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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88호
최경희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

최 경 희/ 연구위원?정치학 박사수료






문제설정: 신자유주의 시대, 참여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와 참여민주주의’를 국정 모토로 삼았다. 참여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시민의 ‘정치참여’를 중요하게 고려하는 급진적 민주주의 조류의 하나이다.1) 루소(J. J. Rousseau)는 시민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그 이후는 종속적인 상태라는 것을 직관하면서 이전 사회계약론자와는 다른 견해를 제출하였다. 루소는 인민주권의 양도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직시하였고, 이러한 맥락에서 직접민주주의의 근대적 형태를 강조한 정치이론가라고 볼 수 있다.2) 맑스가 고대 직접민주주의 전통과 루소의 견해를 착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맑스주의 전통에서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 구현에 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구사하는 참여민주주의는 많은 이들에게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감만을 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소위 노무현식 통치스타일은 우익보수 세력에게 집단이기주의, 불안정, 무질서, 너무 많은 참여 등을 운운하게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법치’를 강조하고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지 김영삼의 개혁 실패가 ‘박정희 신화’를 불러온 것처럼, 김대중의 개혁 실패가 ‘제왕적 대통령론’을 불러온 것처럼, 민주화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전 정부의 개혁실패가 가져오는 결과보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민주주의의 실패는 더 큰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민주주의 시도가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어찌 집권 100일 정도에 판단할 수 있을까하는 반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중단 없이 계속 진행한다고 한다면, 저자의 판단으로서 참여민주주의는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참여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서로 위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시대, 참여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설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루소의 참여민주주의 주장과 그 전통의 맥락에는 ‘평등’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물론 루소가 절대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 예속되지 않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예속되지 않는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루소는 ‘어떤 시민도 다른 시민을 매수할 정도로 부자가 아니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팔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하지 않은’ 상태를 원했다. 루소의 이런 이상적인 말은 철저히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가 관철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에게는 그 성격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민사회에서 시민은 루소가 상정한 시민사회의 시민이 아니다. ‘토론과 합의 도출’의 정치문화는 참여민주주의를 이끌어내는 기본적 토대지만 참여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정치적 기제는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합리화를 위한 다수의 배제 논리가 맞물려 진행되는 것이고, 경제합리성을 정치논리보다 우선하고 있거나 정치를 경제논리로 전화시키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정치경제적 결과는 다수의 빈곤화이고 빈곤층의 탈정치화를 배태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관계는 은폐되며, ‘통합’, ‘화합’, ‘참여’, ‘분배’ 등 정치적 미사어구로 그 본질적 간극을 봉합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한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민주화 이행론의 현재적 함의를 평가하고, 다음으로는 신자유주의적 논리와 민주주의의 모순성을 밝히면서, 철저히 경제논리에 종속된 정치논리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결론을 대신하여 현 시기 민주주의 투쟁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문제의 확장: 민주화 이행론의 한계와 종언

1970년대 중반, 남부유럽의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군부독재는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그 붕괴를 시작으로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지역에서의 민간정부의 출현,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로 이어지는 동유럽과 소련의 변화, 서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변화 등 세계 곳곳에서 정치체제가 변동하였다.

사실 이러한 변화들은 같은 경향을 갖는 것 같으면서도, 지역마다 그 변동의 의미가 다를 뿐만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매우 다른 정치적 맥락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측면들은 쉽게 사상(捨象)되면서 ‘민주화 이행’이라는 측면에서 일반화하는 경향들을 보여왔다. 이에 이러한 변화들과 맞물려 ‘민주화 이행 패러다임’은 강한 이론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실제적으로 1980년대 초부터 미국 레이건 행정부를 중심으로 ‘민주화 지원 프로그램’이 가동되면서 민주화 이행은 지배적인 역사의 방향으로 자리잡아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도 필리핀 다음으로 민주화 이행의 도정에 올라 선 사례로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사례와는 달리 ‘민주적 공고화’의 성공적 사례로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받기도 하였다. 민주화 이행 패러다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발전론’이 비서구 지역에 대한 전망을 낙관적으로 제시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20세기 후반 군부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자유민주주의로’ 귀착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들은 이행지역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화 이행론을 통해서 민주주의 논의는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는 속성을 보여왔다. 즉, 경쟁적 선거를 핵심적 속성으로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행 전과 후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설명되었고, 구조보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이면서, 구조발생적 의미들을 파악하기보다는 현상 서술적인 맥락에서 설명들을 진행해 왔다.

