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공업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다 …
얽힌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정병모 / 조선소 노동자
10. 보고대회
수만의 노동자들을 집어 삼킨 공장은 겉보기에는 고요했다.
아니다. 마치 폭풍을 앞둔 저녁, 속절없이 붉게 진 노을빛처럼
화사하고 포근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공장은 쌩쌩 잘 돌아 가고 있었다.
쫓기는 공정에 밀려 있는 일감에 파묻힌, 그 속에 녹아버린
노동자들은 아무 일 없는 듯이 하던 일을 제각기 열심히 하고
있었다.
용접하는 사람도 철판을 자르는 사람도, 무거운 부재를 나르는
노동자들의 표정에도 변화는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이 있었다면 불꽃을 튕기며 그라인더 작업을 하는
노동자가 쇠를 갈 때 일어나는 불꽃이, 내 마음 탓인지
불꽃놀이처럼 정겨워보였다.
외할머님 장례식 때문에 현장을 며칠 비운 탓으로 현장 분위기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라도 붙잡고 그간의
사정을 듣고 싶었지만, 저마다 하는 일에 골몰한 사람을
쳐다보니 쉽사리 물을 수도 없었다.
아무리 진정을 하려 해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권용목을 만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권용목을 만나지?
어떻게 노동조합을 만들었을까?
어떻게 하면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지?
현대중공업에도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을까?
다행히 그동안 현대중공업에 누가 노동조합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
꼬리를 물고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일을 하면서도 내내 ‘노동조합’, ‘권용목’을 번갈아 가며 떠
올리며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보고대회가 열린다는 현장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주로 현대엔진(주)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엔진식당으로 자전거를 타고 찾아갔다.
보고대회가 열리는 식당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비집고 겨우 식당에
들어갔다.
식판에 밥을 타서 먹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판의 밥을 그대로 둔 채, 보고대회가 열리고 있는 단상을 향해
고개를 빼서 쳐다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산만했지만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보고대회를 한참 진행한 모양이었다.
마이크가 신통찮은 탓에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거리가 먼 탓인지 핸드마이크로 떠드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권용목 위원장을 모신다고 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박수소리는 한참을 지나 잦아졌다.
사회자의 소개를 받은 권용목 위원장이 앞으로 나섰다.
먼 눈에 봐도 그 조그만 뿔테 안경을 쓴 그 사람이
틀림없었다.
허리를 정중히 숙여 인사를 한 후 좌우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기억이 없지만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는 노동조합이 없는 현대왕국에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지지 덕분에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우리들의 단결을 깨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절대로
흔들리지 맙시다.
우리 임원들은 여러분을 믿고 숙식을 함께 하면서 공동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노동조합 설립신고가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생이 되더라도 그 때까지 참고 견딥시다."
이런 취지의 말을 했던 것 같다.
권용목 위원장의 인사말을 끝으로 보고대회가 끝이 났다.
보고대회를 마쳤다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보고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노동자나 식당에서 밥을 먹는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인사를 마친 권용목 위원장의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인사를 주고받느라고 분주했다. 서로 등을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격려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딴 나라 사람 같은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부러웠다.
찾아가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하루 종일 머리 속을 맴돌던, 모든 의문을 따지듯 묻고
싶었다.
먼발치에 있는 권용목 위원장을 찾아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축하한다고 인사도 하고 싶었지만 주변의 사람 때문에
포기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작업현장으로 돌아섰다.
보고대회를 구경하느라 밥을 먹지 못했지만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으며,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작업장을
산책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면서 생각에 빠져 들었다.
현대그룹에 아니 현대엔진에, 최초로 노동조합이 생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 작업장으로 이용되던, 거대한 차량이 바삐
움직이던 도로에는 노동자들이 편을 갈라 족구시합을 하고 배구
등을 하며 휴식을 갖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노동조합이 생긴 것을 알고나 있을까?
알면서도 속내를 보이지 않으려고 시치미를 떼고 딴청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혹시 저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아닐까?
현대중공업에도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걸까?
시계를 들여다보니 점심시간이 다 끝나고 있었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자전거 페달을 정신없이 밟으며 작업장을 향하는 내 머리 속에는
다시 잡념이 밀려왔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신고필증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엔진 노동자들이 생각이 났다.
노동조합만 만들면 다 되는 것이 아니구나.
신고필증이 나와야 노동조합을 인정받을 수 있구나.
