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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평가 뒤집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98호
김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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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 (한신대 교수)
[ www.another0415.net 2004년04월22일 ]



(I)
17대 총선은 대통령 탄핵과 보수부패정치 심판, 수구 대 개혁, 노무현 정권의 실정 심판, 거여견제론, 거야부활론, 지역주의, 낙천낙선운동, 진보정치 실현, 신자유주의 심판 등 주요한 이슈만도 다양했을 뿐 아니라 1인2표의 정당투표제의 도입 등 선거제도도 달라졌기 때문에 16대 총선과 비교하여 총선결과를 평가하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총선결과를 평가하기 위한 기초적인 자료조차 제공되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이른바 정치평론가들이나 칼럼니스트들의 자의적인 평가와 언론매체들의 아전인수적인 선전이 횡횡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인 수준에서지만 총선 결과를 재평가하고 선거에 나타난 민의를 올바로 파악하는 것은 의미 있는 과제다.
총선의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첫째, 과반수 의석 확보를 통한 열린우리당의 승리, 둘째, 과반수 의석을 내주었지만 안정의석을 확보한 한나라당의 회생, 셋째, 민주당과 자민련의 몰락, 넷째,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과 제3당으로의 성장, 즉 진보정치의 제도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결과는 분명 극우 반동과 보수주의 그리고 지역주의에 의해 지배되어 온 한국 정치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자유주의 경향의 제도언론과 평론가들은 이를 놓고 대통령 탄핵에 대한 국민의 심판, 노무현 재신임, 보수부패정치 청산과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 지역주의의 몰락, 진보정치에 대한 관용과 기대, 심지어는 황금분할이라느니 하면서 자유주의 정치와 신자유주의의 승리를 자축하고 선전하는데 여념이 없다. 보수주의 언론들조차 이런 평가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평가는 분명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지만, 진실의 전체는 아니며 상당 부분 과장과 왜곡을 담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형성된 전선은 총선국면을 지배적으로 규정하였는데, 그러나 이 전선은 선거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2주간의 짧은 시간 내에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개헌선까지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 하에 열린우리당의 압도적인 우세로 시작된 선거국면은 박근혜 바람과 정동영의 노인폄하 발언으로 한나라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이 재결집되고 열린우리당의 압승에 대한 견제 심리와 노무현 정권 심판의 주장과 맞물려 선거 직전 정동영이 선대위원장 및 비례대표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는 상황으로까지 급변하였다.
대통령 탄핵의 쟁점을 다시 불사르기 위한 이 결정으로 대통령 탄핵 문제는 이번 총선 국면 내내 최대의 이슈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탄핵전선은 이렇게 부정할 수 없이 열린우리당 지지 효과를 창출하는 환경이었다.

자유주의의 승리, 그러나 탄핵 심판과 노무현 정권의 재신임은 아니다
이렇게 탄핵 전선의 규정 하에서 치룬 총선이었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와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의 과반수 의석 상실 그리고 민주당의 몰락이라는 선거결과는 당연히 이른바 의회쿠데타 세력과 보수부패정치에 대한 국민적 심판, 노무현 정권의 재신임이라는 평가를 일반화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선거통계만을 검토해보아도 알 수 있다시피 이 평가는 올바른 게 아니다.
먼저 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60% 정도로 역대 최악의 투표율이라는 지난 2000년 총선의 투표율 57%보다 3%만큼 올라갔을 뿐이다. 이는 대통령 탄핵문제가 우리 사회의 폭발적이 이슈가 되었고 광화문과 전국 곳곳에서 수십만 명의 촛불이 넘쳐흘렀고 탄핵세력을 심판하자는 목소리가 TV 방송3사를 도배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시민단체들과 언론의 대대적인 투표참여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은 역대 최악의 수준으로부터 3%만 올라갔을 뿐이었다.
