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 1심 판결에 부쳐
박이용준
송두율 교수 추방 및 처벌에 반대하는 청년학생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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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징역 7년에 처한다’
중형이 예상되기는 했었다지만 방청석은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이와 안타까움과 고통의 눈물을
훔치는 이가 만들어 낸 축축한 공기는 장내를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 서둘러 떠나는 재판부와 검사를 등진 채, 어수룩하게 서
있는 송두율 교수. 그의 어깨를 보듬어 줄 사람은 그 순간
아무도 없는 듯 했다. 그리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그의 벗들
또한 건넬 말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이제 막 민족의 새 세기를 시작하려던 어느 3월의 늦봄은,
그렇게 자신과의 대화가 중단되어 버린 역사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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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재판결과는 실망을 넘어 민망 그 자체였다. 회를
거듭하는 재판과정에서 검찰이 공소사실에 대한 유력한 증거라고
제출한 것은 고작 월남한 북 고위관료의 진술과 그에 따른
정황추측뿐이었으며, 그 증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원고측 기관의
북한바로알기 부문 비공식 홍보대사나 다름없었다. 이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하지만 이 번 판결이 갖는 민망함의 백미는 따로
있다. 재판부가 발휘한 위대한 똘레랑스 정신이 그것이다.
재판부는 뚜렷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 한 검찰에 관대했으며,
정황증거를 통한 그들의 추측마저 용인해 버렸다.
재판부의 판결문을 읽어 내려다가 보면 송두율 교수가 왜
7년이나 받았는지 감이 잡힌다. 사상범, 양심범을 다루는
사법․공안당국의 필모그래피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의
죄목에 대한 무게는 아무래도 ‘괘씸죄’에 실린 듯 하다. 다시
말해, 높으신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음을 채근한다는 뜻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송두율 교수가 남북통일을 위해 기여한 점,
그가 분단의 희생자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선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중형을 선고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피고의 반성 여부가 사법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근대 민주주의의 법치를 근간으로부터 부정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반성하라고 강제하는 법은
하나도 없다. 행여,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니다.
반성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강요하거나 권장할 일이 아니라,
개개인의 양심과 도덕에 맡기면 그만인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 요긴하게 사용하라고 헌법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용과 절차에 하자가 없다는 재판부의 입장은 존중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판부는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의 통일을 앞당기는 것보다 피고가 피의 사실(의
진위 여부는 제외하고)을 깊이 반성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가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유지라고 하였으나, 헌법은 전문에서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것’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 모두를 밝히고 있다. 똑같은 비중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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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가 기소된 날부터 국내․외의 여러 인권단체와
언론계, 학계는 본 재판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해 왔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인간이 가지는 기본권인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법으로 구속하는 것에 대하여 규탄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잇따른 탄원과 성명이 진정 담고자 했던 것은
국가보안법의 존재에 대한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지난 4월
6일에 있었던 국가보안법에 대한 『송두율 교수 석방과
사상-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의 헌법소원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다. 당일 기자회견 중에 대책위
송호창 변호사가 밝혔다시피, 국가보안법 3조에 대한 헌법소원을
시작으로 이 법의 폐지를 위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셈이라 볼 수 있다. 실망스런 선고내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판결로 말미암아 국가보안법은 다시 한 번 이슈의 중심으로,
개폐의 사정권 안으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전개 될
우리의 운동방향도 이 지점으로부터 모색해야 하는 바,
국가보안법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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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법원의 판결은, 송두율 교수가 그동안 쌓아 온 학문적
성과의 가치를 ‘남한의 착하고 순수한 범생이들을 충동질시킨
삐라’ 정도로 평가절하 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송두율
교수의 실체는 남한 사회의 분열을 기도한 주체사상 전도사이며,
주체사상파를 비롯한 철없는 학생운동의 좌익․폭력성은 송
교수로부터 나고 그로부터 자란 것이다. 문득, 복잡한 머리 속을
가로지르며 순진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나도 그 책을 읽었는데, 그럼 나도 주사파인가? 처벌과 감시의
대상인가?’
혼란스러움을 견디다 못 해 주위의 친구들에게 그 답을 청했다.
그랬더니, 평소 불확실성을 대함에 있어 내재적 접근법으로
일관하는 그들의 대답은 ‘아니’였다. 그렇다면, 주체사상
전도사와 영접한 자, 그리고 불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란
무엇일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 처벌을 받는 최근(독재정권시절의 보안법
적용은 정권유지의 필요충분조건에 지나지 않았으므로)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어이가 없다 싶을 정도로 법 해석과 적용의
범위가 모호하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말처럼 정말 고무줄이다.
