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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선과 이데올로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84호
최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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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선과 이데올로기: 분석과 전망*



최 형 익

연구위원/ 한신대


1)


1. 들어가며

최근 치러진 16대 대선과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그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반공주의에 규정된 자유민주주의 또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심각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선거와 이데올로기 균열구조의 관계가 반드시 일대일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거시적 사회관계를 반영하는 정치이데올로기는 장기간 구조화된 것으로, 따라서 모든 선거가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선거정치의 결과를 해석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징후적으로 독해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의 변화와 관련하여 1963년 4대 대선과 2002년 16대 대선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전제하에, 지배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특성을 살펴보고, 이러한 분석에 입각해서 16대 대선에서 전개된 이데올로기적 균열 양상과 함께 노무현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에 대해서도 함께 고찰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사용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은 플란쨔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와 유사하다. 플란쨔스에 의하면,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지배계급에 대한 국가의 고유한 조직화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즉 지배계급들의 권력 재생산에 요구되는 전략을 발언하고 정식화하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가 구체화하는 전략이 완전히 감추어질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략이 국가의 의지에 반하여 알려지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수준에서는 전략적 발언이 지배계급을 조직하는 국가조치의 필수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는 국가의 전략을 항상 투명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이는 피지배계급에게 알려질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러한 불투명성 자체가 다양한 전략의 충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1)



2. 1980년대 이전의 국가 이데올로기:

   반공주의, 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삼중주

해방 이후, 정확히 한국전쟁 이후부터 한국사회의 정치구조를 규정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반공주의’(red complex)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참혹상에 대한 반도이남 사람들의 집단 체험은 반공주의를 이 땅에 태어난 모든 한국민들이 시민권 취득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통과의례이자, 일종의 고해성사로 자리잡게 했다. 또한 반공주의는 한국전쟁의 경험을 통해 그것을 내재화한 전전세대(戰前世代)를 넘어서 공민교육의 지상과제로 호명되었고, 제도권 교육을 통해 전후세대(戰後世代)의 의식과 몸을 규율하는 이른바 ‘생체권력’으로 전환하기에 이른다.2)

그런데 정치적 측면에서 반공주의가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줄곧 한국사회의 변동과정이 야기할 그 모든 정치적 변화의 내용과 한계를 사실상 결정해왔기 때문이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전후 한국에서 발생한 그 어떤 정치-사회변동도 반공주의적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반공주의가 국가의 존립요건 혹은 지상의 국가이데올로기로 호명되는 상황이 빚어낸 정치적 결과란 무엇보다 권위주의 혹은 파시즘적 정치체제를 수동적으로 묵인하게 하는 대중적 국가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공주의가 독재정권이 이완되는 민주화과정 하에서조차 야당과 저항세력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의 내용 역시 영-미식 자유민주주의 그 이상을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반공주의는 이승만 정권이나 5․16 군사쿠데타를 통한 박정희 유신정권, 전두환 5공 정권 성립의 토대였을 뿐만 아니라, 4․19 시민혁명이나 1980년대 이전의 다양한 민주화 시위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정권과 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세력이 넘을 수 없는 전략적 경계를 사실상 결정한 이데올로기적 균열구조로 작용하였다.3)

하지만, 억압 이념으로서의 반공주의만을 가지고는 거꾸로 그동안 성립했던 다양한 정권의 성공담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라는 헌정체제의 연속성을 모두 해명할 수 없다. 구체적 현실을 들여다보자면, 반공주의는 언제나 긍정적 양상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전후 50여년간 한국사회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는 이른바 ‘집단적 열정’의 기제로 작동할 수 있었다. 반공주의의 이면에서 그 긍정성을 담지한 대표적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함께 작동했다. 요컨대, 전후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정치질서는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가 배치되는 제 양상을 통해 잘 설명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이데올로기의 조합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권은 바로 이승만 제1공화국이었다. 이승만은 60년 3․15 부정선거에 따른 4․19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적어도 자유민주주의적 헌정질서 그 자체를 파괴한 적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항상 대통령이 되기 위해 대통령 선출 규칙을 바꾸긴 했지만, 문제는 그와 상대하여 어떠한 정치인도 보통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해서 이승만은 당시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추앙받았지 그것을 파괴했다고 비난받지는 않았다. 게다가 야당이었던 한민당의 유력 인사들이 대부분 과거 친일파 경력을 가진 지주계급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자체로 민중적 정당성을 지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해방 이후 농민들의 최대 숙원이었던 토지개혁 역시 일관되게 반대하지 않았던가. 이를 잘 알고 있던 이승만이 북한과 자신의 정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동원한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주의’였다.

해방공간에서 이루어진 남한의 국가수립 과정이 북한에 비해 덜 급진적이고 반민중적 요소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과 비교했을 때만 그렇다는 얘기이다. 동일한 시기에 독립한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비교해본다면 남한의 국가수립 과정은 사회 내부에 강력한 물질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예외적 후원아래 자유민주주의적 형태의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등 구체제와 상당히 단절적인 정치변동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등 우익민족주의세력이 단정수립을 결행하는데는 미국의 경제-군사적 지원이 주요한 물적 토대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 제헌헌법의 내용이나 토지개혁시안에서도 드러나듯이 유사한 시기에 독립한 어느 신생국가도 따라오기 힘든 정치적 민주주의와 함께 지주제도 청산을 골자로 하는 비교적 강도 높은 사회-경제개혁 조치를 통한 독자적인 국민국가 형성 프로그램을 가동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최상위의 지배이념으로서, 의미 그대로의 민족주의를 국민국가 수립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정치적으로 동원한 쪽은 북한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었다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이승만을 위시한 남한의 우익세력이 일관되게 내세운 정치논리는 북한은 민족보다 계급을 더 앞세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선전이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문제는 남한 민중에게 민족우선 논리는 매우 효과적으로 삼투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익민족주의 세력은 민족주의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혼합한 제헌헌법을 장착시킴으로써 정당정치와 함께 보통선거권의 일거 도입에 따른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하는 정치체제를 형성하였다. 이를 통해 남한에서도 그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정치적 주권자로서의 인민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상비군, 즉 국군(National Army)의 창설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인민의 군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외적 안보를 위한 국민군대의 유무 여부가 한 나라의 주권을 언표하는 주요한 정치적 형식이라 했을 때, 해방 이후의 남한을 제국주의의 대리정권이나 하수인으로 보는 입장은 잘못된 접근이다. 더구나 1948년 남한에 독자적인 국가가 수립되고 미군정이 폐지된 이후에는 남한을 특정 강대국의 식민지로 간주하는 것은 적어도 그러한 국가창설에 동의한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또한 지긋지긋한 36년 동안의 일제식민지 체제에서 갓 해방된 사람들에게 우리는 또 다른 나라의 식민지라고, 따라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쉽게 동의를 구하기 어려웠을 일이다.

