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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노동자 의식

현장에서 미래를  제99호
이진우

대기업노동자 의식


이진우
회 원






여기서 다루려 하는 의식은 사회에 대한 의식이다.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동력이었고, 민주노총,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낳았던 대기업 노동자들은 우리사회 - 자본주의사회 - 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과 임금노동관계를 통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착취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가계급의 폭력기구로 국가가 존재하고, 이러한 적대적 관계를 은폐하고 체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이데올로기 장치(공교육제도 신문 방송 언론)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계급과의 적대관계, 착취관계, 지배• 피지배관계가 경제 정치 사회 문화영역에서 총체적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노동자계급이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교육과 자본의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과학적 인식을 방해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가 겉보기에는 평등한 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글에서는 자본주의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적 열쇄인 자본과 임금노동관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식과 그 한계를 서술해보고자 한다.

1.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고 입고 거주하고 자식을 낳고 부양하여야 한다. 즉 물질 - 의식주 - 를 생산하고 2세를 생산하여야 한다. 2세의 생산은 가족을 통해서, 그리고 의식주의 생산은 바로 자본주의적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하에서는 생산수단이 자본가계급에게 독점되어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질을 생산할 수 없다.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생산수단이 결합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이 결합은 이루어진다. 노동력판매의 결과 노동자에게는 화폐임금이 주어지고, 자본가는 일정기간 동안 노동력을 사용할 권리를 얻게 된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끌고 가서 노동시키고 그 결과물, 즉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로 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다시 임금을 가지고 의식주, 문화 교육 보건의료서비스를 포함한 자신의 생존수단을 상품으로 시장에서 구입하여야 한다. 노동력상품의 소유자인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고 (생산물)상품의 소유자인 자본가에게 상품을 산다.

1.1. 형식적 평등

이 과정 중 두개의 측면에서 형식적 평등이 나타난다. 첫째,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는 그 가치대로 서로가 소유한 상품(노동력과 생산물상품)을 교환(판매와 구매)하는 평등한 관계가 형성된 듯이 보인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 한번은 상품의 소유자로서 다른 한번은 화폐의 소유자로서 서로 동등하게 대면한다. 둘째로 노동자의 노동과 자본가의 생산수단이 자본가의 관리하에 결합하여 생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산의 두 요소로 노동과 자본이 나타난다. 그 결과 마치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 양자 모두 생산의 주체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임금을 선불이 아니라 노동 후에 후불로 받는 현실은 이러한 인식을 조장한다. 여기서 노동의 성과를 임금으로 받는다는 의식 - 일할만큼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 이 출현한다.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이 출현한다. 이는 이른바 성과급을 요구하는 형태로 표현되는 경영의 성과에 대한 분배요구로 나타난다.

