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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비판 ― 코르닐로프 반란

현장에서 미래를  제98호
Metheus


[다함께] 비판 ― 코르닐로프 반란


Metheus
www.another0415.net 2004-03-25



전술을 논하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코르닐로프 반란’이나 논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가(심)해 보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으리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좌파진영의 어느 한 “전술”의 근거이니까요.

1.
먼저 현 탄핵정국에 대한 좌파들의 전술을 보자. 그것들에게서 정세변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결여되어 보인다. 또한 전술 도출을 위한 치열한 노력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정세변화는 전술의 변경을 요구한다. 물론 전술의 변화는 정세의 변화가 그것을 요구할 때 만이다. 지금은 정세의 변화가 전술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좌파들은 이에 대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해오던대로 혹은 그보다 못한 전술로 정세에 즉자적이고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민중탄핵”, “국민발의제”, “국민소환제” 등등은 “의회탄핵”과 “탄핵”을 통해 확인된 “의회정치 파탄”에 대한 즉자적이고 수동적인 대응이다. 노무현의 탄핵을 주장하려 했거나 직접민주제를 주장하려고 했어도 이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주장되었거나 전략적으로 주장되었어야지 탄핵국면에 새삼스레 주장될 것은 아니다. 그러한 탄핵되어야 할 사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고, 의회정치(대의정치) 파탄과 직접민주제에 대한 주장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주장되었던 것이다. 정세가 변하자 이런 구태의연한 것들을 새삼스러운 듯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무능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2.
이와는 다르게 [다함께] 동지들은 현 탄핵정국에서 전술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좌파조직보다 우월하다. 정세가 변화하자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민감하게 대처하려는 태도는 훌륭하다. 대중이 진출하자 누구보다도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 대중들과 결합하려하고 자신의 행동을 원칙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역사의 경험에서 도출하려는 태도 역시 훌륭하다.(물론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가두에서 반전서명을 받고 3.20 집회를 조직하기 위해 쏟은 그들의 노력이다.)
물론 훌륭한 태도와 자세 그리고 선의가 전술의 올바름을 저절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다함께] 동지들이 탄핵정국에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좋은 예다. 나는 몇몇 [다함께] 동지들이 왜 잘못된 전술로 귀결됐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이 게시판에서 그 까닭의 일부를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한마디를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그들은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나는 그들이 나의 미래의 동지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들의 전술 자체에 대해서 왜 잘못됐는지를 다루지는 않겠다. 현재의 전술에 대해서 나의 주장은 이미 밝혔고(「전술을 생각한다」) 또 다른 많은 글에서 주장되고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래의 인용문을 읽고 들었던 생각과 그것과 관련된 사실, 즉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한 몇몇 [다함께] 동지의 잘못된 이해에 국한해서만 검토하겠다.

(이에 대해 이미 채만수 소장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참조를 위해 옮기겠다.)

“그들은 역시 ‘국제사회주의자들’ 다웠다. ‘다함께’는, 지금 그들의 의미만을 살려서 대략 옮기자면, ‘코로닐로프 반란 때에 볼쉐비키는 케렌스키 정권을 방어하여 반군과 싸웠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대중을 전취, 혁명을 성공시켰다’, ‘따라서 지금 노동자의 힘과 사회진보연대 등 좌파가 오불관언하는 것은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오불관언’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잘못이다’, ‘보수야당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탄핵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고, 시위와 동맹파업, 총파업을 조직하자,’ ‘3·20반전행동의 날에도 우익쿠데타 저지 슬로건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난파해 몰락해 가는 한나라당 등이 의사당에서 벌인, 그것도 계략에 빠져서 절망적으로 벌인 비극적인 코미디 한 토막을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의 군사반란과 대등하게 취급하다니! “아는 것이 병”이고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속담은 꼭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혁명적 공문구를 남발하면서 ‘이적행위’를 저지르고 있다.”(채만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 #2 )

