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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혼란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정치그룹 비판

현장에서 미래를  제105호
백철현

“노동운동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 -1”
Ⅰ. 왜곡과 혼란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정치그룹 비판
Ⅱ.‘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의 양상과 정치적 의도

‘노동운동의 위기론’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를 고민할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정치투쟁의 영역에서는 계급정당 건설, 경제투쟁의 영역에서는 노조운동의 관료화 극복, 이데올로기투쟁영역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이데올로기 종속극복문제 등이 주요한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첫째 글 「왜곡과 혼란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정치그릅 비판 」은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을 해방으로 안내할 사상-사회주의의 정치적 내용과 원칙-을 올곧게 지켜내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하며, ‘사회주의 정치그릅’간의 사상투쟁을 통해 옥석을 대중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읽혀지는 글입니다.
두 번째 글 「‘친자본’진보 이데올로기의 양상과 정치적 의도」에서는 노동운동진영에 침투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인 90년대 초의 “노동운동위기론”과 98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회적합의주의”등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음 호(2월 호)에서 계급정당 건설문제와 노조운동의 관료화 극복문제를 계속하여 다룰 예정입니다.

백 철 현
노동자정치신문(가칭) 회원




1. 언어적 합법성을 획득한 사회주의의 가치하락
왜곡과 혼란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정치그룹 비판

특집Ⅰ • • •

2004년 한 해 파업건수는 450건을 넘어서 9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에 직접 타격을 주는 근로손실일수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이 압축적인 파업통계에 남한 노동자계급운동의 한계와 가능성이 응축되어 있다.
왜곡과 혼란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정치그룹 비판
남한 노동자계급은 자본과 자본가 정권의 거센 공격 앞에서 투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투쟁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지도부의 타협과 양보, 백기항복 때문에 대부분 패배로 돌아갔다. 이 틈을 비집고 어용들은 ‘파업무용론’을 현장에 유포하면서 준동하고 있다. 그런데 서울지하철 노조 등에서는 어용들의 준동 덕분에 기회주의적이고 협조주의적인 집행부가 민주파의 가면을 쓰고 생명을 연장하는 역설적인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왜곡과 혼란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정치그룹 비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등 대공장 자동차 노조에서는 ‘짧고 굵은 투쟁’이라는 조합주의 책동에 의해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오염되고 단결력은 약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현실적인 임금과 복지격차는 물론이고 심리적 격차도 더욱 더 벌어지고 있다. 이 틈을 비집고 자본의 현장통제와 탄압, 구조조정 공세는 강화되고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들은 노무현 정권이 유포하는 사회적합의주의의 포로가 되어 호시탐탐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노리고 있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분신, 자결, 점거로 자본에 극단적인 저항을 하는 남한 노동자의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자본의 위로부터의 압박 사이를 오가면서 관료주의자들은 좌충우돌하고 있다. 관료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압박이 거세면 마지못해 투쟁에 나서지만 타협으로 투쟁을 마무리 하려 든다. 하지만 자본과 정권의 힘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지금의 계급역관계 속에서 관료주의자들의 타협은 일방적인 양보와 패배, 굴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운동에 미치는 자본의 영향력과 힘은 개량주의에 비탕을 둔 사회적 합의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 이 사회적 합의주의는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은 정리해고, 근로자파견제 수용 등으로 나타나면서 대중적으로 비판을 받게 되면서 구호로서는 점차로 사라지고 있다. 대신에 개량주의자들은 ‘사회연대적 노동운동’, ‘사회적 노동운동론’이라는 그럴싸한 외피를 두르고 개량주의를 은폐하고 있다. 이 신종 이데올로기는 2004년 한 해 계급투쟁이라는 현실의 검증을 거치자 노동자의 임금양보와 생산성 향상을 통하여 자본의 경쟁력을 회복하자는 ‘자본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으로 나타났다.
