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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월에

현장에서 미래를  제10호
백기완

권 두 언




다시 오월에


백 기 완 (자문위원,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나는 사실 이 붓을 들기 전 상당히 망설였다.
붓을 들까 말까, 만약 든다고 하면 도대체 어떤 뼈대있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아니 설사 뼈대있는 말을 한다고 치더라도 도대체 누가 읽어 줄 것이며 혹 읽어 준다고 하더라도 무슨 반응을 일으킬 수가 있단 말인가 ···. 이렇게 서성거렸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요즈음 이 땅 노동자들에 대한 나의 육감이요 체감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내가 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내 의식의 한계요, 그 한계의 편협성이다. 그래서 이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나는 마냥 내키지 않았음을 솔직히 털어놓기를 머뭇대지 않는다.
그런데 붓을 들게 된 계기가 생겼다.
‘노사관계법, 제도 전면 개혁, 3자 개입, 복수노조 허용 등 전향적 검토’ 아침 신문을 드니 대통령 김영삼씨가 그렇게 말을 했다는 제목이 뜩 하니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세상살이 겪을 만치 겪어 본 백기완이가, 그래 김영삼씨 말 한마디에 왔다갔다 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전연 그 반대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서성거리던 붓대를 움켜잡았다는 말인가? 사실은 김영삼씨 말의 거짓됨이라고 할까, 빈 점이라고 할까. 도대체가 잘못된 발상, 잘못된 동기, 잘못된 목표가 너무나도 얏싸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떤 점일까.
김영삼씨는 이제껏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나름대로 신나게 역설해 왔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강변하던 전두환․노태우씨를 감옥에 넣고 또 옛날 조선 총독부 자리를 일제 잔재 청산이란 명분으로 허물고…. 그러나 김영삼씨의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의 독점재벌들의 부정한 자본축적의 역사, 다시 말하면 노동자 탄압 착취의 역사다. 이 때문에 이번에 노동법과 그 제도에 대한 전향적 개선을 모색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김영삼씨가 주장해 온 바대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파괴 왜곡되었던 노동자의 삶의 내력을 바로 세운다는 뜻에서 출발했어야 했다.
그런데 김영삼씨가 “구시대의 지나치게 규제적인 법과 제도는 유연하고 탄력성있게 재조정되어야 하며 국제 기준과 관행에 부합하도록 고쳐 나가야 할 것” 이라고 말함으로써 오늘 이 땅의 노동자 문제를 이 땅의 민주화 문제, 사회정의, 역사바로세우기의 취지에서 출발하지 않고 있음을 실토한 것은 참으로 놀랄 일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물론 오늘의 지나친 규제로 조직된 노동악법은 마땅히 고쳐져야 한다. 복수노조 금지란 말이 그렇지 실제에 있어서는 노동운동의 자율성을 파괴한 가장 악랄한 악성 조항이었으니 이것은 눈꼽만치의 속임수도 없이 사그리 칼을 대야 한다. 또 제3자개입 금지 조항은 정치권력이 독점 독선적으로 노동운동에 개입 통제한 실례이니 이 점도 변형 법규나 권력의 실질적 행사로 존속시킬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없애야 할 것이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정치투쟁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전근대적 탄압장치를 마땅히 없애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성 조항들은 도대체가 무엇인가 말이다. 그냥 전근대적이요, 국제 기준과 관행에 어긋나기만 하는 건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오늘의 점증하는 무역역조가 웅변하듯이 이 땅의 경제가 국제 분업체계에 수직적으로 예속된 국내 장치요, 나아가 이땅 경제의 구조적 모순, 즉 경제의 알기(주체)를 생산적이요 도덕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누구나가 규탄하는 부패 독점재벌을 알기로 보호 육성하던 반경제적이요 반사회․반진보적 모순 특히나 분단체제의 경제적 구조물이 아니었느냐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바로 세우려고 한다면 마땅히 노동자들의 생산적이요 도덕적인 노력의 역사에 근거하여 한국 사회발전의 모형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한국적 변혁 방법론에 입각하여 추진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노동법과 그 제도를 고치는데 국제기준과 관행에 부합하도록 하겠다고?
물론 오늘의 이 땅 노동운동의 탄압 현실이 국제적인 관행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치 부끄럽고 한심한 것이지만 그래서 바로 잡겠다는 측면을 전면적으로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차려야 할 것이 있다.
아무렴 앞서 지적한 노동악법은 이참에 전면적으로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물길처럼 밀려오는 우루과이 라운드 즉 국제 독점자본의 무제한의 자본 증식을 위한 터전 조율의 국제적 음모는 아닌가 ···.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참에 노동법과 그 제도 개선 문제와 관련하여 지적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땅의 노동악법은 사실상 쌍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하나는 앞서 지적한 독소 조항의 노동악법과 또 하나는 국가보안법이다. 이것들이 쌍칼처럼 노동운동의 순결과 진보적인 측면을 적대적으로 탄압하고 파괴해 왔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면 이참에 김영삼씨 말대로 국제기준과 관행에 부합하도록 노동문제에 전향적 모색을 하려고 하는데 있어서 마땅히 노동운동 탄압의 쌍칼 국가보안법 폐기 문제가 제기되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점이 지적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의 솔직한 느낌이다. 또 속는구나 ···. 그런 깨우침이다.