이에 최근에는 민주화 이행 패러다임의 모델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설정한 이론적 가정 또한 현실적으로 틀렸음을 증명하면서 ‘이행 패러다임의 종언’을 주장하는 견해들이 다양하게 제출되고 있다.3) 특히 민주화 지원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외부지원 프로그램으로 민주주의 조건은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외부지원 프로그램으로 사회세력이 건전하게 형성되는데는 한계가 있고, 또한 획일화된 프로그램들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다. 그리고 최근 2003년, 민주화 지원 프로그램은 그 의미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사실, 지원이 아니라 개입이고,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것임을 이라크 후세인 정권 축출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1980년대식 민주화 지원 프로그램은 소련의 붕괴 이후 일방적 개입과 조정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민주화 이행의 결과가 무엇인가? 그 성격을 ‘보수적 민주화’(최장집 2002), ‘수동혁명’적 민주화(조희연 2003) 등으로 분석하는 것은 한국의 민주화 이행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며, 민주화 이행을 통한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화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냉전 반공주의 세력의 위세는 위협받지 않았으며, 수구세력의 과잉권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민주화 이행을 통해 체제의 정당성을 획득하면서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통치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맞물리면서 계급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다수 민중은 빈곤과 경제적 정치적 무권리 상태로 전락함에 따라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거의 위기 상태이다. 사실 이러한 민주화 이행의 정치적 결과는 비단 한국의 사례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민주화 이행이 발생했다는 다른 많은 국가에서 마찬가지이다. 기존 비민주적인 정치체제에서 형성된 지배세력의 사회경제적 권력과 구조가 변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구세력의 지배적인 정치경제적 권한은 온존․강화되고 있다.

이행 패러다임의 종언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기존 지배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사회세력의 실질적인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엘리트간 협약과 타협의 보수적 민주화는 기존 정치체제의 지배세력을 바꿀 수 없다. 대안적인 권력을 형성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세력의 성장이 가능할 때 민주주의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진일보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 신자유주의 시대, 민주주의 위기 심화와 파시즘으로의 전화

민주화 이행을 통한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민주주의가 위기 상태에 도달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사실 그 핵심적 원인에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입각한 정치경제 개혁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영삼 정부부터 실시된 ‘신경영 신경제 정책과 세계화 전략’, 김대중 정부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지금의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관철되어 오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은 맞물려 진행되는 사례들이 많다. 그것이 아무리 ‘이중적 딜레마’라는 표현 속에 긴장감 내지는 어려움을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구조 속에서 많은 이행정부에서 민주화는 수사적 어구로 배치될 뿐 더욱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던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었다. 이중적 딜레마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선택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민주화의 퇴행뿐만 아니라 경제적 파산에도 함께 직면하는 것이었다.

1991년 소․동구의 붕괴와 탈냉전 이후 미국의 일방적 군사적 패권주의 세계질서가 보여준 역사의 진실은 민주주의의 위협세력이 사회주의 세력이라고 선전했던 자유주의 진영의 주장과는 달리 민주주의 위협세력은 자본주의 자체였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4)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선전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면 민주주의가 만개(滿開)할 것이라고 했건만, 역으로 작금의 세계자본주의 현실에서 자유민주주의조차 위협받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역사학자 홉스바움은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심연이 파시즘을 등장시켰다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이러한 위기 탈출로 등장한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가장 친자본적이며 반민중적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더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공화당 정부의 출현을 도모했던 과거 10년의 프로젝트는 지금 미국의 정치가 어디쯤 도달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과 일본이 파시즘을 선택했던 것처럼, 미국은 파시즘을 선택하고 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무장한 신자유주의’라고 명명되거나, ‘네오콘(Neocon)’으로 불리워지는 미국 공화당의 신보수주의적 정치스타일을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과 그 핵심적 의미가 맞닿아 있다. 프린스턴대 울린 명예교수는 현재 미국을 독일 나찌즘과 비교하여 ‘뒤바뀐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lism)’라고 부른다.


“... 나찌가 권력을 잡기 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는 전체주의 성향의 난동꾼들이 ‘거리’를 점령했으며 민주주의적인 것은 오직 정부뿐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거리에는 민주주의가 살아있지만 진정한 위험은 갈수록 구속받지 않은 정부에 있다.

