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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 이후의 80년(5)

현장에서 미래를  제90호
바만 아자드

기/획/번/역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 이후의 80년(5)


제2부 사회주의에 위기를 초래한 객관적・외부적 요인



바만 아자드/ 사회주의 이론연구가






신경제정책 (NEP : 1921-1928년)


실로 ‘전시공산주의’가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전에 대응하기 위해서 입안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경제정책’(NEP)은 ‘전시공산주의’의 결과로서 생긴 경제적 위기로부터 사회를 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처방된 것이었다. 볼쉐비키 및 레닌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 ‘후퇴’는 자본주의와 공존하고 공업 및 농업에서의 현저한 생산 감소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이윤을 이용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NEP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혼합하려고 하는 시도였다. 이러한 기본 위에서 농업생산에서의 지도권은 농민 자신에게 귀속되고, 공업부분의 운영권도, 중공업․운송․은행․무역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사기업에 위임되었다. 상업 및 유통에서의 국가에 의한 독점은 폐지되고, 이 기능은 다시 시장으로 이관되었다. 1922년에는 이미 소매점의 약 90%, 금액으로 하여 전체 소매거래의 약 75% 이상이 사유화되었다.1)

국가의 역할은 기간산업의 관리나 과세정책을 통해 경제 동향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경제에 대한 ‘전체적인 지도방침’을 부여하는 데에 한정되었다. 화폐는 교환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재차 인정되었다. 국영기업 사이에서는 통화에 의한 결제가 장부기입에 의한 방식을 대신하였다. 1921년에는 국립은행이 ‘경제성장을 촉진할’ 목적으로 부활되었다. 국립은행은 개인 예금에 관한 일체의 규제를 해제하고, 정부는 국립은행에 예치된 모든 개인예금을 몰수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공업부문에서는 종업원 20인 미만의 모든 기업이 사적 경영으로 되돌려졌다. 그것들은 원래의 소유자에게 되돌려지기도 하고, 새로 등장한 사기업 경영자에게 임대되기도 하였다. 98%가 국유였던 중공업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에너지․금속․군사․운송․은행․무역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완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한 대형 ‘트러스트’에 위탁되고, 그들은 같은 업종의 사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윤의 최대화를 원칙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생산에 관해서는 이들 ‘트러스트’는 국가에 대해서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고, 국가와 이들 ‘트러스트’를 잇는 유일한 것은 세금의 징수였다. 국가는 단지 ‘트러스트’로부터 제품을 구입하는 계약을 맺을 뿐이었다. 1923년까지 478개의 이러한 ‘트러스트’가 설립되고, 거기에는 합계로 국유기업 전체의 75% 이상의 노동자가 고용되었다.2) 국가에 의해서 설립된 산업도 이윤을 기초로 조업하고, 국가로부터의 보조금의 필요성을 없애도록 했다.

이러한 사적 경영화의 경향은 농업부문에서 한층 급속히 실행에 옮겨졌다. NEP 모델의 중추에는 실제로 노동력의 최대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빈농의 지지를 되찾아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그들의 협력을 확고히 하는 데에 있었다. 볼쉐비키는 빈농과 국가 사이에 새로운 이해 대립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자신들의 진정한 의도와는 반대로 볼쉐비키는 빈농의 분노를 살지도 모르는 모든 정책을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농가가 잉여생산물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인정된 것은 이 때문이었고, 국가는 ‘순잉여생산물’에 대해서 고정된 세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데에만 머물렀다. 빈농들은 사적 기업의 경영자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잉여생산물을 시장에서 팔고, 그 이익으로써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인정되었다. 농민들이 토지를 대여한다든가 농업노동자를 고용하는 것까지도 국가는 인정하였다.

이 정책은, 한편에서는 농업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적인 자극을 창출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의 발전과정 속에서 훗날 사회주의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의 원천이 되는 부농층을 성장시켰다. 맑스가 부농을 사회주의의 완강한 적대자로서 언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상황 때문에 이 사회주의 국가는 농업생산을 급속히 확대시키기 위해서 사회주의적인 계획을 유보하고 부농에 대해서 중대한 경제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시 공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두 개의 주요한 경제부문 간의 불균형이 공업제품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농산물의 가격을 하락―‘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3)로서 알려져 있는 현상―시킨 1923년에는 공업부문을 희생시키면서 농업부문에 대량의 보조금을 투입하거나 농산물 가격을 인위적으로 인상하기까지 했다.

사회주의적 시책으로부터의 이러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볼쉐비키에게 있어서 NEP는 전략적인 대성공이었다. ‘전시 공산주의’ 시대 말기에는 공업 및 운송부문의 생산수준은 전쟁 전의 20%로까지 떨어져 있었다. 공산당은 NEP에 의해서 아무튼 이전의 수준까지 생산을 증대시켰다. 농업분야의 성장은 그 이상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1920년의 농업생산은 전쟁 전의 64%로까지 떨어져 있었지만, 1928년에는 1920년에 비해 118%나 증가했다.4) 정부는 1923-24년까지 재정적자를 없애고, 1년 후에는 재정흑자를 달성했다. 루블화의 가치도 안정되어 국제통화시장에서도 거래되게 되었다. NEP는 이렇게 그 경제적 목표를 달성했던 것이다.

‘전시 공산주의’가 경제적인 생산활동을 희생으로 하여 그 정치적․군사적 목표를 달성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NEP도 또한 일정한 정치적인 대가, 특히 사회주의 건설의 진전을 희생으로 하여 경제적인 부흥을 보증했다. 경제적 모델로서의 NEP는 실로 계획에 기초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레닌 자신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윤 추구에 기초한 국가자본주의였다. 이 모델은 공업분야에서는 새로운 자본가층을, 그리고 농업분야에서는 부농층을 발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위급한 고비를 넘기기 위해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장기적인 목표를 시장경제에 종속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특히 기간산업 및 중공업에서 명백했다. 사회주의의 성장은 국가가 생산에 다량 투자함으로써만 보증됨에도 불구하고, 1924년 중공업의 자본축적량은 최고액이었던 1917년보다도 23%나 적었다. 공업설비 생산의 주요한 구성요소인 철강산업의 이 해 생산량은 1913년의 23%까지 감소했다.5) 쏘비에트 국가의 수립으로부터 약 8년이 지난 1926년 이 나라 공업생산의 구성은 1912년과 마찬가지였다. 1912년에 중공업의 생산액은 제조업의 28%를 점하고 있었는데, 1926년의 시점에도 그것은 29%에 불과했다.6) 바꾸어 말하면, 이 나라의 공업생산 능력은 경우 1%밖에 성장하지 않고, 기존 설비는 노후화됐으며, NEP체제는 사회주의로의 진전을 향한 전략적인 계획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1926년에는 공업생산의 성장은 기존 능력의 한계점에 달하여 감소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NEP는 농업부문의 일방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해서만 지속 가능했고, 사회주의적인 발전의 경제원칙과는 명백히 모순되는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중공업에 대한 국가의 계획적인 투자의 필요성이 차츰 명백해졌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잉여생산물을 국가의 관리 하에 둠으로써 자본을 급속히 축적할 필요가 있었다. NEP는, 그 목적을 달성한 지금, 사회주의적 경제발전이라고 하는 전략적인 목표에 보다 공헌하는 다른 모델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망이 없어진 후에는 그 긴급성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급속한 공업화’ 모델 (1928-1945년)

장래의 사회주의 발전의 모델을 둘러싸고 공산당 지도부 사이에서 1924-1928년에 진지한 논쟁이 이루어졌던 것은 이 긴급성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7) 이 논쟁에는 세 개의 조류가 있었다. 첫 번째 조류의 대변자는 당내 좌파에 속해 있던 I. A. 플레오브라젠스키인데, 그는 경제발전을 위한 자본의 원시축적은 엄격한 소비 삭감과 농업부문의 모든 잉여생산물을 공업부문으로 이전시킴으로써 달성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이 모델은 단기적으로 농업을 희생시켜 공업만을 발전시킬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눈으로 보면, 공업을 발전시키는 초기단계를 거친 후에는 농업 발전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이 창출되어, 결과적으로 부문간 발전의 불균형이 수정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모델은, 서방측 국가들과의 무역 확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본의 원시축적은 국내 자원에만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8)