3.
[다함께] 김하영씨는 그의 글(「민중운동은 왜 탄핵에 반대해야하는가?」,『다함께』26호)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동안 노무현이 저질렀던 일에 대한 복수로, 좌파가 우익 야당들의 노무무현 탄핵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우리가 우익의 반격을 패퇴시키지 않은 덕분에 우익 정당들이 권력을 찬탈한다면 그들은 맨 먼저 노동자·민중운동을 공격하는 일부터 착수할 것이다. 우리가 노무현을 더 나은 대안으로 지지해서 우익 야당들의 노무현 탄핵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때론 싫어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도 우익으로부터 방어해야 할 때가 있다.”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던 볼세비키는 1917년 8월(구력) 코르닐로프 장군이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이런 상황을 맞았다.”(당시 케렌스키가 볼세비키를 엄청나게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닐로프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고) “볼세비키는 코르닐로프 반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노동계급의 신임을 크게 얻었고, 결국 그 해 10월” “케렌스키 정부를 대체했다.”

볼세비키가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코르닐로프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그 “코르닐로프 반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노동계급의 신임을 크게 얻었고 결국 그 해 10월” 혁명에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김하영씨는 코르닐로프 반란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볼세비키의 전슬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선택하여 그것도 왜곡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살펴볼 것이다.

4. 코르닐로프 반란
길지만 먼저 이 사건에 대한 글을 살펴보겠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들은 가급적 인용문의 원문 그대로이다.

