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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아프리카에 가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89호
모니카 무어헤드

미국은 짐바브웨에서 손을 떼라!** [편집자 주] 노동자 세상(Workers World)에서 발행하는 7월 10일자 신문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부시 아프리카에 가다


모니카 무어헤드





6월 25일 부시대통령은 워싱턴D.C.에서 있었던 미-아프리카 비즈니스 정상회담에서 연설을 했다. 여러 제안 가운데서도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과 라이베리아의 챨스 테일러 대통령을 제거할 것을 촉구했다. 부시는 기업가와 투자자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포함된 청중 앞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전 날, 콜린파월 국무장관은 뉴욕타임즈지의 여론란에 로버트 무가베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글을 썼다. 파월은 무가베 대통령에게 “폭군”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파월은 무가베 대통령이 300퍼센트에 이르는 물가인상, 70퍼센트의 실업률, 식품 부족 등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은 짐바브웨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이긴 하지만, 긴급한 짐바브웨 위기에 대해 더욱 강력하고 더욱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무가베가 제거되고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새로운 선거 일정이 잡히면, 각계각층의 짐바브웨인들은...모여서 국가재건을 시작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미국은 선거전에라도 짐바브웨의 정치적 경제적 기구를 세우기 위한 관대한 지원을 즉각 약속할 것이다.”
이는 부시 정부가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원조를 뇌물로 주는 것과 같다. 단지 그들이 짐바브웨에 내정간섭을 함으로써 국제법을 거스르는 경우에만 그렇다.
부시의 연설과 파월의 기고문은 부시가 몇몇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를 방문하기 꼭 일주일 전에 등장했다.
부시는 짐바브웨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산업화된 국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게 된다. 워싱턴 포스트지 6월 16일자에서는 남아공에서 제공하는 전력공급을 타보 움베키 대통령이 중단할 것을 제안하는 비열한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 한 때 정치범이었고 최초 흑인 남아공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는 이라크전 기간 동안은 부시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다른 그룹들은 부시 방문에 반대하는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왜 짐바브웨 정부는 미 제국주의와, 영국 그리고 다른 유럽연합 국가의 레이더 망에, 그것도 전면과 중앙에 있게 되었을까?


피비린내 나는 유럽지배의 역사
1880년대 중반 베를린에서는 아주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여러 유럽국가의 자본가들이 모여서 엄청난 광물자원을 수탈하고 원주민을 노예화하기 위해 전략을 짜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하다.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식민지와 시장을 확장하는 것이다.
1888년 영국 자본가 세실 로드와 그의 사업 파트너인 챨스 루드는 현재 로데시아로 알려진 메이트블러핸드, 매쇼날랜드 그리고 인접한 영토들을 수탈하기 위한 작당모의를 하는 것을 영국군주로부터 허락 받게 된다.
이 영토들은 풍부한 광물자원, 특히 금 때문에 표적이 되었다. 1890년 백인 용병이 이 영토를 침입한다. 이 피비린내 나는 침략은 수천명의 백인이 토지를 장악하고 정착하는 토대가 된다. 실제 백인 1인당 6,000에이커의 토지와 금이 주어졌다.
1898년 로드와 루드가 소유하고 있는 영-남아프리카 주식회사에 대항해 무장한 저항군이 등장했다. 이것이 첫 번째 치무렌가(Chimurenga), 또는 해방 투쟁의 첫 단계이다. 반란은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의 연합전선에 의해 수행되었다.
원주민들은 침략자들의 진보한 무기에 대항할 수 없었다. 원주민들은 계획적으로 조상의 땅에서 쫓겨나 가축무리처럼 원주민주거지(native reserve) 알려진 고립되고, 척박한 땅으로 몰려다니게 되었다.
1898년 위원회내의 원주민주거지명령(Native Reserve Order)을 통해, 유럽 식민지개척자에 의해 경작될 수 있는 1500만에이커 대한 도둑질이 합법화되었다. 1930년의 토지배분법에 의해 아프리카인과 정착민이 소유한 토지를, 이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1930년의 인구구성을 보면, 백 십만의 흑인과 5만명의 흑인, 즉 백인 한 명당 스무 명 이상의 흑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는 다른 방식으로 분배되었다. 원주민 주거지는 2천900만 에이커, 유럽인 주거지는 4천 900만 에이커로.
1965년 이언 스미스 백인 소수 정부는 독단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바로 그 해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동맹(ZAPU)과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ZANU)이 애국전선(the Patriotic Front) 형성을 위해 협력하게 되면서, 두 번째 치무렌가(Chimurenga), 또는 민족해방투쟁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당시 로버트 무가베는 ZANU의 지도자였고 조슈아 은코모는 ZAPU의 지도자였다.
증가하고 있는 게릴라들의 투쟁이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로데시언 전선으로 알려진 (the Rhodesian Front)이언 스미스 정권의 군부는 런던에서 영국 정부와 인민전선의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협상을 통해 1979년 랭카스터 하우스 협약(the Langcaster House Agreement)이 나왔고 1980년 새롭게 새워진 짐바브웨 정부의 헌법의 기초를 닦았다.


