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번/역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 이후의 80년(6)
제3부 사회주의의 위기의 주체적․내부적 요인
바만 아자드/ 사회주의 이론연구가
2. ‘발달한 사회주의’ 모델과 정치적 위기의 배경
여러 가지 결점―그 다수는 쏘비에트 사회의 당초의 후진성에 의한 것이었다―이 있었지만,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의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고, 그 결과 자본주의 경제에 비해서도 높은 성장률을 달성해 왔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현대적인 과학기술은, 비군사적인 산업에서는 성장하지 못했지만, 군사 부문에서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쏘련은 1957년에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의 사회주의적 잠재력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사회주의 사회는 단기간에 근로인민의 생활수준을 일찍이 유례가 없을 만큼 향상시키고, 불균형한 공업성장 모델의 결점의 대부분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진은, 선행한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결과도 남기고 있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전위당 쪽의 의식적이고 과학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후의 동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은 새로 발생한 문제들을 잘 제거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의 경제적 지침들을 계속 지킴으로써 경제위기를 악화시켜 버렸다. 나아가 당은 경제위기를 정치 무대로까지 가져가도록 조장하는 비현실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이렇게 잘못된 정치적 결정은 객관적인 요인(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논한다)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의 성과에 관한 한결같이 주관적인 과장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러한 주관주의적 정치방침의 징후를 최초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쏘련공산당 제21회 임시대회(1959년 1월 27~2월 5일)였다. ‘공산주의건설자대회’라고 불린 이 대회는 쏘련이 “긍지를 갖고” “인류에게 사회주의에의 길을 개척했다”고 말하면서, “사회주의의 승리에 기초하여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대단히 심각한 개조가 이루어진 결과” 쏘련은 “그 새로운 발전의 시기인 공산주의 사회 건설의 전개기(展開期)에 들어갔다”고 결론지었다. 그 결과 “공산주의의 고도 단계에서는” 서서히 “‘각자는 능력에 따라서, 각자는 욕구에 따라서’라고 하는 원칙이 실현될 것이다”라는 것이다.1)
이 초낙관적인 결론에 기초하여 대회는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을 계속할 필요성을 고집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이 모델의 상당히 많은 측면이 많은 분야에 걸쳐서 확대되었다. 모든 경제 영역에 걸친 임금의 평준화와 급격한 임금인상이 더욱 빠른 속도로 계속되고, 정부 지출을 개인 소비재의 생산 증대에 충당한다고 하는 정책이 가속도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경제성장률이, 특히 공업부문에서, 계속 떨어졌다.
‘공산주의 사회의 전면적 건설기’의 개시라는 선언은 당시 사회주의의 성장률과 자본주의 사회의 성장률을 비교하고, 그러한 성장이 세계적으로 사회주의와 쏘련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하는 전면적인 신뢰에 기초한 것이었다. 주관주의적인 방침이 생기게 된 근원은 이러한 피상적인 비교였다. 그 결과, 미리 정해진 장․단기 목표와의 관련 하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회주의의 성과와 결함에 관한 과학적인 평가가, 사회주의의 성과를 사회주의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을 리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성과와 비교하는 데에 기초하는 경쟁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러한 비교의 결과는 처음부터 명백했다.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의 성과에 관한 만족감이나 자만이나 과장,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잠재능력과 과학기술면에서의 성과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단계에 관한 쏘련공산당 제22회 대회(1961년 10월)의 결의는 당의 공식결의 속에 있는 그러한 주관주의적이고 낙관적인 경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제22회 대회는 제21회 대회 이후의 당 활동을 시인하고,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완전한 최후의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한 확신을 반복해서 서술하면서, 바야흐로 쏘련 사회가 발달한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가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의 길을 걷고 있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대회는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 새로운 (제3의) 당 강령을 승인하고, “당은 공산주의 건설이라는 과제의 수행에, 공산주의의 물질적․기술적 기반을 창출하는 데에서 중요한 단계인 7개년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당과 국민의 힘을 돌리도록 중앙위원회에 위임하였다.”2)
쏘비에트 사회가 공산주의 건설 단계에 들어가 있다는 새로운 포괄적인 견해의 채택은 명백히 쏘비에트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정치적․이론적․사상적인 귀결을 초래했다. 맑스가 ꡔ고타강령 비판ꡕ에서 설명한 것처럼, 공산주의 건설의 원칙과 필요조건은 사회주의 건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경제계획의 우선 사항, 당과 정부의 기구와 책임, 당과 계급의 관계, 정부와 쏘련 인민의 관계,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국제무대에서의 쏘련과 사회주의 진영의 역할과 기능 등 모든 것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경제계획의 우선 사항
경제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발달한 사회주의’ 모델은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과 동일한 원칙에 기초하고 있지만 ‘공산주의의 건설’ 단계를 선언함으로써 경제계획의 우선 사항에 심각한 변화가 생기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전의 모델에서는 (소비에 역점이 두어져 있긴 했지만) 생산의 증대가 경제계획의 첫 번째 목표로 되어 있었는데, 제22회 대회에서 채택된 신계획에서는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이 최우선 목표의 하나로 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순이 다음과 같이 개괄되어 있었다.