“5. 꼬르닐로프 대장의 반혁명적 음모. 뻬뜨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들 편으로의 소비에트의 전이.
부르죠아지는 모든 정권을 장악한 후, 무력하게 된 소비에트를 격멸하고 노골적인 반혁명적 독재의 수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백만장자 랴부신스키는 파렴치하게 말하기를, 「기왕의 여윈 손과 대중적 빈궁은 민중의 거짓 벗들인 민주주의적 소비에트와 위원회의 멱살을 틀어쥘 것임으로」 이점에서 자기는 역경(逆境)의 출구를 보노라고 했다. 전선에서는 병사들에 대한 야전 군법회의와 사형집행이 널리 시행됐다. 1917년 8월 3일에 총사령관 꼬르닐로프 대장은 후방에서도 사형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8월 12일에 모스크바 대극장에서 부르죠아지와 지주의 세력을 동원할 목적으로 임시정부가 소집한 국무협의회가 개최됐다. 협의회에는 주로 지주, 부르죠아지, 대장들, 장교들 및 까작크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소비에트는 멘셰비키들과 에쎄르들을 협의회의 대표로 보냈다.
국무협의회를 개최하는 날에 볼셰비키들은 항의의 표시로써 다수의 노동자들을 망라한 총파업을 모스크바에서 결행했다. 동시에 허다한 기타 도시들에서도 파업이 결행됐다.
에세르 게렌스키는 거드름을 빼면서 협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어떠한 혁명운동의 시도든지, 그 중에는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자의로 탈취하는 시도까지도 ‘철혈’로 진압하겠다고 을러댔다.
반혁명적 꼬르닐로프 대장은 위원회와 ‘소비에트 폐기’를 공공연하게 요구했다.
은행가, 상인, 공장주들은 금전과 원조를 약속하면서 대본영(그 때에 총사령관 참모부를 이렇게 명칭했다)에 있는 꼬르닐로프 대장한테로 줄지어 갔다.
‘동맹국’, 다시 말하면 영국과 프랑스 대표들도 꼬르닐로프 대장에게로 찾아가서 혁명을 반대하는 조치를 지체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사태는 혁명에 반대하는 꼬르닐로프 대장의 음모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꼬르닐로프의 음모는 공개적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음모에 주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음모자들은 볼셰비키들이 뻬뜨로그라드에서 혁명의 반주년 기념일인 8월 27일을 기하여 폭동을 준비한다는 낭설을 퍼뜨렸다. 게렌스키를 우두머리로 한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들에게 대들었으며 프롤레타리아당을 반대하는 테러를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꼬르닐로프 대장은 군대를 뻬뜨로그라드에 출동시켜 소비에트를 쓸어버리고 무단독재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군대를 모집하고 있었다.
꼬르닐로프는 자기의 반혁명적 진출에 대해 게렌스키와 미리 협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꼬르닐로프가 진출할 시각을 바로 앞에 두고 게렌스키가 방향을 돌연히 변경해 자기의 동맹자에게서 물러섰다. 게렌스키는 민중이 꼬르닐로프 반란을 반대하고 일어나서 그것을 격멸한 뒤에 만일 게렌스키 임시정부가 즉시 꼬르닐로프와 갈라서지 않으면 민중이 임시정부도 한꺼번에 소탕할까 두려워 취한 행동이었다.
8월 25일에 꼬르닐로프가 「조국을 구원하노라」고 선포하고 제3기병군단을 크류모프 대장의 지휘하에서 뻬뜨로그라드로 출동시켰다. 꼬르닐로프 반란에 대한 대답으로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반혁명에 대한 적극적 무장적 배격에 나서라고 부르짖었다. 노동자들은 신속히 무장을 하고 배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적위군 대열은 이 시일에 몇배나 성장되었다. 직업동맹들은 지기들의 맹원들을 동원했다. 뻬뜨로그라드의 혁명적 병사부대들도 역시 전투적 준비에 나섰다. 뻬뜨로그라드 주위에는 참호를 파놓았고 철조망을 쳐놓았으며 철도 레일들을 끊어 놓았다. 크론스타트의 무장한 해군 수천 명은 뻬뜨로그라드를 방위하려고 도착했다. 뻬뜨로그라드를 공격하는 ‘야만사단’으로 대표들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카프카즈 산간 출신인 이 병사들에게 꼬르닐로프의 진출에 대한 의의를 이해시켜 줌으로 인해 ‘야만사단’은 뻬뜨로그라드에 대한 공격을 거절했다. 선동원들은 꼬르닐로프의 기타 부대들에도 파견됐다. 위험성이 있는 이곳저곳에는 모두 다 혁명위원회와 꼬르닐로프파와의 투쟁본부가 성립됐다.
혼비백산한 에쎄르 멘셰비키 당수들과 게렌스키까지도 이 당시에는 볼셰비키들에게서 보호를 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도에서 꼬르닐로프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볼셰비키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꼬르닐로프 반란을 격파함에 대중을 동원하면서도 게렌스키정부와의 투쟁을 중지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들은 대중 앞에서 그 전(全)정책에 의해 꼬르닐로프의 반혁명적 음모를 객관적으로 도와 주던 게렌스키, 멘셰비키들 및 에쎄르들 정부의 정체를 폭로했다.
이 모든 정책을 채용한 결과 꼬르닐로프 반란이 격파됐다. 크류모프 대장은 자살했다. 꼬르닐로프와 그의 공모자 제니낀과 루꼼스끼는 검거당했다(그런데 얼마 후에 게렌스키가 그들을 석방했다).
꼬르닐로프 반란의 격파는 혁명과 반혁명간의 세력 관계를 일시에 폭로해 밝혀 놓았다. 이 사실은 대장들과 입헌민주당을 비롯, 부르죠아지의 포로가 된 멘셰비키들과 에쎄르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반혁명적 진영이 반드시 패망할 것임을 보여줬다. 힘겨운 전쟁을 오래 끄는 정책과 장기간 전쟁으로 인해 생긴 경제적 파괴가 모조리 그들의 영향을 민중 속에서 이탈 시켰던 것이다.
꼬르닐로프 반란의 격파로 인해 볼셰비키당은 반혁명의 어떠한 흉계를 막론하고 격멸할 능력을 가진 혁명의 결정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볼셰비키당은 아직도 지배적 정당은 되지 못했으나 꼬르닐로프 반란 때에 실질적인 지배적 세력으로 행동했다. 이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주저없이 볼셰비키당에 대한 지지를 실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꼬르닐로프 반란의 진압은 사멸한 듯한 소비에트가 실상 그 자체내에 혁명적 반격의 가장 강력한 잠재세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소비에트와 그의 혁명위원회만이 꼬르닐로프 군대의 진로를 끊어 놓았으며, 그들의 세력을 제거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었다.
꼬르닐로프 반란과의 투쟁은 쇠잔하기 시작한 노동자·병사 대의원 소비에트에 생기를 주었으며 타협정책의 포로에서 해방시켰고 혁명투쟁의 대로에 끌어냈을 뿐 아니라 볼셰비키당 축으로 인도했다.
볼셰비키들의 영향은 소비에트내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성장했다.
볼셰비키들의 영향은 역시 농촌에서도 신속히 퍼져나갔다.
꼬르닐로프 폭동은, 지주들과 대장들이 볼셰비키들과 소비에트를 격파하고서는 다음으로 농민들을 습격하리라는 것을 농민대중에게 보였다. 중농들은 그 동요성 때문에 1917년 4월부터 8월에 이르는 동안 혁명의 발전을 방해했지만 그들도 꼬르닐로프가 격파된 후에는 빈농대중과 결탁하면서 결정적으로 볼셰비키 측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조영명 엮음, 『러시아혁명사』, pp.204~7, 온누리, 1985)