그 반대의 극에 위치한 것이 농업의 불균형성장 모델이었다. 당 지도부의 우파에 속해 있던 레프 샤닌이 이 흐름의 대변자였다. 그의 주장은, 농업부문의 기존의 구조와 농촌부문의 노동력 구성에 기초하여, 공업에 비해서 농업에 대한 투자 수익률이 높고, 따라서 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초기의 자본투자는 농업에 대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즉, 국가는 농업생산고의 증가에 주력하여 이 부문의 잉여생산물을 수출하고, 공업부문에서 필요한 기계류는 외국에서 수입한다는 것이다. 샤닌의 모델은 명백히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와의 무역의 확대를 전제하고 있었다.9)

이 두 개의 모델과 대립한 것이, 당내 우파의 대변자인 N. 부하린이 제안한 ‘균형성장’ 모델이었다. 그는 두 개의 불균형발전 모델은, 그것이 공업적인 것이든 농업적인 것이든, 어느 것이나 경제를 다시 위기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또한 소비의 삭감을 수반하는 급속한 자본축적은 ‘기아’를 초래하여, ‘NEP’의 성과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완만한 축적과 성장에 기초한 모델이 공업과 농업 혹은 중공업과 소비재산업이라고 하는 여러 경제부문 간의 균형을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모델은 자유시장 경제기구에 기초한 것으로서, 농산물 가격의 인상을 통해서 농가의 자발적인 생산 증가를 촉진하고 공업제품의 가격을 인하, 외국으로부터 공업기술을 습득한다고 하는 것이었다.10)

4년에 걸친 이 논의의 결말을 최종적으로 결정지은 것은 유럽에서의 파시즘의 신장과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새로운 군사적 침략 가능성의 증대에 관한 당 지도부의 높은 불안이었다. 이 문제는 앞에서 말한 여러 제안에 대해서 당 지도부, 특히 스탈린이 취한 다양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논쟁의 초기 단계, 즉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의 위험성이 낮았던 시기에는 당 지도부는 부하린의 모델로 기울고, 좌파의 모델에 반대했다. 그러나 위험성이 증대함에 따라서 국내의 자원에 의해서 국가를 공업화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더 자각되게 되었다. 부하린의 ‘균형성장’ 모델은 낮은 성장률과 외국과의 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이러한 비상사태에는 걸맞지 않게 되었다. 1928년 마침내 당 중앙위원회는 부하린과 그 추종자들의 안을 ‘우익 망상’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고 ‘급속한 공업화’ 모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렇게 결정하는 데에서, 제국주의자의 침략 위험성의 증대라는 외부적 요인이 중대한 역할을 했음은, 쏘련이 ‘급속한 공업화’ 모델을 채택하는 것을 옹호한 스탈린의 다음 연설에서도 명백하다.


다소 속도를 늦추고 운동을 삼가서는 안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아니, 동지 여러분, 그래선 안 됩니다! 속도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힘과 가능성에 따라서 그것을 증대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속도를 억누르는 것은 낙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낙후된 자는 뒤처져 패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패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결단코 패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의 일면은 러시아가 낙후되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패배하고 있었던 데에 있습니다. 몽고의 칸에게 졌습니다. 터키의 호족에게 졌습니다. 스웨덴의 봉건영주에게 졌습니다. 폴란드-리트와니아의 지주에게 졌습니다. 영국-프랑스의 자본가에게 졌습니다. 일본의 귀족에게 졌습니다. 이상의 모든 자들은 러시아가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패배시킬 수 있었습니다. 즉, 군사상의 낙후, 문화상의 낙후, 국정상의 낙후, 공업상의 낙후, 농업상의 낙후 때문입니다. ...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뒤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우리 사회주의 조국이 뒤쳐져 패배하고, 그 독립을 잃는 것을 바랄 것입니까? 만일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최단기간에 조국의 낙후를 일소하지 ...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이외의 길은 없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레닌은 10월 혁명의 전야에 “사멸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고 추월할 것인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선진국들에 50년 내지 100년 뒤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리를 10년에 따라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내든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눌러 찌그러들든가 입니다.11)


현실이 스탈린의 예측을 증명했다. 1941년, 이 역사적인 연설로부터 10년 내에 나치 독일은 쏘련의 소멸을 목표로 전면적인 군사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급속한 공업화’ 모델을 급속히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쏘련은 히틀러의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사회주의를 방어, 세계의 다른 인민을 사악한 파시즘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 거리를 10년에 따라잡기” 위한, 국가의 급속한 공업화를 목표로 한 이 중요한 결정을 한 후에 쏘비에트 국가는 당연히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채용할 필요가 있었다. 중앙계획경제는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분권적이고 간접적인 경제운영이나 관리, 시장기구―이는 본래 아주 완만한 기구이다―에 의존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제발전을 달성하는 데에는 효율적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NEP는 중앙계획 모델로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객관적인 역사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었고, 쏘비에트 지도부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증대하고 있던 외부로부터의 제국주의의 침략의 위험성이라고 하는 현실에 의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플레오브란젠스키의 비균형적인 공업성장 모델과 그것을 지지하는 좌파를 반대했던 쏘련 공산당의 지도부가, 그리하여 플레오브란젠스키의 모델을 성심성의껏 채용하고, 그것을 급속히 실행에 옮겼다. 이 경제 모델의 원칙은 플레오브란젠스키에 의해서 설명된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사회의 소비 수준의 급속한 인하. 생산, 분배, 상품․써비스 가격을 완전히 국가 관리 하에 두는 것. 농업부문의 잉여생산물을 완전히 공업부문으로 이전하는 것. 공업부문에서의 급속한 자본 축적. 경공업․소비재공업에 비해 중공업의 성장에 중점을 두는 것. 지방의 농업 노동력을 급속히 도시와 공장으로 이전하는 것. 급속한 문맹퇴치운동과 노동자에 대한 기술 교육. 외국과의 무역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 자원만에 기초한 경제발전.

이러한 원칙이 1928년 10월에 채택된 공산당의 제1차 5개년 계획에 반영되었다. 이 제1차 5개년 계획에서는 사회주의적 발전의 기초를 준비하기 위해서 중공업의 고정자본량을 5년간에 2배로 증가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서 공헌하고, 공헌에 따라서 받는다”고 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 처음으로 모든 작업의 기준이 되었다. 이 원칙은 또한 상이한 경제부문 간의 노동력 이동을 촉진함과 동시에 문맹 퇴치와 전문교육을 장려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노동현장에 획일적이고 군대와 같은 규율이 강제되었던 ‘전시 공산주의’ 모델과는 달리 이 ‘급속한 공업화’ 모델은 물질적인 동기 부여에 의한 자발적인 노동과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기초하여 기능하는 것이었다. 농업․써비스․공공부문의 임금 수준이 의도적으로 인하되는 한편, 중공업이나 기타 생산부문 노동자의 임금은 급속히 인상되었다. 동시에 국가는 모든 학교에서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 모든 공장에서 무상으로 직장 내 훈련이 실시되었다.

1930년대 초에는 스탈린이 공공연하게 ‘지식인층 속의 평등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평등주의와 동일시하는’ 일체의 경향을 배격했다. 1931년 6월 23일에 개최된 기업 간부회의에서의 연설에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노동력의 유동의 원인]은 잘못된 임금조직에, ... 임금 분야에서의 ‘좌익적’ 획일제에 있습니다. ...

이러한 폐해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임금 획일제를 폐지하고, 이전부터의 임금 등급제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의 차이는 사회주의 하에서 계급이 없어진 후에도 존속하고, 공산주의 하에서 비로소 이 차이는 없어질 것이며, 따라서 ‘임금’은 사회주의 하에서도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노동에 따라서 지불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맑스와 레닌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 활동가와 노동조합 활동가 가운데 우리 임금 획일제론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이 차이는 우리 쏘비에트 제도 아래에서는 이미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맑스와 레닌인가, 그렇지 않으면 임금 획일제론자인가? 여기에서 올바른 것은 맑스와 레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지금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임금 획일제라는 ‘원칙’에 기초하여 임금 등급제를 고집하는 자는 맑스주의와 손을 끊고, 레닌주의와 손을 끊는 것이 됩니다. ...