특히 20대의 투표율은 이번에도 30%를 좀 넘긴 걸로 알려져 있어 탄핵과 촛불집회가 국민의 정치참여와 정치의식을 제고했다느니, 인터넷을 무대로 활동하는 20대가 정치개혁의 새로운 주도계층으로 나섰다느니 하는 언론의 선전은 이렇게 실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국민의 40%가, 20대의 65% 이상이 부르주아 제도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선거를 거부한 셈이다.
투표율이 의미 있게 제고된 것은 아니지만, 투표자들 중에서는 지지성향은 의미 있게 변동하였다. 그 변동의 이유를 추적할 수 있는 통계 자료(연령별, 계층별, 지역별, 계급별 지지표 이동 자료)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석은 불가능하다. 또 이번 총선에는 정당투표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16대 총선과 단순한 비교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 되지 못 한다.
그럼에도 간략하게 정당별 득표율의 변화를 보면, 16대 총선에서 39%의 득표율로 지역구 의석수의 49%를 차지했던 한나라당은 이번 총선에서 정당투표의 35.8%, 지역구 의석수의 41%를 차지함으로써 제1당의 지위를 내주었지만,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정당별 지역구 득표율 합산 통계가 부재하기 때문에 이하 비교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탄핵정세로 조성된, 한나라당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총선환경을 고려하면, 이는 오히려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이 강고한 것임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반면 16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30%의 득표율, 42%의 지역구 의석수를 차지하였는데,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이 38.3%, 민주당이 7.1%를 얻어 양당을 합친 자유주의 정파의 득표율은 45.4%, 지역구 의석수 55%(열린우리당 53%, 민주당 2%)가 됨으로써 자유주의 정파가 압승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새로 추가한 12%의 지지율과 함께 생각하면, 자유주의 정파들의 15% 포인트의 득표율 증가는 일단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아마도 지난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나 자유주의 정파를 지지한 유권자들로부터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잃은 지지율이 3% 정도임을 감안하면, 자유주의자들의 지지율 제고는 대부분 자민련 지지표나 무소속 표를 잠식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로 자민련이 잃은 표는 대부분 열린우리당이 가져갔다. (위의 계산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들은 새로 24% 포인트의 지지율 증가를 가져왔어야 하는데, 자민련이 잃은 7%+민국당 3.7%+ 9.4% 무소속 전체표를 계산해도 이는 20%밖에 되지 않는다. 수치상의 이 차이는 16대 총선의 지역표와 17대 총선의 정당투표를 비교한 데서 왔을 것이다. 또 실제의 정당 간 표 이동루트는 위의 설명과 달리 보다 복잡할 것이지만, 그에 대한 분석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정파간 지지율의 변동으로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이 크게 변동하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6대 총선에서 보수주의파와 자유주의파의 지지율은 52.5% 대 30%이었는데, 17대 총선에서는 38.6% 대 45.4% (=38.3%+7.1%)로 크게 역전되었다. 한국사회의 극우보수적인 정치지형이 이번 총선을 통해 자유주의 정파의 지배로 변화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여기에 13%의 민주노동당 지지표까지 감안하면, 정치지형의 변화는 더 더욱 크게 보여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선거 결과가 탄핵세력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국민적 재신임이라는 주장은 그렇게 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열린우리당은 과반수에 훨씬 모자라는 38.3%의 지지표밖에 얻지 못했고, 이에 반해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 3당의 지지표는 45.7%에 이르기 때문이다. 설령 민주노동당의 13%를 탄핵반대표로 계산한다 하더라도(여기에는 많은 유보조항이 필요하지만), 그 결과는 탄핵세력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국민적 재신임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탄핵세력에 대해 국민적으로 심판했지만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재신임은 아니다라는 결론은 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부패정치의 청산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도 일정하게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선 한나라당은 약간의 지지율 감소를 겪었을 뿐이고, 열린우리당이 가져간 자민련의 커다란 지지표는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된,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지역주의 표이기 때문이다. 사실 보수주의파와 자유주의파간의 지지율 변화가 그렇게 극적이었던 것은 사실 극우경향의 자민련 지지자들이 열린우리당 지지로 전환된 것에 크게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양자간의 지지율 변화는 그렇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니라 할 수 있다.