협조주의자들이 민주와 어용의 허구적인 구도 속에서 살아남듯이, 노무현 정권은 수구와 개혁의 전선 속에서 지배력을 회복하고 끊임없이 지지자들을 결속시키고 있다. 탄핵정국의 격랑을 거치고 다수의석을 확보한 노무현 정권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 이후에 또 다시 고립되었다. 노무현 정권은 ‘민생파탄’이라는 생존의 위기에 처한 대중들이 분노를 하게 되자 이번에는 4대 개혁입법이라는 ‘개혁 전선’으로 대중적 지지를 회복하려 하고 있다. 개혁전선을 둘러싸고 한나라당과 정권의 대립이 격화되는 속에서도 부르주아 정파들은 노동자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는 부르주아적 단결력을 과시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끊임없이 이 개혁전선의 포로가 되어 파견법 개악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조차 ‘열린우리당 2중대’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면서 국가보안법 투쟁에 ‘올인’하지 말고 ‘민생투쟁’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는 좌파적 흐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파가 대적전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서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하는 반면에 좌파는 ‘민생투쟁’이라는 몰계급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에서 10석을 확보한 뒤에는 더욱더 계급정당, 투쟁정당이 아닌 정책정당, 수권정당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해 ‘제도권 내의 현실 정치세력으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하면서 이를 부추기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대중적인 지지를 좀더 확대하기 위해 국민정당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혁신그룹으로 활동하는 정치조직들은 민주노동당을 계급정당, 투쟁정당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거구에 기초하고 선거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의회주의 정당의 속성상 대중적 지지와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 점점 더 몰계급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은 대중적으로 성공하면 할수록 계급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대중운동 내에서도 한국노총을 어용으로 배척하고 있는데 민주노동당은 한국노총의 지지를 받기 위해 민주노총과의 통합을 원하고 있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민주노동당을 사회주의 대중정당으로 바꾼다는 선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념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엄밀한 당원의 자격기준 없이 무차별적으로 당원이 인입되는 조직구성 원리상으로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개량주의 정당을 넘어 국민정당화를 지향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밖에서 독립적인 혁명정당을 구성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민주노동당 내에서의 활동은 현실의 역관계상 민주노동당에 대한 대중적 환상만 키워줄 뿐이다.
창궐하는 개량주의를 분쇄하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대중운동의 자생적 분출을 혁명적 전망 하에 개입하고 지도하는 ‘정치적 참모부’의 건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 할 수 있다. 남한 내에서는 당 건설을 둘러싼 수많은 계획, 실험이 진행돼 왔다. 과거에는 그 정치적 수준과 내용에 상관없이 산개론, 대중적 정치조직(MPO), 정치적 대중조직(PMO) 등 다양한 건설 방식과 경로가 논란을 빚었지만 건설될 당의 성격과 위상을 비합법 전위정당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91년 ‘사회주의 조국’인 소련의 몰락 이후에는 청산주의 흐름이 지배하면서 공개정당, 합법정당 건설 움직임이 당 운동을 지배했다. 합법정당 건설을 위한 지류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개량주의의 본류로 합쳐졌다. 민주노동당 내부에는 사회주의 분파인 다함께, 평등연대가 자리 잡고 있고 최근에는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이하 전진)가 새로운 사회주의 분파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노동당 밖에는 사회당과 비제도적 투쟁정당을 강조하는 ‘노동자의힘’이 계급정당 건설을 목표로 투쟁하고 있다. 각 정파들은 앞 다투어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이제 사회주의는 비합법이라는 신비를 뚫고 언어적 합법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언어적 합법성을 획득하는 순간 사회주의의 정치적 내용과 원칙은 왜곡과 혼란으로 뒤섞이고 사회주의적 가치는 하락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 일반이 아니라 어떤, 무엇을 위한 사회주의 정당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고 있는 현실의 정파들의 입장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2. ‘야누스의 얼굴’〈노동자의힘〉
‘노동자의 힘’(이하 노힘)은 몇 년 동안 강령제정위원회를 통해 강령을 준비하고 있으나 아직 명확한 자신들의 강령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노힘에 대한 비판은 지엽적일 수밖에 없고 노힘의 실천상의 문제나 조직상의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난 해 4월 26일 사회주의 포럼에서 노힘의 활동가정치조직론을 ‘과정으로서의 조직건설론’으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노힘은 기간 강령적 수준 하에서의 노선적 통일 없이 조직을 구성하였다. 또 이념적‧강령적 내용이 없다보니 조직 구성원의 자격도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노힘은 대중운동에서 많은 고통을 받아 왔다. 조직 내에서의 노선상, 실천상의 차이는 크게 좁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조직 내부의 규율상의 문제를 끊임없이 낳고 있다. 대중운동 내에서의 실천상의 오류에 대해서도 노힘은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 노힘의 활동가 정치조직은 정치적 통일성과 조직적 일체감의 약화라는 노힘의 한계를 더욱 크게 만들 것이다. (백철현, 남한 사회주의 운동은 무엇을 가지고 시작할 것인가?)
노힘은 “새로운 정치조직의 ‘주체형성’은 계급적 좌파진영의 역사적 성과와 한계를 올곧게 반영하고, 90년대 이후 분산적, 지역적 활동을 전개해 온 좌파진영의 상태에 근거할 수밖에 없었다. 강령을 중심으로 한 사상․이념의 동의 여부, 조직 노선의 동의 또는 노동운동에서의 영향력 등을 가지고 좌파진영이 함께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며 조직건설의 역사성을 근거로 조직노선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힘은 “‘공동활동, 공동투쟁’을 한 조직 내에서 공유함으로써만 새로운 정치조직을 건설할 수 있는 ‘주체형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주장한다.