한국전쟁 후에 이승만이 주창한 ‘북진통일론’만 해도 그렇다. 국제정치구조에서 작동하는 세력관계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던 국제정치의 귀재이자 현실주의자였던 이승만이 북진통일론이 얼마나 허황되고 실현불가능한 것인지 모를 리 없었다고 여겨진다. 문제는 그것이 행사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이다. 북진통일론은 반공, 반북주의라는 부정성을 가리운 채 남한 사람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일깨우고 그 중심에 이승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킨 뛰어난 이데올로기적 호명이었다. 한마디로, 북진통일론은 남한 국민들을 응집시키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잘 결합되어 있었으며, 나아가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무조건 보증했던 일종의 ‘만병통치 이데올로기’(panacea)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수호자, 나아가 국부라는 당대의 일반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민생, 즉 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한국사회 앞에는 자유민주주의에 더해 경제발전이 매우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중대한 의제로 놓여있었다. 군사쿠데타라는 자유민주주의적 헌정질서의 파괴행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생각보다 일찍 국민들로부터 승인받게 된 것은 바로 현대화되고 상대적으로 단일한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군부가 경제발전, 소위 ‘조국 근대화’의 구호를 전면에 내걸었기 때문이다.4) 더구나 박정희는 이유야 어찌됐든 재빨리 군정을 접고 민정이양을 단행하여, 자유민주주의적 헌정질서를 회복했다. 그리고 구 한민당 계열의 민정당 후보인 윤보선과 정면 승부하는 길을 선택했다.

대통령 선거와 한국사회, 특히 이데올로기적 균열구조의 변동양상만을 놓고 보았을 때,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은 1963년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이후 근 40여년 간 이데올로기 지형을 사실상 결정한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 곧 발전주의를 통해 산업화에 대한 대중들의 열정적 집합의지(elan)을 불러내려 했던 박정희와 공화당 전략의 승리였기 때문이다.5) 한마디로, 시대적 변화의 욕구를 간파했다고나 할까.6) 이에 반해 민정당 윤보선 후보는 별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이른바 네가티브 켐페인으로 일관했다. 박정희의 전력을 문제삼는 식의 색깔론, 즉 ‘반공주의 전략’을 구사했다.7) ꡔ동아일보ꡕ는 당시 선거구도와 그 결과를 ‘보수야당 대 진보여당’의 대결, ‘보수적 기질 대 자유주의적 기질간의 대립’으로 표현했다.8) 여당 후보는 한국사회의 비주류 출신, 이에 반해 야당후보들은 모두 명문엘리트 출신이었다는 점을 포함해서 여러 측면에서 4대 대선은 16대 대선과정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향후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균열구조와 관련하여 박정희 체제를 합법화한 4대 대선이 갖는 의미는 발전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결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거꾸로 지배이데올로기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심각하게 결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박정희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 발표에 즈음하여 작성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와 같은 후진민주국가에서 실시하려 하는 경제개발계획이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를 재확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경제적 개발과 국민생활의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후진민주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재확립하는 길은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과 국민소득의 향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원칙을 충실히 조화시켜 종국적으로는 국민복지, 특히 개개인의 복지향상에 도움을 주는 데 있어야 된다고 단언하고 싶다. 따라서 서구에서 물려받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체제 하에 종국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소득을 높일 수 있는 경제개발계획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세아에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패와 장래를 결정하게 될 유일한 관건이 될 것이다.”9)


박정희 정권의 등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명한 가장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체제가 근 20년간 몰아부친 근대화와 발전을 향한 민족총화단결의 이데올로기는 한국사회를 가히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무엇보다 물질적 잉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했다.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은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조차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를 급속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근대적 자본가 집단과 거대한 자유주의적 중간계급이 창출되었다.

이것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방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후 최초로 국가권력에 필적하는 사회계급 세력이 성장했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승만 체제와는 전혀 다른 물질적 기초를 지닌 지배계급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반공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던 이들에게 택일이 강요된다면 경제성장을 유보하기보다는 자유민주주의를 유보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했다. 해서 박정희 정권이 표방한 경제발전과 자유민주주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훼손될 경우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태세가 되어있었다. 이들은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보다 자유민주주의 복원을 외치는 야당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으며 국회의원 총선 시기 내내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식으로, 선거를 통한 사보타지 전략으로 맞섰다. 여기에다 경제성장마저 정체될 경우라면 박정희 유신정권의 붕괴란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를 포함한 중산계급은 정권이 강압일변도로 통제하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한마디로 박정희 체제는 자기의 무덤을 팔 인부(digger)들을 자신의 발 밑에서 자라나게 했던 것이다.



3. 민주화 이후의 이데올로기적 균열구조: 지역주의와 신자유주의

한국인들에게 반공주의가 이데올로기적 자기검열 기제로 작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유민주주의가 중요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악랄한 납치, 고문과 정치적 살인을 통한 인권유린 등 반공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렸던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체제는 역설적으로 반공주의가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억압적 이데올로기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의 불협화음이라는 79~80년의 정세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복원되지 않고 유신체제와 연속성을 지닌 전두환 체제가 들어섰다.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박정희 체제 성공의 유산이지만 동시에 그 몰락의 원인 제공자이며, 반공 속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지속적 경제성장과 자유민주주의 양자를 만끽하고자 하는 그러나 전자를 위해 후자를 기꺼이 유보할 태세가 되어있던 자본가 집단과 중산층의 이른바 안정과 질서를 위한 보수동맹의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다. 1980년대 초반의 상황에서 이들의 정치적 동요의 징후는 명백했다. 박정희 체제의 자식들이었던 이들은 양 김씨의 전면등장, 특히 그 가운데 김대중과 재야세력의 연계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속에서 해방 후 좌우익 대립과 한국전쟁을 떠올리며 혼란의 징후를 발견했다. 사실 전혀 혼란스러울 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체제의 성립은 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조차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덜 되어있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 돼버렸다.