그런데 숙련노동자라는 기간요원(cadre)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전진 및 승진의 전망과 자극을 비숙련노동자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담하게 이 방법을 취하면 취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 이 문제에서 쩨쩨하게 구는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범죄를 범하는 것이고, 우리 사회주의 공업의 이익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12)


이러한 전제에 따라서 당 지도부는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원칙으로서 계획적인 차별임금제도를 도입했다. 교육 수준, 기술, 노동의 곤란성의 정도, 지리적 조건에 기초한 차별임금제도가 결정되었다. 차별임금 구조는 노동자가 직업을 선택하고 기술을 습득하는 데에 효과적인 물질적 동기를 부여하였다. 1934년에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의 평균임금의 차이는 4대 1로 되고, 반대의 흐름이 시작되는 1956년에는 8대 1이 되었다.13)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1934년에는 중공업의 상당수의 숙련노동자들은 월 1420루블의 임금을 받고 있었지만, 비공업부문의 비숙련노동자의 월간 임금은 50루블을 넘지 않아, 그 비율은 28.3대 1이었다.14) 노동력 배치와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한 이러한 수법은 ‘급속한 공업화’ 모델이 실행된 기간 내내 그 요석(要石)이었다.

‘급속한 공업화’ 모델이, 그것이 미리 정한 목표 속에서 달성한 것은,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눈부신 것이었다. 1928년에서 1940년 사이에 공업생산은 연평균 11%나 성장했다.15) 총공업자본 스톡(stock)은 1928년의 348억 루블에서 1933년에 757억 루블, 1937년에 1,190억 루블, 그리고 1940년에는 1,700억 루블로 증가했다.16) GNP에서 농업부문이 점하는 비율은 1928년에는 49%였는데 1940년에는 29%로 감소되고, 이 시기에 공업부문의 비율은 28%에서 45%로 증가했다.17) 1928년에서 1937년 사이에 공업생산 총액에서의 중공업부문의 비율은 31%에서 63%로 증가하고, 중공업에서의 노동자 1인당 생산고는 1928년에는 경공업의 그것의 94%였지만 1933년에는 140%로 증가했다.18)

노동력 구성의 변화도 경이적이었다. 전체 노동자에 대한 상근 노동자의 비율은 1928년의 57%에서 1937년에는 70%로 증대했다. 전체 노동자에 대한 공업노동자의 비율은 연평균 8.7%나 증가하여, 1928년의 18%에서 1940년에는 29%로 되었다.19) 여성들은 더욱더 직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939년의 시점에서는 16살에서 59살의 전체 여성의 71%가 취업하고 있었다.20) 또한 이 해까지 문맹률은 1928년의 56%에서 20%로 감소했다. 1940년에는 이미 1,400만 명 이상이 7학년 이상의 교육을 받고, 100만 명 이상이 고등교육기관을 졸업했다.21) 전문적인 중등교육기관 졸업자 수는 1926년에는 130만 명이었는데, 1950년에는 790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22) 같은 기간에 전일제 대학의 학생 수는 9배 이상 증가했다. 국가의 행정명령에 따라서 고등학교 혹은 기술대학에 입학한 학생의 75%는 노동자계급 혹은 소농가정의 출신이었다.

사회주의적 경제부문의 비율은 비약적으로 증대했다. 1928년부터 1937년 사이에 이 부문의 비율은 국가의 총자본 스톡의 65.7%에서 99.6%로 증대했다. 또한 공업생산에서의 비율은 82.4%에서 99.8%로 상승하고, 농업생산에서는 3.3%에서 98.5%로 증가했다.23) 이와 함께 교육․의료 써비스나 사회보험의 무료화가 선언되고, 1936년 이후에는 미혼모나 많은 자녀가 있는 어머니에 대한 국가보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회주의 부문의 성장은 노동자의 총수입에서의 무상의 사회적 써비스(공산주의적 소비)의 비율 증대와 일체가 되어 있었다. 연율 15.7%의 비율로 증가한 무상의 사회적 써비스는 1928년에서 1940년 사이에 2배로 증가하여 GNP의 10%를 점하게 되었다.24) 그 결과 노동자의 총수입에서 무상의 사회적 써비스의 비율은 1927년의 28%에서 1935년에는 34.5%, 1944년에는 38% 이상이 되었다. 1944년에는 이미 쏘련의 모든 노동자가 각자의 임금 외에 (공산주의적인) 무상의 국가 소비기금으로부터 각자 임금의 40% 가량을 넘는 액을 수취하게 되었다.25)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사회의 소비를 의식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던 시기의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이러한 뛰어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희생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희생 가운데 일부분은 ‘급속한 공업화‘ 모델 자체 속에 의식적으로 계획되고 포함된 것이었다. 예컨대, 1928년부터 1940년 사이의 농업생산의 연평균 성장률은 겨우 1%이고, 이 부문에서 고용되는 노동자 수는 연평균 2.5%씩 감소하여 총노동력에 대한 농업부문의 비율은 1928년의 71%에서 1940년에는 51%로 감소했다.26) 이는 농업부문으로부터 공업 중심지로의 자발적인 노동력 이동을 목적으로 한 차별임금 정책의 직접적 결과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의 노동생산력은 같은 시기에 17%나 증대했다.27) 나아가 사회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서 국가는 기본적인 필수품을 제외한 소비물자의 가격을 급격히 인상했다. 1928년부터 1937년 사이에 소비물자 및 농산물의 가격은 각각 8배와 6.39배 상승했다. 그 결과 GNP에서의 가계소비의 비율은 1928년의 80%에서 1937년에는 53%, 그리고 1940년에는 49%로 감소했다.28)

한편, 지구 표면의 6분의 1을 덮는 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수천 가지 물자의 생산과 분배를 중앙에서 계획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경제의 사회주의적 부문에서 생산되는 900 가까운 물자의 생산량과 분배방식을 면밀히 계획했다. 이 숫자는 차기 5개년 계획에서는 3,000으로 증가하고, 그 후에도 1만, 3만, 20만으로 증대해 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팽대한 생산과 분배의 계획에는 막대한 계산능력이 필요했다. 어떤 연구소에 의하면,


경제계획 대상물의 상호관계의 수는 대상물의 수의 2승에 비례하여 증대한다. 예컨대, 12만 5천 종류의 물자를 생산하는 쏘비에트 기계 제조업의 계획을 입안할 때에는 계획 입안자는 여러 생산물에 관해서 150억(즉, 12만 5천의 2승)이나 되는 상호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100개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한 종류의 물자는 하나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100종류의 물자보다도 많은 계산과 결정이 필요하다.... 예컨대, 비교적 단순한 기계인 분광기는 150개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264개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쏘비에트의 계획 입안자가 ‘서류의 바다’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도 불가사의가 아니다.29)