노힘은 강령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 이념, 조직 노선의 동의 하에 결집하는 당건설을 관념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공동활동, 공동투쟁 등의 실천활동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상, 이념의 통일성과 조직적 결속력 없이 진행된 노힘의 조직건설론은 내부의 공동활동과 공동투쟁조차도 끊임없이 가로막고 조직 내부의 분란을 만들어 내고 있다.
2004년 8월 28일 노힘 14차 정기총회에서는 조직발전전략(안)을 둘러싸고 노힘 강화, 좌파연합, 민주노동당 개입 전술 세 가지 안을 둘러싸고 내부 논란이 벌어졌다. 일단 이 논란의 결과 민주노동당 개입 전술안이 소수 입장으로 확인되고 노힘 강화 입장이 우세를 차지했지만 좌파연합을 주장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게 존재하면서 단일한 입장을 채택하지 못했다. 노힘 내부의 논란은 기본단위에서 ‘노힘 강화를 위한 특별결의(안)’을 채택하는 것으로 결정났지만 이후 또 다시 대통령 선거나 총선을 둘러싸고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될 소지가 크다.
실제 ‘차이를 넘어 통합으로’라는 구호 하에 진행되는 ‘좌파연대론’은 97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나타났던 정치연대의 재판으로 나타나면서 노힘 내부를 끝없는 분란과 갈등으로 몰아가서 노힘을 결정적인 분열로 몰아넣을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노힘은 활동가 정치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2002년 8월 전국활동가수련회를 개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사회당과 민주노동자연대가 이탈하고 이후 사회주의정치연합과 사회진보연대가 떨어져 나갔다. 노힘은 “최대한 모든 좌파진영과 함께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先결집 後공동의 강령건설투쟁이라는 단계별 조직건설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이미 활동가 정치조직 건설은 실패하고 말았다. 노힘은 의회주의 반대를 천명하면서도 先결집(정치적 재조직화)의 대상으로 사회당과 중앙파의 좌파까지 포함하기로 하였다. 노힘의 先결집 대상에 포함된 단위들은 좌파라는 추상적 수준의 공통지점을 제외하고는 이행의 문제, 국가문제, ‘당 형태 문제’ 등 핵심적인 지점에서 ‘공통지반’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무정부주의, 자율주의, 의회주의로 뒤섞여 있는 정치적 재조직화 대상들과의 좌파연합은 사회주의 조직과 정치를 ‘잡종교배’와 ‘절충주의’로 퇴화시킬 뿐이다. 노힘 내에서 민주노동당 개입전술 입장이 극소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일단 논외(이것도 민주노동당의 대중적인 약진이 계속되면 노힘 내부를 뒤흔들 소지가 크다)로 하면, 노힘 내부의 경향은 좌파연합의 경로와 방식, 강조점에서는 약간씩 다르지만 근본적인 입장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사회운동적 정치조직론이나 비제도적 투쟁정당론은 크게 보면 동일한 정치조직론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의회진출 등을 중시하는 대중정당인가, 아니면 비제도적 투쟁정당인가 인데, 이 문제는 (물론 참여하는 이들의 내부토론과 합의에 기초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대중투쟁의 성장-발전에 복무하는 비제도적 투쟁정당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합법대중정당의 문제의식을 적극 수용하는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단일 정치조직으로서의 통합 및 사상-노선 상의 통일은 기본적으로는 당면과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 연대를 확보하는 가운데에서 행해지는 내부적 토론과 상호융합 과정을 거쳐 달성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김세균, ‘좌파운동 어디로 나아가야 하나?’『진보평론』22호, 2004년 겨울)
1997년 정치연대로부터 출발해 전국활동가 조직건설의 좌초까지 지속되어 온 좌파정치운동은 하나의 순환을 마감했다. 계급지형과 정치지형의 변화 속에서 어찌되었던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주체와 계획을 중심으로 다시 세워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 때문에 좌파연대를 매개로 한 직접적인 조직건설 경로보다도, 부분적으로 이를 포함하더라도 정세 조건과 불안정노동 층의 대중적 토대 확보를 통한 계급 주체 형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며 이를 바탕으로 정치운동의 주체가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홍석만, ‘좌파운동의 복원을 위하여’『진보평론』22호, 2004년 겨울)
도대체 “일단 모이고 보자”는 식으로 제기되는 ‘좌파대동단결론’이 어떻게 개량주의, 관료주의, 조합주의 질곡에 빠져 있는 대중운동을 혁신하고 남한 자본주의에 파열구를 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사상적 통일성과 조직적 일체성에 바탕을 둔 실천으로 정치적 중핵을 형성하지 않고 ‘계급주체 형성’, ‘노동자계급운동의 지도구심 형성’을 통한 계급정당 건설이 가능할 것인가? 그럼에도 이들은 “필자는 계급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당의 성격, 구상, 역할, 사상이념이 무엇인가는 논외로 하자. 다만 좌파의 통일된 정치조직으로서, 정치적 실체로서 정당이 필요하다는 점만 확인했으면 한다)”(홍석만, 같은 글)고 주장한다. 가장 중요한 조직문제와 정치문제를 회피한 채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좌파의 결집과 계급정당 건설 주장은 가히 주술적 믿음과 자기 암시적 신비주의에 가깝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현실의 구체적인 실천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낳았다.