‘뒤바뀜’의 또 다른 예가 있다. 나찌 정권에서는 ‘큰 사업’이란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점에 그 어떤 의문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수십년 동안 기업의 힘이 정치권, 특히 공화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기업이 정책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찌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역할 뒤바뀜이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전체주의로 몰고 가는 추진력을 만든 것도 기업권력이다. 기업권력은 자본주의의 역동성의 대표자이자 과학 기술을 자본주의 구조와 통합시킴으로써 만들어진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권력의 대표자다. ......나찌는 불평 없이 정권을 지지할 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국민투표에서 열광적으로 ‘찬성표’를 던지는 지속적 동원 사회를 원했으나, 뒤바뀐 전체주의는 거의 투표를 하지 않는 정치적으로 해체된 사회를 원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요소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약해진 입법부, 권력에 고분고분하고 약자에 억압적인 사법체계, 어느 한 당(야당이든 여당이든)이 부유한 지배계급, 연줄이 좋은 자들, 기업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기존 시스템을 재편하는 데만 열중하는 정당제도 등이다. 이 와중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포자기와 정치적 절망감에 휩싸여있고 중산층은 실업에 대한 공포감과 신경제의 회복이 가져다 줄 환상적인 보상에 대한 기대감 사이에 붕 떠있다.

이런 음모는 아첨꾼이자 갈수록 집중화되는 미디어가 부추긴다. 여기에 후원 기업과 한 통속이 된 대학들, 넉넉한 자금 지원을 받는 싱크 탱크와 보수적인 재단 등이 갖춰진 선전기구, 테러리스트와 수상한 외국인, 국내 반체제 세력을 색출한다는 목적으로 갈수록 긴밀해지는 지방 경찰과 연방 사법기관의 협조도 한 몫했다....”5)


라고 펜을 들고, 현 미국 공화당 정부의 전체주의화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란 무엇을 함의하는가? 위의 울린 교수의 인용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기업에 의한 돈의 지배가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재벌기업가들과 미국을 함께 방문하여 세일즈 외교를 진행하고, 월스트리트에 한국시장을 열렬히 소개하고 온 것처럼, 노무현 정부는 적극적으로 독점기업의 이해와 맞물려 정책을 입안 및 집행하고 있다. 이제 정부와 자본의 동맹관계는 어떤 스크린 장치도 필요 없게 되었다. 역대 어떤 정권보다 더 노골적으로 친재벌적 친자본적 노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총자본으로서의 국가는 그 역할에 있어 더 적극적이자 직접적이다. 여기에 한국의 정당들은 집안 잔치하느라 정신없다. 민생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가끔 튀는 국회의원들이나 씹어대면서, 옆 나라 일본이 ‘유사법안’을 통과시켜도 김종필은 내심 동의의 뜻을 펴고 있다. 역시 김종필은 군사화,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본의 위기를 돌파할 줄 아는 명실상부한 정치인이다. 그리고 가끔 ‘한국경제가 위기’라고 협박하면서, 공포 아닌 공포를 조장하고 중산층을 ‘위기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다.

기업권력이 좌지우지하는 사회. 기업이 언론을, 기업이 병원을, 기업이 교육을, 기업이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을, 기업이 먹을 것을 장악하려고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돈이 없으면 생존의 가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돈을 벌 수 있는 권리도 박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메트릭스는 기업의 이윤추구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메트릭스는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자본이 지배하는 이 세상, 현실일 것이다. 기계가 우리를 지배할 세상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이미 자본이 우리를 지배한 이 세상을 직시할 때이다.