가장 뚜렷한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것은 법적용이 형평의 원칙에
심각히 어긋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K대 법대〉사건의
경우에는 「체 게바라 평전」이 좌익 활동의 물증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된 「체 게바라 평전」은 대형서점에 전시되어
팔리고 있으며, 심지어 중․고등학교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기도 한 책이다. 이 책이-공안당국이 판단하기에-정말로
북한을 이롭게 하는 좌익 활동의 명백한 물증이라면, 긴급히
전국 서점과 도서관에서 회수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리고는 이
책을 읽은 사람 모두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야 한다. 언젠가
좌익용공분자로 돌아설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또 하나는 국가보안법의 적용이 고등학교 교과서 수준도
따라가지 못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진보의련〉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 중 자본주의 비판이 있었는데, 당시
공안기관은 자본주의에 적대감을 갖고 그 붕괴를 주장하는 것이
체제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했었다. 자타가 공인한 엘리트가 모인
집단에서 (자본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자본주의
붕괴〓공산주의’라고밖에 생각하지 못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누구 말처럼 정말로 건수를 높이기 위한 의도적
단세포증후군일까? 물론, 이 경우에도 처벌의 범위는 임의로
정해진다. 숱하게 깔린 반자본주의 관련 저서와 반자본주의
운동가는 애초부터 이들의 관심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나 있지만,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만큼 이쯤으로 해 두자. 결론적으로,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전도사와 영접한 자, 불신자를 특정하지
않는다. 전도사의 죄를 묻는가 하면, 불신자에게 법을
적용하기도 한다. 법률이 허하는 자유가 어디까지인지
따져본다는 것이 웃긴 일이지만, 불분명한 경계를 제시하는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로
재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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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은 사건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대학사회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학사회에서
교수나 동료, 혹은 선․후배 사이의 학문적 교류는
사회일반의 그것보다 비교적 활발하다. 그러다 보면, 다양한
학문의 폭을 경험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고, 그 바탕에서 토론과
논쟁, 그리고 배움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이것으로 토대는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이제 국가보안법의 고무줄에 걸리는
일만 피하면 된다. 비단, 대학만이 아니다. 모든 배움 공동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책을 읽는 일, 그 책을 갖고 스터디를
하는 일, 서구진보사상 등에 심취하는 일 등은 항상 불안을
각오해야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송두율 교수의 1심 선고 이후에 국가보안법에
대한 개폐논의는 더욱 활발해 지고 있다. 아울러, 그 의지와
단결력 또한 어느 때보다도 높다. 17대 총선에서 다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과 원내 3당이 된 민주노동당의 소속 의원
대부분이 국가보안법 개폐의 필요성을 진작부터 역설해 왔던 바,
법안 개폐의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학을 비롯한 여러 배움 공동체들은
국가보안법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를 확보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책임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의 역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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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지만, 내 주위엔 송두율 교수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혹시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부분 수구언론에서
조각해 낸 ‘간첩 송두율’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젠,
그나마도 희미한 것 같다. 송두율 교수는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여론의 관심 밖으로도 밀려나 버렸다. 송두율 교수를
무죄 석방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은 자명해졌다. 지금 상황에선
무엇보다도 그를 알려내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가 왜 무죄인지를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그 다음이다. 특히 대학사회와 배움
공동체 안에서 그를 알려내야 하며, 국가보안법의 반민주적이고
악랄한 면 또한 동시에 알려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옥죄려는
대상 1순위는, 마음 가득한 열정으로 지식과 정보를 배우고
나누려는 캠퍼스의 젊음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송두율 교수를 다룬
다큐멘터리-경계도시 상영을 준비 중이고, 여러 학교를
순회하며 독서모임도 개설할 계획이다. 송 교수의 저서를 읽고
느낌을 적어보는 작문대회는 이미 추진 중에 있다. 모두가
송두율 교수를 알려내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는 본래 우리의
권리였던 사상과 양심, 학문의 자유를 되찾는 데 튼튼한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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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은 ‘사람은 누구나 정당한 법률에 복종해야 할
합법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부당한 법률에 불복해야 할 도의적인
책임도 있다. 인간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법은 어느 것이나
정당한 법이다. 이와 반대로 인격을 타락시키는 법은 모두
부당한 법이다.’ 라고 했다. 자신의 생애와 명예와 사랑을
걸고 부당한 법에 온 몸으로 맞서고 있는 경계인 송두율 교수.
2심에서 그의 선전과 승리를 기대 해 본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