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답사기 (3)
- 푸르른 옥정호와 야윈 섬진강
정 혁 기
자유기고가
se
oul_blues @ naver.com
섬진강의 물이 많이 불어난 섬진강 상류 모습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출발한 섬진강 물줄기는 진안군의
마이산 남쪽을 돌아 나올 쯤엔 강물이 불어나 여유 있는
모습이다. 진안군의 백운, 마령, 성수면을 지나 임실군 관촌면에
이르러서는 제법 어린 티를 벗어난 청소년처럼 힘차게 흐른다.
기행문 • • •
이곳 섬진강 상류를 따라가는 답사 길에는 빼놓을 수 없는
친구가 있다. 마이산(馬耳山, 673m)이다. 이름 그대로 솟은
모양이 마치 말의 귀처럼 두 봉우리가 쫑긋 솟아있다. 마이산은
신라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이라 불렀다.
계절별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봄에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돛대와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하늘에 우뚝 솟아있는
형상이 푸른 숲과 바위가 어우러져마이산
마치 용의 뿔과 같다하여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과 바위의
형상이 말귀와 같다하여 마이봉, 겨울에는 하얀 눈 위에 솟은
봉우리가 먹물을 찍은 붓과 같다하여 문필봉이라 부른다.
마이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기묘한 형상이다. 봉우리는 각각 673m, 667m. 높은
봉우리가 수마이봉, 낮은 봉우리는 암마이봉이다. 암수 봉우리로
솟아올라 마치 마귀를 닮은 산의 형상이 기묘하기도 하지만 그
사이에 쌓은 돌탑(塔寺)으로도 유명하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타원형으로 쌓은 80여 개의 높고 낮은 탑들은 안정감과 공간미가
신비롭다 못해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당초에는 120기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80여기가 남아있다. 이 탑들은 임실군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으로 알려진 이갑룡(1860~1957)이
쌓았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마이산 남쪽을 지나온 섬진강에는 마이산 외에도 성수산, 만덕산
등 주위의 산에서 흘러내려온 이곳저곳 계류들이 합류한다. 물을
더해가며 강은 여유롭게 흐른다. 섬진강을 따라가는 상류의
답사길은 강이 점점 성장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겁다. 이러한 섬진강의 모습은 상류를 벗어나 중류에
접어드는 시점인 신평면을 지나 운암면에 이르러서 전혀 새로운
자태를 보여준다. 섬진강이 옥정호(玉井湖)라는 호수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호가 시작되는 운암면의 면사무소가 위치한 곳에서
옥정호 서안을 따라가는 749번 지방도와 이어지는 715번 지방도,
그리고 정읍 산내면사무소에서 이어지는 30번 도로를 거쳐
섬진강댐에 이르는 길은 섬진강과 호남정맥이 오누이처럼 어울려
있는 빼어난 답사길이다. 간간이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숙박시설들과 산사면을 깍은 도로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거대한 인공호에 마치 남해안 다도해를 합해놓은 듯 수려한
풍광이 펼쳐진다. 특히 모래재, 곰치를 지나온 호남정맥은
섬진강과 바짝 이웃하며 흐름을 이어가는데 오봉산(513m),
국사봉(475m)에 이르러 한 폭의 산수화를 빚어낸다. 이곳에 이와
같은 자연경치가 펼쳐지게 된 것은 저수면적 26.5㎢에 총 저수량
4억 톤이 넘는 물을 담는 섬진강댐이 건설된 덕분이다.
섬진강댐
섬진강댐의 건설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동진 농지개량조합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정읍․김제 지역의 곡창 호남평야의 부족한 농업용수를
개발하기 위해 대규모 농업개발에 나섰다. 1927년 12월, 임실군
강진면에 운암제(雲岩堤)를 건설하고 터널을 뚫어 동진강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이어 1931년에는 제2의 터널을 뚫어
운암발전소를 건설했다. 일제에 의해 건설된 운암제를 시작으로
섬진강의 물은 지금까지 호남평야의 땅과 작물을 적시어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댐은 운암제가 아닌 1965년 12월에 새로
준공된 것이다. 대륙침략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미곡증산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동력원을 확보할
목적으로 1941년 운암댐 하류 2.4km 지점에 새로운 댐 건설을
시작했으나, 이 공사는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됐고 1948년 8월
조선전력주식회사(현 한전)에 의해 재착공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중단된다. 우여곡절 끝에 섬진강댐 사업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반영되어 공사가 다시 시작되어, 1965년
12월 국내최초의 다목적댐으로 완공됐다. 만수시의 표고가
1백96.5m, 총 저수량은 운암제의 7배에 달하는 규모였고, 이로써
일제가 건설한 운암제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댐이 높아짐에
따라 호남평야와 계화도 간척지 논에 대한 농업용수 공급과
전라북도 서남지역의 상수원으로서의 기능이 배가됨과 동시에
유효낙차(157.7m)를 이용한 수력발전에도 이용되고 있다.
