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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과 대통령의 명실상반한 ‘일자리 만들기 최우선정책’

현장에서 미래를  제95호
채만수


특별기획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과
대통령의 명실상반한 ‘일자리 만들기 최우선정책’


채 만 수/ 소장





미리 일러두기
이 글의 대부분 내용은 이미 ‘디지털말’(www.digitalmal.com) 및 ‘진보넷 참세상방송국’(cast.jinbo.net)에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해서” 및 “명실상반한 ‘일자리 만들기 최우선정책’”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표현상의 약간의 수정과 보안을 통해서 그 두 글을 억지로 하나의 형태로 묶은 것이다.
참고로,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해서”가 쓰여진 후에 보도된,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의 보고서 “정규직 노동자의 보호 수준에 관한 국제비교”(2004. 1. 12.) 및 김기환(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 전 KDI원장)의 컬럼 “일자리 늘리기 전에 해야 할 일”(󰡔조선일보󰡕, 2004. 1. 31.) 등에 대한 비판이 주로 추가되었다.


1.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과 지식인들
보도에 의하면,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것이 최근의 경제적 상황 및 동향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주요 인식의 하나인 것 같다. 예컨대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나서서 “올해 우리 경제는 5%를 넘어 6%대 성장도 가능할지 모르나 이와 관계없이 일자리가 지난해에 이어 줄거나, 늘더라도 크게 늘지 못하는 ‘고용 없는 성장’이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우리 경제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하는 등, 지식인들이나 정책 관계자들의 이에 관한 발언이 잦아지고 있다.
그 자체 과연 과학적인 개념 및 통계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의문이지만 아무튼 부르주아 경제학의 주요 성장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에 대략 3% 정도 성장한 것으로 추측되는 데에 반해서 일자리는 지난 1년 동안 3만 개가 사라진 것으로 나타난 것이 새해 벽두부터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통계청의 고용 관련 통계는 2003년의 연평균 취업자 수는 2,213만9천 명으로서 2002년의 2,216만9천 명에 비해서 약 3만 명 혹은 0.1%의 감소를 기록하고, 실업자 수는 2002년 70만8천 명에서 2003년엔 77만7천 명으로 약 6만9천 명 혹은 9.7%의 증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통계는 물론 기술적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비정규직 등 고용의 각종 형태상의, 혹은 그 질의 악화, 따라서 상대적 과잉인구의 진정한 실상은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은 물론 국내에서의 논의만이 아니고 미국이나 일본, 유럽 등 자본주의 주요 국가에서의 공통적인 논의인데, 이들 역시 모두 최근의 경기 및 고용상의 변화를 반영한 것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주지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오래 전부터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고, 이러한 불황 기조는 자칫 1930년대 대공황과 유사하거나 그보다도 더욱 심각한 위기로 빠져들지 모른다고 하는 전망이 제시되어 왔다. 따라서 그것이 고용을 수반한 것이든 아니든, 과연 저들 일부의 예측 혹은 소망처럼 한국 경제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의미가 있을 만큼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현재 예측하기 힘들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정말 ‘고용 없는 성장’을 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간단히 살펴보고 싶다.
다만,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노동자들에게 굴종을 강요하기 위해서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이 ‘고용 없는 성장’이란 현상과 논의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몇 가지 예를 보자.


[예 1 : 동아일보의 김순덕 논설위원]
1월 1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김순덕 논설위원의 “‘앙꼬’ 없는 찐빵 먹는 법”이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바로 “‘고용 없는 성장’의 잔인함”에 관한 얘기이다.
이런 저런 너스레를 늘어놓으면서 “고용 없는 성장이라니, … 마치 앙꼬 없는 찐빵처럼 앙꼬만 빼먹은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가뜩이나 고픈 배가 아파지기까지 하는 고약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며, 억지 비유를 들어 그 ‘잔인함’을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정말 잔인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자신의 논법과 주장이다. 여러 구역질나는 너스레 중에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고용 없는 성장’을 더욱 조장하고자 하는 주장들을 써 갈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리 내 나라지만 과연 이 땅에 투자할 가치가 있느냐다. 내가 제조업체 사장이래도 중국보다 임금은 열 배, 공장 지을 땅값은 40배가 넘는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국가경쟁력은 날로 떨어지는 마당에 서비스업이라도 살리려면 개방을 해야 하는데도 의료는 의사가, 교육은 교육자가 완강히 막는 형편이다.” 운운.

