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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들> 비판

현장에서 미래를  제93호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

퇴각할 것인가 아니면 전진할 것인가?
<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들> 비판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2003-11-26)



지난 11월 19일 열사대책위와 노조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총파업 투쟁 패배를 평가하면서 선진노동자의 과제로 “허튼소리 남발하기가 아니라 현장활동의 진지한 조직화를!” 제출했다. 이들의 주장은 곧바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선진노동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는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면 이들은 논리적으로 보아 선진노동자가 꽃병을 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리고 이제는 전선에서 퇴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은 현 시점에서 꼼꼼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히 하나의 정치분파의 목소리가 아니라 현시기 선진노동자들의 특정한 심리상태와 운동적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선진노동자들에게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퇴각할 것인가, 전진할 것인가?
우리는 이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현시기 선진노동자의 과제를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한다.

선진노동자는 꽃병을 버리고 퇴각해야 하는가?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11월 9일 전국 노동자대회 이후 대규모 구속과 검거작전으로 수십 명에 대한 구속․수배 조치가 떨어지는 등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에 대해 파시스트적 탄압과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고 있다면서 “적들의 추적을 물리치고 역량을 보존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로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선진노동자들은 가당치도 않을 총파업이니 노무현 정권 퇴진이니 하는 허튼소리를 집어치우고 투쟁전선으로부터 퇴각하여 “현장의 구체적인 현안들에 대한 일상적인 투쟁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관료들은 언제나 “현장 동력이 부재하다” “지금은 투쟁에 나설 때가 아니다” “국민 여론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면서 당면한 투쟁을 회피해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자칭 사회주의 노동자들이라는 이들 역시 보다 계급적이고 전투적인 수사로 덧칠했을 뿐 노조 상층관료들의 투쟁회피주의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당면한 상황에서는 혁명적인 대중파업을 전개할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노동자 대중의 내적인 힘과 같은 조건들이 성숙해있지 않으며, 계급의식적 선진노동자들이 이러한 투쟁들을 조직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들(노무현을 지지하는 노동자들, 즉 후진대중)은 선진노동자들과 진지한 토론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현실적으로 노조관료들의 투쟁회피주의를 정당화 해주며 선진노동자들의 시야를 전국적 쟁점과 정치적 사안으로부터 현장의 현안, 경제적 사안으로 돌리게 한다.
우리는 당면한 열사투쟁 전선에서 “현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지는 “현안투쟁과 결합시켜야 한다”는 주의주장을 계속해서 접해왔다. 그것은 내 현장도 조직하지 못하면서 무슨 총파업이냐, 무슨 파병반대냐 하는 식으로 선진노동자들의 분노와 정치행동을 전국전선으로부터 이탈시켜 단사 현장으로만 틀어막는 역할을 한다. 지도부의 투쟁회피에 대한 노동자들의 정당한 분노를 억누르고 너나 잘해 식의 책임 떠넘기기로 선진노동자들의 행동 범위를 제한한다. 그리하여 (미래 그 어느 날 도래할) “진정한 혁명적 대중파업”을 위해서 지금은 노동열사들이 줄을 잇고 분노한 노동대중이 꽃병을 만들고 있어도 선진노동자들은 “현장에 구체적인 현안들에 대한 일장적인 투쟁들을 조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결코 단사 현안으로만 조직되는 것도 아니며 전국적인 노동자투쟁이 반드시 경제투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현장으로부터” 혹은 “단사 현안으로부터” 식의 사고는 단사주의, 실리주의로 조합원대중의 의식과 행동을 제한하는 것이며, 따라서 선진노동자들은 그러한 사고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오히려 현장은 전국적인 쟁점과 투쟁 그리고 정치적인 사안으로부터 계급적 의식과 전투적 행동의 필요성을 공급받을 때 피로감, 동력의 부재, 지도부의 통제 등을 뚫고 터져 나올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87년 6월 항쟁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었다는 것, 97년 총파업이 자본가 국회의 날치기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선진노동자는 없다. 다만 기회주의자들만이 역사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고 사시 눈을 뜨고 딴 곳을 쳐다볼 따름이다.
11월 9일 선진노동자들은 꽃병을 들지 말았어야 했는가? 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퇴각해 역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정보과 형사들 연말 보너스 높여주는 전술”을 피해 도망가는 전술을 구사해야 하는가? 아니다. 지금은 선진노동자들과 전투적인 대중이 다시 한번 꽃병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도망간 지도부를 대신해 가투선봉대를 만들어서 가투에 앞장서라는 것은 선진활동가만 다 죽으라는 말”이 아니다. 열사투쟁 전선을 사수하고 이끄는 것이 당면 선진노동자들의 임무일 수밖에 없으며, 그 투쟁의 전국적·계급적인 의의와 전투적인 기운을 현장으로 실어 나르고 그것을 가지고 현장을 재조직하는 것이 여전한 사활적인 과제이다. “지속적인 가두투쟁을 전개하기에는 정말로 역량이 너무나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이러한 임무와 과제를 부정 한다면, 그것은 전술적 기회주의로 굴러 떨어지는 길이다.

