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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민중탄핵론 논쟁’과
 파렴치한 변명 ․ 궤변과 모함 ․ 기만이 설 곳은 없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104호
채만수

이른바 ‘민중탄핵론 논쟁’과
관련하여
―파렴치한 변명 ․ 궤변과 모함 ․ 기만이 설 곳은 없다―
채 만 수



< 글머리에 : ‘반나절 + 하룻밤’ 사이에 작성한 글이라서 간혹 비문과 오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I. 이 ‘논쟁’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
1. 적대성에 상응한 정치적 귀결이 필요하다
1) “서로 다른 입장들을 제시하고 비판하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고, 오류를 수정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 물론 최소한 동지적 관점에서 이견과 다른 관점에 대해 분명한 논지를 가지고 전개되는 비판과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경청하고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채소장의 글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9월 23일자로 연구소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이 글은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102호, 2004년 10월에 재록되었으므로 참고바람.
에서 남구현 교수는 그렇게 쓰고 있다.
참으로 대훈장다운 훌륭한 말씀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최소한 동지적 관점에서 이견과 다른 관점에 대해 분명한 논지를 가지고 전개되는 비판과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은 다르다”는 말씀은 너무나도 지당하다.


그런데, 이 훌륭하고 지당한 말씀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남구현 교수가, 다시 말하면 상대방을 향해서 “좌익공론적”이니, “정치적으로 유해하고 무책임한 것”이니, “좌익소아병적”이니, “고립을 자초하여 실천적으로 정치적 자살로 이어지는 관점”이니, “노동자 운동을 협소한 노동자주의에 가두는 몰계급적 관점”이니, “반동적 사회주의”니 하며 최대한의 적대적 규정들을 동원했던 자들 중의 하나가, 그들 중의 선두에 서서 아직도 자신들이 옳았다고 강변하고 있는 자가 읊조리고 있다. 남구현․이해영․최형익,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 www.another0415.net (2004. 3. 23.)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8호, 2004년 5월, pp. 85 이하 재록) 참조.
그런 자(들)이 “동지적 관점에서” 운운하면서 “비판과 비방 중상은 다르다” 운운하고 있다. ― 이야말로 적반하장이며, 위선을 딛고 선 또 다른 비방과 중상이 아닌가!
2) 나를 포함해, 이른바 ‘탄핵정국’에서 ‘민중탄핵’이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경계”를 얘기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그렇게 적대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주지하는 것처럼, 나는 그들이 ‘서당개 수준의 학자’이자 자신이 설정한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이고, 그들의 주장은 왜곡, 곡해, 날조, 모략, 자가당착과 주관적 환상, 그리고 심지어 지적 사기에 근거하고 있다고 응수해 왔다. 그리고 ‘탄핵국면’에서 그들이 요구한 것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노동자 계급 운동의 종속이었다고 규정했다.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과 그 ‘비판’에 대해서”,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8호 및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102호, 2004년 10월 등 참조.
― 그들에 대한 나의 이러한 규정과 태도 역시 명백히 적대적이다.
3) 예의 글에서 남구현 교수는 “하나의 연구소는 무조건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나의 통일된 입장”이라는 것의 범위, “통일”이라는 것의 수준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논의를 제쳐두더라도 어느 누구도 “한노정연은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 오지 않았다. 더구나 “무조건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누구도 결코 주장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 ‘적대적인 입장이 공존할 수 있다’거나, ‘적대적인 입장도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될 수는 없다. “무조건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야말로 “최소한의 동지적 입장”조차 공유할 수 없다면 “노동운동의 전문성․현장성․계급성의 확보”라는 연구소의 ‘기본목표’의 달성은 당연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4) 바로 그 때문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논쟁’(?)에는 그 적대성에 상응한 정치적 귀결이 따라야 한다. 연구소가, 서로 적대성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정치적 고담준론이나 하는 위선적 소부르주아 담론가들의 사교단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자기비판 없이 공존은 불가능하다
1)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논쟁’ 혹은 ‘사태’에 대해서 연구소의 일부 구성원들 사이에 ‘굉장히 불편해 하는’ 분위기, 혹은 심지어 ‘혐오스러워 하는’ 분위기까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한테 나는 감히 “이것은, 즉 이러한 내부 사상투쟁을 불편해 하고 혐오하면서 ‘조직이 조용히’ 운영되기를 바라고, 그리하여 이 사태가 원만히 봉합되기를 원하는 것은, 혹시 소부르주아적 분파주의 아닌가” 자문해 볼 것을 권고하고 싶다. “이러한 내용과 형태의 싸움이 우리 조직, 그러니까 연구소의 누군가와 우리와 정치적․이론적 대립․투쟁 관계에 있는 어떤 단체나 인사 사이에 벌어졌더라도 이렇게 불편해 하고 혐오했을까”, 혹은 사실은 “과거에 그러한 유사한 ‘논쟁(들)’이 벌어졌을 때에도 내가 지금 취하고 있는 태도를 취했던가” 자문해 보기를 권고하고 싶다. 혹은 (글 쓰는 인품이나, 맨정신에 사람들과 대면하는 인품은 높아서) 글로나 대면해서는 아니겠지만, “나와 정치적․이론적으로 대립․투쟁․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 평소의 언행은 어땠는가” 자문해 보기를 권고하고 싶다. 그러면서 “혹시 내가 정치적․이론적인 올바름보다는 조직 분파주의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자문해 보기를 권고하고 싶다. 감히 그렇게 권고하고 싶다.
2) 나는, 저들이 ‘탄핵국면’에서 보여준 태도, 그러한 주장을, 그리고 아직도 완강하게 계속하고 있는 저들의 주장을 눈감고 넘어가는 것은 정치적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들 역시 나나 ‘민중탄핵론’ 등을 제기한 사람들의 태도와 주장을 눈감고 넘어가는 것은 정치적 범죄행위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토록 격렬하고 적대적인 규정들을 동원하면서 ‘연서명’으로 적대를 조직하고 나섰을 것이다.
3) 양쪽의 이러한 적대성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양쪽 가운데 어느 한 쪽, 혹은 양자 모두가 정치적․이론적으로 철저히 잘못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양자 모두가 정당할 수는 없다.
둘째, 따라서 양자는 ‘동지적으로’ 결코 공존할 수가 없다. 물론 공존을 위한 일체의 문을 닫아거는 것은 아니다.
셋째, ‘동지적 공존’을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있다. 그 오류와 적대에 상응한 철저한 자기비판과 보증,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의 ‘인품 있는’ 소부르주아적인 ‘자기비판’ 즉 ‘적당한 사과나 유감 표명’이 아니라 자기 주장과 행위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재검증을 포함한 자기비판이 그것이다.
4) 이 외의 어떠한 형태․형식의 공존 모색도 ‘해결’이나 전진이 아니며, 소부르주아적 조직 분파주의의 표현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을 것이다.
5) ‘탄핵국면’에서 저들이 도발적․적대적으로 썼던 예의 글에서 저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보다 정직하게, 좌파가 현재의 탄핵사태 그리고 대중적 반대시위에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이대로라면 우리는 대중의 정치적 의식을 진두지휘하며 앞서 나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꽁무니를 따라 잡기에도 바쁠 것이다. ꡔ현미ꡕ 제98호, p. 88.

자, 바로 여기에 저들의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적 열정이 숨김없이 절절히 표현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저들에 대한 나의 솔직한 바램은 이런 것이다.
그래, 차라리 거기로 가서 ‘탄핵반대’를 외쳐대던 그 소부르주아 대중의 정치적 의식을 진두지휘하시오! 그것이 노동운동의 대열 속에 남아서 갖은 요설로 혼란을 조성하는 것보다 훨씬 더 노동운동을 도와주는 것이요!

