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 1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상태**
편집자 주-본 글은 지난 2월에 있었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0차 총회기념 토론회(“노무현 정권 1년과 노동자
민중운동”)에서 발표된 토론문을 필자가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김 혜 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 노무현 정권 1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빈곤과
노동조건 악화로 고통당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제
그것이 일상화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비정규직은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비정규직이라 안정적인 고용은 몇 사람의
특권이 되어버렸고, 이제 비정규직을 서서히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 기준 위에서 삶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
기준이란 소비를 대폭 줄이는 것이고, 가족 구성원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며, 모자라는 부분은 빚으로
메우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은 이제 일상적으로 불안정해졌다.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노동자들에게 ‘삶의 전망’이나
‘미래의 계획’은 말 그대로 ‘이상’이다.
◯ 이렇게 비정규직을 일반화하고 이것을 삶의 조건으로
강요하기 위해 자본은 제도를 정비해왔다. 정리해고의 요건을
약화시키고 근로자파견제를 확대하며, 계약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했다. 이제 그 누구도 비정규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전처럼 가혹하게 다루지
않는다. 약간의 임금인상과 4대보험 적용 등의 조치를 취한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해서 과거처럼 통째로 업체를 날리거나
전원을 해고하지는 않는다. 노동조합이 자신의 존재조건 자체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비정규직의 처지에서 노동조건 개선에
만족하기만 한다면 비록 왜소하더라도 노동조합이 유지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운동’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
기존 노동운동의 관성을 넘어서 새롭게 형성되는 비정규직이라는
주체들을 통해 연대의 정신을 복원하는 것, 노동조건 개선과
임단협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넘어서는
투쟁, 이런 것을 조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투쟁을 조직하는
것은 단지 ‘노동조합’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노동조합을
넘어서서, 신자유주의 정권과의 합의를 넘어서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 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중요한 투쟁이기도 하다.
◯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어서지 않는다. 삶이
고통스러운데도 투쟁하지 않고 버틴다. 비정규직이라는 존재
조건 위에서 숨죽이며 산다. ‘신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적 합의주의 재시도’라는 측면에서 노무현 정권의 허구성에
대한 폭로가 중요하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삶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개혁성에
대해 기대감도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기대감 때문에가
아니라 공포감 때문에 숨죽인다. 경제위기를 경험하면서 위기가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사람들은 경험했다. 그 공포
때문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사회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지도하는 대표체들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없기 때문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현상에 대한 폭로나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또는 노무현 정권의 본질에 대한 선동으로는
대중투쟁을 조직하기에 역부족이다.
◯ 사람들은 신자유주의가 결코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것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다. 과거처럼 국가의 정책으로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하여 모든 것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고, 개인들간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논리가
판친다. 이 논리는 저항하기보다 개인적으로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만든다. 힘든 노동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영어학원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노동자들, 곁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보면서도 ‘나라도 살아야지’ 하고 눈을 질끈 감는
노동자들, 비정규직을 고용안전판으로라도 삼아서 살아남겠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 모두 경쟁력 논리, 능력주의, 공동체의
파괴, 국가의 역할에 대한 교묘한 부정, 집단성이 없으면서도 한
국가 안에서는 경제적 운명공동체라고 착각하는 왜곡된 논리.
이러한 신자유주의 논리 안에 사람들은 길들여져 있다.
◯ 노무현 정권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유일한 대안인 계급적 노동운동을
고립시킨다. ‘협조적 노동운동의 안착화’도 그의 일환이다.
노동자에게 줄 것이 많아서 ‘협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부와 현장을 괴리시킴을 통해서, 즉 현장의
노동자들은 죽어나가는데 상층에서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협조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짓밟아 ‘협조’에 힘을 실어준다.
현실론이 힘을 얻고 전투적 노동운동이 고립되면 현장의
고통과는 무관한 합의의 틀이 만들어져 ‘협조적 노사관계’가
구축된다. ‘협조’를 실현할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 민중
전체에 대해서는 배타와 초과착취가 지속될 것이다. 희망을 잃은
노동자들은 집단적 투쟁보다는 개별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방법을 택하게 되고, 그래서 노동자들은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쟁에서조차 밀린 노동자들은 분신자살이나 살인,
방화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 사회안전망이 붕괴하고 극단적으로 삶의 위기가 생길 때
사람들은 분노한다. 정권은 이러한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다. 투쟁에 대한 탄압과 상층에 대한 포섭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니 노동자들 사이에 위계를 세분화한다. 이
위계는 고용형태, 학력별, 거주지별, 성별, 국적별, 나이별,
일하는 기업의 규모별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최근 고용형태만
보더라도 한 기업체 안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사무직 남성
노동자들 일부와 그 아래에서 경쟁하는 사무직 남성 노동자들,
그리고 기타 정규직 노동자들,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계약직,
일용직, 용역직,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임금과 서로
다른 노동조건을 갖고 위계서열화한다. 이러한 위계서열화는
서로간의 경쟁을 유도하고 관리하는 구조이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한 칸이라도 높은 위계로 올라가기 위해 경쟁한다.
