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스스로 서기 위한 7년의 장정,
에바다 투쟁보고서
서 문
1999년 여름, 나는 한신대학교에 있었다. 학생운동 한답시고 밥대신 더위를 먹어가면서 텅빈 학교를 지키던 어느날, 함께 활동하던 동지로부터 인근의 한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용인즉, ‘비리재단 퇴진을 위해 장애인들이 천일동안이나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곧 당시 그 투쟁에 결합하고 있던 학생 주체 한 명을 학교로 초청해서 상황을 들었고, 그들이 그동안 투쟁해왔던 비디오 테잎을 관람했다. 나와 동지들은 곧 에바다 투쟁에 결합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하반기 학원 민주화 투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후인 2000년, 에바다에 관선이사가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몇년 후 2002년 나는 민중복지연대 사무국장으로서 다시 에바다와 만나게 되었다.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고, 오랫만에 만난 권오일 선생님은 최씨 일가의 사주를 받은 농아원생들에 의해 한쪽 다리가 부러진 상태였다. 어쨌든 난 그래서 다시 에바다와 만났다. 그리고 그해 6월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의 간사단체를 민중복지연대가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사실 소규모 조직으로 이제 걸음마를 걷기 시작한 민중복지연대라는 단체가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의 간사단체를 맡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매우 부담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이 어찌되었건 ‘에바다 투쟁을 사수해야 한다’는 강한 당위는 민중복지연대로 하여금 간사단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그동안 월급 한푼 못 받은 채 민주이사가 관장하고 있던 에바다 복지회 법인 사무국장직을 수행해 오던 평택 지역의 동지가 여러가지 불가피한 이유들로 인해 그 직을 사직하는 일이 생겼다. 나에게 에바다 복지회 법인 사무국장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다. 민중복지연대는 당혹스러웠다. 유일한 상근 활동가인 사무국장이 그것도 임기가 채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에바다 복지회 사무국장을 맡는다는 것과 장애 투쟁에의 결합을 계속하고는 있었으나, 뚜렷한 결합 주체와 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쟁점들을 제쳐두고 에바다의 법인 사무국장으로 상근자가 가는 것은 여러모로 볼 때 부담스런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당위는 충분했다. 7년의 투쟁, 이 투쟁에서 승리했을 때, 혹은 패배했을 때 그것이 각각 이제 성장하고 있는 민중복지운동과 장애운동에 미칠 영향은 사실 지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민중복지연대의 논의는 7년의 투쟁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공동 사무국장으로 상근자를 새로 선임하기로 하고, 나는 민중복지연대 사무국장으로서의 직책을 유지한 채 에바다 복지회 법인 사무국장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 본격적으로 더 깊게 에바다와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내가 에바다에 본격적으로 결합한 이후 보고 듣고 느끼면서 판단한 에바다와 에바다 투쟁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에바다는 그 투쟁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또한 많은 과제를 던져주며 정상화를 위한 최씨 일가와의 투쟁을 마무리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에바다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가지기보다는 좀더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에바다 투쟁의 성과와 시사점을 올곧게 받아 안는데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쓰고자 한다.
1. 에바다 속으로
1) 에바다 이야기
에바다는 그 명칭에서 보듯이 기독교 이념에서 시작되었다.1) 미국인 선교사 더글라스 크래이머가 1964년 평택에 어린이 보육원을 설립한 이후 1974년 역시 미국인 선교사인 맥신스트로 브릿치로 이사장이 바뀌었고, 그는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1982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맥신스트로 브릿치는 당시 이사로 참여하고 있던 최성창 목사에게 6000여평의 땅을 기증하였고, 최성창 목사는 이 땅과 함께 전국에 있는 에바다 교회에서 모금한 돈과 기부금을 합쳐 에바다 농아복지회를 설립하게 된다. 농아원을 운영하던 에바다 농아복지회는 비인가 상태의 농아학교를 운영하다 1986년 지금의 에바다 농아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1995년 에바다 장애인 종합 복지관을 건립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선교사가 떠나고 최성창 목사가 에바다를 운영하게 되면서, 에바다는 최씨들의 왕국으로 점차 변질돼 가기 시작한다. 최성창 목사와 그의 형 최모씨, 누나 최모씨, 동생 최모씨, 이들은 에바다라는 왕국의 주인행세를 시작했고, 이제 각종 비리와 인권유린 사건들이 줄을 잇게 된다. 최 목사의 누나 최모씨는 농아원장과 복지관장을 겸직하면서 비리를 저질러대다 결국 96년 겨울 농아원생들에 의해 비리가 폭로되면서 감옥 신세를 지게 된다. 이들은 또 농아원 뒷편에 3층짜리 건물을 지어 놓고 1층은 ‘직업보도실’이라며 제본공장을 만들어 놓고선 아이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는가 하면 2층과 3층은 신학원을 만들어 놓고 최 목사 자신은 스스로 ‘학장’을 자임하고, 누나 최모씨의 양자들을 각각 ‘교수’로 앉혀 놓고선 제멋대로 목사 자격을 주는 등 이들의 행태를 가만히 보면 -일종의 종교적 허영에서 나온 것인지 어쩐지 모르지만- 사이비 종교집단을 연상케하는 짓거리들을 계속해 왔다.
