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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가족

현장에서 미래를  제10호
황귀돈

연 ◦ 구 ◦ 논 ◦ 문

노동자 가족
- 생동성(Lebendigkeit)과 자본의 상호간섭 -


황 기 돈 (독일 브레멘대 박사)


이번 호에는 황기돈 박사께서 지난 제10차 이론연구세미나에서 발표한 ‘노동자 가족’을 다시 보완한 글을 싣는다.
노동자 가족 문제를 그 본질과 유형으로까지 분석한 이 글은 현장활동보다도 어렵다고 하는 노동자 가족, 그 삶의 문제를 진단하고 극복하는 이론적 준거를 제시해 줄 것이다.



1. 세계화다! 국제화다! 날로 격화되는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가 경쟁력, 기업 경쟁력, 노동자의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이를 ‘경쟁력의 담론’ ‘21세기를 위한 담론’이라고도 한다. “사람 좀 살자”는 목소리는 이 미래를 위한 담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못견디겠으면 “집에 가서 애나 보라” 한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마흔을 전후한 나이에 직장생활에서 떠나간다. 일부는 “나는 벌써 퇴물인가”라고 자조적인 질문을 하면서 또 다른 일부는 정말로 ‘퇴물’이 되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좌불안석이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그것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죽기 살기로. 경쟁력 있게 일한다는 것은 죽기 살기로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겠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낫다. 나이 마흔에 그동안 쌓인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난다. 세계 최고의 40대 사망률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작업 현장에서 일하다 죽어가거나 다치는 사람이 일년에 수천명이다. 세계 최고의 산재율이다. 최소한 이 두 부문에서는 국제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즉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은 노동자의 삶의 에너지를 세계 최고로 빨아먹은 결과이다.
‘죽기 살기로’ 일하거나, ‘퇴물’이 되거나, 죽어가거나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남편이고, 어머니이고, 아들이고, 딸이고, 형이고, 누나이고, 오빠이다. 이들은 모두 노동자 가족의 구성원이다. 노동자 가족은 폐기물 처리장이 된다. “죽겠다”고 하면서도 계속 일하는 사람들은 집에 돌아와서 내일 다시 죽을 정도로 일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충전시켜야 한다. 국제화를 위해서는 노동자 뿐만 아니라 가족의 경쟁력도 강화시켜야 한다. “주부도 경쟁력이다.” 아이들의 경쟁력도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전쟁을 위한 전 국민 ‘총동원령’에 다름 아니다. 모든 인간, 특히 노동자의 삶은 노동과정 뿐만 아니라 가족 생활까지도 자본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사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느냐?고 체념한다. 살인적인 경쟁조건하에서 어찌하겠느냐는 것이다. 살인적인 노동을 계속하자는 논리의 완곡한 표현이다.
경제전쟁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자본간의 경쟁이다. 경쟁력 강화 및 ‘총동원령’은 자본간의 생사를 건 싸움에 모든 인간들이 죽기 살기로 나서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본이 노동과정 뿐만 아니라 전 사회영역의 짜임새를 관할하는 기본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가족생활의 합리화 및 노동의 재생산과정의 합리화라고 한다. 경쟁력 강화를 합리화라고 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를 내화시킨,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으로 사회화된 주장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죽음과 ‘죽을 지경’의 삶의 현실은 경제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거나 혹은 경제발전을 통해서 어떤 형태라도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이다. 노동자 삶을 유지하고, 그 질을 개선시키는 것이 경제발전의 목적이며 경제발전은 그 수단에 불과하다. 자본간의 경제전쟁을 위한 노동자 가족의 경쟁력 강화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그리고 그 가족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담론, 다른 합리성을 표현하는 담론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다른 담론의 출발점은 1)노동자 삶은 경제 및 정치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후자가 오히려 전자를 해방하기 위한 실천의 사회적 조건이다. 2)노동자 가족에게는 자본의 행위원칙과는 다른 삶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어느 사이에 자본의 행위원칙이 스며들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노동자 가족의 구체적 행위 속에 나타나는 두가지의 서로 다른 것들, 즉 삶의 원칙과 자본의 행위원칙 사이의 관계를 규명해 본다. 관계 규명의 순서는 우선 1)노동자 가족을 생동성과 자본이 상호간섭하는 실질 객체로 규정하고 2)서로 다른 것들이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이유 3)적대성을 동일성, 최소한 비적대성으로 전화(실질추상)시켜야 하는 이유 4)실질추상의 내용과 5)수단을 밝히고 6)상호간섭의 결과를 노동자 가족의 구체적 행위 속에서 분류한 후 7)노동자 운동이 지향해야 할 바를 논해 본다.


