조수원 동지 장례투쟁에 대한 글을 마치며
이 글에 대해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많은 동지들이 다른 시각을
갖을 수 있을 것이다. 또 23일간 있었던 모든 투쟁의 상황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다만 이번
투쟁의 시작에서 종료까지 투쟁을 기획하고 배치하는 선두에서
직접 동참하고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데 충실하고자 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부족한 점은 동지애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끝으로 또다른 조수원 동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산자들이 해야할 몫이 분명히 남아 있음을 각인하며 조수원 동지
장례투쟁에 참여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신 많은 동지들에게
지면을 통하여 깊은 동지애와 감사를 전한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