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 • •
최 경 희
한노정연 연구위원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의 기원과 배경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의 양상과 정치적 의도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라는 모순적 언어구성을 처음 사용한
것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현장에서
미래를』2001년 7월호 제68호 특집을 기획하면서 시작되었다. 현
한국사회가 자본주의체제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라는 것은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경제적 착취관계가
정치적 권력관계에 의해 유지 및 재생산되는 체제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자본가계급은 경제적 지배계급으로서 구조적
권력을 행사하는 일차적인 집단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의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가장 체제
유지적이며 가장 기득권 유지적이며 가장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다.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인민대중의 해방을 기획하는
사회적 진보운동에, 즉 ‘노동자・민중의 몸과 머리’의
해방적 기획을 이끌어 내는 사상과 이데올로기에는 ‘친자본’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애초에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자본주의사회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데 2005년 현재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는 노동운동
내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왜 이것을
주목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간단하다. 계급해방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가 노동운동 내에 미치는 물질성은 모든 억압받는
인민대중의 해방을 기획하는 노동운동-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의 방향을 상실하게 만드는데 있다. 그래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는 2004년 내내 노동운동 내부의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 시각들을 계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이러한 흐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다시 말해 이러한 사상 및 이데올로기가
노동운동에 영향을 준 시기는 언제부터인가? 그 자체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2004년 소위
박승옥, 김형기 등등이 제기한 노동운동위기론의 내용을 보면서
그 힌트를 찾았다. 한노정연은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2001년 김대중 집권 시기에 최장집과 김동춘
교수가 노동운동에 던지는 훈수와 견해가 갖는 정치적
함의로부터 명명했지만, 필자는 노동운동에 영향을 준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의 출발은 1991-92년 최초로 시작된
‘노동운동위기론’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삼정권 출범 전후, IMF
관리체제 이후 적극적이고 구체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집행권력으로써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세 시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는 더 많이
더 저변으로 더 세력화하여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 국면마다 양상은 다르지만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자본주의 성장에서 비롯된다. 한국자본주의의
압축성장은 곧 노동자계급의 양적확대와 노자관계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로부터 비롯된 한국노동운동은 1970년대의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하였고,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출범으로 조직적
노동운동은 시작되었다. ‘전노협’은 그 당시 변혁적
노동운동의 실체였다. 1980년대의 변혁적 에네르기가 1990년대
초 노동운동으로 집결되었고, ‘전노협’은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한국자본주의 발전의 궤적에 맞게 변혁적 노동운동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노동운동을 체제내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1945년 이후 유럽에서 노동운동을 체제내화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형성되면서 사회조합주의적 체제가 만들어진 것처럼,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변혁적 노동운동을 무력화하고
체제내적 노동운동으로 성격을 개조할 수 있는 기본적
물적토대가 형성 된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친자본’
이데올로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91-92년 ‘노동운동위기론’의 핵심적 공격 대상은
‘전노협’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였다. 전투성에 대한 공격은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의 핵심은 2004년 ‘노동운동위기론’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둘째, 노동운동에 대한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증가는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의 진전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군사독재, 군사파시즘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정치체제 또는
국가형태의 이행은 노자계급투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을 전후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세력’ 중의
자유주의 세력은 권력으로 투항하였고, 김대중 정부가 제시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국정모토는 자유주의 개혁세력을
국가권력을 담당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 한국 지배계급의 성격이 극우파시즘세력으로
전일화되었다면, 김대중 정부의 등장으로 자유주의적 우파세력이