(가) 소매가격의 인하, 주민으로부터의 징세 폐지와 결합시켜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개인적 보수를 인상할 것, (나) 노동의 양과 질에 관계없이, 결국 무료로 사회성원의 욕구를 채우는 데에 할당되는 사회적 소비기금…을 확장할 것.3)
생산의 기술수준과 노동생산성의 수준이 이러한 계획의 물질적 조건을 채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거의 공산주의적인 수순을 채택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들이 야기되었다. 첫째로, 소비재가 질과 양 두 측면에서 모두 기존의 필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임금을 더욱 올리고 물가를 내린 결과 암시장이 더욱 성장하고 지하경제가 확대되었다. 둘째로, 일용품 소매가격의 인하는 소비재에 대한 정부 보조금의 증액, 즉 개인소비 영역에서의 정부지출의 증액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 소비 기금의 확장’이라고 하는 정부의 목표와는 명백히 모순되는 정책이었다. 셋째로, ‘주민으로부터의 징세 폐지’는 사람들의 가처분 소득을 다른 형태로 증액하는 것으로서 이는 첫 번째 문제를 더욱 조장한 데다가 정부의 세입을 격감시켰다. 정부는 평상시 개인의 소비행동양식을 감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세금을 이용해 왔는데, 세의 삭감은 이 영역에서의 정부의 지도력을 약화시켰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나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폐임금의 격차가 1920년대 수준 이상으로 평준화된 상황에서 ‘노동의 양과 질에 상관없이’ 전원에 대해서 ‘사회적 소비 기금의 확장’을 강조한 것은 사회적으로 유익한 노동의 양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인 복리를 누구에게나 보증하는 것이고, 따라서 생산의 증대를 향한 물질적 동기부여를 더욱 파괴하게 되었다.
이렇게 ‘공산주의 건설’의 개시를 선언함으로써 노동에 대해서 물질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구조 전체가 변질되고 약화돼 버렸다. 주체적이고 도덕적인 동기에 대한 신뢰라는 공산주의적인 방법이 노동에 대한 물질적인 동기부여라고 하는 사회주의적인 수법을 대체해 버렸다. 이는 쏘련 공산당 제22회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에도 명확히 반영되어 있다.
이데올로기 활동은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더욱더 강력한 요인으로 되어 있다. 사회성원의 의식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공산주의의 물질적․기술적 기초의 창설, 공산주의적 노동형태와 새로운 인간관계의 발전에서 그들의 창조적 적극성은 더욱 완전히 더욱 광범하게 발휘되…는 것이다.