(II)
자유주의 압승의 착시현상과 선거제도의 결함
보수주의의 패배와 자유주의의 승리를 그렇게 극적으로 보이게 한 근본적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었다. 이는 이번 선거만의 문제도 아니지만, 선거결과를 분석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지표가 정당지지율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수만 갖고 논하는 유치한 평론문화 때문이다.
국민의 정당지지율이 의회구성에 반영되는 것은 대의제의 기본적 요소의 하나라 할 수 있는데, 한국은 이런 기본적 요소를 선거제도에 담고 있지 않다. 정당투표로 결정하는 비례대표는 총선 직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체 의석의 1/4정도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3/4의 지역구 의석은 결선투표제 없이 최대득표자 당선원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국회구성은 언제나 국민의 지지율과 어긋날 수밖에 없고 국민의 결정을 왜곡해서 반영할 뿐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38.3%의 정당지지율을 얻은 열린우리당은 비례대표를 포함하여 전체 의석의 50.5%(151석)를 가져갔고, 한나라당도 그보다 정도는 덜 하지만 35.8%의 정당득표로 40.4%의 의석(121석)을 가져갔다. 이 선거제도의 피해자는 당연히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었다. 양당은 국민적 지지율에 훨씬 못 미치는 의석수를 가질 뿐이었고, 이렇게 이 당들을 희생하여 열린우리당의 압승과 한나라당의 안정의석이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열린우리당은 원내 과반수의석을 차지한 지배하는 정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투표자의 38.3%밖에 지지를 갖고 있지 못하고, 더군다나 투표율이 60%임을 감안하면, 전체 유권자의 23%의 지지만을 획득한 셈이다. 전체 유권자의 23%, 전체 투표자의 38%의 지지로 국회의석의 50%를 차지하게 하는 선거제도, 이것이야말로 이번 선거가 자유주의의 압승으로 나타나게 한 착시현상의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선거제도하에서는 정당별 지지율의 크지 않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원내 구성이 크게 요동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 총선에서 투표자의 62%가 열린우리당을 거부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의 압승, 노무현 정권의 재신임, 탄핵세력에 대한 국민적 심판, 보수부패정치에 대한 국민적 청산이라는 언론매체와 정치평론꾼들의 평가는 사실관계로부터 크게 벗어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다수파 지지를 받지 못했고 노무현 정권은 재신임을 받지 못했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번 총선결과를 놓고 탄핵세력의 심판이냐 탄핵세력의 지지냐 하는 탄핵민심 논쟁이 뒤늦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벌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과반수의석을 근거로 탄핵세력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나라당은 탄핵에 찬성한 3당의 정당지지율을 근거로 탄핵세력에 대한 지지라고 주장했는데, 선거결과를 탄핵심판 문제만으로 본다면,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에게는 유감스런 것이지만 이 논쟁은 한나라당의 주장이 맞는 것이다.

낙천낙선운동, 노골화된 커넥션과 영향력 감소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과 당선운동의 평가도 이런 점에서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시민단체들과 자유주의 정당간의 정치적 커넥션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지만, 특히 이번 총선에서는 총선시민연대가 이라크 파병에 찬성한 국회의원들은 제외하고 탄핵에 찬성한 한나라당 민주당 의원 전체를 낙선대상으로 결정함으로써 그 커넥션은 노골화되었다. 또한 그만큼 낙선운동의 공정성은 의심받게 되었고 그 영향력도 현저하게 감퇴하였다. 물갈이연대의 당선운동도 노골적으로 열린우리당 지지로 나타나서 민주노동당으로부터 당선지지 후보를 사절 받는 수모까지 당했다.