혹시 있을지 모르는 만약을 대비해 집에도 가지 못하고 숙식을
함께 하며 고생하는 현대엔진 동지들이 걱정스러웠다.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얽힌
실타래를 제대로 풀 수 있을지 몰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찾아 갈 곳이 있어 잔업을 하지 않고 퇴근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 홍보물을 받아보고 마음을 굳혔지만, 막상
찾아가려니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홍보물에 적힌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노동문제상담소입니다.”
“.........”
“말씀하세요.”
전화까지 건 마당에 망설일 이유는 없었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뒤통수 간지러운 부끄러운 고백 하나 한다.
아는 사람은 대충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난 급하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다.
어릴 적 앞뒤 집에 살던 친한 친구였던 ‘홍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놀리는 재미로 흉내를 내다가 죄 받은 탓으로, 나 역시 말을
더듬게 되었는데 한참 더듬을 때는 나조차 답답할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철들고 나서 말을 더듬는 것을 고치려 부단히 노력했고, 어느
정도 교정을 했다고 생각을 하지만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급하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버릇은
여전했다.
지금은 완벽하진 않지만 웬만해서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
여기서는 편의상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는 것으로 적는다.
“거기가 울산사회...... 선교 실천협의회인가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무슨 일인가를 묻는다.
“상담할 일이 있어 찾아가려 하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신정동을 아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태화로터리와
신정지하도 사이 무슨 산부인과 맞은편에 있다고 하며
찾아오라고 한다.
급한 마음 탓인지 제대로 듣지 못해 다시 물었다.
“신정 1동에 있는데요. 허동은 산부인과 맞은편에 건물이
있는데 2층은 다방이고 3층에 사무실이 있습니다.” 한다.
2층에 있는 다방 이름은 주원다방이고, 다방 건물 3층에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가 있다고 한다.
지나 간 6월이 생각났다.
성남동에서 공업탑으로 가두행진을 할 때의 일이다.
신정지하도 못 미쳐, 흔히 월평이라고 부르던 곳을 지날 때
유달리 시위대를 환영해주던 곳이 있었다. 물론 대다수 시민들도
시위대가 지나가면 박수를 치면서 환영해주었고, 기다렸던
사람들은 은근슬쩍 시위대에 합류했다. 자연스레 시위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그런데 월평을 지날 때는 남달랐다.
걸어가는 시위대를 향해 작은 홍보물을, 눈처럼 뿌리면서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채 손을 흔들며 환영해주던 작은 건물이
있었다.
서로 박수를 치며 격려하는 마음으로 몇 번을 뒤돌아봤는지
모른다.
아! 거기였구나. 짧은 탄식이 절로 났다.
방어진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에 시달리며 다닌, 먹고 살기 위해
땀내 나는 사람들 사이에 콩나물처럼 꽉 끼인 채 다니던 버스
안에서도 마음은 들떠 있었다.
태화로터리를 지나 월평이란 곳에서 내렸다.
내 짐작으로 울산시청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어디엔가
있었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천천히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건물들을 자세히 살피며
걸어갔다.
작은 사거리 부근에 오니 ‘허동은 산부인과’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산부인과 맞은편이니 이쯤인데, 허나 잘 보이지 않는다.
얼마쯤 살폈을까. ‘주원다방’이란 간판이 보인다.
조그마했다. 저렇게 작으니 눈에 띌 리가 없지. 혼자 말을 하며
건물을 쳐다봤다.
한쪽으로 조그만 계단이 있는데 햇빛 탓인지 컴컴했다.
11. 노동문제상담소
잠시 망설이며 시커멓게 입을 벌린 계단을 올려다봤다.
그리 넓지 않은 계단이다. 어둠에 차츰 익숙해지니 모든 것이
자세히 보인다.
긴장한 탓인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길게 한번 내쉬고 기다랗게 쭉 뻗은 계단을
올라갔다.
2층 다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지나쳐 올라가니 3층이
곧바로 나타났고 문은 열려 있었다. 조그만 사무실은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성격 탓인지 아님 바쁜 탓인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서류더미와 홍보물 따위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한쪽에는 책상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 책상도 사정은
비슷했다.
탁자를 사이에 둔 넓은 의자에는 몇 사람이 모여서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갑작스레 들어온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 중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삐쩍 마른 체격의 날카롭게 생긴 나를 보고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믿거나 말거나. 내 키는 178센티인데, 그 당시에는 몸무게가
62키로 정도, 뼈만 앙상한 몸매를 자랑했다. 지금은 말
못합니다. 비밀입니다.)