당은, 현단계에서의 이데올로기 활동의 주요한 점은 높은 사상성과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적 태도라고 하는 정신으로 모든 노동자를 교육하고… 개성을 전면적으로, 조화롭게 발전시키고, 진정으로 풍족한 정신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
당은, 사회의 모든 성원 사이에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적 태도를 배양하는 것을 교육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사회의 복지를 증진하는 노동은 각자의 신성한 의무이다. …
공산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는 사회생활에서의 도덕적 원칙의 역할이 한층 높아지고, 도덕적 요인의 작용범위가 더욱더 광범해지며, 그에 따라서 사람들의 상호관계를 조정하는 행정상 조치의 의의가 줄어들어 간다. …
당은, 공산주의 건설자의 도덕적 규범은 다음과 같은 도덕상의 원칙들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 공산주의 사업에 대한 충성, 사회주의 조국 및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애정.
― 사회의 복지를 위한 양심적 노동 …
― 사회적 재산의 보호와 증대에 대한 각자의 배려.
― 사회적 의무에 대한 높은 자각, 사회적 이익의 침해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
― 집단주의와 동지적 상호원조. 즉, 각자는 모두를 위해서, 모두는 각자를 위해서라고 하는 원칙.
― 사람들 사이의 인도적 관계와 상호존중 …
― 사회생활 및 사생활에서의 성실성, 진실성, 도덕상의 순결, 솔직함, 그리고 양보. …
― 부정, 기생자 근성, 부정직, 출세주의, 탐욕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4)
이러한 도덕적 원칙―그것은 공산당원에 의해서 언제나 강조되어 온 것이지만―을 특히 당의 강령 속에 이렇게 정성 들여 포함시킨 것은 사회와 정부기관 속에 배금주의나 출세주의적 경향이 증대하여 그것과 대결할 필요가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의 우선과제가 물질적 동기부여라고 하는 사회주의적 원칙으로부터 주체적․도덕적 동기에 기초한 공산주의적 신뢰로 변화된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그 후의 전개가 보여준 것처럼, 얄궂게도 차츰 노동에 대한 무관심이나 나태한 태도나 기생성을 조장하고, 마침내는 경제성장의 정체를 야기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다시, 과학기술면에서의 낙후, 생산에서의 저품질이나 비효율, 제국주의에 의해서 강요된 냉전과 군비확장 경쟁에서의 거대한 지출, 그리고 쏘련에 부과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이라고 하는 과대한 국제적 책임이 더해지면, 그러한 주관주의적 정책이 사회주의 경제에 미친 파괴적 영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브레즈네프 시대와 결부되곤 하는 70년대의 이른바 ‘정체’의 10년간이라는 위기는 실제로는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발전단계에 관한 제22회 대회의 주관주의적인 평가의 직접적인 결과이고, 그에 대응하여 그 시기에 이루어진 사회주의 체제의 우선과제의 변경의 결과이기도 하다.
‘전체 인민의 국가’
쏘련에서 ‘공산주의 건설’의 개시가 선언됨으로써 사회의 정치적 상부구조에도 중대하고 심각한 변화가 생겼다. 이 문제는 국가의 성격과 역할, 나아가 다양한 사회계급, 특히 노동자계급과 국가의 관계에 관해서 결정적이었다.
제22회 대회(1961년)는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발전단계에 관한 새로운 평가에 기초하여 쏘비에트 국가의 성격을 ‘프롤레타리아 국가’로부터 ‘전체 인민의 국가’로 변경하고, 채택된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국내의 발전이라는 임무로부터는 쏘련에서 그 필요가 없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로서 태어난 국가는 오늘의 새로운 단계에서는 전체 인민의 국가, 전체 인민의 이익과 의지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변했다.5)
사회주의 국가의 성격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태도와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의 맹목적인 무효화는 사회의 현실에 합치하지 않는 추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전체 인민의 이익과 의지를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국가 규정은 쏘비에트 사회의 사회계급간의 객관적인 차이가 모두 소멸하고 쏘비에트 국가가 ‘전체적으로’ 동일한 계급적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에 기초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그러한 전제는 사회주의 사회에 계급과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사회주의 이론의 관점에서도 객관적․역사적 관점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론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맑스가 분명히 보여준 것처럼,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계급이 그 존재를 끝낼 수 없는 한, 사회주의 국가는 계급적 성격을 갖고,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에 대한 지도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쏘련 공산당 지도부가 이 사실을 완전히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강령 속에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되어 있었다. “노동자계급은 쏘비에트 사회의 가장 선진적인, 조직된 세력”이고, “공산주의의 전면적 건설기에도 지도적 역할을 한다.”6)
