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발표회
시점간 단일체계 접근과 새로운 가치논쟁에 대한 평가*
김창근 / 한노정연 연구원, 홍익대 강사
최근에 맑스의 전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가치논쟁이 일어났다. 전형논쟁
과정에서 신리카도학파는 맑스의 가치론이 논리적으로
비정합적이고, 이윤율과 상대가격을 설명하는데 불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에서는, 맑스의
가치론은 시점간 단일체계로 해석되어야 하고, 그럴 경우 맑스의
가치론은 논리적으로 정합적이고 이윤율과 가격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신리카도학파의 주장과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의 특징을 비교하고, 신리카도학파의
주장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필자
주
1. 머리말
애덤 스미스 이후 인간노동에 의해 상품의 가치를 설명하려 했던
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론과 자본주의에서의 일반이윤율 형성
사이의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모순 때문에 스미스는
노동가치론을 포기했고 상품의 가격이 임금과 이윤 그리고
지대의 합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산비론을 주장하였고, 데이비드
리카도는 상품의 가치가 ‘대체로’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리카도 이후의
리카도학파도 동일한 모순 때문에 노동가치론이 자본주의에서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노동가치론을 포기한다.
리카도학파의 붕괴 이후 칼 맑스는 노동가치론에 근거하여
일반이윤율의 형성을 설명하려 시도했고, 일정한 기간 동안
생산된 상품들에 포함된 ‘잉여가치와 가치가 평균이윤과
생산가격으로 전형’(이하에서는 ‘전형’으로 줄인다)된다고
주장하면서, 스미스와 리카도가 직면했던 모순을 극복한다.
하지만 맑스의 전형은 도전을 받게 되는데, 이 도전은
보르트키예비츠(Bortkiewicz, 1907a, 1970b)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에 이안 스티드만 (Steedman, 1977)과 같은
신리카도학파(Neo-Ricardians)에 의해 체계적으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전형에 대한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Temporal
Single System Interpretation)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가치논쟁을
불러일으켰다.(주1)
그런데 국내에서는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의 등장에 따른 새로운
가치논쟁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이 글은 이 논쟁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주2)
특히 맑스의 가치론을 ‘이원체계’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단일체계’로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맑스의 가치론에서
상품들의 가치가 ‘동시적’으로 결정되는가 아니면
‘시점적’으로 결정되는가 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겠다.
먼저 다음 절에서는 전형에 대한 맑스 자신의 논의부터
살펴보자.
2. 맑스의 전형
맑스는 자본론 1권 1편 ‘상품과 화폐’에서
상품의 가치를 상품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노동가치’ 형태로 규정한다(p.49).(주3)
이러한 상품 가치 규정은 자본론 3권 2편
‘이윤이 평균이윤으로 전환’에서 전형에 대해 논의하기 전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규정은 자본주의 현실에서
일반이윤율이 형성되는 경향이 있는 상품의 가치와 직접
부합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가장 단순하게 고찰해 보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가정하자. n개의 생산부문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경제에 1) 고정자본은 존재하지 않고, 2) 모든 자본 부분들은
1년에 1회전하며. 3) 모든 부문은 1년 중에는 생산만 하고,
연초인 t와 연말인 t+1의 시점에서만 상품을 교환한다. 이런
가상적인 상황을 ‘가장 단순한 상황’이라고 하자.(주4)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상품들이 노동가치대로 판매된다고 하자.
