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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계는 가능하다.하지만 그 세계는 사회주의밖에 없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97호
그리스 공산당

기/획/번/역


또 하나의 세계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세계는 사회주의밖엔 없다

― 네그리와 하트의 ꡔ제국ꡕ에 대한 그리스 공산당의 비판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최근 몇 년 동안 소위 ‘제국’론이라는 것이 나타나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 주장은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 관한 레닌의 역작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은, 이미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현실이 세계적으로 형성되었다면서 그 현실을 기술하고, 나아가 제국주의를 초월하여 제국주의를 대체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새 단계를 기술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본질적으로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낡은 이데올로기 개념의 반복이며, 그 근원은 현대 생산력의 본질에 관한 매우 잘못된 인식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

제국론에서 특히 특징적인 것은, 현대의 ‘정보경제’ ‘비물질적 노동’에 의한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둘러싼 사적소유라는 개념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노동자계급이 “거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네그리와 하트 ꡔ제국ꡕ) 결과 오늘날의 경제적 현실은 “생산되고 소비되는 물질적인 대상에 의해서 보다도 공동으로 생산하는 서비스나 관계에 의해 정의되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러한 잘못된 평가의 논거로서, 이들 이론은, 소위 ‘제국’이라는 것은 “단일한 지배논리 하에 통합된 일련의 국가적(네셔널) 혹은 초국가적(수퍼네셔널)인 조직체로 이루어진” “글로벌한 주권형태”라고 기술하고 있다. “권력의 영토상의 중심”이 없고 충돌이나 대립도 없는 통치이고, 국민국가의 권력과 역할은 축소되고, 혹은 완전히 폐절되고 거기에서는 “제국주의적 전쟁, 제국주의 국가간의 전쟁, 반제국주의적 전쟁, 이와 같은 전쟁의 역사는 이미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제국’이라는 개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와 무관하게, 세계적인 진전에 대한 그들의 부분적 내지 보다 전체적인 입장, 그 견해의 전체는, 세계의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운동 내부에, 운동은 이미 전략이나 전술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한 인식을 용인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제국주의라는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현실에 대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왜곡하고 있으며, 계급의 적들 앞에서 운동을 마비시키고 무장해제시키고 있다. 그들은 혁명적 전위, 즉 공산주의당들의 필요성 대신에 소위 ‘멀티튜드’1)에 의한 자연발생적인 폭발성을 들고 나온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견해와 이데올로기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대세계에서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이 여전히 시의적절함을 분명히 하고, 제국주의의 역사적 상황에 의하여 규정된 공산주의 운동의 책무 중 근본을 이루는 정치적 요구를 운동의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 - 오늘날의 자본주의 발전의 현실

레닌은 그 독창적인 저작 ꡔ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로서의 제국주의ꡕ(제국주의론)에서, 자본주의의 독점 이전의 단계에서 독점단계, 즉 제국주의로의 이행을 규정하는 법칙에 대하여 상세하게 연구하였다. 그는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 특징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최고의, 최후의 단계로서의 그 역사적 위치 형성 ― 그 역사적 계속은 사회주의에 의한 혁명적인 폐절을 도래시키는 것 ― 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의 현실은 레닌의 저작에서 기술된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 특징과 완전히 합치하고 있다.

레닌의 시대 이후 생산과 자본의 집중은 비약적으로 진행되었다. 독점, 특히 다부문을 지배하는 독점이 국내시장과 세계시장에서 한층 결정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오늘날 그들은 세계무역의 60% 이상을 지배하고, 그들의 생산액은 전 세계 생산액의 약 25%에 달할 정도이다(1999년 현재).

그러나 ‘제국’론이 주장하는 식으로, 독점은 “국민국가를 스스로가 움직이는 상품, 화폐, 인구의 흐름을 기록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되어버린 경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독점, 강력한 독점적 결합체는, 무엇보다도 우선 세 개의 제국주의 센터에서는, 결정적인 ‘국가적’ 결속을 가지고 있다. 이점은 데이터에서 명확히 보여진다. 독점의 판매액 중 50% 이상은 그들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나라의 국내시장을 향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일본은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1992~1993년에 공업부문의 75%, 서비스부문의 77%)(P. 하스트 & G. 톰슨 ꡔGlobalization In Questionꡕ(그리스어판 177~178쪽). 더욱이 모기업은 독점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국가적’ 결속이 존재하는 결과로서 독점의 재생산의 조건(임금수준, 과세수준, 대부의 조건, 보호조치, 정부 보조금, 재정투․융자 등)은, 국민국가의 범위 내에서는 오로지 국가독점의 규제조치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윤의 원천은 외부 시장에 대해서도 요구되며, 그 결과 국가간의 합의와 국가독점적 성격의 제한에 의하여 자본의 재생산 조건을 규정하고 바꾸려 하는 물질적인 근거와 필요성이 생겨난다.