비타협적인 투쟁 그 자체가 훌륭한 폭로이자 선동이다
11월 9일 가두투쟁에 이은 12일 무기력한 총파업 이후의 현 상황을 “명백히 도망가야 할 상황”이라고 바라보는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인식에는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빠져있다. 대신에 “합법적인 투쟁, 평화적인 운동만을 고집하는 후진적인 대중, 반동적인 대중들에게 반동적인 제도와 제도화된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투쟁이 아니라 폭력적이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단호하게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어야 한다” “불법 폭력 투쟁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재 제기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끝내기 위해서는 국가기구를 타도하는 폭력혁명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명확히 설명되어야 한다”는 식의 선전주의에 빠져있다.
그러나 이들이 진정 알지 못하는 것은 11월 9일 가두시위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전국적 선동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노무현 부르조아 개혁주의를 폭로해야 한다고 연거푸 주장하지만, 이미 그 날 가투가 백 마디 선전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노무현 정권의 허구적 개혁성과 파쇼적 폭력성을 만천하에 까발렸다. 문제는 그것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그 속에서 투쟁의 방향과 전체 노동계급의 전술적 슬로건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열사들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것을 지켜본 대중의 오열 그리고 선진노동자들의 분노를 단일한 전선으로 집중시키고 그 힘으로 전국적인 노동자투쟁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진정 필요했으며 여전히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그에는 선진노동자들의 헌신과 투쟁 의지가 불가피하게 요청된다. 현 상황에서 법과 방패와 ‘불법필벌’을 앞세운 자본가정부의 탄압에 맞선 더욱 더 강고한 투쟁만이 전선에 합류하고 있지 않은 수많은 노동대중에 대한 최고의 선동이자 조직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11월 9일 노동자들의 가투시위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적들의 즉각적인 공안탄압과 선전포고에 위축된 민주노총이 12일 총파업 이후 소극적인 수요집회와 촛불시위로 물러선 것이다. 그와 함께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자들 또한 슬그머니 깃발을 내리고 뒷짐을 지게 되었다. 또 하나는 그 날 꽃병 시위에 이어 농민들의 죽창 시위, 부안주민들의 화염병 시위가 이어졌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평화적인 집회와 청원, 촛불 시위에 의존하던 민중투쟁이 급격하게 물리적인 반정부투쟁으로 전화하였다. 그런데 자본가정부와 언론은 노동자투쟁에 대해서는 장안동 보안수사대를 동원하면서까지 폭력시위 주도자를 색출하려고 눈에 핏발을 세우지만 농민과 부안주민 투쟁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자투쟁과 민중들의 투쟁이 연결되고 상호점화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에서는 “농민들과 부안군민들은 전투에 나서는데 왜 우리 노동자들은 소심하게 물러서는가”라는 불평이 터져나오고, 그와 함께 노동자대오 내부에서도 전선에서 퇴각하고 싶은 욕구와 준비되지 않은 가투에 대한 두려움이 일고 있다. 그러나 강위력한 노동자투쟁이 전체 투쟁에 도화선이 되고 있는 것이 정확히 현재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노동자들은 다시금 대열을 정비하고 현장을 재조직하고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투쟁들을 직조함으로써 제 민중들의 반정부투쟁을 선도하는 것에서 나아가 전위에서 끌고 나가기 위해 분투해야 하지 않는가? 11월 9일 노동자들의 선도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 자체가 전체 민중들의 투쟁을 가열하였다면 이제는 다시 그 열기가 전체 노동계급의 현장 곳곳으로 전달되고 스며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선진노동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정세적 상황에 눈감고 선진노동자를 농민이나 부안군민의 의식수준으로 깎아내림으로써 전체 노동대중과 민중의 전위로서의 선진노동자의 임무를 퇴색시키고 있다. 그들은 “남한의 노동자들은 이제 겨우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자유주의 부르조아들의 위선과 거짓과 기만과 배신에 대해서 깨달아가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다”면서 그것이 열사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로서는 선진 노동자들의 의식의 발전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명확히 틀렸다. 자유주의 부르조아와 노무현의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선진노동자들이 아니라 노동대중을 포함한 농민들과 부안군민들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진노동자들의 비타협적인 투쟁이 있었음을 부정해선 안된다.