그러면 일정한 i부문은 연초인 t의 시점에 1년간 사용할
생산수단들을 노동가치 에 따라 구입하고 그 생산수단을 이용해
1년간 상품을 생산한다. i부문의 노동자들은 연초인 t의 시점에
임금 를 받고 1년간 필요한 생활수단들을 구입하는데, 는 i부문
노동자들이 1년간 필요로 하는 생계수단의 노동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이들 i부문의 노동자들은 1년간 만큼의
노동시간 동안 노동한다. 그러면 i부문의 잉여가치 는
직접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 와 가변자본 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주5)
즉, =-이다. 나아가 잉여가치율은 상이한 부문들에서
균등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우리는 상품들이 노동가치대로 판매될 경우 i부문에서 연간
생산한 상품의 가치 와 이윤율 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상품의 가치:=+=++ (1)
이윤율: =/[+]=/[1+] (2)
식 (2)에서 는 i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 /인데, 잉여가치율
가 사회 전체적으로 균등화될 때 i부문의 이윤율 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에 의존한다. 즉 일정한 i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거나 낮을수록 이윤율은 반대로 낮거나 높다. 그런데
이 점은 노동가치론으로 자본주의 현실을 직접 설명하는데
일정한 곤란을 야기한다.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본들의 유기적
구성은 부문별로 매우 상이하며, 부문 간에 균등화되는 경향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동일한 자본이 j부문과 k부문에
투하될 때(즉, +=+), j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 가 k부문의
보다 높을 수 있다. 이 경우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j부문이
획득하는 이윤 =[+]=[+]/[1+]은 k부문의 이윤 =[+]=[+]/[1+]보다
작다. 즉, 두 부문은 동일한 자본을 투하했지만,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따라 상이한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과는 자본주의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 현실에서 이윤율은 부문 간에 장기적으로 균등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즉, 동일한 크기의 자본은 동일한
크기의 이윤을 획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부문별로 상이한
이윤율로 귀결되는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부문 간의 이윤율 균등화 경향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맑스는 전형을 통해 노동가치론에 기초하여 이 모순을 설명하려
했다. 즉, 그는 노동가치론에 기초하여 어떻게 부문 간의
불균등한 이윤율이 균등화되어 일반이윤율을 형성하게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노동가치론에서 출발하면 부문별 이윤율은 매우
상이하지만, 자본들이 충분히 자유롭게 다른 부문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유기적 구성이 높아 이윤율이 낮은 부문들의 자본들은
유기적 구성이 낮아 이윤율이 높은 부문들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결과 전자의 부문들에서는 상품들의 가격은 노동가치
이상으로 상승하고, 이런 부문은 자신의 부문에서 생산한
잉여가치 이상의 이윤을 실현한다. 반면 후자의 가격은 노동가치
이하로 하락하고, 이 부문들은 자신이 생산한 잉여가치보다 적은
이윤을 실현한다. 이런 자본의 이동은 상이한 부문별 이윤율 가
로 균등화될 때까지 계속되며, 그 결과 부문들 간에 균등화된
일반이윤율 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이윤율이 균등화될 때의
이윤과 가격이 각각 평균이윤 와 생산가격 이다.
이제 맑스의 일반이윤율과 생산가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해
보자.
일반이윤율:=/(+)=/[1+] (3)
생산가격:=[+]+[+]=[+]+ (4)
평균이윤/잉여가치:/=[1+]/[1+] (5)(주6)
식 (3)에서 일반이윤율 은 사회 전체의 총자본 (+)에 대한, 전체
자본이 생산한 총잉여가치 의 비율로 결정되고 있다. 그리고 식
(4)에서 평균이윤 는 일반이윤율 을 자본의 가치 +에 곱하여
구해진다. 맑스는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상품들은 위와 같은
생산가격으로 판매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노동가치론과 일반이윤율 형성의 모순을 해결하고
있다.
먼저 상품들이 생산가격으로 판매될 경우 동일한 크기의 자본은
동일한 이윤을 획득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품들이
노동가치대로 판매될 때,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더 높은 j부문과
낮은 k부문에 동일한 자본이 투하된 경우 j부문의 이윤이
k부문보다 작았다. 그런데 상품들이 생산가격대로 판매된다면
j부문의 이윤 =[+]=[+]는 k부문의 =[+]=[+]와 동일하다. 그
이유는 두 부문의 이윤율이 로 균등화되었기 때문인데, 이런
균등화 때문에 동일한 크기의 자본은 동일한 이윤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맑스의 전형은 일반이윤율이 형성되는 자본주의에서의
경향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맑스에 따르면 노동가치론에 일정한 수정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노동가치론이 개별적인
상품의 가치에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가치론이 개별적인 상품들의 가치에 적용된다면, i부문의
상품들은 노동가치 대로 판매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형의 결과
상품들은 노동가치 가 아니라 생산가격 에 따라 판매되며,
일반적으로 생산가격 와 노동가치 는 일치하지 않는다. 양자의
차이는 잉여가치 와 평균이윤 의 차이인데, 식 (5)에서 i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 가 사회적 평균 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와 는
일치하지 않는다.
i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 는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평균 보다
높거나 또는 낮을 것이고,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만약 i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사회적 평균보다
높은 경우, i부문은 노동가치 보다 -만큼 높은 생산가격 에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여 자신이 생산한 잉여가치 보다 큰
평균이윤 를 획득하다. 반대로 i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사회적 평균보다 낮다면, 노동가치보다 낮은 생산가격에
판매함으로써 자신이 생산한 잉여가치보다 -만큼 작은
평균이윤을 실현한다. 따라서 자본의 유기적구성이 우연히
사회적 평균인 부문이 아닌 경우, 일정한 생산부문은 자신의
상품들을 노동가치와 상이한 생산가격에 판매하여 자신이 생산한
잉여가치와는 다른 크기의 이윤을 획득한다.