1987년에 발생한 일련의 정치변동의 결과는 따라서 ‘민주화’라는 애매모호한 개념보다 외형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복원 내지 유신이전의 질서, 특히 1963년의 질서로 다시 돌아갔다는 의미의 ‘재민주화’로 보는 게 보다 정확한 개념규정일 것이다. 87년 헌법은 사실 62년 헌법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동소이하며, 이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평민당 세력이 적극 주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은 그 자체로는 사실상 박정희가 1963년 이후 한국사회의 발전경로로 천명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데올로기를 재차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한국사회의 주도적 정치분파들은 그 사이에 발생한 다양한 사회, 경제적 균열을 때론 고의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정치제도를 창설하는데 있어 계산에 넣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6공 헌법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라 하겠다.

1987년의 정치변동이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실망스런 선거결과로 잘 부각되진 못했지만, 전후 최초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집단적 도전이 사회적, 물질적 힘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사이의 정치연합으로 표현되는 저항세력은 자본의 성장속도에 비례해서 80년대 들어 급속히 성장했으며, 그동안 한국형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실질적 민주화의 단행을 요구했다. 저항정치의 와중에 발생한 1987년의 위기는 한 측면에서는 한국사회의 전후 지배구조에 파열구를 냈다는 측면에서 성공한 민주화 투쟁이었지만, 동시에 지배계급이 지배전략의 변화를 통해 파열지점을 신속히 복구해냈다는 측면에서는, 결과적으로 해방 이후 처음으로 세력균형에 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10)

이러한 세력균형은 노태우 정권의 약체성의 이유와 함께 3당 합당으로 표현되는 지배집단의 보수대연합 요구를 모두 설명해주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3당 합당은 외형적으로 호남을 배제한 지역주의 연합으로 외표화 되었지만 사실은 자본가, 중산계급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기득 이권을 상실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정치적 각서였다. 여기에 김대중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단지 초대받지 못했을 뿐이다.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분파를 대변하고 있던 김대중은 지배집단에겐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들에게는 김대중 분파가 자유민주주의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 이들에게는 모두 사회주의로 통칭되는, 그러나 실제내용에 있어서는 가령 유럽식 사민주의 정책을 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잠재해 있었다.11) DJ가 그동안 걸어온 정치적 역정에 비추어볼 때, 사민주의적 성향을 띨 가능성이 당시까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김대중과 자유주의적 개혁분파는 공안정국을 통해 순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순치과정은 이후 New-DJ플랜이나 15대 대선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치분파인 김종필과의 연합을 통해 지배세력의 신인도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지배분파들 사이의 정치적 분열이 1987년 이후 세 차례 대통령 선거를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본다면, 지역주의는 이들 자유민주주의 분파들간의 정치적 대립과 정략이 빚어낸 부수적 이데올로기 또는 선거정치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 내부 갈등의 결과이다. 지역주의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통해 새롭게 조성된 정치적 균열을 담아낼 수 없던, ‘그들만의 리그’로서의 자유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 내부에서 각 정파간 경쟁이 그나마 유일하게 동원할 수 있었던 정치적 자원이었다. 이는 반대로 반공주의와 마찬가지로 지역주의가 정치적 동원을 위한 유력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 이를테면 사민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정치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에 공존해야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주의보다는 양김 정권을 연결지워주며, 특히 김영삼 정권 후반기와 김대중 정권의 전체 시기를 규정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다. 1997년 15대 대선을 통해 등장한 김대중 정권은 공식이데올로기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천명했다. 이러한 정치노선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맥락은 정권이 공식적으로 표방한 언술 그 자체만으로 평가 할 수 없으며, 사회-경제적 관계의 변화, 이를테면 정권교체기에 동시발생 한 외환위기 및 IMF 사태의 관리방식과 관련지어 평가되어야 한다. 외관상, 김대중 정권은 경제위기를 타개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방식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을 답습한 것이다.12) 단적으로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비해 재벌지배 경제구조를 포함하여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보수적 자본-언론권력 카르텔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1997년 말 한국을 강타한 경제위기 사태는 박정희 정권이래 지속돼 온 성장 일변도의 출혈적 발전주의 전략을 폐기하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 혹은 발전연합의 필요성에 직면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은 우경화 노선을 통해 경제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사실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병행발전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는 박정희 노선의 변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박정희식 발전노선이 등장초기에 내장했던 일정한 진보성은 2002년 한국사회에서 그 퇴행성을 명백히 드러냈다.13) 따라서, 16대 대선은 조희연 교수의 표현대로, 이른바 문민정부와 국민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부작용 때문에 문민정부나 국민정부와 같이 개방화 및 민영화 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나, 개방화와 민영화의 부작용들에 대해서 보완하거나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상황에서 치러지게 되었다.14)



4. 16대 대선과 이데올로기 균열

16대 대선은 특별한 정책-공약의 차이보다는 현대 선거의 일반적 경향처럼, 흔히 이미지 선거로 치러졌다고 보는 게 중론이다. 그동안 한국에서의 대선은 정책적 차이나 계급 계층적 지지기반에서의 차이를 드러내기 보다 이른바 모든 계급, 계층에 호소하는 식의 ‘인중(catch-all) 전략’이 구사되었다. 이념적 차이를 강조하다가는 자칫 색깔론 등 역풍에 휘말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미지건 해석 여하에 따라 이미지 아래 감춰진 이념적 차이를 다소간 반영하기 마련이다.