경쟁에서의 승진통로가 약간 열려있는 데다가 위계간 임금격차나
노동조건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남을 짓밟고라도 이
통로를 뚫고 가려고 한다. 생존선에 가까운 저임금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경쟁한다. 저임금은 경쟁을 하도록 만들기 위한
필연적 장치이기도 하다.
◯ 정권은 위계화와 경쟁의 유도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책임을 분산시키고 노동의 불안정화를 가속화하여 위기를
관리한다. 과거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실업의 구조적
원인을 가리고, 실업노동자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민중들이 그 책임을 떠맡도록 했던 것처럼 말이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생존 보장은 우리의 ‘권리’이다. 정권은 이 ‘권리의
주체’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기존 노동운동 외에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는 것을 막고 투쟁의 가능성을 봉쇄한다.
복지의 붕괴를 민중 전체의 주머니를 털어 해결하면서, 노동의
불안정화로 저임금일자리를 양산한다. 죽기 싫으면 이
일자리에서 일하라고 한다. 이미 새롭게 확장된 공공영역 등
정당한 일자리를 마치 시혜적 일자리인 것처럼 왜곡하여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제공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정규직을 공격하여 생존에 매달린 사람들의 불만을 일시적으로
왜곡되게 표출시키지만 결국 정규직에 대한 공격은 모든 노동의
불안정화로 귀결된다. 삶의 고통에 처한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조직화를 가로막으며, 시민단체들이 이에 호응하여 이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이상 불만은 가득하지만 투쟁은
조직되지 않는다.
◯ 이렇게 되면 국가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고 이데올로기의
물적인 토대가 붕괴되고 그러면 국가는 물리력에 대한 동원으로
권력을 유지하게 되어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부정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2003년에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노동자투쟁을 탄압한 것을 사례로 든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탄압도 절차적 정당성에 기대고 있다. 이
때의 절차적 정당성이란 법과 제도에 입각해있다는 것이다. 법과
제도 자체가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노골화된다. 민중들의 위기감을 자극하여 그러한 봉쇄에 대한
대중동의를 확보한다. 생존에 대한 공포를 저당잡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면 민중들의 획득한 정치권
권리의 파괴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고 그 기반 위에서 타협이
이루어진다.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극악한 탄압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가시적 파괴가 아니라, 제도 자체를 반민중적,
친자본적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이며, 이 속에서 민중동원 정책을
쓰기 때문에 이에 맞서는 투쟁이 오히려 고립되기도 한다.
◯ 생존권 투쟁과 노동자 투쟁과의 연대를 형성할 가능성은
많아졌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로 바로
전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 때문에 자본과 정권의
관리전략은 더욱 치밀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주체를 형성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노동자, 그리고
장애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생존의 끝에서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이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한다. 이미 비정규직 투쟁 주체가 많이 형성되었지만
자칫 노동조합운동만으로 국한될 위험성도 갖고 있고, 이주나
장애운동 진영의 주체들은 여전히 미약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당면한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빈곤과 불안정화에
저항’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대정부
직접행동을 하는 주체선언을 하자.
◯ 또한 민중들의 불만을 실제적인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삶의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다른 대안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해방’의 전망이 공공연하게 선동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선동만으로 조직과 투쟁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대중조직인 민주노조의 전투적 투쟁으로서만 현재의
전선을 돌파해왔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계급적 부위에
대한 정권의 집중타격과 그 패배감이 오히려 ‘협조적
노사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상황에서 ‘전국적
대중투쟁’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틀을 넘어서는
정치적 주체들을 발굴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계급적인
정치운동이 고양되지 않고서는, 그래서 이후 사회에 대한 전망과
새로운 투쟁 주체들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지 않고는 대중투쟁도
어렵다. 또한 개별 국가 차원의 대응에 대한 무력감’이
확산되고 있기에 진행되는 국제 투쟁에 연대하거나 반제투쟁에서
성과를 남겨야 한다. 그리고 그 투쟁의 성과가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주체의 형성으로 귀결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