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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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반세계화운동, 이대로 좋은가?
 노동자민중세상-학생발언대

현장에서 미래를  제116호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

노동자민중세상: 학생발언대


반전-반세계화 운동, 이대로 좋은가?
- 반전-반세계화 투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시각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


농민들이 타살 당했다. 벌써 3인의 농민이 목숨을 잃었다. 대한민국은 열사공화국이란 말이, 자본주의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이제는 새롭지도 않지만 류기혁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재확인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과연 사람 죽이는 사회를 죽이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남한에서는 반APEC 투쟁이 펼쳐졌고, 홍콩에서는 6차 각료회의를 맞아 반WTO 투쟁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는 또한 모든 운동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착취의 폐절이라는 목표로 집중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10년이 넘는 퇴조기 속에서, ‘어쨌건 우리편’이라는 순진한 인식이 제반의 학생운동가들에게 존재하는 듯하다. 그것이 현란한 수사로 치장되어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동지들, 그저 존재하는 운동은 모두 우리편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사회주의자가 경계해야할 후진적 의식이다. 정치가의 모든 기술의 핵심은, 그 고리를 쥐었을 경우 전체 사슬을 움켜쥘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고리를 거머쥘 수 있는 능력이며, 그 가장 중요한 고리는 둘일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현 시기의 반전-반세계화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건 하나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럴 뿐이다. 우리는 현 시기의 반전-반세계화 운동이 자본주의적 착취의 폐절이라는 단일한 목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 시기의 반전-반세계화 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고민을 간략히 서술하려 한다.


1. 전쟁과 제국주의

2차 대전 이후로, 제국주의의 양상은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말한 바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의 종전, 즉 1945년까지의 제국주의는 명명백백한 식민지의 존재를 전제로 한 제국주의 강대국 간의 쟁탈전의 양상이었다. 원료산지 확보, 판매시장 확보를 위한 열강들 간의 식민지 획득을 위한 쟁탈전으로 전쟁의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1, 2차 세계대전이었다.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으로서의 연속혁명론, 그리고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제시된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론 역시 제국주의 열강간의 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독일혁명의 성공여부에 혁명 러시아의 존망 자체가 좌우되는 상황이었기에,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저 유명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슬로건은 무엇인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2인터내셔널은 1차 대전이 일어나기 2년 전, 이미 1912년에 자본가들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세계정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보자.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흔히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라크전은 레닌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용어법과 전혀 양상이 다른 전쟁이다. 당시의 ‘제국주의 전쟁’은 영국, 미국, 독일 등 열강들 간의 전쟁을 의미했던 것이며, 이로 인한 자본주의의 파국가능성은 지극히 구체적인 문제였다.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물리적 충돌가능성이 가시화되지 않고 있는 상황은 분명,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레닌의 시나리오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는 조국이 없다”는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강고히 가지되, 이것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최대한 구체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20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가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이행기라고 볼 수 있다. 세계대전은 세계체제에 대한 전일적 헤게모니 국가가 부재한 상황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전일적 헤게모니 국가로 등극했으며, 베트남전 패배 이후에도 미국의 헤게모니는 무리 없이 유지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불균등한 권력질서 속에서, 미국은 여전히 유일한 패권국가이며, 그 결과 제국주의 국가들 전쟁가능성은 가시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 시기를, 1차 대전에서 2차 대전에 이르는 시기와 유사한, 단일 패권국 부재의 시대로 보는 동지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베트남전 패배가 국가들 간의 권력질서에 미친 영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열강들 간의 권력질서에서, 베트남전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가 흔들리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1차 대전에서 2차 대전 사이의 헤게모니 이행기의 일촉즉발의 권력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미국의 중국과 미국이 무역마찰로 인한 갈등관계에 있다고 해서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미국은 역학관계 상에서 위안화 절상을 관철시켜낼 우위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 간의 권력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 지금은 레닌의 시나리오가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두 번째로(물론 위와 연결된 문제이지만), 계급역학관계의 측면에서도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은 미비하다(국내의 계급적 충돌로 인해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 제국주의자로 전향한 케이스에 대해서는 D. 하비, 『신제국주의』를 참고하라. 당시에 이런 전향은 매우 흔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그 자체가 계급적대로 인한 국가적 위험을 정복과 전쟁을 통해 봉합하려는 시도에 기인했다. 국제적 계급 역학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20세기 초반부터 1945년까지 기간은 자본주의의 파국적 위기의 시기였다. 대공황으로 인한 파국적 위기의 상황에서 비롯하는 계급적대, 제3세계 식민지들의 민족해방 투쟁의 고조, 소련의 강국으로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앞날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현재와 같이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며 진지전을 강제당하고 있는 상황에 있지 않았다. 세계체제는 격심한 계급투쟁의 전화 속에서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런 자본주의의 위기는 전쟁으로 표현되는 동시에 극복되었던 것이다(또한 마샬 플랜의 주요 목적은, 미국 과잉자본의 유럽으로의 배출 뿐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을 봉합하고 공산당을 거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운동은 1980년대 이래로 패배를 거듭하며 20년이 넘는 수세기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1970년대 말 이후, 장기불황이라는 자본운동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조직화되어있지 못한 상황이며, 대안적 전망을 책임질 국제적 세력역시 부재한 상황이다. 세계체제는 장기불황이라는 위기 속에 존재하고 있으나, 수많은 균열을 단일한 힘으로 조직할 세력은 부재하다. 남한에서 역시 전투적 계급투쟁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으나, 이를 단일한 대오로 결집시킬 수 있는 조직적, 정치적 자원을 가진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 결과 세계체제는 자본운동의 위기로 인한 수많은 균열 속에서도 당시 보다는 훨씬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과잉생산으로 인한 격심한 자본간 경쟁 속에서 분투하면서도,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무한한 자신감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전운동은 전략적 과제로 설정될 수 없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한 전쟁을 반대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최고수위로 격화시키자는 것이었음을 생각해보자. 노동계급이 생산의 고리를 틀어쥐고 전쟁에 반대할 수 있는 구체적 고리는 존재하는가? 과연 지금 반전운동으로 계급투쟁을 격화시킬 수 있는 매개고리는 존재하는가? 현 시기에 반전운동은 전술 운용에 있어서의 부차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뿐, 사회주의자들의 중심적 역량투입 과제가 될 수 없다. 반전운동이라는 정치활동을 통해 계급대립을 격화시킬 수 있는 조건과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다함께’류의 단체들은 노동계급이 반전투쟁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물적 조건을 알지 못한 채, 시민운동 수준의 이데올로기만을 유포하고 있는 셈이다. 1999년 시애틀에서의 반 WTO 시위 이후, 반전·반세계화 투쟁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으로 현 정세를 경향적 고조기라고 보는 것만큼 몰 정세적인 관점은 없다. 그 제반의 주체가 시민단체, NGO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SWP 그룹이 내놓은 일종의 이행기 강령인 켈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선언』은 트로츠키에 대한 희화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남한이야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노동시간이 늘어나고 있는 퇴조의 상황에서 어찌 이런 몰정세적 전술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트로츠키의 후예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마저 희화화 당하는 것을 보면, 트로츠키는 진정 비운의 혁명가임에 틀림없다.


