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인식** 이 글은 본
연구소 「현대자본주의연구팀」이 2월 19일부터
7차례에 걸쳐 진행한 「현대자본주의의
이해」공개강좌를 듣고 작성해 주신 글입니다.
- 한노정연 ‘현대자본주의 이해 강좌’를 듣고 -
전 성 식/ 민의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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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역사속에 등장한 이후 끊임없는 위기를 겪으며
다양한 변신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변화로 생존을 이어가려 한다. 신자유주의 역시 그 과정의
하나의 형태이며 자본주의의 현신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우리의 실천은
과학적 이론을 요구한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은 없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올바른 실천의 전제가 된다.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현실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사의 발전과 역사의 내적인 연관을 파악하여 올바른
역사적 전망을 갖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의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 어느 때 보다도 대규모적으로 또 다양한
영역에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역사적 전망의 부재는 우리의 헌신적인 투쟁을 무위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으며 사람들을 절망하게 한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는 것, 즉, 정치적․역사적 전망을 찾는 것은 지금
우리 운동의 시급한 과제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진행하였던 공개강좌 [현대
자본주의의 이해: 20세기 자본주의의 전개]는 연구소내의
현대자본주의연구팀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해왔던 학습의
성과를 전체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마련했던 자리였다. 강좌의
내용은 말 그대로 187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세계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강좌의 강사들은
자신들의 이번 이론작업을 새로운 전망을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위치 짓는다. 그들은 과거 정통 교의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다양하게 제시된 주장들의 조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길고 지난한 과정일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씩
만들어” 가겠다는 각오로 논의하고 강좌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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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는 세 명의 강사가 두 번씩 강의를 진행하여 모두 여섯
차례의 강좌가 있었고 마지막 한 번의 종합토론으로 7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맑스주의를 기본적 관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이번 강좌는 전혀 새롭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즉 맑스주의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이번
강좌는 새로울 수 있었다. 강사들은 맑스주의의 관점에 서야만
현재 전개되는 현상을 바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현대자본주의를 설명한다. 강사들은
현대자본주의의 현상을 설명하려 했던 기존의 다양한 이론들을
때로는 비판하며 때로는 근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이끌어
간다.
「제1강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현대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을 간략히 서술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본주의는 불완전한 체제이며 그 내적 모순에 의해 위기가
불가피하고 그 위기는 점차 심화된다’는 고전적 주장을
재확인한다. 또한 위기를 공황이나 전쟁과 같이 폭력적이고
근로대중을 주된 희생물로 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일시적으로나마
극복할 수 있는, 결코 인간다운 삶과 양립할 수 없는 체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제2강 현대자본주의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는
“1870년대의 대불황기에 전면화된 ‘독점’과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돌이킬 수 없게 된 수준에 이른 국가개입을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한다. 강사는
1930대의 대공황 이후 ”경제적 재생산과정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국가에 의한 항구적 위기관리“의 “일상화”를 소위
정통적 입장인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차용하지만 그
중요한 특징은 트로츠키주의자인 멘델의
ꡔ후기자본주의ꡕ를 빌어 설명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미 국가의 항상적 개입 없이는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려운 상태로 변모했”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주장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으로까지 이어진다. 즉 강사는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를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며
오히려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두
얼굴로 파악하기를 주장한다.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에 의해
노동자 계급에게 최소한의 양보도 허락할 수 없게된 자본가
계급은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더
적극적인 국가개입을 하고 있으며, 국가에 의한 항구적
위기관리라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본질적 성격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제3강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장기호황과
장기불황」은 매우 재미있는 주제를 일관적인 관점으로
다룬다. 전후 나타났던 장기호황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장기불황을 강사는 과잉자본․과잉생산의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그 역시 기본적으로는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는 전제를 명확히 한다. 그는
현재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알려면 50년 전으로 돌아가길
주장한다. 전후의 장기호황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엄청난 규모의
과잉자본과 케인즈주의 화폐정책(신용팽창과 부채경제),
브레튼우즈체제의 세 요소는 서로 결합하여 장기불황으로
전화하고 그것은 현재에 이른다. 전쟁으로 인한 과잉자본의
청산과 산업혁신이 가져온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은 전후
장기호황의 토대가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내적 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산업순환을 겪게 되고 위기를 겪게 된다. 그
위기는 과잉자본의 파괴를 통해 또 다른 차원의 순환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전쟁을 통한 생산시설의 철저한 파괴는
과거 그 어떤 위기보다도 큰 과잉자본에 대한 파괴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과거 어떤 산업순환의 경우보다도 오랜 시간동안
자본주의로부터 과잉자본의 문제를 잊을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과잉자본의 양산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긴 장기호황은 필연적으로 과잉자본을 양산하였다. 이미
1965년을 기점으로 이 과잉자본들은 과잉생산을 일으켜 위기로의
전환이 예견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실시된 극단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은 위기를 지연시켰고 오히려 과잉자본을
양산하게 된다. 미국의 케인즈주의 정책은 브레튼우즈체제를
이용하여 국제적으로 확대되게 되며 브레튼우즈체제는
세계경제를 지탱하다가 결국 붕괴되게 된다.