아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물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왔냐고 물으니 난감해졌다.
사무실을 찾아오면서 준비해 왔던 수많은 말이 갑자기 사라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머리에 저절로 손이 갔다. 머리를
긁적이며 겨우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발행한 유인물 보고 왔는데요. 노동조합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를 유심히 살피며 내 말을 찬찬히 듣던 그 남자가
‘노동조합에 대해 알아볼 것이 있어 왔다’는 내 말에 경계를
푸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의자를 권하며 앉으라 한다.
몇 마디를 더 꼬치꼬치 묻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사람을 찾으러 가는 모양으로 휑하니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그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겨우 생겼다.
이곳저곳 찬찬히 둘러보니 조그만 사무실에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했지만 활기차 보였다. 전화를 받는 사람,
유인물을 정리하는 사람, 나처럼 찾아온 사람인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얘기를 하느라고 저마다
바빴다.
나는 안중에 없이 제 할일만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설명해야
오해하지 않고 내 진심을 알릴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이 스쳐갔다.
기다리라던 남자가 어떤 여자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여기서 함께 일하는 실무자라고 소개를 한다.
이름을 노옥희라고 하며 자기소개를 간단히 한 후 어떻게 왔냐고
묻는다.
요약해 설명한 내용은 이렇다.
“나는 현대중공업에 다니고 있는데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다.
노동조합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라.
그것이 어렵다면 현대중공업 사람 중에서 나처럼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을 소개시켜주라.
그러면 그 사람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드는 방법을 공부하겠다.
혼자 하려하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벌써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면 소개해주라.
믿거나 말거나 난 순수한 마음으로 왔고, 우리 집 전화는
274-0000이다.”라는 얘기를 했다.
쉬지 않고 준비했던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묵묵히 내말을 듣던 그 사람들이 몇 가지를 더 묻더니, 여러
가지 사정상 신분을 확인하고 싶다고 어렵게 운을 뗀다.
‘시절이 하 수상하던 시기에’ 뜬금없이 불쑥 찾아온 사람을
쉽게 믿을 수는 없는 상담소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머니에서 회사 출입증과 주민등록증을 꺼내보여 주었더니 몇
가지만 간단히 적겠단다.
또 적당히 연막을 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기들을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얼마나 기다려야 연락을 할지 모르지만
기다리겠냐고 묻는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마다할 수 없어 그러겠다고 했더니 주소와
전화번호 따위를 적고는 알았다고 그런다. 집에 돌아가 있으면
연락을 할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그런다.
경험은 없었지만 주워들은 얘기는 있어서 제대로 일을 하려면
신분을 확인해야 하고, 신분을 확인하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가
보다 생각하니 오히려 믿음이 생겼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더구나 처음 찾아온
사람에게 모든 것을 불쑥 말하기는 더더욱 어려웠으리라. 마음의
짐을 덜고 돌아 나오는데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첫 모임
기다리는 시간은 왜 그리 길던지.
회사에서 일을 할 때나 퇴근 후 친구들과 만날 때에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제쯤 연락이 올까? 나처럼 찾아오는 사람이 혹 있을까?
나를 믿어 줄까?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상담소를 갔다 온지 3일째 되던 날, 퇴근 후 집에 오니 어머니가
연락이 왔다고 그런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했더니, 내일 시간이 어떠냐고 그런다.
시간을 내겠다고 그러니 몇 시까지 시외버스 정류소 근처의
다방으로 오라고 그런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드디어 연락이 왔구나.
어떤 사람들일까? 몇 명이나 모일까?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일부터 해야 하지?
다음날 퇴근 후 찾아간 다방은 한산했다.
한쪽에 앉아 있던 상담소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손을 번쩍 들고
자리를 알린다. 이미 몇 사람이 같이 모여 있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 미리 갔는데도 모두들 벌써 와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리에 앉으니 ‘백’이라고만 알고 있는 그 남자가 좌중을
둘러가며 인사를 시킨다.
그 사람들끼리는 이래저래 여러 인연으로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다들 인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나만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고 나니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도 잠시, 노동조합
설립에 관련한 얘기로 본격 들어갔다. 다들 사전에 공부를 많이
한 모양으로 척하니 알아듣는데 나만 뻘쭘했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50명 이상이 모여야 하고, 상부
단체의 승인도 있어야하고, 발기인 대회도, 보고대회도 해야
한다고 설명을 한다.