요즈음 나는 김영삼 정권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르게 오늘의 이 땅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미덥지 않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요즈음 나 나름의 공식 석상에 설 적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대의 특징은 하제 즉 희망이 없는 것이라고 울부짖곤 한다. 돈의 자기 증식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욕망 욕구가 판을 칠 뿐 모두의 선, 모두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는 공동체 그 이상이 도리어 파괴되고 있는 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압도적인 현실이니 도대체 희망이라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욕구 욕망의 대량 경주만 판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네의 공동의 선, 아름답고 사람다운 세상을 꾸려 갈 알기 즉 주체가 없어져 간다는 나 나름대로의 육감 체득이 그렇게 내뱉게 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보자.
요즈음 이 땅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정당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자기가 ‘진짜 보수’, ‘보수의 원조’, 아니 ‘정통 보수정객’ 보수주의자라고 자랑스럽게(?) 뻗대는 꼴을 보게 된다.
묻나니 ··· 나이 육십을 피눈물로 살아온 경륜을 총동원해 묻나니 이 땅의 보수 원조라면 무엇일까?
침략적 외세가 강요한 분단을 자기 지배권력 쟁취-유지에 악용, 분단체제를 강화하면서 진취적인 통일 의지는 말할 것도 없고 눈물겨운 통일염원마저 적대시 해 온 반민족적 분열주의자들이 그 첫째다. 그 다음은 총과 칼로 정권을 찬탈한 독재권력과 짜고 누가 뭐라던 돈만 벌고 그리하여 이루어진 썩어 문드러진 부패재벌이 지배하는 오늘의 현상을 유지 보존하자는 반민중적 묵수주의자들이다. 더구나 생산하는 사람들의 인간적 양심, 비록 가난하지만 순정과 성실을 담보로 하는 민중의식을 지역주의로 파괴 왜곡하여 정치권력을 이어가는 반역사 반진보적 야망의 화신들이 아니냔 말이다. 솔직히 말하여 민중의 힘으로 밀어내야 할 역사의 퇴물들이 도리어 보수지배를 땅땅 우르는 판인데 그런데 이른바 생산적이요 양심적이라는 민중의 알짜(실체) 노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거다.
두 번째, 지금 이 땅의 재벌들은 너도나도 ‘세계 일류기업’, ‘재벌의 세계화’라는 명제를 내걸고 있는 판이다. 잘 아는 바 오늘의 재벌들은 땅장사, 투기, 사치품 장사 등 그 구조의 비경제성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고 재벌들로 하여 소유의 편차가 격화되어 사회적 모순이 돌이킬 수 없을 만치 깊어 가고 그리하여 일어나는 경제적 또는 사회적 손실은 모두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에게 떠넘기는 판이다. 여기서 세계 일류기업이란 한편으로는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의 정당한 저항과 요구를 세계 일류기업이라는 환상 속에 해체 매몰시키자는 것이요, 따라서 재벌 비대의 희생양을 영원히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에게 강요하자는 악랄한 폭력의 위장에 다름 아니다. 그 위장된 폭력을 세계주의 다시 말하면 실체가 없긴 하지만 마치 세계적 희망으로 꾸려내는 것은 역시 재벌밖에 없는 것처럼 마구 떠벌이고 있는데 도대체 노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나는 오늘의 노동자들에게 묻고 싶다.
간교한 보수주의자들은 그네들의 지배 원칙을 마치 우리들 모두가 순종하고 따라야 할 가치처럼 밀고 들어오는데 노동자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가치는 따로 없는 건가? 아니 썩어 문드러진 악덕 재벌들은 감히 세계주의를 들고 나오는데 이 땅의 노동자들은 어떤 세상을 만들겠다는 세계관이나 세계주의는 없는 건가?
여기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보수 원조를 떠벌이는 사람들이거나 세계주의를 떠벌이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은 지금 이 땅의 모순의 해결자가 아니오, 따라서 우리네 희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해결자요 희망이란 말인가.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곧 이 땅의 모순의 해결자요 희망이라는 생각은 없는 건가. 나는 도대체가 알 수가 없어 ‘길’이라는 내 자작시 한편을 띄운다.

너와 나 우리 다 함께 피눈물로 쌓아
사랑을 거닐던 뚝방이 무너졌다
온몸으로 일군 역사 한 살매(일생)가
덧없는 자갈돌처럼
밑으로 바닥으로
보이는 건 오로지 칠흑 같은
암흑도 안 보인다

그래도 길은 있다 사랑하는 사람아
거슬러 올라가라
썩어 문드러진 탁류에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길이다
한/노/정/연

1996-04-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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