1.2. 내용적 실질적 불평등, 즉 착취

그러나 이 과정은 다음의 세가지 측면에서 불평등한 관계이다.
첫째,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착취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노동력이란 노동자들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 - 즉 임금 - 란 노동력을 재생산 하는데 필요한 비용이며, 이는 노동자 자신의 의식주와 문화 교육 보건의료서비스비용과 2세의 부양(가족부양)을 위해 필요한 비용을 뜻한다. 임금이 이 범위를 - 그저 먹고 사는 수준 -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은, 상속할 재산이 없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해고를 당하면 당장 내일 생계가 불가능한 노동자, 여생을 걱정해야 하는 퇴직 노동자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아주 오래전 옛날부터 이미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이상의 물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토기(우리나라의 경우 빗살무늬 토기 등등)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는 바로 생산자 자신이 먹고 남아서 (일시적이라도) 보관해 둘 잉여생산물이 생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철기시대에 오면 국가가 출현하기 시작하여, 생산하지 않는 인구로 이루어진, 즉 지배계급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를 먹여 살리는 잉여가 항상적으로 피지배계급에 의해 생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물며 자본주의 시대 400년 동안 지속적이고 폭팔적으로 이루어진 생산력의 증대와 특히 1970년대부터 진행되고 있는 과학기술혁명을 생각한다면, 노동자들의 노동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이상의 생산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임금이 그저 먹고 살 정도에 그친다는 것은, 그 임금을 받고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생산물 중 많은 부분이 자본가계급의 소유로 남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노동력의 가치보다 그 노동력이 창조하는 가치 - 생산과정에서 생산물에 추가되는 가치- 가 훨씬 더 크고, 그 가치는 자본가계급의 소유로 된다. 착취가 발생한다.
오직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거대한 규모의 노동자 반실업자 실업자가 한편에 서 있고, 바로 그들 자신이 만든 - 노동의 생산물인 - 더욱 거대한 공장과 도시의 삘딩숲, 홍수처럼 넘쳐흐르는 상품 그리고 금융시장을 떠도는 수백조원에 이르는 화폐가, 자본의 형태로 극소수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착취를 웅변해주고 있다.
둘째,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진행되는 관계는 결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되자마자, 노동자로서의 인간자체가 상품세계의 운동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상품은 팔려야 자신의 가치를 실현한다. 상품은 화폐의 지배를 받는다. 상품이 너무 많아 팔리지 않으면 덤핑으로라도 팔려야하고, 그렇치 않으면 폐기처분된다. 노동자는 팔려야만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즉 자신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팔려야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 노동자는 팔리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신의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단지 손해를 볼 뿐이다. 노동자는 상품처럼 취급되지만 자본가는 상품을 소유하고 있다.
셋째, 겉보기와는 달리 생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결코 주체가 아니다. 그의 노동력은 이미 자본가에 팔렸기 때문에 사용할 권리는 자본가에게 넘어갔다. 생산의 과정은 자본가의 기획과 관리하에 노동력에서 노동을 추출하여 생산물에 고정하여 가치, 그리하여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노동력을 사용할 권리가 자본가에게 넘어간 이상, 그 노동력을 사용해 얻은 생산물도 자본의 권리이고 자본의 소유 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주체는 자본가뿐이다.

2. 자본과 임금노동관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

이와 같은 형식적으로 평등하게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불평등한 착취관계이고 지배관계인 노동과 자본간의 관계가 노동자의 인식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즉 노동자들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2.1. 노동력의 구매자로서 자본, 노동자의 구세주로서 자본

자본은 노동자계급의 노동이 만든, 노동의 축적물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노동이 자본의 주인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자본이 노동자에게 생명과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노동력 상품을 구매해 주어서 노동자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는 존재로서 인식된다. 다음은 어용노조가 장악하여 ‘죽음의 공장이 되어 버렸다는 현대중공업노조 홈페이지 실명게시판의 글이다(강조부분은 필자가 했음).

“<호사다마>
흠...호사다마라..
좋은 일에는 언제나 마가 낀다(?)
노사관계가 좋음을 시샘하여 마가 낀 것입니까?
불순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저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우리 회사와 아무 관련도 없는 사실을 빌미삼아 대규모 사업장인 우리 회사를 흔들어 보려고 생떼를 쓰고 있는 저들을 우리는 냉정하게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략)
이러한 와중에 우리 회사가 부도덕한 회사로 낙인이 찍히고, 우리의 명예가 실추된 것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합니까?
십 수년간 우리의 피와 땀을 흘려 일구어 온 일터를 저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한 놀이마당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 화가 나지 않습니까?
내 가족과 내가 의지하며 꿈을 키워가는 우리 회사를 저들 마음대로 흔들어대는 데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다년간 합리적 노사관계를 통하여 사태 해결의 노하우를 쌓아 온 많은 경험이 있습니다. 저들이 우리의 사업장을 유린하지 못하도록 내부적인 결속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작성일 : 2004년 04월 22일 )