하지만 더 가관인 것은 이들이 운영하던 시설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분명히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 국비 지원을 받는 에바다 학교가 있음에도 학교 건물은 어디에도 없다. 학교 건물로 사용하던 건물들은 모두 법적으로 농아원 건물이다.2) 교사동은 물론이고, ‘기숙사’, ‘급식소’ 모두가 농아원 건물이고 사실 따지고 보면 학교는 얹혀 있는 꼴이다. 건물도 없이 학교인가가 난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시설을 만들어 놓고 이를 철저히 이용해왔다. 농아원 숙소를 학교 기숙사로 겸해서 사용하게 되면서 농아인 한명을 수용하게 될 경우 이 사람이 원생인지, 기숙사생인지는 서류를 꼼꼼히 검토해 보지 않는 한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교육청과 시청으로부터 이중의 지원을 받아내는데 중요한 근거로 활용된다. 한 사람의 농아인을 두고,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는 기숙사 운영비를, 평택시청으로부터는 농아원 운영비를 2중으로 지급받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실 농아원 진입 후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그나마 있는 건물조차 제대로 지어진 건물이 아무것도 없다. 에바다 농아원내에 있는 그 어떤 건물도 비가 새지 않는 건물이 없다. 학교 교실에서는 비오는 날이면 냇가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고, 식당의 부식창고에서는 빗물이 벽을 타고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그나마 낫다는 본관 건물의 경우도 비가 오는 날에는 예배당에 강이 생길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직업보도실은 가장 최근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 하여 폐쇄된 지 오래이고, 식당의 경우도 2층과 기둥역할을 하는 보에 심각한 균열이 있어 무너져가고 있는 상태다. 학교의 유일한 화장실인 옥외 화장실은 그나마 무너져가고 있고, 정화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문제는 이런 심각한 건물상태로 인해 아이들이 언제나 위험에 노출된 채 생활하였다는 것과 함께 매년 보수공사(기능보강사업) 명목으로 평택시로부터 사업비를 받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상태들이 이렇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운영비 2중 지원의 문제도 그렇지만 이것 역시 ‘국민의 혈세’가 눈먼 돈이 되어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어처구니 없기는 복지관 역시 매한가지다. 장애인 복지관으로는 너무 접근성이 떨어지는 평택에서도 외곽의 공단 내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설 역시 정말 장애인 복지관을 생각하고 지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빨간 벽돌 건물에 조경도 그럴듯하게 갖추어 놓았지만 사실 모두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볼 때 그렇지 장애인들로서는 갑갑하기 이를 데 없이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는 건물을 다 짓고 나서 나중에 만든 것이고 그나마 그것 외에는 휠체어 장애인들이 2층과 3층을 다닐 수 있는 통로가 아예 없다. 모두가 계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용 주차장 역시 비좁기 이를 데 없고, 현관에는 처음에는 경사로도 없다가 나중에 벽돌로 엉성하게 만들어 놓은 표시가 역력하다. 그런 와중에 복지관 호실마다 설치돼 있는 샤워시설은 도대체 이 건물이 장애인 복지관 용도로 지어진 것이 맞는지를 의심하게 한다.
2) 에바다와 한국 사회복지의 현실
에바다 진입투쟁이 있기 약 한달여 전 쯤인 걸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시절 도덕책을 통해 ‘천사’이자 ‘위대한 사회사업가’로 배워왔던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의 비리가 터져나왔다. 후원금 횡령을 기본으로 하는 ‘위대한 사회사업가’의 온갖 추잡한 비리가 언론의 도마위에 올랐고,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꽃동네 이전에도 양지마을, 성지원, 형제원 등등 사회복지시설에서의 비리와 인권유린 사건은 샐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 시설들을 운영하며 비리를 저질러온 이들은 순간적인 언론의 지탄을 피해 잠시 감옥으로 피신(?)해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복귀하여 이름만 바꾼 다른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리고 얼마 후 에바다 진입투쟁이 성공한 후 약 2달여 시간이 지난 후 오웅진 신부가 불구속 기소되었다는 검찰 수사 결과를 들었고, 역시!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에바다에서는 끈질긴 투쟁을 통해 비리주범, 인권유린 주범들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에바다에 왔을 때 비리주범들이 남기고 떠난 흔적은 한국 사회복지가 그동안 가져왔던 참담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 사회복지는 전후 구호사업으로부터 그 명맥이 시작된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난민, 전쟁고아, 전쟁 부상자 등에 대한 구호사업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이들의 구호는 대부분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6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을 떠나 그들의 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본국으로 선교사들이 귀국하면서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구호사업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주로 기독교 목회자-에게, 구호사업을 하면서 형성된 부동산, 기금 등과 같은 재산을 넘겨주고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요구하자들의 구호활동을 벌여줄 것을 부탁하면서 돌아간다. 그리고 이후 한국 사회복지는 선교사들로부터 재산을 넘겨받은 이들에 의해 ‘사회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게 된다. 에바다 역시 위에서 이미 본바와 같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설립되었다. 이들 ‘사회사업’의 형태는 거의 대부분이 ‘생활시설’3)로 운영되었고, 이 생활시설들은 ‘개발독재’라는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국 사회복지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잘 살아보세’ 라는 구호와 함께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한국 사회에 안착화 시키는 것을 핵심 목표(국시)로 설정하고 온 사회를 몰아갔던 당시의 군사정권 치하에서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 ‘표준’이 생겨난다. 이 표준은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안착화와 발전을 더욱 효율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설정되었다. 농촌은 이전의 생활터전에서 ‘추억’과 ‘향수’의 고장으로, 도시는 ‘새로운 생활터전’으로 상정되었고, 가족은 도시에 적합한 핵가족이 적극 권장되었다. 심지어는 자녀의 숫자까지도 국가가 나서 조율하는 성의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식탁 역시 ‘혼식’ ‘분식’이 적극 강요되었고, 교육은 초등-중등-고등-대학에 이르는 과정이 정식화되었고 내용도 ‘국정교과서’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다.
이 같은 국가에 의한 표준으로부터 자의든 타의든 일탈하는 것은 이제 ‘비정상’으로 간주되었다. 가족의 표준에 어긋나는 ‘고아’, ‘미혼모와 그 자녀’, 도저히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 강요된 사회적 표준에 맞추어 생활이 불가능한 ‘장애인’, 정규 교육과정에서 일탈한 ‘문제아 또는 비행청소년’ 등등.. 이들은 비정상으로 간주되었고, 이들에 대해서는 ‘정상화’를 위한 치료가 강요되거나 ‘사회적 격리’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 격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서 이는 대부분 사회복지시설 즉 ‘사회사업’을 ‘사랑과 봉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 ‘사랑과 봉사’ 즉, 온정주의의 탈을 쓴 사회적 격리는 대규모로 행해졌고, 이 과정에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던 위대한 사회사업가들은 최대의 수혜자로 된다. 이들은 크게는 오웅진과 같이 교과서에까지 실리면서 찬양을 받았고, 적어도 최성창처럼 지역사회의 명망가, 유지로 행세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정작 ‘사랑과 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들은 온갖 비리와 인권유린, 강제노동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이는 에바다에서도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 예외없이 벌어졌다.