2. 제국주의와 생산력의 문제,
그리고 오늘날의 반세계화 운동의 한계

1945년 이후로 식민지는 주권국가의 위치를 획득했고, 1960년대 이래로 제3세계에서 역시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 결과, 제국주의국가의 초과착취로 인해 제3세계에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은 없다는 것이 그 요지였던 1960년대의 종속이론은, 이른바 제3세계 신흥공업국의 등장과 동시에 파산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초과착취로 인한 개량의 불가능성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파국론적으로 논했던 PDR론 역시 종속이론의 그늘 아래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남한사회구성체논쟁 자체가 종속이론과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양우진의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한국 국가자본주의 형성연구」를 참고). 우리는 오늘날의 제국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誌에 의하면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는, 미국과 함께 2050년 경 세계 5대 경제 강국으로 예상되고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안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제3세계’라고 불리던 국가들에서 자본주의의 고도화 경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80년대에 주로 ‘신식민지’라고 규정되던 남한은, 현재 유수의 국제적 기업을 보유한 세계 10위권의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지금도 남한의 자본가들은 동남아시아에서 그 나라 노동계급을 열심히 착취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통상의 인식과 다르게 제국주의가 모든 경우에 식민지의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주의는 그 본질상 과잉자본의 식민지 침투이며, 이것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는 식민지에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식함을 통해, 생산력을 팽창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맑스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가 아일랜드의 생산력을 낙후시킨 반면, 인도에 대한 식민지배가 인도의 생산력을 팽창시켰음을 기록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항상 식민지의 생산력을 정체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련의 제국주의에 대한 공식입장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생산력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었는데(호르헤 라라인,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참고), 이것은 소연방의 기계적 유물론, 즉 생산력주의 때문이다. 곧 기계적 유물론에 근거해 생산력팽창 그 자체를 역사변동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그 자체를 ‘선(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한의 경우 자본주의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해 1910년 설, 1930년 설 등이 있지만, 자본주의가 일제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것 자체는 명확하다. 또한 일제통치기간 중 생산력 역시 정체한 것이 아니었다. 35년간의 일제통치기간 중 식민지 수탈이 이루어졌던 기간은,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 제국주의 통치기간 중 마지막 기간, 즉 대동아 전쟁 준비기(전쟁공출)에 한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 - 즉, 근대적 계급관계를 창출하고 생산기반시설을 구축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생산력이 봉건적 절대왕조국가의 생산력보다 높았던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제국주의-식민지 관계에 있어 우리가 주목해야할 바는, ‘생산력의 정체’가 아니다. ‘제국주이에 따른 식민지 생산력의 정체’라는 것은, 실증적으로도 검증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민족주의적 호소에 바탕하고 있으며, 이것은 결국 ‘자립경제구축’과 같은 소부르주아적 요구로 경도된다. ‘동북아 물류중심 국가 건설’이라는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장단을 맞추는 NL의 작태를 보라.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할 바는 자본주의의 폭력적 도입과 고도화에 따른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질서의 강화인 것이다. 남한사회구성체를 ‘신식민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명명백백한 지금의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한-일 FTA에 반대했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민족주의자들, 민주노총지도부가 이 주장하는 것처럼 초국적 자동차 메이커가 국내 자동차 시장을 잠식하여 ‘국내산업’을 공동화하기 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이런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훌륭한 비판으로 볼 수 있는 다른 기사를 잠시 옮겨보도록 하자.