1930년대 중엽에는 이미 계산 잘못에 의한 생산부족이나 과잉에 의해서 이 문제는 더욱더 명백해지고, 계획경제를 공화국 수준으로까지 분권화시킬 필요성이 생겼다. 그러나 쏘비에트 지도부는 분권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 위협과 분권화가 초래하는 국가 군비에 대한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 때문에 그러한 개혁은 저지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계속 발전함에 따라서 발달한 컴퓨터 기술에 대한 필요성은 전략적인 필요성으로서 인식될 정도로 한층 강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쏘련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이 문제에 한 나라만으로 씨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발달한 컴퓨터 기술을 결정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제국주의 국가는 쏘련에 대한 모든 종류의 컴퓨터 기술의 이전을 국제적으로 엄격하게 금지할 것을 강요하고, 이 정책을 쏘련에 대한 경제봉쇄의 주요하고 전략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쏘비에트 국가가 1992년에 소멸하기까지 일관해서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은 엄격하고도 강력하게 이 전략을 계속했다. 이 정책은 수십 년에 걸쳐서 쏘련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혼란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문제는 경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농업생산을 집단화하고 10년이 채 되지 않아 농업부문의 공적 소유가 3.3%에서 98.5%로 확대되는 속에서, NEP 시대에는 크게 윤택했던 부농층으로부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급속한 공업화’ 모델의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농업부문의 잉여생산물에 대한 국가의 관리이고, 부농으로부터의 저항은 이 모델 전체를 완전히 파탄시킬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국가가 강제적인 집단화 정책을 채택하고, 이 계획에 대한 모든 반대에 대해서 신속하고 단호한 진압조치를 취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을 실행하면서 이 사회주의 국가가 범한 과오는 노동자와 농민의 단결에 뿌리깊게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고, 국가에게 정치적이고 인민을 장악하는 데에서 곤란을 낳았다. 이 진압의 정확한 역사적 의미와 그것에 이용된 수단은 오랫 동안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이 문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상세한 역사적 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농업생산의 집단화가 ‘급속한 공업화’ 모델의 불가결의 구성요소였음은 지극히 명백하고, 그 때문에 그 부작용에 관해서는 이 모델이 전체적으로 목표로 삼은 것의 틀 속에서 분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이 나라의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하는 모든 소리를 침묵시키려고 하는 움직임 속에서, 쏘련 공산당 자체의 내부에서도 마찬가지 움직임이 일어났다. 어떠한 형태의 반대도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준비를 저해하는 기도로 간주되었다. 10월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공산당의 많은 저명한 지도자들이 반역이나 제국주의의 스파이의 죄를 지고 사형이나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들 지도자의 다수는 나중에 그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이러한 억압은 당에 사라지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고, 그 후 당내에 많은 부정적인 조류가 성장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감히 말하자면, ‘급속한 공업화’ 모델의 가장 중대하고 영속적인 부작용은 공산당의 기구․책임과 사회주의 국가의 기구․책임 사이의 논리적․역사적인 경계선이 애매해지고 혼동되게 된 것일 것이다. 국가의 급속한 공업화 과정을 실제로 지도해야 할 필요성에서 공산당은 그 최하층 수준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행정 책임을 지고, 국가의 일상적인 관리자가 되도록 강요받았다. 이것이 당의 역할 및 그 내부구조에 대해서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 후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 기간 중의 당의 정책 형성에서 결정적인 사항으로 되었다. 급속한 공업화 기간에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다분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당과 국가의 구조와 책임의 이러한 교체가 이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이 후에 사회주의의 위기의 가장 중대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위기의 주체적인 원인에 관해서는 제3부에서 논한다.



3. 파시즘 침략의 파괴적 영향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선동과 양해 하에 이루어진, 쏘련에 대한 파시스트 독일의 군사침략과 국토 일부의 점령으로 말미암아 1930년대에 달성된 사회주의적 진전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2,000만 명 이상의 소련 인민, 즉 이 나라 노동력의 커다란 부분과 가장 혁명적인 시민들이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죽었다. 독일 점령군은 쏘련에서도 가장 공업화된 지역인 1,710개의 도시에 거리에서 약탈을 하고, 7만 이상의 지방도시를 불살랐다. 3만 2천의 공업설비와 6만 5천 킬로미터의 철도가 파괴되고, 9만 8천 개의 협동조합과 약 5천 개의 국영농장과 트랙터나 농업기계 창고가 약탈되었다. 수만 개의 병원, 학교, 예술학교, 고등교육기관, 도서관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파시즘에 의한 쏘련에 대한 침략의 손해는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총계 2조6천억 루블을 넘었다.30)

인류 역사상 어떠한 전쟁에서도 이만큼의 희생자와 손해를 견뎌낸 나라는 없었다. 그 이전에도 쏘련은 내전 시대에 심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옹근(만) 6년 이상을 요했다. 그러나 이 파시스트의 침략에 의한 파괴는 다른 어떠한 것과도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가의 공업 및 농업의 산업기반이 황폐화됨과 동시에, 부족했지만 그나마 존재하고 있던 소비재 시설도 소멸되었다. 인민은 식량, 의류, 구두, 주거, 의료, 연료, 기타의 기본적인 필수품에 대한 필요를 채우는 데에 커다란 곤란에 직면했다. 사회주의적인 분배 원칙은 불가능해지고, 국가는 ‘전시 공산주의’ 시대의 배급제도를 다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쏘련의 당과 국가, 그리고 영웅적인 인민은 일찍이 걸었던 곤란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재차 외부로부터의 원조가 전혀 없는, 자기들 자신의 한정된 내부 자원에만 의존하는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회주의 건설과정은 10년이나 후퇴하고, 10년 전에 ‘급속한 공업화’ 모델을 개시했던 지점에서 또 한번 모든 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 중에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 사회주의 체제는 그 건설적인 힘을 다시 증명하였다. 제4차 5개년 계획은 4년 3개월만에 그 목표를 달성했다. 2년 반만에 이 나라의 공업은 재생되었다. 제1차 및 제2차 5개년 계획을 합한 것에 필적하는 6천 개 이상의 대규모적인 공업설비가 재건되고, 조업을 재개했다. 1948년에는 공업생산량이 전전(戰前)을 넘게 되고, 1950년에는 전전의 수준을 73%나 상회했다. 그 해 공업에서의 노동생산성은 1940년의 수준보다도 37%나 높아졌다.31)

농업의 재건은 1946년의 가뭄도 겹쳐 한층 곤란했다. 전쟁 후 1954년의 이 나라의 경작면적은 1940년의 그것보다도 25%나 적었다. 전전과 비교해 곡물․면화․식육의 정부 비축은 반감했고 우유는 3분의 1이 되었다. 전쟁에 의한 희생 때문에 농업노동이 가능한 노동자는 아주 감소되어 있었다. 또한 지방 노동력의 대부분이 공업의 재건을 위해서 도시로 유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랙터 공장이 재빨리 재건되고, 1950년에는 농업생산은 보다 우수한 자재와 기술적 지원을 받은 보다 소수의 노동력에 의해서 전전의 수준까지 회복되었다.32)

그리하여, ‘급속한 공업화’ 모델에 의거하고 있던 쏘련은 1950년대 중엽에는 이미 공업 및 농업 산업기반의 재건과 전쟁에 의한 손해의 수복에 성공했다. 공산당과 쏘비에트 국가는 그토록 비상히 곤란한 제 조건 하에서 쏘련을 단기간에 발달한 공업국가로 변화시켰다. 1928년에서 1956년이라는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이 나라의 공업생산은 연평균 12.7%나 성장하고, 1928년의 8.7배나 되는 수준에 도달했다. 국민총생산은 연률 15%(몇몇 서방측의 연구에 의하면, 10%) 이상이나 성장했다. 문맹은 일소되었다. 무상 의료와 교육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서방측의 경제학자들도 인정한 것처럼, 국가가 계획적으로 사회의 소비를 억제하는 노력을 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재의 생산도 연률 5.8%의 비율로 확대되었다.33)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의 침략에 의해서 초래된 파괴가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을 10년 이상이나 늦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10년의 지체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 특히 전쟁 과정에서 최소의 손해밖에 입지 않고 전후 대두해온 미 제국주의에 대한 쏘련의 상대적인 입장을 약화시켰다.

파시스트와의 전쟁에서의 쏘련의 영웅적인 승리와 전쟁에서의 손해를 단기간에 수복한 것에서의 사회주의의 감동적인 성공에 의해서 쏘련의 노동자계급․인민만이 아니라 세계의 인민 사이에서 쏘련 공산당과 쏘비에트 국가에 대한 커다란 경의와 권위가 창출되었다. 남겨진 문제들이 있었지만, 공산당과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쏘련의 인민과 노동자계급의 지지는 일찍이 없던 수준에 도달했다. 과거 수십 년에 걸쳐서 사회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주력해 온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있어 다른 모든 요소 이상으로 실로 이 권위와 경의야말로 커다란 위협의 원천이었다.