2001년 현대자동차 이상욱 집행부는 7.5 총파업을 철회하였고, 2002년 4.2 발전파업 철회 과정에서도 노힘 핵심 조직원이 연루돼 있었다.
현대자동차 이상욱 집행부는 2004년 투쟁에서 사회공헌기금을 제출하였다. 노힘의 한 조직원은 한노정연 『현장에서 미래를』기관지에 ‘사회공헌기금 야누스의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자동차 4사를 중심으로 제기된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그런데 이 비판 글은 자동차 4사에서 핵심적으로 사회공헌기금을 제출한 현대자동차 이상욱 집행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피해가고 있다. 노힘은 공식적으로는 사회공헌기금을 비판하고 있으나 자신의 조직기반인 현대자동차 집행부가 반조직적인 입장을 제출하고 실천하고 있다. 최근 금속산업연맹 선거에서도 노힘은 무원칙한 ‘통합선거’를 주장하고 나선 바 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태도야말로 노힘이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가 아닌가?
이러한 실천상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대해 분명하게 단죄하지 못하는 노힘의 연방제적인 태도는 무규율, 무원칙을 낳으면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대중운동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도 노힘은 여전히 무원칙한 팽창주의 전략인 활동가 정치조직 결성 계획을 내세우고 있다. 노힘은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조직의 연합적이고 연방적인 성격보다 단일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박장근 노힘 대표,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당면 과제로 제안하며’)라며 자신들의 기회주의적, 중도주의적 내용을 옹호하고 정치적 파산을 은폐하고 있다.
노힘은 건설될 정치조직의 상을 ‘비제도적 투쟁정당’으로 하면서 합법정당도 아니고 전위정당도 아닌 중도주의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파괴’ 없는 ‘대체’라는 모호한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중도주의적 입장은 조직 내부의 강령적 통일성과 조직적 일체감을 확보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노힘의 ‘노힘 강화론’과 ‘좌파연대론’, ‘민주노동당 개입론’을 둘러싼 대립은 강령적 통일성과 조직적 단일성 없는 노힘의 ‘원죄’에 기인한다. 노힘강화론은 노힘의 무원칙을 고수하는 것이고 좌파연대론과 민주노동당 개입론은 노힘의 무원칙을 확대재생산 하는 것에 불과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것이 문제다.


3. 민주노동당 내 의견그룹 비판
1) 〈전진〉그룹, 〈다함께〉비판
민주노동당 내에는 사회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 혁신그룹, 개입주의 그룹 등 다양한 세력들이 동거하고 있다. 최근 사회주의 혁신그룹을 자처하면서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준)’(전진)가 민주노동당 내에서 만들어졌다. 전진은 트로츠키의 이론을 빌려서 단계변혁 이론과 최소강령주의를 비판하고, 로자의 이론을 빌려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을 외친다. ‘전진’은 대중운동 내에서 자신들의 기회주의, 개량주의를 감추고 사회주의로 위장한다. ‘전진’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다만 전진이 제출한 글 몇 구절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실체는 중앙파와 사회적 노동운동론의 결합임을 알 수 있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선도적 투쟁이 전체 노동자의 임금 및 복지수준을 끌어올리던 메커니즘은 중소기업에 대한 독점 대기업의 수탈 강화(원청-하청 관계의 악화)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노동계급 내의 분절 심화(비정규직의 확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전투적 기업별 노동조합에 기반한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재생산과 정당성의 위기를 가져왔다.
과거 전투적 기업별 노동조합이 가졌던 ‘사회운동성’(좁은 사업장을 넘어서는 관심 범위, 현장 대중의 적극적 참여)을 이제는 의식적으로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 기업별 임단협의 범위를 넘어서는 다양한 쟁점들을 제기해야 하며, 이를 통해서 기업별 임단투로 환원되지 않는 전 계급적 실천 양태를 만들어 가야 한다. [전진, 기본노선(테제)과 해설]
‘다함께’는 민주노동당의 개혁을 추구하는 노선 보다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이른바 ‘개입주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다함께의 민주노동당 가입은 일단은 국가보안법의 광풍을 피해가기 위한 현실적인 절박함도 컸다. 다함께는 “노동자 대중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입당전술을 통해 민주노동당 내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 일각에서는 다함께를 민주노동당을 숙주(宿主)로 삼아 살아가는 기생물로 표현하기도 한다.