결국 ‘국가경쟁력’을 위해서 임금을 삭감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개방 정책을 강화하라는, 즉 ‘고용 없는 성장’을 촉진하라는 주문이다.
우선 그가 “내가 제조업체 사장이래도 중국보다 임금은 열 배 … 가 넘는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할 때, 그는 그러한 임금의 차이가 사실은 주로 명목적인 것이고, 또 실질적인 부분조차도 사실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 간의 경제․사회․문화적 조건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명백히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인하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직한 방법으로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글 어디에도 물론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초래되는 근본적인 원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 자본주의적 과잉생산과 경쟁 격화의 역사적 의미 등에 관한 비판적인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비판적인 언급은커녕, 들은 풍월은 있어서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근로자 쥐어짜기가 경영합리화로 인정되면서, 고용감소 특히 제조업부문의 고용감소는 구조적 산업변화에 따른 영구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서도, 그리하여 “고용 없는 성장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이라는, 철저히 전도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에 따른 노동자들의 고통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광범한 현상이라는 점이 “위안”이라는 전도된 의식을 말이다.
그러니,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중요한 건 줄어든 만큼 새로운 분야에서 일자리가 나오느냐인데 이는 어떤 능력을 지닌 정부를 만나는가에 달린 운수문제가 됐다”고 말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 발언 역시 그의 전도된, 혹은 자가당착적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바로 앞에서 ‘고용 없는 성장’의 원인을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근로자 쥐어짜기가 경영합리화로 인정되면서” 발생하는 “고용감소” “특히” “구조적 산업변화에 따른 영구적 현상”으로서의 “제조업부문의 고용감소”라던 스스로의 진단을 슬그머니 ‘정부의 능력 여부’로 바꿔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발언은 사실은 자신들이 조장한 ‘박정희 신드롬’을, 그리하여 수구․보수 지향을 대중에게 은근히 선동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무현 정권 역시 어느 정권에 못지 않은 독점자본에 대한 철저한 봉사자이고 그 이해의 대변인이지만, 종파주의적 이해에 맹목적으로 되어 있는 저들 수구․보수 언론의 시각에서는 그 정권은 좌파적이고 무능해서 갈아치워야 할 대상으로 되어 있고, “어떤 능력을 지닌 정부를 만나는가에 달린 운수문제” 운운은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나오는, 역시 부정직한 선동 발언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정말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치졸한 숙명론과 그에의 굴종이다. 즉,

“개인이 선택할 길은 둘 중의 하나다. 내 한 몸이라도 스스로 앙꼬가 되어 나라의 입 하나를 덜어주는 동시에 앙꼬 없는 찐빵이라도 나눠먹을 것인지, 아니면 지난해처럼 남들 발목잡기로 앙꼬 없는 찐빵조차 아무도 못 먹게 만들 것인지.
앙꼬가 되는 방법으로는 누구도 못 따라 올 경쟁력을 갖추는 것과 입맛을 낮추는 두 가지가 있다. 잔인한 말이지만 [잔인한 줄은 아는군 : 인용자] (취업)될 사람은 되고, 할 사람은 벌써 하고 있다. 무능한 정부는 아직 안 되고 안 하는 사람의 고마운 핑계가 돼 줄 뿐이다.“

그러니, ‘이 무능하고 게으른 자들아, 너 자신을 원망하라!?’ 더 들어 보자.

“정부가 만들겠다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사실 근로자하기 불편한 환경임을 인정해야 할 때다. 비정규직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부르주아지의 능력 있는 개라는 증표로서의 : 인용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말마따나 임금 양극화 역시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다.
…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다 같이 못사는 사회를 만들 심사가 아니라면 밀가루 반죽에 재를 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니, ‘구구로 숙명으로 알고, 죽은 듯이 참고 살아라!?’
그러나 이 부르주아 지식인이 모르고 있는 것은, 노동자․민중이 싸움을 하는 것은 결코 ‘남의 발목잡기’도, ‘다 같이 못사는 사회를 만들 심사’도, ‘밀가루 반죽에 재를 뿌리는 것’도, 하물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노동자․민중으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를 나눠먹으며 호의호식하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그리하여 심히 심사가 뒤틀릴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이 아니다.
노동자․민중이 싸움을 하는 것은 바로 역사의 시곗바늘을 제대로 돌려서 착취․억압 없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다.


