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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살인적 진압에 맞선 한국합섬 노동조합 투쟁

현장에서 미래를  제12호
이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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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살인적 진압에 맞선
한국합섬 노동조합 투쟁


이 길 우 (남선물산노동조합 위원장)


회사측의 반격과 조합원의 투쟁 열기

한국합섬 노동조합은 약 4년 전 유령 노조를 분쇄키 위해 200여 명이 노조정상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결과 94년 10월 22일~11월 3일까지 현장 대중투쟁을 통해 유령노조를 분쇄하고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아주 소중하고 값진 성과와 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렵게 건설한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해 조합원 교육을 하고, 현장내 다양한 소모임을 꾸리는 등 섬유사업장에서 보기 힘든 일상활동이 초보적이나마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합섬 자본은 한국합섬 뿐만 아니라 계열사인 이화섬유에서도 처음부터 유령 노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으로 인정하기는커녕 무쟁의를 통해 노사화합 선언 등을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95년 임단투에서도 무쟁의를 강요하였고, 노동조합은 일방중재조항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여 1년 무쟁의에 합의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95년 12월 2일, 2공장에서 질소질식 산재사고가 발생하여 2명의 노동자가 산재 사망하였다. 이에 노동조합에서는 산재 사망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구했고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회사측에서는 진상 조사중에 2공장장(전무이사)이 노조 위원장에게 “위원장을 칼로 찔러 죽이겠다”, “노조에게 복수하겠다”며 망언을 하였고 급기야 위원장을 폭행까지 하였다.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회사측에 대한 조합원들의 분노는 단체행동 돌입을 위한 파업 찬반 투표 89% 찬성으로 나타나면서 일촉즉발의 파업 돌입 위기까지 갔으나 회사측이 노조 요구를 100% 수용할 것을 약속하면서 95년 12월 2일~15일까지 산재 사망과 관련한 투쟁을 마무리 하게 된다.
그러나 기만적인 회사는 96년 1월초부터 산재 사망과 관련한 약속을 저버리고 김천지방법원에 산재사망과 관련된 투쟁을 빌미삼아 24억 6천만 원의 손배청구와 3월초 42명의 노조간부를 대상으로 징계방침을 통보하면서 96임단협 교섭을 8차례나 거부하였다. 그리고 타협의 조건으로 “단협유효기간 2년으로 연장, 96․97년 무교섭 무쟁의 선언을 하면 손해배상과 징계를 유보하고 97년 말에는 완전 철회하겠다”는 문서를 만들어 노조간부 전원이 서명합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렇듯 상상을 초월한 부당노동행위와 민주노조를 말살하려는 회사측에 대해 한국합섬 800여 조합원들의 분노와 투쟁의 열기는 누구도 꺽지 못할 정도로 높았다 (파업찬성률 93.5%). 더 이상 노동조합에서도 조합원들의 열기 때문에 투쟁의 포문을 열지 않을 수 없는 상태까지 온 것이다.

연대투쟁의 전개와 부위원장의 분신

노동조합은 4월 8일 2공장 전면 파업, 9일 1공장 부분파업, 11일 1․2공장 전면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더 이상 회사측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면파업을 전개하였다.
이 투쟁은 처음부터 개별단사 투쟁을 뛰어 넘어 진행되었다. 한국노총내 화섬분회와 구미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과 함께 연대 방안을 모색하면서 ‘결사 항전을 위한 연대의 밤’을 개최하였고,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섬유대책위와 함께 한국합섬 박동식 회장집에 항의방문하였다. 또한 대구지역에서는 선전전 등을 전개하였는데 대경총련 학생동지들이 한국합섬 투쟁 현장을 사수하는데 동참하기도 하였다. 특히 서울상경투쟁팀을 구성하여 민주노총 및 전해투와 결합된 투쟁을 통해 한국합섬 투쟁을 전국적으로 알려 내고자 하는 등 투쟁은 처음부터 적극적인 자세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한국합섬 투쟁은 개별단사의 노동자와 자본의 투쟁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공권력이 투입된 것이다.
5월 4일 밤 11시 구미 한국합섬 제2공장에서 40여 명의 조합원들이 250여 명의 전투경찰에 의해 집단적으로 폭행당하고 불법 연행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간 이진권 부위원장과 서상준 회계감사 등 5명이 그 자리에서 또다시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자 조합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며 온몸에 신나를 끼얹고 항거하였다. 이진권 부위원장이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기는 순간 온몸에 불길이 휩싸여 활활 타올랐고, 옆 동료들이 타오르는 불을 끄는 동안 개인 소화기를 휴대한 전경들은 수수방관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불을 끄고 나자 그 와중에서도 전경들은 불을 끄던 동료들에게 달려들어 조합원 2명을 연행해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그것도 모자라 분신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내몬 데 항의하며 피켓 시위를 벌이던 150여 명의 조합원들을 강제 연행해 갔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경찰과 관계기관에서 두 명의 노조 간부의 처절한 항거 투쟁을 부주의로 인한 단순사고인 양 호도하며 책임을 회피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분신 당시 연행된 두명의 조합원을 면회도 시켜 주지 않고 불법감금시켜 사건을 조작하려 하고 16명 긴급구속, 30명 불구속 입건, 102명 구류 5일 이라는 폭력적인 조치로 공권력을 남발하였다. 이것은 실로 도발이며 만행이었다.