2. 우선 노동자 가족에 대한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노동자 가족은 노동자 삶의 한 단위이며, 가족 내적(성별, 세대별) 모순과 사회적 모순(노동과 자본)이 상호간섭(Interferenz)하는 공간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상호간섭의 내용은 서로 다른 것들이 상호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상호간섭은 인간으로서의 노동자 행위연관들(Handlungsbezuge)과 자본의 행위원칙들이 상호작용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분석 대상인 노동자 가족에는 이 두 가지의 적대적인 원칙들이 상호작용하고 그 결과 노동자 가족의 삶은 다차원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경제적인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상호간섭의 내용은 ‘생동성’과 ‘자본’이라는 두개의 분석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생동성(생명성)은 ‘인간의 행위연관’을 표시하는 개념이며, 이는 자본의 행위원칙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 적대관계는 맑스의 가치론으로 규명할 수 있다. 가치론은 방법론적으로 구체노동 분석에서 추상노동 분석으로 상승하기 때문에, 추상노동 분석은 인간의 일상적 실천에 관한 역사적 그리고 계급이론적 사슬로 되돌아올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추상과정이 단순한 논리적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실재하지 않으면 이는 ‘잘못된’ 추상이기 때문이다. 구체노동을 추상노동화시키는 과정은 ‘실질추상’(Realabetrektion)의 과정이다. 실질추상의 상태에서만 가치법칙은 유효하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가치론은 노동세계의 물화현상을 지나치게 일반화(Uberveraligemnerung)시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즉, 가치론은 경제주의적 시각에서 계급갈등의 원인을 ‘임노동과 자본’의 기본모순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정치체계 또한 노동세계 바깥의 의사소통적 삶의 연관관계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바탕하여 하버마스는 경제 및 정치체계를 상호 보완하면서, 생활세계 전체를 그들의 명령(Imperetive)에 굴복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본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론에 대한 평가, 그리고 그의 가치론 비판이 정당한가는 이 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가치론 비판은 두 가지의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가치론을 행위론으로 해석하기 위해 1)자본과 국가를 가치증식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 및 파괴하는 물화된 사회관계의 두 가지 현상태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과정에서 노동과 자본간의 적대 뿐만 아니라 가족과 자본, 그리고 가족과 국가의 관계도 분석의 대상이 된다. 2)임노동을 생동성의 하나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형태규정으로 본다. 즉 임노동을 ‘실질추상화’된 생동성으로 본다는 것이고 실질추상의 과정이 적대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완성된 임노동력으로 태어나지 않고, 자기 노동력의 일부분을 자본에 팔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는 항상 자본과는 다른 행위연관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모순은 ‘생동성과 자본의 모순’이다.


3. 생동성과 자본의 행위 연관들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삶의 유지, 발전이며 여기에는 충분이라는 범주가 행위 합리성을 원칙적으로 규정한다. 즉 삶의 유지, 발전에 필요한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합리적 인간행위다. 행위의 동력이 내적자율이라 함은 인간의 행위는 외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내재화된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내적으로 자유로운, 즉 자기 감정 및 욕구에 충실한 인간들만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 뿐만 아니라 타인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다. 자기 책임하에 타인을 존중하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협업 및 단결이라는 형태로 현상한다. 내적자율은 협업과 단결을 가능하게 하며, 내적자율의 유지, 발전은 협업과 단결의 목적이다.

맑스에 의한 자본은 ‘죽은 노동’이며, 자기의 ‘삶’을 유지, 즉 축적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동성(삶의 에너지)을 착취하여야 한다. 경쟁은 자본의 ‘내적 자원’이며 이는 보다 많은 착취라는 강제로 현상한다. 착취, 그것도 다른 자본보다 더 많이 착취하지 못하는 자본에게는 ‘파산’이라는 처벌이 가해진다. 이러한 강제하에서 자본은 생동성을 착취하기 위해 생동성을 지배하여야 한다. 지배의 수단은 화폐, 노동조직 그리고 법이다. 자본의 착취는 노동자간의 경쟁을 전제로 한다. 이렇듯 생동성과 자본은 모든 부분에서 서로 다르다.


4. 자본이 생동성을 임노동으로 실질추상시킬 수 있는 이유는, 삶의 에너지인 생동성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중적 성격으로부터 도출된다. 생동성은 자본에 대한 ‘유일한 적대물’이며, 동시에 자본을 ‘살려내는 발효체’이다. 여기에서 실질추상이라 함은 자본이 자기의 유일한 적대물인 생동성을 자신의 ‘삶’의 유지(축적)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는 임노동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생동성이 임노동으로 전화되는 것은 삶의 전 영역에서 진행되며, 인간의 사회화 과정 전체가 자본과 생동성의 적대적 모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한 인간이 자본의 일부분인 노동력으로 사회화되는 과정과, 노동력으로 기능하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투쟁과 적응의 과정이다. 자본과 노동의 투쟁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연구되었고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적대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의 원칙이 노동자의 일상생활에서 관철되고 있는가? 라는 문제가 중요해 진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알게 모르게 자본의 행위원칙들을 내화시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결과이다.