II. 남구현 교수의 “채소장 글에 대하여”에 대하여 (1)
1. 참으로 편리한, 참으로 편리한!
1) 남구현 교수의 이 글은, 이번의 ‘논쟁’과 관련한 그(들)의 여느 글과 마찬가지로, 왜곡과 비방, 중상, 모략에 차 있는 글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자신들은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경청하고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 “최소한 동지적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했는데, 나는 자신들을 “비방 중상”했다는 식의 비방․중상으로 시작하는 글이고, 그 내용 또한 ‘참으로 편리하기 그지없는’(?) 쟁점만을 취하고 있다.
2) 우선 아주 사소한 데에서까지 저들의 수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주 사소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그는 문제의 글의 모두(冒頭)에, “채만수 소장의 남구현, 이해영, 최형익에 대한 비판 글이 진보평론에 실리지 않게 된 사태와 관련한 저번 회의에서 ...” 운운하고 쓰고 있다. 사소하지만 문제에 접근하는 그(들)의 수법의 하나를 드러내주는 서술이다. 어째서 “채만수 소장의 남구현, 이해영, 최형익에 대한 비판과 관련한 회의”가 아니고 그 “비판 글이 진보평론에 실리지 않게 된 사태와 관련한 회의”란 말인가? 문제와 쟁점을 슬그머니 바꿔치기 한 것 아닌가.
자신들에 대해서 “사실 지금 제출되고 있는 몇몇 비판적인 글들은 민중탄핵 관련 좌파의 대응에 대해 공식적인 검토를 거친 글들이 아니라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오독과 곡해에 가득찬 글들이어서 대응을 해오지 않고 있습니다”라고도 쓰고 있다.
“오독과 곡해에 가득 찬 글들”이라는 판단이야, 내가 보기에는 그 자신의 오독과 곡해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의 자유라고 치더라도, 도대체 ‘누구의’ ‘어떤 공식적인 검토’를 의미하는 것이고, 언제부터 그(들)은 그러한 “공식적인 검토를 거친 글들”(?)에 대해서만 ‘대응’을 해왔단 말인가? 자신들의 논리적 옹색함 때문에 대응해 오지 못했고, 이제 무언가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궁지에 몰려서야 ‘대응’하게 된, 그것도, 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편리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공식적인 검토를 거친 글들이 아니(어서)”라느니, “개인적인 차원에서 오독과 곡해에 가득찬 글들이어서”라느니 하면서, 자신들을 비판해 온 여러 사람을 모욕하고 있는 것 아닌가!
3) 남구현 교수의 문제의 글은 그들에 대한 나의 추궁에 대해서 ‘참으로 편리하게, 참으로 편리하게’ ‘대응’한 글이다.
그는 응당 대답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편리하게 도 엉뚱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는가 하면, 추궁한 일부 문제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도 그야말로 당구풍월식, 그것도 똘똘한 서당개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을 ‘대답’으로, 그것도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2. 남구현 교수 등의 또 한 수법 ― “앞뒤 좌우 거두절미”한 비판과 왜곡․날조
1) 9월 23일의 글에서 남구현 교수는 ‘민중탄핵론’에 대한 자신들의 “문제의식은” “요컨대, 지금의 정세에서”, 즉 당시의 ‘탄핵정국’이라는 정세에서 “주된 공격의 방향을 어디로 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의견을 제출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맞는 말이다. 다만, 자신들이 단순히 ‘이견을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좌익공론적”이니, “좌익소아병적”이니, “반동적 사회주의”니 하면서 ‘적대적 이견을 제출’했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는 점만을 뺀다면!
아무튼 그러한 적대적 이견을 제출하면서 그들은 당연히 그렇게 이견을 제출하게 되는 자신들의, 객관적 정세와 관련한, 그리고 이론적인 ‘제 전제와 논거들’을 제시했던 것이고, 그에 대한 나의 논박은 그러한 그들의 ‘제 전제와 논거들’이 올바르지 않은 것이고, 왜곡․날조․모략, 그리고 사기에 근거한 것이라 것이었다. 나의 논박은 그렇게 ‘선언’한 것이 아니고, 그가 9월 23일의 글에서 “물론 장황한 인용을 하면서” 운운할 만큼,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그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반증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들에 대한 나의 이러한 비판과 반론이 결코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이견․주장을 “앞뒤 좌우 거두 절미하고 우리가 오로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지한 것처럼 낙인을 찍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고는, 혹은 “장황한 인용을 하면서” 반드시 인용했어야 하는 “뒷부분은 생략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을 부당하게 합리화하기 위해 상대방의 글을 그런 식으로 부당한 방식으로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가 “물론 장황한 인용을 하면서 뒷부분은 생략하고 있다”는 부분을 보자.
그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가 ꡔ현미ꡕ(=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8호(2005.5)에 “보수―중도―진보― 그리고 운동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쓴 글 가운데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것에 관한, ꡔ현미ꡕ 제99호(2004.6)에서의 나의 다음과 같은 비판이다.
...“선거 결과 열린 우리당의 승리와 민주 노동당의 제도권 진출은 … 보다 많은 ‘개혁’과 ‘민생’ 안정을 바라는 국민 다수의 의견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노무현 정권에 관해서는 기껏, “지난 1년간 노무현 정권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히는 신자유주의 정책, 부안 핵 폐기장, 이라크 파병 문제의 경우는 … 쉽게 해결되기 힘들 것”인데, “노동시장 유연화, 민영화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를 바꾸는 문제는 지구적 차원에서의 자본의 축적 전략을 재고해야 하는 사안이며, 부안의 핵 폐기장 문제는 결국은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의 근본 방향을 전환해야 해결되는 문제이고, 이라크 파병 문제도 대미 외교정책의 기본이 걸려 있어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시니, 이것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입니까, 변호입니까? ― 이 정도까지 되면, 귀하의 정체와 역할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ꡔ현미ꡕ 제99호, p. 29.

내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남구현 교수의 글은, 연구원 여러분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탄핵정국’에서 자신들이 취했던 정치적 태도․입장을 변호하는 글인데, 그리고 사실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다른 논점은 다 제쳐두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그의 ‘사실상의 변호’만을 위에서처럼 비판했던 것인데, 그것이 노무현 정권에 대한 변호가 아니었으며 나의 비판은 ‘도가 심한’ “곡해”라니, ꡔ현미ꡕ 제102호, pp. 194-95 참조.
“장황한 인용”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관련 부분, 해당 문단들을 보다 더 장황하게 인용해보자.
탄핵 정국과 선거 과정에 모든 정치적 쟁점은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실종되었고, 모든 것은 탄핵 세력과 탄핵 반대 세력 사이의 힘겨루기로 환원되었다. 수구 세력의 역사적 반동을 막고 개혁을 진전시키려는 시도는 탄핵 반대 곧 노무현 지지로 해석되었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은 탄핵지지 곧 한나라당 이중대로 해석되었다. 선거 결과 열린 우리당의 승리와 민주 노동당의 제도권 진출은 일단은 탄핵 주도 세력의 정치적 패배를 의미하며, 탄핵/탄핵 반대 그 자체를 넘어서 보다 많은‘개혁’과 ‘민생’안정을 바라는 국민 다수의 의견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 선거가 끝나고, 다양한 쟁점들이 다시 등장할 것이다. 지속적인 개혁을 표방하고 있는 열린 우리당과 진보 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민주 노동당은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일단 국민소환제, 의원 특권제한, 정치 부패 비리 척결, 선거 제도 개편 등 정치 개혁과 국가 보안법 개폐 등의 개혁은 돈 안들고 손쉽게 할 수 있으며, 아직 작동하고 있지만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실질적인 효과가 적은 족쇄를 걷어내는 개혁으로 우선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노무현 정권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히는 신자유주의 정책, 부안 핵 폐기장, 이라크 파병 문제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쉽게 해결되기 힘들 것이다. 노동시장 유연화, 민영화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를 바꾸는 문제는 지구적 차원에서의 자본의 축적 전략을 재고해야 하는 사안이며, 부안의 핵 폐기장 문제는 결국은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의 근본 방향을 전환해야 해결되는 문제이고, 이라크 파병 문제도 대미 외교정책의 기본이 걸려 있어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ꡔ현미ꡕ 제98호, pp. 5-6.

이상이 관련된 두 문단의 ‘완전한’ 인용이다. 이 인용문을 읽고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무리인가? 곧, “이것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입니까, 변호입니까? ― 이 정도까지 되면, 귀하의 정체와 역할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라고. 그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은 남구현 교수 스스로 물론 본의에 반해서, 그리고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물론 장황한 인용을 하면서 뒷부분은 생략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즉, ‘생략된 뒷부분’이 없이는 그러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3) 자, 그러면 내가 부당하게 생략했다는 식으로 그가 몰아부치고 있는 그 ‘뒷부분’이라는 게 무엇일까?
위에서 본 것처럼 문제의 두 문장에는 ‘뒷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노무현 정권이 ...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므로 대중투쟁을 통해 노동자 민중이 해결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는 바” ꡔ현미ꡕ 제102호, p. 195.
운운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말하는 ‘뒷부분’이란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커다란 문단 두 개를 건너뛰어 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음과 같은 글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를 넘어서는 우리의 대안이 있다면 이는 제도 정치를 넘어서는 해방적 계급 정치, 운동의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메이데이와 앞으로 이어질 노동자 투쟁에서 그 가능성을 짚어 본다. 같은 곳.