한편, 다양한 사회계급간의 역사적 차이는 사회주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계속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대회는,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의 중요한 요소로서 노동자․농민․지식인의 단결의 필요성을 올바르게 호소하고 있고, 이 단결이 사회주의의 성공을 위한 중요한 열쇠로 간주되고 있었다. 명백히 이들 계급의 이해가 일치되어 있었다면, 그들 계급간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 당의 투쟁의 주요한 무대의 하나로는 간주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생각해 보면, 특정 계급의 이해로부터 독립적인 ‘전체 인민의 국가’의 수립을 선언한 것이―그것은 명백히 사회주의의 이론적 원칙으로부터 일탈하고 현존하는 계급관계를 무시하는 개념이었다―단지 쏘련 공산당 지도부의 주관적인 이상주의의 결과였다고 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역으로, 이러한 오류의 실제의 근원은 관료, 테크노크라트 층이 성장하고 차츰 힘을 강화해온 데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관료, 테크노크라트 층은 특히 행정에 의한 경제관리가 쏘비에트 국가에 필요했던 ‘급속한 공업화’ 시대에 정부의 책임 있는 부서에 종사하고 있었다.
사실, 계급으로부터 독립적인 국가라고 하는 개념,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인 자립이라고 하는 개념은 스탈린의 사후 불과 수년 사이(1954~56년)에 말렌코프 등에 의해서 제출되고, 그것은 당내에 대립과 추방까지 불러왔다. 그러한 시기에 흐루시쵸프는 국가 관료층과 ‘테크노크라트의 반혁명’의 힘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고, 이러한 경향을 억제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계속 증대하는 국가 관료층은 제20회 대회 이후 권력욕을 넘어 물질적․경제적 동기까지 획득하여 국가에 대한 당의 지휘․관리에 차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제20회 대회는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을 위한 토의에 한정되고, 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추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을 오래 지속시키고, 국가 관료층의 성장에 비해서 당을 한층 더 약체화시키게 되었다. 일종의 잘못된 경제정책―그것은 ‘급속한 공업화’ 시대에서 비생산적인 경제활동으로 차츰 이끌고 있었다―이 국가 관료층 상부에 불법적인 수입과 특권을 가져다 주고, 정부 내에서 그러한 계층이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쏘련 공산당 제22회 대회의 결정들은 사회주의의 정치구조를 둘러싸고 국가 관료층의 견해가 우세해진 징후를 분명히 보여 준, 쏘련의 사회주의 발전과정에서의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게 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과 이데올로기 양자는 정치에 봉사하게 되었다. 이는 당과 국가의 관계의 역전(逆轉)이고, 사실상 국가가 당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지도부를 현저하게 약화시키고, 사회주의 사회의 모든 국면에서 국가 관료층의 이해와 견해가 아무 거리낌없이 지배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을 바꿔버린 결과는 중대하고도 결정적이었다. ‘모든 인민의 국가’는 계급간의 차이를 애매하게 만듦으로써 비프롤레타리아적인 세계관에 대한 면역을 잃고 더욱더 관료화로 기울어져가게 되었다. 노동자계급과 기타 근로계급의 이해는 차츰 국가 관료의 이해에 의해서 은폐되어 갔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형식적이고 관료적인 민주주의에 굴복했다.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는 관료층의 부패와 권력 및 직권의 남용이 광범위에 미치게 되었다. 물질적인 동기 부여가 없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창조성과 근면성이 사라지고, 나태와 자기만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과 정부의 경제계획을 지연시켜 사업계획의 완수를 방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예컨대, 현대적인 과학기술의 개발이나 그것을 널리 산업에 활용하는 계획 등을) 완전히 중단시켜 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 특히 미국이 그 경제력과 첨단기술 모두를 구사하여 냉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쏘련에 대한 반공선전을 강화하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의 이데올로기적인 방송이나 기타 매스컴을 사용하여 쏘련의 근로인민을 공격해대고 있던 시기의 일이었다. 이러한 내부적 및 외부적인 사정들이 서로 얽힌 결과, 쏘련의 근로인민은 차차 당과 국가로부터 이반하여 사회주의 사회에 정치적 위기가 발생할 소지가 준비되고 있었다.
