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사회주의 정치를 실천할 때이다
오 세 철
연세대명예교수/이사
114주년 세계노동절은 신자유주의의 거센 공세 속에서, 미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살육 속에서, 그리고 노동현장에서 수많은
노동열사를 만들어낸 자본의 광폭한 칼날 위에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매년 찾아오는 메이데이가 형식적 행사주의로 매몰된
지 오래되었고 혁명의 투혼을 계승하려는 사상과 실천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메이데이 투쟁의 의미를 축제로
왜곡시키려는 또 한번의 역사적 과오를 목격하였다.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 후에도 메이데이는 축제로 자리매김
되지 않는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박제화 되었던 메이데이 행사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그날까지 눈을
부릅뜨고 우리가 지켜야할 사상적 원칙과 구체적 실천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엄혹한 시절에 무엇이 축제이고,
왜 축제인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정치를 실천할 때이다”
남쪽의 두 노총의 인사 300여명이 남북노동자의 연대를 내걸고
평양으로 갔다. 국가, 민족, 지역 그리고 성을 넘어서는
노동자의 단결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국가와 체제를
달리하는 남북의 노동자가 민족의 단결을 위하여 함께
어우러지는 것도 기쁜 일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단결은
사상적이고 계급적 단결일 때만이 역사 진보와 만나고 세계적
혁명실천으로 나아간다. 대한민국의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에 두
노총(특히 민주노총)은 자본과 권력에 맞서 지금까지 자신들이
어떻게 투쟁해 왔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한반도
관철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북의 노동계급과의 연대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동북아 노동계급의 단결과 어떻게 연관을
맺으며 나아가 세계 노동계급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남북 노동자의 모임은
민족단결의 축제가 아니라 전쟁반대, 제국주의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투쟁일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메이데이 집회는 남쪽의 축제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수호 위원장의 얼굴이 메이데이 포스터에
크게 실린 것이 상징하듯이, 그리고 전경련과의 정례적 모임
갖기 등의 노사협조를 넘어선 친자본적 행보에서 그 의미가
뚜렷해졌다. 그야말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의
자축행사였다. 400억의 정부보조금 요청,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긍정적 언명, 투쟁보다는 교섭위주로의 활동방식
표명 등은 관전자들이 예상한 것을 뛰어넘어 급속하게 우향우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지는 현장을 복원하고
현장권력을 밑으로부터 장악. 통제하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중소영세사업장보다는 대공장이 우선시 되고 노동계급보다는
국민이 선호되는 몰 계급적 관행에 익숙하다. 개량화되고
관료화된 서구 노동운동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경험하는 우리의
대중운동의 모습은 극복 돼야 할 투쟁의 대상이지 축하해야할
일은 결코 아니다.
권두언
그러나 무엇보다도 114주년 메이데이의 축제 대상은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 이었다. 그야말로 양 날개가 활짝
폈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평가에서
노동운동의 관료화와 개량화 그리고 정치운동의 합법 개량화는
끊임없는 투쟁의 대상이었고 극복의 대상이었지 칭송의 대상은
아니었다. 50년만의 쾌거로 호들갑을 떨거나 대중운동의
좌향좌로 찬양하거나 간에 의회정치에의 목마름이나 환상과
최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비례대표제가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의 부르주아적 순치과정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른바 좌파들도 투표율이라는 평균치에
매혹되어 계급정치를 선거정치로 환원시키려하고 있다. 개량주의
의회세력이 환호하고 열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고
자본과 그 유지 체제가 체제내화를 부추기고 확산시키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이른바 자칭 좌파라는 세력에 있다.
무능력 종파주의 때문에 사회주의 정치를 실천하지 못하면서
현실적인 개량주의 정치세력과 관념적으로 전선을 긋고 있는
세력에게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외부적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현실정치에의 개입을 강제시키고 있다. 대중운동에게는
제도정치권으로의 진출이 열리게 되었고, 개량주의 정치
세력에게는 끊임없는 체제내화를 통한 입신양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으며 어중간한 좌파세력에게는 실존적 선택의 길만이 남게
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정치세력에게
축제는 없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시장이 있어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한, 자본의 이해가 관철되는 전쟁이
없어지지 않는 한 축제는 우리에게 없다. 오직 그 근원을
폐절시키는 날까지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사회적 합의주의의 틀
속에 매몰되어 가는 대중운동, 의회정치로 체제 내화되는
진보정치운동에 맞서 현장을 밑으로부터 복원하는 현장권력
쟁취운동과 노동자 평의회 운동 그리고 의회정치세력에 맞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실질적 전개만이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이다. 사상적 동요와 기회주의, 보신주의와
출세주의, 그리고 패거리주의를 과감하게 벗어던지는 실천적
활동만이 필요한 때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정치를
실현할 사상을 다지고 조직을 추스르고 투쟁을 조직하자.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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