『전경련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82.4%의 기업이 한일 FTA에 따른 관세율 인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FTA 체결은 자본에게 재앙이 아니라 자국 내 노동자의 수탈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여 자본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비상구인 것이다 … FTA는 노동자계급에겐 무엇을 선사할 것인가? 지난 8월 10일 서울 일본 클럽(SJC)은 노동·노사관계분야에 13가지 건의사항을 제출했다.
①노사협정·관행 시정 ②유급휴가제도, 노동시간제도 적정화 ③법정퇴직금제도 개정 ④일·한 사회보장협정 조기시행 ⑤단시간근로자(파트타임)지침 폐지 등 ⑥파견근로자제도 개정 ⑦노조전임자수 감축, 임금 지불 금지 등 ⑧노조의 불법노동행위에 대한 엄정하고 신속한 법적용 ⑨업무도급계약에 의한 기사 포함 렌트카 허용 ⑩국가유공자 고용의무의 탄력적 운용 ⑪노사협의회 구성·운영 등 ⑫노동조건의 하방경직성 ⑬정규직 해고조건 완화
… “노동쟁의 해결 노력, 무노동 무임금 원칙, 휴가수당에 대한 사용자 의무철폐, 퇴직금 산출 유연화, 노조의 불법행위에 대해 엄격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상이 의미하는 바는 한, 일 자본이 공통으로 노리는 바가 ‘남한 노동운동의 총체적인 무력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들의 국제적인 연대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노정신 준비 11호,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전면에 내걸고 ‘FTA 반대투쟁’을 전개하자!!


이런 자본가국제주의의 전면화,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의 전면화로서의 세계화·시장개방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식민지’라는 이름만 떼어냈을 뿐, 여전히 반세계화 운동의 실천적 함의에 있어서는 많은 그룹들이 신식민지 종속국 규정과 별반 다르지 않는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WTO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초국적 자본’이 남한의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여 농민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 남한의 농민이 과연 시장개방되기 전에는 살아있었는가. 우리가 신질서 3호의 <우리에게 농활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한바와 같이,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업 자체가, 농민이란 계층 자체가 사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을 역전시킬 수 있는 농민주체 역시 거의 사멸한 상황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남한사회구성체 속에서 해방이후 급속도로 진행되어온 소농층의 도시프롤레타리아로의 분화가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농산물과 공산품의 부등가 교환을 통한 농민층 수탈이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농가부채 문제는 바로 이런 농민층 수탈의 결과이다. 이전에 지적했다시피, 남한자본주의의 조건상 대규모의 농업자본은 형성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농업프롤레타리아 층’이라 부를만한 존재집단은 형성불가능하다. 소농층은 도시프롤레타리아로 분화되었으며, 이 분화과정에 참가하지 않았거나, 못한 존재들이 바로 현재의 농민들이다. 이것은 모두 농산물 그 자체에 대한 수입개방이 되기 전부터 이루어져왔던 남한자본주의 자체동학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점을 인지하지 못한 채, 현 시기에 맑스와 레닌이 말한 ‘노·농 동맹’을 언급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심할 정도의 몰정세적 발상이다.

