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자주’의 문제에서는
진전이 있는가
편집출판위원회
한노정연
“결코 사진을 찍기 위해서 미국을 방문하지는 않겠다!”
그 배후에 아마도 틀림없이 존재할 국내․외의 복잡한
정치적 거래나 음모를 별도로 한다면,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여 그 정권을 성립시킨 것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또한 각자 주요하게
지향하는 바에 따라 분류하자면 그 스펙트럼이 상당히 광범한데,
그들 중의 주요한 집단의 하나가 미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의
자주와 그에 기초한 민족의 자주적․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그렇게 지향하는, 말하자면
민족주의자들이다.
지난 대선과 같은 대결 구도 속에서는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애초부터 노무현 후보 같은 유력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파의
후보를 지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민족 자주’의 문제에서는 진전이 있는가
첫째로는, 그들은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구
집권세력이나 직접적으로 재벌을 대표하는 후보를, 물론
정당하게, 적극적인 대미종속․숭미주의자들, 즉 반민족적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개혁적 수구세력’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노동자
후보 혹은 급진적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후보를 지지할 만큼
진보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후자는 결코 집권
가능성이 없는 영세 후보여서 반민족적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고자 하는 이들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현실적인 매력이 있을
수 없었다.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이렇게 애초부터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이러한 선택에 확신을 준 것은, 그리하여
그들을 적극적이고 열광적인 지지자로 만든 것은 “결코 사진을
찍기 위해서 미국을 방문하지는 않겠다”는 노무현 후보측의
슬로건이었다.
“결코 사진을 찍기 위해서 미국을 방문하지는 않겠다!” ―
이는 친미 혹은 숭미주의자들에게도 적극적인 비판 캠페인 혹은
저항이나 중상의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도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노무현 후보가 집권하면 무언가 대미
자주적인 정책과 자세를 견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주기에 충분한,
참으로 교묘하게 고안된 슬로건이었다.
더구나 노무현 후보에 대한 그들의 기대나 신뢰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서의 노무현 씨의 미국과 관련한 ‘독특한’(?) 경력에
의해서 더욱 뒷받침되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지난 대선 때까지
그는 한번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도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현실적으로 집권을 다투는 극히 유력한 정치인으로서의
그가 미국을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이면에는
어떤 은밀한 관계가 있는지 어떤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리고 또
그에 상관없이, 정말 특이한 경력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 치고 미국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계의 엘리트뿐만이 아니다. 군과
경찰․사법부를 포함한 관료계나 경제․재계는 물론
심지어 학계나 문화․예술계의 지배 엘리트들 치고 미국에
가서, 혹은 미국에 불려가서, 그 유력 정치가들이나 각계의 유력
인사들, 그리고 CIA나 기타 대외정책 씽크탱그로 불리는 여러
정보․공작기구들의 유력 인사들과 만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의 엘리트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계속
보장․지원받기 위해서,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모종의 거래를 하지 않은 자들이 사실상 없다.
그런데 하물며 현실적으로 대권을 다투고 있는 그가 한번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니! ― 이는 정말 순진한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로 하여금 노무현 후보의 집권에 대미 자주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경력’이었던 것이다.
“53년 전에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
그러나 노무현 정권에 대한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순진한
기대가 산산이 깨지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취임 3개월도 채 지나기 전인 5월에 그는 미국을
‘방문’하였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는 ‘자신의 본색을
확연히 드러내며’ 맘껏 ‘민족적 자주성’을 과시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의 그의 언동에 분노한 한 대표적 민족주의자의
발언을 들어보자.
확연히 드러난 노무현의 본색
노 대통령은 “한국을 떠나면서 걱정과 희망을 함께 가지고
왔는데 이제 희망만 갖고 한국에 가게 됐다”고 했다. 과연
그런가? 착각도 유분수다. 그가 가지고 온 것일랑 희망이 아니라
분노와 허탈이었고 또 그에 대한 절망과 배신감뿐이다.
