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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삶과 죽음

현장에서 미래를  제8호
남구현

정 ․ 세 ․ 초 ․ 점

노동자의 삶과 죽음


남 구 현 (연구위원, 한신대 교수, 사회복지학)


작년 11월에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의 노동자투쟁의 결과물인 민주노총의 출범을 보았읍니다. 민주노총에 대해 현 정부는 출범에 즈음하여 노조지도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령을 내리고, 출범 이후에는 민주노총을 불법조직으로 간주하여 설립신고서를 반려하였습니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지도자들인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과 민주금속연맹의 단병호 위원장에 이어 민주노총 수석 부위원장인 양규헌씨 등은 현재 구속중에 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은 하루 이틀 사이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소위 문민정부라는 현 정부 역시 지난날의 군사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수 십년간 행해 오던 관행을 따르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 이어졌던 노동자와 민중의 연이은 죽음은 그 결과입니다. 현대자동차 양봉수 열사는 분신을 통해 이른바 노사대화합 선언이니 무쟁의 원년이니 하면서 전개된 현 정부의 교활한 민주노조탄압정책인 신노동정책과 자본의 신경영전략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온몸으로 입증하였습니다. 조수원 열사는 노조활동을 빌미로 부당해고를 당한 후 병역특례법에 따른 혜택이 부정되면서, 이를 노조탄압의 무기로 사용하는 사실의 부당성을 온몸을 불살라 입증하였습니다. 죽음의 행렬은 노조활동가에게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장애인 노점상 이정환 열사의 분신으로부터 시작된 작년 한해는 연말의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로 끝났습니다.
죽음의 행렬은 올해에도 이어져 나갔습니다. 한편에서는 떠들석하게 과거청산이니 역사 바로세우기니 하며 전, 노 전직 대통령이 재판정에 서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노조 탄압에 항거하며 분신한 한국전력 노조의 김시자 열사의 죽음과, 강제철거에 대해 투쟁하던 신연숙 열사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새해를 맞았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사회 민중들의 잇따른 분신과 의문사는 5,6공 시절에도 없던 일입니다.
이는 문민정부의 속성과 관련되어져 있습니다. 개혁과 세계화를 입이 닳도록 반복하는 이른바 문민 정부가 들어선 이래 노동관련 부분에서는 개혁은 커녕 노동정책은 거꾸로만 가고 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잇따른 민중의 죽음입니다. 금융실명제, 정치권 비리사정, 5,6공 청산 등 사회가 민주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일찌기 5,6공 시절의 파쇼적 억압정치를 위해 만들어진 규정인 노동법의 3자개입 금지, 복수노조 금지,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등의 노동자의 민주적인 기본권을 제약하는 조항들은 아직도 민주노조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노동악법이 개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조폐공사법 개정을 통한 공익사업범위 확대 등 편법적으로 개악되었습니다. 문민정부 등장 이래 지하철노조와 한국 통신에 대한 공권력 동원 등 폭력적인 노동운동 탄압은 계속되어 왔으며, 과거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가 한창 진행 중이며 과거의 독재자들이 피의자로서 재판정에 서는 요즈음, 바로 그들이 제정한 악법들이 멀쩡히 살아 남아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죽음의 검은 세력, 분신조 어쩌고 저쩌고 하던 우리의 존경스러운 성직자께서도 왠일인지 조용합니다. 이전에는 열사들이 죽을 때마다 독재타도를 소리높여 외쳐오던 소위 민주화세력도 이제는 숨죽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썩어 빠진 보수정치세력의 눈치를 보며, 한자리 안 걸리나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번에는 우리 사회에서 어차피 눈에 잘 띄지 않는 노동자, 노점상, 철거민 등등 하층민의 죽음이고, 이들을 문제 삼아 별 소득이 없다고 판단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는 본인들이 생각하는 민주화는 대통령직선제, 자유로운 보통선거 등의 제도적 장치로서 이미 이루어졌고, 자신들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진출하는데 장애물은 사라졌다고 판단하기 때문일까요? 이제 온 사회가 민주화가 된 양, 모두가 협조하여 국제 경쟁에 나서는 것만이 급선무인 양 너도나도 선거판에 나서서 선의의 경쟁을 하느라 어수선한 뒤켠에서 민중탄압이 구태의연하게 벌어지는 지금의 현실을 볼 때, 이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민중 자신의 과제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져가고 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 어느 시기에나 역사의 진보가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관련된 문제에 도달하면 노동자계급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계급들이 연합하는 모습을 쉽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각 계급이 처한 조건이 노동자계급이 처한 조건과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정신노동 또는 육체노동을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가지 물건 또는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으로서 노동자가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노동은 삶의 근원으로서 삶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에서는 노동자의 노동에 의해 자본이 재생산되고 있어서, 노동자의 노동은 이미 지나간 노동의 축적물에 불과한 자본 - 그러한 의미에서는 죽은 노동 - 을 다시 살려내는 토대가 되고 있으며, 거꾸로 죽은 것에 불과한 자본이 살아 있는 노동을 지배하고 있으며, 자본관계에 대한 입장이 각 계급마다 다르기 때문에 노동문제에 대한 대응 방식이 각 계급마다 다른 것입니다.
