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대선의 승자와 패자
채 만 수
부소장
I
대선 후 당선자를 향한 용비어천가가 낭자하다. 으레 그러하려니
하다가도, 명색이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라는 자들까지
‘보수정치’의 근본적 한계를 망각한 채, 예컨대 “노무현의
승리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다시 이끌어내 준
쾌거”(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라거나 노무현의 당선으로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주류가 바뀌”어서 “2003년은
한국에 진정한 21세기가 시작되는 해”(정영무, 한겨레21
편집장) 운운하며 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참았던 역겨움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듯이, “이회창이냐,
노무현이냐”라는 것이 현실 게임이었다. 따라서 보다 더
보수적이고 사대적이며 냉전 추구적인 이회창 대신에 그래도
조금은 자유주의적이고 덜 사대적이고자 하며 가능한 한
남․북간에 평화와 협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무현이
당선된 것에 대한 긍정적 의의를 깡그리 부인하거나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저들 가객(歌客)의 심히 균형을
잃은 일방적 관점이고, 무엇보다도 모든 긍정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의 경과와 결과에, 그리고 저들의
용비어천가에 깊게 각인된 계급적 성격이다.
II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밖에’ 졸업하지 못했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사법시험에 합격, 판사를 거쳐 성공한 변호사,
나중에는 열렬한 인권 변호사가 되고, 국민의 대표 혹은
‘선량’이라는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지역주의와의 투쟁으로
파란 많은 정치적 이력을 거친 끝에 장관이 되고 마침내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그의 ‘입지전(立志傳)’. 비록 그 자체
철저하게 부르주아적 입신(立身)과 부르주아적
정치․전망이라는 한계에 갇힌 것이고, 하물며 그에 대한
찬사는 구제불능의 출세주의를 전제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넘어가기로 하자.
그리고 우선, 수많은 용비어천가의 가객들이나 이른바
‘노사모’ 등등이 높이 치켜세우면서 사실상 이번 대선
과정에서의 자신들의 결의의 근거로 삼고 있는 “소신과 원칙이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노무현과 관련한 그들의 균형 잃은
관점에 간단히 언급하자.
조금도 새로울 게 없는 얘기지만 굳이 예를 든다면,
ꡔ한겨레21ꡕ 제440호(2003년 1월 2일자)는 정몽준,
이인제, 김민석, 김원길, 박상규, 전용학, 강성구, 원유철,
이근진, 김윤식, 안동선, 이완구, 이재선, 이양희, 함석재,
오장섭 등등 이번 “대선 과정에서 정치적 이익만 좇아 원칙과
소신, 의리를 헌신짝처럼 내던진 정치인들”을 “둥지를 옮긴
‘철새’”, “고향으로 되돌아간 ‘연어’”, “배신자”,
“변절자”로 묘사․지탄하면서 그 정치적 몰락을 예견하고
있다. 기사의 제목은 “새들은 제 발등을 찍으며 운다―배신과
변절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자처한 철새들… 그것은 희극이자
비극이었다”이다. 기사가 설령 노무현 당선자의 “원칙과 소신,
의리”를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획․작성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 철새들의 ‘배신과 변절’의 정치적
행태를 비판하고 지탄하는 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비록 그 기사에서 명시적으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필시
내심으로 가지고 있었을, ‘노무현의 정치적 노선에 대한
우(右)로부터의 거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의 ‘변절과 배신’, ‘변신’은 지탄하면서도
‘재벌 정치가’ 정몽준과 “원칙과 소신 없는” ‘후보
단일화’를 했고, 사실상 그에 기초해서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노무현의 ‘무원칙과 무소신’, 혹은 ‘훼절’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거꾸로 그 ‘원칙과 소신’만을 찬양하는
저들은 과연 균형이 있는 것인가?
위에 언급한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정 대표의 ‘폭탄선언’ 직후인 12월18일 밤부터 투표가 끝날
때까지 노무현 지지자들은 인터넷과 전화를 통해 시시각각
정보를 나누며 사건의 파장을 예의 주시했다. 그들은 “노
후보가 ‘정몽준 지뢰’를 넘어 당선되면 거추장스런 혹을
떼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출발할 수 있다. DJP연합의 불행한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득이 된다”며 ‘전화위복’과
‘새옹지마’의 고사성어를 역설했다. 19일 밤, 투표 결과가
나오자 노무현 지지자들은 광화문 거리에서 기쁨에 넘쳐 외쳤다.
