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증후군’을 경계하고, 계급적 관점을 견지하자
채 만 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소장
다시 선거철이구나! 신문이나 TV 등 전통적인 매체에서
인터넷까지, 청와대․검찰에서 시민운동․여성운동
단체들까지, 아니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노동운동 단체나
‘진보정당’들까지, 그리고 수구․보수로 지탄받는
‘조․중․동’에서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신문․잡지들까지 모두가 요란스럽게
‘정치혁명’․‘정치개혁’․‘시민혁명’을
떠들어대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렇게 떠들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야 저들의 자유이고 정말 못
말리는 장기(長技)지만, 듣고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점은 확인․경계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저들의 소란은 말하자면
‘조두(새대가리)증후군’이라고나 해야 할 불치병증의 발로라는
점이다.
저들은 정격유착을, 부정부패를, 썩은 정치인을, 무능한
정치인을 지탄․규탄하면서 ‘물갈이’를 주장하는 데에
열을 올린다. ‘정치 발전’과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위해서
‘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말이다(그 자부심 뒤에
옹골찬 야심을 숨기고 있는 자들도 물론 한 둘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들의 병증은 지난 번 선거 때도, 그 지난 번 선거
때도, 또 그 지지난 번 선거 때도 … 아니, 사실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선거가 역사에 등장한 이후 내내 ― 다름 아니라,
선거란 바로 그러한 것이니까 ― 자신들이 그렇게 ‘운동’하고,
그리하여 ‘물갈이’를 해댔지만, 그 물은 매번 다시 악취가
진동하는 썩은 진흙탕물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매번 같은 소동을 벌인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낙선운동’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어서 만든 16대
국회나 ‘수구․보수’에 대항하여
‘평화․개혁세력’이라고 뽑아놓은 노무현 정권이 그 동안
어떤 짓을 해 왔고 오늘날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서도
저들은 오늘날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소동의 객관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다. 혹은 그 의미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바로
저들의 병증을 불치의 ‘조두증후군’으로 진단하는
이유이다.
어쩌면 저들의 두뇌가 정말 새대가리 마냥 너무나 작아서
부르주아 정치란 그렇게 썩고 부정부패하고 무능할 수밖에
없도록 저주받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지금도 그런 덜 떨어진 자들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이 사회에서 말께나 한다는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그들 중의 적지 않은 자들이 영국이나 미국의
정치풍토․정치관행을 ‘깨끗하고 유능한 정치,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치켜세우곤 했다. 그런데,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그렇게 모범으로까지 거론되는,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고장인 영국이나 미국에서 오죽하면
‘정치가’(politician)라는 호칭이 모욕하는 말로 통할까?
(statesman이라는 위선적인 호칭도 있지만 말이다.)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것은 사적․계급적
이해․거래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하여 계급적 분열과
대립을 은폐하면서 대중을 매수해야 하기 때문에 무릇 썩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 부패하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지만, 저들의 저 백치 같은
‘조두증후군’의 발작이 사실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강화해 가는 유력한 수단의 하나가 된다는
점이다.
저들이 ‘정치혁명’․‘정치개혁’․‘시민혁명’을
요란스럽게 떠들 때, 사회는 온통 저들의 그러한 몰계급적인,
아니 실제로는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의제․담론으로
뒤덮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유지․강화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금
‘정치혁명’․‘정치개혁’․‘시민혁명’을
떠들어대는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판에 끼어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고 있는 일부 ‘노동운동’
단체들이나 ‘진보정당’을 빼놓고는, 모두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적인 의제․담론과 부르주아적인
그것이 첨예하게 대립․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고, 그리하여 가능한 한 노동자계급적인
의제․담론을 배제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른바
수구․보수 이데올로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이라는 매체, ‘진보적’이라는 시민운동 단체들도
사실은 그렇다. 그리하여 저들의 ‘조두증후군’도 사실 많은
측면에서는 그렇게 정치적․사회적 의제를 선점하려는
계급적 본능에서 발작하곤 하는 것이다. ― 따라서, 모름지기
‘조두증후군’을 경계하고 계급적 관점을 견지할 일이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노동자계급의 사회과학이,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정치․지배를
분석․비판할 때, 그것은 방법론상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그러니까 부패하거나 무능하지 않은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지배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렇게 해야만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지배의
본질적 의의와 작용․영향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지배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부패․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적 착취를 유지․강화하는
억압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부르주아 선거란 바로
그러한 억압기구를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헤게모니적으로, 즉
착취․억압받는 대중, 노동자계급 자신의 동의 하에
재생산하는 기구이다.
노동자들이 이 점을 망각할 때 그들은 몰주체적으로 되어 으레
‘정치혁명’․‘정치개혁’․‘시민혁명’ 등의
부르주아 헤게모니 강화에 동원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계급적 의제는 망각하게 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그 깃발에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써넣고 있는 ‘진보정당’들 역시 부르주아
정치․지배의, 나아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성격을
폭로하는 노동자계급적 의제나 담론을 견지하기보다는
‘정치혁명’이니 ‘정치개혁’하는 시민적 의제․담론에
더 많은 정력을 투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사회의 지배적
정치의식, 즉 부르주아적 정치의식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는
대중에의 명백한 추수로서, ‘선거정당’으로서의
‘진보정당’의 한계의 발로일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조두증후군’을 경계하고 계급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선거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덧붙여서
말하자면 ‘조두증후군’은 지금 노동운동 내부에서
‘노동자계급과 그 운동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도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일부에서 ‘노정 협상’이니 ‘협상과 투쟁’이니 하는 갖은
요설을 다 동원하여 주장하고 있는 노사정위원회 재참여론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말 새대가리가 아니라면, 노사정위원회의
경험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상황 타개는 언제나 올바른 정치방침과 대중의
역동성 속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