그런데 위의 결과는 상품들의 가치가 인간노동에서 나온다는
노동가치론과 이윤의 원천은 잉여노동이라는 잉여가치론 모두가
개별적인 생산부문에 직접적으로 타당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맑스가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은 폐기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는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이 성립한다는 것을 두 쌍의 총계일치
명제의 성립함을 보임으로써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일반이윤율 의 결정인데, 그것은
+형태로 ‘주어진’ 자본들의 총합 [+]과 그것들이 생산한
총잉여가치 의 비율로 결정된다. 이렇게 이윤율이 잉여가치에
기초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첫째 사회 전체의
‘총잉여가치=총이윤’, =가 성립한다.(주7)
이것은 가 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잉여가치론이
개별부문들의 이윤에 직접 적용될 수 없지만,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성립함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개별자본들이 획득하는
이윤의 원천은 사회 전체의 자본이 생산한 총잉여가치이며,
이윤은 총잉여가치가 자본들 사이에 ‘재분배’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차원에서 잉여가치론은 여전히 성립한다. 둘째,
‘총잉여가치=총이윤’이 성립하기 때문에
‘총노동가치=총생산가격’, =가 성립한다.(주8)
이것은 사회 전체의 자본이 생산한 상품들의 가치가 인간노동에
의해 결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별 부문의 상품들은
노동가치 대로 판매되지 않지만,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는
노동가치론이 성립한다.
결국 맑스는 전형을 통해 노동가치론에 기초하여 일반이윤율
형성을 설명하려 하였고,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성립하는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을 제시했다. 그런데 맑스는
자본론 3권 2편에서 위와 같이 전형을 다룬
후 비용가격이 ‘수정’된다고 언급하는데(p.194), 비용가격은
3권 1편에서 “상품 가치 중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격과 사용된
노동력의 가격을 보충하는” 부분으로 정의되고 있다(p.30).
우리의 경우 고정자본이 없고 모든 자본의 연간 회전수가
1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i부문의 비용가격 는 자본의 가치 +와
일치한다.
우리는 앞에서 불변자본 와 가변자본 가 각각 생산수단과
노동자들의 생활수단의 노동가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정하고
전형에 대해 논의했는데, 그것은 생산수단과 노동자들의
생계수단이 그 노동가치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전형의 결과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된 모든 상품이
노동가치 가 아니라 생산가격 에 따라 판매된다. 그러면 i부문은
이제 생산수단을 그 생산가격에 구입하고, 노동자들의 임금도
생계수단의 생산가격에 따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i부문의 자본의 가치와 비용가격도 노동가치 형태인 =+가 아니라
생산가격에 기초한 형태 =+로 ‘수정’되어야 한다.(주9)
나아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품들의 생산가격은 일반적으로
그 노동가치와 다르기 때문에, 상품들의 생산가격으로 구성되는
‘수정’된 비용가격 =+는 그 노동가치로 구성되는 =+와는
상이할 수밖에 없다.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비용가격 수정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 후에 “당면의 연구에서는 이 점을 더욱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며 추가적으로 논의하지
않는다(p.195). 그런데 신리카도학파는 이러한 맑스의 비용가격
‘수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전형논쟁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신리카도학파의 주장을 살펴보자.