왜냐면 그가 미국 가서 한 일이라곤 더욱 고조된 한반도
전쟁위기이고, 더 굴욕적인 자발적 대미 노예주의이며, 함께
가야할 북녘을 민족공조는커녕 미국과 합작하여 표적화하는
반(反)민족이었다. 또 그는 한반도를 동북아 중심국이기보다는
미국의 세계전략의 충실한 하수인 역으로 위상 지었고,
주한미군을 철군시키기보다는 동북아 지역군 용으로 영구주둔
시키고, 한국군을 미사일방어체제 등으로 ‘현대화‘시켜
한반도와 동북아에 군사긴장과 전쟁위기를 몰고 와 민족통일
행로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
자발적 노예주의로 치달은 노무현의 굴종외교
먼저 한국의 기성 주류 못지않게 ‘자발적 노예주의’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그의 미국에서의 엽기적 행보와 어이없는
굴종외교를 간략히 보자.
첫째,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무엇보다 한반도 전쟁위기를 말끔히
해소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미국의 대(對)북한 전쟁획책에
절대불가라는 우리의 목소리를 분명히 천명하고 선언하는 자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 증대될 경우에는 추가적인 조치의 검토가
이뤄지게 될 것이라는데 유의(한다)”로 사실상 미국의 한반도
전쟁을 묵인․동조한 셈이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P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지도자들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준 군사적 능력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 “미
공격 위협 북핵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한국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적 해결이 여의치 않을 때는 미국과
협의해 다음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그는
미국과 함께 전쟁을 주도한다는 가공스럽고 위험천만한 정책을
피력한 셈이다. 이러고도 그는 부시로부터 수사적인 평화해결을
공동선언에서 합의 받았다고 정상회담의 성공 운운하고 있다.
부시라는 자는 입만 열면 평화적 해결을 먼저 떠들어대고
말미에는 반드시 전쟁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본심을 내비치는
인간임을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반도 전쟁을 위한 시간 벌기와 명분 쌓기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는 전쟁 미치광이 부시는 이를 기반으로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옥죄면서 서서히 전쟁이라는 최후의 선택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미 연달아 예정된 미국의 일본, 중국, 러시아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이 마각을 드러낼 것이다. 이제 우리 민족의 생명권은
공멸의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바보’ 노무현은 전쟁불가에 대해 입도 한번
벙긋하지도 못한 채 부시에게서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어린애’(easy man)라는 ‘부추김’에 흥분까지 해서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둘째, 한반도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의 전쟁획책에 대한
통제력과 더불어 민족공조를 취해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시켜서 민족자주 행로를 개척해야 한다. 여기에는
당사국으로서 남한의 주도적 역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선언은 “남북교류와 협력을 북한 핵문제의
전개상황을 보아가며 추진해” 나가는 핵․경협연계론을
합의함으로써 민족공조를 통한 전쟁위기 해소와 통일기반 조성을
봉쇄해 버렸다. 남한 주도를 아예 포기한 채 그는 미국의
위험천만한 봉쇄구도에 자발적 예속주의로 푸들 강아지 꼬리를
흔들어 댄 셈이다.
더 나아가 그는 원초적인 대북 적대를 노골화했다. “미국이
53년 전 (한국전쟁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북한 체제
하에서)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코리아 소사이어티 주최 만찬에서 막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미국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오지 않았다면 우리의
분단도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는 현대사 입문조차도 모르는가
보다. PBS와의 인터뷰에서는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나는 북한이 믿을만한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정권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북한은 낡은 체제를 고집하고 있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북한 주민들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과 요구는
국제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없다”
나는 이 말들이 전쟁 미치광이와 ‘악의 축’ 이후 한국을
방문해 도라산에서 북한을 향해 내뱉은 부시의 발언인 줄
착각했다. 한국 대통령의 말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셋째, 그가 공약한 ‘주권국가로서의 체면과 위엄’을 살리면서
대등하고 상호존중의 한미관계를 정립하는 과제는 완전히
내팽개친 채 예속적인 한미관계를 자발적으로 더욱
고착․심화시키고 영구화시켜 미국이 획책하는
신냉전구도의 앞잡이 역을 자임하고 있다. 강정구, "노정권에
희망은 있는가?", ꡔ평화만들기ꡕ 제72 호, 2003년
5월 20일.
