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빈곤자살을 보며
정 미 진 / 편집위원
휘몰아치는 자살 광풍?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건들이
부쩍 늘었다. 지난 달에는 아이들 셋을 아파트 아래로 내던지고
엄마도 그 뒤를 따른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아서, 비슷한 사건이 잇따랐다. 은행 빚 부담에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택한 엄마, 아들의 카드 빚을 비관해서
농약을 마신 아버지, 채무관계를 비관하며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들이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자살’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한 달 내내 여러 자살 사건이 기사화됐다. 언론은 7월 17일 고층
아파트에서 자식들과 자신의 목숨을 버린 비정한(?) 엄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장의 죽음까지
뭉뚱그려서 ‘자살 증후군’을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빈곤자살이 올해 700명(전체 자살자 가운데 6.8%,
8월 12일 경찰청 발표 통계자료)에 이를 것이라는 통계자료를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살이 우리 사회에서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8월 6일자 조선일보는 ‘확산되는 자살 신드롬과 예방법’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자살의 동기는 실연의 고통,
가정․경제적 문제, 건강 문제 등으로 다양하다. 다양한
통계를 동원해서 어떤 나이 대의,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살하는 지까지 상세하게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아이와 엄마를 10여 층 아래로 떠민 생활고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같은 날 한국일보의 기사 제목은 “간밤엔 또 누가....
‘자살증후군’ 전염병처럼 확산”이다.
“…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장의
충격적인 투신자살이 온 나라를 뒤흔드는 가운데 실향민의
독극물 자살, 생계형 자살, 신병비관 자살 등이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들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다며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한국일보, 8월
6일).
위 기사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유형의 사건은 결과적으로 놓고 볼
때는 모두 같이 자살이다. 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버린 이유가
사회적인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자살과 생계형 자살을 같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생계형 빈곤자살과 일련의 자살들을 똑같이 자살증후군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기사는 이어서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비하하며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한다. 정부와 사회가 나서서 자살 방지책을
세우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지역단위의 자살예방기구가
필요하단다. 하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혹은 일을 해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들을
자살예방기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하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과거보다
전체 사회적으로 더 풍요로워진 현재의 사회에서는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귀에 익은
소리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00만원 조금 넘는 최저생계비로
4인 가족이 살아가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석 달 이상
전기세를 내지 못해 전기가 끊긴 가정이 지난 4월에 서울에만
2만 가구에 이른다는 사실을, 서울시의 수도료 연체가구가 29만
가구나 된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봐야 하나? 제헌절에 목숨을
끊은 세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돈 1,2만 원도
수중에 없었다.
물론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해 오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로 인해 소외계층이 느끼는
소외감도 더 깊고 커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으로 설명되지 않는 절대적 빈곤층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의 존재는 외면한 채 상대적 박탈감만으로
빈곤자살을 설명하려드는 이 기사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 외에도 각 신문마다 자살증후군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정몽헌 회장 자살 ‘죽음의 바이러스’ 무차별 확산/초등생서
대기업 회장까지 자살 신드롬”(대한매일, 8월 5일), “번지는
자살 광풍…”(국민일보, 8월 5일), “늘어나는 자살-참을성
없는 사회 이판死판 안 된다.”(경향신문, 7월 30일).....
이 기사들은 모두 지난 한달 새 일어난 여러 자살 사건들을 모두
같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설명한다. 빈곤으로 인한 자살을
여러 사건들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최근 한달 새 빈곤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이 인내심이 없어서 혹은 우울증 때문에 목숨을
버린 듯이! 자살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사회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에도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생계고로 인한
자살도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관심과
정신병리학적 의료 지원으로 모두 예방할 수 있다는 듯이!
비정한 모정? 우리 사회의 가부장성?
연이은 자살 사건 중에 눈에 더 도드라지는 것은 아이들을
동반한 자살이다. 아이들을 고층 아파트 아래로 내던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론은 “엄마, 나 죽기 싫어”라는 아이의 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일부 여론 역시 이에 동조하는 듯 하다.
살기 힘들어 그런 거라면 자기만 죽으면 됐지, 왜 아무 죄 없는
아이들까지 내던지느냐고 모정의 비정함을 비난한다. 아이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비정한 모정이었을까? 아이를 껴안고 뛰어내려야
할만큼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당장
내일의 끼니도, 아픈 아이의 병원비도 없는 엄마가 아이들을
두고 세상을 버리는 것 역시 얼마나 힘든 일일 것인가?
어느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한 시민은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어떻게든 살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한다. 어떻게든
살 거라니? 우리 현실에서 가난 때문에 엄마가 자살하고 나서 이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야 할 지를 생각하면, 이 말 역시
“엄마, 나 죽기 싫어”라는 말만큼이나 끔찍하게 들린다.
동반 자살이 몇 차례 더 이어지자, 이제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성을 탓한다.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회
인식이 아이들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아이들 역시
엄연한 한 인간이기에 생사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아이들의 죽음은 타살이라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태껏 아이의 양육과 교육의 역할 대부분을 부모에게
떠넘겨왔던 우리 사회가 이런 비난을 할 자격이 있을까? 아이의
출생부터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우리 사회가 담당하는 몫은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초, 중등학교 공교육이 전부다. 초,
중등교육에서도 공교육 외의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고, 사회
극빈층은 이를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사교육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 초, 중등교육은 반쪽 짜리도 못 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아이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성인이 되어 갈수록
교육격차는 더욱 커진다.
한편에선 가난 때문에 굶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가도, 다른 한편에선 한번에 몇 천 만원 짜리 해외
체험 캠프에 참가한다. 서구 상류 문화를 체험해서 한국 사회의
신귀족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천만 원도 아낌없이
투자(?)한다(ꡔ한겨레 21ꡕ 2003년7월30일 제470호
특집 ‘죽음이 드리운 그늘진 동심’).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어떤 삶을 살게되느냐는 결정적으로 부모의 경제적 부와 지위에
달려 있다. 그 뒤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가 버티고 서
있다.
죽음을 부르는 자본주의
올해 계속되고 있는 불황이 연이은 자살을 부르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불황과 호황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불황을 담보하고 있다는 말이다. 날이 갈수록
불황의 시기는 늘어가고, 호황의 시기는 짧아져만 간다. 당연히
사회적 약자일수록 호황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불황의
늪에서는 더욱 빠져 나오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는 불황기가
아니라도 삶이 힘든 빈곤층을 보호할 만한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황기가 되면 그들은 삶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 거기서도 버티지 못할 때 그들은 죽음을
택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언론은 전체 자살 수치의 증가로
호들갑을 떨고 있다. 자살 바이러스? 자살 신드롬? 자살 광풍?
이런 용어들 속에 빈곤 자살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인내심이 없어서, 삶에 대한 애착이 없어서, 극심한 사회적 변화
때문에? 이런 사회․문화적 현상들로 지난 해 죽은 600명의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설명할 수 있나? 이 수치는 다름
아닌 지난해의 공식적 빈곤자살자의 수이다(8월 12일 경찰청
발표 통계자료).
자본주의가 죽음을 부르고 있다. 언론은 그 간단 명료한 사실을
억지로 포장하려 들고 있다. 아이까지 안고 죽음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게 하는 자본주의에 눈감으면서 엉뚱하게 비정한
모정을, 우리 사회의 가부장성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