개발독재가 끝나고 사회가 점차 민주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회복지시설도 그 변화를 타지 않을 수 없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와 비리, 인권유린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에바다에서도 역시 실종된 아이들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나 좀처럼 쉽게 확인되고 있진 않다. 그나마 에바다는 주범들을 소탕했기에 실종자들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의문사를 밝히려는 노력이 시도될 수 있지만 꽃동네는 과연 어떻게 될까?
2. 에바다 투쟁 이야기
에바다 사태 초기에 아직 엄마 뱃속에 있던 권오일 교사의 딸 진은이는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무럭무럭 자라서 투쟁을 마무리하는 단계인 지금은 7살짜리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되어 있다. 에바다 투쟁은 그렇게 길게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이 기나긴 투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해아래 집’이다. 에바다 투쟁이 시작된 이후 최씨 일가가 지배하는 에바다 학교에서 벗어나 만든 생활공동체이다. 이 해아래집은 투쟁의 거점으로서 훌륭하게 그 역할을 해 냈으며, 동시에 농아원과는 묘하게도 대조를 이루면서 장애인 복지, 또는 장애운동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 학생, 시민․사회 단체들의 지속적인 투쟁에의 결합이다. 때론 시들한 듯 싶다가도 중요한 시점에는 언제나 이들의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서 결국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사실 에바다 투쟁에 대부분은 그 결과만을 놓고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정상화가 다 되었느냐, 아직도 문제가 있느냐 등, 그리고 이 결과에의 집착에 ‘해방구’에 대한 환상이 겹쳐 일을 풀어가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지난 7년의 시간동안 어떻게 투쟁이 유지되었으며, 결국 승리로 귀결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해아래집은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지역 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들의 결합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기여하였는지, 이러한 ‘과정’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에바다의 정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시작과 끝
시작은 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6년 11월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말 그대로 ‘비참한’ 생활환경과 강제노동, 인권유린, 시설비리에 저항하는 농아학생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에바다 투쟁이 시작되었다. 농성이 시작되자 곧 최씨들의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들이닥쳐 농성하는 농아학생들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해산시켰다. 그러나 상황은 곧 바뀌었다. 에바다에서 최씨들이 저지른 범죄사실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당시 비리의 핵심에 있던 최실자(최성창의 누나, 당시 농아원장, 농아학교 서무과장, 에바다 장애인 종합복지관 관장 겸임)가 긴급 구속되었고 그 외에도 비리에 연루된 전 이사장 최성창의 일족들이 하나씩 사법 처리되는 듯 하였다.
최성창 목사는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계속하고 있는 농아학생들과 함께 한 권오일 교사 부부를 비롯한 교사들에 대한 보복성 징계와 농아원생들을 동원한 폭력을 자행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와, 비호해주는 지방권력을 등에 업고 하나씩 복귀하기 시작한 일가들이 가세하면서 투쟁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98년 감사원에서 에바다에 대한 특별감사를 실시하였고, 99년에는 국회의원 이성재가 관선이사로 파견되기에 이른다. 이후 이사회 내부에서는 관선이사 파견을 계기로 이사회에 참여하게 된 민주파 이사와 평택시에서 선임한 임시이사인 최성창을 지지하는 구 재단 측 이사들 간의 지루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2002년 4월 민주이사가 이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4)
2002년 7월 이제 법인 운영권을 손에 쥔 민주 이사들과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는 농아원 정문에서 일주일간 진입농성을 벌였고, 이 투쟁으로 그동안 안하무인 식으로 폭력을 휘둘렀던 최씨 일가와 이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었던 비호세력들의 발목을 단단히 묶어 둘 수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사태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 물리력을 동원한 진입투쟁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씨 일가의 눈으로 확인되어짐으로서 더 이상의 폭력행위를 계속했다가는 최씨 일가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대표적인 비호세력이었던 평택경찰은 농성현장에서 법질서 집행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그 무능한 모습이 폭로됨으로서 더 이상은 노골적으로 최씨 일가를 비호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2년 8월에는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에바다 복지회 산하 시설 중 하나인 ‘에바다 장애인 복지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정상화를 향한 전초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신임 복지관장 선임’을 둘러싸고 생긴 잡음으로 이후 상당기간 전체 투쟁이 소강상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2003년 2월 이사회에 의해 임용된 신임관장이 복지관을 장악해 나가면서 상황은 급진전되었다. 곧이어 2월말 4월초에 이르는 기간동안에 최씨 일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농아원으로부터 에바다 학교를 분리시키기 위한 ‘작전’이 실행되었으며, 결국 2003년 3월31일 에바다 학교가 농아원으로부터 복지관으로 수업장소를 옮겨 14개월만에 정상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마지막 한 단계만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최씨 일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농아원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복지관이 정상화되고, 학교 수업이 임시 수업장소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최씨 일가들은 농아원을 근거삼아 이를 폐쇄한 채 정상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3년 5월28일 드디어 민주이사와 지역의 노동자, 학생들로 구성된 진입대오가 농아원 진입에 성공하였고, 약 10일간의 투쟁 끝에 2003년 6월7일 최씨 일가와 그 하수인들을 ‘에바다 복지회’ 산하 모든 시설에서 완전히 축출해 낼 수 있었다.