“‘역사의 간계’가 작용했다. 신의 섭리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기자(임석규)는, “지난 2000년 한 역술인이 구한말
동학교도인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전수된 것이라며
공개”했다는 “비결서”까지 동원, ‘우연의 일치’를 빙자하여
‘역사의 간계’, ‘신의 섭리’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정 대표’와 ‘야합’했던 노무현의 ‘무원칙,
무소신’이나 그러한 행보가 예정했던(?) ‘불행한 전철’에
대한 비판․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당선과 승리에만
“기쁨에 넘쳐” 광화문 거리로 나섰던 ‘노무현
지지자들’처럼! 그 ‘후보 단일화’라는 그 ‘야합’이야말로
“정대표의 ‘폭탄선언’” 혹은 “정몬준 지뢰”의
전제였는데도 말이다. 하기야, 여러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이
이러저러한 야비한 의도를 감추고 혹은 오직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의도에서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강권하고 노무현이 아직 이
도박에 명운을 걸기를 거부하고 있을 때에는 “원칙 없는 단일화
결사 반대”를 외치다가 막상 노무현이 도박을 하여 행운을
움켜쥐자 언제 반대했더냐는 듯이 노무현 ‘단일 후보’의
당선만을 위해서 일로매진했던 자들이니, 그들에게서 어떤
‘균형 있는 시각’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물정 모르는
순진함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저들 가객들에게 이 말 한
마디는 들려주자. 발생할 문제를 경계하는 대신에 승자를 위해
찬가를 부르는 것은 노예근성의 발로일 뿐이라고.
III
그런데, 위에서 정몽준과 노무현 간의 ‘후보 단일화’라는
‘야합’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사실 이는 지나치게 과도한 표현
혹은 평가이다. 사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략적 의도에서
그것을 ‘야합’이라고 몰아 부쳤던 한나라당의
가치전제(價値前提)에,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노무현의 원칙과
소신’을 옹호하며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반대하던 노사모
등 노무현 골수 지지파들의 가치전제에 무비판적으로 동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몽준은 보수적인 재벌 정치가임에 비해서 노무현은 진보적이며
원칙과 소신이 있다는 전제. 이는 분명 반(半)만이 진실인
함정이다. 정몽준이 보수적인 재벌 정치가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지만, 권력을 향해서는 스스로 자신과는 “다르다”고,
“보수적”이라고 비판하고 매도했던 정몽준과 손을 잡을 만큼,
노무현은 그다지 진보적이지도 원칙과 소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혹은, 노무현의 ‘원칙과 소신’이라는 것이 그의 계급적
보수성을 보상할 만큼 진보적인 것이 아니다. 예컨대, 노무현에
바쳐진 용비어천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김원길 의원(서울 강북갑)과 박상규 의원(인천 부평갑)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변절행보를 보였다.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다가 정작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자 한나라당으로 튄 이들의
행동은 모순의 극치였다. 특히 김 의원은 당내 후보단일화를
주도하며 “수구․냉전집권세력[원문대로]의 집권을
저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때문에 그가 한나라당에
입당하기 전까지도 민주당에선 그의 순수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국민회의 시절부터 DJ의 총애를
받으며 당내 최고의 경제․정책통으로 통했다. 정책위
의장은 그의 ‘단골 당직’이었고, 복지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런 그에게 노 후보도 많은 미련을 보였다. 그가 사무총장직을
내팽개치고 ‘반노’로 돌아섰을 때 노 후보는 집에까지 쫓아가
설득하는 성의를 보였지만 끝내 그를 돌이키지 못했다. (임석규,
“새는 제 발등을 찍으며 운다 …”)
이 일절은 김원길 등의 보수성과 ‘변절행보’를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필시 이 용비어천가 필자의 의도에
반해서) DJ, 국민회의, 민주당, 그리고 노무현의 ‘진보성’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김원길을 총애하고, 그러한
그에게 단골로 ‘정책위 의장’을 맡기고, 그러한 그에게 “많은
미련”을 가지고 “집에까지 쫓아가 설득하는 성의를 보이는”
그들의 ‘진보성’ 말이다.