[다함께] 동지들의 주장처럼 꼬르닐로프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의 단호한 투쟁은 볼셰비키가 “노동계급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었다. 볼셰비키는 병사들과 농민(중농까지)의 신임까지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케렌스키 정부를 대체”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에 대한 볼셰비키의 태도에 관련한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가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게 되는 그 조건들이다.

5. “코르닐로프 반란”의 배경과 경과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벌어진 시위는 봉기로 전환했고 혁명은 성공했다. 짜르를 몰아낸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기관이 만들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혁명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소비에트와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지배기관인 임시정부가 그것이다. 이중권력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점차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부르주아지의 영향에 노동자계급이 감염되어서인데 소비에트 내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우위를 차지하면서 임시정부를 사실상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하에 투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정부의 즉각 타도와 무장봉기를 호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구체적 정세에서는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의 평화적인 이행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월 테제]는 제국주의 전쟁의 종식과 부르주아지와 연합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전면 결렬을 주장함으로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양자로부터 비난받았으며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대립을 가져왔다. 케렌스키는 7월 4일 무장시위를 호소, 선동, 격려, 조직, 지도한 사람들을 전원 체포하여 ‘혁명에 대한 반역자’로서 재판에 회부하기로 한다.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는 독일첩자로, 반역자로, 무질서 옹호자로 탄압받고 체포되거나 피신해야 했다. 이것이 앞의 코르닐로프 반란 직전까지의 러시아의 정세였다. 이때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유보하기를 주장하고(“[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이양되어야 한다]는 슬로건은 평화적 발전의 길 위에서 다음의 일보, 즉각적으로 실행 가능한 일보를 위한 슬로건이었다. 그것은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슬로건이었는데, 2월 27일과 7월 4일 사이에는 그것이 가능했고 또 마땅히 가장 바람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레닌, 「슬로건에 대하여」) “현재의 반혁명 및 현재의 소비에트의 배신에 맞서 싸우는 문제”에 대해 강조한다. 이와 같은 경로를 거친 후 형성된 정세는 아래와 같았다.