2) 에바다 투쟁과 해아래집
(1) 해아래집 소개
평화롭게 흐르고 있는 진위천변에 자리잡은 해아래집은 언뜻보면 시골 하천변에 흔히 있는 식당 정도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청각 장애인의 보금자리 해아래집’이라고 씌어있는 녹색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해아래집에 처음 갔을 때 놀랐던 것은 여느 수세식 화장실보다 깨끗한 옥외 화장실이었다. 옥외화장실은 파란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간이 화장실 두 칸인데 웬만한 수세식화장실보다 더 깨끗하다. 아이들이 당번을 정해 늘 청소하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화장실 청소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거의 모든 가사노동을 자발적으로 당번을 정해 놓고 돌아가면서 해결한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선생님들과 상의하고 도움을 청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자기들끼리 회의를 통해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나갈 줄 안다. 그래서 사실 선생님들은 해아래집 아이들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거나 하지 않는다. 농아원에서 생활하다 최근에 해아래집에 온 아이들도 처음에는 어색해하고 생활습관도 맞지 않아 힘들어했지만 점차 적응하면서 생활습관이나 행동거지들도 많이 좋아지고 있다. 선생님들은 이런 아이들의 변화를 가리켜 ‘해아래집화’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해아래집은 인근 지역주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사실 장애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인근 지역 주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기는 힘들다.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에바다 농아원’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이 퍼져 있는 상태에서 ‘에바다 출신’ 농아학생들이 공동 생활하는 해아래집이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은 특이한 경우다.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중소 사업장들에서는 졸업한 아이들을 자기네 사업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단순히 아이들이 ‘착하다’라는 표현만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착한 장애인은 다른데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아래집 아이들의 생활시스템에 있는 것 같다. 해아래집 아이들의 생활시스템은 첫째 민주적이다. 해아래집은 선배나 선생님들에 의해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것이 강요되는 일은 없다. 아이들의 의사는 언제나 존중되며, 모든 것은 토론과 설득, 상담을 통해 이루어진다. 둘째 이런 민주적 생활시스템은 자발성에 기초하여 더욱 강화된다. 사실 자발성이 없으면 민주성은 관철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힘든 투쟁 과정에서 함께 해온 선생님들과 선배들이 모범을 보이면서 자발성은 후배들에게도 전염되어 갔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한 것은 담당자의 자발성과 결합하여 더욱 확실하게 이행되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의 생활시스템, 그리고 그에 따라 형성된 생활습관과 성장은 다른 장애인 생활시설 특히 - 최씨 일가에게 충성만하면 아무런 걱정도 없이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농아원 아이들과 사고와 정서, 생활양식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별성을 보이면서 인근의 주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해아래집과 그 아이들이 인근 지역 주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던 것은 에바다 투쟁에 함께 하고 있는 투쟁주체들에 대한 신뢰의 근거가 되었고 결국에는 최씨 일가의 지역적 고립을 의미하였다. 아무리 평택시장으로부터 경찰, 검찰 등 지역의 기득권 세력들로부터의 비호를 등에 업고 있다 하더라도 해아래집이 지역으로부터 받는 신뢰는 에바다 투쟁의 대의를 더욱 강화하였고 이는 결국 기득권 세력들이 최씨 일가를 노골적으로 비호할 수 없도록 하는 효과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2) 투쟁과 해아래집
96년 11월 농성을 시작했던 에바다 학교 농아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농아원 기숙사 한켠에서 농성을 하다가 서울에 있는 한국 농아인 협회 지하실에서 농성을 하다가 농아원 인근 교회로 옮기는 등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평택시와 당시 재단을 운영하던 최씨 일가 측에서는 아이들이 농아원으로 복귀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아이들은 결국 농아원 재입소를 거부하였다. 당시에 아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리 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추측하기로는 생활시설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질서에 대한 반감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쨌든 그래서 농성에 함께 했던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생활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했고 그 때 다행히 지금의 해아래집을 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곧 해아래집으로 옮겨왔고,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해아래집은 유지될 수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약간의 지원과 선생님들 각자가 봉급에서 각출한 운영비로 살림은 꾸려갔으며 해아래집에 상주하는 세명의 여선생님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해아래집에서 7년을 보내며 헌신해왔다. 만약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해아래집도, 에바다 투쟁도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아래집은 에바다 투쟁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에바다 투쟁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해아래집’에 대해 ‘피난처’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사실 진입 투쟁이 성공한 후에도 정상화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이 지점에 대한 이견으로 인한 논쟁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해아래집은 에바다 투쟁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기능들을 해왔다.
첫째, 장기적인 투쟁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안정적인 거점을 제공하였다. 아이들이 농아원에 들어가지 않고 해아래집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최씨 일가와 그 비호세력에게는 하나의 압력이 되었으며 그 자체가 농성이 되었다. 최씨 일가들에 의해 저질러진 2002년 3월의‘해아래집 테러사건’은 최씨 일가들이 해아래집의 존재를 얼마나 껄끄러워 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5) 또한 지역의 운동세력들을 규합하여 투쟁 대오를 형성해나가는 주요한 거점이 되었고, 때로는 투쟁주체들의 편안한 쉼터로서도 기능하였다.
둘째, 해아래집의 존재와 성장은 최씨 일가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해아래집의 민주적이고 자발적인 생활시스템에 의해 맑게 성장한 아이들과 농아원에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질서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고, 주민들로부터 받는 평판 역시 180도 다른 것이었다. 해아래집 아이들은 좋은 평판과 함께 곳곳에서 일자리 추천이 들어오는 반면 농아원 아이들은 잦은 폭력과 도벽 등으로 좋지 않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학부모라면 농아원에서 아이들을 빼내 해아래집에 맡기고 싶어했고, 학부모들(물론 처음부터 투쟁에 함께 했던 학부모들도 있었지만)이 해아래집으로 몰리면서 이는 당연히 에바다를 관할하는 경기도 교육청이나 평택시청에도 압력으로 작용하였다.6) 결국 지역 주민들 사이의 여론에서도, 지역 관청으로부터도 최씨 일가는 해아래집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궁지에 몰리는 꼴이 되었다.