어떤가? 이것이 문제의 “뒷부분”인데, 이러한 빈말, 공문구가 “노동시장 유연화, 민영화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를 바꾸는 문제는 지구적 차원에서의 자본의 축적 전략을 재고해야 하는 사안이며, 부안의 핵 폐기장 문제는 결국은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의 근본 방향을 전환해야 해결되는 문제이고, 이라크 파병 문제도 대미 외교정책의 기본이 걸려 있어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변호, 그 배려를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도 정치”에서는, 정치적 고비에서는, 갖은 궤변으로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면서, “제도 정치를 넘어서는”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해방적 계급 정치, 운동의 정치를 통해서” 하자!?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4) 기왕 그가 위 문단들을 통째로 인용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으므로, 위 인용문의 내용에 대해서 잠시 더 얘기해보자. 다시 인용하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탄핵 정국과 선거 과정에 모든 정치적 쟁점은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실종되었고, 모든 것은 탄핵 세력과 탄핵 반대 세력 사이의 힘겨루기로 환원되었다. 수구 세력의 역사적 반동을 막고 개혁을 진전시키려는 시도는 탄핵 반대 곧 노무현 지지로 해석되었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은 탄핵지지 곧 한나라당 이중대로 해석되었다.
우선 여기서 그가 “수구 세력의 역사적 반동을 막고 개혁을 진전시키려는 시도는” 운운할 때 그 ‘개혁’이란 명백히 그가 무언가 ‘민중적인 것’, ‘민주적인 것’ 등등으로 해석하는 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논한 바 있지만, 특히,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ꡔ현미ꡕ 제102호, pp. 156-58 참조.
오늘 ‘내부 토론회’의 성격상 뒤에서 다시 간단히 언급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그가 “탄핵 정국과 선거 과정에 모든 정치적 쟁점은 마치 불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실종되었고, 모든 것은 탄핵 세력과 탄핵 반대 세력 사이의 힘겨루기로 환원되었”으며, “탄핵 반대 곧 노무현 지지로 해석되었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은 탄핵지지 곧 한나라당 이중대로 해석되었다”는 것을 마치 남의 얘기하듯이, 그렇게 개탄하고 있는 점이다.
‘탄핵정국’에서 보여준 그(들)의 기본적 태도 자체가 사실은 그가 남의 얘기하듯이 개탄하는 행태 그것이었지만, 9월 23일의 글에서도 예컨대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비록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정책 내용을 담고 있어 투쟁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현 정세와 국면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해 추동된 것이 아니고 일단은 수구반동의 반동적 움직임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민중탄핵론에서 가장 반동적인 세력이 노무현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라고 보는 관점은 최소한 양비론적 수준으로라도 바뀌어져야 하며” ꡔ현미ꡕ 제102호, pp. 194-95.
운운.
자, “모든 정치적 쟁점”을 ‘탄핵 찬․반 여부’라는 “블랙홀”에 몰아 넣은 것은,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은 탄핵지지 곧 한나라당 이중대로 해석”한 것은, ‘민중탄핵론’을 “사실상 탄핵찬성과 동일한 생각의 연장에 있다”며 “좌고우면하지 말고, ‘노무현 탄핵찬성’을 전면에” 내걸라고 다그친 ꡔ현미ꡕ 제98호, pp. 86 등 참조.
저들인가, 아니면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비판하며, ‘민중탄핵론’을 제기하며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고 한 나 혹은 우리인가? “모든 정치적 쟁점”을 ‘탄핵 찬․반 여부’라는 “불랙홀”로 몰아 넣은 것은 바로 자신들 아닌가? “반동적 사회주의”․“좌익공론”․“좌익소아병”까지 운운하면서 말이다.
나나 기타 ‘민중탄핵론’을 거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노무현 지지’로 “곡해”했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반동적 사회주의” 등 갖은 적대적 용어들을 다 동원하면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을 “탄핵지지 곧 한나라당 이중대로 해석”한 자들에게 응당 돌아가야 할 응보 아닌가?
5) 흥미로운(?) 것은 저들의 왜곡․날조․비방․중상은 가히 천하의 가예(家藝)여서,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방금 위의 짧은 인용문 속에서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 민중탄핵론에서 가장 반동적인 세력이 노무현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라고 보는 관점 ...” 운운.
도대체 ‘민중탄핵론’을 거론한 누가 노무현 정권을 “가장 반동적인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자! 풍차를 향해서 대가리 터지게 돌진! 돌진! 또 돌진!
6) 남구현 교수는 위 인용문 속에서 또한 “비록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정책 내용을 담고 있어 투쟁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운운하고 있다. 지금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의 반노동자적 성격은 남구현 교수가 위와 같은 서술 속에서 사실상 그렇게 치부하고 있는 것처럼 그토록 부차적․주변적인 것인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본질적 성격 그 자체 중 하나 아닌가!
3. 남구현 교수 등이 반드시 대답해야 할 것
1) 남구현 교수의 9월 23일자 ‘대응’이 ‘형식상으로라도 최소한의 유효한 대응’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근거 없이 단언․선언․전제하는 대신에, 사실의 증거와 논거를 통해서 입증했어야 할 것이다.
2) 첫째로는, “한마디로, 대중들의 직접행동이 빈사에 빠진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해낸 게 현 사태의 규정적 핵심이다” ꡔ현미ꡕ 제98호, p. 87.
운운하는 자신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도대체 어떤 민주주의를 구해냈다는 것인지?
지금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무관하게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이,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당신들의 ‘형이상학적 사고’가 아니고도, 가능한 것인지?
나는 남구현 교수 등이 적대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는 글에서 이미, 국가보안법, 집시법, 테러방지법, 부안 사태, 네이스 파동 등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노무현 정권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민주세력’입니까?”고 물었고, ꡔ현미ꡕ 제97호, p. 11.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해낸 게 현 사태의 규정적 핵심” 운운하는 저들 맑스주의 교수님들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저들의 대답은 ‘수구반동’이니 ‘공동의 적’이니 하는 염불뿐이다.
‘탄핵국면’에서 그 소부르주아 대중의 광란을 가리켜서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해낸 게 현 사태의 규정적 핵심” 운운하는 것은, 어떤 요설(妖說)로 치장하더라도, 결국 노무현 정권을 민주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세 분 맑스주의 교수님들께서 노무현 정권이 ‘민주적임’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국 저들의 선전을 선전한 것 이외의 다른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저들 맑스주의 교수님들은 그렇게 그러한 선전을 해온 것 아닌가? “봐라,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되니까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 들지 않느냐?!”며, 회심의 꼬리를 쳐들어 흔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들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대신에 예정하고 있는 ‘형법 보완입법’ 혹은 ‘대체입법’이 사실상 ‘국가보안법을 개악하는 것’이라는 것은 이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남구현 교수 식으로 표현하면, “아직 작동하고는 있지만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실질적인 효과가 적은”(ꡔ현미ꡕ 제98호, p. 5) 국가보안법을 ‘걷어내고’, ‘실질적인 효과가 많은’ 새로운 ‘족쇄’를 도입하고 있다고나 할까?