[예2 :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유경준 연구위원 등]
그런데 동아일보의 김순덕 논설위원은 그래도 아직 나은 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유경준 연구위원이나 그의 ‘보고서’라는 것을 아무런 비판적 문제의식 없이, 아니 ‘바로 이것이야말로 널리 선전해야 할 것’이라는 듯이 신문의 제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는 기자나 데스크에 이르면, 그들은 아예 정신분열증 환자 혹은 파렴치한이기를 작정하고 있다.
사실 나의 비판이 극언이기 때문에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선, 그러한 보도의 하나를 있는 그대로 보기로 하자.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27개국(아이슬란드 슬로바키아 룩셈부르크 제외) 가운데 여섯 번째로 정리해고가 어려운 것으로 조사됐다.
또 한국이 ‘고용 없는 성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요건 대폭 완화 △해고비용을 증대시키는 명예퇴직 관행 폐지 △부당해고시 경영자를 형사처벌하는 규정 폐지 등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11일 재정경제부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정규직 노동자의 보호 수준에 관한 국제비교’ 보고서에서 “OECD의 1999년 평가에서 한국은 27개국 중 25번째로 정리해고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해고수당(명예퇴직금) 등을 고려할 경우 순위가 급상승해 여섯 번째로 정리해고가 어려운 나라로 분류된다”며 이같이 밝혔다. 한국보다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기가 더 어려운 국가는 스웨덴 이탈리아 벨기에 체코 스위스 등 유럽의 일부 국가들뿐이다.
한국은 해고의 ‘정당한 이유’를 법원에서 지나치게 엄격히 판단, 정규직에 대한 통상적인 해고도 OECD 회원국들 중 아홉 번째로 어려운 것으로 평가됐다.
유 위원은 보고서에서 “정규직에 대한 지나친 보호는 비정규직의 비중을 증가시키고 실업자를 늘리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며 “세계 각 국이 국제적 경쟁격화와 경기침체 등에 대처하기 위해 정규직에 대한 보호를 완화하는 추세인 만큼 한국도 관련 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명예퇴직 관행 폐지 △정리해고시 사전통보일(현행 ‘60일 전’) 단축 △경영상의 해고사유 확대 △부당해고시 경영자 형사처벌 규정 삭제 △해고의 ‘정당한 사유’ 확대 등의 조치를 제시했다.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와 관련해서는 “정규직․비정규직간의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고 계약조건을 명확히 해 합리적 관행이 정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동윤 기자의 명의로 작성되고 “KDI, ‘해고요건 완화해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한국경제󰡕 2004년 1월 12일자의 머릿기사이다. 물론 󰡔한국경제󰡕뿐만 아니라 주요 일간신문이 모두 예컨대 “‘고용 없는 성장’구조 징후, 정리해고 어렵고 임금수준 높기 때문”(예진수․김병직 기자, 󰡔문화일보󰡕 2004. 1. 12.) 등의 제목으로 1면이나 경제면의 머릿기사로 보도하고 있다.
주장의 내용인즉, 한 마디로 “‘실업자를 늘리는 부작용을’ 없애거나 완화하기 위해서 자본에게 해고의 절대권한을 허(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상하게도 “△명예퇴직 관행 폐지 △정리해고시 사전통보일(현행 ‘60일 전’) 단축 △경영상의 해고사유 확대 △부당해고시 경영자 형사처벌 규정 삭제 △해고의 ‘정당한 사유’ 확대 등” 해고의 절대권한을 강화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해고를 확대하여 실업문제를 해결하자! ― 정신분열증 환자나 파렴치한이기를 작정하지 않고서야 가능한 얘기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신분열증적 혹은 파렴치를 극한 주장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이 오늘날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이다.
참고로 위 기사는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와 관련해서는 ‘정규직․비정규직간의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고 계약조건을 명확히 해 합리적 관행이 정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는 말로 끝나고 있다.
원 보고서와 그에 기초한 보도의 일관된 그리고 핵심적인 주장이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과보호’(!)를 걷어치우고 그들에 대한 절대적인 해고 권한을 자본에게 부여하라”는 것인 만큼, 그들이 말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라든가 “정규직․비정규직간의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고 계약조건을 명확히 해 합리적 관행이 정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름 아니라 그나마의 정규직의 노동조건을 비정규직의 그것 수준으로 끌어내려 ‘정규직․비정규직간의 부당한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임은 저절로 명백할 것이다.


[예3: 김기환 전 KDI 원장]
그런데 세상엔 으레 뛰는 자 위에는 나는 자가 있는 법이다. 이전에 KDI 원장이었던 석학 김기환 박사(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가 그렇게 날고 있다. 그는 󰡔조선일보󰡕 1월 31일자에 “일자리 늘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는 글을 기고하고 있는데, 필시 󰡔조선일보󰡕 편집 데스크에서 붙였을, 그 글의 중간 제목의 하나는 숫제 “노조 무서워 인력채용 꺼려”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 노사관계서 손떼야”이다. 그에 의하면,

하필 지금에 와서 우리 경제가 충분한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
… 근본원인은 한마디로 말해 특히 김대중 정부 때부터 노동시장을 계속 정치화시킨 데서 비롯된다. 예컨대, 임금은 노사(勞使) 당사자 간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건만,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 제3자인 정부의 개입을 가속화시켰다. 정부가 노사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자 당시 정부와 더 가까웠던 노조는 거의 모든 노사문제를 정부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했다.
노사관계가 정치화된 후 노조는 날이 갈수록 정부만 믿고 거의 모든 노사간 협상에 있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과격성을 보였다. 그러한 과격성은 노조가 엄연히 기존법을 어겼음에도 정부가 엄정한 법 집행을 외면하자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니 ‘노사정위원회를 해체하고, 정부는 노사관계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다.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해체하고, 노사관계에서 손을 떼라’는 주장만을 놓고 본다면, 올바른 계급적 관점을 견지하는 노동자들이라면 이야말로 환영해야 할 주장이다. 왜냐하면, ‘정부’로 표현되고 있는 국가야말로 자본에 의한 노도의 착취와 그 제도를 보장하는 억압장치이기 때문이고, 노사정위원회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상층부를 포섭하여 그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사정위원회가 설치될 당시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최장집 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지 않았던가!

노사정위원회는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노동의 동의를 구하려 만든, 제도적 개선을 위한 고안물이라 할 수 있어요.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노동자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을 초래하는 문제들을 노동의 동의를 얻어 관철시켜 사회적 저항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장치입니다. 물론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기능하는 한편, 노동이 중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이기도 했습니다만, 후자의 성격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자의 정책 참여 기구가 발전했습니다. 이를 두고 코포라티즘이라 하지요. 한국과의 차이점은 유럽의 경우 이들 기구들이 복지 정책을 주로 다뤘는데 반해 한국의 노사정위원회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기구였다는 점입니다.(한국노동사회연구회, 󰡔노동사회󰡕 제52권, 2001년 3월호)

