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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위를 구(걸)하라(!?)

현장에서 미래를  제83호
정병기

노사정위를 구(걸)하라(!?)


정 병 기
연구기획실장





지난 1월 2일자 ꡔ한겨레 21ꡕ의 논단 “노사정위를 구하라”의 독해법은 ‘노사정위를 구걸하라’이다. 논자 박태주가 보는 노사정위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사정간 사회적 파트너십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갈등과 대결의 노사관계를 대화와 타협의 노사관계로 성숙”시키는 제도이다. 그럼에도 지난 노사정위의 역할은 ‘조정의 산실’이 아니라 ‘갈등의 산실’로 작동해 왔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 이유는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인한 노동계의 정치적 리더십 부재로 진단되고 있다. 논자는 곧 노사정위를 재작동하고 민주노총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와 자본보다 앞서, 그리고 투쟁하기보다 먼저 대화를 구걸하고 있다.
논자 박태주의 논리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세 가지 오류, 즉 개량주의적 노동조합관의 오류, 노사정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신뢰의 오류, 투쟁 선행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오류에서 비롯된다.


개량주의적 노동조합관의 오류
노동조합의 역할과 관련해 논자는 “세계화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정상적 기능이 보장되는 가운데 노동조합이 사회적 주체로서 시대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세계화에 대한 논자의 이해를 간단히 짚어보자. 물론 논리적이나 분석적으로는 노동자 연대와 같은 다른 측면의 세계화도 거론될 수 있다. 그러나 논자가 말하는 세계화는 어디까지나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팽창의 가시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작금의 세계화임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박태주의 논리는 ‘노동조합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팽창에 대항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주도해 나가는 한 주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이러한 노조 이해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노조관과 노사관에 감읍하는 퍼포먼스로도 나타난다. 그가 본 노무현의 노조관은 “경제의 정상적 흐름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사회적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걸러내는 갈등의 안전판”이며, 노사관은 “분규는 예방도 중요하지만, 무조건적인 억제가 능사가 아니라 합리적 절차를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합리적’인 것이다.
민주노총의 역사적 투쟁들이 “분규”였으며, 앞으로 “자율적으로” 해소돼야 하는 것이었던가? 전평과 전노협의 노동해방투쟁이 ‘자본의 흐름(경제의 정상적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었고, ‘노자간(사회적)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걸러내는 갈등의 안전판’이었다는 말인가? 노동조합은 물론 노동법상으로는 고용관계에서 근로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직이며, 조합특수주의의 형태로 자기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조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은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 일반의 권익을 대변하는 조직으로서 자본주의 극복의 한 조직적 수단이기도 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공권력이 노골적으로 자본을 비호하는 나라에서 노조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반정부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의 용어법을 빌린 박태주의 주장에서 공권력이 노사관계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은 발전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노사 자율교섭을 절대시하는데 매달려, 노조를 ‘갈등을 통한 자본주의 질서 유지의 안전판’이라거나 노동투쟁을 이익집단간의 ‘분규’로 표현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적어도 노동계를 대표하는 사람은 자본과 그 정부와는 다른 관점과 용어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은 노동계를 대표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사정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신뢰의 오류
박태주는 노사정위를 “대화를 통해 노사정간 사회적 파트너십을 추구하는 기구”이자, “‘지구 끝까지 시장논리를 관철시키겠다’고 드는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하나의 대안”이라고 설파한다. 그런데 작금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팽창’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다. 그럼에도 논자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논리적․분석적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 차원에서 분리하는 듯 하다. 그는 노사정위는 신자유주적 ‘세계화’에 ‘적응하는’ 노조의 수단임과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서는’ 대안이 된다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노사정위를 사회적 파트너십을 추구하는 기구라고 보며, 그것을 훌륭한 제도적 장치라고 보는 데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근본적으로 논자의 개량주의적 노조관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노조를 노동자계급적 정파성을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노사정위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자못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노사정위는 사회적 조합주의의 대표적 장치이다. 따라서 노사정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대응은 사회적 조합주의에 대한 명철한 판단을 전제로 한다. 조합주의는 또한 노동자들의 오랜 투쟁의 산물로 나타난 역관계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볼 때, 세 번째로 지적할 투쟁과 타협의 관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투쟁 선행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오류
박태주의 논리에서 드러나는 마지막 문제인, 투쟁과 타협의 관계에 대한 오류는 “투쟁하기 위해서도 대화는 필요하며, 합의는 결국 대화와 타협의 산물”이라는 관점에 있다. 곧, 대화와 타협은 투쟁의 선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본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서 합의의 본질적 원천이라는 입장이다. 개인과 소집단들간의 갈등에서는 대화와 타협이 처음부터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계급간의 갈등이나 그 계급의 대변자인 노동조합과 자본간의 갈등에서는 그렇지 않다. 힘관계를 현저하게 기울게 할 수 있는 투쟁을 선행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투쟁의 위협을 가하지 않고도 노동자들이 타협과 양보를 얻어내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노사정위 또한 이러한 투쟁의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노사정이 대등한 입장에서 사회경제적 위기를 해결하고 그 성과물들을 분배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노동자 대변조직과 자본의 위기해소능력 및 정부의 친노동자적 정책 의지가 병존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노동자 대변조직의 존재는 막강한 투쟁력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적 조합주의와 그 제도적 장치인 노사정위는 자본과 정부의 요구에 따라 노동계에게 양보와 부담만 요구할 뿐이다. 게다가 그에 참여한 사회적 파트너인 노동조합은 노동계의 대표라는 이름으로 비판적 노동운동을 스스로 억압하고 파괴하는 주구로 기능하게 된다.
강력한 투쟁을 통해 자본과 정부를 협상으로 끌어냄으로써만 적어도 노동자측에 유리한 힘겨루기나 대등한 협상이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논자는 정부와 자본이 협상을 제시하기도 전에 민주노총측에서 먼저 과거의 참여거부를 반성하고 대화를 요구하라고 한다. 그것도 어떠한 새로운 투쟁도 전개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러한 논단을 어찌 “노사정위를 구걸하라”로 읽지 않겠는가? 한/노/정/연

2003-01-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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