“코르닐로프가 전국에 반란지지를 호소하기 전만 해도 반동세력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군대내에서, 농촌에서, 그리고 소수민족 내부에서 승리하고 있는 듯 하였다. 군부지도자들, 유명인사들 그리고 두마의원들, 운행가들, 구지도자들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듯 보였다. 밀류코프는 [혁명은 끝났다]라고 파악했었다. 교회는 구래의 방식을 적당히 되풀이하면서 죄많은 인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였으며 사형집행관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월혁명의 지도자들은 제헌의회를 또 연기하였고 체레텔리의 경우, 사형폐지안에 반대하는 등 그처럼 반동세력에게 고분고분할 수 없었다. 반정부세력은 이제 끝장난 것으로 여겨졌다. 7월 이후, 무정부주의자들은 사라졌고, 볼셰비키는 도피했거나 은신 중이었다. 레닌은 변장하여 핀란드에 숨어있었고 트로츠키와 그의 동료들은 수감되어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두 달 동안 반동의 성공은 너무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기 때문에 레닌은 이 시점에 있어서 군부의 반란이란 전혀 무의미한 짓이라고 확신하고는 반란루머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다. 코르닐로프 역시 권력을 잡는 데에는 단지 손만 뻗으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마르크 페로, 『1917년 10월 혁명』, 거름, pp.86~7)

이러한 상황에서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더욱 반동적인 정책(계엄령의 권한확대와 후방에 대한 사형제 도입)을 요구한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이를 거부하지만 협상에 응한다.

“협상에 응하여 그가 내놓은 조건들을 수락하는 체 하였다. 여기에 하나의 계fir이 숨어 있었다. 그는 코르닐로프에게 마치 르보프(홀리 시노드의 총독-인용자)가 질문자인 것처럼 하여 그의 요구조건들을 르보프에게 명기하여 주도록 하였다. 코르닐로프는 르보프에게 구두로 말한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주었으니 이번에는 그가 덫에 걸려든 것이다.”(마르크 페로, p.80)

케렌스키는 각료회의를 소집하여 코르닐로프의 쿠테타기도와 그의 해직을 알렸고 “코르닐로프 장군이 조국과 혁명을 배반하였다.”고 전국소비에트에 알렸다. 코르닐로프 반란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사실 반란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나 버렸다. “케렌스키는 군대의 ‘무혈반란진압’을 축하하였다.”(마르크 페로, p.82) 그러나 정세의 복잡함은 코르닐로프의 반란이 마치 임시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여겨지게 된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역시 사태를 그렇게 보고 임시정부 방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코르닐로프를 반대하지만 이것이 코르닐로프 행동의 공범자인 임시 정부를 방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즉 그는 코르닐로프에 대한 투쟁을 계속 벌이면서 임시정부와 그 조수로 전락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폭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레닌은 “‘코르닐로프를 제거하라, 케렌스키를 지지하지 말라’는 슬로건은 민중들의 여망이었던 반동분자들과의 투쟁에 부응하고, 또한 케렌스키의 행동을 묵살함으로써 그가 코르닐로프에 대한 승리에서 얻게 될 민중들의 신임을 사전에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마르크 페로, p.84)

“대(對)코르닐로프 방위조직을 구성하는 가운데 민주진영의 정당지도자들은 서로 손을 잡게 되었다. 소비에트비상회의가 진행되던 8월 27~28일 밤 그들은 자기 노선을 확정하였다. 반코르닐로프 투쟁은 반혁명세력에 대한 혁명세력의 투쟁이 아니라 단지 반혁명세력이 취할 수 있는 상이한 두 방법간의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는 서로 취한 방법이 다를 뿐이지 모두가 반혁명세력으로서 투쟁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하는 종전부터 고수해온 입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까지 계속 논쟁이 되어 왔던 입장으로서 멘세비키, 사회혁명당과의 연합을 통해 고립상태를 벗어나자는 입장이었다. 투쟁의 사회적 기초가 확대되고 소비에트가 다시 7월사태 이전과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연합논리를 단순하게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지도부와의 협력을 다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볼셰비키 조직들은 또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레닌도 비록 자신의 부재중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이러한 노선변경을 인정·지지하였다.”(마르크 페로, 같은 글, p.82)