2. 신리카도학파의 동시적 이원체계 해석
보르트키예비츠(1907a, 1907b)에서부터 시작된 신리카도학파는
맑스의 전형을 동시적인 이원체계로 해석하는데, 이들은 맑스의
비용가격 ‘수정’을 투입물의 ‘전형’으로 이해한다. 이들에
따르면, i부문에서 1년간 생산된 잉여가치 가 평균이윤 로
전형되기 때문에 산출물의 가치 가 로 전형되는 것과 동시에,
i부문에서 1년간 사용된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도 노동가치
형태인 =+에서 생산가격 형태인 =+로 ‘전형’된다. 이 경우
맑스의 전형은 상품의 노동가치 =++ 가 생산가격 =++로 전형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신리카도학파의 해석은 ‘이원체계 해석’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여기에서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이 한편으로
노동가치 형태인 =+로, 다른 한편 생산가격 형태인 =+로 동시에
‘이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맑스의 전형에서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이 =+ 형태로
단일하게 존재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런데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에 대한 이러한 이원적인
해석이 바로 전형논쟁을 일으켰다. 신리카도학파의 해석에
따르면, 맑스의 ‘총잉여가치=총이윤’은 ‘=’이고,
‘총노동가치=총생산가격’은 ‘(++)=(++)’가 된다. 그런데
전형은 단지 자본들이 생산한 잉여가치가 자본들 간에
평균이윤으로 재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형 전과 후의
총잉여가치와 총이윤은 필연적으로 일치해야 한다. 문제는
이렇게 ‘총이윤= 총잉여가치’가 성립할 때,
‘총노동가치=총생산가격’이 일치하는가이다.
앞에서 살펴본 맑스의 경우 두 쌍의 총계일치 명제가
성립했는데, 그 이유는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이 총노동가치
(++)와 총생산가격 (++)에서 단일한 형태로 공통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리카도학파의 이원체계에서는
‘총노동가치=총생산가격’인 ‘(++)=(++)’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 성립할 때 노동가치 형태와 생산가격 형태의
총자본의 가치 또는 총비용가격이 서로 일치해야 된다. 즉,
(+)=(+)가 성립해야 한다.
그런데 신리카도학파는 두 형태의 비용가격 총량이 일반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총잉여가치=총이윤’이 성립할 때
동시에 ‘총노동가치=총생산가격’이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맑스의 가치형태들을 기술적 조건과 실물임금으로 환원시키고,
우리의 ‘가장 단순한 상황’에서 소위 투입물과 산출물의
가치가 ‘동시에’ 결정된다고 가정한다.(주10)
이런 가정 하에서 그들은 맑스의 가치론을 다음과 같은
행렬식으로 표현한다.
가치체계: = + = + (1+),
= ―, = / (6)
가격체계: = (+)(1+) (7)(주11)
위 두 체계에서 맑스의 가치형태들은 기술조건과 실물임금으로
환원되어 있는데, , , 그리고 는 각각 , , 그리고 (-)로, 와 ,
그리고 는 각각 , , 그리고 (+)로 표현되어 있다.(주12)
위 두 체계는 ‘이원체계’ 해석으로 불리는데, 식 (6)의 좌변에
포함된 산출물의 노동가치 는 식 (7)의 좌변에 포함된 그
생산가격 로 전형되고, 동시에 식 (6)의 우변에 포함된 투입물의
노동가치 와 실물임금의 노동가치인 들도 식 (7)의 우변에
포함되어 있는 그 생산가격들인 와로 각각 ‘동시에’ 전형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위의 두 체계는
‘동시적’ 체계인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 투입물과 실물임금의
가치와 다른 한편으로 산출물의 가치가 ‘동시적’으로 동일한
값으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현실에서 투입물의 가치는 산출물의 가치에 선행해서
결정되고, 노동력의 가치도 임금계약을 통해 생산에 선행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단순한 상황’에서
이러한 가치결정의 현실적인 시간성을 고려한다면, 투입물의
가치를 (t) 또는 (t)로, 노동력의 가치를 (t) 또는 (t)로
표현한다면, 산출물의 가치는 (t+1) 또는 (t+1)로 표현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연초인 t의 시점에서 가치가 결정되어 생산에
전제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 연말인 t+1의 시점에서 가치가
결정된다. 그리고 전년도와 올해의 생산조건이 상이하다면,
(t)는 (t+1)과 상이하고 (t)는 (t+1)과 상이할 것이다. 그런데
신리카도학파는 ‘가장 단순한 상황’을 가정하면서도, 한편으로
투입물과 노동력의 가치와, 다른 한편 산출물의 가치가 t+1의
시점에서 동시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t+1)=(t)이고, (t+1)=(t)이라고 가정한다.