저들 ‘철새들’이 ‘배신하고 변절한’ 것은 보수정치집단의
조폭적 의리이지 이념적 신념이나 노선이 아닌 것이다. 그토록
많은 ‘철새’가 나는 것도, 언뜻 물과 기름처럼 보이던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가 가능했던 것도, 바로 그렇게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부르주아 정치인으로서의 계급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른바 ‘후단협’을 결성하여
탈당소동을 일으키고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바꿈으로써
‘철새’로 규정 당한 자들이 그러한 계급적 본능에 자신을
내맡겼다면, 사려 깊고 신중하게도 민주당적을 유지하면서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던 자들은 노무현과 정몽준 사이의 정치행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정 자신들 사이의 그러한 공통의 계급성을
꿰뚫어본 교활한 마키아벨리스트들이었던 것이다. 당분간 열렬한
노무현 지지자들의 눈밖에 나는 거야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실제로, 노무현 당선자 자신이 공언하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노
정권의 경제, 사회 정책이 국내외 독점자본의 이익을 대변,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를 통해서 노동자․민중을 사지로 몰고
간 김대중 정권의 그것과 다를 것이라는 어떤 근거도 없다.
정권인수위원회의 경제, 사회 부문에 참여하고 있는 이른바
‘개혁적’ 인사들의 태반은 과거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의
반노동자․민중적 독점자본 합리화 정책들을
발의․옹호해 왔던, 시민단체라는 이름의 새로운 관변단체,
경실련 및 참여연대 출신들이거나, 민주노총 출신이라고 해도
갖은 ‘현실론’을 들먹이며 김대중 정권을 지지하며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자들이다.
이른바 ‘정치개혁’을 떠들지만, 사실 그것은 권력 재편기면
으레 나오던 그렇고 그런 타령일 뿐이다.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시쳇말로 ‘새대가리’일 것이다. 이미
그것은, 선거 후 민주당의 ‘개편을 둘러싼 새로운 내용에서
보듯이, 권력의 배분을 둘러싼 암투로서 나타나고 있고, 으레
그랬듯이 보수정객들의 또 한번의 이합집산, 권력 나눠먹기로
끝날 운명의 것이다. 저들의 ‘정치개혁’이 얼마나 민중의
권익신장과 무연한 것인가는 광화문의 반미․반전
촛불시위에 대해서 대선 후 자행되고 있는 분열공작과 탄압이
미리 예증하고 있다. 계급간의 정치적 역관계에 어떤 의미 있는
변화도 없는 마당에 그 이외의 어떤 ‘개혁’을 전망할 수
있겠는가?
사실이 이러한데도 “노무현의 승리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다시 이끌어내 준 쾌거”라거니, “2003년은 한국에 진정한
21세기가 시작되는 해”라거니 하며 떠들어대고 있으니, 분명
“희극이자 비극”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절망’일까?
IV
여기서 우리는 이번 대선의 진정한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를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그와 관련, 민주노동당은 선거 후
자신들이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설령 이번 대선의 결과가 그들이
자부하는 대로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노동자 계급의
승리’일 것인가?
결코 아니다. 상황은 전혀 그 반대이다.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는 민주노동당의 자부가 진실일지라도, 혹은
그것이 진실인 만큼, 이번 대선의 승자는 독점자본이고, 패자는
노동자 계급이다. 이번 대선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독점자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대폭 강화되고,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원칙과 노선은 크게 왜곡되고 후퇴했기 때문이다.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V
우선, 일부 젊은이들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언론인들’
사이에서 부는 정말 못 말리는 ‘노무현 열풍’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노무현의 승리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다시 이끌어내
준 쾌거”라거나 노무현의 승리로 “2003년은 한국에 진정한
21세기가 시작되는 해” 운운하고 나서는 천박한 지적 분위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러한 열광은 분명, 부르주아 정치행사로서의 대통령 선거나
총선거를 부르주아 계급지배 장치의 재생산기구로서 파악하는
대신에, 부당하게도 대통령 선거나 총선거에서의 승패가 한국
사회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라도 하는 듯이
전제하면서 이를 선전하는 것이다. 이는 독점자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의 엄청난 강화이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체(遲滯)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라는 수식(修飾)으로 자신을 장식했던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불과 1,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대중적으로,
특히 노동자 계급에서 광범위하게 폭발해 나올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 스스로도 자임하고 있듯이 노무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반전자(反轉者)가 아니라 그 계승자로
전망되는 한, 이러한 예상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곧바로 부르주아 지배체제 자체에
대한 그것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던 것처럼, 노무현 정권에 대한
그것도 쉽사리 그렇게 발전하진 못할 것이다. 그만큼 지금
부르주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강하고, 또 이번의
대선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강고해졌다.