집권세력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노동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의
경향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특히 김대중 정부 내내 ‘노사정
위원회’를 둘러싼 노동운동 내의 갈등은 노동운동 내부의
세력관계를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다. 노동운동 내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은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4년 4월 15일 총선 이후 집권 2기를 맞는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과거 노동운동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입안하고 주도하게 되면서 노동운동 내의 정부 정책의 영향력은
더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즉, 노동운동 내의 무엇이
‘자본의 이데올로기’인지 무엇이 ‘노동의 이데올로기’인지
모호해졌다. 그러나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명확하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 성장의 하위
파트너로서 노동운동을 길들이고, 제도화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을 자본의 의도에 맞게 분할지배하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수면 위로 등장한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는 약 13여년 사이에 노동운동 내에서
주류적 영향력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즉,
그러한 결과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노동운동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의 첫 국면 : 1991-92년
‘노동운동위기론’
앞에서도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1990년 전노협의 출범은 조직적
노동운동의 첫 출발의 의미를 갖고 있다. 1987년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민주화’의 열망이 각 부문과 영역에서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교육, 학생, 노동자, 통일운동들이
전국적 조직을 만들어가면서 투쟁의 고양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주변혁’운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때이다. 정부는 1989년 ‘공안정국’을
조성하면서 이 아래로부터의 민주변혁운동을 해체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1990년 3당이 합당하여 보수대연합 ‘민자당’을
탄생시켰다. ‘민자당’과 ‘전노협’으로 대변되는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결국면은 1990년대 초반 불가피한
것이었다. ‘전노협’은 평등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노동해방의
기지로서 제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전노협’은 출범하자마자 정부의 집중적 탄압을 받았다.
왜냐하면 정부는 조직적 노동운동의 싹을 애초부터 제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노협은 노동운동탄압,
민중운동압살로서 드러나는 공안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총파업
전술’을 선택하였다. 엄청난 물리적 싸움들이 거리에서
현장에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인 ‘민주성과
자주성과 계급성’을 현실화시켜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쟁하는 민주노조를 길들이기 위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제안과 언급이 최초로 ‘노동운동위기론’을
중심으로 제시되었다. 최장집, 김형기, 박승옥, 김동춘
등이었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형성되는데
실패했다거나”, “왜 노동자계급은 정치세력화에 실패했는가”,
“민주화 이행을 가로막는 노동운동의 급진성”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전노협의 ‘전투성’
또는 ‘급진성’을 비판하는 것이었고, 노선적으로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비판하면서 ‘진보적 노동조합주의’,
‘민주적 노동조합주의’, ‘사회협조적 노동조합주의’로
노동운동의 방향을 선회할 것을 권고한 것이었다. 그 당시
이러한 지식인들의 제안은 노동운동의 방향을 변화시킬 만큼
운동의 내부에서 물질적 힘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최초로 ‘노동운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언급을 하여
처음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의 두 번째 국면
: 2001년 사회적 합의주의로 노동운동 길들이기
김대중 정부 시기(1998년-2002년)에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를 주창한 사람들은 김대중 정부의
정책브레인들이 많다. 그 핵심은 최장집, 황태연이라고 볼 수
있고, 외곽에 김동춘 등 진보적 시민운동의 정책브레인들이
있고, 노동운동연구소로서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있다.
『현장에서 미래를』(2001년 7월 제68호)의 특집을 참조할
것.
김대중 정부의 집권시기가 어떠한 시기였는가?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현장에서 매섭게 불던 때이다. 현장에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따른 정리해고제 반대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의 정리해고제 반대싸움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는 집권말기 ‘김대중 정부 퇴진투쟁’이
추동될 만큼 심각한 집권실패를 경험한 ‘국민의 정부(?)’였던
것이다.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반대 투쟁은
노동조합운동 차원에서 머물렀을 때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어려운
싸움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반대 투쟁이 체제를 뛰어넘는
정치적 노동운동으로 발전되지 않는다면, 역으로 노동조합운동
차원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반대투쟁을 진행했을 때, 그
싸움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 반대투쟁의 딜레마에
놓여있는 노동운동, 즉 정치적 패배감이 존재한 그 국면에서
노동운동 내부를 가르는 ‘친자본’ 이데올로그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노동운동에 던졌다.