90년대 중반 IS(국제사회주의자)는 민주노총 60만 조합원이 선진노동자라고 하면서 그에 조응하여 사회주의자들은 서울 시장 선거에서 조순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2003년 자칭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1,400만 노동자들의 90% 이상이 노조도 없고 민주주의나 공화주의가 뭔지도 모른 채 후진적이고 반동적인 상태에 있다고 하면서 선진노동자들은 이제야 노무현에 대한 환상을 거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 상황에서 선진노동자들의 분노와 투쟁 의지를 꺾는 반계급적인 행위이다. 왜냐하면 열사들의 죽음은 노무현에 대한 투쟁을 선전선동하고 조직하고 있던 선진노동자들의 전투적 행동에 불을 지핀 ‘도화선’이었지 노무현에 대한 환상을 깨는 쇼크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 정세에서 선진노동자들을 노무현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가 열사들의 죽음에 쇼크받아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노동자들로 보는 것은 선진노동자들에 대한 모욕이며 폄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정세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무시하고 딴지걸기 함으로써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족하는 종파주의적 태도이다. 선진노동자들 자신의 독자적이고 과감한 행동을 부정하는 한편 대중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타협해야 한다고 노조관료들과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간, 자신들은 대중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선진노동자들로부터는 외면당하고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있다는 것을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사회주의 노동자’는 결코 자신을 선진노동자와 애써 구분하려 들거나 따로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선진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면서 전진한다.
그렇다면 현 시기 누가 선진노동자인가? 열사투쟁 전선에 선봉에 나선 이가 바로 선진노동자다. 4만 노동자 대오의 선두에서 꽃병과 파이를 움켜쥐고 싸웠던 이들이 이 투쟁을 사수하고 지도할 수 있는 또 그래야 하는 주체들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는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수많은 노동대중이 노동계급이다. 사회주의자의 임무는 (저들 사회주의 노동자들처럼) 혁명정당 건설을 이유로 선진노동자들을 전선에서 이탈(퇴각)할 것을 종용하는 아니라 강고하게 전선을 사수하고 그 속에서 계급적 대의와 노동대중의 미래를 책임지는 주체로 스스로 성장하고 단련하는 길에 함께 투쟁하는 것이어야 한다. 혁명정당 건설은 정세와 무관하게 현장에서의 일상적인 작업과 선전으로써 가능하지 않다. 전국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계급적인 대안 그리고 결코 물러서지 않겠는 투쟁결의와 행동의 결집을 통해서만 비로소 천 오백만 노동대중의 지도자이자 계급적 전위는 창출되는 것이다.
열사들의 선혈로 얼룩진 바리케이트, 여기서 퇴각할 것인가 아니면 전진할 것인가? 지금의 정세는 선진노동자들에게 두 가지 중 하나의 길을 가라고 한다. 저 멀리서 그리고 가슴 한 켠에서는 “일단 물러서자” “다음을 기약하자” “내 한 몸, 내 현장이라도 추스르자”라는 메아리가 단소 소리처럼 퍼진다. 선진노동자들은 그러한 후퇴적 경향과 심리를 과감히 떨쳐내야 한다. 지금은 꼬리를 말고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자’를 가장한 온갖 투쟁회피주의, 선전주의적 대기론을 척결하고서 스스로를 재무장하고 대중을 재조직하여 투쟁전선으로 집결해야 할 때이다. 그 속에서만 다음의 발걸음과 투쟁의 방향이 우리를 환히 비추어줄 것이다.

2003-1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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