4. ‘냉전’과 군비확충 경쟁

미 제국주의에 의해서 자행된 히로시마․나가사키 상공에서의 원자폭탄의 작렬과 수십만 명의 무고한 생명의 소멸은 일본 제국주의에 군사적 항복을 압박하는 수단이었다기보다는 쏘련에 대한 군사적 경고와 사회주의에 대한 ‘냉전’의 개시를 고하는 신호였다. 전쟁 중에 쏘련은 그 물질적․인적 자원의 파괴에 계속 직면했는데, 다른 한편에서 미 제국주의는 대양을 끼고 있어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으로부터 격리된 곳에서 핵무기에 의한 무장에 힘쓰고 있었다. 미국을 필두로 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미국의 핵무기 개발로 초래된 군사적 불균형을 사회주의 국가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파시스트 정권에 의한 수백만 명의 살해에 손을 빌려준 많은 독일인 핵무기 전문가들을 처벌․투옥하지 않고 고용했다.

제국주의 정부들 특히 미국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 파괴를 노린 ‘냉전’의 강요는 사회주의에 대한 장기간의 파멸적인 군비확충 경쟁으로 전화되었다. 제국주의의 핵 위협에 대항해야 하는 필요 때문에 쏘련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자원의 커다란 부분을 거대한 군비를 구축하는 계획에 투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에게 있어서 무기 생산은 자본축적의 원천의 하나이고, 지배계급에게 초과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회주의에 있어서의 무기 생산은 오로지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자원을 먹어치우고, 사회의 공산주의적 소비기금을 대량으로 흘려버리는 손해를 줄 뿐인 파괴적인 활동에 불과했다.

군비확장 경쟁의 결과, 최신기술에 대한 투자는 맨 먼저 군사산업에서 이루어지고, 경제의 민생부문의 기술개발을 방해했다. 이것이 비군사부문의 생산을 저해하여 노동자계급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주의 체제의 능력을 제한하고, 자본주의와 비교한 사회주의의 매력을 감퇴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에 대해서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었는데, 이윽고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서 효과적인 반(反)사회주의 선전도구로 되었다. 자본주의에 의한 반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선전은 한층 더 복잡하고 새로운 형태를 취했다. 쏘련과 기타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은 ‘라디오 자유 유럽’을 필두로 텔레비전, 위성방송, 신문, 잡지, 혹은 서방측으로부터의 관광객―그 가운데에는 많은 스파이나 공작원이 섞여 있었다―으로부터 항상적으로 반사회주의․친자본주의 선전의 폭격을 받았다. 자본주의의 선전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복지 수준 및 공적 소유나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라는 개념의 신뢰성에 직접적으로 의문을 띠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시에 쏘련으로부터 중국, 독일민주공화국, 쿠바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국가들 내에서 직접 사보타지(파괴활동)나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이용했다.

제국주의의 대(對) 사회주의 냉전 선전과 군사작전은 국제적으로 자금을 조달한 주도면밀한 침략 계획의 일환이었고, 사회주의 국가의 정부는 그들의 한정된 자원 속에서는 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거대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쏘련의 1971년의 GNP가 미국의 그것의 겨우 55%였던 사실에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후에야 비로소 ‘냉전’ 기간 중에 미국 정부만도 수만 명의 스파이를 고용하고, 스파이 활동과 기타 대(對)쏘 파괴활동에 연간 150억 달러나 쓰고 있었음이 밝혀졌다.34)

‘냉전’과 군비확장 경쟁에 의해서 강제된 거액의 비용은 사회주의의 발전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가져왔다. 쏘비에트 경제의 성장률은 전전에 비교해 낮아졌다. 연간 성장률은 1940년대의 평균 15%에서 1950년대에는 10%로, 1960년에서 1972년까지는 6.7%로 하강했다. 그렇지만 쏘비에트 경제의 성장률은 1950년부터 1972년까지는 평균 8.3%였다. 이는 같은 시기의 미국의 2배 이상이다.35) 그러나 이 두 경제 체제 사이의 질적 차이―특히 사회주의 국가가 모든 시민에 대해서 기본적인 필요를 조달하는 중대한 책임(자본주의 국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책임)과 경제의 공산주의적 부문의 계속적인 성장을 보증할 역사적인 임무를 지고 있는 것―를 생각하면, 경제성장률의 이러한 계속적인 저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있어서는 곤란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 결과, 경제성장의 감속이 제국주의의 반사회주의 선전작전 및 끊임없는 방해공작과 어울려 위기를 심화시켜, 그 위기를 정치적 수준으로까지 부상시키는 물질적인 기초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객관적인 요인들만이 사회주의 체제의 진로를 허물어 패배를 초래한 것은 아니다. 공산당과 사회주의 국가는 각 단계마다 상당히 곤란한 조건―군사 점령, 사회의 후진성, 생산 수준의 저하, 파시스트의 침략, 기타― 하에서 적절한 정책과 타당한 사회․경제 모델을 채용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 왔다. 이번에 정치적인 수준에까지 달하는 위기를 초래한 것은, 당과 사회주의 국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객관적․외부적인 요인들에 대한 대응에서의 주체적인 오류와, 공산주의를 향한 사회의 진전에서 적절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을 창출하는 그들의 활동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이론적 원칙으로부터의 일탈이었다.





제3부 사회주의 위기의 주체적․내부적 요인



지극히 곤란하고 불리한 객관적․역사적․국제적 조건 하에서 30년 이상에 걸쳐서 이루어진 사회주의의 뛰어난 성과는, 세계 규모에서 인류사회를 전진시키는 사회주의의 거대한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향한 길을 지시할 때에 공산당이 수행하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공산당과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가 후진성과 파시즘을 극복하고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11개 국가가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함으로써 그 책임이 경감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하는 곤란한 임무에 새로운 내부적 국제적 책임이 부가되게 되었다. 그리고 쏘련은 자기 나라의 사회주의의 발전이라고 하는 본래의 임무에 더해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들을 경제적․정치적으로 지원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에 의해서 쏘련은 더욱 무거운 경제적 중책을 담당, 생산을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한층 고도화시키고 노동생산성을 한층 더 향상시켜 자국 사회의 부를 비약적으로 증대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한편, 불균형한 ‘급속한 공업화’ 모델은, 거대한 성과가 있었지만, 경제와 정치에 명확히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여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심각한 손해를 미칠지도 모르게 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영향의 몇몇은 실제로 이미 그 징후를 보여 주고 있어 종래의 사회주의 발전 모델을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할 필요가 임박해 있었다.

경제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농업부문은 가공할 상황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농업생산은 연 평균 겨우 1%씩밖에는 성장하고 있지 않았다. 농민들, 특히 집단농장의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저하됐다. 1950년 집단농장 농업노동자의 수입은 국영농장 노동자의 10%가 못되고, 도시 공업노동자 수입의 5%였다.36) 지방의 노동자와 도시 지역 노동자의 생활 수준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농업 생산은 계속 증대하는 도시 거주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충분하지 못했다.

한편에서, 중공업에 장기간 중점을 두고 경공업이나 소비재 산업의 성장은 경시되었기 때문에 소비물자가 부족했다. 이는 차츰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특히 중공업에서의 영향은 컸다. 중공업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높은 임금은 이들의 구매력을 극적으로 증대시켰지만 소비물자의 부족 때문에 그 높은 수입을 지출할 수 없게 되었다. 보다 높은 수입을 위해서 보다 많이 보다 좋은 작업을 하려고 하는 동기 부여는 노동자들에게 그 의미를 잃고, 그것이 공업부문에서는 노동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몇 십 년에 걸쳐서 공업생산의 양적인 확대만을 강조해 왔던 것이 ―비록 그것이 필요했지만― 소비물자의 질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생산물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게다가, 급속한 경제성장은 사회주의 경제의 기반을 한층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만들어 그 관리는 더욱더 곤란했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경제성장은 투자의 양적 확대와 지방으로부터 도시지역으로의 노동력의 이동에 의한 생산의 증대에 기본적으로 의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투자의 수익성을 높이고 기존 노동력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결정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들 요인에 의해서 새로운 형태의 계획과 경제관리의 수법을 채용할 필요가 생겼다.