「제4강 장기불황에 대한 자본의 대응들」에서
한편으로는 임금의 하락과 고용의 불안정, 노동강도의 강화 등의
노동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과잉자본
이동에 따른 제3세계의 외채․외환위기로 자신들에게는
버블붕괴에 따른 위기로 현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5강 초국적 자본의 운동」과 「제6강
세계화에 대한 불만」은 초국적 자본과 그 운동에 대한
설명과 그 이데올로기로서의 ‘세계화’에 대한 설명을 한다.
강사는 ‘세계화’란 자본이 이윤을 목적으로 국민국가를
초월하여 세계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를 자본자체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자본의 세계적
축적, 산업자본 및 금융자본의 세계적 축적운동으로 나아간다.
결국 ‘세계화’란 ‘자본의 세계화’이고 이것은 하나의
단일하고 균등한 과정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불균등한
과정으로서 다양한 수준의 강도, 상이한 속도, 상이한 순서로
상이한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자본의
세계적 축적과정은 세계적 규모의 자본의 집중과정이고 세계적인
노동자의 통합과 분열과정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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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내용처럼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인식이다. 즉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선택
가능한 여러 대안들 중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과 위기의 심화가 극에
다다라 정상적인 재생산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시기, 더
이상 자본주의적 틀 내에서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시기,
따라서 지속적으로 노동자와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탄압을 멈출 수 없는 시기의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벌어진 장기불황에 의해 노동자 계급에게 최소한의 양보도
허락할 수도 없게 된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아래에서는 어쩔 수 없는 과잉생산의 위기, 그리고 이
때문에 발생했던 장기불황과 ‘세계화’라는 구호. 이것이
우리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인 관계의
현주소인 것이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당연한 우리의
정치적․역사적 전망은 자본주의의 극복일 수밖에 없다.
강좌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사점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기본노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케인즈주의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즉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다른 얼굴 혹은 현재적 귀결이라고 한다면
반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의 전망은 몇몇이 주장하는 것처럼
케인즈주의로의 회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케인즈주의에 대한
비판과 신자유주의의 실현을 통한 자본주의 구출에 대한 염원은
앞서 말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지만 사회보장제도의
유지․강화와 고용안정 등을 주장하면서 노동자 계급에게
상대적으로 온정적으로 보이는 케인즈주의를 진보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진보진영내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의 오류나 불철저한 인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더 커다란 이유는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전선에서 끊임없는 이론적․실천적
동요를 불러일으켜 강유력한 투쟁을 방해한다는 것과 힘들게
얻은 노동자․민중의 투쟁의 성과를 독점부르주아의 일분파
혹은 소부르주아지에게 갖다 바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에 있다.
실제로 케인즈주의로의 회귀 주장은 자유주의적 소부르주아지
정치의 중요한 주장이다.
현재 진행되는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이
일시적․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지속적이라는
것도 강좌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자․민중에 대한 공격은 과거의 그것과는 상이하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공격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항상
반복되었고 가장 먼저 선택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재생산이 불가능한 위기의 시기에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가 심화되어 발생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이것은 항상적 구조적인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절망적 위기, 절망적인 모순의 폭발, 탈출구 없는
항상적이고 만성적인 과잉생산의 위기의 결과가 신자유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때 저항하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파쇼적 탄압이 동반되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앞으로 예상되는
것은 파쇼적 탄압을 동반한 자본의 노동자․민중에 대한
공격은 더욱 더 강화할 것이고 노동자․민중들은 말
그대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 속에서 끊임없는 투쟁이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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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를 연구하여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운동법칙의 발견이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법칙의 발견은 주관적 의지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과 선한 의지로 올바름을 증명하려는 태도가
옳지 않으며 우리의 투쟁의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줬다. 또 선한 의지와 주관적 의지가 운동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운동에 엄청난 해를 끼치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었다.
이번 강좌의 내용이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 더 많은
부분이 틀렸을 지도 모른다. 혹시 현대자본주의의 운동법칙에
대한 올바른 발견을 하였다고 해도 이것 자체가 앞서 말한
것처럼 올바른 실천을 저절로 담보하지는 못한다. 이번 강좌의
의의는 현대자본주의의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단초를 제기한
것에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강좌는 준비한 사람들이 목적한
바대로 정치적․역사적 전망의 부재로 고통받은 현재의
운동 상황에서, 그 기초가 되는 사상․이론에 대한
포괄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 그리고 새로운 전망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에서 더욱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
앞으로 이를 이어갈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