3) 둘째로는, ‘탄핵국면’에서 자신들이 그토록 중시했던 ‘대중’과 남구현 교수가 ꡔ노동자의 힘ꡕ 제57호(2004. 6. 25.)에서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기도 하였다”는 야유와 함께 자신들의 입장이 옳았음을 강변할 때 언급한 ‘대중’이 계급성이, 혹은 적어도 그 정치적 지향이 동일한 계급임을 입증했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탄핵국면’에서 ‘민중탄핵론’을 거론한 사람들이, 그리고 세 분 교수께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탄핵 무효’를 외치던 ‘광화문의 대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계급성, 그들의 정치적 지향, 그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광화문의 대중’과 남구현 교수가 ꡔ노동자의 힘ꡕ 제57호에서 천연덕스럽게 “봐라, 대중이지 않느냐!”는 식으로 내세우고 있는 대중은 그 계급성도, 정치적 지향도 판이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많은 면에서 대립적․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그는 ꡔ노동자의 힘ꡕ에서 마치 그 양자가 동일한 대중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기를 치고 있었고, 9월 23일의 ‘반응’을 불가피하도록 남구현 교수를 몰아부친 바로 그 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의 ‘대중’이라는 소항목에서 내가 비판했던 것도 바로 그의 그러한 사기였다.
그러나 그는 “광화문 집회로 상징되는 대중적인 중간 계급 운동의 동력이 결합되어 있었으며” ꡔ현미ꡕ 제102호, p. 194.
운운하는 말로,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ꡔ노동자의 힘ꡕ에서의 사기가 적극적인 것이었다면, 이는 소극적인 방식의 사기이다.
4) 셋째로는 노무현 정권의 ‘개혁’이 노동자․민중의 이익에 기본적으로 봉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혹은 적어도 ‘반노동자적․반민중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어야 할 것이다.
남구현 교수 등은 애초의 글에서 노무현 정권의 ‘개혁’을 노동자․민중에게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의 한계” 운운했고, 나는 그들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도착된 인식”에 대해서도 충분히 비판했다. ꡔ현미ꡕ 제102호, pp. 156-58 참조.
그런데도 그는 거기에 대한 대답 없이 “우리의 문제의식은 ... 탄핵 정국은 노무현 정권의 개혁 부르주아지 또는 쁘띠적 개혁(즉 과거 청산, 정치 개혁, 지역주의 청산으로 상징되는 수구 반동과 정치의 전 근대성에 대한 공격)에 대한 수구 세력의 반동에 의해 야기된 것이고...” ꡔ현미ꡕ 제102호, p. 194.
운운하면서, 사실상 과거의 주장을, 저들의 선전을 되풀이하고 있다.
저들이 떠드는 이른바 “‘과거 청산’은 사줄 만하지 않으냐”고? 거기에 대해서는 세 분 교수님의 비판이 된 글에서 이미 이렇게 쓴 바 있다.
‘친일진상규명법’을 열린우리당이 주도한 작은 성과라고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그 법을 주물러서 껍데기만 남겨 놓은 한나라당 등에 대해서 누구 못지않게 분노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봅시다. ‘해방’ 60년 만에 친미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친일 진상 규명’이 과연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들의 친미행각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닙니까? ꡔ현미ꡕ 제97호, p. 14.

지금 떠들고 있는 ‘과거청산’이 이러한 평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겠는가?
정치개혁? ― 이 역시 “노무현 정권 또한 깨끗한 손”이 아니며, 역사적인 여러 선례를 들어서 “부패구조의 재편”, “정치자금 배분 구조의 재편”임을 충분히 얘기했다. 실제로, ‘탄핵정국’이 터지기 훨씬 이전부터, 노무현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여러 정치적 부패가 드러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지역주의 청산? ― 졸던 소도 웃을 얘기다.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선전을 동원한 간교한 지역주의에 의거해서, 그리고 서울로의 지나친 인구 집중이라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지역주의를 동원하기 위한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동원하면서 권력을 잡았고, 아직도 그 지역주의에 의존하고 있는 정권이 어떻게 지역주의를 청산하겠다는 말인가?
이러한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자를 자칭하는 정치학자님들께서 ”정치개혁“ 운운하고, ”지역주의 청산“ 운운하고 계시는 것은 ‘정치학자’의 권위를 실어 발벗고 저들의 정치선전꾼으로 나서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 반복되는 얘기지만, 노무현 정권의 개혁이란, 오늘날 노무현 정권이나 그 정권의 행보, 구체적 정책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이어서 철저히 반노동자․반민중적이고 철저히 친독점자본적이다. ‘탄핵정국’에서도, 지금도,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은 결코 “현 정세와 국면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해 추동된 것이 아니고” ꡔ현미ꡕ 제102호, p. 195.
하며 넘기고, 더구나 그 점을 들어 비판하고 나섰다고 해서 “반동적 사회주의” 운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개혁이니 지역주의 청산이니 하는 것은, 노무현 정권이 진심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그와 대결하는 것도 아니지만, 백보 양보해서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이른바 ‘개혁적 부르주아지’ 내지 ‘개혁적 쁘띠’와 ‘수구 반동 세력’ 간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 계급이 반노동자 계급적인 저들의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비판을 접고 저들 ‘개혁적 부르주아지’ 내지 ‘개혁적 쁘띠’를 편들 이유는 없다. 정치개혁이니 지역주의 청산이니 하는 것들이 기본적으로 (소)부르주아적 과제인데다, ‘개혁적 부르주아지’ 내지 ‘개혁적 쁘띠’가 이미 저들 ‘수구 반동 세력’과 유력하게 권력을 다투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권력의 담당자가 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남구현 교수가 9월 23일의 글에서 반론을 제기한 바도 있고 하여, 뒤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6) 참고로, 저들이 근거도 없이 마치 ‘노무현 정권은 옹호할 가치가 있는 민주세력’이라는 주장을, 그것도 부정직한 방식으로, 펴고 있지만, 백보․천보 양보하여 그들에 따라 노무현 정권이 ‘상대적으로 보다 민주적인 세력’이라고 인정하더라도, 그들 집권 하의 민주주의는 그들을 옹호하고 지지함으로써 신장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끊임없이 저들을 비판하고 그들을 압박함으로써만 신장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도 말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개혁’에 대해서도 유사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제 계급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 등
1) 남구현 교수는 필시 “다른 견해에 대해서” “최소한 동지적 관점에서” “경청하고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로” ꡔ현미ꡕ 제102호, p. 192.
왜곡․날조․모함하여 사람을 기막히게 하는 기막힌 재주를 타고 난 것 같다. 마치 내가 “제 계급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 문제를 들어 자신들에게 “맑스가 이야기 하지도 않은 내용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고 한 것처럼 모략하면서 열을 올리며, 정말 ‘대학자다운’ 반격을 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ꡔ현미ꡕ 제102호, p. 193 참조.

청맹과니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그들을 ‘사기꾼’으로 규정한 것은 그들이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는 것의 내용임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용, 그 “전후 맥락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길게 인용” ꡔ현미ꡕ 제102호, p. 154.
한 인용문 속에 라쌀레 문제가 포함되어 있고, 또 그에 대해서, 바로 남구현 교수가 문제삼고 나온 바로 그 내용의 각주를 내가 달았지만, 그야말로 “전후 맥락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일 뿐, 내가 그것을 들어 그들을 사기꾼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ꡔ현미ꡕ 제102호, pp. 154-55 참조.

2) 그는 말한다.
채 소장은 ―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과문과 무지를 힐난할지 모르겠으나 ― 우리가 서당개 풍월에 불과한 지식을 가지고 사기꾼 기질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실례로서 우리가 맑스가 이야기 하지도 않은 내용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고 하고 있다. ꡔ현미ꡕ 제102호, p. 193.

여기까지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에 이어서 그가 그 첫번째 ‘실례’로서 예의 라쌀레 관련 발언을 드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모함이고, 사기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학식이 ‘서당개 풍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그들의 ‘국민발의권’ 등의 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도 대략 입증한 바 있다 ꡔ현미ꡕ 제98호, pp. 21-26 참조.
는 점도 다시 밝혀두고 싶다. 언젠가도 잠깐 언급했지만, ‘테르미도르 반동’의 성격, 그 주체의 계급적 성격을 고려할 때 저들이 국회에서의 ‘탄핵안 가결’을 가리켜 ‘테르미도르 반동’ 운운하는 것도 사실 그러한 서당개적 풍월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분명히 말해두지만, 내가 저들의 사기를 증명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면 불끈하시겠지만 잠깐만 진정하시오. 곧 다시 증명해 줄터이니까―) “혹시 누가 있어 나의 과문과 무지를 힐난할지 모르겠지만” 하고 썼던 것은 결코 저들 서당개들을 의식했거나 하물며 그들의 비아냥감이나 되기 위해서 그렇게 썼던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썼던 것은 단지 “반동적 사회주의”와 관련한 저들의 사기를 나는 맑스․엥겔스의 논의를 단지 MEW로 알려져 있는 ꡔ맑스․엥겔스 저작집ꡕ(Dietz 판)에 의거하여 “결단코 그러한 적이 없다”고 입증하고 있지만, 그 ꡔ저작집ꡕ이 맑스․엥겔스의 저작 ‘전체’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었을 뿐이다. 하기야, 9월 23일의 글에 표시된 MEW 상의 전거나, (너무나 역겨워서 그의 첫 번째 발언의 앞부분을 읽다가 내팽개쳐버렸지만) 지난번 연구소 내부 토론회의 ‘녹취록’에서 맑스는 ꡔ공산당 선언ꡕ 속에서 ‘반동적 사회주의’로서 “기독교적 사회주의, 소시민적 사회주의 그리고 진정 사회주의”를 들고 있다고 하는 남구현 교수의 설명을 보면, 그의 MEW는 나나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편제도 내용도 전혀 다른 것인 모양이지만! (다음에 할 얘기지만, 이렇게 전혀 다른 MEW를 가지고 그에 의거하고 계시니,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실 수밖에!)