셋째, 장애인 복지에 대한 문제의식의 제기와 함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였다. 해아래집은 그 기원자체가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생활시설의 질서에 대한 거부로부터 나왔고, 지난한 투쟁을 거치면서 훌륭하게 성장하면서 장애인도 일정한 조건만 갖추어 진다면 격리되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훌륭하게 자립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는 한편에서 그동안 한국 사회 장애인 복지의 주류를 형성해 왔던 생활시설에 대한 문제제기임과 동시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에바다 투쟁과 운동
에바다 투쟁에는 처음 투쟁을 시작한 농아학생과 교사들 외에 지역 노동자, 대학생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많은 사회운동 단체들이 함께 결합하였다. 에바다가 위치한 평택과 인근 경기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과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전국적으로는 인권, 장애운동 단체들과 전교조 특수교육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가 결성되어 투쟁에 함께 하였다. 또한 장애운동에 전망을 가진 대학생들이 결성한 ‘전국 에바다 대학생 연대회의’ 역시 투쟁에 있어 비중있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처음 투쟁을 시작했던 직접적인 투쟁주체라 할 농아학생과 교사들이 꿋꿋하게 투쟁을 지켜온 것도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주요한 근거가 되었지만 이와 함께 지역의 노동자․학생들을 포함한 전국적인 차원에서 운동세력의 끊임없는 결합과 지원이야말로 직접적인 투쟁주체들로 하여금 끝까지 투쟁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한 주요한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사회운동세력들이 에바다 투쟁에 어떤 경로를 통해 결합하였으며, 그들이 에바다 투쟁에서 가졌던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들을 진행해 보고자 한다.
(1) 에바다 투쟁의 확장
투쟁은 처음 농아학생들의 비리재단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온갖 비리와 폭력으로 얼룩진 비리재단의 퇴진을 요구하는 농아학생들의 농성이 96년 11월26일 시작된 이래 뜻있는 교사들이 이에 동참하였고, 에바다에서의 비리와 인권유린 사례들이 전국적으로 폭로되면서 곧 장애인권 운동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들과 지역의 운동세력들이 결합하였다. 이들은 97년 8월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과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발족시키고 이를 통해 에바다 투쟁에 결합했고 대학생들은 투쟁시작 후 1년여만인 97년 12월 ‘전국 에바다 대학생 연대회의’-이하 대학생 연대회의-를 발족시켜 이 단위를 통해 공대위에 결합하게 된다.
이후 에바다 투쟁이 천일을 맞기 전까지 투쟁은 공대위를 통해 주도되었다. 공대위에는 투쟁을 처음 시작한 농아학생, 교사들과 같은 직접적인 투쟁주체들과 민주노총 평택지구협의회와 평택 민주노동자회를 비롯한 지역 노동운동단체, 쌍용, 기아, 만도를 비롯한 지역의 크고 작은 사업장의 현장조직들이 함께 참여하였고, 대학생들 역시 대학생 연대회의를 통해 공대위에 결합하였다. 그 외에도 공대위에는 통일, 의료, 복지, 인권 등 지역의 각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에바다 투쟁이 천일을 넘기면서 에바다 투쟁은 다시 확장된다. 천일을 기점으로 1999년 7월15일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가 전국적 차원에서 결성되고 여기에는 인권단체들과 장애인 운동단체들, 그리고 전교조 특수교육위원회 등이 중심으로 참여하였다.
에바다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대위, 연대회의 등을 통해 투쟁에 결합한 지역의 노동자, 학생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은 나름대로의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에 기초해 투쟁을 진행해 나갔다. 투쟁에 필요한 동력의 창출은 공대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공대위를 통해 함께 하던 민주노총 평택지구협의회와 각 현장 조직을 통해 에바다가 지역의 수많은 현장에 전파되었고, 대학생 연대회의는 학생운동의 각 단위들에 에바다 문제를 선전하고 투쟁에 결합할 것을 촉구하였다.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법률적 문제를 비롯한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산 인권센터와 같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교조를 통한 투쟁의 선전과 조직화도 이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처음 투쟁을 시작했던 농아학생들과 교사들도 활발히 움직였다. 그들은 결코 외곽에서의 에바다에 대한 지원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역의 각 투쟁현장을 활발히 돌아다니면서 함께 연대하고, 연대하는 과정에서 다시 에바다의 상황을 선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바다 투쟁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활발한 투쟁의 확장은 2002년을 넘어서면서 고비에 직면하게 된다. 99년 국회의원 이성재가 관선이사로 파견된 이후 이사진 개편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이 투쟁의 결과 2001년부터는 공대위 추천 인사들이 점차 이사회에 적을 올리게 되고 2002년에는 완전히 절대다수를 장악하게 된다. 이는 분명한 투쟁의 성과였으나 이는 동시에 승리에 대한 속단으로 이어지면서 투쟁의 전술적 흐름을 지나치게 이사회 중심으로 치우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또 이와 함께 투쟁이 5년을 넘어 장기화 되면서 투쟁에 결합하는 각 단위의 집중력 역시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2002년 7월15일 농아원 진입 투쟁 당시 순간적으로 투쟁의 흐름이 살아나는 듯 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에바다 투쟁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한편에서는 ‘이사회를 장악했으면 다 승리한 것 아니냐’ 라는 승리에 대한 속단과 한편에서는 ‘6년을 싸워 이사회까지 장악했지만 결국 해결되지 않는다’ 라는 낙담이 교차하면서 전체 투쟁전선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많은 단체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이사회에서 새로 임명한 에바다 장애인 종합 복지관 관장 직무대행의 독단으로 인한 문제가 겹치면서 투쟁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2) 고비를 넘어 승리로.
① 문제의 해결
고비는 오래 가지 않았다. 2002년 당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투쟁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공대위 또는 연대회의의 논의 체계 중심으로 갈 것인가? 또는 이사회 중심으로 할 것인가? 둘째, 점차 떨어져가는 에바다 투쟁에의 집중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셋째, 투쟁에 문제가 되고 있는 복지관장 직무대행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에바다 투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투쟁이 장기화되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중간 중간에 성과들이 나오게 될 때 이런 문제들은 어느 투쟁 현장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에바다에서는 이런 문제를 할 수 있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으로 해소하였다고 자부한다.