그런데 김기환 박사가 노사정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하는 이유는 전혀 엉뚱하다. 즉, 정부가 노동자 편이고, 노사정위원회는 정부의 노동자 편향을 제도화하는 기구라는 것이다. 이는 우선, 앞에서 김순덕 논설위원의 시각과도 관련하여 언급했지만, 명백히 종파주의에 맹목적적으로 되어 사실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하고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등을 사시로 보고 있는 결과이다.
그가 노사정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하면서 “노사문제의 해결은 어디까지나 노사 당사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물론 복선이 있다. 즉, 해고 등 자본을 규율하는 그나마의 법률적 장치조차 철저히 제거하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IMF의 강력한 요구로 원칙적으로 정리해고가 채택되었다. 하지만 정리해고를 하기 전에 충족시켜야 할 조건들이 너무 까다롭다 보니 정리해고는 많은 경우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었다. 그 결과 모든 기업들은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기를 두려워했다.…(기업들은 정리해고하기 위해 새로운 인력을 채용한다? : 인용자)
정리해고 조건을 완화해야 한다. 예컨대 노조의 동의를 얻고 나서야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노조활동 전임자의 급여는 노조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충당해야 한다.
… 노사와 직접 관련 없는 기업활동에 대한 많은 규제들도 세계화시대에 걸맞게 줄이고, 규제체계도 정부나 법이 허용하는 기업활동 이외에는 모든 일을 금지하는 소위 ‘포지티브 시스템’에서, 정부나 법이 금지하는 활동 이외에는 모든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
만약 정부가 이 같은 건의를 무시하고 앞으로 노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뿐 아니라 시민단체까지 개입시키고,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들에 고용집약적인 경영을 요구한다면 머지않아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점점 더 북한을 닮아갈 것이다. 이어 불과 1~2세대 내에 전 한반도가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면에서 또 다시 중국의 한 변방(邊方)이 될 것이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올바른 접근방법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논의를 전개한다면서 사실은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들에 고용집약적인 경영을 요구한다면”, 즉 정부가 기업에게 일자리 창출을 요구한다면, 절대 안 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를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들에 고용집약적인 경영을 요구한다면 머지않아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점점 더 북한을 닮아갈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에, 조선인민공화국의 오늘날의 경제적 어려움의 최대의 원인은 인류역사상의 최강제국 미국의 장기간에 걸친 적대․봉쇄정책에 있다는 사실은 은폐한 채 그렇게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편, 김기환 박사가 ‘정부는 노사관계에서 손을 떼고’ “노사문제의 해결은 어디까지나 노사 당사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위와 같이 자본에 대한 일체의 규제 철폐를 요구하는 것일 뿐, 정말로 국가가 노사간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국가에 요구하는 것은 사실은 노동자들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 즉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하고 절대적인 폭력’이다. 그가 노사정위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도 그의 눈에는 정부가 ‘무자비하고 절대적인 폭력’ 대신에 ‘대화와 포섭’을 하려 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실 그는 구제불능의 정치적 백치증세를 드러내고 있다. 김대중이나 노무현 등 노련한 정치꾼들이 자신보다 몇 수나 위라는 것도, 자신이 소망하는 것과 같은 “엄정한 법 집행”, ‘무자비하고 절대적인 폭력’은 이내 혁명을, 체제 자체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어정뜬 예]
하기야 “자본의 이익이 곧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익”이라는 부르주아적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그리고 그러한 허위의식을 목적의식적으로 선전하면서,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보람이자 의무로 생각하는 일개 신문사 논설위원이나 KDI 연구원 등 부르주아 관변 지식인들이 그런 인식을 드러내고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명색이 노동자와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일한다는 분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시니 말이다.

70년대 오일쇼크에서 시작된 장기불황의 국면을 거치면서 이 체제내화된(길들여진) 노동운동에 대한 자본의 공세는 자본이 개발한 계급투쟁의 새로운 무기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구조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계발해간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신경영전략’이라고 이름지었던 온갖 것들―일본적 생산방식, 린 생산방식, 팀작업, JIT, 신노동문화, 신인사제도, 경영혁신 등등―이 이 시기에 자본이 개발한 새로운 계급투쟁의 물질적 기초라면, 소위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라 할 수 있다. 이제 자본은 불황이나 경제위기의 국면에서는 물론이고 호황의 국면에서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양보’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공세적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이제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받아들일 것을 노동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소위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변화가 배경이 되고 있었다.(임영일, “공황기의 한국 노동운동의 과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편, 󰡔연대와 실천󰡕 1998년 8월호, pp. 6~7.)

위 인용문의 요지와 주장은 명백히 이렇다.
“이제 자본은 (과학기술혁명을 통해서)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개발했기 때문에, “이제 자본은 불황이나 경제위기의 국면에서는 물론이고 호황의 국면에서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양보’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공세적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투쟁해 봤자 아무 일도 될 일이 없으므로 “노동이 양보”하여 타협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길을 가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는, 채만수 󰡔노동자교양경제학󰡕(제3판), 도서출판 현장에서미래를, 2003, p. 408 이하 참조.)


2. ‘고용 없는 성장’의 의의
그러면, 과연 ‘고용 없는 성장’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지속 가능한 것인가?
김 논설위원이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운운하고, 임 교수 역시 “새로운 생산방식” 운운하고 있지만, 실제로 ‘고용 없는 성장’, 혹은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이란 최근 수십 년간의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로 노동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그리하여 과거와 같은 숫자의 노동력으로, 혹은 그보다 훨씬 적은 노동력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고, 유통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가장 방어적인 통상수단인 자유무역협정(FTA)비준조차 불가능한 ‘불임(...)정치’에 뭘 기대하겠는가” 운운하면서 삼천포로 빠지는 글이지만, 여하튼 그러한 횡설수설식의 사고방식 덕에 한 부르주아 논설은 다음과 같은 예를 소개하고 있다.