다함께는 “민주노동당이 집권해야 개량주의 정당의 한계를 대중들이 깨닫게 된다”는 식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함께는 민주노동당이 집권하여 개량주의적 본질이 드러날 때 개량주의에 환멸을 느끼는 대중다수를 숙주로부터 끌고 나와 독립적인 혁명정당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개입주의 전술의 조건으로 사회주의 활동의 독립성, 개량주의 정치에 대한 폭로와 정치선동의 보장, 개량주의 조직 내에서 포위되지 않을 정도의 조직적 힘 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다함께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개량주의의 전위부대로 타락시키고 있다. (노동자정치신문 제안서, ‘왜, 어떤 노동자정치신문인가?’)
다함께는 혁명적 공문구를 남발하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에 대한 철저한 폭로와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적어도 수십만 노동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의 실체가 사회민주주의임이 입증될 때까지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현명하다 … 민주노동당이 1987년 이래 성장해 온 민주노조 운동의 정치적 표현이고, 자본주의의 공세로부터 방어를 원하는 노동계급과 피억압 사회집단의 정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최일붕․김하영/다함께 편집팀, ‘좌파 혁신과 연대에 제기될 몇 가지 문제’『진보평론』22호, 2004년 겨울 )
민주노동당이 성장하여 집권하면 대중들이 개량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혁명적 정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함께의 사고는 그들의 정치에서 일관된 것이다. 부르주아 정당의 집권보다 민주노동당의 성장과 집권이 그 자체로 운동 수준의 발전이라고 보는 것은 단선적인 사고이고 변증법을 진화론적, 기계론적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열망을 담고 있지만 개량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으로 왜곡된 반영이다. 이것은 혁명적 정치세력의 부재가 가져온 사물의 모순적 모습이다.
민주노동당의 성장과 집권은 그 자체로 성장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운동을 조합주의와 개량주의의 늪으로 몰아가면서 진행된다. 이것은 현장을 파괴시킨다.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이데올로기와 현장 내에서의 기회주의, 반노동자성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타격해서 대중들의 계급성을 강화하고 대중운동을 급진화시켜야 한다. 그럴 때만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노동자 대중들의 지지철회가 부르주아 정당으로 회귀하지 않게 된다. 단, 이것이 민주노동당과의 공동활동을 거부하는 소아적인 태도는 아니다. 오히려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과의 공동전선을 끊임없이 형성할 때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는 더 효과적으로 폭로될 것이다.
다함께의 진화론적, 기계론적인 변증법적 사고는 이 뿐만이 아니다. 다함께는 과거에 소련의 몰락이 대중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접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여 “환영한다”고 했다. 그러나 소련의 몰락은 전 세계 부르주아 진영의 힘과 계급적 자신감을 극도로 강화시키면서 전일적인 힘을 갖게 된 제국주의 진영에 의한 전쟁과 민족주의적 갈등, 내전 격화, 노동자에 대한 공격 강화 등 자본주의를 더욱 광기와 야만으로 몰아넣었다.
다함께는 과거에 조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했다. 이들에 대한 지지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대시킬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함께는 탄핵국면에서도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파괴했다. 다함께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좌우명처럼 외치면서 현실에서는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의 단계론적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다함께는 진지하게 현장 투쟁을 독립적으로 조직하고 전투적인 투쟁으로 발전시키려 하지 않는다. 다만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열심히 암송하면서 대중투쟁이 발생하면 찾아가서 지지를 남발할 뿐이다. 반전투쟁에 열심히 임하고 있지만 반전투쟁을 현장에 기반을 둔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현장에 있는 노동자를 현장으로부터 끌어내 비폭력, 평화주의적 설교를 하는 시민적 개인으로 해체시킬 따름이다.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적 추상적 선전주의이자 현장 중심성의 파기다. 이것은 다함께가 레닌의 전국적 정치신문을 통한 당 건설 방식을 고집하고 있지만 사실상 전위정당 노선이나 ‘볼셰비키 전략․전술의 보편적 적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장세포론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다함께 성원의 선발원칙, 기준, 활동방식, 활동거점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다함께는 혁명적 인텔리들의 현장진입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대학생 출신자의 ‘[산업]현장 들어가기’(1980년대의 공식 용어로는 ‘공장 위장취업’) 정책에는 대리주의가 담겨 있다. 공장 취업은 일확천금식으로 노동계급 속에서 조직 건설하기를 목표로 하는 전술로, 1980년대의 경험은 대학생 출신 공장취업자는 공장에서 오래 생존할수록 조직 내에서 좀더 보수적인 인자가 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협소한 노동조합 쟁점들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노동자성’을 입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산업]현장 가기’는 노동자들과 솔직하고 개방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정치적으로 끌어당길 필요성을 우회하려는 대리주의적 방식이다. (같은 글)
현장에 진입한 혁명적 인텔리들이 보수화되고 조합주의 경향으로 빠져드는 것은 정치적 전망을 상실하고 청산주의에 빠져 개량주의 조직이 됐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유로 현장에서 진지하게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의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분노를 모아서 의식적으로 조직한 투쟁이다.
