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속공
이영민 / 철도 노동자
87년식 농성
KTX 승무원들이 서울역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이틀간,
상황은 바뀌었다. 기세가 등등하던 경영진이 당황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저항선이 무너지며 심리적 공황상태 직전인 것 같다.
이제 됐다. 두 달 이상의 치열한 대치상태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느낌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일 수 있으면 해고국면은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 같다. 이럴 때 기습적인 보조공격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농성을 하는데, 자기들끼리 잘들 논다. 틀에 짜인 집회가 끝나면
그 다음은 자기들 세상이다. 준비한 프로그램이 없는데도 춤도
추고, 노래 배우기도 하고, 손님들에게 안내방송을 한다.
준비되지 않은 선동이(자기는 선동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있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고, 육성으로 하는 노래가 가슴을 울린다.
“꼭 87년 때 파업하는 것 같네. 선수들보다 더 잘하네.”
“신선해요, 모든 게 다 신선해요.” 동료나 해고된 후배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이다. “진정성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때가 묻지 않아서 그럴 거요.” 이런 이야기도 오가고.
연대투쟁 오는 동지들도 신이 나는 표정들이다.
처음 하는 투쟁도 대개는 선수들이 형식을 다 짜놓고 맞추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들은 경험이 없고, 자신도 없으니까 대개는
지도하는 대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 때는
그런 한계를 많이 느꼈다. 수십 차례에 이르는 집회가
관성화되고, 아무 감동도 없고, 의무적이고 의례적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하냐? 비록 서투르기는 해도
자기들끼리 판을 짜고, 자기들끼리 돌아가며 사회를 본다.
그런 분위기에 오염되어 어어 하는 사이에 나까지 앞에 끌려
나가고 춤까지 추게 되었다. 율동이니 하는 것은 아주 질색을
하는 편이지만 그럭저럭 해치웠다. 88년 처음 파업할 때
기분으로 돌아간 것 같다.
사지에 빠져본 경험이 없으면
중국 홍군은 2만 5천리 대장정 끝에 보석처럼 빛나는 정예
혁명가들을 얻게 되었다. 그뿐이랴? 중국을 뒤엎을 전략과
전술을 얻었으며 그것을 가다듬었다. 사지에 빠져본 경험이 없는
장수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즘 한다하는
지도부들은 어떠한가? 싸우기도 전에 미리 겁을 집어먹고,
어떻게 적당히 수습할지 그것부터 걱정하는 것 같다.
우리 조합은 누가 보아도 12월초 파업에 들어가는 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2월로 늦추는 안이 나오고, 그것으로
조직이 혼란에 휘말렸다. 겨우 수습은 하였으나 걱정이다.
조합원이 지도부의 투쟁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투지를 발휘할
수 없다. 손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출정명령을
내리는 날에는 병사들 중 앉은 자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누운
자는 눈물이 턱에서 교차한다. 그러나 더 갈 곳이 없는 결전의
상황에 처하게 되면 병사들은 전제와 같은 담력, 조귀와 같은
용력을 보이게 된다.”(전제와 조귀는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와
노나라의 용사로서 용기와 담력의 화신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명령을 내려야 할 지도부가 겁을 집어먹고 있으면?
조합원들은 각자 제 살 길부터 찾기 마련이다.
“해고통보를 받고 간부들이 의외로 담담해요. 진짜 해고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그럴까요?” “아니지, 진작부터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그런 거요. 옛 말에 이르기를 사지에 빠져본
장수가 아니면 승리할 수 없다 하였소.” “그게 무슨
말인데요?” “뭐, 하여간 그런 말이 있소.” 연약한 아녀자들도
이런 용기를 보이거늘.(중국식 표현을 빌린 것이지 여성동지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님).
속공
강한 군대는 필요하면 하루에 80키로의 강행군도 해치운다
하였다. 삼국지에서 사마의가 상용에서 맹달을 쳐부술 때나
중국의 홍군 모두 강행군을 통한 기만과 포위공격을 장기로
삼았다. 주어진 시간은 11월 30일, 이때까지 태세를 갖추지
못하면 개별 재계약통보에 조직이 무너진다. 어떻게 해야
조합원을 하나로 묶어 재계약 국면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냐?
지도부는 조직정비를 결정하고 강행군하기 시작했다. 조합원
교육 15회, 소속노조 변경 및 희생자 보상에 관한 찬반투표
2회(1회는 법률상의 요건을 갖추기 위한 형식상의 투표이다.),
전 조합원 어용노조 탈퇴 및 가입원서 작성, 집회 3회, 농성
시작, 가장 중요한 연대투쟁 사업장 방문 등을 해치웠다. 10월
29일부터 20여일 사이에 진행된 일들이다. 이 사이에 회사측은
어떤 일을 하였나? 간부들과 대의원들을 선별 해고하기 위해
감사실 출두 각 3회씩, 노조 지침에 따른 승무원 6명에 대한
승무정지 및 경고조치, 평조합원 감사실 출두 조사 총12회, 사장
이메일 발송, 승무본부장 이메일 및 게시물에 의한 협박,
특별채용으로 흔들기, 우편으로 선별재계약 통보, 전화를 통한
회유와 협박 등 파상공격을 진행했다. 그런 공격을 견디고
적절히 막아내며 전열을 정비해온 것이다. 부당노동행위
고소고발 및 체불임금 쟁취를 위한 고소도 진행되었다. 역시
실무적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간부들이 매우 힘들어 하였다. 첫째, 전임자가 한명도 없으니
실무에 치이고, 무엇보다 공격을 당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
따른 무력감을 호소하였다. “전열을 정비하지 않으면 크게 붙을
수 없지요. 지금 잘 방어하고 있으니 조만간 힘쓸 때가 있을
거요.”