허 참나 갈수록 태산이네. 오늘 모이면 대충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한 컷 부풀어 왔는데... 이제부터
시작이란 말인가?
풀잎주산학원
그런데 막상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우려는 잠시뿐, 얘기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먼저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얘기를 했다.
제일 먼저 우선해야 할 일이 사람을 모으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을 모으는 데 모든 힘을 쏟기로 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상담소 실무자를 제외하고 모두 5명이
모였는데, 각기 속한 사업부가 달랐다. 해양사업부, 공무부,
연구소, 의장생산부, 나는 조선사업부 특수선사업부에 속해
있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다행히 각자가 속해 있는 부서가 다르니
자기주변에서 믿을만한 사람을 최대한 모으고, 많은 사람들이
모은 다음 결성대회를 여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두 번째는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준비모임을 매일 갖기로
하였고, 모임장소는 내 여동생과 아내가 공동운영하던 반구동에
있던 주산학원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결정하고 나니 마음은 바빠졌지만,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에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헤어졌다.
다음날 퇴근 후 두 번째 모임을 주산학원에서 시작하였다.
어제 모임 이후 각자 현장에서 활동한 결과를 보고하는 것으로
얘기가 시작되었는데, 노동조합 창립 발기인에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보고 형태로 했다.
많은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각자 맡은 사람과 구역이 달랐기
때문에 새로운 얘기도 많았지만 보고되는 얘기의 신빙성은
떨어져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부터 그랬다. 사실 나도 막상 현장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누구에게 얘기를 할지,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쩔쩔매다
퇴근시간이 되었다. 겨우 친하게 지내는 몇 사람에게만 얘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보고하기를 여러 사람에게 얘기를 했고 반응도
좋더라는 식으로 얘길 하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거짓은
아니었지만, 마음만 앞선 나머지 희망 섞인 추측으로 허황된
보고를 했고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현장사람들에게 얘기를 폭 넓게 하지 못한 변명을 하면
이렇다.
첫째로 어떤 사람에게 얘기를 해야 할지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늘 가까이 흉허물 없이 지내온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이 얘기를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거절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라 걱정이 앞섰다.
둘째는 일이 잘못되어 붙잡혀가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일을
망치기는 싫었다.
아무에게나 중차대한 얘기를 함부로 떠벌리기에는
‘노동조합’은 너무 절박한 얘기였다.
변명하자면 다들 내 마음 같았을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모임에서도 몇 가지를 결정했다.
열정은 누구보다 앞서 있었지만 노동조합에 관해서 깊이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한 우리가 부끄러웠고 늦었지만 노동법을
공부하기로 했다.
현대중공업에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나선 우리가 노동법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몇을 제외하고는
노동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벼락치기 공부라도 해서 노동법을 제대로 알아야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고 회사를 상대로 근로복지를, 임금인상을 추진할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에 공부하기로 했다.
짧은 시간에 전체를 배울 수 없으니까 노동조합 결성에 관련한
것을 우선 배우기로 했다.
또, 먼저 노동조합을 만든 현대엔진사람들을 만나서 결성에 관한
경험과 어려움을 듣고 배우기로 하고 연락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금속노련에도 연락할 방법을 알아보기로 했다.
지금은 다 아는 얘기지만, 그 당시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면 금속노련의 감독 아래 진행해야 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알고 있었기에 금속노련과 연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성을 하기 위해 사람을 다
모았는데 금속노련과 연결이 안돼 결성도 못하고 승인을 받지
못한다면, 다된 밥에 코 빠트리는 꼴이 된다고 생각했다.
금속노련과 연결되어야 결성식을 가질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현대그룹에 첫 노동조합을 만든
‘현대엔진노동조합’ 결성과정에서 금속노련을 통한 조직결성
소식을 들어 알고 있던, 우리가 범한 오류 중 하나였다.
12. 노조설립신고서
날마다 일을 마치고 난 뒤 어김없이 주산학원에서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는 여러 가지를 검토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벼락치기 공부를 잠깐하기도 했지만 공부는 형식에 그쳤고, 주로
결성식에 필요한 사람들을 찾기 위한 상황점검에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사람을 찾는 방법은 대략 두 분류로 구분했다.