‘전체 인민의 당’
관료층의 이해와 견해가 사회주의 정치기구에서 지배적이 된 결과, 당과 정부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이해와 견해가 당 자체 속에도 침투하여 전위당의 프롤레타리아적인 성격이나 구성도 약화되었다. 1961년의 제22회 대회에서 승인된 쏘련 공산당의 강령과 규약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고 쏘비에트 사회의 통일이 강화된 결과, 노동자의 당, 공산당은 쏘비에트 국민의 전위 대신에 전체 국민의 당으로 되고 …7)
대회는 당의 규약을 수정함으로써 ‘당원 자격의 기본적 기준’을 “공산주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이라고 정의했다.8) 그 결과 대회에서는 당의 노동자 계급적 성격이 침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원 자격에 관한 계급적 기준도 모두 제거되어 버렸다.
이는 새로운 타입의 노동자계급의 당에 의한 레닌주의의 사상적․조직적 원칙으로부터의 명백한 일탈이고, 최종적으로는 당을 무력화시켜 강화되고 있는 관료층이나 테크노크라트 층의 영향력에 대해서 굴복시키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쏘련 공산당 제23회 대회(1966년 3월 29일~4월 8일)는 “당 기관, 쏘비에트 기관, 경제 기관의 근거 없는 개조에서 범한 주관주의적 오류”9)를 바로잡고, 당 규약을 변경하여 당원 자격의 기준을 보다 엄격하게 했지만, 그러한 조치는 ‘전체 인민의 당’이라고 하는 당의 새로운 성격 규정을 파기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 했다. 이 규정은 1980년대 중반의 정치적 위기까지 지속되었다. 사실, 1977년 10월에 열린 쏘련의 제7회 최고쏘비에트(임시)회의는 ‘전체 인민의 국가’라고 하는 개념을 승인하고, 그것을 쏘련의 새로운 헌법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계급의 정당을 ‘전체 인민의 당’으로 바꾸고, “공산주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자면 누구에게나―즉, 계급적 기반이나 계급적 입장에 관계없이 사회에서 고용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게―대문을 엶으로써 출세주의적 정부 관료의 입당에 널리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실제로 제20회 대회(1956년)와 제22회 대회(1961년)까지의, 그리고 그 후의 당원 수의 급격한 증가는 노동자계급의 당에의 참가 증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국가 관료가 당에 우르르 밀려들어온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17회 대회(1934년)에서 제19회 대회(1952년)까지의 18년 간에는 당원 수의 증가는 400만 명(1934년의 190만 명에서 1952년의 600만 명으로)뿐이었는데, 당원 수는 1956년(제20회 대회)에는 680만 명, 1966년(제23회 대회)에는 1,170만 명,10) 1976년(제25회 대회)에는 1,570만 명11)으로 증가하고, 1986년(제27회 대회)까지는 1,900만 명 이상12)이나 되었다. 즉, 제20회 대회로부터 제27회 대회 사이에 1,300만 명 이상13)이 입당한 것인데, 1959년14)부터 1966년 사이에만도 400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의 당원 자격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급속한 당원의 증가가 당의 노동자 계급적인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오히려 당의 대열에 관료층이나 테크노크라트 층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1970년대 말 현재 노동자는 쏘련 전체 인구의 57%를 점하고 있었는데, 당원 전체에서 점하는 비율은 40%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전체 인구의 20%를 점하는 농민은 당원의 13%밖에 안 되었다.15) 한편, 같은 해에 전체 인구의 20%였던 지식인과 관료가 당원의 거의 반수를 점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당의 지도적 부서에서 점하는 비율은 전체 당원에서 점하는 비율보다도 훨씬 높았다. 쏘련 공산당 자신의 보고에 의하면, 1971년 초 현재 각 공화국 수준의 당의 중앙위원회 서기와 당의 주(州)나 도시․촌 위원회의 서기의 거의 전원이 고등교육기관의 졸업자로서, 엔지니어나 경제․기술 전문가, 농업 기술자 등이 반수 이상을 점하고 있었다.16) 이러한 사람들의 다수는 이데올로기상의 신념에서 입당한 것이 아니라―이데올로기상의 신념은 아무튼 사회 전체에 걸쳐서 장기간 침식되어 있었다―당원이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상의 특전과 정치상의 지도적 직책을 추구해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과 정부 사이의 기구상의 구별을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 당내에서 관료적 견해와 출세주의가 영향력을 강화하게 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당의 다수의 최고지도자 및 간부들은 정부의 직책에 취임하여 정치적인 책임을 지면서 국가 경제의 관리와 운영에도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그 기원을 스탈린 시대의 ‘급속한 공업화’ 모델로까지 소급할 수 있는데, 후르시초프 시대에는 국가 관료 대책이라는 캠페인이 선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더욱 확대되었다.