섬진강의 물은 67km에 이르는 동진강 도수로를 통해 계화도
간척지까지 도달한다. 산을 넘겨 끌어들인 섬진강의 물로 농사를
짓는 셈이다. 계화도 간척지는 원래 서해안 갯벌이었으나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종합개발사업의 결과 탄생했다. 1963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동진
도수로와 청호저수지 축조, 용․배수로 조성, 경지정리
등을 거쳐 1978년에 이르러 준공기념탑을 세울 수 있었다.
섬진강댐이 완공된 지 13년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이 간척지에는 섬진강댐 건설로 수몰되게 된 섬진강 유역의 임실
운암․강진면 일대 수몰민이 이주해 왔다. 수몰민이
이주되는 과정에는 고통과 애환이 숨어있다. 무엇보다 계화도
간척지는 섬진강댐이 건설된 지 13년이 지나서야 완공을
봄으로써 그 시차 기간에 수몰민은 수몰지역인 고향을 떠나
정착하지 못하고 집을 떠난 방랑자와 같은 불안정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계화간척지 개답공사가 마무리된 1978년까지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통계수치로도 엿볼 수 있다.
종합개발사업이 마무리될 즈음인 1977~80년 사이에 계화리 등
간척지 지역에 임실 운암․강진면, 정읍 산내면 일대
수몰민 1천 9백 92세대, 1만여 명이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65년 12월 섬진강댐 준공에 따른 애초의 수몰민은
임실과 정읍지역에서 모두 2천 7백 86세대에 1만 9천 8백
51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1999년 8월말 조사에서는 계화도에
정착한 수몰민은 3백 12세대에 불과했다고 한다. 결국 수몰민의
상당수가 이주할 때 받았던 이주증서를 헐값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고 땅을 떠났다는 것을 말한다. 더구나 이주민에
대해서는 1938~1939년 일제시기에 용지매입이 완료됐다는
이유로 낮은 보상금이 지급되어 타향에 정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고향은 이미 물에 잠겼다. 그들 중의 일부는
전국 어딘가로 삶터를 찾아 흩어졌고 일부는 다시 수몰지역
주변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잃고 헤매는 한 많은 행로였으리라.
옥정호
옥정호 주위를 지나가면 곳곳에 이주 전 주민이 살았던 마을을
표시하는 빗돌이 서 있다. 물 속으로 잠기게 된 고향을 떠나면서
기념비를 세우고 마음도 묻어버리려 했을 이주민의 아픔을
헤아리니 푸르른 옥정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야속하기만 하다.
논․밭 농토를 일구고 곡식을 거두며 비록 고단한 삶이
이어지는 어려운 세월이었겠지만 가족과 이웃이 모여 살았을 집,
골목길, 당산나무, 멱 감고 고기 잡던 계류와 서로 나누었던
정과 자잘한 싸움까지도 몽땅 옥정 호에 잠겨버렸다고 생각하면
댐을 짓는 인간의 계획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게 된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고서는 보름을 넘기기 어렵다. 생명활동을
하는 모든 생명체, 즉 식물, 동물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생명체는 물을 고도로 이용하기 위한 고유한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생명체 중의 하나, 동물 중의 하나인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인류가 물을
어떻게 잘 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에는 티베트 고원에 자리
잡은 라다크 지방에 사는 주민들이, 황량하고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인간 생존에 절대적 필요조건인 물을 어떻게 이용해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라다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개울에서 옷을
빨고 있었다. 내가 더러운 옷을 막 물에 담그려고 할 때 일곱
살도 채 안 된 어린 소녀가 물길의 위쪽에서 왔다. “그 물에
옷을 넣으면 안 돼요” 하고 그 소녀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저
아래쪽 사람들이 그 물을 마셔야 돼요.” 아이는 적어도 한 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아래쪽 마을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물을
쓰면 돼요. 저것은 그냥 밭으로 가는 거예요.”
“대부분의 마을에서 관개는 마을 안에서 지명되거나 선출된
‘추르폰’이 관리한다. 그는 필요한 대로 수로를 막거나 열거나
하면서 물의 흐름을 조종한다. 각 집은 매주 일정한 시간 동안
물을 자기들의 밭으로 돌리도록 할당을 받는다. 한 어머니와 두
딸이 밭에 물을 대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는데, 그들은 조그만
수로를 열었다가 땅이 흠뻑 젖자 흙을 한 삽 떠서 그것을
막았다. 그들은 물이 놀라운 만큼 고르게 퍼지도록 하였다.
그들은 어디로 물이 쉽게 흘러가는지, 어디에서 조금 도와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한 삽을 떠내고 저기에다
쏟아놓고, 꼭 물길을 열만큼만 돌을 움직여 놓고 - 이 모든 것을
아주 섬세하게 때를 맞추어 할 줄 알았다. 때때로 그들은 삽에
기댄 채 한눈으로는 물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이웃사람과 잡담도
하곤 했다.”