그러한 헤게모니 강화의 한가운데에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 언론인들, 그리고 네티즌들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지역주의․연고주의의 청산이니, 세대
교체니, 정치개혁이니, 부패청산이니, 3김 청산이니 등을
하려하지만 몰계급적인, 아니 부정직한 부르주아적 언사와
의제(議題)로 노동자․민중의 정치의식의 진전을
가로막으면서 독점자본의, 그들의 정치적 대표자들의 헤게모니를
유지․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지배 장치의
대표적인 재생산기구로서의 대선이나 총선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빼어난 장기를 발휘하며 활동을
극대화하는 공간일 뿐이다. 그리고 ‘노동자․서민’의
몰주체적인 대표자들이 ‘진보’라는 어릿광대 춤을 추면서
대중을 오도하는 슬픈 장(場)일 뿐이다.
VI
노동자 계급의 패배는 대선 과정에서의 자신들의 오류에도 크게
기인하고 있다.
그 동안 상대적으로 부르주아 정치행사와 거리를 두어 온
노동자의 힘은 지난 9월, 어떤 교묘한 수식어로 치장되어 있던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정치의 룰에 따라서 대선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예정한, 더구나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자신들이 ‘개량주의 노선’으로 비판해 온 특정 후보
지지운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도록 예정된 ‘공투본’,
‘공선본’, ‘대선 실천단’을 제안함으로써, 그리고 이어 그
좌절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하고,
그것을 훼손시켰다. 이는 물론 ‘대선 시기라는 특수한
국면’에서는 ‘어떤 방식이든 선거에 참여해야’, 혹은 보다
적실하게 말하면, ‘이른바 후보전술을 통해서만’ 무언가
‘실천’을 할 수 있다는 비주체적 사고, 강박관념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철저히 틀렸다고 하는 것은 이번 대선 과정 내내
광화문과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를 메우면서 직접적인 선거 이슈
못지 않게 광범위한 대중과 언론의 주목을 받아 온 두 여중생
사망 관련 ‘촛불 시위’가 훌륭하게 증명했다 할 것이다. 물론
일부의 후보 진영, 특히 노무현 진영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선거에 이용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선거와 맺은
관계는 이른바 ‘후보 전술’과는 전적으로
반대방향에서이다.
독점 부르주아의 정치적 의제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면서 마치
선거를 통해서 무언가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허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선거 국면에서 노동자 계급의 기본적인
실천은 그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VII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의 패배에 심대하게 기여한 것은
민주노동당의 ‘선전(善戰)’이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전
과정을 통해서 민주노동당과 권영길 후보는, 부르주아 지배체제
재생산 기구로서의 대선의 계급적 성격을 선전하고 폭로하는
대신에, “우리가 집권하면…” 운운하면서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정치의식을 마비시키는 작업에 시종 ‘선전’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선전은 철저히 민중주의적인 것이어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의 대립적 성격이나 그것을 지양해야
할 필요성, 지양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대해서는 굳게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부유세’니,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이니 하면서 오로지 이른바 분배 차원의
선전․선동에만 집중하거나, 예의 ‘재벌 개혁’이나
‘노동자 경영참가’ 등 독점자본의 합리화 정책이나 그
기만적인 노동자 포섭정책들을 선전하였고, “진정한 정치개혁”
등 전적으로 의미 있는 내용을 가질 수 없는 부르주아적
정치구호를 남발하였다.
또한 ‘노동자․농민․서민의 정당’이라는
민중주의적 구호를 되풀이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지향한 것은
이른바 ‘국민정당’이었다. 따라서 선거 직후 권영길 대표의
기자회견(12월 20일)도 ‘노동자․민중’을 향한 것이
아니었고, “국민 여러분”을 향한 것이었다. “국민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습니다”라는 게
회견문의 제목이고, “국민 여러분, …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저 권영길은 국민 여러분께 다가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라는 게 회견문 서두의 인사 아닌가? 그리고
노무현 당선자가 제시한 “개혁과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견제와
비판을 수행하는”, 부르주아 정치체제 내의 “‘선명 야당’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거듭 다짐하지 않았는가?