3) 아무튼 이어서 그는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다. “물론 맑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가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며...” 운운하면서 말이다. 했어야 할 대답은 안 하면서 묻지도 않은, 하나마나 한 이런 장광설은 왜 필요했을까? 뭐에 제발이 저려서 그는 이런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4) 아무튼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글에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은 라쌀레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여타 소부르주아계급의 투쟁 역시 혁명적일 때가 있다”라고 쓴 부분에 대해 그[채만수: 인용자]는 과연 제 계급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이 그러한 것이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서술은 사실 마치 나나 ‘민중탄핵론’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러한 관념을 가졌다고 암시하는 모략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거꾸로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우리의 글이 민중탄핵론 입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략했는지는 차치하고, 라쌀레의 관점과 이에 대한 맑스의 입장은 글에 오해의 여지 없이 제출되어 있다고. ꡔ현미ꡕ 제102호, p. 193.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위 인용문에서 스스로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라쌀레 운운하면서 “마치 나나 ‘민중탄핵론’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을 가진 것처럼 암시적으로 모함하였고, 내가 주요하게는 아니지만 아무튼 문제의 각주에서 추궁한 것도 바로 그 ‘모략’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얼마나 대단하시고 오만하시면, 그에 대해서 “우리의 글이 민중탄핵론 입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략했는지는 차치하고 ...” 운운하고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본말의 전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5) 하기야 이런 ‘본말전도’를 묻는 내가 어리석을 것이다. 학자님들 사이에서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본말 전도도 예사롭게 행해지고 있는 모양이니까 말이다.
다름 아니라, 본 건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이종영 교수는 최근에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글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글에서 그가 전개하는 “현행 민주주의” 혹은 “정당 의회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여러 면에서 경청할 만하다. 그런데 그 비판에 열중한 나머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지양한 가장 모범적인 역사적 사례는 중세 유럽의 도시코뮌들에서 발견된다” 이종영,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 ꡔ진보평론ꡕ 제21호, 2004년 가을, p. 137.
“생산단위 내부의 봉건적 관계를 사상할 수 있다면, 중세 유럽 도시코뮌의 이러한 정치는 직접적 생산자가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생산자들 서로간의 공존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진정하게 민주주의적인 것이다” 이종영, 같은 글, p. 138.
(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 문제를 논하면서 “생산단위 내부의 봉건적 관계를 사상할 수 있다면... 진정하게 민주주의적”이라니! 도대체 내부의 그 봉건적 관계를 사상(捨象)하면서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러나 이런 본말전도, 주객전도가 예사롭게 행해지는 게 진보적 학자님들의 세계인 모양이다.

6) 우리의 본론으로 돌아가자.
내가 라쌀레에 대한 저들의 서술과 관련하여, “과연 제 계급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이 그러한 것이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하는 식으로 표현했던 것은 저들의 서당개 풍월식의 글쓰기와는 크게 구별되는 서술방식으로서,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당연히 그 문제가 전체의 논의 속에서 주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말(末)이었지 결코 본(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계급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을 저들 교수님들께서 쓰신 것처럼 단정해버리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구현 교수는 바로 이 점을 들어, 내가 그 점을 들어 자신들을 사기꾼이라고 몰아세웠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면서, 자신들은 결코 ‘사기꾼이 아니며 맑스에 의거했노라’는 식으로 떠들어대고 있다. 참으로 가소롭게도!
7) “라쌀레의 관점과 이에 대한 맑스의 입장은 맑스의 글에 오해의 여지 없이 제출되어 있다”며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고타강령 비판을 보면, “노동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의 과제일 수밖에 없고, 노동자 계급에 대해 모든 다른 계급들은 오직 하나의 반동적 대중(eine reaktionre Masse)”이라고 쓴 라쌀레에 대해 맑스는 공산당 선언을 인용하면서 부르주아지는 구질서를 옹호하는 봉건계급과 중간신분에 대해 대산업의 주창자로서, 중간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로의 몰락을 앞두고 혁명적인 경우를 쓰고 있는 것이다.(MEW 19, 22-23) ꡔ현미ꡕ 제102호, pp. 193-94.

우선, 여담이지만, 1864년에 세상을 떠난 라쌀레가 어떻게 1875년의 “고타강령”을 쓰고 있단 말인가? 이 역시 저 남구현 교수가, 혹은 저들이, 얼마나 불성실하게 서당개 풍월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예이다. (도대체 독자를 얼마나 얕잡아 보면 그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무튼 남구현 교수는, “고타강령”에 “노동의 해방은 노동자계급의 사업이 아니면 안 되고, 그[노동자계급: 인용자]에 대해서 다른 모든 계급은 단지 하나의 반동적 대중이다”이라고 쓰여 있는 것의 뒷부분, 그러니까 “그[노동자계급]에 대해서 다른 모든 계급은 단지 하나의 반동적 대중이다”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 맑스가 그것은 “‘그 (노동자계급)에 대해서 다른 모든 계급은 단지 하나의 반동적 대중을 이룰 뿐이다’라는, 순수한 라쌀레로부터의 인용(Lassallesches Zitat vom reinsten Wasser: der (der Arbeiterklasse) gegenber alle andern Klassen nur eine reaktionre Masse bilden)” MEW, 19, S. 22.
이라고 했던 것을 들면서 ‘제 계급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은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이라고 본 것 아니었느냐”는 식으로 떠들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전거를 발견하셨다. 그러나 연구소 내부 토론회니까 하는 말이지만, “고타강령” 중의 그 부분은 내가 문제의 글을 쓰기 전인 금년 봄에 “20세기 사회주의 연구” 쎄미나팀에서도 이미 검토된 바 있고, 그 때에도, 즉 그 명문(明文)을 앞에 두고서도 나는, “그렇다고 하여 라쌀레가 정말 제 계급계층을 단지 하나의 반동적 대중으로 봤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저들 세 분 교수님과 내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8) 우선,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 자신이 라쌀레를 깊이 연구한 적이, 그의 저작을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그를 판단하는 데에서의 나의 자료인 맑스와 엥겔스의 ꡔ저작들ꡕ에는 ‘제 계급 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과 관련하여, 위 “고타강령”에서와는 전혀 다른 언급도 있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수많은 글에서 라쌀레에 대해서 대략 500번 정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위 “고타강령”에서와는 전혀 다른 언급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라쌀레의 모든 사회주의가 자본가를 욕하고 프로이센의 시골귀족(Krautjunker)에 아부하는 데에 있었다면, ...” 운운. F. Engels, "[Rezension des Ersten Bandes "Das Kapital" fuer den "Beobachter"]", MEW, Bd. 16. S. 227.

“라쌀레가 사회주의 천년왕국의 도입이라고 하는 비스마르크의 소명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면, ...” 운운. 같은 곳.

어떤가? 여기에 인용한 글들은 라쌀레가 ‘노동자계급 이외의 여타 계급’에 대해서 또 다른 태도를 취했음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맑스․엥겔스의 저작을 더욱 검토하면 아마 이 이외에도 더 많은 ‘다른 언급’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만, 아무튼 위에 든 인용문만으로도, 라쌀레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인용과 평가가 맞다면, “제 계급 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은 “노동자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이라고 것이었다는 판단은 유보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5. ‘사회파시즘론’ 운운에 대해서
1) 사실 무엇 하나 주워듣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재단해버리는 것도 다름 아니라 서당개적 소양의 발휘인데, 그러한 기질은 저들이 애초의 문제의 글에서 “사회파시즘론” 운운하면서도 발휘한 바 있다. 그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신자유주의=파시즘’이라는 등식 역시 현실의 복잡한 제 관계들을 가리는 극히 단순화되고 과장된 도식일 뿐이다. 오히려 이 도식을 통해 지난 20세기 좌파 사회운동사의 가장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 가운데 손꼽히는 1920년 말~30년대 초의 ‘사회파시즘 테제’라는 우울한 경험이 연상되는 것은 웬 일인가? 임박한 히틀러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당시 독일공산당은 사민당을 히틀러 파시즘과 동일시하는 사회파시즘론을 공식입장으로 천명한 바 있고, 그것이 좌파 모두의 공멸로 귀결되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 좌익소아병적 사회파시즘론이 국제운동사에서 공식적으로 극복되는 계기가 이른바 1935년 디미트로프의 통일전선론이었다. 따라서 현 노정권과 그 지지세력을 한 웅큼으로 싸잡아서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오류이자, 실천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통전이전 단계로 좌파이론을 퇴보시키고, 고립을 자초하는 그래서 실천적으로 정치적 자살로 이어지는 관점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ꡔ현미ꡕ 제98호, p. 88.