<박일수열사투쟁> 과정에서 현대중공업이 노동운동의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에 분개하며 쓴 노조원의 글이다. 현중노동자에게 현중은 “십수년간 우리의 피와 땀을 흘려 일구어온 일터”이고 “내 가족과 내가 의지하며 꿈을 키워가는 우리 회사”이다. 현중 게시판에는 이러한 견해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인식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팔리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공포가 노동자들을 언제나 짖누르고 있어 노동자들은 자본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특히 노동력을 팔려는 노동자는 많고 이를 사려는 자본이 이에 비해 적을수록, 실업자가 많아져서 노동자간의 경쟁이 격화될수록, 노동자들은 더욱 무기력해진다. 또한 노자간 힘의 불균형을 교정하려는 노동자들의 단결력(노조 등을 통한)이 약화될수록 무기력해진다. 그 만큼 자본•회사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자본을 자신의 구세주로 여기는 전도된 의식은 현실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노동력이 상품이 되어버린 자본주의하에서만 현실이며 무산자에게 강요된 현실이다. 배운 것 이라곤 용접외에는 없는, 십년 이십년 넘게 자본의•기계의 부속품으로 기능해 온, 인간으로서의 다른 기능은 위축되어 불구가 되어버린 노동자에게 운명처럼 강요된 현실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인식하지 못하는, 혹은 체제대안을 인식하기는 했을지라도 자본가계급의 지배질서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에게 강요된 현실이다.
이들에게 현중은 "십수년간 우리의 피와 땀을 흘려 일구어온 일터“, 즉 십 수년간 우리의 노동력을 구매해준(실현하게 해준) 구세주이다. 의식주를 구매할 돈을 쥐어주어 생물학적인 생존을 보장할뿐만 아니라 , 자신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라는 승인을 받게해 주는 곳이다. 노동력이 팔릴때만이 노동자는 우리사회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 따라서 자본은 노동력을 구매하여 노동자의 사회적 생존을 승인하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일터’가 노동자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은 노동자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터”의 의미는 이것뿐이다. 또“내 가족과 내가 의지하며 꿈을 키워갈 수밖에 없는 우리 회사”이다. 그 꿈이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력 상품이 자본가가 보기에 구매할 가치가 없어지면 노동자는 폐기처분된다. 그러나 그것은 상품의 당연한 운명일뿐이다. 건강을 지키고(현중 노보에는 건강증진 프로그램, 건강검진 등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각종 기술자격증을 따고, 동료와 경쟁하여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높여서, 보다 좋은 가격으로 보다 오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꿈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다.

2.2. 불평등에 대한 인식과 평등에 대한 요구

자본이 믿고 의지할 만큼 자비롭지도 않고, 노동자들을 소모품 정도로 여기고, 그리고 자본과 노동자가 결코 평등하지도 않다는 것을, 노동자는 너무나 절실히 경험해왔고 당연히 의식하고 있다.
현중노조게시판을 계속 보자.

“<돈벌어 놓으면 쪽쪽 빨아가는 국회의원으로부터 우리 회사를 지키자!>
올해도 국회의원들 재산공개에서 1등을 차지한 현대중공업대주주 정몽준씨 과연 이 사람은 얼마나 현대중공업에서 일하고 억억억하는 돈을 빨아갈까요?
이사람은 얼마나 회사에 기여도가 있어서 노동해서 벌어놓은 이익금을 빨아갈까요?
이사람 맘에 안들면 구름처럼 연기처럼 사라지는 중역들과 사원들은 또 얼마나 될까요?
누가 잘 아는 사람있으면 말해주세요?
누가 이사람이 진짜루 현중에 공헌도가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나요?
아까운 회사돈 우리 스스로가 지키고 나눠가집시다. (작성일 : 2004년 04월 22일 (14:11)