‘급속한 공업화’ 모델에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정치적 결과도 수반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농업의 강제적인 집단화와 그에 따른 진압정책이 농업임금의 장기간에 걸친 저수준화와 더불어 노동자와 농민의 단결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었다. 나아가, 계획생산을 위한 행정상의 운영 수법이 정부 내에 갈수록 많은 테크노크라트층[전문가층: 역자]을 출현하게 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공산당도 정부의 관료화에 휘말려들고 있었던 것이 더욱 문제였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더욱 제한되고,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일반대중의 참가율은 대폭 한정되게 되었다.

당내 민주주의는 많은 객관적인 요인, 특히 전쟁 때문에 손상되어 있었다. 당대회는 13년 이상(1939-1952) 소집되지 못하고, 개인에 의한 지도가 전체적으로 집단지도를 대체했다. 공산당의 기구․책임과 사회주의 국가의 기구․책임 사이의 경계선이 애매해지고, 정부기관의 책임자 자리에 있는 공산당원 사이에 관료적 부패 및 권력․지위의 남용이 이전보다 분명히 현저해진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다른 요인들과 더불어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사회주의의 사회경제 모델과 사회의 지도방법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필요가 있었다. 요시프 스탈린의 사망으로부터 약 4년 후인 1956년 2월에 공산당은 제20회 대회를 열고 이들 과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20회 대회에서 제안된 해결책과 채택된 모델은,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는 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키는 온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객관적․외부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주체적인 오류에 의해서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의 곤란을 증대시키는 정책을 당이 채택했던 것이다.



1.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과 경제위기의 배경

쏘련공산당 제20회 대회는 그 첫번째 의제로 바로 ‘급속한 공업화’ 모델에 의해서 발생한 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의 해결을 내세웠다. 당 지도부는 대회 전에도 1953년 7월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당 활동, 국가 활동, 경제 활동의 중대한 결함”이 있었음을 말한 바 있었다. 이 중앙위원회 총회는 “정상적이지 못한 점”의 원인이 “개인숭배의 결과 당 생활의 레닌적 기준과 볼쉐비키적 지도원칙이 파괴되어 있었던 점” 및 “중앙위원회와 중앙위원회 정치국 활동에서의 집단지도, 그에 상응한 비판과 자기비판”의 결여에 있다고 하였다. 이 중앙위원회 총회는 나아가 “당, 당 지도부” 및 “쏘련 정부”를 약체화시킬 것을 노리고 일부 ‘모험주의자’가 사회주의 “법질서를 난폭하게 짓밟았다”며,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적절한 결정을 내렸다. 계속해서 1953년 9월, 1954년 6월, 1955년 1월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는 ‘농업의 상태’가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지방경제의 ‘낙후’의 원인에는 “지도상의 결함”, “계획작성의 과도한 중앙집권화”, “농업생산의 증대에 콜호즈[kolkhoz, (협동조합적) 집단농장: 역자] 및 콜호즈원이 물질적 관심을 갖게 한다고 하는 레닌주의적 원칙이 침해된” 것 등을 포함한 “객관적 요인도 주체적 요인도” 있다고 하였다. 1955년 7월의 중앙위원회 총회는 “생산조직을 개선하고 과학기술의 최신의 성과를 도입함으로써 더욱 강력한 공업의 성장”을 확보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중앙위원회 총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공업에서의 기술의 진보는 국가 경제발전의 속도를 높이고 노동생산성을 향상시켜 공산주의의 물질적․기술적 기초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37)

그러나 제20회 대회는 부정적인 정치적 현상을 표면적이고 형식적으로 추궁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한 모든 현상, 즉 집단지도 및 기타 민주집중제 원칙의 붕괴, 정부기관 내 관료제의 확대, 출세주의, 당의 간부나 지도부에 의한 권력과 지위의 남용, 사회 전체에 걸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원칙으로부터의 일탈 등이 모두 단지 스탈린의 ‘개인숭배’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현상, 특히 국가와 당 조직 사이의 경계선이 애매해진 것이나 당 자체의 내부에 관료적 경향이 자라고 있는 것에 관해서는 그 구조적인 근본 원인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회에서는 “이후 당내나 국내에서 이러한 현상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개인숭배와 그 결과를 극복할”38) 것이 결의되었지만, 이러한 문제의 구조적인 근원에 다가가는 근본적인 추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은 문제의 원칙적인 해결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 후의 사태 전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중도이폐의 시도는 당과 국가 양쪽에서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이 더욱 확대되는 여지를 남겼다. 그러한 부정적 현상을 모두 ‘스탈린 개인숭배’로 돌려버린 것은 스탈린에 대한 개인 공격을 가장한 반공 캠페인을 수행하기 위한 다시없는 기회를 사회주의의 적에게 제공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결정적이었던 것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체로 제20회 대회의 정책 지침에 따른 경제 모델이 채용된 것이었다. 제20회 대회는 1956-60년의 쏘련의 제6차 국민경제발전5개년계획에 다음과 같은 전체적 틀을 부여했다.


이후에도 중공업, 즉 철강업과 비철야금업, 석유산업, 석탄산업, 화학공업, 기계공업을 첫째로 발전시킬 것.

국가의 전기화에 관한 레닌의 유훈을 일관해서 실행하고 ... 공업에서의 기본 건설, 주택 건설, 문화․복지시설용 건물의 건설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건설업을 가능한 한 발전시키고 개선할 것.

국가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장 유효하게 이용하고, 원료․연료․전력의 새로운 자원을 생산에 도입할 것.

기술 진보를 촉진할 방침을 끈질기게 취할 것. 과학기술의 최신 성과를 생산에 도입한다.

공업에서의 전문화와 협동화의 확대를 기초로 생산조직을 개선할 것.

일상 소비물자 생산의 발전속도를 높일 것.

농업 고양(高揚)을 위한 활동을 끊임없이 정력적으로 계속하고, 가장 짧은 기간에 농업생산 전체의 종합적인 기계화를 실현할 것.

근로자의 물질적 수준의 더 한층의 향상을 쟁취할 것. 노동자와 직원, 그 중에서도 특히 우선 저소득자의 실질임금을 높이고, 콜호즈원의 수입을 증대시키고, 임금을 삭감하지 않고 서서히 노동자와 직원의 노동일을 단축하고, 연금을 늘리고, 기타의 사회정책을 수행할 것.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근로자의 창조적인 적극성과 창의를 가능한 한  발전시킬 것.

각급 쏘비에트 기관, 노동조합, 콤소몰 조직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개선하고, 국가의 경제생활에서의 이들 기관이나 조직의 역할을 높일 것.39)