김하영씨 말대로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는 소비에트로부터도 엄청난 탄압을 받았었다. 이러한 반동의 시기에 코르닐로프는 반란은 반동이 득세하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감행된 것이다. 코르닐로프와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케렌스키가 함께 반혁명의 길을 갔다는 것이나 코르닐로프가 군부독재를 획책하는 수구반동세력이고 케렌스키가 자유주의자이고 개량주의자인 것이나 또 “민주주의자로서 그(케렌스키―인용자)는 코르닐로프의 주위에 운집해 있던 반혁명분자들과 반유대주의자들에게 강한 증오감을 느꼈다”(마르크 페로, p.84)는 점이나 코르닐로프를 제거하고 싶었고 그를 덫에 빠지게 한 후 제거한 것(마르크 페로, pp.80~1)을 보았을 때 코르닐로프 반란과 현재의 우리와 유사한 점은 있다. 즉, 한민자와 열린우리당이 함께 파병을 결정하고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을 비준하고 각종 신자유주의정책을 공조하는 것으로 함께 같은 길을 갔다는 것이 그렇고, 최병렬 등이 수구반동세력이고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라는 것이 그렇고, 노무현이 그들에게 증오감을 갖고 있는 것이 그렇고, 덫에 빠지게 한 것이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사소한 유사성을 제거하면 당시의 객관적 조건과 현재의 그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2월혁명-노무현 당선(?), 이중권력(임시정부, 소비에트)-이중권력(?)(대통령-의회)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다.

6. 케렌스키와 임시정부에 대한 레닌의 태도.
“코르닐로프 반란은 대단히 예기치 않은(그런 실점에, 그런 형태로일 것이라고는 예기치 않은), 그리고 완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사태 전환이다.
모든 급격한 전환이 다 그렇듯이, 그것은 수정과 전술상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모든 수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원칙하게 되지 않기 위하여 극도로 신중(extra-cautious)해야 한다.
무원칙하게 되는 자들은, (블로쟈르스키처럼) 방위주의로 미끌어져 들어가거나 (다른 볼셰비키처럼) 사회혁명당원들과의 블럭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그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오류이며 무원칙하다. 우리는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로 이양한 이후에만, 강화제의 이후, 비밀조약을 깨고 은행과 절연한 이후, 이러한 연후에야만 방위주의자가 될 것이다. 리가의 함락도 페트로그라드의 함락도, 우리를 방위주의자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나는 볼로쟈르스키가 이 글을 읽게 되면 대단히 좋겠다). 그때까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고 저쟁을 반대하며 방위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심지어 지금도 우리는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무원칙한 것이다.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오? 물론 우리는 싸워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이, 타협으로 굴러떨어져 자신을 사태의 추이 속에서 휩쓸려가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몇몇 볼셰비키가 내딛고 있는 길과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엔 분리의 선이 존재한다.
우리는 케렌스키의 군대와 꼭 마찬가지로,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울 것이며 또한 케렌스키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의 나약함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차이점이다. 이것은 다소 미묘한 차이이지만 매우 본질적인 차이인 것이며, 망각해서는 안되는 차이이다.
그러면, 코르닐로프 반란이후 우리의 전술상의 변화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케렌스키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형태를 바꾸고 있다. 그를 향한 우리의 적개심을 조금도 누그러뜨림이 없이, 그에 반대하여 말한 단 한마디의 말도 철회함이 없이, 그를 타도해야 하는 임무를 포기함이 없이, 우리는 당면한 정세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당장 케렌스키를 타도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 맞서 싸우는 임무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인민들(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고 있는)에게 케렌스키의 나약함과 동요를 지적할 것이다. 이 임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수행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것은 그야말로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변화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변화란, 그야말로 중요한 이 임무가 이제는 케렌스키에게 다음과 같은 일종의 ‘부분적 요구들’(partial demands)을 제출하는 우리의 운동(campaign)을 강화시키는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밀류코프를 체포하고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며 크론쉬타트와 비보르그와 헬싱키호르스의 군대를 소환하고 두마를 해산시키며 로드쟌코를 체포하고 지주소유지의 농민으로의 이양을 합법화하며 곡물과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를 도입하는 것 등등의. 우리는 이러한 요구들을 케렌스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고 케렌스키에게라기 보다는 오히려, 코르닐로프에 대항한 투쟁의 추이 속에 휩쓸려 온 노동자, 병사, 농민들에게 제출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열의를 유지해야 하며, 코르닐로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성과 장교들을 처리하도록 해아 하며, 코르닐로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성과 장교들을 처리하도록 그들을 고무해야 하며 토지를 농민에게 즉각 이양할 것을 요구하도록 그들에게 역설해야 하며 로드쟌트와 밀류코프를 체포하고 두마를 해산하며, 『레치』 및 기타 부르조아 신문들을 폐간시키고 이들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는 것이 필요함을 그들에게 제의해야 한다. ‘좌파’ 사회주의혁명당원들에게는, 특히 이와 같은 방향으로 역설해야 한다.”(레닌,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게」,『레닌과 사회주의 혁명』,태백, 1989.)