독점자본의 서로 다른 부문간 혹은 그것을 지원하는 국가간의 다양한 충돌은, 자본의 요구에 기초하여 냉혹하고도 불가피하게 전개된다. 레닌에 의해 기술되고 있는, 독점의 경쟁과 지배적인 제국주의 열강간의 경쟁이라는 현대의 현실은, 매우 격렬하게 드러난다.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최근의 예가, 한편에 미국과 영국, 다른 편에 소위 프랑스․독일 축을 배치한 이라크를 둘러싼 제국주의간의 대립이며, 그것은 이 지역의 에너지 자원을 노리는 각국 독점의 대립을 반영한 것이다.

이른바 ‘제국’의 범위 내에서 독점은 “국민국가의 권력을 침식하고”, “분쟁의 매개나 계급대립의 조정”에 직면하여 국민국가는 그 자율성을 상실한, 그리고, 바야흐로 국민국가는 발전을 위한 “장벽”이 되고 있다고 하는 견해의 표명이, 제국주의의 객관적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와 같은 견해는, 약소국의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정치가들이 벌이는 온갖 행태를 은폐하고, 야만스러운 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한 책임을 초국가적인 기관(IMF, 세계은행, WTO, 유럽위원회 등)에 전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초국가기관들의 역할을 왜곡하여 독점자본의 재생산을 지구적 규모에서 규제하기 위한 기구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들(초국가적 기관들)은 거대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를 밀어붙이기 위한 추진기구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노동자계급과 인민 제계층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고, 일국 단위의 투쟁을 국제적인 투쟁과 연계지워 자국의 부르주아지에 반대하고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제기관의 산만하기 그지없는 “글로벌한 네트워크”와의 투쟁으로 향하게 한다.

상품의 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의 수출은 제국주의 시대의 또 하나의 기본적인 특징을 이룬다. 여기에서, 생산의 국제화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로서, 대외직접투자(FDI)가 있다. ‘새로운 글로벌한 현실’을 호소하는 사이비 이론에 반하는 데이터가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FDI의 확대는 특히 흡수․합병을 추진하는 강한 경향(세계 GNP의 8.3%는 FDI에 기인하는 생산물이며, 거의 5%는 고정자본의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ꡔUNCTAD 세계투자보고 1999ꡕ])에 의한 것이며, 자본주의 출현 이래의 경향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총자본 재생산의 대부분은 자본주의 경제의 국민국가라는 형태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더욱이 FDI의 거의 70%(2001년 현재)는, 선진자본주의국 쪽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20세기 초두의 상황과는 거꾸로 되어 있다(데이터는 ꡔUNCTAD 세계투자보고 2002ꡕ 참조).

현대 세계의 새로운 사회․경제 현실을 주장하고 그것이 제국주의를 초월하였다고 하는 자들은, 빈번하게 그 논거로서 공업자본의 운동과 비교했을 경우의 화폐자본의 운동에서 소위 “자율성”을 들고, 화폐자본 자체의 기관이나 기구가 세계경제를 제압하기에 이르렀음을 들고 있다. 맑스는 ꡔ자본론ꡕ의 시대에서 의제자본2)의 전개와 증권거래의 작동을 통한 그와 같은 현상의 발생을 암시하고 있다. 레닌은, 자본의 집중이 한층 진행하여 산업자본이 은행자본에 통합되고 독점이 출현한 결과 자본의 투기적 성격이 더욱 강화됨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그런 점에서, 현대세계에서 화폐자본의 투기적 거래가 증대하고, 현실 자본과 비교하여 화폐자본의 운동의 자율성이 확대되는 현상은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에서 금융이 수행하는 역할이 강화된 것의 직접적 결과이다. 동시에 그것은, 생산의 사회화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간의 모순이 (사회적 소유에 따른)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소된다는 역사적인 조건하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생성을 드러내고 있다. 지적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은, 대량의 자본의 흐름을 지배․관리하는 것은, 세 개의 제국주의 센터의 독점 그룹이지, ‘제국’론에서 “자율적”이라고 주장하는 “글로벌 시티”라든지 “컨트롤 시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에서 서술해온 것의 결과로서, 시장의 분할과 세력권의 분할을 요구하는 분쟁이 격화하고, 제국주의간의 대립과 충돌에 이르게 된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의 초월에 관한 견해로, 소위 ‘제국’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현대 세계의 통합이 추진되고 그 결과로 생산의 “탈중심화” 및 “탈영토화”를 수반하는 “공업경제로부터 정보경제로의 이행”이 진행된다는 주장이 있다. 거기에서는, 물질적 대상의 생산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 오늘날의 소위 “비물질적인 노동력의 형상(커뮤니케이션, 협동, 다양한 정보의 생산과 재생산에 연계되는 것)”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가상의 중심적 역할이 서술되어 있다. 그와 같은 주장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전혀 비과학적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에서의 착취관계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인 임무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 그들은 “사적 소유권이라는 개념 그 자체는, 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는 더욱 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착취가 이미 특정한 장소를 갖지 않는다”. 더욱이 “특정한 차이 내지 척도를 규정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해지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소위 “멀티튜드”로 대체되었다, 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체제의 현단계에서 새로운 과학기술과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력의 전반적인 발전으로부터 괴리시키고 있다. 그들은 생산력의 발전이 축적되어 새로운 질적인 변혁에 이르렀지만, 이 질적인 변혁은 현존하는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대해 외면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애매하게 하고 있다.