‘2천6백 명 대 3백 명.’ 지난 97년 충남 대산단지의 현대석유화학은 2기 NCC(나프타분해공장)를 준공했다. 1,2기 공장의 생산능력이 연산 45만t(폴리에틸렌 기준)으로 같았지만 직원수는 1기가 2천6백 명인 데 반해 2기는 3백 명으로 충분했다. 관리인력 절감 덕도 있었지만 생산․제어기술 덕에 ‘사람’이 필요 없어진 때문이다. 벌써 7년 전 일이니 지금은 공장에서 더욱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오형규, “고용 없는 성장’의 두려움”, 󰡔한국경제󰡕, 2004. 1. 12.)

이렇게 현대의 과학기술혁명은 사실상 ‘무인생산’을 향해서 전개돼가고 있고, 또 실제로도 많은 부문에서 ‘무인생산’, 곧 ‘고용 없는 성장’을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용 없는 성장’이, 임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결코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지속 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상당히 어려운 경제학적인 분석과 설명이 필요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에 결론만을 말하자면, 가치는 인간노동만이 그것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치란 사회 속에서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생산수단을 포함한) 생활자료를 생산하는 그 인간노동의 교환관계․비율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기야, “자동화란 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이 정신노동으로까지 확대된 것”이고 “탈노동화, 탈인간화 형태로 진행되는 … 활동능력 자체를 가치화하는 것”이어서 “‘인간화된 기계’는 가치 내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이진경,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에 관하여”, 맑스코뮤날레 조직위원회 편 󰡔지구화 시대 맑스의 현재성󰡕 제1권, 문화과학사, 2003, pp. 474~485]는 역겨운 저질 코미디가 ‘맑스의 현재성’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으로 둔갑하는 세상이긴 하지만!)
따라서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로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한편에서는 생산물이 갈수록 무가치하게 생산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무상으로 분배되도록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사유재산제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생산수단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고 사회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 그리하여 그들은 자본에 ‘고용되어야만’ 노동할 수 있고 생활자료를 획득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갈수록 많은 다수가 ‘고용되지 못하게 된다’는 것, 즉 실업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우리 사회를 포함,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과연 지속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근로자하기 불편한 환경”이 아니라 ‘근로자들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대대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환경이 지속될 수 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의미 심장한 문제는 그렇게 자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고용 없는 성장’, 즉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이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내적 필연성으로 인해서 갈수록 가속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의 ‘고용 없는 성장’,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름 아니라, 갈수록 만연할 수밖에 없는 과잉생산, 그에 따라 갈수록 격렬해지는 경쟁이, 우리가 일상에서 절실히 경험하는 것처럼, 그것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거의 한계에 달하면서 오늘날의 사회문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격렬해지는 계급투쟁이 발생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도록 자극을 준 김순덕 논설위원 같은 분들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자본주의 자체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고, 그것도 이제 매장할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3. 명실상반한 ‘일자리 만들기 최우선정책’ 특별히 전거를 밝히지 않은 채 인용하고 있는 글귀들은 모두 <청와대 부리핑 2004> 제221호, 2004. 1. 14.에 실린 “2004년 신년 기자회견 모두연설문”에서 따온 것들이다. 다만, 우리말의 특성상 전후 문맥을 반영하여 조사 및 어미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