당과 국가의 융합은 입당하는 쪽이 이득이라는 물질적인 동기를 낳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차츰 당의 이해를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국가 관료의 이해에 결부시켜 갔다. 정치적․경제적인 실리주의가 창조성, 혁신적 정신, 장기적 발전 등을 서서히 배제해 갔다. 부단히 “현상을 폐지한다”고 하는 공산당원의 역사적인 사명은 “기존의 개인적인 특권을 유지한다”는 관료적 동기와 갈수록 모순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당의 지식인 사이에는 더욱 침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상황을 계속적으로 분석하여 문제 해결의 방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적인 능력을 차츰 현상을 찬미하고 국가 관료의 정책과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쓰게 되었다.
따라서 당은 한편에서는 당원과 사회의 근로인민의 사상적 훈련을 강화할 필요성을 올바르게 강조하면서도, 그 당 자체가 반대 방향으로, 즉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더욱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차츰 공허한 겉껍질로 변질되고, 그 내부에서는 기생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관료층이 성장하여 당의 활력과 생명력을 침식하고 있었다. 전위당은 그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져, 그것이 대표하고 있었던 계급으로부터 유리되어 갔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는 거대한 역사적인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정치적․경제적 위기 속에 끌어들어 가고 있었다.
1) 앞의 ꡔソ連邦共産黨史ꡕ, p. 1053.
2) 大月國民文庫, ꡔソ連邦共産黨史ꡕ(최신판=ꡔソ連共産黨史ꡕ 增補第4版, 모스크바 정치문헌출판소 1972년 판의번역) 제3분책, p. 931.
3) 쏘련공산당 강령 (1961년 10월 31일 쏘련공산당 제22회 대회에서 채택, ソビエト社會主義共和國連邦大使館廣報課刊 ꡔソ連共産黨第二二回大會ꡕ 弟1冊, p. 96.)
4) 같은 책, pp. 124-129.
5) 같은 책, p. 104.
6) 같은 곳.
7) 같은 책, p. 145.
8) 앞의 ꡔソ連共産黨史ꡕ(최신판), p. 941.
9) 같은 책, p. 965.
10) [일본어 역주] 같은 책, pp. 680 (제2분책), 843, 872, 960, 1,024.
11) History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Farsied., Tudeh Party of Iran Publications, 1979, pp. 542, 687, 719, 793, 852, 917.
12) [일본어 역주] ꡔソ連共産黨第27回大會への中央委員會政治報告ꡕ, ノ-ボスチ通信社, p. 148.
13) [일본어 역주] 열거되어 있는 숫자와 계산이 맞지 않지만(제19회~27회 대회 사이의 숫자로 생각된다), 원문대로 둔다.
14) [일본어 역주] 본문에는 언급이 없지만, 1959년(제21회 임시 당대회) 시점에서의 당원 수는 762만 2천 명이다(앞의 ꡔソ連共産黨史ꡕ(최신판), p. 923).
15) History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Farsied., Tudeh Party of Iran Publications, 1979, p. 823.
16) 같은 책, p. 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