다함께는 현장에 뿌리내리기 위한 끈기 있는 노력과 성실함, 고뇌를 ‘일확천금식 전술’이라는 한 마디로 매도하고 있다. 현장 내의 쟁점에 대해 조합주의적으로 접근하면 협소해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일상요구에 기초한 정리해고 반대, 파견법 철폐 같은 생존권 투쟁, 구조조정 반대 투쟁 등 자본주의 합리화에 맞서는 투쟁들을 전계급적인 전망을 가지고 조직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노동자의 생존권적 요구는 정치투쟁으로 조직될 내적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는 임금이나 근무체계, 자본의 합리화 전략, 노무관리 체계, 대중의 상태와 정서, 노조의 규약과 역사성, 현장조직 운동 등 현장 내의 다양한 쟁점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적 분석 능력과 제 현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 혁명사, 조직론, 철학, 문학 등에 정통할 수 있도록 분투해야 한다. 혁명적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만이 노동자 계급의 전위가 되어 진정으로 ‘인민의 호민관’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성실성, 헌신성, 투쟁성도 발휘해서 인간적, 정치적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다함께는 자신들의 소부르주아 정치를 청산하고 현장에 기반을 둔 혁명적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2) 자본주의 구조개혁론의 변형인〈평등연대〉의 국가기구 변형론
평등연대는 자신들의 강령적 입장을 정직하게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정직함이 정치적 오류를 면죄해주는 것은 아니다. 평등연대는 민주노동당 내에 사회주의 정치조직을 건설하고 당을 혁신하여 사회주의 대중정당을 만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별도의 정당으로 분립해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정윤광, 노동자정치조직건설에 대해서)고 있다. 하지만 “현 시기 민주노동당을 토대로 하지 않고, 민주노동당과 별도의 변혁정당(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여 민주노동당을 뛰쳐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평등연대가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평등연대의 입장은 민중주의의 흔적을 남긴 채 트로츠키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빠져 있다. 평등연대는 ‘사회주의로 가는 우리의 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입장은 한마디로 유로 꼬뮤니즘과 구조개혁론의 변형이다.
평등연대는 “선거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집권하여 기존 국가기구를 인수 활용하는” 의회주의 전략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라 부르주아 정권의 타도, 대체권력의 수립, 혹은 이중권력 상태를 통한 부르주아 정권의 타도라는 경로는 현실적 타당성을 잃고 있다”(성두현, ‘사회주의로 가는 우리의 길’)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을 세우는 혁명의 경로를 남한 내에서는 군사독재 시절의 유산일 뿐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성두현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봉건제의 유산을 철폐할 당시의 진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반동적인 자본가들만을 위한 민주주의인 부르주아 독재로 전환됐음을 외면하고 있다. 베트남전,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유고 등에 대해 민족주의적 갈등과 내전을 조장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켜 자행되는 수백만의 인류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극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가장 발전된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발생하고 있다. 단순히 미국의 신보수주의자인 네오콘의 지배를 받는 미친 전쟁광인 부시정권에 의해서 이러한 학살극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의 클린턴 정권이나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 정권도 자국의 부르주아 이해나 지배를 위해서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테러와 제국주의 전쟁을 빌미로 자국 내 민주주의를 압살하면서 인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 자국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정리해고와 노동의 유연화, 노조파괴, 임금삭감과 복지공격 등을 통해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여 자본의 전일적인 계급지배가 관철되게 만들고 있다.
파시즘이나 파시즘 지배의 한 형태인 군사독재는 부르주아 독재가 단순히 억압적인 통치형태에 있는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따라서 파시즘적 지배형태를 극복하면 자본가 계급이나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의 빛’을 다 같이 쬘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부여한다. 파시즘적 통치는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기나 자본주의의 극심한 위기 시에 나타나는 부르주아 독재의 가장 폭력적인 모습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아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 즉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자본주의가 최상의 양호한 조건에서 발전한다면 민주공화국에 있어서도 다소간 차이는 있겠지만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적 착취에 의해 설정된 편협함 속에 둘러싸여 있으며 결과적으로 언제나 소수를 위한, 즉 유산계급만을, 부유한 자들만을 위한 민주주의로 남게 된다.(레닌, ‘국가와 혁명’)
그래서 우리는 부르주아의 지배형태에 상관없이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본질로 하는” 부르주아 독재에 맞서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량주의의 아버지인 베른슈타인도 보통선거권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개혁하여 사회주의를 도입할 수 있다고 봤다.
숫자로 보나 교육수준으로 보나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보통선거권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도살자’를 스스로 선택하는 정도의 권리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인식수준이 높아지면서 그것은 민중의 대표자를 지배자로부터 참된 민중의 봉사자로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다.(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성과인 보통선거권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지배자, 착취자들을 선출하는 형식적인 기구가 되어 버렸다. 선거 자체도 돈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발전한 현대자본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1인 1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로 자본가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대중에게 불어넣으면서 자본의 실질적인 배후 지배를 은폐한다.