5. ‘죽은 노동’인 자본이 자기의 삶을 원활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본의 한 부분으로 기능해 주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인간이 가치형태로 행위할 때만이 가치운동은 원활히 이루어진다. 즉 인간이 시장에서는 ‘상품소유자’, 생산과정에서는 ‘가변자본’, 그리고 공공영역에서는 ‘약한 시민’으로 행위를 할 때, 자본은 잉여가치의 근원인 산 노동력을 계속해서 구입할 수 있고, 위기시에 계급모순이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더라도 ‘강한 국가’가 이를 봉합하여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되지 않을 수 있다.


6. 실질추상의 수단,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수단, 인간 행위의 가치형태로의 전환 수단은 크게 나누어 화폐, 노동조직, 법이다.

화폐는 자립화환 교환가치로써 자신의 교환수단으로서의 사회적 기능에 힘입어 인간을 상호경쟁하는 상품소유자로 전화시키는 힘, 즉 ‘사회적 권력’으로 기능한다. 1)지불수단으로서 화폐는 인간을 ‘편리’하게 해 준다. 즉 자기 자신이 직접 생산하지 않은 재화를 구입할 수 있게 하여, 욕구의 충족을 가능케 한다. 2)화폐는 ‘모든 개인의 사적소유의 대상물’인 것처럼 보인다. 3)화폐는 화폐 소유자에게 자신이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상대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노동력이 유일한 소유물인 노동자는 자기의 생동성을 시장에서 노동력으로 교환해야 화폐를 소유할 수 있고, 이를 위해서 자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신의 행위연관을 억제 또는 자본에 필요한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 즉 화폐는 인간의 자기 통제력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화폐는 사적소유의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더 많은 화폐를 소유하기 위해 극단적인 경쟁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극단적 경쟁의 결과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 에도 불구하고 상품소유자는 교환과정에서 ‘자유’로운 교환자, ‘평등’한 교환자로 느끼기 때문에 교환체계를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는 기제로 받아들인다. 그 결과 상품소유자의 행위는 교환체계에 대한 저항보다는 교환체계 내에서 자기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경사한다. 이 경향이 강화되는 정도에 따라 인간에 대한 화폐의 지배력은 강화되고, 가치운동은 원활해진다.

노동조직은 시장에서 구입한 노동력을 투입하여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도 다른 개별자본보다 경쟁적으로 더 많이. 이것이 자본운동의 시간적, 공간적 ‘무경계성’의 근거이다. 무경계성은 자본의 또 하나의 속성인 무한파괴의 다른 표현이다. 파괴의 대상은 노동자의 주체성과 문화적, 도덕적 한계 그리고 자연이다.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거나 자본축적의 종속변수로 취급하는, 자본을 위한 성과를 높이기에 집착하는, 즉 자기 자신을 객체화시키는 노동자의 행위를 ‘가변자본’적 행위라 개념지을 수 있다. 인간의 가변자본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의 한 부분인 자연재화를 ‘불변자본’화시키는 과정도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파괴과정이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을 이윤 극대화라는 대원칙하에 조직, 구조화하는 과정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의 극대화 과정이며, 이것은 자본의 합리적 행위이다. 이러한 자본의 합리성은 노동자의 저항을 계급투쟁이라는 형태로 유발시키고 자연재해라는 형태의 자연의 저항에 봉착한다. 특히 계급투쟁 과정에서 표출되는 자본과 생동성의 적대성을 경제적, 문화적으로 배설시키고, 노동자의 단결을 저지시키기 위해 자본가는 임금 및 노동조건을 차별한다. 물론 차별의 근거는 노동자가 ‘가변자본’으로 행위하는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더 많은 임금은 한편으로는 투쟁의 결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많은 자기파괴에 대한 보상물이다. 개별노동자 및 각 기업의 노동자들이 각자의 임금수준을 높이고 자기의 노동조건 개선만을 위하여 동료 및 타 기업의 노동자와 경쟁하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본성인 경쟁을 체화한 증거이며, 이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의 부단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법은 자본운동에 따른 사회의 계급적 균열을 봉합하고 자본축적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제도화된 물리적 폭력으로서 국가행위의 매개체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행위목적은 당연히 자본축적 조건의 유지, 발전이다. 이를 위한 정책수단은 생산요소, 특히 노동력의 경제적 동원과 정치적 탈동원이다. 국가행위의 합리성은 자본의 그것과 같다. 즉 가능한 한 값싼 정책을 통해 가능한 한 강한 경제적 동원, 그리고 가능한 한 안정적인 정치상황. 이러한 국가개입의 목적은 국민들이, 특히 노동자들이 ‘약한 시민’으로 국가권력에 긍정적으로 대할 때 쉽게 이루어진다. (이의 가장 흔한 예는 모든 인간간의 관계의 법률적 규정이고, 가장 극단적인 예는 노동자가 계급갈등을 국가가 법적으로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권은 ‘비프롤레타리아적’ 권리이다. 시민권을 누릴 수 있는 주체는 자신의 생동성을 억제하거나, 국가운영에 경쟁적으로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거나, 실제로 그렇게 행위하는 주체이다. 그 반대로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개인 및 집단을 ‘사회불안 세력’으로 규정하여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강한’국가에서 자신의 안전을 찾는 ‘피보호자’로서의 행위가 자본주의 사회의 공공영역에서 나타나는 가치형태의 행위이며, 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적 균열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7. 노동자 가족의 행위 양태에는 위에서 언급한 생동성과 자본의 상호간섭의 결과들이 현상한다. 1)가족 내에 생동성 지향을 이룬 가족과 2)자본의 속성을 내화시켜 가족 구성원간의 관계도 경쟁, 지배 등으로 규정하는 가족과 3)이 두 가지의 행위형태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가족.