총선시민연대는 이번 총선에서 낙선대상자 206명 중 129명(62.9%), 특히 탄핵찬성 이유로 낙선대상자가 된 100명 중에서는 51명(51%)이 낙선되었다고 밝혔고, 물갈이연대는 지지후보 54명 중 23명(42.6%)이 당선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런 수치는 2000년 총선 당시 낙선율 70%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총선에서나 이번 총선에서나 문제는 물론 시민단체들이 밝힌 낙선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정한 대상자가 낙선되고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그 당선과 낙선이 시민단체의 낙선운동과 당선운동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구에서 지지표의 변화와 그 변화의 요인들을 추적해야 하는데, 이를 분석하기 위한 의미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낙선운동과 당선운동을 통해 “국민의 개혁의지가 충분히 반영되었다”느니, “국민이 탄핵반대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시민단체의 자화자찬은 전혀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정당별, 정파별 지지율과 그 변화에 비추어 보아도 사실관계와 많이 다른 주장이어서 이들이 선거결과의 기초적인 분석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정당투표제와 진보정치의 약진
13%의 정당지지율을 획득한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부정할 수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진보정당이 의회에 진입했을 뿐 아니라 13%의 지지율이라는 것은 좌파정치가 척박한 한국 현실에서는 경이적인 결과라 할 수도 있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기존의 부패정치권에 대해 유권자들 중에서 좌파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경향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진보정치의 미래에 희망을 갖게 하는 결과이다.
진보정치의 약진은 이번 총선에 처음 도입된 정당투표제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결과가 단순하게 정당투표제의 효과인지, 즉 그 이전에 진행된 지지층 변화가 정당투표제의 도입으로 현실화된 것인지 아니면 이번 총선에서 새롭게 형성된 정치지형 변화를 반영하는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정당투표제가 제한적이어서 13%라는 높은 정당지지율이 의석배분에 그대로 반영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13%의 지지율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 수치이지만, 국회에서 10석의 의원 수는 그렇게 의미 있는 수치가 아니며, 열린우리당이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 더욱 의미 있는 수치가 아니다.
국회에서 민주노동당이 과소 대표되고 있는 문제를 제도적으로 정정해야 하는 문제는 그것대로 제기되어야 하겠지만, 또 과소 대표된 상태에서도 국회정치의 특별한 의의는 부정할 수 없겠지만,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가 국회정치에 몰두하면서 국회 밖 대중정치를 멀리 하는 것은 스스로 높은 대중적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고 국회 밖의 보다 큰 힘을 오히려 과소 대표된 제도권 안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선거 결과의 분석에서 정말 어려운 문제는 민주노동당 지지표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즉, 이 지지표가 어느 계급,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지, 또 민주노동당의 진성 지지자들 표인지 아니면 1인2표제 하에서 자유주의 지지자들의 관용표인지 또는 좌파성향의 비판적 지지표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역으로 이 지지표가 지역구 투표에서 얼마나 민주노동당 지지표로 또는 자유주의 지지표로 나타났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 등 각 당은 전국 및 시도별 지역구 득표율을 집계한 것으로 알지만, 황당하게도 중앙선관위는 지역구 득표율을 전국적으로 또는 시도별로 집계하지 않았다.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낸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의 지역구 득표율은 10%?가 안 되는 것으로 안다.)
이 지지표의 성격 여하는 민주노동당이 추구해온 진보정치의 노선을 평가하고 민주노동당의 지지기반이 누구인지를 밝히는데 있어, 또 앞으로 민주노동당의 정치와 정책이 지지자들과 어떻게 교류하고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척도가 됨에도 불구하고, 이 성격은 모호한 채로 남아있어 앞으로 많은 논란이 불가피할 것 같다.