제6차 5개년계획에서 채택된 틀에는 그 시점에서 사회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즉, 현대 과학기술의 이용과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의한 중공업의 확대에 계속 중점을 둘 것, 과학기술과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의해서 투자에 대한 수익을 증대시킬 것, 근로인민의 소비물자에 대한 요구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것, 농민의 생활수준을 높일 것, 농업의 현대화와 농업생산의 증대,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노동조합과 노동평의회의 역할의 강화 등이다. 이들 원칙은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의 작성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것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잘못된 정책의 결과 결국 탈선해버렸다.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의 제일보는 임금, 특히 농업부문의 임금수준을 급격히 인상하는 것이었다. 모든 경제분야에서 1개월당 최저임금이 1957년의 27-35루블에서 1962년에는 40-45루블,40) 다시 1968년에는 60-70루블41)로 인상되었다. 계획의 지침에 따라서 농업분야의 임금은 대폭적으로 인상되었다. 농업부문의 연평균 임금은 1950년의 89루블에서 1960년에는 330루블, 그리고 1965년에는 614루블(약 7배)로 상승했다.42) 한편, 농업 이외의 노동자의 임금은 1950년의 830루블에서 1960년에는 1,008루블, 그리고 1965년에는 1,190루블(약 1.5배)로 상승했다.43) 더욱 놀라웠던 것은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의 연간 임금 상승으로, 그것은 1950년의 43루블에서 1960년의 221루블, 그리고 1960년에는 483루블(11배 이상)로까지 상승했다. 국영농장에서의 연간 임금은 1950년의 459루블에서 1960년의 559루블, 그리고 1965년에는 900루블(약 2배)로 상승했다.44) 결국 1950년부터 1965년까지 사이에 농업부문의 연간 평균임금은 비농업부문 노동자의 11%에서 52%로 증가했다. 이 급격한 임금상승은 그 후에도 수년간 이어졌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급속하고 대규모적인 임금상승에 수반하여 소비재의 생산도 마찬가지로 증가한 것은 아니었다. 1965년까지 임금이 몇 배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공업과 소비재 생산부문의 인구 1인당 생산고의 성장은, 예컨대 식품산업에서는 145%, 생활필수품부문에서는 123%에 머물렀다. 생산이 대폭 증가한 것은 유일하게 내구소비재(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등)로, 1950년부터 1965년까지 9배 증가했다. 그러나 그것도 수십 년 동안이나 억제되어 온, 근로인민의 증대하는 요구에 응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예컨대 1965년에는 인구 1,000명 당 라디오 22대, 텔레비전 16대, 냉장고 7대, 전기청소기 3.5대, 재봉틀 3.5대, 가구 세트 8대가 생산되었다.45) 1968년에 미국에는 인구 1,000명당 540대의 전화기가 있었지만 쏘련에서는 인구 1,000명당 겨우 45대(12분의 1)였다.46)

한편,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은 가계지출의 확대에 중점을 두는 유럽 및 미국의 소비형태를 추종하는 것이었지만, 노동자의 사회적 소비의 비율(공산주의적 소비기금으로부터의 수입의 비율)―그것은 1944년에는 38%에 달해 있었다―은 1950-56년에는 35%로 감소했다. 이 숫자는 1935년의 수준보다 낮은 것이었다.47) 1955-65년 사이에 소비는 절대액에서는 확대되었지만, 그것은 같은 기간의 임금의 상승속도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예컨대, 1955년부터 1965년 사이의 1인당 주택면적의 확대는 4.8평방미터에서 6.8평방미터로 42% 증대하는 데 머물고, 1928년의 5.8평방미터를 겨우 넘는 정도였다.48) 1968년에는 도시지역 주택의 약 30%가 여전히 수도가 정비되어 있지 않은 채였다. 1969년에는 러시아 공화국의 주택의 20%에 상하수도가 없고, 25%에는 중앙난방시설이 없고, 40%에는 샤워나 목욕탕도 없었다.49) 따라서 사회적인 쾌적함이나 생활수준의 상승도는 임금의 상승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1인당 소비의 연간 성장률은 1950-55년에는 6%를 넘었는데 1956-60년에는 3.5%, 그리고 1961-65년에는 2.7%로 저하되었다.50)

한편에서는 짧은 기간에 현금 수입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소비물자의 생산 증대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 결과, 1965년부터 1968년 사이에 노동자의 유휴 저축액의 증대는 연율 20%나 되었다. 1960년에는 노동자 1인당 평균 저축액은 약 10루블이었는데, 이 액은 1968년에는 약 350루블(도시노동자의 약 4개월분의 임금에 해당)로 증가했다. 1969년에는 임금생활자의 연간 수입의 70%가 예금으로 회수되고 있었다. 소비재의 부족이 그 주요 요인이었다.51) 이러한 상황이 보다 많은 보다 좋은 노동을 하려는 노동자의 물질적인 동기를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어떤 물자를 취급하는 암시장을 발호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부 관료, 특히 소비재의 분배를 책임지는 자들 중의 부패와 뇌물을 기반으로 하는 지하경제가 창출되었다. 비생산적인 활동에 의한 수입이 급속히 증대하였다. 그 결과 사회와 정부기관 속에 일종의 기생적인 층이 형성되어 성장했다. “생산적인 사회적인 노동과의 교환으로서의 수입”이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 뇌물과 노동자계급으로부터의 착복에 의존하는 기생적인 층에 의해서 차츰 침해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정부로부터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지도적 당인 공산당으로부터 대중이 이반해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악영향을 준 것은 경제 전반에 걸쳐서 임금을 기계적으로 균일화한 것이었다. 제20회 대회 후 곧바로 임금 격차를 없애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단 3년 사이에 과거 22년 이상에 걸쳐서 확립된 임금 격차가 없어졌다. 1966년에는 쏘련의 노동력 인구의 87% 이상이 40-160루블(60%가 40-100루블)의 월수입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200루블 이상의 월수입을 얻는 사람의 수가 전체 노동력 인구의 2.5%를 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1934년에는 40-160루블의 월수입을 얻고 있는 노동자는 노동력 인구의 52%를 넘지 않고, 200루블 이상의 월수입을 얻고 있는 사람이 전체 노동력 인구의 18%를 넘고 있었다(월수입 40루블 미만의 사람은 1934년에는 근로인민의 1.3%, 1966년에는 1%였다). 제조업에서는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극적으로 축소되었다. 숙련도에 의한 최고임금과 최저임금의 격차가 1930년대에는 4배 이상이었는데 1960년대에는 2배 미만으로 되었다. 이것은 1928년의 임금등급으로 돌아간 것을 반영한다.52)

농업부문 내의 임금 격차도 농업부문과 비농업부문 사이의 임금 격차도 모두 급격히 축소되었다. 1950년대 초까지는 농업부문의 노동자와 비농업부문의 노동자의 수입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고, 농업부문 내에서도 집단농장의 노동자와 국영농장의 노동자의 수입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하지만 이 격차는 1955년부터 1970년 사이에 급격히 축소되었다. 예컨대 1950년에는 집단농장 노동자의 평균 연간수입은 국영농장 농업노동자의 평균 연간수입의 10%가 못되었다(42루블 대 459루블). 이 격차는 1960년에는 30%를 넘고(221루블 대 645루블), 1965년에는 55%(483루블 대 900루블), 1975년에는 67%(1,027루블 대 1,528루블)로 축소되었다. 나아가 농업노동자의 평균 연간수입은 1950년에는 비농업노동자의 11%(89루블 대 830루블)였는데, 1960년에는 33%(330루블 대 1,008루블), 1975년에는 70%(1,225루블 대 1,780루블)로 증가했다. 바꾸어 말하면, 1955년부터 1975년 사이에 쏘련의 전체 농업노동자의 평균 연간수입은 비농업부문 전체 노동자의 임금과 비교해서 3.6배의 증가율로 상승했다.53)

이렇게 단기간에 (절대액에서도 경이적인 증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임금을 기계적으로 평준화한 것은 수십 년 전에 스탈린이 “반맑스주의, 반레닌주의”라고 선언했던 것이고, 쏘련에서의 생산 증가율의 저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 1955년 6월 및 1960년 7월의 중앙위원회 총회(두 총회 모두 제21회 당대회 후에 개최되었다 [역주: 시기에 혼란이 있는 듯하나 확인하지 못했음])에서의 평가를 필두로 한 당 지도부의 거듭된 평가에 의하면, 노동생산성과 자본효율을 올리기 위해서 산업에 현대적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점에서 정부가 이렇다 할 진척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사실, 1954년부터 1960년에 걸친 초기의 농업생산의 증대는 생산성의 향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로 흐루시초프의 “처녀지” 계획의 결과였다. 이 계획에서는 주로 공산당 청년조직(콤소몰)의 자원자가 지방에 가서 4,200만 헥터의 미개간지나 휴한지(休閑地)를 경작했다. 이 초기의 성장도 곧 한계에 부딪쳤다. 2․3년만에 미개간지가 없어져 버렸고, 쏘비에트 지도부가 잘못된 농업정책을 채택했기(예컨대 소의 사료로 옥수수를 재배했다) 때문이었다. 그 결과 쏘련의 국민총생산(GNP)의 연평균 성장률은 1940년대의 10년 동안에는 15%였는데 1950년대의 10년 동안에는 10%, 1960년대부터 1972년 사이에는 6.7%(1940년대의 절반 이하)로까지 급락했다.54)