미 제국주의, 전쟁과 평화, 민족통일 등의 문제와 관련한 노무현
정권의 ‘본색’에 대해서 이 이상 더 분노하고 생생하게
고발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만, 강정구 교수가 위 글을 썼을 당시(2003년 5월 18일)의
‘시기상의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서 한 마디만 보태자면,
오늘날 노무현 정권의 대미 종속성 혹은 그 종속 지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안의 하나가 한국군의 대규모 이라크
파병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 전쟁이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에 대한 이권을 확대․강화하기 위한 미
제국주의의 파렴치한 침략전쟁이며 대량살육전이라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이라크 민중의 처절한 저항이야말로 정당한 것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하다. 그런데도 ‘개혁과 평화 세력’을
자임하는 노무현 정권은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이 되어 수천 명의
군대를 파병하고 있지 않은가!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구제불능의 자가당착
그런데 노무현 정권 혹은 노무현 대통령이 드러낸 ‘본색’에
대한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는 얼마나 절실한
것일까?
당시 저들이 정말 말과 글로 표현한 만큼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정권의 반민족적 행태․본색에 분노했다면, 정말 그랬다면,
그들은 당연히, 그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진 못한다 하더라도, 그
정권을 옹호하고 나서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의 그러한 ‘순진한 기대’(?)를 철저히
배반했다. 지난 봄 이른바 ‘탄핵 국면’에서 “탄핵 무효!”를
외치며 미친 듯이 노무현 정권을 옹호한 대표적인 세력 중의
하나가 바로 그 민족주의자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언동에
그토록 분노를 표출했던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의
지도부나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노동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이나 ‘이론가들’이 노무현 정권을 반노동자적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동시에
“탄핵무효!”를 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저들의 그러한 행태 속에서 우리가 구제불능의 소부르주아적
자가당착을 읽는다면 과도한 것일까?
저들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그러한 구제불능의 자가당착은
물론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한계는
결코 그들이 어떤 특정 인물, 특정정권에 헛된 기대를 건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한계는 보다 더 깊은 곳, 보다 더 근본적인 데에 있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바로 사회와 역사를 보는 저들의 관점의
한계이고, 따라서 한국 사회의 구조와 성격에 대한 저들의
이해의 한계인 것이다.
저들은 비극적 역사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현재의 한국의
사회구조를 그대로 두고도, 한국 사회의 현 지배-피지배 관계를
그대로 두고도 혹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부정하면서.
대미 민족자주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저들의 구제불능의 한계인 것이다.
역대 모든 정권이 보여준 대미 종속 지향성은 사실 한국 사회의
계급적 지배-피지배 관계의 표현이다. 그리고 바로 그 계급적
지배-피지배 관계야말로 그러한 종속 지향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유혈의 역사를 통해 강제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노무현 대통령 식으로 표현하자면, ‘54년 전’
저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서 수백만 명을 살상하면서 저
무지막지한 전쟁을 벌였으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파쇼 정권을 보장․지원해 왔겠는가를!
민주주의와 자유․정의를 위해서?
그런데도 저들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조차 ‘계급환원론’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저들은 끝없이
자기모순적인 정치적 실천을 거듭할 것이며,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로 위장한 교활한 정치꾼들의 노리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 정권 하에서, 아니 현재의 사회구조에서라면 어떤
정권 하에서도, 이른바 ‘민족 자주’의 문제와 관련, “진전이
있었는가” 하고 묻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아니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대미 종속성은
다음의 경우에만 청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한국의
지배계급이 바뀌는 경우나 미국의 그것이 바뀌는 경우, 혹은 그
두 개의 변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