현대자본주의에서 대자본은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유착하여 금융과두제를 형성하여 전사회에 대한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금융자본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한 매수와 로비, 직접적인 인적 결합, 정보 독점, 혼맥 등 수십, 수백 가지의 끈을 동원해 국회와 행정부, 사법부를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언론사, 학교, 교회, 영화사, 음반사 등을 직간접으로 소유하여 이데올로기적, 영적, 문화적으로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부르주아 공화국 내에서도 군대와 경찰력, 행정력은 더욱더 비대해지고 있으며 감옥제도 등을 통하여 피억압 계급을 통치하고 있다.
주식 민주주의는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이 3-5% 정도만의 지분만으로도 전체 기업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장 내에서의 민주주의는 경영참가로 나타나면서 노동자의 자발적인 종속과 억압을 강요하기도 한다. 남한 자본주의에서도 부동산 임대소득이나 이자소득 등으로 매년 5억 원 이상 버는 부자들이 최근 3년간 2배 가까이 늘어나면서 기생성이 늘어나고 있다. 자본주의의 기생성의 증가와 부의 극심한 차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도 잘 보여준다.
성두현은 “의회주의도 아닌 현행 국가의 타도도 아닌 새로운 경로의 설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현행 부르주아국가의 질서 내에서조차 최대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 노동자, 민중의 자치적 역량과 조직을 최대한 발전시킨다.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최대한 확장시켜낸다. 대중투쟁을 통해 주체적 역량을 확대, 강화시키고 국가안팎에서 변혁의 근거지를 확대강화한다.
역량의 강화의 어느 시점에 선거를 통해 집권한다. 집권 이후 민주주의 발전을 전면화한다. 기존 국가기구를 변형시켜 나가고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질적 도약을 이루어낸다 … 즉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주체역량을 강화하며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제시하는 틀에 제약되지 않고 오히려 이 틀을 확장시켜내어 기존 국가를 도구로 간주하는 관점을 배격하고 기존 국가를 개조해가는 전략을 의미한다. (성두현, 같은 글)
성두현은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기존 국가를 그대로 인수하여 사용할 수 없다”를 집권한 권력이 스스로 국가기구를 ‘개조’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맑스의 이 말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기존 국가를 노동자가 집권하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철저히 파괴하고 분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노동자계급의 국가기구를 새롭게 조직하여야 하는데 이는 자본가 계급의 반동적인 저항을 억압하고 몰수와 생산수단의 사회화 등 혁명적 정책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두현은 “기존 국가기구의 가장 반동적인 억압기구와 이데올로기 기구의 파괴와 기존국가기구의 정당한 기능의 재조직화, 자치기구의 확장과 이들의 통합을 통한, 기존 국가기구의 일련의 변형과정을 의미한다”고 일부 파괴, 일부 인수 또는 변형이라는 기괴한 형태를 제기한다. 기존 국가를 인수하여 사용하든 개조하여 변형하거나 재조직하든 모두 본질적으로 맑스의 국가기구 파괴사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두현은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지배도구라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립적’ 국가라는 모습과 ‘중재자’의 모습은 환상적이고 기만적인 것이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형태”고, “부르주아지의 이해가 자동적으로 관철되는 기구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 계급투쟁의 결과에 따라 관철되는 기구라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여 중립주의에 기울어 있다.
‘기존 국가기구의 가장 반동적인 억압기구와 이데올로기 기구’는 경찰, 군대, 감옥, 행정부, 의회, 사법부, 안기부, 자본가 언론 등이다. 일단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한 세력이 스스로 집권을 가능하게 한 절차적 정당성을 허물어 버리고 가장 반동적인 국가기구를 파괴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평화롭게 집권한 세력이 스스로 국가기구 일부를 파괴한다면 무장력이 필요할 텐데 그 무장력을 어디서 동원할 것인가? 생산수단과 대자본가의 자산몰수, 은행 등 금융기관 접수와 호화주택, 대토지의 몰수와 무장력의 사용은 누가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자본가들은 기존 억압기구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필사적인 저항에 나서 전면적인 내전상황으로 치달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국가기구를 일부 파괴, 일부 변형하는 것은 아무런 구별점이 없게 된다.
