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투쟁의 연속으로서 2004년,
그러나 다른 정치적 결과를 위하여
최 경 희/ 연구위원
2004년 벽두부터 세상은 시끄럽다.
이러한 시끄러움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더 시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시끄러움, 진정한
싸움이 드러날 때까지...
그것이 무엇일까?
돌아보는 2003년: 노무현 정권의 실체
2003년은 어떠한 해였는가? 지난 2003년은 다른 어느 해보다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중심으로 계급투쟁이 격렬하게 드러난 한
해였다. 기대와 환상이 깨지고 노골적이고 의도적인 이 사회의,
이 정권의 본질이 드러난 해였던 것이다.
2003년은 노무현 정부의 ‘참여민주주의’라는 환상의 서곡으로
시작되었다. 이 환상의 물질성은 있었다. 2002년은 한국사회에서
간헐적이든 주기적이든 민중적 열망이 시민적으로 드러난
해였다고 볼 수 있다. 월드컵-촛불시위-대선으로 이어진
대중적 열기는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한 기대로 모아졌고, 그러한
사회적 기대를 노무현 대선 캠프가 틀어쥐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과감히도 ‘참여정부’라는 것을 모토로 잡았다. 김영삼
정부의 ‘문민정부’, 김대중 정부의 ‘국민의 정부’와
비교해서 얼마나 과감한 모토인가!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가 아니라
배제적인 신자유주의 정부라는 사실이다. 최근 FTA 법안 통과를
위해 국회를 직접 방문하는 노무현의 행보에서 이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권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주었으며, 이러한
현실은 참여정부라는 모토와 본질적으로 위배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 후에 ‘공공요금’이 오른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정책이 아닌가? 심각한 가정경제 파탄, 신용불량자
급증, 삶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만연해 있는 현실
앞에 정부는 공공요금을 인상한다고 한다. 민중의 삶이 붕괴되는
이 지경에 공공요금을 올린다는 것은 분명 무슨 의도가 있을
것이다. 혹 요금인상에 대한 국민의 반발심을 공기업의
비효율성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대체시키면서, 이후 공기업
민영화가 사회적 대의라는 틀을 형성하기 위한 과정은 아닌가.
너무 지나친 논리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현 정부의 어떠한
정책도 도탄에 빠져있는 민중을 보호하려하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확히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민중적
반노동자적이고, 배제적인 신자유주의 정부이다.
환상의 파괴 그러나...
그렇다. 그 환상은 오래갈 수 없었다. ‘자주외교’를 외쳤던
후보시절 노무현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겠다던 후보시절 노무현도, ‘국민이 대통령입니다’고
말했던 후보시절 노무현도, 모두 환상임이 드러났다.
철도노동자에게 공권력 침투, 핵폐기장 반대 투쟁하는 부안
민중에게 공권력 투입, 손배가압류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 공권력 투입,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농민에게
공권력을 과감하게 발휘하면서 노무현 정부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민중에게 정권의 본질을 각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2003년을 이어 2004년에도 신자유주의 정권과 노동자, 농민,
민중의 결렬한 계급투쟁은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투쟁이
노동자, 농민, 민중의 정치적 승리로 진전될 수 있을 것인가?
2003년 계급투쟁의 장과 이슈가 2004년에도 진전되고 발전된
양태로 외화될 것인가? 그러나 2003년 계급투쟁의 진전은 다시
‘다시’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국민중운동사 속에서 나타난
반복적 패턴에 대한 단상인 것이다. 1987년 고양된 민중운동은
1987년 대선을 통해 승화되었는가 단절되었는가, 1990~91년
고양된 민중운동은 1992년 대선을 통해 승화되었는가
단절되었는가, 그리고 최근 1996~97년 총파업 정국에 이은
1997년 대선은 그러한 민중투쟁을 고양시켰는가 아니면
단절시켰는가? 대선 또는 총선과 같은 정치일정과 민중운동의
고양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러한가? 그 원인을 찾는 연구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묻고
싶다. 과연 2004년 총선은 2003년의 민중투쟁을 고양 또는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투쟁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2004년 ‘역전의 위험’ 속에 도사리고 있다. 2003년을 통해
드러난 각 영역의 계급투쟁의 진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단지 소망이나 바램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그 싸움들이 진전되고 확장되고 드러나게 될 때까지 소중한
생명들의 희생과 살아있는 이들의 피와 땀과 노력들을 통해서
이루어낸 것들이다. 한번 소강된 국면은 다시 이끌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현재, ‘역전의 위험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2004년 벽두부터 2004년 4월 15일 총선을 종착점으로
‘정치개혁’이라는 화두로 정치적 이슈가 재편되면서, 진전된
계급투쟁의 장 또는 쟁점들이 가리워지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정치개혁이라는 이슈로 환상의 재현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안타깝게도 ‘죽어가는 노무현 정부’의
환상을 재생산시키고 있다. 소위 ‘시대적’ 또는
‘역사적’이라는 거창한 형용사를 덧 붙힌 ‘정치개혁’이라는
화두로 정치적 이슈가 재편되고 있으며, 그 정치개혁의 주체는
노무현과 그 지지세력인 ‘열린 우리당’이자 새롭게 정치사회에
진입하려고 하는 ‘민주노동당’이고, 정치개혁의 대상은
지역주의 정치인, 부패한 정치인의 온상인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보수 세력의 심판이라는 대립구도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개혁’의 화두는 많은 도시 중산층과
서민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즉, 이 썩은 정치인들, 부패한
정치인들, 지역주의 정치인들이 나가주면 일자리도 생기고, 먹고
살만한 좀 살맛나는 세상이 오려나하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기대를 ‘정치개혁’이라는 화두로 응집시켜가면서
도시중간층을 젊은 유권자들을 선거정치로 집결시키고 있다.