신리카도학파는 이제 식 (6)이 자본론 1권의
맑스의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고, 식 (7)은 비용가격의
‘수정’을 고려한 3권에서의 상품의 가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위의 두 체계는 독특한 수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 식 (7)의 수학적 체계에서 이윤율 은 식 (8)의
도움 없이 구해질 수 있다.(주13)
둘째, 위의 두 체계의 자유도가 1이다. 왜냐하면 식 (6)의
가치체계에서 들은 절대적인 양의 노동 또는 노동시간으로
결정되는 반면, 가격체계에서 미지수는 n개의 들과 이윤율 로 총
n+1개 있지만 식은 n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체계
전체의 수학적 자유도가 1이면, 선형독립된(linear-independent)
식 하나만을 외부적으로 대입할 수 있다.
신리카도학파는 이러한 두 가지의 수학적 특성을 들어 맑스의
가치론이 한편으로 ‘불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
‘비정합적’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이윤율 은 식 (6)의
노동가치 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t+1)=(t)라는 동시적
가치결정을 가정함으로써 식 (7)에서 구해질 수 있기 때문에,
맑스의 가치론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주14)
둘째, 이들은 맑스의 두 개의 총계일치 명제 중 하나만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두 체계의 자유도가 1이기
때문이다.(주15)
이렇게 자유도가 1이기 때문에, ‘총잉여가치=총이윤’인
‘(―) = (+)’를 위 두 체계에 대입하면, 일반적으로
총노동가치=총생산가격, 즉 =는 성립할 수 없다. 반대로
총노동가치=총생산가격, 즉 =를 대입하면 총잉여가치=총이윤, 즉
(―) = (+)는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두 쌍의 총계일치
명제 중 하나는 성립할 수 있지만, 두 개 모두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점간 단일체계 접근은 위의 두 가지 주장 모두를
거부한다. 다음으로 이 해석에 대해 살펴보자.
3.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
신리카도학파의 ‘불필요성’ 주장은 투입물과 산출물의 가치가
동시에 결정된다는 ‘동시적’ 가치결정에 기초하고 있고,
‘비정합성’ 주장은 ‘이원체계’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은 ‘동시적’ 가치결정을 거부하고,
맑스의 가치론이 ‘이원체계’로 해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리카도학파는 동시적인 가치결정, 즉 (t+1)=(t)라고 가정하여,
가격체계를 구성하고 이윤율 을 식 (7)에서 자체적으로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은 ‘가장 단순한
상황’에서 투입물의 가치는 연초인 t의 시점에서 결정되고
산출물의 가치는 연말인 t+1의 시점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즉, 투입물의 가치 (t)가 산출물의 가치 (t+1)보다 선행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시점적’(temporal)
가치결정 주장이다.
그런데 투입물과 산출물의 가치가 상이한 시점에서 결정되고
그에 따라 (t)와 (t+1)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식 (7)
자체만으로는 이윤율 을 수학적으로 구할 수 없다. 식 (5)에는
식이 n개 존재하지만, 미지수는 각각 n개인 (t)와 (t+1)들과
이윤율 로 총 (2n+1)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은 이렇게 상품들의 가치가 이렇게 ‘시점적’으로
결정된다면 신리카도학파는 맑스의 가치개념 없이는 이윤율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들은 신리카도학파는 식
(7)의 가격체계에서 구한 이윤율은 리카도의 ‘콘(corn)
모델’을 n개 부문으로 확장한 ‘물량이윤율’에 불과하며,
잉여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맑스의 이윤율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리카도학파가 불변자본을 = 또는 =로,
가변자본을 = 또는 =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품들이
정확히 노동가치 또는 생산가격에 판매된다고 가정하고 있다.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은 ‘비균형’(non -equilibrium)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상품들은 일반적으로 생산가격
으로 판매되지 않고, 생산가격과 괴리된 시장가격에 판매된다고
주장한다.(주16)
그리고 이러한 시장가격에 구매된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가격이 자본의 가치나 자본들의 비용가격을 이룬다. 시점간
단일체계 접근은 이러한 자본주의 현실을 고려할 때, 맑스의
비용가격과 자본의 가치는 생산수단의 구매가격과 임금지불액인
+ 또는 +의 형태의 화폐액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주17)
맑스는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이 노동가치 형태인 (t)+(t)
형태로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고 전형에 대해 논의하고,
비용가격이 ‘수정’된다고 언급했다. 신리카도학파는 이런
맑스의 언급을 소위 투입물과 산출물의 ‘동시적 전형’으로
해석하고,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이 +와 +의 이원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은
이러한 이원체계 해석을 부정하고, 맑스의 가치론을
‘단일체계’로 해석한다.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은 맑스의 전형은 일정한 형태와 크기로
생산에 ‘주어진’ 또는 ‘전제된’ 자본들이 생산한 잉여가치가
자본들 사이에 재분배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에 따르면
맑스가 자본의 가치가 노동가치 형태인 +라고 가정하고 전형을
논의했는데, 생산수단과 노동자들의 생활수단이 노동가치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노동가치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그들
구매가격인 비용가격도 노동가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현실에서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은 노동가치대로
판매되지 않고, 전형된 생산가격대로 판매되는 경향을 가진다.