에바다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주체들의 건강한 사고와 활동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그와 함께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와 논의 결과에 대한 공동책임이라는 기본 논의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와 그 결과에 대한 공동책임의 원칙이 지켜지면서 이는 투쟁에 결합하는 각 주체 상호간의 신뢰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상호간의 신뢰는 투쟁을 지속시키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이를 깨뜨리는 행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위의 문제들 중 첫번째와 세번째 문제는 민주적인 논의과정을 통해 해소하였다. 2002년 5월, 에바다 농아원에의 진입과 관련한 투쟁계획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첫번째 문제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논의는 역시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진행되었으며 논의 결과는 공대위와 연대회의 중심으로 전체 투쟁을 가져가고 이사회는 전체 투쟁 중 합법 전술을 구사하는데 있어 최종 승인과 집행을 담당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 논의 결과는 끝까지 유지되었다. 세번째 문제 역시 민주적 논의 과정을 기반으로 해소되었다. 사실 복지관장 직무대행의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공대위 추천 이사들이 이사회를 장악한 이후 처음으로 임명한 복지관장 직무대행이 복지관 직원은 물론이고 그동안 함께 투쟁해 왔던 동지들과도 불화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등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친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으나 논의하여 합의하면 일주일도 못 가서 복지관장 직무대행에 의해 번복되는 과정이 계속되었다. 결국 공대위와 연대회의, 그리고 에바다 이사회는 새로운 정식 관장 공채를 서두르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복지관장 직무대행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하지만 그의 반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랜 투쟁 과정에서 민주적인 논의와 공동책임이라는 원칙이 지켜오면서 확립된 투쟁주체들 상호간 신뢰관계가 공대위, 연대회의, 이사회의 결정에 밑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복지관장 직무대행을 추천했던 단위가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섰고 결국 2003년 3월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문제의 경우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장기화된 투쟁, 이사회를 장악하고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에바다 투쟁에 지치기도 하였거니와 김대중 정부 5년간 계속되어 온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인해 곳곳에 수많은 쟁점들이 일어나면서 에바다 투쟁에 대한 각 단위들의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져 갔다. 이러한 문제는 2002년 7월15일 진입투쟁을 경과하면서 잠시 해소되는 듯 하였다. 7월 진입투쟁을 통해 형성된 에바다 투쟁에의 집중을 유지하기 위해 공대위는 해아래집을 ‘투쟁상황실’로 설정하고, 서울에는 민중복지연대 사무실을 ‘서울상황실’로 설정하여 투쟁에 대한 집중을 높여가고자 하였으나 이 방안은 채 한달도 유지되지 못했다. 다른 문제들은 점차 해결되어 갔지만 이 두 번째 문제는 진입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당초 4월말, 5월초로 상정했던 농아원 진입시도 역시 늦춰지고 있었다.
② 진입과 승리
이사회와 공대위의 문제는 민주적 논의과정을 통해 오래전에 정리되었다. 문제를 일으키던 복지관장 직무대행의 문제도 3월을 고비로 완전히 정리되었으며 공채를 통해 선임한 신임관장에 의해 복지관은 점차 정상을 되찾아 갔다. 그동안 농아원과 학교가 폐쇄되어 해아래집에서 수업과 행정업무를 진행하던 학교는 2003년 3월31일부터 복지관 3층을 임시학교로 선정하여 이전하면서 일차적으로 수업이 정상화 될 수 있었다.7) 학교 수업이 근 14개월만에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농아원을 불법점거하고 있던 최씨 일가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학교 수업을 정상화시키는 과정에서 과감하게 단행한 인사권의 발동으로 최씨 측에 충성을 바치던 교사들과 직원들도 점차 새로운 이사회와 운영진의 지시에 따르기 시작했고, 농아원에 아이들을 맡겨 놓았던 학부모들도 해아래집의 성장과 함께 아이들을 농아원에서 데려와 해아래집에 맡기기 시작했다. 최씨 일가의 고립과 함께 이탈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진입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농아원 내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 판단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되었던 두번째 문제, 즉 에바다 투쟁에 대한 각 단위의 집중이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을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17일 ‘4.20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 주간’을 맞아 기획한 에바다 문제 해결을 위한 민중행동의 날 행사가 있었고 이에 대한 집중도를 통해 실제 가능한 동력을 가늠해보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도 여의치 않았다. 진입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에바다 문제해결을 위한 대통령께 편지쓰기 운동을 진행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다시 끌어보자는 계산 아래 진입은 5월말-6월초로 연기되었다. 만약 이번에 시도될 진입투쟁이 어설프게 끝난다면 우리 역시 일정정도의 타격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최종 결정은 5월말이 거의 닥쳐서야 이루어졌다. 평택경찰서장이 바뀌고 난 후 가진 경찰서장면담과 새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루어진 청와대 면담이후에야 진입결정이 이루어졌다. 경찰이 최소한 이사들에 대한 신변보호는 하지 않겠느냐는 어렴풋한 판단 속에 이사들이 법인 사무실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최소한의 목표치로 설정하고 진입 날짜는 5월28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진입은 성공하였고, 약 10여일에 걸친 투쟁 끝에 최성창을 비롯한 최씨 일가를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③ 진입투쟁 성공이 주는 시사점
진입 날짜를 결정한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힘이 얼마나 모일지는 의문이었다. 따라서 진입투쟁의 목표치도 최소치로 설정되었고, 대오 조직화 목표도 최소치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최대한 경찰과 협조하면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졌던 우려는 기우였다.
이미 2002년 진입투쟁을 전후하여 에바다 투쟁을 “경기 노동자의 힘”의 핵심사업으로 설정하였던 “노동자의 힘”은 진입 결정이후 평택지역을 비롯한 경기남부지역의 현장조직들을 통해 노동자 대오를 조직하였고, 그 외에도 그동안 에바다 투쟁에 함께 했던 지역의 각 단위도 나름대로 대오를 조직하였다. 이와 함께 인근의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대오가 조직되어, 총 50여명의 대오가 조직되었다. 진입 투쟁을 위한 50여명의 대오가 농아원 앞으로 올라오자 최씨 측에서는 농아원생들을 시켜 정문을 폐쇄했고, 경찰은 공대위가 약속을 어겼다면서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이 실무자들에게 항의를 하는 동안 진입대오는 정문을 열고 신속하게 진입하였으며 곧바로 법인 사무실로 향해 최성창을 끌어내고 법인 사무실을 장악하였다.