농성을 시작하고 나서 간부들 얼굴이 펴졌다. 회사쪽이
흔들리거나 약세를 보이는 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한 달을 지냈는지 모르겠어요. 간부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버텨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러니까 궁즉통이라는
말이 있는 거요.” “그게 무슨 말인데요.” “뭐, 하여간 그런
말이 있소.(우물쭈물)”
속공의 결정판은 하루사이에 이루어졌다. 회사에서 선별재계약에
대한 우편통지들 보냈다는 게 확인된 순간 하루 만에 농성을
이끌어낸 것이다. 회의를 하고, 비상을 걸고(문자로), 호소문을
내걸고, 일일이 전화를 하고, 그리고 농성시작이다. 회사측에서
보낸 우편물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농성을 만들어 판을
뒤바꿨다. 농성장에 조합원들이 속속 도착할 때 간부들의 느낌을
무엇으로 설명하랴.
새마을호
새마을호 여승무원 교육을 두 번 했다. 총회 두 번에 공동투쟁을
결정했다. 공사는 새마을호 승무원과 KTX 승무원들을 전문
외주업체에 위탁할 생각인 것 같다. KTX가 해고국면을 넘기면
처지가 같아진다. 예상한 대로 불만이 높았다. “왜 우리에게는
싸우자고 제안하지 않지요? 직장에 온통 KTX 프랑카드만
걸어놓고.” (내 그럴 줄 알았다. 불이 옮겨 붙고 있구나.)
“미안합니다. 그쪽 상황이 워낙 급하다 보니.” “우리는
조합원이고 그쪽은 아직 조합원도 아닌데, 하여간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본래 새마을호 승무원들은 KTX에 대하여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에는 새마을호가 최고 등급의
열차였는데 한쪽으로 밀려버린 기분이 된 것이다. “KTX는
캐리어를 주는데 우리는 가방만 들고 다니라 하지요,
그뿐인가요. 객차 안에서도 KTX는 캐리어를 주고 우리에게는
종이박스 같은데 신문을 담아서 서비스를 해야 하지요, 옷도
우리는 촌스럽고 그쪽은 오히려 정규직하고 똑같은 옷을
주고...” “KTX는 여러분을 부러워해요, 공사소속이라고.”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 새마을호 투쟁을 통해 정규직이 된
친구가 계속 집회에 참석하고, 사무실도 방문하여 용기를
북돋워준 탓이다. 무엇보다 바로 옆에서 서로 투쟁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게 결정적일 것이다. 지금은 투쟁수위가
너무 달라서 조절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요구안도
통일시키고, 그러자면 연석회의를 한번 해야 할 것 같다.
공동투쟁의 지도부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이래저래 자꾸 일은
벌어지는데 감당해야 할 간부들은 극소수이니 그것이 유일한
걱정이다.
피로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머리가 맑지 않으면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여유를 잃어 초조해지기 쉽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사무실에 전화를 하니 지부장도 같은 상태인 것
같다. 일요일인데도 나와서 투표를 진행하고 내일 농성을
준비하고 있는 간부들이 고맙다.
관계
대전에서 비정규직 교육을 만들었길래 쫓아갔다. 역무, 시설,
전기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 놓았다. 어려운 조건에서
분투한 동지의 노고가 눈에 보인다. 솔직하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결국 여러분이 스스로 나서 싸워야 한다. 정규직
노조가 해주겠거니, 정규직이 해주려니 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고 누누이 이야기했다. 그래놓고 “어쨌든 노동조합에 가입을
하셔야 합니다. 모두들 가입하시겠죠?” 하고 물었다. 묵묵부답,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처음 보는 친구가 와서 열변을
토하더니 노조에 가입하라고 한다. 너 같으면 하겠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노조에 가입하면 계약위반이고, 그래서
해고되기는 십중팔구이고, 네가 말하는 이상은 좋지만 그야말로
이상일 뿐인데 해고를 각오하고 덜컥 가입을 하겠는가 말이다.
“지금 노조에 가입하라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가입해도 다음
대책이 없으면 가입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죠. 나는 교육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사람들 의식화를 시켜놓지
않으면 노조에 가입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요. 이게 여기
지역의 현실입니다.” “네, 동지가 하는 방법이 아무래도
정공법인 것 같아요.”
모든 일은 관계가 우선이다. 관계를 만들어놓고, 서로 믿음을
쌓아놓지 못하면 모래위의 탑에 지나지 않는다. 믿음직한 동지를
뒤로하며 다시 한 번 섣부른 욕심을 반성한다.
시어머니
오랫동안 마음을 비워놓고 돕고자 했더니 서로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뭔가 욕심이 생기고, 자꾸 미더워 보이지 않고, 그래서
사사건건 지도하고자 했더니 갈수록 의존하더라. 잘하던 일도
내게 밀어 두더라. 그래서 이제는 좀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자
했더니 덜컥 일이 터지더라. 경험 있는 자가 아니면 도저히
감당할 상황이 아닌 것 같더라.
그래도 계속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 다시 한 번 옆에서
지켜보다가, 미처 챙기지 못해 굴러 떨어지는 그릇이나 착
받아서 슬그머니 놓아두어야 할 것 같다. 말없이 챙기는 머슴이
되어야지 시어머니처럼 사사건건 개입하다가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쫓겨나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