한편, 이렇게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문제의식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게 한편에서는 ‘사회불안’의 원인으로서의 두려움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계속 추구해야 할 방향으로서 떠오른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월 14일 ‘2004 신년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그 ‘모두연설문’을 통해서 “일자리야말로 최고의 복지”이고 “가장 효과적인 소득분배의 방안이기도” 하다며, “올해에는 일자리 만들기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고 말했다.
보수언론에 의해서까지 ‘말뿐’이며 경솔․경박하다고까지 혹독한 비판을 받는 그 동안의 그의 언행 때문에,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이라고 해서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이야, 구제불능의 이른바 ‘노빠들’ 말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담론으로까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최고권력자의 발언이다 보니, 그것도 ‘연설문’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청와대가 이날 회견의 ‘핵심’임을 자임하는(“회견연설문 나올 때까지”, <청와대 부리핑 2004> 제221호, 2004. 1. 14. 참조) 내용이다 보니, 장․단기간의 실업으로 말 그대로 생존권에 위협을 받아온 당사자들은 물론, 갈수록 심화돼 가는 대중의 빈곤화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고 싶은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일자리 만들기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는 그의 다짐은 기대할 만한 어떤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천명된 그의 정책이 만일 현실화된다면, 아니, 현실화되면 될수록, 일자리는 더욱 사라지고 실업문제, 불완전 취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회견에서 확인된, 일자리 문제와 관련한 그의 인식과 처방은 문제에 대한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진단과 이론에, 부르주아적 탐욕 때문에 논리적 정합성을 잃고 오로지 대중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현란하게 수식(修飾)된 기만적인 진단과 이론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독점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가일층 “흔들리지 않고” 강화해가겠다는 선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 구호 속에 은폐된 독점자본의 탐욕
“회견연설문 나올 때까지”라는 청와대측 자료에 의하면, “(1월) 7일 열린 1차 회견문 점검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국가기술혁신체제 구축 △지식산업 발전 △서비스산업의 개발 등 ‘일자리 창출 방안’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담을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실제의 연설문에서는 이 외에 ‘노사관계의 안정’이나 ‘임금인상 요구 자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의 완화, 그리고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 등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주요한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 노력을 지속해 …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며, 이 모든 방안을 관통하는 것은 이른바 ‘국가 경쟁력 강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안을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더욱 “흔들리지 않고” 가일층 강화해가겠다는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도’ 기업으로부터 은밀히 징수한 수십 억 정치자금 위에 정권이 서 있음이 명백한데도, 그리하여 악취가 진동하고 있는데도, ‘기업 경영의 투명성’ 운운하고 있는 천연덕스러움은 치지도외하고 넘어가자. 기만과 사술․협잡․투기로부터 자본을 구제하고, 숙명적인 부정부패, 금권정치로부터 부르주아 권력을 구제하려는 헛된 망상은 이른바 시민운동이나 부르주아 경제학자, 부르주아 정치학자들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어서 우리가 거기에 정색을 하고 대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제로 삼는 것은 말하자면 ‘정상적인’ 부르주아 경제에 관철되는 법칙이고, 그 위에 서 있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임금 문제]
뒷부분에서 열거된 임금 문제부터 살펴보면, 대통령은 먼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로자 여러분은 올 한 해만이라도 생산성 향상을 초과하는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년간 생산성 향상을 훨씬 웃도는 임금인상이 계속돼 왔습니다. 이런 상황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변국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임금인상이 계속되면’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칫 줄어들 수도 있다는 엄포일 것이다.
이른바 ‘생산성임금제론’에 입각한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러나 감히 말하자면, 경제학의, 사실은 문제의 성질상 논리학의 기초도 모르는 발언이다. 물론, 성질상 논리학의 기초 문제이기는 하지만, 양(量)을 다루는 경제학 이외의 과학에서는 이 문제가 특히 문제로 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책임은 필시 경제학의 문외한일 대통령에게보다는 그를 보좌하는 (소위) 경제학자들에게 있겠지만, 아무튼 경제학의, 그리고 논리학의 기본도 모르는 발언임에는 틀림이 없다.
생산성이란 일정한 투입노동량에 의한 생산량의 관계를 비교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지난해에는 일정 수의 노동자들이 일정 시간 노동하여 어떤 승용차를 월간 10만대를 생산했는데, 새로운 생산기술을 도입했다든가 기타의 어떤 이유 때문에 금년에는 같은 수의 노동자들이 같은 시간 노동하여 같은 자동차를 월간 12만대 생산한다면, 바로 생산성이 20% 상승한 것이다. 그런데, 이 12만대의 자동차의 가치․가격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지난해에 10만대를 생산했을 때와 전적으로 동일한 양의 노동시간이 들었기 때문에, 지난해의 10만대의 가치․가격과 동일하다. (여기에서는 물론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가치와 가격이 일치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필시 이러한 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가치론’이라며 기각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각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가치론’의 비과학성을 증명하고, 자신들의 독자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가치․가격론을 제시․입증해야 할 터인데, 사실은 그 어느 한쪽도 입증이 불가능하다.)
자본에게 있어서 이 생산성의 상승 혹은 증대가 중요한 이유, 즉 자본이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생산성 증대를 추구하는 까닭은 생산성이 증대하면 각 상품 1단위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그 증대율의 역수(逆數)만큼 줄어들어서 그만큼 가치․가격이 줄어들고, 따라서 그만큼 경쟁력이 높아지고, 시장의 가치․가격에 변함이 없다면 그만큼 초과이윤을 얻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는, 동일한 자동차가 금년엔 작년에 비해서 ‘12만분의 10만 = 6분의 5’의 가치․가격으로 생산되어, 그만큼 경쟁력이 있고, 시장가격이 작년과 동일하다면 그 차액만큼 초과이윤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이와 같은,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물적 생산성’ 외에 ‘가격생산성’이니, ‘부가가치생산성’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과학으로서의 부르주아 경제학의 파탄을 드러낼 뿐 어떤 의미도 가질 수가 없는 용어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은 그 ‘가격’, ‘부가가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역시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생산성이란 이렇게 투입노동량에 대한 생산량의 양을 비교하는 개념인데,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즉, 현대자동차에서는 예컨대 어떤 승용차를 생산하는 데에 그 이전 달에 비해서 지난 달에 생산성이 20% 증대했고, 삼성전자에서는 같은 기간에 어떤 컴퓨터를 생산하는 데에 30%의 생산성이 증대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양 부문을 함께 아우르면 평균 생산성은 얼마나 증대했을까?
25%?!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자.
갑돌이는 지난 한 해 동안에 키가 12cm 늘었고, 갑순이는 같은 기간에 몸무게가 6kg 늘었다. 그러면 갑돌이와 갑순이를 함께 아우르면, 두 사람은 같은 기간에 평균 얼마나 늘었을까? ‘(12cm + 6kg) ÷ 2 = 9cm’?!, 아니면 9kg?!
다들 아는 것처럼, 분명 아니다. 왜? 12cm와 6kg은 단위가 달라서 서로 비교하거나 평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지각 있는 성인이 위 질문에 9cm 혹은 9kg 늘었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그를 가리켜서 ‘바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바보스러운 짓이 경제학에 오면 소위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천연덕스럽게, 아니 과학자의 권위를 가지고 저질러진다. 위에 설정한 예의 경우 ‘생산성이 25% 증대했다’는 식의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현대자동차가 생산하는 자동차와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컴퓨터 간에는 가치․가격을 제외하면 어떤 공통의 단위도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 양적 관계를 비교하거나 평균할 수 없다. 또한, 생산성이 어떻게 변했든, 각각 동일한 양의 노동투입을 전제하고 있는 위의 예에서는 가치․가격은 같은 기간에 양쪽 모두 이전과 동일한 양씩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격에는 어떤 증감도 없다. 즉, 생산물이 달라지면, 이들 이종(異種) 생산물들을 아울러서 그 생산성의 증감을 하나로 통계화할 수 있는 어떤 과학적인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발언이 입각하고 있는 이른바 ‘생산성임금제론’은 그것이 마치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전제하여 그것을 과학의 이름으로 ‘통계화’(?)하고, 그리고 나서 임금 상승률과의 대소를 논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초과하는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해 주기 바란다”는 주문은 바로 그러한 가당치도 않은 이론 위에 선 주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정말 심각한 문제”로서 “이제는 우리 노동운동이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하고, 그리하여 이를 해소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과 해법은 철저히 전도된 것이고, 철저히 독점자본의 탐욕을 반영한 것이다.
대통령의 주장과는 반대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결코 “강력하고 잘 조직된 대규모 사업장 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주도해온”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근로조건이나 임금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대기업 노동조합이 … 스스로 절제하고 양보하는 결단을 보여주어야” “노동운동의 대의에도 맞는 길”이 아니다.
대기업 노동자들도 대부분 오늘날 빚에 시달리면서 그날그날의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고 있고, 그 자식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임금의 문제이지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독점자본의 탐욕을 반영하여 문제를 철저히 거꾸로 제기하면서 전반적인 저임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주장과는 반대로, “노동운동의 대의에도 맞는 길”은 최소한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나아가 실업 노동자가 보다 광범하고 보다 강력하게 스스로를 조직하여, 우리 사회에서 ‘생활임금’이라고 부르는, 자기 재생산에 부족함이 없는 임금을 쟁취하는 것이다.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고급 경제관료들, 그리고 대학의 경제학 교수나 신문․방송의 논설위원․기자 등, 한마디로 최근 박노자 교수가 아주 적절하게도 ‘학상배(學商輩)’라고 부른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 ‘고임금’을 질타․비판․개탄하는 자들이 즐비하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 주장의 비과학성은 차치하더라도,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임금․소득․생활을 자신들이 그토록 질타․비판․개탄해 마지않는 노동자들의 ‘고임금’ 수준으로 제한한다면, 나는 그들을 적어도 도덕적으로는 칭송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럴 위인들이 아니다. 천하의 집단이타주의자들이니까 말이다!