‘정치개혁’이 일반 국민에게 소중한 열망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대선기간 동안 기업의 정치자금 액수와
조달방식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고, 최근 부패한 정치인들이
연일 구속되는 상황, SK와 대우건설의 비자금 파동 등 정치와
경제의 비리구조에서 풍겨나는 썩은 냄새는 우리를 너무
참담하게 한다. 그래서 정치개혁을 바라는 맘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의 주시할 것은 정치개혁의 일차적 이득은
기존 정치인들과 새롭게 진입하려고 하는 정치인들의 몫인
것이다. 물론 새롭게 진입하려고 하는 정치인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 따라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차적으로 정치개혁은 정치가들의
이해득실에 따른다. 정치엘리트들의 경쟁에 국한된 문제이다.
일단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국한된 틀 내에서 파악해 보았을
때에도, 대표 받는 이들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대표되어야 할 내용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누가 대표 받아 괜찮은 사람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대표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즉, 대표되어야
할 내용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시되고 있고, 등안시
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정치개혁의 논의는 또한 그들만의
것이자 허상이다.
총선이 노동자 민중의 것이 되려면
선거를 계급투쟁의 연장으로 사고해라, 실천해라라고 주문하기도
하고 주문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판단들과 상황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정치개혁’이라는 화두로 지금까지 진전된 계급투쟁의 이슈를
역전시킬 필요가 없다. 정치개혁의 화두는 그들의 것 ―
정치사회 안과 밖에 있는 정당과 시민단체들 ― 으로 남겨두고,
노동자, 농민, 민중은 정치개혁을 넘어서 계급적 정치적 이슈를
제기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첫째, 먼저 본질적으로 말해서 2003년의 계급투쟁의
직접적 원인이 ‘지역주의, 고비용 부패정치’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반대 미제국주의 반제투쟁, 전교조의
NEIS 저지투쟁, 민주노총의 비정규직․노동악법 철폐투쟁,
농민의 FTA 반대투쟁에서 나타난 것은 대내외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일관적으로 주도, 집행해 가는
정부의 의도와 방향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이 지금의 의회를 구성하는 썩어빠진 정치인들의
존재자체로부터 기인하지는 않는다. 혹자는 신자유주의 정권과
노동자, 농민, 민중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이렇게 심화된 것은
정부와 국민을 조절할 국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호도한다. 과연
정치인, 국회의원 물갈이가 된 17대 국회에서 노무현 정부의
본질적인 정책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지, 아니 본질적이
아니어도 좋다. 국회 내에서 그 방향을 훼손시키거나 수정시킬
수 있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정치개혁’을 통해
‘열린우리당’이 제1당이 된다면, 노무현 정부는 기사회생하여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며, 2003년 동안 노동자, 농민, 민중
투쟁으로 고삐를 걸어놓았던 이슈들을 쉽게 처리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소위 정치개혁이라는 값비싼 과정을
통과해서 노동자, 농민, 민중에게 다시 불어 닥칠 신자유주의
개혁바람의 그 섬뜩함으로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묻고 싶다. 17대 국회에서 ‘국회보안법’ 폐지될 수 있을까?
17대 국회에서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창출정책’이 가능할 수 있을까? 17대 국회에서 FTA 비준안이
전면수정 또는 폐지될 수 있을까?
둘째, 그렇다고 부패한 정치인들이 국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결코 ‘지역주의, 고비용 부패정치구조’가 지속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자, 농민, 민중의 정치개혁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주의, 부패정치’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개혁’은 정치사회 안과 밖에 존재하는 그들의
일차적인 몫으로 남겨놓으면 된다. 현재 기존 보수 4당들은 모두
‘정치개혁’을 화두로 제 밥 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그래야만 그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의 수준에서
정치개혁을 통해서 얻는 이득은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싸워왔던 노동자, 농민, 민중은 정치개혁이라는 이슈를
넘어 노동자, 농민, 민중의 삶의 이슈들 ― 지금까지 싸워왔던
요구했던 ― 을 좀 더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진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2004년 더 시끄러워져야 하는 이유이고,
2003년 동안 첨예하게 싸웠던 계급적 이슈들을 갖고 2004년을
내달려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이 선거과정에서도 형성될 때만이 17대 국회에
속지 않을 것이고, 끌려다지니 않을 길이다. 노동자, 농민,
민중이 직접적인 정치주체로서 아직 형성되지 못하는 현
단계이지만, 그렇다고 노동자, 농민, 민중이 대의정치 아래
존재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노동자, 농민, 민중이
대의정치 위에 존재하고 있을 때에만 차기 17대 국회가 국민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일 것이다. 2003년의 계급투쟁은
정부와 국회를 긴장시켰다. 2004년의 계급투쟁은 정부와 국회를
노동자, 농민, 민중의 관점과 이익으로 견인해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2004년에 완성되지 않을지라도.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