1)자기 자신의 생동성과 내적자율을 존중하며, 사회적 조건을 자신의 필요나 욕구에 따라 가족 내에서 재구성하고자 하고, 이를 실현하는 노동자.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자율성 만큼이나 부인과 아이들의 자율성이나 생동성의 귀중함을 아는 노동자. 자신 및 가족의 욕구나 행위관련이 사회적 조건과 모순될 때에는 이의 사회적 관철을 위해 노동 및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는 노동자. 노동자로서의 남편,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 여성노동자로서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가족의 경제적, 문화적 불안정성의 원인을 자본의 본질에서 찾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부인.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살아있는’ 행위를, 경제적, 정치적 행위를 처벌하는 위협이 상존하고 있고, 자기의 생동성을 억제하지 않고, 학교 성적을 높이지 않는 아이들을 ‘별난’ 아이로 취급한다.

2) 자신의 노동력을 더 좋은 조건으로 팔기 위하여 가족 내의 관계를 노동시장 및 작업장의 조건에 맞추고 가족 노동력을 가부장적으로 착취하는 노동자. 경제적 궁핍과 가족 내에서의 가부장적 착취로부터 탈출하는 돌파구를 중산층 가족의 부인들의 삶의 형태에서 찾는 노동자 부인. 경쟁력 향상과 ‘중산층화’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며 아이들도 그렇게 사회화되어야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 교육시키는 부모. 이러한 노동력 상품의 소유자로서의 행위양식을 ‘전통화’시키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생동성을 폭력으로 억제, 통제하고 이를 아이들이 험한 경쟁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 믿는 부모. 험한 세상을 변화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대신 거기에 순응한다. 이 가족의 생활은 자본의 속성들이 규정한다. 이러한 가족이 많을수록 자본운동은 세대를 거쳐 원활해진다. 물론 이런 가족은 일정한 정도 물질적 보상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가족에게서는 ‘사회적 병리’ 현상 뿐만 아니라 개인의 병리현상도 관찰된다.

3)노동세계에서는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하지만 가족 내에서는 권위주의적, 가부장적 행위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를 어찌할 수 없다고 변명에 급급한 노동자. 그래도 변명이라도 한다는 것은 최소한 지금과는 다른 삶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즉 병리현상을 병리현상으로 인식은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결정적인 출발점이다.


8. 이 글의 목적은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가를 최소한 이론적으로 규명해보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한 노동자 가족의 다양한 행위양식들은 하루 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 학교교육, 노동자가 된 후 작업장에서의 지배와 통제, 법이라는 지배체계를 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그래서 “알아서 긴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철저한 자기통제’의 다른 표현양식이다. 이것이 노동자를 지배, 통제해야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하지 않는 중요한 행위론적 요소이다.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릴 때부터 철저한 자기통제의 경쟁력 강화를 강제받은 아이들이 노동자가 된다면 자본주의 체제 극복은 한낱 추상적인 구호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그만큼 자본은 국제화, 세계화를 자기의 의도대로 추진할 수 있고 노동자의 삶은 계속 자본의 종속변수로 남아 있게 된다.

맑스는 자본을 부정적인 것, 혁명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동구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많은 것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사회구조가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의 행위가 법칙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조의 변화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행위양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혁운동은 생동성을 지향해야 하고, 인간의 내적자율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일시적인 처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게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동성을 유지, 그러나 자기에게 필요한 형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강제가 있다. 자본은 임노동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노동자는 자본없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동성 지향 운동의 사회적 조건이다. 한/노/정/연

1996-04-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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