그리고 이런 상품들의 구매가격이 비용가격 또는 자본의 가치를
이룬다. 따라서 시점간 단일체계 접근에 따르면, 발전된
자본주의에서 맑스의 비용가격은 생산가격 형태인 +의
‘단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에 따르면, 발전된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본들은 +의 형태로 생산 이전에 주어지고, 이렇게
주어진 자본은 의 잉여가치를 생산하지만 전형 때문에 만큼의
평균이윤을 획득하게 된다. 그에 따라 i부문이 1년간 생산한
상품의 가치는 ++이지만, 이 상품은 생산가격인 ++로 판매된다.
그리고 이런 해석에 기초한다면, 맑스의 두 쌍의 총계일치
명제는 동시에 성립한다. 먼저 생산된 총 잉여가치 는 자본들
간에 재분배될 뿐이기 때문에, =가 성립한다. 다음으로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은 생산가격 형태인 +로 단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총가치=총생산가격’, 즉 (++)=(++)이 성립한다.
4. 신리카도학파의 이원체계 비판
여기에서는 신리카도학파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만을
하는 것으로 줄이겠다. 먼저 신리카도학파의 주장을 다음의 세
가지로 나타내 보자. 1) 맑스의 전형은 위와 같은 동시적
이원체계로 나타내져야 하며, 2) 맑스의 가치론이 동시적
이원체계일 경우 맑스의 전형은 논리적으로 비정합적이며, 다른
한편 3) 이윤율(과 상대가격)은 맑스의 가치개념 없이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신리카도학파의 주장 2)의 비정합성 비판과 3)의
불필요성 비판이 논리적으로 상호 모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3)의 주장은 1)의 주장과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3)에 의하면 신리카도학파의 이윤율은 맑스의
가치개념 없이 구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구해진 이윤율은 맑스의
이윤율인가? 그럴 수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맑스의 이윤율은
가치개념에 기초해서 구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의
주장이 옳다면, 1)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옳을 수 없다. 즉,
맑스의 가치개념 없이 이윤율이 구해지는 동시적 이원체계는
맑스의 가치론을 나타낼 수 없다. 그리고 2)의 주장은 1)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에 의존하는데, 1)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면
2)의 주장도 타당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비정합성 주장과
불필요성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그러면 신리카도학파의 이윤율은 가치개념 없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이 이윤율은 노동에 의해 직접 결정되지 않고, 식
(7)에서 기술적인 투입물 계수와 노동자들의 실물임금에 의해
결정된다.(주18)
그런데 가치개념과 인간노동과 독립적으로 결정되는 이윤율과
가격이 맑스의 가치론을 나타내 주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주19)
왜냐하면 맑스의 가치론의 핵심은 이윤이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에서 나오며, 일반이윤율과 이윤도 잉여노동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리카도학파의 이원체계는 맑스의 가치론에
적합한 체계로 ‘재수정’되어야 한다.(주20)
이런 수정을 위해서 이윤율 에 노동 또는 노동시간이
포함되도록 정의하고, 나아가 그것을 ‘잉여가치/자본의
가치’로 정의해야 한다.
먼저 자본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런데 신리카도학파의
이원체계에는 자본의 가치가 +와 +의 두 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면 이윤율은 어떤 자본의 가치를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의미있는 이윤율은 자본의 운동을 규정하는
이윤율이어야 한다. 그런데 노동가치 +에 기초하여 결정되는
이윤율은 현실의 자본의 운동을 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자본가들이 투입물을 구입하고 노동자들이 생활수단을
구입하는 가치는 노동가치 가 아니라 생산가격 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전된 자본주의에서 현실적인 자본의
가치는+ 형태일 수밖에 없다.(주21)
그러면 맑스에 적합한 잉여가치는 무엇인가? 잉여가치는
‘잉여노동’의 표현이고, 잉여노동은 노동의 일부이므로, 결국
노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가격체계에는 노동변수가 사실상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가격체계는 맑스의 이윤율을
구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가치체계에는 노동변수가
들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잉여가치가 도출되어야 한다. 그러면
잉여가치는 ―가 되고, 맑스의 일반이윤율 을 (―)/(+)로 결정할
수 있다. 이 이윤율은 신리카도학파와 같이 가치개념과 무관하게
결정되지 않고, 잉여가치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맑스의 이윤율이다. 그리고 이제 생산가격체계에 이 이윤율을
도입함으로써 생산가격들인 도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신리카도학파의 이원체제는 다음과 같이 단일체계로
‘수정’된다.