따라서 이 선거결과를 단순하게 민주노동당 주류파가 추구해 온 의회주의 진보정치의 역사적 성과라든지 의회주의 노선의 올바름을 증명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 민주노동당이 한국에서 좌파운동의 방향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도 없다. ■

총선 소회

이 종 회
[ www.another0415.ent 2004년 04월 22일 ]



몸가짐을 바로해서 총선평가와 전망을 얘기하는 기회는 이래저래 있어야 겠지만, 내게 17대 총선은 유난히 ‘아는 사람들’이 많이 당선되어 감상적 소회가 깊다. ‘그 나이 되도록 남들 다하는 국회의원 한번 못하면서 무어 그리 바쁜지’ 하는 질책과 원망 섞인 부모, 친척의 눈초리를 애써 피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3번만 거치면 다 아는 사람이라는 우리나라에서 ‘뭐 특기할만한 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래저래 25년 넘게 운동판 언저리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알게된 사람들이다 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전대협 1, 2, 3기 의장이 다 당선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선도적인 문제제기로 학생운동이 주요한 역할을 한 적이 있었고, 그들이 핵심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학생운동 당시 간난(艱難)과 고초를 겪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소위 운동가 ― 요사이는 터부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 칭호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삶의 이력으로 보아 ‘과연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를 몸으로 느끼고 있을까’하는 회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이 386이란 수식어로 치장되어 제도정치에 진입하는 이력이 되고 보수정치를 연장하는 ‘젊은 피’의 역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노동자․민중운동진영의 세력이 미약하여 우회로를 선택했다든지 정치적 신념으로 ‘비판적 지지’를 했다 강변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운동이 진전하고 적어도 이번 선거에서 노동자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기치를 걸고 기어이 원내에 진입한 민주노동당에 대해, 선거 막판에 유시민이 보인 태도를 보아 그들 사고의 대강을 읽을 수 있다. 하여 굳이 따진다면 원내에서 귀감을 보였다 할지라도 전국연합 의장출신으로는 이창복 의장보다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함께 한 천영세 의장에게 더 동지애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장에 가겠다고 학교 때려치우고 용접을 배워 한참 자리를 잡아갈 즈음 ‘충격적인’ 구로동맹파업이 있었다. 당시에 몇몇 같이 생활하던 선배, 동지들과 논쟁을 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전체 대중운동과 유리된 정치적 선도투 아닌가’ 또는 그렇다 할지라도 ‘대중운동 진전의 표현이자 대중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등… 보다 공공연하고 대중적인 운동에 스스로 몸을 싣기로 한 마음먹은 것도 그 이후이다.
그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이 국회로 갔다. 이후 지금은 이래저래 떠난 사노맹으로 정리한 동지들이나 유시민도 있지만, 핵심이랄 수 있는 김문수, 심상정 그리고 진원지이자 핵심노조였던 대우어패럴 김준용 위원장의 매부되는 배일도 등등. ― 서노협 의장으로 전노협 건설의 핵심이었던 배일도 지하철 위원장과 김준용은 항상 행보를 같이 해왔고 국회진입을 몇차례 시도하던 김준용은 최근까지 지하철 배일도 집행부의 지도위원으로 있었다. ― 구로동맹파업의 정신은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그리고 전노협, 민주노총의 총파업으로 이어지고 그들의 역할은 다했다. 민중당 노동위원회에서 함께 하기도 했던 김문수는 일찍이 전향(!)을 했고 ― 최소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포기했기에 그리고는… ― 배일도는 김문수를 따랐다. 심상정은 전노협, 민주노총을 거치면서 노동자 대중운동의 진전에 온 몸을 던져 구로동맹파업이 단지 선도투만이 아니었음을 보이고자 했다. 그리고 그도 갔다.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건설된 서울노동운동연합이 제기한 ‘정치적 노동운동’에 경제주의자로 낙인찍혀 스스로 피해자라던 방용석도 민주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서 김문수와 만났다. 이후 노동부장관을 거쳐 지금은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으로 있는 그는 여러 눈에 띄는 족적을 남겼다. 김대중 정부 막바지에 노동부 장관으로서 ‘주5일 정부법안 경제특구법 공무원조합법’ 등 민주노총이 규정한 ‘반노동자적 3대 쓰레기악법’ 제정에 한 몫한 그가,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분노를 보이던 ‘정치주의자’ 김문수를 국회에서 만났을 때 어떠했을까? 70년대 말 원풍모방 탈춤반을 드나들면서 만났고 한두 차례 일도 같이했던 그는 몇 년전 우연히 마주치자 “요사이 혁명 잘 되나?”라는 비아냥으로 나를 반겼다. 방용석, 그가 비아냥거리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 80년대 경제주의(?)는, 같은 원풍모당 지부장이었고 지금도 투쟁현장 앞에서 싸우다 경찰차에 받혀 병원에 입원했다 최근 퇴원한 박순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의장으로, 이번에 민주노동당으로 등원한 YH 최순영 위원장으로 아직도 서슬 퍼렇게 살아있다.
