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강령ㆍ정책 비판
정 병 기
연구위원
보혁구도의 가능성과 민주노동당의 역할
지난 대선은 한국에서도 바야흐로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보혁구도의 성립이 맹아적이나마 가시화된 정초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가 오랫동안 한국 정치를
규정해온 지역주의라는 정치적 균열과 무관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민노당에 대한 지지율이 노동자 밀집 지역인
울산(11.4%)을 제외하고는 대개 3~5%로써 전국 평균 3.9%
주위에 분포했던 것이다. 사회당의 경우는 더욱 평탄하게 나타나
광주를 제외하고는 전 지역에서 전국 평균과 동일한 0.1%의
득표율을 보였다. 진보세력에 대한 지지가 아직 명백하게 대거
득표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장차에는 보수-진보의 균열이
지역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장할 수 있음을 암시해 준다.
한국에서는 보혁구도를 통해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직접
대표된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은 압축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있어도 결코 특정 단계를 생략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역사의 발전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를 결코
생략할 수 없으며 이제 한국에도 그 단계가 도래했다는 징조가
보이고 있다.
물론 합리적 보수와 신선한 정치를 주장하며 세대 균열에 편승한
노무현 효과가 보혁구도의 형성을 많은 부분 상쇄시킨 것이
사실이다. 최근 탄핵 파동으로 이념적 보혁구도의 대립이 다시
설 땅을 잃고 보수 진영의 한 축이 진보의 명분을 독점하는
상황이 되는 듯도 하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부르주아 선거에서도 진보가 자리잡는 것은 확실하다고 보이며,
단기적으로도 제도권 진보정당의 대표인 민노당에 대한 지지도는
분명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에 따라 민노당의 역할에 거는
기대도 적지 않다.
진영 내부에서 서로 비방하고 해코지 하지 않는다면,
진보세력들이 다양하게 분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비제도적 좌파로서 사회에서 더욱 투쟁적이고 대중적인 활동을
하는 조직도 존재해야 하지만,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동의를 철회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회주의적 길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민주노동당과 같은
제도권 좌파의 역할도 소중하다.
그러나 민노당의 초기 활동을 보면 노동자계급정당으로서는
부끄럽기만 했던 ‘국민승리 21’의 경험과 같은 부정적인
기억도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으로 전환한 후에는 과거에 비해
훨씬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면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노동자 계급정당에 두고 있는 민노당의 강령과
정책은 부족한 점이 적지 않다. 전체적으로 창당선언문과 강령
전문에는 사회주의적 목표들을 명시하고 있지만, 과학적
사회주의로 보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많고, 구체적 정책은
국가사회주의적 입장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민노당의 강령과
정책은 복지국가를 목표로 하는 듯 하지만 그조차도 현재 유럽
복지국가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당선언문: 계급성 결여와 반권위주의 의식 결여
우선 창당선언문을 보면, 민노당은 자기 정체성을
“노동자․농민․빈민․중소상공인의 정당이며,
여성․청년․학생․진보적 지식인의 정당”으로,
그리고 민노당의 주인을 “땀흘려 일하는 모든 사람들,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 억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였다.
민노당의 선언적 목표는 “노동자와 민중이 주체가 되고 사회의
부가 소수에게 장악되지 않는 평등사회, 개인의 창조성과 성과를
존중하면서 제도화된 인간과 인간의 차별을 극복하는
평등사회”이다. 민노당의 연대전략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진보세력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개인의 총화를 이루어 내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와 군사적 위협, 인권 침해에 반대하는 세계의 모든
진보 세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 면에서 창당선언문은 노동자계급을 주체로 세우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계급을 어떻게 세워내는 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즉,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채 “다양한 진보세력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개인의 총화”를 이루어낸다고 함으로써, ‘노동당’보다는
‘민중당’이나 ‘인민당’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릴 듯하다.