첫째, 노동운동 내부의 ‘발상의 전환’을 주문하는 최장집
교수는 진보정당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사회
노동정당은 필요한데, 그 정당의 성격은 ①“이념 지향적인
정당”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개발하고
②“제도적 개선을 이룰 수 있도록 능숙하고 세련된
협상기술”을 갖추어야 하며 ③“계급연합정당으로서의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①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국민적
과제에 관심을 갖고 전체 사회의 이익과 국민생활 옹호에
앞장서야 한다고 판단했고, ② 이를 위해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노총’이라는 슬로건 아래 사회 개혁을 주요투쟁과제로
정식화했으며, ③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 노사정
3자기구를 통한 정책참가와 경영참가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사회적 합의주의를 제창하는 김유선[당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노사정위원회”가 실질적
사회협약기구가 되기 위해서는 ①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정당이
존재하고, ②산별체제가 정착되어 있어야 하며, ③민주노총이
확고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고, ④조합원 대중이 지도부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김동춘 교수 그 당시 김동춘 교수는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으로서 입장을 제시하였다. 당시 김동춘 교수는 현
한국사회의 근본문제를 30년 개발독재와 분단체제라고 보고,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모순을 심화시킨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인식논리에서 ‘기업내부의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이
경영참가를 통한 감시’ 시스템을 만들고 남는 문제는 주주와
소비자들의 힘으로 견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은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최경희. 2001.
“신자유주의 시장질서의 본질은? 부채는 밑으로 가라앉고 부는
위로 올라가는 것,” 『현장에서 미래를』(제68호), pp.42-53.
는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이 “80년대의 정치주의”와 “중앙권력
패권주의를 비판”하면서 “지방의 반란을 주도”하고
“노동세력의 체제통합의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진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희연 교수는 “참여연대의 성격을 ‘민중적 시민운동’,
‘시민적 민중운동’, ‘진보적 시민운동’으로 규정”하고
“민중운동과 ‘개량적’ 시민운동의 연합모델” 또는 “전투적
민중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의 동맹모델”을 제시한다. 따라서
‘사회개혁’ 또는 ‘사회적 합의’라는 관점 속에서 시민운동은
1기 민주노총이 표방했던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과
사회적 조합주의의 ‘사회세력화’와의 정치적 합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박영균. 2001. “사회적 조합주의와 사회-정치적
‘세력화’, 그리고 ‘국민정당화’,” 『현장에서
미래를』(제68호), pp.26-41.
정리하자면, 이러한 주장들은 노동운동의 노선을 ‘사회적
합의주의’로 변화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에서 제시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세련화하여 ‘사회적 합의주의’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러한 노선의 변화는 ‘신자유주의구조조정
반대투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규제완화 또는 구조조정의
부정적 부분에 대한 사회적 대처’와 같은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에 의한 한국적 재편의 요구는 ①
국가-자본-노동의 거시적 타협체제 구축 ② 진보정당의
의회진출과 산별노조건설 ③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정책조정기구,
제도구축에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이 그 당시 현장에서
거부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 내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 또는 더 강하게
‘약탈국가’로서 그 의미가 규정되었다. 왜냐하면, 김대중
정부는 부자인 국민과 가난한 국민 중에서 가난한 국민에 대한
사회배제적인 전략 즉, ‘두 국민 전략’을 폭력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실업자, 불안정노동층이 증폭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민중・도시빈민의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에 대해 김대중 정부는 노동탄압적 배제전략으로
일관했고, ‘손해배상 및 가압류’라는 법제도적 차원에서
철저하게 노동운동을 무력화시켜내고 있었다. 그래서 2002년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사회적 폐해들이 정치적 불만으로 증폭되어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2년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이다. 민주당 내 국민경선은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등장시키는 성공적인 역할을 하였다.