비밀이라고 할 것까지 없지만 그래도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결성식에 참여할 사람과 사전 준비모임격인 주산학원에서의
모임에 참여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구분해서 점검했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늘었지만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지는 않는 것을 내부 방침으로 정했다.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서툰 우리 모두는 많은 사람이 모이면 회의하기 어려우니
사전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을 열 명 정도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즈음 현대엔진노동조합은 시청으로부터 설립신고를
받아냈다.
시청에 노조설립신고를 낸지 일주일 만인 87년 7월 13일 마침내
설립신고서를 받았다.
집에도 가지 못하고 매일 합숙을 하면서 애를 쓰고, 점심시간을
이용한 보고대회를 열어 노조설립에 대한 열의를 보여준
권용목을 비롯한 엔진노동자들이 이루어낸 값진 승리의
결과물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작업현장은 눈으로 보기에도 술렁거릴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과 기대감이 함께
묻어났다.
움츠리고 주저하며 살던 노동자들에게 비로소 살아 갈 희망이
생긴 탓인지 작업현장에는 망치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조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감회도 남달랐지만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노동상담소를 통해 엔진쪽 노동자와 선을
대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상담소를 통해 모임을 갖게 됐지만 상담소 사람들이 우리를
완전히 믿지는 못한 모양인지 그다지 열의가 없어 보였고, 그
탓인지 일의 진도는 매우 느렸다.
나 또한 우연히 적어 둔 권용목의 집으로 전화해서 통화를
시도했지만 한 번도 전화연결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권용목의 집으로 전화가 불이 날 지경으로 많이 왔고
찾는 사람이 많아서 집에도 없었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오는 얘기도 그리 신통치는 않았다.
현대엔진 쪽에서는 자기들이 알고 있기로는 현대중공업에는 여러
팀들이 노조설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무 곳이나 추진 속도가
빠른 곳에서 먼저 노동조합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다음에 노동조합에 힘을
합하면 되는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우리는 생각이 달랐다.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조합설립을 추진하는
팀이 여럿이 있다면 따로따로 힘들게 추진을 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모여서 힘을 합하면 노조결성이 훨씬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현대엔진쪽에 주문하기를 여러 팀을 한곳에 모아주기를,
그것이 어렵다면 대표들만이라도 따로 모여서 노조설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길 부탁했다.
같은 목적을 갖고 있으면서 따로 일을 추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데 그것조차 맘대로 안됐다. 내 생각에는 서로가
서로를 절대로 신뢰하지 못해 빚어진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금속노련과의 연락도 지지부진했다.
노조설립에 관련해 이야기해야 할 일과 도움을 받을 것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던 우리로서는 피가 마르고 애가 타는
일이었다.
내려온다 내려온다는 말만 무성할 뿐 제대로 연락이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도대체 알 수도 없었다.
현대엔진에, 아니 현대그룹에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도와 준
이후 부쩍 위상이 높아진 탓인지 찾는 사람도 많고 챙겨야 할
사업장이 많아서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나중에 보자는 말을
전해 들었다.
가까운 시일에 울산에 온다는 말만 믿고 막연히 기다려야
했다.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 설립
시간은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주산학원은 우리의 소중한 아지트였다.
우리들은 퇴근 후 매일 모여서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갔다.
설립에 필요한 인원도 넘칠 만큼 다 모았고 설립에 필요한
노동법에 대한 공부도 어느 정도 터득해 가고 있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금속노련과의 연락도 신통찮았고 현대엔진 쪽과의
연락도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어렵사리 연락 닿은
현대엔진 쪽에서는 종전과 같은, 먼저 추진하는 쪽이 노동조합을
추진하면 되었지, 뒤 늦게 합쳤을 때 생길 수 있는 혼란을
염려하여 서로 연결시켜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 다른 얘기는 우리를 조바심을 내게 만들었다.
우리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있었는데, 노조설립과정에서 보여준
현대그룹의 치밀한 노무관리와 비열한 탄압이었다.
현대엔진에서 노조설립에 성공하자 뒤를 이어 현대미포조선에서
노조를 결성하였다.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7월15일 저녁 7시에 노조설립을 하기
위해 노동회관에서 결성식을 가지려 했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결성장소인 노동회관이 수 십대의 차량과 수백 명의
관리자에 의해 봉쇄되었다.