정몽준이 정치한다, 축구협회 일 한다 하면서 회사에는 잘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게시판의 다른 글에 의하면)일당이 2억5천만원이 넘어갈 정도의 거액을, 노동자가 “노동해서 벌어놓은 이익금을 빨아”가는 것을 보면서 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인식은 거기서 머물고 있다. 즉 이 노동자는 “회사에 기여도”나 “현중에 공헌도”에 따라 회사돈, 즉 이익금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몽준이 회사에 조금 기여(공헌)한다면 조금 받고, 중역이나 관리자들도 조금 기여(공헌)한다면 조금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노동과 자본이 겉보기에는 생산의 주체로 나타나는 현상에 기반한 의식이다.
착취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것이, 자본가들의 몫이 큰 것만이 문제가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이른바 ‘분배의 정의’가 이루진다면, 노동자가 지금보다 더 많이 받거나, 혹은 노동력의 가치대로 임금을 받거나, 혹은 자본가가 노동자가 인정하는 만큼만(?) 가져간다면 문제는 없어진다.
착취가 이루어지는 관계, 자본 임노동관계 자체를 철폐하여야만,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되는 사회자체를 폐지하여야만 착취가 사라진다는 인식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가치 즉 이익금은 오직 노동자들의 생산적인 노동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자본가들과 자본의 관리자들(중역과 사원)은 한푼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이들은 사라져야하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하고 관리기획하여야 한다 - 이것이 “아까운 회사돈 우리 스스로가 지키고 나눠가”지는 방법이다 - 는 인식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비단 어용노조가 지배하고 있다는 현중노동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현대자동차를 보자. 현대자동차 <노조소식>에 “4만 조합원의 정당한 요구, 반드시 쟁취하자!”라는 제목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임금 127,171원, 단체교섭요구안 해설
1. 임금인상 요구안
2004년도 임금인상 요구안은 민주노총의 요구안을 토대로 2003년도 경영실적과 2004년도 경제성장에 대한 전망치를 기준으로 물가 상승분 및 회사의 지불능력을 감안하여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실질적인 소득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표준생계비의 81.10% 수준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임금인상 요구액은 127,171원(통상급 대비 8.65%, 기본급 대비 10.48%)을 요구한다.“(2004/4/22발행)

임금인상 요구의 근거들로서 경영실적이 거론되고 있다. 즉 노동이 기업에 기여하여 이윤을 남겼으므로 그 만큼에 해당하는 금액을 노동이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소득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읽을 수 있다. “회사에 기여도”나 “현중에 공헌도”에 따라 회사돈, 즉 이익금을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임금은 노동력가치이며, 이는 표준생계비로 표현된다. 그리고 노조도 표준생계비를 임금인상의 근거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가 제시하고 있는 표준생계비는 3,316,909원(조합원평균부양가족이 3.7인)이고 현재 임금은 2,395,635원이므로 921,274원이 적다. 그런데 127,171원을 임금인상요구액으로 제시하고 있다(5월7일자 “노조소식”). 노조가 보기에 “소득분배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불능력-경영실적-과 국가의 경제력-경제성장-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표준생계비)라는 과학적인 인식과, 노동과 자본이 함께 생산의 주체이고 따라서 그 성과분 중에서 노동이 기여한 몫을 임금이라는 형태로 받는다는 현상적 인식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노동이 아무리 ‘기여’를 해도 그 성과는 자본의 것이다.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을 이용한 결과인 ‘경영성과’는 자본의 권리이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이미 판매해 버렸기 때문에 경영성과에 대한 자신의 몫을 주장할 권리도 없고, 그래서 경영에 참여할 권리도 의무도 없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력의 이용을 제한하기 위한 노력(예, 작업시 위험을 느낄 때에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 쟝취, 몸이 아프면 불이익 없이 쉴 수 있는 권리 쟁취 등등), 즉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에 적대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임금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은 2004년 5월 4일 발행된 <노조 소식>의 다음 글에도 표현되고 있다