문제의 해결: 현 시기 민주주의 투쟁의 의미

환경, 정보, 노동, 여성, 교육 등등 많은 영역에서 계급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자본과 기업의 합리화 또는 이윤추구의 논리와 인권․연대․공유․사회적 가치․평등․평화의 논리가 맞서 싸우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민주주의 투쟁의 핵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 투쟁은 직접투쟁, 직접정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들을 마련하고 있다. 민주주의(democracy)는 역사적인 조건에 따라 다양한 위상을 차지한 논쟁적인 개념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는 어원적인 의미에서 ‘데모스(demos)’와 ‘크라토스(kratos)’의 합성어이다. 데모스는 ‘인민’을 의미하고, 크라토스는 ‘지배’ 또는 ‘권력’을 함의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어원적으로 인민에 의한 지배, 인민의 권력을 함의한다. 21세기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위임했던(사실 한번도 위임한 적은 없다) 권력을 인민에게로 다시 찾아오는 직접적 정치투쟁, 민주주의 투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는 독재와 민주주의를 동전의 양면으로 생각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권력주체의 배타적 성격을 함의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같은 의미로 비유될 수 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소수에 의한 다수지배 형태를 띠고 있다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소수지배 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그 역사적 과업에 있어 역할에 차이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지배를 지속했던 모든 낡은 정치형태를 소멸시키는데 주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독재 형태까지도 없애는 것과도 같다. 이때 정치의 종언은 ‘계급지배 정치’의 종언이다. 그래서 그러한 정치형태를 종언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속에서 새싹처럼 돋아나는 진정한 공동체의 조직원리인 새로운 의미의 정치, 직접정치의 의미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역사적 맹아가 현재의 급진적 민주주의 투쟁 영역에 자라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낡은 정치형태 중에 첫 번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리통치, 위임통치, 그 정치적 지배층을 계속적으로 재생산 또는 유지하는 시스템일 것이다. 결코 인민주권은 위임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 민중에게 거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대의(representative)를 거부한 직접정치. 21세기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통해 전세계 민중이 경험하는 것은 새로운 대안적 정치주체를 형성하고 대안적 정치형태를 형성시키는 그 자체에 있다. 전세계 농민이 단결하고, 전세계 노동자가 단결하고, 전세계 환경운동가들이 단결하고, 전세계 평화주의자들이 단결하고, 계속 단결하고 연대하여 전지구를 대상으로 전세계 노동자․민중의 새판짜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역사적으로 그러한 국제적 운동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자본주의는 발전하면 할수록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한/노/정/연


1) 민주주의 이론을 분류하자면 직접민주주의의 고전적 그리스 이론에서 루소와 맑스로 이어지는 급진적 민주이론(Radical Democratic Theory), 1960년대 참여민주주의이론부터 마르쿠제에까지 이어지는 신급진적 민주이론(NRDT), 대표적인 로버트 달의 다원적 민주이론(Pluralist DT), 가장 최근에 민주주의의 최소정의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슘페터의 엘리트적 민주이론(Elitist DT), 그리고 로크, 토크빌, J.S 밀로 이어지는 자유민주이론(Liberal Democratic Theory) 등이 있다.


2) 루소의 언급이다.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 꼭같은 이유에서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 … 인민의 대리자는 인민의 대표자가 아니고 또 될 수도 없다. 그들은 단순히 인민의 대리행위자(agent)이며, 어느 것도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인민이 몸소 승인하지 않은 어떤 법률도 무효하다. 영국인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지만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의회구성원의 선거시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구성원이 선출되자마자 인민은 노예화된다. 그들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사회계약론』에서)


3) 이행 패러다임의 5가지 가정을 비판하고 있다. 첫 번째는 독재로부터 이행한 나라들은 민주주의로 향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독재로부터 이행한 나라들은 존재하지만 ‘민주주의로 이행’은 불확실한 것이 현재적 상황이다. 두 번째는 민주화는 일련의 연속적 단계-개방, 돌파, 공고화 단계-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는 가정이다. 하지만 이행의 경로는 단선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혼란한 과정이다. 세 번째 가정은 선거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많은 이행된 국가들에서 정규적인 선거는 실행하지만 투표 이상의 정치참여는 나타나지 않는다. 네 번째 민주화 이행의 결정적 국면은 행위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행을 결정하는 잠재적 조건-경제적 수준, 정치적 역사, 제도적 유산, 인종적 구성, 사회문화적 전통 또는 다른 구조적 특징들-은 이행과정의 시작 또는 결과에 있어 주요한 요인이 된다. 이러한 잠재적 조건은 민주주의의 선행조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제3의 물결을 구성하는 민주적 이행은 국가형성을 시작할 것이라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제3의 물결의 국가들이 기본적으로 국가형성의 도전상태이거나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존재한다(Carothers, Thomas. 2002. “The End of Transition Paradigm” Journal of Democracy Vol. 13 No. 1)


4) 최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북한을 위협하는 것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적은 자본주의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것이다. 좀 과도하게 말하자면, 현재 국제정치의 위험 수위는 사회주의 진영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5) 미국 프린스턴대 정치학과 명예교수인 쉘던 울린 교수가 <The Nation>에 기고한 글을 <오마이뉴스>에서 번역하여 올린 글이다.


2003-06-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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