▷ 과학과 기술의 성과를 소유하는 것은 누구인가, 자본가계급인가 노동자계급인가? 새로운 과학기술은 인간의 요구를 동기로 하여 개발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적인 이윤을 동기로 해서인가?

▷ 과학기술의 발전은 생산관계를 변혁하는가? 자본은 사회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생산과정의 최종적인 생산물이 금속제의 건조물이건, 컴퓨터 프로그램이건, 생산관계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다.

▷ 자본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착취, 즉, 잉여가치와 자본가의 이윤의 산출은, 단지 동일한 채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격화한다.

맑스는 이미 “과학은 자본에 봉사하는 것으로서 갇혀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과학기술의 발전의 목적은 “상품을 싸게 하고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소비하는 부분을 단축하고, 그가 자본가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노동일의 다른 부분을 연장할 뿐인 것이다. 기계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수단이다.”(칼 맑스 ꡔ자본론ꡕ 제1권 제4편 제13장 ‘기계와 대공업’)라고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자계급의 임무

전체적으로 ‘제국’론은 이전부터 존재하는 현상의 새로운 국면 내지 새로운 형태로의 발현으로 보지 않고 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의식하고 있건 의식하지 못하건, 그들은 생산, 투자, 무역의 국제화의 현단계가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이며 그 내부 요소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와 같은 견해는 그 본질에서, 평화적인 “초제국주의”의 가능성에 관한 20세기 초두의 관념적인 개념을 되살려낸 것이며, 카우츠키3)와 유사한 견해를 재탕하는 데 불과하다.

이와 같은 관념적인 개념은, 당시 레닌에 의하여 격렬하게 반대되었던 것이고,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야만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나날이 그 오류가 증명되고 있다. 자본의 유동성 강화에 따른 자본주의 경제의 국제화, 세계시장의 확대와 심화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았으며, 해결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그 위기를 폐절하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 경제간에서 발전하는 관계는, 자본주의의 통합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며, 항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힘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점들은,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 독점끼리의 대립, 제국주의간의 대결, 전쟁 같은 것을 결코 폐절할 수 없다. 그것들은, 보다 약한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교섭과 협조의 해소로 나아가는 반대 경향을 수반한다.

국가간의 협정이나 규제는, 자본주의의 국민국가를 폐절하지 않는다. 국민국가 각국과 각각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제적인 결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현실적으로는, 소수의 대국이 결정을 하고, 보다 많은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그 결정을 지지하여 실행한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예를 들면 이라크에서 미국에 협력하고 있는 40 몇 개 국가).

현대에서 제국주의는 매우 대규모하게 생산을 사회화함으로써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적인 자본주의적 취득형태 간에 존재하는 근본모순을 한층 첨예화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인민의 운동은 당연히 국가적 규모 및 국제적인 규모에서 독점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ꡔ공산당선언ꡕ에서 맑스-엥겔스가 한 말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즉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드시 우선,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처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동시에 노동자계급은 공산주의운동의 협동의 세계적인 진전을 통하여 전략 목표로서 사회주의를 내걸고 투쟁함으로써, 그 투쟁을 국제적인 것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오늘날 제국주의라는 조건 하에서는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소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혹은 단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만 가능하다”라는 레닌의 테제는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 “이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계급을 수탈하고, 자국에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뒤 다른 자본주의 세계에 대하여 나서서,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계급을 자기 쪽으로 끌어내고, 그 나라들에서 자본가에 대하여 봉기를 일으켜,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으로라도 착취계급과 그 국가에 반대하는 행동을 조직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레닌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각국의 자유로운 동맹은 후진국에 대한 다소간 장기적으로 완강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유럽합중국의 슬로건에 대하여, 전집 제1권)라고 강조하고 있다.4)