16대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의 경우, 이슈선점 전략에 입각 상대방의 의제를 무력화하기 위해 반미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등 보수적 이미지를 희석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언론과 유권자들은 역시 이회창 후보를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안정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보수주의자로, 노무현 후보를 개혁과 변화를 바라는 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진보주의자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보수와 진보라는 구도에는 사실상 구체적으로 어떤 이념적 차이가 있는지가 대단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분석과 신문기사 역시 여기에서 멈춘다. 이러한 이유에서 단순화의 위험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좀더 세심한 이데올로기 분석은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진다.

16대 대선, 특히 선거운동에 실제 돌입해서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이랄 만한 것이 별로 빚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진보주의자로 인식돼온 노무현 후보와 재벌 총수이며 보수주의적 경향을 띠는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후보의 단일화 성사가 크게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적 선거전과는 달리, 사회적 수준에서는 북핵문제, 여중생장갑차 사망사건 등과 같은 미국관련 사건으로 이데올로기적 갈등이랄 만한 사건들이 터져 나와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노무현 후보는 이러한 사건에 접하여 대선을 ‘전쟁이냐 평화냐’의 대립구도로 놓으며, 자신을 평화애호세력으로, 따라서 북핵문제는 대화와 타협에 따라 해결되어야 함을 그리고 해결될 수 있음을 설파했다. 이에 반해,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한미공조만을 강조하는 이회창 후보의 대북정책은 대화보다 봉쇄를 고집하는 냉전주의자의 그것으로 비쳐졌다. 이데올로기 대립구도에서 진보주의자가 우세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사실 선거전을 이데올로기적 공세로 끌어가는 것은 보수우익 세력의 전매특허로 보수주의자들에게 많은 이득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지난 대선시기를 놓고 본다면, 색깔론 시비로 상징되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당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볼 근거는 희박하다. 13대 대선에서 KAL기 폭파사건의 영향으로 색깔론이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의 당선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주의나 후보단일화 실패의 요인보다는 영향이 작은 것이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14대 대선에서 이른바 ‘DJ 비토론’ 등 색깔론과 유사한 여당측 전략구사가 있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 갖는 이념적 거리가 그리 크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명력이 없으며, 15대 대선의 경우 색깔론의 직접적 피해자인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점에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이번 16대 대선의 경우 매우 흥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선거시기 자체보다 선거전에 직접 돌입하기 이전에 이회창 후보측이 이데올로기적 균열이랄 만한 것을 노무현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들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선거전에 이용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되는데, ‘주류’(主流, main-stream)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이데올로기 그리고 중산층에 기반한 보수주의적 안정희구세력이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온 그리고 이만큼 끌어올린 주류이며 자신이 바로 주류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을 대표해서 나온 대통령 후보이기 때문에 마땅히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회창 후보진영의 논리였다. 소위 ‘주류론’은 ‘바로 이거야’ 라고 내심 쾌재를 부르던 조중동 등 보수일간지의 열렬한 성원아래, 이른바 ‘여론주도층’(opinion leaders)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가운데, 선거전을 리드해 가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들은 그동안 김대중 정부의 정리해고 우선순위의 구조조정정책, 공기업 민영화 등 민중생존권을 파탄내는 신자유주의 정책 덕에 한국사회 깊은 곳에서 이념적 좌선회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2002년 4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 특히 광주경선에서 노무현의 대반격은 이러한 사회적 수준의 이념적 좌선회를 반영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의 정치적 흐름은 과거의 그것과 몇 가지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그 동안 한국의 부르주아계급이 정치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대중에게 사용해왔던 유력전략인 지역분할과 반공주의가 더 이상 먹혀들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바로 이 점에 경악했다. 민주당 경선을 기점으로 불기 시작한 ‘노무현 바람’으로 그다지 유력하지 않았던 노무현 후보의 단순지지율은 경선 시작 약 보름이 채 못되어 30% 이상 상승했다. 30%를 선거에서의 득표수로 단순 환산하자면 거의 700~800만명 가량이 마음을 바꾸어 먹은 것이다. 이에 반비례하여 김대중 정권 4년 동안의 온갖 실정, 부정부패 덕에 차기 대통령을 거저 먹을 것 같았던 이회창과 민주당내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인제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지율의 등락 자체에 있다기보다 이들이 어떠한 정치전략을 택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회창과 이인제는 마치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듯 당치않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에게 좌익이라는 이념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는 이른바 그동안 한국정치에서 위세를 떨쳐온 우향우 전략의 최근 결정판이었다. 이와 달리 노무현은 이념공세에는 직접적으로 응대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과거 이러한 공세가 있을 때 사용되었던 김대중의 New-DJ플랜과 같은 우선회를 택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대결을 선호했다. 자신의 지지율이 지금껏 왜 상승했는가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우익 기관지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이후 지원 사격을 개시했지만 때늦은 것이었다. 이러한 공세를 비웃기라도 하듯 노무현 지지세는 더욱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불과 한 두달만에 대통령 선거구도를 일거에 뒤흔들어 놓았다. 이는 DJ 정권의 실정에 서민대중들이 피로해 있고 매번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반사이익을 챙겨 왔던 이전까지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가공할 사태의 반전이었다.