나는 단병호 위원장을 좋아한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는 콘크리트를 버무리기 위해 신은 장화로, 수배중에 우리 집에 들러 갈아입고 벗어둔 ― 다시 올거라 믿어 세탁해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속옷으로, 그리고 징역 면회소의 쇠창살로 기억한다. 이제 그 단병호의 가슴에도 금뱃지가 새겨졌다.
그는 누구나 알다시피 해방 아니 분단 이후 최초, 최대의 노동자 대중운동을 세워낸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가 일어선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자본으로서도 최대의 위기였고, 그 이후 자본은 스스로 축적전략을 달리해야만 했다.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대중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전략이 대중의 삶을 강제했다. 그리하여 노동현장의 구호가 그가 운동을 시작했던 87년과 다르지 않은 지금, 지금 등원한 단병호는 원망스럽다. 과연 마지막 징역을 나오면서 우려하던 민주노동당의 그 문제들은 해소된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져버려야 할 정도로 캄캄한 노동운동의 전망을 민주노동당으로 열어낼 수 있을 것인지, 이제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동시에 운동의 굴레로 작동하지는 않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은 있는지… 많은 물음을 단병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열사정국을 주도했던 국민연합 집행위원장이었던, 명동성당에서 정원식 밀가루사건으로 뒤집힌 공안정국으로 투쟁이 사그라든 마지막에 낙망하던 이수호 위원장. 지금은 중학생이 되어버린 딸래미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사람과 반찬을 하여 찾곤 했던 명동성당의 이수호 위원장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민주노동당을 세워야한다는 그의 충심을 이해하지만 역대 민주노총 위원장과 함께 환호하는 그 뒤끝이 나는 두렵다.
한 때 나와 함께 운동을 했던 권영길 위원장. 딸래미가 집을 나가자 나를 찾아와 걱정하던 부성애로 먼저 기억하는 그 권영길 위원장에 대해 공개, 비공개적으로 비판해야 했던 그 가슴 아픈 역사가 단병호, 이수호 위원장에게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것을…
단 위원장이 민주노동당에서 함께 하자는 충심어린 제안에 가슴이 아프다. 당, 합법정당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닫아둔 적도 없고, 그리고 될 법한 소리도 들리지는 않겠지만 국회의원이라도 해야하면 해야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 함께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생디칼리스트 또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라는 적개심 어린 소리를 당분간 더 들어야 할 것 같다. 운동의 지형이 바뀔 것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나, 제도언론까지도 얘기한다.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든, 의제적인 노사정합의를 배경으로 하는 민중주의적 정치에, 의회주의적 정당에 종속된 노동조합에 갇힌 노동운동, 노동자 정치운동의 역사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기에… 특히 지구적인 수준에서의 자본의 긴장이 강화되고 더구나 무장한 세계화로 옥죄어 오는 지금.
나, 개인에게는 운동의 3기로 접어드는 시기로 다가온다. ■

2004-04-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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