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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기본합의 이행의 중단과 교훈

현장에서 미래를  제85호
서보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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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기본합의 이행의 중단과 교훈


서 보 혁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위원






들어가는 말
2002년 10월 소위 북한의 우라늄 핵개발 ‘시인’ 파문 이후 북-미간 대립이 더욱 짙어가고 있다. 북한은 이후 핵개발을 시인한 적이 없다고 하고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적 압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서 남한정권의 포용정책이 북-미 갈등을 상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미 양측은 물론 한반도문제에 이해관계를 가진 주변국들과 전문가들은 대부분 1994년 10월 21일 맺은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가 사문화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 국제원자력기구의 경수로 건설 중단, 미국의 대북 중유 제공 중단 등 일련의 상황이 그런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본합의의 용도 폐기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지금 상황을 정확히 말하면 기본합의의 사멸이 아니라 이행의 중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는 기본합의문의 미래와 관계없이 거기에 담긴 기조와 원칙이 양국관계의 개선은 물론 한반도의 안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입장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이행되지 않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절충된 이익
북-미 기본합의문은 ①북한 흑연감속로 및 관련시설의 경수로발전소로의 대체, ②양국간 정치적․경제적 관계정상화, ③한반도 비핵화, ④비확산레짐 강화 등 4개항과 13가지 부대사항을 담고 있다. 양국은 북한의 핵개발 중단 및 대북 전력지원을 동시 실행하면서 비확산규범의 관철과 양국관계의 개선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미 양국이 협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클린턴 행정부와 김정일 정권의 대내정치적 필요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린턴 정부는 의회 중간선거가 6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공화당의 비판을 둔화시키고 민주당 후보들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북한과의 협상타결이 필요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또한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에서 자신이 아버지 못지 않은 외교적 수완을 가지고 있음을 주민들과 지배층 인사들에게 확인시켜 줄 필요와 극심한 경제난을 타개할 대외적 조건이 절실하였다. 특히, 김 주석 사망 이후 김정일의 권력 안정화는 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개발 동결 대신 미국의 안전보장은 선차적인 과제였다.
이런 정치적 필요와 함께 양국의 전략적 이해도 작용하였는데, 북한의 경우 냉전 붕괴 이후 열악해진 안보환경의 개선을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확보해야 할 상황이었다. 반면, 1990년대 초 미국은 비중이 높아진 동아태지역의 새로운 안보환경에 대한 보다 적극적 개입과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핵문제는 비확산규범의 불안정은 물론 미국의 동아태전략 수행에 일차적인 장애로 등장하였다. 당시 미 행정부가 김일성 정권의 제거가 아니라 핵동결에 주안점을 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네바합의는 양국의 정치적, 전략적 이익이 반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익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다기보다는 절충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또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중 북한의 이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반영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제네바합의에 대한 미 정가내의 지속적인 비판과 부시정부의 등장과 함께 제네바합의 ‘개선’을 주장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불안정한 이행
북한은 제네바합의를 통해 경수로 도입, 중유 지원, 안보위협 완화와 대미 직접 협상채널 유지, 핵카드 유지,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계기 확보 등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이익을 동시에 관철시켰다. 또 북한은 대미 핵외교를 통해 국제적 위신 제고, 김정일 정권의 지도력 부각 등과 같은 부대 효과도 거두었다. 북한은 1995년 1월1일 <로동신문>등에 실린 공동사설에서 기본합의문 채택을 “조선반도 핵문제 해결과 조미관계 발전을 위한 하나의 리정표”라고 평가함으로써, 합의 이행 초점이 비확산 순응이 아니라 안전보장과 북-미관계 정상화임을 분명히 하였다. 북한의 입장에서 제네바 기본합의의 가장 큰 성과는 북한이 핵개발을 단계적으로 포기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의 체제위협의 중단 약속과 궁극적으로 그것을 제거할 길(관계정상화 프로세스)을 열었다는 점이다. 물론 북한이 이상과 같은 성과를 거두는데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두 개의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 제3국으로의 연료봉 반출, 원자로 해체, 한국형 경수로 도입 등 핵개발 중단, ‘불량국가’ 이미지의 지속, 한-미-일의 대북정책 공조 등이다.
클린턴 정부도 제네바 합의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당시 미 국무성 민턴(Mark Minton) 한국과장은 제네바합의의 의의를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중단, 한반도문제의 외교적 접근, 북한의 대외적 접촉 및 북한에 대한 국제적 영향 등을 꼽았다. 실제로 제네바합의의 내용은 기존 핵시설의 해체를 요구하는 NPT의 요구사항보다 폭넓은 것이었다.
그러나 제네바합의에 도달한 양국의 인식과 이해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클린턴 행정부가 핵합의를 통해 핵동결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것은 소련, 동구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도 체제의 현상유지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가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도 비확산규범 자체를 수용하기보다는 그것을 대미정책 목표 실현의 도구로 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네바합의가 향후 양국간 협력을 보장할지는 불투명하였다. 그것은 양국의 상대국에 대한 편향된 인식과 평가 방식의 수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네바합의가 향후 양국간 공동 이익을 추구할 여건을 마련해 놓은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실제 제네바합의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부정적인 반응이 주조를 이루었다. 미 행정부내 관료조직인 국방성, 중앙정보국 등에서는 사용 후 핵연료의 제3국 송출, 핵폐기시설에 대한 특별사찰, 공표되지 않은 핵물질의 통제, 기존 핵시설의 해체, 그리고 남북대화 재개 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1995년 중간선거 이후 상하 양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을 강력하게 견제하고 나섰다.
북-미 양국은 2000년 말까지 고위인사의 교차 방문을 통해 관계개선을 구체적으로 시도하면서 제네바합의 이행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양국 관계개선에 대해 상대적으로 북한이 더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각종 협상에서 북한의 의제분할 및 지연전술은 관계개선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1998년 양국에서 동시에 발생한 대포동미사일 시험발사와 금창리 핵시설 의혹은 클린턴 정부 임기내 양국관계 개선의 가능성을 더욱 약화시켰다.