가치체계:=+ (8)
이윤율결정:=(―)/(+) (9)
가격체계:=(+)(1+) (10)
물론 위의 체계는 ‘가장 단수한 상황’에서 신리카도학파의
동시적 가치결정을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가정들에 기초할
때에도 맑스의 가치론은 신리카도학파와 같은 이원체계로 구해질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위와 같이 ‘동시적 단일체계’로
구해진다.(주22)
그러므로 신리카도학파가 맑스의 가치론이 ‘비정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맑스의
가치론이 단일체계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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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 연구 통권
3호(2005년 제2권 제1호,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05.5.20)에 게재되었으며, 김창근 연구원의 박사학위 논문
맑스의 가치론과 시간: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의
확장(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2005.2)의 일부로서 제
87차 연구발표회(2005.10.29)에서 발표되었습니다.
1. 맑스의 전형을 ‘시점간 단일체계’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프리만(Freeman)과 클리만(Kliman) 등을 들 수 있고,
국내 논문으로는 김창근(1998, 2005)과 송태복(2003)이 있다. 이
해석의 대표적인 저서는 Freeman, A. and Carchedi(eds)(1996)와
Freeman, A., A. Kliman & Julian Wells(eds)(2000)이다.
국제노동가치론연구모임(International Working Group on Value
Theory)의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gre.ac.uk/~fa03/iwgvt)에서는
이 입장을 따르는 최근의 논문들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영어의 ‘temporal’을 ‘시점간’으로 번역하는데,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에서는 한편으로 생산물의 가치와 다른 한편으로
그 생산물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생산수단 또는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생활수단의 가치가 ‘다른 시점’에서 결정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2.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을 잘 정리하고 있는 다른 글은 Kliman
and McGlone(1999)을 들 수 있고, 류동민(2003)은 신해석의
입장에서 이 해석을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3. 이 논문에서 ‘노동가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직간접적인
노동에 의해 결정되는 상품의 가치’를 가리킨다. 맑스의
‘가치’를 이렇게 ‘노동가치’로 바꾸어 부르는 것은 이
논문에서는 맑스의 ‘가치’와 ‘생산가격’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가치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4. 전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단순화를 위해 이런 ‘가장
단순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맑스는
자본론 3권 9장에서 전형을 다루면서 이런
상황을 명시적으로 가정하지 않고 있고, 고정자본의 존재를 직접
고려하고 있다.
5. 은 ‘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Monetary Expression of
Labour-time, MEL)으로 1단위의 노동시간이 얼마만큼의
화폐액으로 표현되는가를 나타낸다. 맑스에 따르면 이 표현은
금이나 은과 같은 화폐상품을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데, 예를
들어 금 1온스를 생산하는데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10시간이라면, 1시간의 노동시간은 1/10온스의 금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노동시간당 임금과는 다른데, 1시간의 노동이 금
1/10온스로 표현되고 잉여가치율이 100%인 경우, 임금은 1시간
당 1/20온스이다. 맑스는 전형에 대한 논의에서 이 표현이
주어져 있고 불변이라고 가정한다. 이 표현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김창근(2005)의 4장을 참조하라.
6. 는 사회적 총자본의
유기적구성이고,/=[+]÷()={/[1+]}[+]÷()={/[1+]}÷{/[+]}=[1+]
/[1+]이다.
7.=/(+)이기 때문에, =[+]=[+]=[/(+)][[+]]=가 성립한다.
8.=(+)+이고, =(+)+인데, =이고 (+)는 와 에서 공통적이기
때문에, =가 성립한다.
9.여기에서 상첨자 ‘*’는 ‘수정’을 의미하는데, 생산수단과
노동자들의 생계수단이 그 노동가치와 상이한 생산가격에
구입되어 비용가격을 형성함을 의미한다.