창당선언문은 또한 “민주노동당 창당은 환경과 인간이
공존하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지위를 누리며 결식
아동․노인․장애인 등 모든 사회적 약자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새 시대를 알리는 우렁찬 목소리”라고 하여
물질주의적 계급성과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계급운동은 여성문제를 비롯한 인권문제와
환경문제 같은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민노당의 문제인식은 반권위주의에 토대를 둔
탈물질주의적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가치들이
갖는 의미는 선언적 언급에서 그칠 뿐 심각한 문제인식과 구체적
정책으로 드러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강령: 국가 인식과 목표-수단 관계 인식의 결함
다음으로 민노당의 강령을 보면, 전문은 “민주노동당은 외세를
물리치고 반민중적인 정치 권력을 몰아내어 민중이 주인되는
진보정치를 실현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등과 해방의 새 세상으로 전진해 나갈
것”라고 서술하였다. 평등과 해방이라는 말로 사회주의적
목표를 명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에 따라 강령은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민중을 억압하는 모든 국가기구와 법, 제도를 완전히
폐지할 것”이며,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여 “아래로부터의
민중권력을 창출해 나간다”고 규정하였다. 자본주의 국가의
“폐지”를 언급하며 새로운 정치권력체를 구상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더 구체적인 분석이 요구되며, 당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명시적 언급도 더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강령의
다른 부분에서 보이는 오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곧,
“한국의 정치 권력은 국내외 자본의 충실한 대리자에 불과했다.
재벌과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한 민중은 정치․경제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
동안 우리들 민중이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워왔음에도 여전히 민중의 권익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라는 언급을 보자. 정치권력을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만 문제가 될 뿐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민노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사회주의적 민중권력이 가능하다는 억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정치강령을 보면 ‘오해’가 오해가 아님을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다. 민노당의 정치강령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명시하고 있다.
“첫째, 썩은 정치, 부패정치의 완전 척결을 통해 실질적으로
국민들에게 책임지는 정치,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정치를
구현한다.
둘째, 억압적 국가기구를 전면 폐지하고,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철저히 보장한다.
셋째, 정당과 선거정치의 실질적인 민주화를 실현한다.
넷째,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 강화하고 지방자치를
활성화한다.”
이 때 억압적 국가기구의 폐지는 자본주의 국가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독재의 억압적 잔재를 청산한다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방안은 비례대표제와 선거공영제,
이념정당구도 확립과 당내민주화를 의미한다. 이른바 합리적
보수주의의 강령과 다를 바 없다. 합리적 보수주의에 기반한
정치개혁은 물론 한국에서 우선적인 목표가 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개혁은 보다 궁극적인 목표의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17대 선거 강령: 이념적 토대의 불확실성의 결과
한마디로 민노당의 강령과 정책은 이념적 토대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유럽의 제도권 좌파정당들이 걸어온 전철을 따라갈
가능성이 농후함을 예상케 한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토대로
복지국가적 해결을 위해 사회주의적 목표를 추구했던 독일
사민당과 산업민주주의적 노조에 토대를 두고 의회주의적 길을
선택한 영국 노동당이 급기야는 부르주아적 국민정당으로 변해간
점은 현재의 민주노동당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더욱 엄밀하게
보면,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은 비록 의회주의적 방법을
택하기는 했지만 뚜렷한 계급정당적 정체성을 확립했던 반면,
한국의 민노당은 창당 시절부터 계급정당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질서에 물들어갈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도 할 수 있다.
다가올 선거에 대비한 민노당의 선거강령을 보면, 이와 같이
의혹이 더욱 분명해진다. 민노당의 “17대 선거 핵심 공약”은
사회, 농업, 교육, 통일, 환경, 대외 정책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도 진보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선거공약들도 정치강령의 테두리 내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농업과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소유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교육정책은 국공립 대학의
통합을 이야기할 뿐 대학 자체의 국유화나 사회화에 대한
인식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병리적 현상’을
치유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치유하는 것은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계급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세우고 이념적 토대를 굳건히
할 때에 비로소 민노당은 장차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보혁구도에서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