지난 시기에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식수로 쓰이는
샘과 우물은 신성한 곳으로 여겼으며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물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가까이로는 1950년대의
한국전쟁과 그 이전의 동학농민전쟁과 임진왜란 7년 동안에
벌어진 참화 속에서 우물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마을에 사람이
더 이상 살지 못하게 하거나 초토화를 목표로 공격하는 데에
우물과 물을 오염시키는 것보다 효과적인 것이 있겠는가. 그들은
물길을 망가뜨리거나 치명적인 독소를 투입하거나 심지어는
시체를 우물에 처박음으로써 마을에 보복하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극한의 인간보복을 행사했다. 빠른 산업화를 거쳐 온 한국사회의
오늘날은 어떠한가. 이제 우리는 우물물을 먹지 않는다. 일부
산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갈수록 오염이 심해져 이용이
불가능해져 가고 있다. 이제는 관을 따라 유료로 공급되는
수돗물도 믿을 수 없어 용기에 포장 판매되는 식수에 의존하는
문화로 바뀌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돗물과 유료식수의 광범한 보급과 이용방식은 대규모 도시의
발달과 산업화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다. 수십만, 수백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대도시의 확장, 그리고 대규모 용수를 필요로
하는 산업단지 및 상업지구의 형성은 그 규모에 필적하는 대량의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로 물을 가둘 댐이 건설되어야 했다. 댐은 처음에는
농사의 필요에 의해 시작됐다. 우리는 그것을 저수지, 제 등으로
부른다. 가장 오래된 벽골제(碧骨堤)가 전북 김제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벽골제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쌓았다.
농업관개를 목적으로 한 댐의 건설은 최근까지도 계속됐지만
20세기에 들어서 다목적 댐 건설이 일반적이었다. 농업, 전력,
용수확보 등을 목표로 하고 최근엔 상업위락 및 관광기능도
강조된다. 어떤 이는 남한을 ‘댐 공화국’이라 부른다. 그만큼
댐이 많이 건설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한편, 댐 건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나타낸 표현으로 읽힌다. 사실 여행을
하다보면 산간의 크고 작은 계곡, 특히 물막이가 용이한
지역에는 댐이 수없이 건설되고 있다. 어떤 곳은 현지주민이
반대하는 데도 집요한 압박과 설득이 진행된다. 이렇게 댐이
많이 건설되는 이유가 무얼까. 근본적인 원인은 대도시의 확장과
산업화 때문이다. 대도시에 조밀하게 모여 사는 인구의 식용수와
상업지구, 산업생산 유지에 절대적으로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역에 들어선 댐들로 인해 섬진강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댐 하류의 수량은 대폭 줄어들었다. 섬진강댐이 가둔
물은 전북 서남부 지역의 용수원으로 사용키 위해 유역을
변경하여 흐름으로써 댐 하류는 강줄기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더구나 섬진강으로 합류되는 보성강과 동복천에도
동복댐과 주암댐이 건설되어 광주․전남지역의 용수원으로
사용됨으로써, 섬진강의 물은 본래 수량과 흐름을 잃어버렸다.
한때는 물길을 통해 남해 광양만에서 구례, 남원 광한루까지
배가 닿았다고 전하지만 그 역사는 빛바랜 얘기가 된 지 오래다.
강우량이 많은 우기 때는 그나마 수량이 보태지지만 갈수기의
섬진강은 초라한 모습이다. 특히 갈수기에는 도시로 공급할 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댐은 일정수위를 유지해야 한다.
아래로 물을 흘려보낼 여유가 없는 것이다.
금강 상류의 용담댐의 모습과 금강
이곳 옥정호의 물은 계화도 간척지의 농업용수와 전력생산으로도
이용되지만 전라북도 남서부 도시의 식수와 산업용수로
공급된다. 2001년 금강 상류에 건설된 용담댐 역시 전주시
일원의 주요 수원이다. 금강 중류를 막은 대청호는 어떤가.
대전시 일원의 수원이다. 이제 대도시는 댐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물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다. 전남․광주시 영역 역시
동복천의 동복댐과 보성강의 주암호가 수원이며, 인근 도시들도
담양호, 장성호 등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과 추세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최근 인류의 생존환경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과 가치는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반면에 생물과 자연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
구성요소인 물은 인류의 생존에 절대적임에도 그 이용은 갈수록
제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오염 때문이다. 물은 벌써 기름보다
그 경제적 가치가 높아가고 있는 현실이며 가장 민감하고
획득하기 어려운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 석유를 쓰지 않고서도,
자동차를 굴리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지만 물을 먹지 않고서는
절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와 지역에 비해 비교적 수자원이 풍부한 한반도에도
물의 위기는 다가오고 있다. 남한도 조만간 물 부족 국가가 되는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댐 건설을 통해 극복해
왔지만 언제까지 무한정으로 댐에 의존할 수는 없다.
섬진강댐으로 담겨진 옥정호의 물이 푸르다. 그 푸른 물위에
떠있는 섬과 하늘이 어울려 산수화처럼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 푸른 물에 가라앉은 수몰민의 애환과 삶터, 그리고
야윈 섬진강은 묻는다. 이 모든 것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