어쨌건, 전국학생연대회의를 중심으로 한 반세계화 통일전선주의자 동지들의 주장대로 이것이 가공할 ‘초국적 자본’의 탓이라면, 우리는 남한에서 초국적 자본의 침투를 막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남한의 독점자본인 현대자동차가 미국 앨라배마에 공장을 세우는 판국이지 않은가? WTO를 비롯한 시장개방을 미국이 주도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신식민지’규정과 실천적 함의의 측면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세계체제론의 ‘반주변부’ 규정을 통해 그 수혜자가 선진국 독점자본들(이들은 종종 ‘초국적’이라 표현하지만, 사실상 구미독점자본을 가리키고 있다)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주의에 대한 투항이다.
예를 들어보자. 2004년 국회에서 통과된 한·칠레 FTA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이들의 말대로 미국 소유의 농업독점자본뿐이었나? 그렇다면 FTA의 통과로 칠레에 가전기기와 자동차를 수출하게 된 남한의 삼성과 LG, 현대라는 독점자본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거대초국적 자본 대 남한 민중이라는 이들의 구도야 말로 몰계급적, 몰정세적인 것이다. 남한 독점자본의 이윤을 위해 소농을 몰락시키고 있는 것이 현 정세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일차적으로 남한자본주의에 맞추어져야 한다. 계급적 관점의 견지 없이 그저 WTO는 농민을 죽이니까 나쁘다는 식의 관점이야말로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 물론 WTO는 농부를 죽인다. 하지만 왜 죽이는가? 카길과 같은 메이저 농업자본을 위해서? 옳다. 그러나 그 수혜자 목록에서 남한 자본을 빠뜨려서는 안된다. WTO, 세계화를 무엇인가 불가항력의 위력을 가진 해외 거대자본과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하는 관점에 의해,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는 소시민의 이해관계 속으로 M&A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소위 ‘좌파’라 자임하는 동지들이 ‘식량주권’이라는 ‘우파’의 수사를 들먹이는 데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주권’은 무엇인가? 한 국가가 가지는 독립적 자주권이다. 결국 ‘식량주권’이라는 말의 의미는, ‘한 자본주의 국가의 식량에 대한 독립적 자주권’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결국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이다. 남한이 식민지가 아닌 상황, 그렇기 때문에 민족해방투쟁의 과제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자본주의국가의 ‘주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도대체 국가주의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결과를 낳을까?
더 구체적으로 가보자. 흔히 하는 이야기대로,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30% 정도이다. ‘식량주권론자’들의 주장대로 남한이 식량에 대한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식량자급률을 100%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긴가? 도대체 자립경제구축론은 언제까지 영향력을 이어갈 것인가. 과연 식량자급률이 100%였던 적은 있었을까? 민족주의에 투항한 동지들이니, 아마 한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왜 ‘주권’은 식량에만 적용되는가? 엑슨모빌, 텍사코, 쉘 등의 석유독점자본가들로부터 남한민중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에너지주권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에너지 공급권이야말로 그 자체가 무기 아닌가?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희극인 동해유전개발이야 말로 ‘좌파’에 의해 장려되어야 할 일이다!

현 시기의 WTO 반대는, PD그룹의 만병통치약인 신자유주의 반대 슬로건이 가지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그대로 가지고 있다. 제반 ‘민중’을 ‘제국주의의 앞잡이’ WTO의 피해자로 상정하는 현 시기 통일전선전략(이것을 전략이라 부를 수 있다면)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코민테른 제7차대회 이후 ‘전략’으로 격상되기까지 한, 스탈린주의 인민전선전략의 실천적 파산은 스페인, 프랑스, 칠레의 경험을 통해 입증된 주지의 사실이요, 우리는 지난 신질서 3호의 <누구와,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에서 이를 거듭 강조했다. 물론 이 동지들은 코민테른 7차 대회를 통해 스탈린주의가 극복되었다고 주장하니, 이거야말로 국제공산주의운동사에 대한 무지가 아닐 수 없다.
현 시기 WTO 반대전선에서, 레닌이 통일전선에서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고 그토록 강조한 사회주의 정치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단지 뭉뚱그려진 ‘민중’의 이해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통일전선이 원래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있는 노동계급의 다수를 전취하기 위한 공산주의자의 전술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떤 통일전선 운용의 경우에도 사회주의정치의 독립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선운용의 기본을 망각한 발상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반APEC 투쟁이 국내의 여러 운동들을 하나로 결집시켰기 때문에 유의미했다고 생각하는 동지들에게, 한 혁명가의 인민전선주의에 대한 비판을 들려주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인민전선 이론가들은 산수의 가장 기초인 덧셈을 넘어서지 못한다. ‘공산당+사회당+아나키스트+자유주의자=그 각각을 단순히 합한 것’이라는 부등식이 그들 지혜의 전부이다. 그러나 산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역학 또한 필요한 것이다. 힘의 합성을 뜻하는 평행사변형에서 합성되는 힘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면 합성력은 그만큼 짧아진다. 정치적 동맹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합성력은 제로(零)가 될 수 있다.” - L. 트로츠키

2006-01-27 01:5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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