동시 행동의 원칙
제네바합의는 미국의 비확산 정책과 북한의 체제생존전략이 타협점을 발견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상호주의적 동시행동의 원칙이 준수되지 않을 경우 합의가 결렬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먼저, 비확산 문제에 있어서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상대주의적 접근과 미국의 절대주의적 접근이 벼랑끝에서 타협을 보았다. 북한은 정권 안보 및 위신 제고, 외화 수입, 억지력 확보 등 다각적 측면에서의 핵개발 동기를 다른 방법으로 획득하지 못하는 한 핵개발을 완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동기보다는 핵개발 자체를 불온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기본합의에는 북한의 핵물질 보유량에 관한 검증을 비롯한 과거 핵활동 규명 시기가 모호하게 되어 있다. 합의문은 북한의 과거 핵사찰 시점을 ‘경수로 사업의 상당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부품의 인도 이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관한 규정은 당시 양해각서에 구체화되어 있지만 부시정부 들어 북-미간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양국간 상이한 입장은 제네바합의에서 봉합되었지만 부시 공화당정권 등장 이후 표면화되었다. 부시정부의 ‘악의 축’ 발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인신공격, 핵 선제공격 가능성 언급 등은 북한의 안보불안을 가중시켰다. 그에 앞서 클린턴 정부에서도 북한에 대한 핵공격 시나리오는 폐기되지 않았다. 비확산에 대한 양국의 상이한 입장은 처음부터 제네바합의 이행의 전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제네바합의 이행이 중단된 것에는 합의 이행의 원칙에 대한 양국의 소극적 태도 역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북한으로서는 핵동결 대신 경수로 2기를 제공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핵동결을 유지하는 대신 경수로 건설의 진척은 클린턴 정부 임기말까지 20%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부시정부 들어서는 경수로 대체안이 제기될 정도로 경수로사업에 부정적이었다. 또 양국간 경제적, 정치적 관계정상화 측면에서는 행정부 재량의 경제제재의 완화, 북-미 공동꼬뮤니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계획 등 클린턴 정부기에 가시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부시정부 들어 무산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결과에는 일차적으로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의 대북인식과 대북정책이 전임 정부와 크게 다른 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다원적 정치체계를 고려하여 클린턴 임기내에 관계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한 것도 지적될 수 있다. 양국이 제네바합의 정신으로 공유한 ‘동시행동의 원칙’이 양국간 상호 불신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제네바합의 이행의 중단을 초래한 근본적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북핵문제를 둘러싼 현재 북-미 갈등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제네바합의가 복원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비확산문제에 있어서 양국간 평행선이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동시 행동은커녕 북한은 불가침조약,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의 검증가능한 영구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북핵문제의 본질은 양국간 공동이익의 모색보다는 상이한 이해를 공존시키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있다. 현재 양국간에는 대화 방식을 둘러싸고도 다자회담, 쌍무회담 등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식에서든 제네바합의가 담았던 내용을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이행하지 않으면 어떤 새로운 합의도 쉽게 사문화될 것이다. 제네바합의는 동시행동 원칙이 준수될 때 이행되었고 그렇지 않을 때 중단되었다. 북-미 양국은 물론 북핵문제의 중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제3자는 이 원칙의 중요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노/정/연

2003-03-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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