결국 남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공직 선출제, 소환제 등 지방자치제 자치기구의 강화이다. 성두현은 이러한 기구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거점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의 자본주의에서는 지방자치제는 자본주의 지배 형태를 고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방자치제는 자본주의 중앙권력에 맞서는 완충장치의 역할을 할 뿐이다. 성두현은 “국회의 대의성의 확장은 그것이 부르주아적 대의성을 탈각시켜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제약을 가하게 되고 기존 국가기구가 노동자, 민중의 억압에 사용되는 것에 제한을 가하게 된다. 소환제의 도입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런 효과를 가져오게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국가기구 변형론의 근거는 베른슈타인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지방의회나 지역 대의기구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져서 그 결과 혁명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중앙 대의기구의 기능은 점차로 축소될 것이고 그에 따라 중앙 대의기구나 정부가 민주주의에 끼칠 수 있는 위험도 점차 감소하게 될 것이다.(베른슈타인, 같은 글)
평등연대와 성두현의 국가기구 변형론은 교묘한 수사로 위장된 자본주의 구조개혁론에 불과하다. 따라서 변혁 경로에서 선거를 통한 집권을 가장 주요한 기회로 삼는 것이다. 평등연대는 국가기구 변형론을 통해서 개량주의라는 비판을 피해가면서 민주노동당 개혁을 위한 자신들의 활동근거를 만들어 내고 있다. 평등연대가 뒤틀어서 사용하는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도 구조개혁론과 유사하다.
트로츠키는 ‘사회혁명을 위한 이행기 강령’에서 “자본주의에서 실현 가능한 개량적 조치들의 획득에 제한을 둔 최소강령’을 비판하고 반동적인 자본주의의 기반자체를 공격하여 혁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이행기 강령을 제기하였다. 이 이행기 강령은 객관적인 자본주의의 위기가 최대로 고조되고 이중권력이 펼쳐지는 준혁명기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제출되었다.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의 핵심적인 요구는, 공장점거 파업 물결의 확산, 자본의 공장폐쇄와 기계반출, 자산 빼돌리기 등 사보타지에 맞서 노동자가 직접 공장을 접수하여 관리, 운영하는 공장위원회와 노동자에 의한 산업통제이다. 이 공장위원회와 노동자에 의한 산업통제는 혁명의 절정기에 소비에트로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일상적인 시기에 이행기 강령의 핵심적인 요구인 공장위원회 사상과 노동자에 의한 산업 통제 요구와 사상을 선전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상적인 시기에 이행기 강령을 구체적인 전술로 제시한다면 개량주의적 요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현 남한자본주의는 만성적인 위기에 빠져 있으나 급격한 위기 국면이 아니고 자본의 전일적인 힘이 관철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내거는 생산통제, 사회화 등의 요구는 혁명성을 탈각하면서 개량주의적 요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실제 경영참가, 생산통제는 공동결정제, 우리사주제, 종업원지주제, 임노동자기금제 등 개량주의자들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자동차 매각반대 투쟁 과정에서 공기업화, 사회화 요구가 얼마나 대중운동을 압살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근본계급 이익은 경제적 여건 변화와 관계없이 체제이행임.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혁명적 상황을 제외하면 사유재산제와 자본계급지배를 일거에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일상적 실천은 ‘비개혁주의적 개혁(non-reformistic reforms)
’을 중심으로 한 체제이행의 정치가 되어야 함.
임노동자기금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기초인 사적 소유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 내의 가장 반자본주의적 제도로 평가받고 있음.(조돈문, ‘작업장 및 사회적 차원에서의 노동자통제’ - 계급적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의 개입전략-)
개량주의자들도 이행기 강령을 흉내내고 있다. 실제 사회진보연대나 김성구 교수도 좀더 좌파의 목소리를 하고서 이런 이행기 요구를 하고 있다. 이중권력의 상황에서 제기되는 이행기 강령은 자본주의와 직접적으로 충돌하면서 혁명으로 권력을 찬탈하거나 자본주의의 반혁명에 의해서 분쇄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행기 요구가 자본주의의 극심한 위기국면과 직접 충돌하지 않고 수렴된다면 자본주의에서 국가문제를 회피하는 개량주의 강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하린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집중된 권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단-에 의해서 달성된다. 이러한 이행이 이루어지는 방법들의 체계를 보통 ‘사회화’라고 한다.”(부하린, ‘과도기 경제학’)고 주장했다. 이 글의 주에서 부하린은 “이 말이 ‘수탈자들에 대한 수탈’과 ‘몰수’라는 말 대신에 쓰인다는 것이 국제 화해주의 이데올로기의 특징이다. 이것은 그 악명 높은 ‘전체’와 관련시켜 ‘사회화’를 언급하려는 것, 즉 자본에 의한 국가권력의 조치들도 ‘사회화’라는 이름 아래 분류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여 면밀하게 이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문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남한에서 이행기 강령은 개량주의자들의 요구가 되었다. 평등연대가 제시하는 이행기 강령은 요구를 백화점 식으로 나열하는 민중주의적 요구로 전락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해마다 투쟁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내거는 사회개혁 요구와도 다를 바가 없다. 평등연대가 제시하는 이행기 강령은 정치혁명의 문제를 회피하는 자본주의 구조개혁론의 변형이다. 한/노/정/연

2005-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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