10. 맑스의 가치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Steedman(1977)도
“고정자본이 없고”, “연초에 곡물임금이 지불되고”,
“자본가들은 연말에” 생산물을 분배받는다고 가정하고
있다(p.38-9).
11.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 n개의 기초재가 존재하고, i부문에서
1년간 만큼의 생산물을 생산한다. 와 는 각각 i재 한 단위의
노동가치와 생산가격인데, 와 는 각각 와 를 원소로 하는 n×
1벡터이다. i부문은 자신의 상품 한 단위를 생산하는데 j상품 를
생산수단으로 필요로 하며, 는 를 원소로 하는 n× n행렬이다.
i재 한 단위를 생산하는데 만큼의 노동이 필요한데, 은 를
원소로 하는 n× 1벡터이다(여기에서의 는 앞에서 맑스의 경우를
논할 때 사용한 와 다름에 유의하라. 앞에서 는 상품 단위당
필요한 직접노동이 아니라, i부문의 연간 직접노동이었다). 는
상품 i 한 단위에 포함된 잉여가치이고, 와 는 각각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인데, 맑스의 경우와는 다르게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서와 다른 기호를 사용했다. 나아가
모든 노동자들은 노동 한 단위당 동일한 양의 실물임금(real
wage)으로 i재 단위를 받는다고 가정되는데, 는 를 원소로 하는
1× n벡터이다.
12. ‘는 의 i번째 행인 1×n벡터이다’
13. 이런 결론에 대한 수학적 증명은 Morishima(1974)를
보라.
14. 대표적인 예로 Samuelson(1971)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맑스의 전형은 자본론 “I권의 가치분석에서
취급된 불필요한 우회로로부터 본래의 길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며, “최초로 쓰여진 것을 지우개로 지우고 나서, 그 후에
다시 새롭게 출발하여 올바른 계산을 기입하는 것과 흡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p.225).
15. 특수한 경우는 임금 또는 이윤율이 0이거나, 모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동일한 경우다. 하지만 세 경우 모두 자본주의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이다.
16. 자본주의 현실에서 일정한 생산부문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정확히 생산가격에서 판매되기 위해서는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고, 자본의 이동에 의해 경제 전반의 이윤율이 균등화된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현실에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자본주의에서 생산기술과 수요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그에 따라 수요와 공급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본들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다.
17. 이런 의미에서 시점간 단일체계 해석은
‘비균형(non-equilibrium)’을 강조한다. 이들은 일종의
균형개념인 생산가격은 단지 시장가격이 장기적으로 수렴해 가는
‘경향’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에서 상품들은 결코
생산가격에 판매되고 구매되지 않지만, 다른 조건이 불변이라면
장기적으로 그런 생산가격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18. 식 (7)에서 가격과 이윤율은 투입물 계수 들과 상품단위당
실물임금 =(1×n벡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후자의 변수에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윤율이 집적 노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와 (1×n벡터)를 i부문 노동자들의 1년간의 노동시간과
1년간 실물임금(1×n벡터)이라고 하자. 그러면 (1×벡터)는 노동
한 단위당 실물임금이므로 /이고, 는 상품 한 단위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 /이다. 그리고 ==[/]×[/]=/(1×n벡터)로, 에는
노동 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신리카도학파의 이윤율은
투입물 계수 들과 상품단위당 실물임금들 =/에 의해 결정되며,
인간노동 는 직접적으로 이윤율을 결정하지 못한다.
19. Steedman(1977)은 신리카도학파의 접근을
‘잉여접근’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의 이윤율이
인간 노동에 의해 직접 결정되지 않고, 한편으로 투입물과
실물임금, 다른 한편 산출물 간의 양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20. 신리카도학파의 동시적 이원체계는 Bortkiewicz(1907a,
1907b)가 맑스의 비용가격 ‘수정’을 투입물과 산출물의 가치의
동시적 결정으로 ‘수정’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수정은 보르트키예비츠의 잘못된 수정에 대한
‘재수정’이고, 맑스의 가치론을 제자리에 다시 위치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1. 물론 이 경우에도 노동가치 형태의 자본의 가치 또는
비용가격과 생산가격 형태의 그것들 간의 관계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김창근(2005)의 2장을 참조하라.
22. ‘동시적 단일체계 해석’은 Wolff, Roberts and
Callari(1982, 1984a, 1984b), Roberts(1987, 1997), Lee( 1990,
1993)를 참조하라. 최근에는 Moseley가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