쏘련 공산당 제20회 대회에서도 강조된 것처럼, 경제계획에서 제안된 사회의 소비수준의 급격한 향상은 명백히 ‘중공업의 계속적인 성장’ 및 공업과 농업 양쪽에서의 자본효율과 노동생산성의 향상―그것은 또한 현대 과학기술의 진보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은 전적으로 그 반대였다.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경제의 과학기술적인 현대화를 중시하지 않고, 소비에 대한 정부 지출을 급격히 증대시키고 동시에 정부 지출에서 점하는 자본투하의 상대적 비율을 감소시켰다. 그 결과 근로인민의 구매력은 급속히 높아졌지만 소비재 산업의 물질적․기술적 생산능력은 그대로였다.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은 경제 전역에 걸쳐서 임금을 기계적으로 평준화하고, 그 결과 생산 증대에 필요한 물질적인 동기부여를 전적으로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회에는 기생적인 활동이 만연하는 온상이, 정부의 관료기구 내에는 부패와 뇌물의 온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잘못된 정책이 서로 결합된 결과 쏘련 내에는 차차 심각한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발생해 왔다.

임금이 눈에 띄게 상승한 것과 소비물자가 상대적으로 입수하기 쉬워진 것이 이 증대하는 위기를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그것은 대체로 서방측의 소비행동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은 불과 수년 사이에 근로인민의 생활과 소비의 수준이 서방측을 따라잡고 추월할 것이라는 환상을 낳았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는 기술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생산기반을 가진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실현되는 것이고, 쏘비에트 사회는 아직 그러한 사회와는 멀다고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주관적인 낙관주의는 필연적으로 대중의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호에는 “제3부 사회주의의 위기의 주체적․내부적 요인의 후반 부분이 연재됩니다) 

한/노/정/연

번역 : 채만수 소장


1) 모리스 돕, ꡔソヴェト經濟史―1917年以後のソヴェト經濟の發展ꡕ 上卷, 日本評論社, p. 175.


2) 같은 책, p. 165.


3) ‘협상가격차’에 관해서는 폴 R. 그레고리․로버트 R. 스튜어트, Soviet Economic Structure and Performance, Harper and Row, New York (1974)의 일본어 역, ꡔソ連經濟―構造と展望ꡕ, 敎育社, 1986, pp. 67-71 참조.


4) G. 올린 나터 “經濟成長の中ソ戰略に及ぼす影響”, D. M. 아부샤․R. V. 알렌 공동편집, ꡔ國家の安全保障ꡕ, 일본국제문제연구소․가시마(鹿島)연구소 출판회, p. 115 제A-1표 (일본어 역주: 단, 표의 수치는 1913년의 공업 및 농업 생산고를 각각 100으로 하여 1920년은 각각 그것의 20, 67, 1928년은 102, 110으로 되어 있어, 본문의 서술과는 다르다.)


5) Alexander Erlich, The Soviet Industrialization Debate, 1924-1928,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60, pp. 105-106.


6) Paul Gregory, Socialist and Nonsocialist Industrialization Patterns, Praeger, New York, 1970, p. 28.


7) 쏘비에트의 공업화 논의에 관한 상세한 기술은, 그레고리․스튜어트, 앞의 책, pp. 80-103 참조..


8)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 pp. 88-91 참조..


9) 같은 책, pp. 91-94.


10) 같은 책, pp. 95-97.


11) 스탈린, “經濟活動家の任務について”(1931년 2월 4일, 사회주의 공업활동가 제1회 전국회의에서의 연설), ꡔスタ-リン全集ꡕ(復刻版) 제13권, 大月書店, pp. 59-61.


12) 스탈린, “新しい情勢 ― 經濟建設の新しい任務” (경제활동가협회에서의 연설), 같은 책, pp. 77-79.


13)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 p. 244.


14) A. 베르그송, ꡔソヴィエト賃金構造論ꡕ, 實業之日本社, p. 155.


15)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 p. 99.


16) 같은 책, p. 100, 제10표.


17) 같은 책, p. 99.


18) Gregory․Stuart, Soviet Economic Structure and Performance, Harper and Row, New York, 1974, p. 82.


19)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일본어 번역판), p. 100, 제10표.


20) 같은 책, p. 252.


21) 같은 책, pp. 255-256.


22) Gregory․Stuart, 같은 책(영문 판), p. 209.


23)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일본어 판), p. 101, 제10표 [계속].


24) 같은 곳.


25) Janet Chapman, Real Wages in Soviet Russia Since 1928,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63, p. 140, 표 20 “Soviet Statements on Benifits as a Contribution to Wages”.


26)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 p. 99.


27) Gregory․Stuart, 같은 책 (영문 판), p. 83.


28)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일본어 판), p. 100.


29) 쏘련의 사회주의 중앙계획에서 증대하는 복잡성과 1930년대에 이루어진 경제계획의 분권화에 관한 여러 제안의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Leon Smolinski and Peter Wiles, “The Soviet Planning Pendulum,” in George R. Fiewel, ed., New Currents in Soviet Type Economies, International Textbook Company, Scranton, Pensyvania, 1969, pp. 269-315 참조.


30) 大月國民文庫 ꡔソ連邦共産黨史ꡕ (구판=ꡔソ連共産黨史ꡕ ソ連邦國立政治文獻出版所 1959년 11월 19일 판의 번역) 제3분책, p. 890.


31) 같은 책, pp. 899, 901.


32) 같은 책, pp. 901-905.


33) Gregory Grossman, “Thirty Years of Soviet Industrialization,” in George R. Fiewel, 앞의 책 (주 39 참조), pp. 43-44.


34) Victor Pero, “The Economic and Political Crisis in the USSR,” Political Affairs, August 1991, p. 12.


35)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 p. 337, 제39표, ‘쏘련과 미국의 GNP의 장기성장(연평균 성장률)’.


36) G. E. Shroeder and B. S. Severin, “Soviet Consumption and Income Policies in Perspective,” in Soviet Economy in a New Perspective: A Compendium of Papers Submitted to the Joint Economic Committe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October 14, 1976, p. 629.


37) 大月國民文庫 ꡔソ連邦共産黨史ꡕ (제2부 주40 참조) 제3분책, pp. 947-958.


38) 같은 책, pp. 968-969.


39) 같은 책, pp. 966-967.


40) Murray Yanowitch, “The Soviet Income Revolution,” Slavic Review, Vol. 22, No. 4, December 1963, pp. 663-695.


41) Emily Clark Brown, “Continuity and Change in the Soviet Labor Market,” in M. Bornstein and D. F. Fusfeld, eds., The Soviet Economy: A book of Reading, Homewood, Illinois, Richard D. Irwin Inc., 4th ed., 1974, p. 176.


42) Shroeder and Severin, 같은 책, p. 629.


43) 같은 곳.


44) 같은 곳.


45) Gertrude E. Shroeder, “Consumption in the USSR: A Survey,” in Bornstein and Fusfeld 편, 같은 책(주6 참조), pp. 302-303.


46) 같은 책, p. 304.


47) Janet Chapman, 같은 책 (제2부 주35 참조), p. 140.


48) Gertrude E. Shroeder, 같은 책, p. 303.


49) 같은 책, pp. 279-281.


50) 같은 책, p. 276.


51) 같은 책, p. 288.


52) 1928년과 1934년의 통계에 관해서는 A. 베르그송의 같은 책(제2부 주24 참조), pp. 282-284, 부록4의 제9표와 제10표, 1966년의 통계에 관해서는 P. J. D. Wiles and Stefan Arcowski, “Income Distribution Under Communism and Capitalism,” Part 2, in Soviet Studies, Vol. 22, No. 4, April 1971, p. 506, 표28(각 숫자는 기간을 똑같이 하기 위해 조정되어 있다).


53) Shroeder and Severin, 같은 책, p. 629.


54) 그레고리․스튜어트, 같은 책(제2부 주1 참조), p. 337, 제39표.


2003-09-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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