“노동조합은 이번 2004년 임투에 총 6개항의 투쟁목표를 설정하였다.
그 첫째가 생활임금쟁취로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면 생활임금조차 확보되지않는 현실에 2004년 임투를 통하여 노동에 걸맞는 최소한의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에 걸맞는 임금”이라는 표현에서, 자본을 노동과 생산의 공동주체로 인정한 선에서 “노동의 역할에 걸맞는 임금”을 요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다시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노동에 걸맞는 임금 -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이고, 노동과 임금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노동에 걸맞는 임금도 사실은 없지만 - 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면서도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임금’, 즉 생활임금이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바로 노동력의 가치에 해당할 것이다. 이 만큼을 받으면 걸맞는 것이고, 이것이 최대 목표가 된다. 물론 이는 다시 경영실적과 자본의 지불능력에 의해 교정되며 동요하지만, 여하튼 최대목표는 생활임금쟁취가 된다.
정리하면 여기에서 보이는 노동자들의 인식은 바로 노자간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바로 노동자들은 노동력상품이라는 상품 소유자와 화폐소유자인 자본간에, 그 가치대로 이루어지는 겉보기에만 평등한 판매와 구매 관계를 보며 노자간의 평등한 관계형성을 최대목표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 2004년 현자노조 조합원 생활실태 및 의식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들의 지향을 표현한다.

“노동조합 변화에 대한 의견:
시대변화에 따라 노동조합도 변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회사와 대등한 교섭과 투쟁을 해야 한다’가 76.7%로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는‘파업투쟁을 통해 조합원의 권익을 찾아주는 시절은 지났다’는 13.8%, ‘회사와 양보하여 타협해야한다’는 8.0%,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다’는 1.5%로 나타났다.“(현자노조신문 4월 29일 자)

“회사와 대등한 교섭과 투쟁”을 하는 것이 노조의 목표이고, 따라서 노동과 자본과의 관계에서의 목표라는 인식이 표현되고 있다.

3. ‘자본과 노동의 대등관계추구’라는 목표가 정치적 수준으로 발전

자본과 노동의 대등한 교섭과 투쟁이라는 단위노조의 목표는 상급단급단체의 목표가 되고, 그리고 정치조직의 목표로 까지 뛰어 오른다.
기업단위에서는 단위노조와 개별자본이, 전국단위에서는 국가의 중재하에서 민주노총과 경총이 노사정위원회 “노사정위원회에 대하여는 ‘참여하는 것이 좋다’76.3%, ‘참여해서는 안된다’ 23.7%로 나타났고, 참여하는 전제조건으로는 ‘무조건 참여’16.7%, ‘구조와 운영이 개선되면 참여’26.1%, ‘노정신뢰회복이 전제되어야’39.3%, ‘총체적 교섭체계가 전제되어야’17.5%로 나타났다.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가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으로는 고용안정이 41.4%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그 다음으로는 사회보장 확대 및 조세제도 개혁이 23.0%로 나타났다.”( 2004년 현자노조 조합원 생활실태 및 의식조사 /현자노조신문 4월 29일 자)
라는 틀에서, “대등하게 교섭하고 투쟁”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보다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 : 고용안정. 보다 좋은 조건으로 보다 값비싸게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 : 생활임금 쟁취 등이다. 사회보장확대나 조세제도개혁도 은폐 된 임금(민주노총은 사회적 임금이라고 표현한다)을 높이자는 것이고, 세금을 줄여서 노동자의 몫을 늘리자는 요구는 생활임금쟁취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영역으로 다시 확장되고 완성된다. 현상적이고 비과학적인 인식이기는 하지만 노자공동으로 생산의 주체이기 때문에 기업단위에서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인식이,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도 노동과 자본이 공동주체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정치적 법적 수준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가 국회에 들어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여야 한다. 기아자동차노동조합의 노조소식지인 2004년 4월 16일자 <함성소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제목 : 진보정치와 노동자의 목소리 국회입성
민주노동당의 실질적인 토대를 제공한 민주노총은 산업적 파괴력과 더불어 정치적 날개를 갖게 되었다. ...
노동자로서는 지난 97년 당시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 악몽과 노동자의 입장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자본의 이익만 대변하던 현국회의 관행에서 탈피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국회입법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진보정치가 국회에 입성하면 과거와 같은 자본대변의 일방적 관행에 제동이 걸리고 노동자를 대변하는 입법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정치적 날개이고,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를 대변하는 입법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이라는 주장이다. 즉 단위노조와 민주노총의 정치부대로서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법을 만들어 현재 자본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법을 만드는 국회를 노자간의 힘의 균형을 이루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회사와 대등한 투쟁과 교섭”이라는 단위노조의 목표가 국회 차원으로 정치적 수준으로 확장된 것이다.