(이 글은 1917년 8월 30일에 쓰여졌고 1920년 11월 7일 최초로 발간되었다. 레닌은 글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때로는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사태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짧은 편지는 너무 늦게 당도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이 편지를 수요일에 쓰고 있는데, 빨라야 9월 20일 금요일이 되어서야 수취인들이 받아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나는 다음의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에 비해 우리의 너무나 좋은 여건이란…. 게으름은 우리의 중요한 내부의 적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자. 레닌이 언급한 “무원칙하게 되는 자들”에는 현재의 [다함께] 동지들이 들어간다. 그들은 열린우리당원들과의 “블럭으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사람들”의 하나로 되고 있다. 그러한 [다함께] 동지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오류이며 무원칙하다.”
당시의 레닌이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처럼 우리 역시 노무현 정부를 지지해서는 안된다.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워야만” 했던 것처럼 우리도 보수반동세력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타협으로 굴러떨어져 자신을 사태의 추이 속에서 휩쓸려 가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몇몇 볼셰비키가 내딛고 있는 길과 똑같”은 길로 가서는 안되는 것처럼 우리도 현재의 [다함께]와 같은 길로 가서는 안된다.
“케렌스키의 군대와 꼭 마찬가지로,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케렌스키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의 나약함을 폭로”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수구반동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노무현의 반노동자․반민중성을 폭로하여야 한다.
당시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슬로건이 ‘임시정부 방위’였던 것과는 반대로 볼셰비키의 슬로건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다. 그런데 [다함께] 김하영씨는 러시아혁명을 들먹이며 ‘노무현 정부를 방어해야 한다’고 한다. 웃지도 못할 일이다.
“밀류코프를 체포하고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며 크론쉬타트와 비보르그와 헬싱키호르스의 군대를 소환하고 두마를 해산시키며 로드쟌코를 체포하고 지주소유지의 농민으로의 이양을 합법화하며 곡물과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를 도입하는 것 등등의”, “요구들을 케렌스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고 케렌스키에게라기 보다는 오히려, 코르닐로프에 대항한 투쟁의 추이 속에 휩쓸려 온 노동자, 병사, 농민들에게 제출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열의를 유지해야 하며, 코르닐로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성과 장교들을 처리하도록 해아 하며, 코르닐로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성과 장교들을 처리하도록 그들을 고무해야 하며 토지를 농민에게 즉각 이양할 것을 요구하도록 그들에게 역설해야 하며 로드쟌트와 밀류코프를 체포하고 두마를 해산하며, 『레치』 및 기타 부르조아 신문들을 폐간시키고 이들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는 것이 필요함을 그들에게 제의해야 한다. ‘좌파’ 사회주의혁명당원들에게는, 특히 이와 같은 방향으로 역설해야”했던 것처럼 우리는 “파병반대”, “파병군 철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 무효화”, “신자유주의 정책 철회”등의 요구를 노무현에게 아니 노무현에게라기 보다는 오히려, 수구보수세력에 대항한 투쟁의 추이 속에 휩쓸려 온 대중들에게 제출해야 한다. (동요하거나 혼란에 빠진) 민주노동당원들에게는 특히 이와 같은 방향을 역설해야 한다. 현재 [다함께]는 이렇게 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대중을 오도하고 있다.(김인식, 「민주노동당은 탄핵 반대운동을 지지해야」, 김하영「민주노총이 탄핵반대 투쟁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함께 27호』) 이 역시 웃지 못할 일이다.
마지막 하나 더 김하영씨는 “노동자․민중진영의 강화는 한쪽 옆에서 팔짱끼고 서 있는다고 해서 얻어지는게 아니다.”라고 타이르며 “노무현 지지자들과 뒤섞일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중요한 것은 이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진영의 투쟁으로 나아가도록 애쓰는 것”이라는 내용 없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대중을 전취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는 “그동안 가장 단호하고도 일관된 입장를 견지해 온 볼셰비키”였다는 것과 “볼셰비키 세력이 그토록 급격히 확장된 데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정치현상의 저 밑에 잠재해왔던 대중들의 과격화 경향이었다. 정국의 위기를 통해 대중들의 과격화 경향이 급작스럽게 노출된 것뿐이다.”(마이크 페로, p.87)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7. 사족
― 나의 인용글이 모두 스탈린주의에 오염된 것이라 매도될 우려에 대한 노파심에서 트로츠키의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해 평가한 글을 덧붙인다.