법인 사무실을 장악하고 내부를 안정시키는 동안 외부에서는 최성창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농아인들이 농아원 정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진입성공과 사수투쟁이 긴급히 요구된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지역의 노동자, 학생들이 추가로 집결하여 대치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약 10여일 동안 계속되는 대치국면 속에서 대중들, 특히 지역의 노동자들의 집중은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결국 ‘중립’을 표방하면서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흔들어대던 공권력을 강제해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진입의 계획에서 성공에 이르는 과정은 앞으로 상정될 수많은 쟁점들과 투쟁들에 대해 몇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투쟁을 계획하는데 있어 대중들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이로부터 나오는 패배주의에 대한 것이다. 투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얼마만큼의 대중들이 얼마만큼의 의지를 가지고 함께 할 것인가? 라는 의문으로 진입 투쟁에 대한 투쟁 지도부의 불안은 결국 기우였고, 투쟁이 시작되자 대중들은 ‘이번에는 해결한다’ 라는 의지로 투쟁에 결합하였고, 진행과정에서도 자발적인 대중들의 결합은 계속되었다. 결국 지도부의 소극적인 판단과는 정반대로 투쟁의 국면에서 폭발한 대중들의 역동성은 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투쟁을 계획하고 진행시킬 때 대중들에 대한 과신과 맹신 역시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가진 폭발적인 역동성에 대한 폄하나 속단으로 인해 패배주의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둘째, 정치조직이 갖는 현장성의 중요성이다. 이번 진입투쟁에서 다른 모든 단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적어도 진입과정과 이후의 대치와 사수 투쟁의 국면에서는 “노동자의 힘”이라는 정치조직이 그 힘을 발휘하였다. “노동자의 힘”은 많은 우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에바다 투쟁을 “경기 노동자의 힘”의 핵심사업으로 설정한 이후 에바다 투쟁에 꾸준히 결합해 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역시 대중들에 대한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현장성을 바탕으로 진입과 사수를 위한 동력을 창출해 냄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3. 에바다 투쟁이 주는 시사점과 과제
에바다 투쟁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에바다 투쟁은 앞서 중간 중간에 언급한 바와 같은 많은 시사점들과 함께 또한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이제는 결론을 대신하여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에바다가 주는 시사점
에바다는 여러가지 시사점을 준다. 먼저 전체 운동 또는 투쟁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을 살펴보면 첫째,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과정과 그에 대한 공동책임의 원칙이 가지는 중요성이다. 에바다 투쟁에서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2002년의 고비를 극복하기는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2002년에 에바다가 직면했던 고비는 사실 장기적인 투쟁의 현장이라면 어느 곳이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였다. 에바다에서는 이 문제들을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와 그 결과에 대한 공동책임을 관철시킴으로서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아래집의 운영 속에서 드러난 장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투쟁도 투쟁이지만 일상 속에서 민주적인 논의와 토론이 얼마나 중요하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투쟁에 있어 함께 할 대중들에 대한 섣부른 속단과 이에 근거한 패배주의는 근거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대중들에 대한 과신 역시 투쟁을 그르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에바다 투쟁에서는 대중들이 가진 역동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에바다에서도 평상시에 대중들이 투쟁에 결합하는 모습이 늘상 드러나지는 않았고, 그래서 투쟁의 지도부는 여러가지 우려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조직하고, 교육하느냐에 따라 대중들의 역동성은 일상적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분출되어 승리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에바다를 통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다음으로 장애운동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을 보면, 에바다 투쟁의 과정에서 생성된 해아래집과 그것의 발전과정은 장애운동의 지향이 어떠하여야 할 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에바다에서 장애인은 결코 주변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투쟁을 처음 시작한 주체였으며, 해아래집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훌륭하게 성장하면서 장애인들 역시 피동적으로 주변의 도움만을 바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장애운동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자립생활운동의 가능성을 일면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에바다 투쟁 이후의 과제
(1) 사회복지 현장의 변화로 연결시켜야 한다.
에바다에서 비리주범들이 쫓겨난 지금도 ‘복지=사랑, 봉사’ 라는 등식이 거머리처럼 남아 사회적으로 관철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사회복지 현장에서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복지의 권리 주체들에 대한 억압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3년 1월25일 서울경인지역 사회복지노동조합이 출범하여 사회복지현장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작년 10월 이후 계속되어 온 부천장애인 종합 복지관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체결을 위한 피눈물나는 투쟁도, 말도 안 되는 수녀회 재단의 횡포에 맞서 싸워오면서 재단 철수를 비롯해 많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에바다 투쟁의 승리는 이제 이러한 사회복지현장 투쟁과 함께 가야 한다. 물론 에바다 투쟁이 승리하였기에 당연히 모든 사회복지 현장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에바다 투쟁을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랑과 봉사’ 라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인지, 그리고 그 배후에 숨어 있는 사회복지 현장 지배자들의 실상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더욱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실질적인 복지와 삶의 질 향상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강제해 냄으로서 사회복지 노동자와 사회복지 권리자 모두가 그 추악한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투쟁함으로서 사회복지 현장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어야 한다.
(2) 장애인의 삶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에바다 투쟁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과 그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과 전망을 제시하였다. 에바다의 현재-구재단에 의해 만들어진-상태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살펴보면, 에바다 복지회 산하의 3개 시설 중 하나인 에바다 장애인 종합 복지관의 프로그램들은 장애아동들에 대한 ‘치료’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상-비정상의 구도 속에서 ‘정상’에 근접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 아이들이 학령기에 접어들면 부모들은 아이들을 일반학교(장애인들이 다니는 특수학교가 아닌)에 입학시키기 위해 -사회적 표준에 아이들을 맞추기 위해-눈물겨운 노력을 하지만 쉽지 않다.