자본주의의 폐절과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계급과 인민 제계층의 투쟁은 영향력이 있는 공산당이 각국에 존재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것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와 같은 당,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과학적 맑스-레닌주의의 분석으로 무장한 당은, 자본주의에 대항해서 얻는 수미일관한 혁명의 전략과 전술을 묶어내어 정식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목표가 사회주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일관되게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투쟁을 계속하는 공산주의당들은 광범한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동맹에서 전위로서의 역할을 획득하는 입장에 있다. 사회주의의 문제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세력, 혹은 현재는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러나 자본의 폭력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세력을 공동의 투쟁에서 단결시키는 것. 이 방향에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협력과 공동행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은 현대의 이데올로기 문제와 과거에 존재한 이데올로기 상의 견해차를 둘러싼 논쟁이라는 시련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점은 사회주의 국가들에게서의 반혁명의 승리의 결과, 한층 명확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글로벌리제이션”은, 가령 ‘제국’이라는 베일을 뒤집어씌우려 하는 중립 과정이 아니라 자본측에 유리한 완전히 계급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인민과 부르주아 정부가 완전히 분담할 수도 없고, 하물며 노동자계급의 “욕망과 요구의 결과” 따위가 아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독점의 권력을 폐절하고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을 개척함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세계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세계는 사회주의 이외에는 없다. 한/노/정/연


번역: 현장에서 미래를 편집출판위원회


1) 네그리와 하트가 17세기 네덜란드의 정치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로부터 도입한 ‘제국’의 질서와 권력에 대항하는 데모크라시 운동의 주체 개념. ‘군중’ ‘다수성’ ‘다성(多性)’등 다양한 번역이 있지만 고정된 정의어는 없는 것 같다. “국민국가의 테두리 내에서 단일하고 균질적인 동일성으로서 조정된 ‘인민’이나 ‘국민’이라는 개념은 구별된다 - 능동적인 사회적 행위 주체”이다. 그러나 ‘멀티튜드’란, 맥락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혁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가령 그것이 산업구조의 변동으로 인해 다양하게 계층분화되고 있다고 해도)를 해체하고, 시민주의에 근거를 부여하고 또한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에 다름없다.


2) 맑스는, 주식회사가 산업자본을 모아내는 단서가 열린 시대에, 주식자본을 자본의 최고의 발전형태로서 서술했다. 주식자본에서는, 주식의 발생에 의해 모아져 생산과정에 투하되는 현실자본과, 주가로 표현되는 ‘의제자본’으로 자본의 기능이 이중화한다. 주식자본은 현실자본의 운동에 따라 생겨나는 이윤과 신용업(은행)의 성립에 의한 일반이자율 형성이라는 두 요인으로 규정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가가 기업의 수익예측이나 이자율의 변동예측 같은 현실자본의 운동으로부터 유리된 독자적 운동을 보이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는 새로운 가치형성의 근거를 갖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의식에 기초하는 매매익을 추구하고, 투기적 주식거래가 비대화한다. 이것이 ‘의제자본’이다.


3)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 칼 카우츠키(1854~1938)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처음으로 ‘정통파 맑스주의자’임을 자인했지만 나중에 계급투쟁이 첨예화되면서 기회주의에 빠져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조국방위’에 복무, 사회배외주의로 전락했다. 그가 주장한 ‘초제국주의’론은, 제국주의 국가간의 대립은 독점체의 형성․발전과 함께 완화되고, 국제적으로 결합한 금융자본이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공동으로 지배․착취하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형태, 즉 ‘초제국주의’가 성립한다고 했다. 레닌은 ꡔ제국주의론ꡕ에서, 금융자본의 지배가 세계경제의 불균등성과 모순을 격화시키기 때문에 거꾸로 약화되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제국주의의 변호론자가 되었다고 카우츠키를 비판했다.


4) 레닌의 논문 「유럽합중국의 슬로건에 대하여」: 제1차 대전 전 맑스주의자는 사회주의는 모든 자본주의국, 혹은 대다수의 자본주의국에서 동시에 승리한다고 한 맑스-엥겔스의 지침에 따르고 있었다. 이 명제에서 출발하여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로의 이행과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은, 정세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레닌은, 이 시기의 이론활동을 통하여 제국주의 단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의 불균등성에 착목, 정세변화에 적합하게 전략을 발전시켰다.


2004-03-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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