“개혁과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견제와 비판을 수행하는 ‘선명
야당’”?― 사실 이 다짐이야말로 오늘날 민주노동당의 객관적
계급성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를, 아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개혁’이란
것이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개혁과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 운운할 때, 그들 자신이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추동자라고 하는 사실조차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민노당이
마치 한국의 노동자 계급의 이익과 정치운동을 대표하는 듯한
허상이 지배할 때 한국의 노동자 계급은 철저히 그들에 의해서
멍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나친 ‘매도’라고?― 그렇다면, 위 기자회견문의 다짐 외에도
민노당의 정책 브레인이나 핵심 간부들이 자신들의 ‘개혁’과
민주당․노무현의 ‘개혁’을 어떻게 동질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들어보자.
◇ 권영길: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노무현 당선자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또한, 노무현 후보가 개혁적 대통령을 자임한
만큼 개혁적 정책을 힘있게 추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같은 기자회견문)
◇ 조희 : “… 노무현 정권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노무현은
기성체제로부터 자유롭지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없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부침이 심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치개혁모델을 앞서서 실천해 가는 방식으로
노무현 정부를 끌고 가야 한다. 한나라당은 국민의 정부의
제한된 개혁마저도 보수적으로 좌절시켰다. 민주노동당이
노무현으로 하여금 철저한 개혁을 하도록 압박하는 야당역할을
적극적으로 한다면 충분히 좋은 야당이 될 것이다.” (“2002
대선 특집 좌담 ‘선명한 유일야당 역할 해나가야’”,
ꡔ진보정치ꡕ 115호 <당원판> 2002년 12월
23일-12월 31일)
◇ 노회찬 (사무총장): “YS와 DJ 정권은 초기에 상당히
개혁적인 정부로 평가받았다.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 국민들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정부는 다 실패했다.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개혁대상으로 삼아야 노무현의 개혁이 성공한다. 한국
보수정치가 개혁을 하려면 포퓰리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같은 곳)
이른바 “대선유권자연대”란 단체가 지난 12월 15일에 발표한
“대선 후보 정책종합평가”와 관련한 ‘기사’를 자신들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자랑스럽게 싣고 있는 것도 ‘개혁’ 혹은
정책에 대한 그들의 몰계급적 이해를 드러내는 한 예일 것이다.
다름 아니라 “권영길-매우 개혁, 노무현-개혁,
이회창-보수”라는 제목 하의 기사인데, 그러한 평가의 근거
또한 걸작이다.
“최열(환경연합 사무총장) 대선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총평을
통해 각 후보간 차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회창 후보는 다소
보수적, 노무현 후보는 다소 개혁적, 권영길 후보는 매우
개혁적”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시민사회단체가 제안한
정책과제를 대부분 수용해 가장 개혁적인 후보로
평가받았고….”
운운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이른바 ‘시민사회단체’란 자들이 어떤
계급․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는지, 따라서 그들이
제안한 ‘정책과제’라는 것들이 어떤 계급적 성격을 갖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관심도 없고, 그저 ‘매우
개혁적’이라고 추켜 주는 데에만 우쭐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또, 이른바 ‘2002 대선 교수 네트워크’가 주관한 “2002년
대통령 선거 평가토론회”(2002.12.23)에서의 이재영 민노당
정책국장의 다음과 같은 ‘자랑과 변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책 발표하고 일주일만 지나면 민노당의 정책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베끼더라. 그러니까 국민들이 딱히 권영길을 찍어야 할
이유를 못 찾았다.” (www.pressian.com, 2002. 12. 23.)
자신들의 ‘정책’이 얼마나 노동자 계급적 성격을 갖지 못한
몰계급적인 것이었으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베꼈겠는가
하는 반성도, 따라서 그래도 명색이
노동자․농민․서민의 정당임을 주장하면서도 그
몰계급성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발언 아닌가? 정강 정책을
몰계급적인 무슨 ‘아이디어 경쟁’쯤으로 알지 않고서야 가능한
발언이겠는가?
그들의 이러한 모든 발언과 정책 방향의 설정은 당연히 그들의
현실인식, 사회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노동자 서민이 겪고 있는 오늘의 모든 고통과 시련의 근원은
바로 기성 정치권에 있다”(조현연, “정치개혁 기본 철학”,
ꡔ진보정치ꡕ 111호, 2002년 1월 11일-17일).
그렇다. “노동자 서민이 겪고 있는 오늘의 모든 고통과 시련의
근원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성
정치권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부르주아
정치권의 ‘개혁’을 자신들의 역사적 소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대선 과정을 거치면서 민노당은 자신들의 지향을
드디어 최종적으로 그리고 드러내놓고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권 대표가 회견문에서 다짐한 부르주아 제도권의 ‘선명
야당’이다. 다른 간부들은 이를 서유럽형의 사민주의 정당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의 발언도 들어 보자.