위기의 민주당은 당시 ‘민주와 개혁, 인권’으로 포장된
노무현을 통해 돌파하고자 하였고, 대통령 후보 시기 동안 그의
현란한 수사적 미사여구는 대중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대부분의 부르주아 선거와 그 정치적 이슈와
노동자・민중의 대중투쟁의 이슈는 공통의 분모를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부르주아 선거는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이슈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2002년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진보정당으로
대변되는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였지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이 갖는 정치적
의미들을 부각시키는 데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노무현 정부는
2002년 월드컵 영향, 촛불시위 효과와 맞물리면서 드라마틱하게
등장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드라마와 별개인 것처럼, 2003년은 배달호 열사,
이용석 열사들의 분신을 통한 저항에서 보듯 ‘열사 및
분신정국’의 해였다. 실업과 불안정노동으로 인해
노동자・민중의 빈곤은 심화되었고, 삶은 불안과 공포로
황폐화되어 갔다. 신용카드 대란, 자살률의 증가 등 이러한
사회적 징후들의 지표들은 너무 많았다. 이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조직화되는 과정에 있었고,
화물연대투쟁처럼 이전에 조직되지 않은 노동운동이 투쟁을
시작하였고, 이주노동자 및 장애인 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드라마틱하게 등장한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는 달리
2003년 내내 불안한(?) 통치를 경험하게 되면서, 노무현 정부는
‘열린우리당’과 함께 ‘한나라당’과의 한판 싸움을
진행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조・중・동의 논조와
다르지 않게 노동운동에 일격을 가하였다. 한국 노동운동이
대기업 중심의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있다고 하면서 노동운동과
대중을 괴리시키는 이데올로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환원하자면
노무현 정부를 출범시킨 그 지지세력인 중간계급, 또는 소위
한국사회의 소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들을 노동계급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역할을 위로부터 적극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2002년
그로부터 2년 후 2004년 총선에서도 2003년의 계급투쟁
주요이슈들은 선거공간에서 자유롭게 표출되거나 사회적 의제나
담론으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오히려 2003년 열사 및
분신정국에서 보여주었던 그 절박함이 2004년 ‘탄핵국면’과
총선국면에서 무력화되었다. 2004년 4월 15일 총선은
다수당으로서 열린우리당을 만들어내면서 노무현 정부는
집권2기를 맞이하였고, 신노사관계 즉, 신자유주의 질서재편에
부합하는 노사관계의 제도화를 추진 중인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김대중 정부가 구상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으면, 그래서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자본은 지금의
노동시장의 계서화된 구조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서열화시켜 분리지배하려는 자본의 의도를 국가는
노동정책에서 적극적으로 제도화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것도
국가-자본-노동이라는 3자 협의기구의 논의를 통해서 말이다.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의 세 번째 국면
: 2004년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의 가시화
문제의 핵심은 바로 노무현 정부에서 주도하는 새로운
노사관계의 변화방향과 노동운동 내부의 소위 지식인 그룹에서
제기하는 노동운동 노선 및 노사관계의 변화방향이 내용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2004년에 박승옥, 김형기 등등에 의해
‘노동운동위기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물론 박승옥이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논쟁의
정치적 귀결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기조, 즉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이제 한국판 생디칼리즘에 다름
아니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전투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중심의 노동운동을
비판하는 논조는 노무현 정부가 비판하는 논조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정규직-비정규직의 서열화구조는 노동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의 분할지배, 노동시장정책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노동운동 내부로 돌리면서 문제발생원인과 해결 방식을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태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 것처럼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21세기
‘신자유주의식’ 방식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형기 교수는 <‘위기의 노동운동’ 10대 문제점과 대안>이란
글을 제출하였다. 명제 9와 명제 10에서 그 주장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명제 9의 내용 중에는 “ 진보적
노동운동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가능한 대안적 발전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여기서 대안적 발전모델로서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서, ‘인간의 얼굴을 한 글로벌화’와 참여, 연대, 생태의
가치를 지향하는 ‘탈포드주의적 조정시장경제’를 상정해볼 수