당시 민주당 경선에서의 노무현 현상의 등장은 외관상으로는 영, 호남의 고른 지지와 수도권 그 가운데 20~40대 청장년층의 폭발적 지지에 기반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노무현의 지지율 상승은 역설적이게도 반DJ, 반(反)신자유주의라는 대중적 정서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가령 민주당 내 경선이 약 40여일 이상 지속된 발전소 노동자들의 민영화 반대 파업과 겹쳐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전 같으면 그러한 파업사태는 사회를 대단히 혼랍스럽게 만드는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되어 보수우익적 성향의 후보에게 이득을 주었을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분석에 입각하여 2002년 4월 당시 잡지 기고문에서 노무현 바람으로 특징지워지는 당시의 한국정치의 흐름을 일과적 현상이 아니라 그 사회-경제적 물질성을 체득한 안정적 흐름으로 정의 내리고자 했으며, 노무현이 8개월 후 대통령 선거 당선권에서 이미 반환점을 돌아섰다는 섣부른 예측까지 내놓았다. 적어도 이데올로기적 구도에 입각한 분석만 놓고 보자면 당시의 진단은 그런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5. 노무현 정권의 이데올로기: ‘제3의 길’?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나온 몇 개의 선거분석 기사에서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하여 눈에 띠는 대목은 이번 선거가 ‘진보, 보수의 대결구도’로 치러졌다는 것이다. 먼저 한국일보는 이와 관련하여 ‘변하는 정치: 진보-보수 균형이뤄’라는 제호 아래 “16대 대선은 큰 변화였고 혁명”이었으며, “냉전 이데올로기가 가미된 보수가 탄탄한 주류를 형성해온 우리 사회에서 ‘개혁’과 ‘진보’ 물결의 위력을 보여줬다”는 분석기사를 실은 가운데, “1987년 6월 항쟁을 경험한 386세대를 중심으로 냉전 이데올로기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진보세력이 확대돼 보수세력에 육박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정책의 성패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저울추처럼 번갈아 우위를 점하는 보-혁 균형 구도로 발전해갈 것으로 본다”는 전문가들의 향후 진단까지 곁들였다.15)

학자들의 시각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크게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조희연 교수는 노무현의 당선과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약진을 한 데 묶어 “파탄에 직면한 제1기 민주화의 ‘신진보화’(新進步化)를 상징하는 것”으로 규정한다.16) 안청시 교수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한국의 ‘비(非)서구형 민주화’의 성공”으로 보다 비교정치(比較精緻)하게 규정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노후보의 선거운동은 단순한 이회창 압도가 아니라 민주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고 동화시키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모두가 변혁 세력이고 ‘새로운 시민’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생긴 것입니다. 영 파워의 ‘뉴 시티즌십’(새로운 시민권)이라고 할까요.”17) 이 밖에도 ꡔ조선일보ꡕ는 「아침논단」에 한 소장정치학자의 입을 빌어 ‘한국의 보수는 왜 패했나’라는 글을 실었는데 그 학자는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합리적 보수이념’의 부재를 패배의 근본요인으로 꼽았다.18)

그런데 위 분석의 공통된 문제점은 보수와 진보를 말하고 있지만, 보수와 진보의 구체적 내용, 특히 새롭게 등장한 진보 이데올로기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깊게 들어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하에서는 소위 ‘진보의 승리’라 일컫는 노무현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시론적 분석을 하겠다.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와 관련하여, 16대 대선의 결과를 분석하자면, 민주화 이후 반공주의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퇴행성이 진행돼 왔으며, 이러한 퇴행성이 대중적 수준의 이념적 좌선회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좌선회의 의미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지닌 정치적 좌익, 곧 사회주의 이념일반의 지지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중앙에 놓고 거기에서 또는 그보다 오른편에서 보다 왼쪽으로 이동했다는 의미에서 좌선회라는 규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좌선회의 결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내에서 그 동안 각각 보수와 개혁분파를 담지해온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상호공멸이 현실화된 것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1948년 제1공화국 제헌헌법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한 이래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때로는, 심지어 박정희 정권하에서조차, 앞장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체제존립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그 반대로 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저항이데올로기의 자원으로 이념적 기능을 공히 행사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이념 그 자체를 새롭게 혁신하건, 아니면 그 외부에 기반하건 새로운 대중적 정치이데올로기‘들’의 등장은 불가피하며, 노무현 정권의 이데올로기 역시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과연 한국에서 전개된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진정한 또는 순수혈통의 자유민주주의와 비견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러한 물음에 올바로 답하기 위해서는 수준을 나누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대다수는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의 인식의 근저에는 자유민주주의, 특히 영미식 앵글로색슨 사회에 대한 물신숭배랄 만한 것이 깔려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적 원형으로 놓고 한국과 같은 과거 후발형 개도국은 그러한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하며, 바로 그것이 ‘정치-경제-사회발전’이라는 관념 말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미국과 거의 동일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향유하는 영국의 유력 일간지 ꡔ더 타임스ꡕ가 최근에 전한 현재의 미국에 대한 진단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ꡔ더 타임스ꡕ는 ‘미국은 미쳤다’라는 제호아래 미국은 과거 매카시즘 열풍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월남전보다도 파괴력이 큰 역사적 광란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1월 15일 논평했다. 칼럼니스트 존 르카레는 이 날짜 더 타임스에 게재된 ‘미국은 미쳤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매카시즘 시절과 마찬가지로 고분고분한 미국언론과 관련된 기업들의 이해 관계가 미국을 세계의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든 자유를 다시 한번 체계적으로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빈 라덴이 공격을 하기 수년 전에 이미 계획됐으나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빈 라덴이었다며 그가 없었다면 부시정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이 어떻게 당선되었는지와 엔론사태,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유층 옹호, 무모할 정도의 세계 빈곤문제 무시, 국제조약의 일방적 파기 등과 같은 곤란한 문제들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19)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변질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퇴행적 경향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퇴행을 그대로 수용, 지지, 묵인 혹은 저항하느냐에 따라 상이한 정치적 결과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때 한국의 사례는 비교적 저항에 가까운 사례라고 여겨진다.