[‘노․사․정 대타협’의 신기원을 만들자?]
대통령은 “노사관계의 안정 없이는 경쟁력 강화도 일자리 창출도 어렵다”며, “올해를 ‘노․사․정 대타협’의 신기원을 이룩한 해로 만들어 보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화와 타협의 노사관계 정착에 주력하고 불법행동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응해 나가겠다”는 엄포를 잊지 않고 있다.
‘경쟁력 강화’가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보기로 하겠지만, 대통령은 도대체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이른바 ‘노사관계의 안정’, ‘대화와 타협’, ‘노․사․정 대타협’의 신기원을 이룩하려는 것일까? 위의 임금과 관련한 언급에서도 명확한 것처럼,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감수를 강요함으로써이고, ‘경쟁력 강화’니 “시장개혁 프로그램을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겠다”느니 하는 발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불완전 고용 등 노동조건의 악화를 감수할 것을 강요함으로써이며, “법과 원칙”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탄압을 가함으로써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일부 상층부를 매수함으로써이다.
“임금인상은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된다”는 등, 임금 문제가, 사실상 저임금을 강요하는 내용의 발언이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유난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연일까?
아니다. 자본의 이윤이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노동, 즉 부불노동․잉여노동에 불과해서 임금과 이윤은 배타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은 잉여노동을 둘러싸고 적대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관계는 결코 ‘안정’될 수 없고, ‘대타협’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외견상 그것이 ‘안정’․‘대타협’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다음의 경우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는, 대통령이 ‘기자회견 문답’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80년대 이전”처럼 “공권력이 다 해결해주고 탄압으로 다 해결할 수 있었던 노사관계”.
다른 하나는, 오늘날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운동 상층부의 매수와 그에 따른 노동운동의 상당 기간의, 그러나 잠정적인 무기력화.
그 동안에도 자본과 국가는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폭력과 매수를 적절히 구사해 왔지만, “올해를 ‘노․사․정 대타협’의 신기원을 이룩한 해로 만들어 보자”면서도 “불법행동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응해 나가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그러한 전술을 더욱 더 적극적으로 구사하겠다는 의지 천명에 다름 아니다. 특히 ‘매수’에 의한 어용화는 갈수록 심각한 문제여서, 이번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에서 그 영향력을 유감 없이 보여준 일부 어용노조의 움직임을 주목하면서 아래로부터 대중적 에너지를 조직․동원하여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노동운동 역시 다시 굴종과 침묵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 노력을 지속해 …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서, 한편으로는 독점자본에 대해 사실상 무제한한 착취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를 위해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계급의 경제적․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고 자본에 대해서는 갖은 지원을 국가가 제공․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가기는커녕, 고용․임금을 포함한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나아가 환경파괴 등 장기에 걸쳐 악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다.
“수도권은 … 규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풀어야 할 것은 과감히 풀면서 난개발과 환경오염은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고 머지않아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특히 김대중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그린벨트가 해제되고 수많은 곳의 토지 형질변경 등이 허용되는 등, ‘규제 완화’가 이루어지면서 수도권, 특히 서울 주변이 얼마나 난개발되고 그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가는 우리가 목격하는 대로이다.