2) 저들의 이러한 장광설 역시 ‘서당개 풍월식의 재단’이라고 나는 감히 단정한다. 왜냐? 그는 이른바 ‘사회파시즘 테제’는 주워들었지만, 서유럽의 맑스주의자들, 그 강단 맑스주의자들, 사민주의에 부유(浮遊)하는 그러한 ‘맑스주의자들’한테서 그러한 테제를 주워들었지만, 당시 독일공산당이 왜 그러한 테제를 내게 됐는지, 아니 왜 그러한 테제를 낼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왜 그들 ‘맑스주의자들’이 그 ‘사회파시즘 테제’를 그토록 매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그들에게서 주워들은 대로 그들과 함께 신이 나서 “20세기 좌파 사회운동사의 가장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 가운데 손꼽히는 1920년 말~30년대 초의 ‘사회파시즘 테제’라는 우울한 경험” 운운하면서 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러한 문제의식으로 탄핵정국에서의 우리의 노무현 신자유주의 비판까지를 멋대로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고 제기했던 것을 “현 노정권과 그 지지세력을 한 웅큼으로 싸잡아서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단정하는 것”이라고 왜곡․날조․모략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서당개 풍월’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제1차 대전 후 1930년대 초까지, 부르주아 정치학자․법학자 등이 그토록 “가장 모범적인 민주공화국이었다”고 격찬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대해서, 따라서 독일공산당에 대해서 학살․테러 등의 피의 탄압을 가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독일의 사회민주당이었고, 그 사민당 정권이었다.
상황이 그러하였으니, 독일공산당이 “사민당을 히틀러 파시즘과 동일시하는”(이 또한 과장․왜곡이지만) “사회파시즘론을 공식입장으로 천명”해다고 한들, 그렇게 “20세기 좌파 사회운동사의 가장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 가운데 손꼽히는 1920년 말~30년대 초의 ‘사회파시즘 테제’라는 우울한 경험” 운운하고 매도할 일이겠는가?
4) 저들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교수님들은 틈만 나면 “구체적 정세”니 “현실의 복잡한 관계”니 하는 염불을 외우고 있다. 그러나, 예컨대 내가 저들의 ‘국민발의권’ 운운하는 논의를 비판하면서 입증했던 것처럼, 저들은 그것을 염불로 외울 뿐 실제로는 그 ‘구체적 정세’나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도,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 바로 이렇게 ‘독일공산당의 사회파시즘론’ 운운할 때에도, “이 좌익소아병적 사회파시즘론이 국제운동사에서 공식적으로 극복되는 계기” 운운할 때에도 말이다.
“이 좌익소아병적 사회파시즘론이 국제운동사에서 공식적으로 극복되는 계기가 이른바 1935년 디미트로프 통일전선론이었다”고 얘기할 때, 저들은 ‘사민당은 예나 1935년 당시에나 여전히 거기 그렇게 있었는데, 독일공산당이, 국제 “좌파 사회운동”이 한번은 파시즘으로 규정했다가 나중에는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규정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몰역사적이고, ‘구체적 정세’와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무시한 서당개 풍월이며, 관념적․형이상학적 사고의 발로인가?
5)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이른바 ‘사회파시즘론’을 “공식적으로 극복하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 “1935년 디미트로프의 통일전선론”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말 그대로 계기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디미트로프의 통일전선론’은 단순히 디미트로프의 ‘사고(思考)의 소산’이 아니라, 당연히 당시의 정세변화의 반영이었다. 다름 아니라 나치 히틀러의 집권과 그 파쇼 하에서의 사민당의 태도 변화가 바로 그 주요한 구체적 정세요, ‘현실의 복잡한 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무시하면서 “20세기 좌파 사회운동사의 가장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 가운데 손꼽히는 1920년 말~30년대 초의 ‘사회파시즘 테제’라는 우울한 경험” 운운하고, “사민당을 히틀러 파시즘과 동일시하는 사회파시즘” 운운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러한 매도를 통해서 은연중 제1차 대전과 그 후에 독일의 사민당이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은폐하려는 저들 서유럽 ‘맑스주의자들’의 간교한 선전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일 뿐 아닌가!
6. 진정 사회주의? ― 역시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1) 앞에서 본 것처럼, 참으로 어이없게도 내가 라쌀레 문제를 들어 자신들을 ‘사기꾼’으로 몰았다고 사기를 치면서 가소로운 대답으로 열을 올리더니, 정말 내가 ‘사기’라고 몰아쳤던 ‘반동적 사회주의’ 운운 관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한편 그는 반동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맑스는 우리가 쓴 맥락에서는 - 그러면 어떤 맥락에서 쓰고 있는지는 밝히지 못한 채 - 어디에서도 결단코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는 반동적 사회주의, 그 중에 하나의 유형인 진정 사회주의에 대해 쓰기를, 당시 독일의 진정 사회주의자들이 봉건 계급에 대해 점차 위협이 되어가고 있는 자유주의자들의 운동에 대해 부르주아적 개혁이 인민대중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반대함으로써 봉건 계급의 반동적 이해 관계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미 부르주아 사회가 발전해 있는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역사 사회적인 맥락에 대한 고찰이 없이 그대로 가져다가 주장한 결과라고 쓰고 있다.(MEW 4, 510-511) ꡔ현미ꡕ 제102호, p. 194.

2) 역시 농담섞인 여담이지만, 남구현 교수는 역시 나나 다른 사람과는 다른 MEW를 가지고 있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그 4권의 486-487쪽 대신에 ‘510-511’ 쪽에 있다고 쓰고 있지만, 그렇게 불성실하게 쓰고 있지만, 그건 물론 그냥 웃으며 넘기자.
3) 문제는 그가 “보라, 맑스가 여기에 이렇게 ‘반동적 사회주의’라고 썼으니, 우리가 사기꾼이 아니라 우리를 사기꾼이라고 물어부친 네가 바로 사기꾼 이나냐”는 듯이 내세우고 있는 바로 그 전거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보라”는 듯이 내세우고 있는 전거란 것이 다름 아니라 어이없게도 ‘진정 사회주의’이다.
4) 그런데 ‘진정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그가 전거로 내세우고 있는 ꡔ공산당 선언ꡕ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진정 사회주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그리고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최대한 직역을 하지만, 양해하기 바란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적 그리고 공산주의적 문헌은, 지배 부르주아지의(einer herrschend
en Bourgeoisie) 압력 하에서 생겨났고 또 이 지배에 대한 투쟁의 문필상의 표현인데, 그것이 독일에 수입된 것은 [독일의 : 인용자] 부르주아지가 봉건적 절대주의에 대한 투쟁을 막 시작하던 때였다.
독일의 철학자들이나 반(半)철학자들(Halbphilosophen), 문예애호가들은 이 문헌을 탐욕스럽게 차지했는데, 다만, 이들 저작이 프랑스로부터 들어 왔을 때 프랑스의 생활관계가 동시에 독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망각했다. 독일의 제 관계에 대해서 프랑스의 문헌은 모든 직접적인 실천적 의의를 상실했고, 순전히 문학적인 모습을 띠었다. 그것은 1848년 판에는 여기에 “진정한 사회에 관한”이라고 삽입되어 있다. ― MEW 상의 원주(原注)임.
인간의 본질의 실현에 관한 한가한 사변(思辨)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세기의 독일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프랑스의 첫 번째 혁명의 제 요구는 단지 ‘실천이성’ 일반의 요구라는 의미밖에는 갖지 않았고, 혁명적인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의지표시는 그들의 눈에는 순수의지, 이러해야 할 의지, 진실로 인간적인 의지의 법칙을 의미했다.
독일 문필가들의 독자적인(ausschliessliche) 작업은 새로운 프랑스의 사상을 그들의 낡은 철학적 이식과 조화시키는 것 혹은 오히려 그들의 철학적 관점에서 프랑스의 사상을 습득하는(sich aneignen) 것에 있었다.
이러한 습득은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즉 번역을 통해서 일어났다.
어떻게 수도승들이 옛날 이교도시대의 고전적 저작을 베낀 사본 위에 무미건조한 카톨릭의 성도전(聖徒傳)을 썼던가는 잘 알려져 있다. 독일의 문필가들은 세속의 프랑스 문헌으로 그 반대의 작업을 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원문 뒤에 자신들의 철학적 헛소리(Unsinn)를 썼다. 예컨대, 화폐관계에 대한 프랑스의 비판 뒤에 그들은 “인간의 본질의 외재화(外在化)”라고 쓰고,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프랑스의 비판 뒤에 “추상적 보편자의 지배의 지양”이라고 쓰는 식이었다. 프랑스적 전개의 밑에 이러한 철학적 상투어를 삽입하는 것을 그들은 “행위의 철학”, “진정 사회주의”, “독일적 사회주의 과학”,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초 부여” 등등으로 명명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문헌은 그리하여 참으로 거세되어 버렸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그것들이 독일의 손에서 어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투쟁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일면성”이 극복되고, 진정한 요구들 대신에 진리의 요구를,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이익 대신에 인간 본질의 요구, 인간 일반의 요구를 대표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무릇 현실의 존재(Wircklichkeit)가 아니라, 단지 철학적 환상이라는 천상의 몽유세계에만 속하는 인간이다. MEW, Bd. 4, SS. 485-86.