[코르닐로프 사건은 우리 쪽에 유리한 상황을 급격히 조성하면서 그간의 견해 차이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히는 작용을 했다. 그러나 견해 차이는 가라앉았을 뿐 소멸되지는 않았다. 이 때 우파는 혁명을 방어하고 그리고 일부분 조국을 방어한다는 기조 하에 소비에트 다수파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경향에 대한 레닌의 반응은 9월초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 나타났다. “원칙에서 이탈하고 있는 자들은 조국방위주의로 미끄러져 들어가거나 다른 볼셰비키들처럼 사회혁명당과 연합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들의 태도는 무조건 틀렸으며 무원칙하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정치권력이 넘어간 후에야 우리는 조국방위주의자가 될 것이다. … 지금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무원칙한 행위이다. 누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코르닐로프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을 것인가? 물론 우리는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분계선이 존재한다. 일부 볼셰비키들은 이 선을 넘어서서 타협을 하면서 사태 전개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레닌,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게」(1917년 8월 30일)『vol. 25.pp.285~6』)](트로츠키, 「10월의 교훈」,『10월의 교훈 및 이행기 강령』, pp.42~3, 풀무질, 1996.)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에 볼셰비키가 유리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는 것은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트로츠키는 앞서의 레닌의 글을 인용한다. 이것은 그가 레닌의 평가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제자들을 자처하는 [다함께] 동지들과 반대로 주장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8. 사족 2
이 글을 쓰던 중에 교수님 세분이 [함께] 발표한 글을 읽게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이 그에 대한 비판이 아니므로 한마디만 언급하겠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이걸 또 공부해야 하는가?)이 언급된 그 글에서 세 분 교수님들의 충정(좌파가 정세에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하고, 대중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몇몇 슬로건에 대한 비판은 나도 공감한다.)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글은 교수님들다운 박식함을 자랑하는데는 충분한 글일지는 모르지만 “원칙에서의 이탈”이며 정세인식의 오류에서 발생한 잘못된 주장이다. 이것이 나의 한마디이다. ■

2004-04-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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