둘째로, ‘한국에 과연 진성(眞性) 보수가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는 곧 한국의 보수가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기반한 것이었는가를 되묻는 것이다. 최근 ꡔ조선일보ꡕ에 실린 윤평중 교수의 <시론> ‘한국에 보수주의가 있는가’가 대표적 경우에 해당한다. 윤 교수는 “표면적으로만 보면 보수를 자임하는 정당이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경제는 여전히 대기업 집단에 의해 좌우되며, 보수지를 자처하는 신문들이 신문시장의 70% 이상을 점하는 현 상황에서” 과연 보수주의의 위기를 운위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런 현상적 지표는 한국 보수가 맞닥뜨린 위기의 본질을 오히려 은폐”하고 있다며, “위기의 핵심은, 보수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서 급속히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원래 자유민주주의는 독립적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보수 기득권 세력은 시민들을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 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왜곡해 악용하기 일쑤였다. 냉전반공 이데올로기, 절대적 시장 숭배,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관행 등이 어지럽게 섞여있는 한국 보수의 지형 속에서 일관된 합리적 이념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결국 한국 보수가 당면한 위기는, 자유민주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제대로 된 보수주의가 없는 데서 오는 것이다.”20)


지당한 얘기다. 하지만, 주장의 핵심이 한국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혁신하는 일은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들의 임무라는 것을 적절히 지적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내 주장을 오히려 뒷받침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승리한 ‘상대적 진보주의자’ 노무현 정권의 이데올로기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 정치게임 규칙을 벗어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현재 기승을 부리는 영미식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형태의 이념적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16대 대선의 결과에 따른 정치지형의 변화, 즉 반공우익을 대표하는 자민련의 몰락이 현저해지고, 비록 의회를 지배하는 거대정당이긴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적 보수분파인 한나라당과 그것의 개혁분파인 소위 동교동계라고 일컬어지는 기존 민주당 주류세력이 동시에 약화되며, 지역선거와 대선에서 어렴풋이 확인된 사실이긴 하지만, 사민주의 좌파 내지 정통 사민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등장 혹은 약진이 현실화되는 조건에서 과연 노무현 정권은 어떠한 이념적 포지션에 기반하여 정치권력을 행사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다.

대중적 좌선회가 강화되어 보수-진보가 다소 균형을 맞춘 상황이긴 하지만,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적 보수가 압도적 힘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사회 현실에서 노무현 정권의 선택은 사민주의와 신자유주의 중간에 위치한, 소위 ‘제3의 길’로 일컫는 유럽식 중도좌파 노선이나 과거 루즈벨트, 케네디나 존슨, 카터로 상징돼온 미국식 리버럴 좌파 이념에 가까울 것으로 판단된다.21) 물론 김대중 정권시절에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을 ‘제3의 길’에 위치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문제는 당시 경제위기 및 IMF 구제금융이라는 객관적 조건에서 김대중 정권의 주체적 성격은 물론 대중적 수준의 이데올로기적 변화의 유인이 제공될 수 없었다는데 있다. 따라서 ‘제3의 길’ 논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곧 자유민주주의 사이드의 압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합리화하는 의제(擬制)적 논의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작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 사민주의적 정책압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이 제기된 정치적 맥락상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그동안 신자유주의 정책 일반을 뒤엎는 급격한 사회-경제적 제반 정책을 현실화하지 못할 것이라는 구조적 한계 및 현실판단에 기초해서 신자유주의와 사민주의 이념을 배합하는 이른바 ‘제3의 길’ 노선이 현실화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자 한다. 실제로 ꡔ슈피겔ꡕ 등 독일의 유력 잡지들은 선거 이후 노무현 당선자를 ‘한국의 슈뢰더’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단지 노무현이 슈뢰더와 마찬가지로 반미정책을 선거에 활용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최근 전경련 간부가 ‘차기 정권의 목표는 사회주의’라고 발언한 해프닝 역시 그 고의적 악의성과는 별개로 노무현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가늠하는데 일정한 시사점을 던져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것의 직접적 실행여부와는 상관없이, 노무현 정권의 이데올로기만을 놓고 볼 때 이른바 ‘제3의 길’ 노선과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점에서인가? 먼저 노무현 노선을 판단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주는 자료는 아무래도 인수위가 설정한 ‘10대 국정과제’가 가장 적절할 것으로 여겨진다. 안소니 기든스에 의하면, ‘제3의 길’은 ‘현대화 도상의 사회민주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복지국가적 사회민주주의와 시장만능 지향의 신자유주의 사이의 중도노선으로서의 제3의 길은 세계화와 지식경제의 부상이라는 ‘쌍둥이 혁명’에 대응하면서 사회정의․연대․평등․공생이라는 전통적 좌파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장의 활력을 적극 수용하는 경제개혁, 민주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높이는 정부개혁, 그리고 국가와 시장의 동반자적 관계로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려는 정치적 기획으로 ‘제3의 길’을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기든스는 제3의 길이 단지 선거용 정책프로그램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기획된 신좌파의 이념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22)


❙ 기든스는 평등과 복지라는 옛 사민주의 고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세계화와 정보혁명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노무현 정부가 제시한 국정 10대 과제 중에 대략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구축’ 항목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에는 남북경제교류협력, 동북아경제협력체제 구축(철도․에너지․금융등), 물류, 비즈니스 중심국가를 위한 기반구축이, 그리고 과학기술 중심사회구축에는 과학기술자 사기진작 및 과학기술인력 양성, 연구개발비의 투자확대, 기술혁신, 신산업 육성이 포함되어 있다.


❙ 경제적 측면에서 ‘제3의 길’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상승효과를 추구하고 공익을 염두에 두고서 시장의 역동성을 이용하자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시장경제를 적대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시장경제는 현재 실천 가능한 유일한 경제체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경우 다른 어떤 체제보다 월등히 뛰어난 번영을 낳을 수 있다는 게 기든스의 견해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선 분배 후 성장’으로 회자되듯이, 상대적으로 분배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칠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케인즈주의에 가까운 경제정책을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으로 요약된다. 여기에는 경제시스템의 개혁, 규제개혁, 금융개혁, 세제개혁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별히 재벌개혁관련 정책이 눈에 띤다. 우선 ‘공정한 시장질서’ 아젠다 중, 기업 투명성 제고 방안으로 인수위는 △증권 분야 집단소송제와 금융계열사 분리청구제의 도입, △출자총액제한 유지 등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위는 또 재벌 오너와 대재산가를 겨냥, 변칙적인 부(富)의 세습을 막는다는 목적의 상속․증여세 ‘완전 포괄주의’ 도입을 공식화했고, 정부도 연내에 도입하기 위한 실무작업에 돌입했다.