자, 이것이 바로 ꡔ공산당 선언ꡕ에서의 ‘진정 사회주의’에 대한 의미 규정이다. 이러한 ‘진정 사회주의’가 어떻게 저들이 ‘민중탄핵론’을 거론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고 했던 그 ‘반동적 사회주의’와 같단 말인가!? “부르주아지가 봉건적 절대주의에 대한 투쟁을 막 시작했던” 그 엉뚱한 시대적 상황을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여 부르주아지 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입시킨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민중탄핵론’을 거론했던 사람들이 18세기 독일의 철학적 문필가들과 같은 그러한 얼뜨기 같은, 그러한 관념론적 존재란 말인가?! 그렇게 제멋대로 사람들을 모욕해도 좋은 것인가!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을 가졌다고 몰아부칠 때는 언제고, 그렇게 우리가 ”인간 본질의 요구, 인간 일반의 요구를 대표한다고 알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인가?!
참으로 서당개도 조금만 똘똘한 서당개라면, 도저히 그런 억지, 그런 사기는 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뭐? “그의 말대로 과문과 무지를 힐난할 수밖에, 논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 “정말 꼴값 떨고 있다!”고밖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5) 여기서도 그는 또 가소롭게도, 이번에는 내가 맑스의 “뒷부분을 생략했다”고 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를 가리켜서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던 그 ‘반동적 사회주의’가 그의 말대로 ‘진정 사회주의’여야, 그것이 ‘진정 사회주의’에 해당한다는 그의 주장이 사기가 아니라 타당성이 있어야 ‘뒷부분’을 논할 여지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인간들이 물론 아닐 것이다. 그 ‘뒷부분’, 그러니까 남구현 교수가 9월 23일의 글의 장광설을 통해서 사실상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부분은 바로 그 뒷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뒷부분은 “이러한 독일 사회주의는, 자신의 서투른 학교습작을 그토록 진지하고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협잡꾼처럼 떠벌리면서, 그러는 동안에 차츰 그 좀스러운 순결성을 상실했다”는 문단, 그리하여 ‘민중탄핵론’을 거론했던 사람들을 모욕하기에 안성맞춤인(?) 문단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6)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물론 채워질 수 없다.
우선, ‘봉건영주 및 절대군주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투쟁’, 즉 계급투쟁을 시대착오적으로, 그것도 자신들이 ‘개혁적 부르주아지’니 ‘수구 반동 세력’이니 하고 부르는 독점 부르주아지 내부의 분파 투쟁에 대입하는 점도 그렇고, 더구나 맑스와 엥겔스는 그 글의 어떤 곳에서도 “주창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것”, ꡔ현미ꡕ 제98호, p. 91.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ꡔ공산당 선언ꡕ에서 논하고 있는, “봉건적 사회주의”․“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독일의 혹은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세 부류의 “반동적 사회주의”는 어느 것이나 그 주체, 그 주창자들의 계급적 반동성, 그 지향의 반동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지, “주창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 따위의 논지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따위의 주장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사기에 맑스주의적 이상을 입히려는 얄팍한 사기에 불과한 것이다.
7) 뿐만 아니라, 남구현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그 뒷부분에서도 맑스와 엥겔스는 ‘진정 사회주의’의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독일 사회주의는, 프랑스의 비판의 넋이 없는 반향(反響)에 불과한데, 그 프랑스의 비판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그에 상응한 물질적 제 생활조건이나 그에 적합한 정치제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 버렸다. 그런데 이들 전제는 모두 독일에서는 이제야 겨우 그것을 쟁취하는 것이 문제로 되어 있는 바였다. MEW, Bd. 4, S. 487.

자, 맑스와 엥겔스가 ‘반동적 사회주의’로서의 ‘진정 사회주의’를 논할 때는 이렇게 언제나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 상응하는 물질적 생활조건과 그에 적합한 정치제도’의 부재를 지적했고, 18세기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즉 ‘진정 사회주의자들’의 그러한 물질적․정치제도상의 전제에 대한 망각이 문제였다.
그런데, 시대착오는 차지하더라도 지난 ‘탄핵정국’에서 그러한 물질적 생활조건과 정치제도라는 전제를 망각한 것은, 신자유주의 개혁과 그로 인한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의 파괴를 얘기한 우리인가, 아니면 그야말로 추상적․관념적으로 ‘민주주의’ 운운한 저들 맑스주의 교수님들인가?

< 미안한 이야기 : ‘반나절 + 하룻밤’은 저들의 사기를 충분히 논증하기에 는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짧은데 몸은 지칠 대로 지쳐서 이하는 극히 간략히 처리합니다. 미안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가능하면 수일 내로 보완해서 다시 제출하겠습니다. >

8) 이상의 모든 증거들은 남구현 교수가 “우리는 이를”, 즉 ‘진정 사회주의’를 “지금 우리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적 부르주아적 내지는 쁘띠적 개혁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없다고 반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하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여 인용한 것이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 모두 사기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연히 “만약 채소장이 맑스의 위와 같은 진술을 이러저러하게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면 그래도 경청하고 우리의 견해를 밝히고 논쟁을 할 수 있으나, 그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밝히지 않은 채 우리가 우리의 주장에 맑스의 의상을 입히고 사기를 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이러한 점에서는 그의 말대로 과문과 무지를 힐난할 수밖에, 논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기이며 꼴값떠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III. 남구현 교수의 “채소장 글에 대하여”에 대하여 (2)
1. “채소장은 선거 때마다 후보 전술 자체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 정치무대가 맑스가 우려하듯이 부르주아와 쁘띠들에 의해 독점되도록 기여해 왔다”?
1) 남구현 교수는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다. 여기에서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가, 맑스와 엥겔스가 “1850년 3월에 동맹원들에게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호소문”에 대한 나의 이해․해석이 잘못되었다며, 그러한 주장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9월 23일자 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탄핵과 관련된 쟁점은 아니지만 맑스는 여기에서 [예의 “호소문”에서: 인용자] 노동자 정치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인 독자 후보 전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맑스는 독자적인 행동으로서 선거에 독자 후보를 내세우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반해, 채소장은 선거 때 마다 후보 전술 자체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독자적인 후보전술을 막아왔으며, 정치 무대가 맑스가 우려하듯이 부르주아와 쁘띠들에 의해 독점되도록 기여해 온 것이다. ꡔ현미ꡕ 제102호, p. 196.