4. 노동력 상품판매자의 권리쟁취가 목표로 되고, 혁명적 전망은 상실된다

자본과 임노동과의 관계는 현상적으로는 서로 상품과 화폐의 소유자로서 그 가치대로 판매하고 구매하는 평등한 관계로 나타나고, 노동자들의 인식은 여기에서 규정받고 있다. 그리고 임금은 노동의 대가라는, 혹은 생산에 대한 노동의 기여분이라는 현상적 인식에 또 한발을 딛고 있다(이는 자본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자간의 대등한 관계 - 노동력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 를 단위노조 차원에서, 민주노총차원에서, 그리고 정치조직(민주노동당)차원에서 추구하는 것이 최대목표로 나타났다. 노동력을 보다 비싸게 보다 좋은 조건으로 판매하는 것을 핵심적인 목표로 하는 노동조합의 과제가 정치적 수준으로 까지 확장된 것이다. 혁명적 지식인과 선진적 노동자의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지도가 부족한, 혹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운동’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수준은 아마도 여기까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취약한 논리이다. 이미 앞에서 전제했듯이 첫째, 상품과 화폐(자본)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구매자와 판매자는 결코 평등할 수 없다. 소비자가 왕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소비하는 모든 사람이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 즉 구매력 돈이 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은 왕이된다. 그리고 노자간의 대등한 관계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노자관계는 착취관계이기 때문이다. 착취관계가 어떻게 대등한 관계일 수 있는가? 둘째, “ 노자간 대등한 관계”그리고 “노동력의 유리한 판매”는 상대방인 구매자, 즉 자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자본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임금은 오직 자본이 지불 가능한 정도로만 요구해야 한다. 호황기에는 임금이 상승할 수 있지만 불황기에는 임금삭감과 정리해고도, 비정규직화도 자본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지만 않는다면(그러나 이는 공문구 이다)받아들여야 한다. 협소한 국내시장을 둘러싼 자본간의 경쟁에서 현대자동차노동자의 입장에서는 현대자동차자본이 대우자동차자본을 이겨야 한다. 국내자본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외국자본과 세계시장 점유율을 둘러싼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외국노동자보다 더 낮은 임금에 더 장시간 노동도 감수하여야 한다. 노동력 구매자는 살아있어야 하고 인력시장도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는 결국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사회를, 착취사회를 영원한 것으로 하자는 말이 된다.
그래서 “노자간의 대등한 관계”를 목표로 하는 현대자동차노동자와 자본을 구세주 같이 여기고 있는 현대중공업노동자는 서로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노동력상품을 판매하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양자간의 차이는 노동자들의 힘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현대자동차에서 노자간의 역관계가 불리하게 되거나, 자동차산업에 불황이 닥치거나 세계경쟁에서 패배하여 자본이 위기에 빠져 노동자에게 위기를 전가하려 한다면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시장인 자본을 수호하기 위해 애사주의(=무한한 굴종)를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5. 마치며

노동조합운동,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으로 노동운동을 확장•발전시킨 대기업노동자들, 그리고 이들이 획득한 의식은 대중적으로는 여기까지 - 노동조합주의와 노동조합주의정치 -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노동자가 자본-임노동관계를 그 실제적인 측면인 착취관계로 인식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법칙을 이해하고, 국가기구를 포함한 자본주의사회의 계급적 적대성을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계급적 각성과 단결을 이루어 노동력이 상품으로 되는 사회를 폐지하여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 노동운동의 앞으로의 과제이고, 혁명적 지식인과 선진적 노동자로 구성된 정치부대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이다. 한/노/정/연

2004-05-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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