❙ 시장경제의 옹호가 곧바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백기투항은 아니다. 제3의 길은 시장을 최선의 것으로 보는 신자유주의와 달리, 시장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불평등과 환경파괴 등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균등을 제공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사회적으로 국가(정부)․시장․시민사회의 세 영역을 다시 연결하는 사회계약의 필요성, 이를 통해 세가지 사회적 주체가 균형이 잡혀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정의의 집행자로서 국가의 본래 기능을 회복시켜, 관료주의, 예산낭비 등 ‘국가실패’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든스는 시장과 국가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존재이며, 이들 사이의 갈등을 시민사회가 중재해야 한다고 본다.

노무현 정부가 이전 정부와 가장 차별성을 보이는 부분이 바로 정치개혁, 사회, 문화, 교육정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사회개혁 분야가 10대 국정과제 중에 가장 많은 6개 과제를 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항목에는 세부적으로 전 국민 건강보장제도 실현, 국민복지증진(기초생활보장제, 보육, 고령화대책, 장애인 등), 쾌적한 환경조성, 주택가격 안정 및 주거의 질 개선, 농어민 생활향상 대책이, ‘국민통합과 양성 평등사회 구현’ 항목에는 5대 차별(성․장애․학벌․비정규직․외국인) 해소, 지역통합(국가균형위원회 설치 등), 계층통합(빈부격차 해소 등), 노사화합(노사정위원회 등 노사협력체제), 양성 평등한 가족정책과 여성대표성 제고가 포함된다.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 실현’에는 공교육 내실화,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 강화, 선진국 수준의 문화 인프라, 세계 수준의 문화산업, 보편적 문화 향수권 보장, 지식정보사회의 전면화,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에는 지방분권화, 쾌적한 수도권, 신행정수도 건설, 지역전략산업 육성과 지방경제 활성화, 지방대학 집중육성이, ‘부패 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에는 국가시스템 혁신, 행정개혁(평가․분석시스템, 평가역량 구축, 전자정부 실현), 투명 공정한 인사시스템 확립, 재정개혁,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를 위한 시스템 구축, 그리고 ‘정치개혁 실현’에는 중대선거구제 등 선거제도 개선, 선거공영제 확대 등 돈 안드는 선거 실현,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원산지 유럽에서 좌, 우 모두에게서 비판받았다. 우파는 ‘제3의 길’이 여전히 복지국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은 황당한 꿈이라고 공격했다. 반편 좌파는 ‘제3의 길’이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를 용인하는 ‘가면을 쓴 신자유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몰아쳤다. 이러한 비판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기존 사민주의적 좌파가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매우 무기력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유럽의 경우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10여년이 넘는 시기동안 이념적 우선회가 진행된 이후 사민주의 정당이 재집권했다는 측면에서 기존 사민주의 이념이 우경화 되었다면, 한국의 경우 대중적 좌선회에 힘입어 어쨌든 97년 김대중 정권과 2002년 노무현 정권 등 오랫동안 권력에서 배제되고 기존 여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후보가 연속 당선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분파가 좌쪽으로 이동했다는 측면에서 동일한 정책이라도 상이한 정치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사회는 곡절이 있긴 했지만, 경제구조에 있어서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가동된 이래 40여년 만에, 그리고 정치구조는 1987년 6월 민주화시민항쟁 이후 약 15년 만에 서구사회의 그것에 거의 근접하는 도약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이러한 견지에 보았을 때, ‘만회된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이를 통해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한국의 ‘비서구형 민주화’의 성공”이라는 규정은 그 실질적 역사성을 부여받는다. 월드컵 4강 당시 일반시민들의 놀랍고 창의적인 자발적 거리응원은 물론, 여중생 사망사건을 계기로 전개된 대규모 SOFA개정 반미촛불시위는 비슷한 시기에 독일,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 대규모 반미-반전시위가 전개된 현실에 비추어볼 때, 시민사회, 시민문화 수준에 있어서도 서구 사회의 그것과 대등해졌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로 규정할 수 있다.



5. 결론에 대신하여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반공주의에 한계 지워진 자유민주주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세력은 철옹성과 같이 대외적 안보와 대내적 질서를 구축했다. 하지만 국가는 경제성장을 통해 물질적 삶을 개선할 수 있어야 일반 민중들의 자발적 동의를 구할 수 있다. 60년대 초반에 등장한 박정희 체제는 반공형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다가 ‘잘살아 보세’라는 발전주의에 입각한 산업화 전략을 장착하여 그람시가 말하는 ‘역사블록’(historical block)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63년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4대 대통령 선거는 이후 40여년 간 한국사회의 변동양상을 규정했다는 측면에서 ‘중대선거’로 규정할 수 있다.

1987년을 기점으로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지배이데올로기는 유례없는 고도성장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결과로 등장한 다기한 형태의 사회-경제적 갈등에 적절히 대처하기는커녕 지역분열을 조장하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전환됨으로써 그 퇴행성을 노정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사회적 동의를 창출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창출, 즉 국가-사회를 연결하는 새로운 발전전략의 수립은 불가피한 일로 여겨졌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새로운 역사블록을 형성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가능성을 내보이고 있다는 측면에서, 16대 대선은 1963년 대선에 버금가는 ‘중대선거’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이 글에서는 자유민주주의 개혁분파의 이념적 좌선회에 기초한 ‘제3의 길’ 노선과 유사한 것으로 잠정적으로 정의하고자 했다. 유럽에서의 ‘제3의 길’ 노선이 사민주의 이념의 우선회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그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차이와 함께 수렴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차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정치현상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보수우익적 입장에서 보면 경악할 만할 사회주의이며, 자유민주주의적 보수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우려할 만한 사태이지만, 중도 좌파적 사민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사안에 따라 협력할 수 있는 비판적 지지로, 그러나 사회주의적 좌파의 견지에서는 여전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비판할 대상으로 비쳐질 것이다. 물론 노무현 정권을 적극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중도개혁 세력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역사적 사건’으로 규정될 것이다. 이처럼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정치적 상황을 보는 시각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이데올로기적 균열을 분석하는 작업은 유의미한 일이다. 다만, 16대 대선이 얼마나 이데올로기적 균열에 입각한 것이냐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좀더 분석이 필요한 일이지만, 적어도 대선의 결과 한국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사회-경제적 균열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형태로 다양화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이념적 좌선회가 진행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한/노/정/연


* 이 글은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가 주최한 <16대 대선의 선거과정과 의의>(2003.1.28.)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한 것이다.