기술혁신․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사실 대통령 스스로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처럼, 이날 발표한 “모든 정책의 초점” 혹은 “전략의 핵심”은 ‘기술혁신’이고, 그들 통한 ‘국가경쟁력의 강화’이다. 그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올해에는 국가기술혁신체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 정부와 기업, 대학과 연구소가 함께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인력 양성에 주력하고, 이를 통해 배출된 인력이 안정된 일자리에서 기술혁신과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는 정말 그의 말대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는 오히려 거꾸로 일자리를 축소하고,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을 조장하는 방안이다. 대통령의 회견에서 천명된 정책이 현실화되면 될수록 일자리는 더욱 사라지고 실업문제, 불완전 취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주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혁신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투자의 동기 등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대통령은 “투자를 일으키는 궁극적인 동력은 경쟁력이고, 경쟁력의 원천은 기술혁신과 인재양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경쟁력의 원천이 기술혁신인 것은 맞지만, “투자를 일으키는 궁극적인 동력이 경쟁력”인 것은 결코 아니다. “투자를 일으키는 궁극적인 동력” 혹은 동기는 이윤의 획득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사실 연설문 전체를 통해서 ‘이윤’을 ‘경쟁력’으로 슬그머니 바꿔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목적을 은폐하고 있다.
아무튼, 기술혁신은 바로 노동의 생산력을 높여서 상품을 값싸게 생산하여 값싸게 유통시키고, 그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 초과이윤을 획득하고자 추진된다. 그리고 현대자본주의에서는 과잉생산이 사실상 전반적․항상적으로 벌어지고 그에 따라 경쟁전이 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기술혁신은 자본의 생사를 건 문제로 되어 있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과학기술혁명이 가속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배경이다.
이 기술혁신․과학기술혁명은 물론 노동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키고 있는데, 적대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소비력을 제한하고 있다. 그 때문에 경쟁전은 다시 더욱 격렬해지면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 결과 기술혁신․과학기술혁명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사실상 전자동화된 무인생산을 향해서 나아가면서 오늘날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 곧 고용을 파괴하면서 이루어지는 과잉․대량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대통령이 천명하고 있는 기술혁신이란, 경쟁전에 사로잡혀 있는 독점자본의 경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것일 뿐, 일자리를 창출하기는커녕 그것을 파괴하는 길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예컨대 세계 최고의 기술력,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일본 자본주의가 벌써 10년 이상의 장기불황, 장기공황에 허덕이고 있고, 갈수록 그 실업문제가 심각해져 가고 있는 데에서도, 그리하여 ‘경제대국 일본’임을 자랑하던 나라에서 매년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실업과 생활고로 자살하고 있는 데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대통령이 ‘기술혁신’과 그를 통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 그의 악의의 표현이 아니다. 다만, 그와 국가가 자본의, 독점자본의 도구임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술혁신이나 과학기술혁명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책이기는커녕 그것을 파괴하는 길이라고 해서 그것을 저지하거나 회피․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저지하거나 회피․파괴하려든다면, 그것은 반동적인 것으로서 반드시 실패하도록 운명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기의 기계 파괴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술혁신․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이윤생산을 위한 독점자본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노동자․민중의 통제 하에 두고, 노동자․민중의 복리증진에 기여하도록 통제하여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전 세계의 노동자계급에게 주어져 있는 과제이다. 아주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이다.
세계의 노동자계급은 아직 그 과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크게 후퇴해 있고, 커다란 좌절과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제의 해결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은 이미 농숙해 있고, 따라서 그 해결이 지연될수록 인류의 고통과 재앙은 더욱 심각한 것으로 돼 가고 있다. 만성적이고 더욱 심화․격화돼 가는 과잉생산과 공황, 그리고 갈수록 광폭해져 가는 제국주의와 전쟁, 그 위협이 그것이다.


[곁다리]

자본의 탐욕이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지만, 추상적․도식적으로만 말한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틀 내에서도 악화돼가고 있는 일자리의 문제를 해결 혹은 완화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공유, 즉 노동시간의 대폭적인 단축이다.
생각해 보라. 한 사회에 필요한 물질적 생활자료의 생산에 필요한 총노동시간을 그 사회의 노동력 인구 수로 나누어서, 그 시간만큼씩만 노동한다면,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자리 만들기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는 대통령의 기자회견 연설문에는 그러한 방향으로의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왜일까?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이름으로 독점자본의 탐욕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은 이 ‘노동의 공유’ 혹은 ‘노동시간의 대폭적인 단축’을 일자리의 ‘비정규직화’로서 제시하고 추진하기도 한다. 정말 파렴치하고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한/노/정/연

2004-02-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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