이에 굴하지 않은 현대미포조선노동자들이 밤 9시에 가정집에서
39명이 모인 가운데 결성식을 갖고 김영환을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다음날 7월16일 오전 10시에 노조설립에 관련한 일체의 서류를
갖고서 시청사회과에 신고하러 갔으나, 접수 중에 있던 서류
일체를 미포조선 관리직 사원으로 보이는 괴한 7명에게 탈취
당했다.
서류를 접수하러 갔던 미포조선노동자들과 금속노련 조직부장
이진우가 거세게 항의하자 남부경찰서에 서류 탈취 사실을
신고하였고, 이 내용이 각종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회사 사내 운동장에서는 미포조선노동자들 1,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보고대회를 겸한 항의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1,450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을 더 화나게 한 일은 따로 있었다.
87년 상반기 경기가 호조를 보이자 노동자들은 노사협의회를
통해 하기 보너스 150%를 요구하였고, 당시 사장이던 손명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주영이
손명원사장을 권고사직하게 했고 이를 알게 된 노동자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16일 보고대회를 겸한 항의집회에 모인 미포조선노동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는데, 스크럼을 짜고 ‘우리의
소원은 노조’라는 노래를 부르고 많은 구호를 외쳤다.
‘민주노조 건설하여 민주노동사회 만들자’ ‘악덕재벌
몰아내자’ ‘노사협의회 해체하고 민주노조 인정하라’
‘보너스 인상 지급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도는 노동자들의 열기에 놀란 회사측은 탈취한 서류를
시청에 돌려줬고, 결성신고 3일 만인 7월19일 노조설립 신고증을
받아냈다.
D DAY. 7월 24일
현대미포조선의 예처럼 주변의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현대미포에서 생겼던 일이 우리에게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또 다른 탄압이 우리에게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만
점점 조급해졌다.
현장에 들리는 소문은 더 흉흉했다.
현대엔진과 현대미포의 실패를 거울삼아 현대중공업에서는
노조설립을 회사가 먼저 선수를 칠 것이란 얘기부터, 회사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이미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소리
소문 없이 널리 퍼져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조합 설립은 힘들 것이라는, 어림없다는
흰소리가 실감났다.
100만평이 넘는다는 넓은 공장에서 수만 명을 대상으로
노동조합을 설립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생각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안 풀리는
것은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고 더 이상 허송세월할 수
없었다.
우리의 준비정도와 시간을 고려할 때 7월 중순쯤이면 노조설립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7월 24일에 노조설립을 하기로 날짜를 정했다.
7월 24일에 노동조합을 설립하기로 결정하니 막연했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금속노련과 연락이 되어야 할 텐데.
누구누구를 초청할까? 태극기도 준비해야 하나. 창립총회 장소는
어디로 해야 할까?
또 다른 걱정도 밀려왔다. 우리와 다르게 노동조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걱정되었다. 공교롭게 우리와 같은
날에 하면 어쩌지. 금속노련 조직부장이 우리에게 안 오고
상대편에 가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호사스런 배부른 걱정이었다.
7월 21일 저녁이었다. 그날도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학원에서
모여 노조설립에 관련한 점검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회의를 하고 있는데 현대엔진 사람들이 찾아왔다.
급한 일이 생겨 왔다고 하면서 말을 시작해놓고 뜸만 들일 뿐,
쉽사리 말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큰일이 났다는 생각에
가슴부터 덜컹 내려앉는다. 여러 번 보자고 연락을 해도
바쁘다는 이유로 오지 않던 현대엔진 사람들이 여럿이 온 것부터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어렵게 시작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서울에서 금속노련 이진우 조직부장이 영남 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짐작컨대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돕기 위해
왔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목적지가 울산인 것 같고, 큰 사업장의 노조설립을
도우려 왔다고 보는데 현대중공업인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장조직들을 모두 확인했지만 전혀 관계가 없고, 현재
노조설립에 대한 계획도 없는 것으로 안다. 아마 확실히
모르지만 회사쪽과 연락이 닿은 것 같고 이른바 어용노조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러 온 것 같다.
잘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간 어느 곳에선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결성을 마쳤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들을 풀어서 금속노련 이진우를 찾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없다.’
말을 듣고 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설마 했던 일이, 염려하며 조바심 내던 일이 결국
터졌구나.(계속)
(* 이 글은 인터넷 신문 <울산노동뉴스>(nodongnews.or.kr)에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