에바다 학교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일반학교의 비장애 아동들과 접촉할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한다. 반대로 일반학교의 아이들도 비슷한 또래의 장애인들을 거의 접하지 못한다. 또 특수학급이 있는 일반학교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통합교육의 실현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사회적 표준’에 맞추기 위한 노력에 있어 비장애 아동들이라고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에바다 농아원은 이제 이런 장애인들을 아예 격리 수용한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농아원 직원들을 제외하고 비장애인들을 평생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 상호간에 그리고 직원과 장애인들간에는 상하간의 서열에 따른 폭력적 질서가 형성되고 이는 평생동안 장애인들을 구속한다.
이처럼 에바다 투쟁을 통해 ‘에바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애인의 삶은 이제 장애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또 에바다 투쟁을 통해 형성된 ‘해아래집’과 같은 장애인 생활 공동체는 장애인들 역시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들과 소통하며, 장애 여하에도(사회적 표준과는 무관하게) 불구하고 자립하여 생활할 수 있음을 다시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장애가 발생된 시점부터 계속되는 ‘표준’에의 접근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강요와 이에 실패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격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낙인이 되어 돌아오는 장애인의 삶의 단상을 에바다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다시 해아래집이라는 투쟁을 통해 형성된 장애인 생활 공동체는 앞서 언급된 장애인의 삶의 비참한 단상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요구하고 있다.
(3) 투쟁하는 대중들은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에바다 투쟁은 사회적 변화와 발전에 있어 대중들 스스로의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리와 인권유린의 주범, 그리고 그 비호세력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라는 대의 아래 지역의 노동자, 학생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형성된 대중적 연대 투쟁의 틀은 수년동안 지속되면서 에바다 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또한 에바다 농아원에의 진입 이후 약 10일간의 투쟁기간 동안 보여준 대중들의 역동적인 결합과 투쟁은 어정쩡한 태도로 ‘중립’을 외치며 정상화를 가로막고 있던 공권력을 강제해내면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자와 학생들 포함하는 대중들의 주체성이 현장, 또는 코 앞의 당면한 사안만을 넘어서 사회적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주요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바다는 이러한 대중들의 주체성과 역동성을 투쟁의 성과로서 적극적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이는 향후 복지회의 운영에 있어서도 투쟁에 결합했던 대중들에 기반하여 민주적이고 투명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중들이 바라는 사회복지의 모범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성과는 최근 들어 준비되고 있는 복지와 관련된 제 쟁점들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각 쟁점마다 성격이 다르고 이에 따라 투쟁의 핵심 주체가 달라질 수 있겠으나 적어도 ‘복지’를 쟁점으로 하는 투쟁에 있어 에바다와 같은 사회적 연대 전선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인식 속에서 더욱 적극적인 대중 투쟁을 조직함으로서 에바다 투쟁을 통해 대중들이 보여주었던 역동성이 다른 쟁점들에 대한 투쟁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에바다’라는 명칭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중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을 치료한 기적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예수가 ‘에바다’라고 외치자 청각 장애인의 귀가 열리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이때 에바다는 ‘열려라’ 라는 의미임)
2) 에바다 학교 교사동의 일반건축물대장을 확인해 보면, 이 건물이 학교가 아닌 ‘노유자 시설’로 인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건물 역시 농아원 소속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외 학교 급식소는 농아원 식당이고, 학교 기숙사는 농아원생들의 숙소를 겸해서 사용해 왔다. 에바다에서 법적으로 학교 소속의 시설은 없다.
3) 생활시설이라는 용어 자체도 사실 쓰여지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명칭부터가 ‘수용시설’이었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수용자’라는 호칭으로 불리었다.
4) 여기서 잠깐 언급하자면 사실 관선이사장이 처음 파견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사진은 완전히 최씨네 측근 일색이었고, 최씨네 측근 이사회는 그 일가와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을 추가하여 새로운 이사회를 구성하라는 보건복지부의 지시를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민주파 이사가 선임되고 종국에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는 재산을 둘러싼 최씨 측의 추악한 아귀다툼으로부터 제공되었다. 최성창의 동생 최성호의 부인인 양봉애는 혼란한 상황을 틈타 최성창과 최실자를 밀어내고 재단 운영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고 물리력을 동원해 최성창과 최실자를 농아원에서 쫓아내 버린다. 그리고 이에 분개한 최성창의 측근인 이사들이 양봉애를 견제하고자 당시 공대위 측에서 추천한 이사들을 받아들임으로서 에바다 복지회 이사회는 재편의 기회를 맞게 된다.
5) 지난 2002년 3월16일 새벽 00시를 조금 넘은 시각 양봉애의 지시를 받은 농아원생들이 양경수, 성정훈 등의 주도 하에 해아래집에 난입하여 해아래집 집기를 부수고 이성존, 이경훈 두 사람을 집단구타하여 피바다를 만든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후 최씨 일가는 지역사회에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6) 실제로 지난 2월 그동안 ‘중립’을 표방하던 경기도 교육청은 학교 수업이 해아래집과 학교 건물에서 양분되어 파행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에바다 학교에 대한 신입생 배정을 보류하였다. 이는 해아래집과 에바다 투쟁주체들에 대한 일종의 압력이었으나 학부모들과 지역 여론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2주일만에 철회하고야 말았다.
7) 물론 학교를 복지관으로 옮기는 문제는 쉽지 않았다. 학교 이전을 결정하기 전인 2003년 2월 경기도 교육청은 에바다 학교의 수업이 (학교와 해아래집에서)양분되어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로 신입생 배정을 보류하였다. 해아래집 학부모들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철회되기는 하였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교육청과의 마찰은 계속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복지관으로 학교를 이전하는 것에 대해 복지관 이용아동들의 학부모들이 강력히 반발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들과 해아래집 학부모, 교사, 복지관장, 그리고 에바다 투쟁에 핵심적으로 결합했던 주체들 거의 모두가 달라붙어 복지관 학부모들을 설득했고 그 결과 에바다 학교는 3월31일자로 정상 수업을 재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