랭카스터 협약에 발목잡히다
식민지배자들에 의해 수탈된 토지의 재분배가 랭카스터 협약을 통해 발표되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언서에는 자발적 판매자(willing-seller)/자발적 구매자(willing-buyer) 체계에 의해 토지가 분배될 것이라고 써 있었다. 이 방식도 독립이후 초기 10년간은 적용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영국은 보상없는 강제적 토지 획득조항이 1980년 헌법에 공식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계략으로 재정착 계획에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짐바브웨 정부는 백인 정착민에 대해 경작할만한 토지를 포기하고 판매하라는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 정부가 원주민에게 주기 위해 획득한 토지는 가장 척박한 것들이었다.
“공정한 시장가격”조항에 의해, 신 정부는 백인 농가의 토지를 살 수 있는 적절한 기금을 확보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립 이후 7년이 되자 이 프로그램에 지원한 162,000명의 흑인 중 40,000명만이 재정착 할 수 있었다.
이 법 아래서 무가베 정부는 토지를 포함한 소유의 강제획득에 대해 어떤 수정도 할 수 없이 10년을 보내야 했다. 1992년 토지획득법(the Land Acquisition Bill)이 작성되었는데, 이 법안은 대규모 상업적 농토를 주요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최악의 땅에서 살고 있는 무토지 흑인 전쟁 노병 대다수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려고 했다.
이 법안은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토지를 국가가 가져오는 데 있어서, 백인에게 보상을 하는 책임은 영국정부에게 있었다.
영국은 이 프로그램에 4천4백만 파운드를 약속했다. 1997년 영국에서 훨씬 더 보수적인 지도자 토니 블레어가 있는 노동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 영국정부는 예산을 삭감했는데, 그 이유는 무가베 정부가 정부인사들을 그 땅에 정착시키려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영국 정부는 이언 스미스 전 로데시아 백인 정부 지도부가 여전히 짐바브웨 내에 1,000에이커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1997년 마침내 무가베는 짐바브웨인 농부들의 직접적 토지몰수를 지지했다. 백인이 대다수인 상업적 농가의 수는 1998년 4,660에서 2002년 여름 2,900으로 떨어졌다. 대사수의 농가들은 모잠비크에서 매우 싼 가격으로 토지를 구입했다. 이 곳은 백인 주도의 용병들이 이미 이 나라의 토지를 황폐화시킨 뒤였다.
2001년 12월 36만명이 넘는 아프리카 가정들은 토지에 재정착했다. 짐바브웨 농민들과 소작농이 스스로 토지개혁을 수행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자는 이를 공격했고 무가베 정권을 인종주의적으로 악마처럼 묘사하고 있다.
1980년 세계은행과 IMF는 무가베 정부에 대한 금융지원의 조건으로 구조조정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세계은행과 IMF는 무가베 정부에게 사회적 지출을 최소화할 것을 요구했다.
독립적, 자급자족적 국가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짐바브웨는 수출국가로 전환했다. 이는 짐바브웨 민중의 기아와 담배와 같은 현금 작물을 기르는 백인 상업농에 대한 초과 이윤을 의미했다.
1999년까지 짐바브웨는 세계은행과 IMF의 정책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었다. 1999년에 디폴트 선언을 하고, 외채를 탕감해 버렸다. 최근, IMF와 세계은행은 짐바브웨의 회원자격을 박탈했다.
토지 위기는 짐바브웨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런 위기는 남아공, 나미비아, 모잠비크 그리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도 상존한다. 이런 위기는 뿌리깊은 식민수탈과 약탈에 연유한다. 미․영 제국주의자들은 짐바브웨와 다른 국가들에서의 민중의 토지장악을 막기 위해 짐바브웨에서의 토지개혁 중단을 원하고 있다.


토지위기와 콩고에 대한 지지
제국주의자들이 짐바브웨를 목표로 삼는 것은 1998년 콩고민주공화국의 위기에서 자신의 군대가 했던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CIA의 애완견이었던 모부투 세세 세코가 몰락한 이후, 콩고 정부는 콩고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개입을 공공연히 비난했던 로렌트 카빌라에 의해 이끌어져왔다. 카빌라는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에게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은 우간다와 르완다의 침공을 격퇴시키기 위해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짐바브웨, 앙골라, 나미비아 등의 SADC 국가들은 콩고에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카빌라는 2000년 1월 살해된다.
부시와 블레어는 그들이 이라크, 이란, 북한, 팔레스타인, 베네수엘라, 필리핀, 쿠바 등과 같은 이유로 짐바브웨를 본보기로 만들려고 한다. 어떤 국가도 반항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거대기업의 이윤을 위해 세계를 재분할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미제국이 끊임없이 일으키는 전쟁의 핵심적 이유이다.

토지몰수가 중간단계에 이를 때까지 무가베는 아프리카 지도자의 “모델”로 여겨졌다.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 내 원주민 유산계급의 발전을 바라는 민족주의자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굳이 무가베를 지지해야할 필요는 없으나, 제국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반란은 옹호되어야 한다. 반제국주의 운동, 특히 미국에서의 반제국주의운동은 민족해방을 완수하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짐바브웨 민중에게 배상을 하라고 요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식민지배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침투로부터 짐바브웨의 경제를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한/노/정/연

번역 : 국제기획실

2003-07-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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