1) N. Poulantzas, State, Power, Socialism, London: Verso, 1980, pp.30~32.


2) 조희연 교수는 반공주의를 분단반공의식의 내재화로 조성된 하나의 ‘사회실재’라는 점에 주목하여, 해방공간의 정치적, 계급적 투쟁 및 한국전쟁의 경험을 통해 남한사회에 정착된 독특한 ‘극우공동체적’ 상황을 ‘반공규율사회’라고 명명한다. 조희연, ꡔ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ꡕ, 당대, 1998, p.92.


3) 최장집 교수는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이러한 한계상황을 ‘분단국가의 최소한의 안정이라는 하한선과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유지라는 상한선 사이의 정치적 공간’으로 표현한다. 최장집,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1945~1995」, ꡔ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ꡕ, 나남, 1996, p.22. 


4) 당시 대표적 야당지인 ꡔ사상계ꡕ까지도  5.16을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평가했다. 「권두언」, ꡔ사상계ꡕ, 1961년 5월호.


5) 최장집, 같은 글, p.23~27 참조..


6) 손호철 교수는 최소한 경제정책에 관한 한 5.16 정권이 초기에 추진했던 내포적 산업화 성격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을 고려할 때 윤보선과 보수야당의 입장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손호철, 「1956년과 63년 대선」, ꡔ현대 한국정치ꡕ, 사회평론사, 1995, p.206.


7) 윤보선은 정읍연설에서 “누가 민주주의 신봉자며 누가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니냐는 것, 누가 공산당이며 누가 공산당이 아닌가는 각자의 경력을 따져보면 알 수 있다”고 색깔논쟁에 불을 당겼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낡은 메커니즘의 찌꺼기”라고 비난하면서, 윤후보의 공격이 “이번 선거가 구악정권과 민중세력의 대결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반격했다. 손호철, 같은 글, p.205.


8) ꡔ동아일보ꡕ, 1963년 10월 17일. 손호철 교수 역시 1963년 선거의 독특한 성격이 ‘보수야당 후보 대 (외형적인) 진보여당 후보’의 대결에 있었다고 말한다. 손호철, 같은 글, p.208.


9) 박정희, 「후진민주주의와 한국혁명의 성격과 과제」, ꡔ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ꡕ, 동아출판사, 1962, pp.226~227.


10) 87년 6월 항쟁을 국가권력 및 지배세력의 힘과 민중의 힘이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반군부독재전선을 형성하면서, 최초의 힘의 균형상태로 들어간 것으로, 그리고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반독재 민주화라는 낮은 수준의 민주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암묵적으로 기존의 지배적 사회관계와 축적 및 분배의 체계에 대한 재편성이라는 계급적 요구를 전면으로 부상시킨 혁명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견해로는 최장집, 「한국국가의 성격」, ꡔ한국민주주의의 이론ꡕ, 한길사, 1993, pp.134~135 참조..


11) 6공 당시 ‘보혁(保革)’ 논쟁이 보수주의 정치세력으로부터 이데올로기적으로 과잉결정되어 불거져 나왔다. 이는 공안정국을 불러왔고, 제1야당인 김대중 세력을 배제한 채 3당합당, 즉 보수대연합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보혁대결 혹은 보혁논쟁에 대해서는 최장집, 「지배이념의 구조, 기능, 변화: 1987년 ‘민주적 개방’ 이후를 중심으로」, 같은 책, 참조..


12) 김대중 정권의 성격을 ‘종속적 신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견해로는 김세균, 「김대중 정권 1년과 노동자-민중운동」, 노동, 사회, 학술단체 공동토론회, ꡔ김대중정권 집권 1년 그 평가와 전망ꡕ, 손호철, 「한국의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ꡔ창작과 비평ꡕ, 1999 봄호, 참조..


13) 언젠가 사석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보니 이제야 박정희 대통령의 고민과 결단의 심정을 알 것 같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14) 조희연, 「‘제2기 민주화’ 단계의 구조적 의미와 개혁담론의 방향」, 민교협, 학단협 외, ꡔ2002년 대선 평가토론회ꡕ, 2002.12.23, 참조..


15) ꡔ한국일보ꡕ, 2002년 12월 24일. 동 기사는 다음과 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전하고 있다. “대선 이틀전인 17일 밤 한국일보와 미디어리서치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이념 성향을 ‘보수’라고 규정한 사람은 34.7%, ‘진보’라고 규정한 사람은 27.0%였다. 또 30.2%가 ‘중도’라고 응답해 보수, 진보가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회창 후보 지지자 가운데 보수 성향은 48.6%였으나 진보 성향은 16.2%에 그쳤다. 또 노무현 후보 지지자 가운데 진보는 38%였으나 보수는 23.7%에 그쳤다.”


16) 조희연, 앞의 글.


17) ꡔ한국일보ꡕ 2002.12.21.


18) ꡔ조선일보ꡕ, 2003.1.16.


19) ꡔ한겨레 신문ꡕ, 2003.1.16.


20) ꡔ조선일보ꡕ, 2003.1.10.


21) 한가지 예로 전문가 4,000여명의 대선 후보 이념성향 평가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극좌 1에서 중도 4, 극우 7을 기준으로 전문가들에게 물어본 결과를 단순 평균하면, 권영길 후보는 2.4로 좌, 노무현 후보는 3.3으로 중도 좌, 이회창 후보는 5.8로 우로 평가되었다. 동아시아연구원 편, ꡔ2002 대선 평가와 노무현 정부의 과제ꡕ, 이슈투데이, 2003, p.53.


22) 아래 ‘제3의 길’의 정치에 대한 개념규정과 구체적 의제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는 A. Giddens, ꡔ제3의 길과 그 비판자들ꡕ, 박찬욱, 최형익 외 역, 생각의나무, 2002, 참조.


2003-02-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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