원래는 삶의 토대이던 노동이 죽음의 원인이 되는 까닭은 바로 노동자의 노동의 결과물이 자본주의적인 이윤 축적의 토대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노동을 하면서 조금씩 빼앗기는 삶은 다시 쌓여 자본이 되며, 노동자의 죽음은 자본이 살기 위한 자양분입니다. 자본을 살찌우기 위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며 노쇠해지는 경우는 오랜 시간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경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은 바로 자본가들의 축재의 원천이라는 점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산업재해의 경우를 봅시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재해방지에 소용되는 비용보다 보상비가 싸게 먹힐 경우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서슴치 않고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산재왕국의 오명을 날리며 세계 최고의 산재율을 자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동자의 죽음은 자본의 가치증식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우리 모두의 삶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건축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가 사는 건물에 담겨져 있습니다. 광산 노동자가 진폐증에 걸려 생명이 단축될 때, 그들이 채취한 석탄은 우리의 집을 덮혀 추위로부터 우리를 지켜 줍니다. 원진레이온의 노동자가 죽어갈 때, 그들이 만든 옷감의 원료는 우리의 옷이 됩니다. 제철소의 용광로에 빠져 죽는 노동자는 그대로 철강에 녹아 들어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나 쇠로 만든 제품들에 담겨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죽음은 물질적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에 스며들어 있으며, 화폐가치 형태로는 빼앗기는 대가가 자본가의 금고로 들어갑니다. 우리 사회의 부유층이 유흥가에서 탕진한다든지 사치품을 구입하는데 사용되는 돈이나 전, 노 전직 대통령이 재벌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천문학적인 액수의 소위 비자금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일하는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가 지불되지 않고 수탈된 돈들입니다.
일상적인 노동과정에서의 죽음과 비교해 열사들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사들은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계기때마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민주노총의 전야제에서 전태일 열사, 이석규 열사,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상기시켰던 외침이 생각납니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70년대에 전태일 열사는 분신으로 항거하여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주장함으로써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한 노동자들이 87년의 뜨거운 여름을 투쟁으로 달굴 때, 이석규 열사는 죽음으로써 민주노조 건설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대기업 연대회의를 구성하면서 생산직과 사무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형성하는 움직임에 앞장서다가 박창수 열사는 저들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노동자들에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노동이 죽음이 아니라 삶이 되는 사회를 열어갈 수 있도록, 계속되는 투쟁에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죽음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간 열사들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열사들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이들의 죽음이 되살아 나는 것은 계속 투쟁하는 자들의 과제입니다. 죽음의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는 세력을 이겨내 노동하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열사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하는 과제는 지금 우리의 몫입니다. 한/노/정/연

1996-02-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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