있다. 탈포드주의는 ‘분권-네트워크-자율’의 원리를 가진
작업조직과 생산시스템, 기업조직을 말하며, 조정시장경제는
‘참여-연대-생태’의 원리에 따라 조정되는 시장경제를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말하기 좋아하는, 말을
조합하여 새로운 단어들을 창출하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적(?) 제3의
길(?)로서 ‘탈포드주의적 조정시장경제’(?)를 제안하지만 그
내용은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와 다르지 않다. ‘참여,
연대, 분권, 자유’와 같은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다른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지금의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이데올로기적 효과일 뿐이다. 명제 10의 내용은 “노동운동이
대안적 발전을 지향한다면, 노동운동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 사회적 대타협이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노동자의 삶의 질을 장기적으로 하락시킨다면 물론 이런 타협을
지향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이다. 즉, 노동운동을
약화시키지 않는 선에서 노동자의 삶의 질을 장기적으로
하락시키지 않는 선에서 노동운동은 사회적 대타협노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군다나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적 합의주의 및 타협주의 노선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김형기 교수가 대안적
사회발전의 상을 ‘탈포드주의적 조정시장경제’로 설정한 이상
‘탈포드주의 조정시장경제’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지 않는 한 명제 10의 주장도 별 가치가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란 자유방임적 개입이든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든 ‘개입’ 즉 ‘조정’을 전제로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국가개입이냐 시장이냐라는 이론적 대립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조정시장경제이냐 시장경제이냐의 대립은 아무런
이론적 의미가 없다. 그리고 ‘탈포드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가치인 ‘유연화’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4년 ‘노동운동위기론’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분석은 박성인
한노정연 부소장이 잘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이러한 논의들이
‘사회적 합의(대타협)’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이다. (각자의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가 나겠지만) 노동운동이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고립시키는 투쟁을 멈추고, “대화와 설득,
자치와 자결의 민주주의”(박승옥), “사회적 대타협”(박태주,
김형기), “거시적 코포라티즘과 사회적 대화전략”(최병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위기의 원인을 노동운동
‘내부’로 돌리려는 목적, 즉 ‘노동운동 위기논쟁’이
겨냥하는 것은 노동운동 내 ‘전투적 좌파’, ‘계급적
좌파’라는 점이다. 박성인. 2004.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운동
위기논쟁에 대하여.”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운동 위기논쟁,
그리고 현장』, <사회주의 포럼 5차 토론회 발제문> (2004년
12월 11일).
결론을 대신하여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는 199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국면마다 노동운동 내부를 교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약 13년간의 흐름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90년대 초반의 주장이 지식인 그룹의 의견제시 정도로 그
영향이 작았다고 한다면, 지금 2005년에는 노동운동 내부에서 큰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전투적 조합주의
죽이기’로 일관된 노동운동 노선논쟁은 ‘사회적 합의주의’로
그 방향을 몰아가고 있다. ‘친자본’ 진보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의도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정부와 자본의 입장에서
사회적 합의주의 노사관계를 제도화시키는 과정에서 김영삼
정부는 태동기로서, 김대중 정부는 과도기로서 의미를 갖는다면,
노무현 정부시기는 그것을 마무리 하려는 단계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진보정당의 의회진출, 산별노조, 노사정위원회가
제도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동조합
운동 내에 상층의 주류가 그 노선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이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제도화하고자 할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제도화된 노동운동의 틀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의 입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들은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이 구도를 대체할 만한 흐름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전투적
조합주의’의 전투성을 ‘민주노조운동’ 내로만 귀결시켜왔던
그래서 그 혁명성이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고립화되고 분산되었던 노동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의 경향을
극복하여 그 전투성과 혁명성을 정치적 운동으로 전화시킬 그
전략과 전술을 모색해야 할 때이자, 그럴 때만이 이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