2) 그야말로 ‘서당개 풍월’이요, 또 그러한 자가당착이다.
앞에서는 뜬금없이 “물론 맑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가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며, 맑스가 이야기하였다고 그 자체가 아니다”며, “우리의 현실 모순을 어떻게 인식하고 현실 모순을 극복하는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수 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라며 ꡔ현미ꡕ 제102호, p. 193.
괜한 너스레를 떨더니, 이제는 현 한국의 노동운동의, 소위 ‘독자후보 전술’ 운운하는 사람․세력들의 구체적인 조건이나 진의 등을 내팽개치고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3) 내가 비판해 온 것이 어떻게 “후보 전술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는가? 내가 비판해온 것은 그 ‘후보 전술’이라는 주장․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진한 청산주의 아니었는가?
실제로, 1987년 대선에서 민중후보를 주장하고 ‘합법정당’을 주장하던 일부 그룹, 예컨대 ‘선봉’ 그룹 같은 경우, 말하자면 “지하의 전위정당 위의 전술적인 위성정당으로서의 합법정당”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주장 자체 “여기 금 묻지 않았음”이라는 푯말, 혹은 “여기 지하에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렸소”하는 광고 아니었던가?
그리고, 지금 남 교수가 얘기하는 90년대 이후의 선거판에서는 그 나마의 문제의식도 모 두 청산되고, 그야말로 ‘합법정당’을 지향하고, 그러한 합법적 정치를 지향하는 후보전술 아니었던가? 그리고 내가 비판해온 것은 명시적으로 그러한 청산주의적 후보전술 아니었던가?
4) 그리고, 내가 “선거 때 마다 후보 전술 자체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독자적인 후보전술을 막아왔으며,” 그리하여 “정치 무대가 맑스가 우려하듯이 부르주아와 쁘띠들에 의해 독점되도록 기여해” 왔다고, 그렇게 나의 능력 혹은 ‘영향력’을 높이 평가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자신들의 청산주의적 열정을 열렬히 발휘해 왔고, 만일 그 열정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나의 비판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에 고유한, 혹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뭐? “정치 무대가 맑스가 우려하듯이 부르주아와 쁘띠들에 의해 독점되도록 기여해” 왔다고? ― 정말 재미있는 모략이다.
그리고 당신들일랑 말리라고 해도 말리지 않을 터이니 제발 그렇게 정치무대로 나가시구려!
5) 또 이른바 독자후보 전술이라는 명분 하에 청산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자체에 대한 나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결코 나의 비판이 그들을 저지하고 그들의 청산주의적 열정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나 바램에서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노동운동의 ‘생각하는’ 선진분자들에게 생각과 판단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러한 비판을 하는 것일 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세 분 교수님들에 대한 나의 비판도 추호도 당신들이 나의 비판에 수긍하고 그리하여 자신들의 태도와 주장을 바꿀 것이라는 기대와 바램에서 이렇게 힘들여 비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선진분자들에게 생각과 판단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에게 이렇게 적대적일 수 있는 것이다.
6)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주요 방안으로 맑스는 실제로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MEW, Bd. 7, S. 251.
고 말했다.
그리고 남구현 교수 등과 이광일 교수를 비판하면서 그 부분을 명시적으로 인용했다. ꡔ현미ꡕ 제102호, p. 75.

그러나 나는 그 문장들을 인용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는 비록 선거와 관련한 것이지만,” 하는 양보절을 잊지 않았다.
다음에는, 직접적으로는 비록 선거와 관련한 것이지만, 노동자 계급 운동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꽁무니에 묶어두고, 노동자들을 그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하는 ‘진보적 지식인’, ‘민주주의자들’의 기만적 언설에 농락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특히 깊이 새기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 ꡔ현미ꡕ 제102호, p. 190.

오만하다고 욕하겠지만, 나의 이러한 글쓰기야말로 저들의 서당개 풍월식 글쓰기와 구별되는 점의 하나라고 나는 감히 얘기하고 싶다.
7) 그런데, 왜 그러한 양보절, 즉 “직접적으로는 비록 선거와 관련한 것이지만,” 하는 얘기가 필요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의 그 호소문을 보내던 1850년의 독일과, 그 당시의 독일의 정치상황, 노동운동의 상황과 현재 한국의 그것이 판이하게 달라서, ‘어떠한 조건 속에서 독자성을 타산하고 유지하느냐’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중요하지만, 당시 독자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선거에서의 독자적인 후보’는 현재의 한국의 조건에서는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맑스와 엥겔스가 그 호소문을 보내던 당시의 독일의 혁명적 노동운동은 ‘청산주의’나 ‘합법주의’가 문제로 떠오르지도 않았던 상황이다.
교수님, 시대착오요. 아시겠소?
2. 1850년 3월의 ‘호소문’은 단지 ‘공동의 투쟁’에 관한 것이다?
1) 남구현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채소장이 인용한 맑스의 글의 맥락은 다르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맑스의 글은 “공동의 적”을 두고 함께 투쟁하더라도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고 독자적인 행동(여기에서는 도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후보와 나란히 노동자 후보를 내세우는 것)을 견지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술로 받아들이고 싶다. ꡔ현미ꡕ 제102호, pp. 195-96.

2) 이런 것을 아전인수라고 했던가, 견강부회라고 했던가? 아무튼 대단히 편리한 해석이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든, 그거야 엿장수 맘대로지만, 그것이 그의 글처럼 겉으로 드러나 표현되면, 그것이야말로 곡해요, 실제로는, 그가 맑스주의 정치학자를 자처하는 정치학 박사이고 교수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름 아니라 지적 사기에 불과한 것이다.
3) 더구나 맑스와 엥겔스는 구체적 상황에 따라서 시기별로 다를 수밖에 없는 혁명적 노동자 정당의 전술 원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고, 또 그가 ‘반박’하고 있는 나의 글에서 나 또한 그것을 명시적으로 인용해주었는데도 그런 파렴치한 주장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에 대한 혁명적 노동자당의 관계는 이렇다. 즉, 혁명적 노동자당은 자기가 타도하려고 하는 분파에 대항해서는 그들과 함께 한다. 그들이 자신들을 강화하려고 하는 모든 경우에는 그들에 반대한다. MEW, Bd. 7, S. 247; ꡔ현미ꡕ 제102호, p. 187.

4) 두 번째 문장은 남구현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공동의 적’에 대한 공동투쟁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문장, “그들이 자신들을 강화하려고 하는 모든 경우에는 그들에 반대한다”는 문장은 어떤가?
그리고 지금의 한국의 상황, 지난 ‘탄핵정국’에서의 한국의 상황에는 어떤 전술이 올바른 것일까?
‘수구 반동 세력’을 타도해야 하니까 이른바 ‘개혁적 부르주아지’․‘개혁적 쁘띠’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일까? ― 이것이 지난 ‘탄핵정국’에서의 세 분 교수님들의 주장이었다.
5) 만일 저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여전히 ‘수구 반동 세력’은 타도해야 하는 대상이고, 더구나 오늘날 보는 것처럼, 그리고 원인․경위야 뭐였든, “보수세력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남았”고, “향후에도 새로운 형태로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지배계급을 위한 정치를 할 것” ꡔ현미ꡕ 제98호, p. 5.
이므로 노동자 계급 운동은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고” “도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후보와 나란히 노동자 후보를 내세우는” “독자적인 행동을 견지”하되, 여전히 ‘개혁적 부르주아지’․‘개혁적 쁘띠’와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말씀해보시지요, 교수님!
6)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강화하려고 하는 모든 경우에는 그들에 반대한다”는 맑스와 엥겔스는 지금 우리 상황에서 “도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후보와 나란히 노동자 후보를 내세운다”고 해석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오히려 귀하의 입장을 지지하는 진술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교수님?
7) 사실, 남구현 교수가 예의 맑스와 엥겔스의 ‘호소문’을 가리켜서 그것은 “맑스의 글은 ‘공동의 적’을 두고 함께 투쟁하더라도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고 독자적인 행동(여기에서는 도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후보와 나란히 노동자 후보를 내세우는 것)을 견지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맑스와 엥겔스가 구체적 정세에 따른 시기구분을 하면서 그에 따라 다른 전술을 제안하는 것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그렇게 주장할 때, 그것은 맑스와 엥겔스의 글을 철저히 거세시키는 것이고, 자신의 사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견강부회도 지나친 견강부회를 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연구원 여러분은 이와 관련하여 지난번 나의 글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중에서 특히 같은 제목을 가진 마지막 III 절을 다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연구소의 세미나 게시판에 ‘민희유아빠’가 올린 “자유주의에 의한 인민의 기만에 대하여”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

2004-1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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