◇ 조희연: “…기성정당의 구도를 파괴하면서 진보정당의
기반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진보정당이 강력하게 진입하지
못하면 미국식 모델이 될 수 있지만 한국 진보정당의 정치사회적
기반은 훨씬 강하다. 자유주의 정당이 없고 보수-진보 양당을
기본축으로 하는 유럽식 모델로 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아직 보수주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정당은 유럽적 정당발전을 전망하면서 개입해
들어갈 필요가 있다.” (“2002 대선 특집 좌담 ‘선명한
유일야당 역할 해나가야’”, ꡔ진보정치ꡕ 115호
<당원판>, 2002년 12월 23일~12월 31일)
◇ 노회찬 (사무총장): “김대중 정부의 실패는 민주당의 부패와
무능으로부터 비롯됐지만 한나라당이 ‘나쁜 야당’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 제대로 된 야당 구실은
민주노동당이 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그런 역할을 자임하고
선명 유일 야당의 위치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당 한 의원이 ‘민주노동당이 제1야당이 돼야 정치가
발전한다’고 했다. 의석수와 무관하게 제1야당이 되기 위한
노력을 지금부터 해야 한다.” (이상, 같은 곳)
◇ 장석준 (중앙 선대본 기획위원):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단순한 득표수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 …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을 기약하는 가장 촉망받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 우리는 투표용지 위에는 아니지만
적어도 대중의 가슴속에 우리의 존재를 뿌리내림으로써 우리
사회가 미국과 아르헨티나의 길이 아니라 유럽의 길, 현재의
브라질의 길로 향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강력한 진보정당이
노동자․서민의 진지로 버티고 서 있는 사회 말이다.”
(“진보정당 1백만 표 시대 개막의 의의―당내 시각, 풀뿌리
노동자 서민 속으로”, ꡔ진보정치ꡕ 115호, 2002년
12월 23일-12월 31일)
유럽의 길? 서유럽형의 사민주의 정당? 그러한 정당이란 다름
아니라 노동자 대중을 정치적 포로로 잡고 있는 독점자본 좌파의
정당 아닌가? 그리하여, 미 제국주의와 더불어 이라크를,
보스니아를, 코소보를 침략하고, 폭격하고, 그 제국주의적
전리품을 나눠먹는 그러한 제국주의 정당 아닌가?
바로 이렇게 당이 좌표를 설정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김대중
정권 하에서 남다른 각광을 받으며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선전했고 이제 노무현의 ‘정권인수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는
정태인 박사의 다음과 같은 축하와 모욕적 훈수를 자신들의
당보에 대접해 싣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 정태인: “… 축하할 일이다. … 그러나 더 큰 나무로
성장하기 위해 가다듬어야 할 것도 많다. 우선 조금 더 현실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상가임대차 보호법과 같은
구체적인 대안은 현실의 투쟁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와 같은 추상적 구호는 정책이
아니며 일반인들의 신뢰를 얻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없으니 추상적이고 화끈한 정책(?)을
내놓고 이것이 다시 정당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악순환부터
끝내야 한다. … 원론의 수준에서 올바른 기조를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구체적인 정책에서 날카롭게 상대를 공박하는, 지적이고
매력적인 좌파를 우리나라에서 보게 될 날을 기대한다.”
(“진보정당 1백만 표 시대 개막의 의의―외부 시각, 지적이고
매력적인 ‘좌파’를 기대한다”, ꡔ진보정치ꡕ
115호, 2002년 12월 23일~12월 31일)
VIII
한편에서는 노무현의 당선으로, 그러니까 부르주아 대선을
통해서 사회가 무언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 같은 정치선전이
팽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노총이 자신의 정당으로
지지하는 민주노동당이 이렇게 서유럽형의 사민주의 정당으로,
그러니까 “지적이고 매력적인 ‘좌파’”로 자신의 진로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2002년의 대선. 거기에서 승자는 분명
독점자본이고, 패자는 노동자 계급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 운동이, 특히 민주노총이 이러한 성격의 2002년
대선을 뼈아프게 평가하면서 민노당에 이끌린 노동자 계급의
‘부르주아 정치권으로의 편입’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진정한 자주적 정치세력화를 새롭게 모색하지
못한다면, 민주노총을 위시한 노동운동의 앞길에는 더욱 커다란
시련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