전국적 연대투쟁으로의 발전과 5월 13일의 합의

지금까지 진행된 투쟁이 유령 노조를 분쇄하고 어렵게 만든 민주노조를 와해하려는 자본의 의도에 맞서 노동조합을 사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개별자본에 대한 민주노조 사수투쟁이라면 분신 이후에 투쟁은 개별 자본에 대항한 민주노조 사수투쟁을 넘어선 대(對)정부 투쟁으로, 전국적인 연대투쟁으로 전화하였다.
이제 경찰의 폭력만행과 조합원 강제연행을 규탄․항의하며 분신한 구미 한국합섬 노조의 이진권 부위원장․서상준 회계감사의 투쟁과 한국합섬노조의 파업투쟁은 구미지역대책위와 대구지역의 연대투쟁에서 영남권 차원의 연대투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대책위가 꾸려지면서 연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연대투쟁으로 발전한 한국합섬 투쟁은 96년 임단투의 전국적 전선을 세워내는 투쟁으로 발전하였으며, 4월 24일 발표한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천만노동자의 주요한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서울과 영남권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대되면서 서울대책위 차원에서 정부와 상층 교섭이 진행되었고 구미에서는 구미 시장을 내세워 협상에 나섰다. 한국합섬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을 살인적인 폭력으로 탄압한 회사측과 정권은 신노사관계 구상의 허점이 드러나고 이를 계기로 민주노총이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빌미로 삼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설치를 일주일 연장하면서까지 서둘러 한국합섬 투쟁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아래의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5월 6일 구미지역 대책위가 결성되고, 5월 8일 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구미역에서 규탄집회를 열고 나서, 영남지역 민주노총 지역협의회에서는 1차 임시대표자회의를 열어 5월 11일 영남권노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후 5월 11일 15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해 투쟁을 결의함으로써 연대투쟁이 활발하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확산은 단지 수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과 한국합섬 노동조합간에 연대의 고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그전에 일정 정도 한국노총 주도로 진행해 온 한국합섬투쟁이 민주노총 중심으로 이전되면서 한국노총과의 차별성을 투쟁속에서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노총과의 연대가 이제 막 시작되던 시점인 5월 13일에 한국합섬은 합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부가 얼마나 한국합섬투쟁을 서둘러 마무리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역으로 이것은 한국합섬과 민주노총의 힘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올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노사화합 선언이 합의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며 위원장의 사퇴를 인정함으로써 투쟁의 정당성이 일정정도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합의안은 민주노총과의 연대투쟁이 최선을 다한 후에 힘의 한계를 절감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연대의 출발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노동운동진영으로서는 상당한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점에서 타협은 불가피했던가?

이러한 정권과 자본이 타협 의도 앞에 한국합섬 노동조합은 더 이상 전국투쟁을 이끌어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두 동지의 분신, 16명 구속, 30여 명 불구속, 102명 구류 5일, 40여 일째 전국적으로 확산된 전면 파업을 겪었지만 그 동안 이러한 투쟁의 경험을 간직하지 못한 노동조합으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힘든 싸움이었기에 파업지도부는 일정 정도 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투쟁만으로도 한국합섬 파업 지도부가 최선을 다한 투쟁이었다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합섬의 투쟁이 정부의 신노사개혁안이 발표되는 시기와 동일하게 터진 투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국합섬투쟁에 대한 평가는 이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96년 투쟁의 초기에는 전선을 치면서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얻었지만 이것이 마지막 합의안 내용에는 담겨지지 않았다. 이것을 우리는 안타까움과 분노어린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합섬 투쟁에 처음부터 결합한 대구지역 대책위 위원장들이나 노동단체 그리고 파업 투쟁 현장 사수를 위해 한국합섬에서 살다시피한 지역의 학생동지들도 이같은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한국합섬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제 민주노총이 떠 안는 천만노동자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한국합섬 노동자들과 고민을 함께 하면서 어떻게 성과있게 마무리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교섭에서 민주노총 참석여부의 문제가 논란되기도 하였다.
이번 투쟁이 가지는 정세적 성격과 의의에 대해서는 묻어둔 채 타결함으로써 좀더 명확히 할 수 있었던 신노사관계의 허구성 폭로와 민주노총의 노개위 참여 문제를 적극적으로 재고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96년의 전국적 투쟁전선 형성이라는 흐름이 끊기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타결 내용에서 보듯이 이러한 합의 내용으로 타결할 수밖에 없었느냐는 반문의 여지는 민주노조를 경험하고 사수 투쟁을 경험했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어떠한 문제를 남겨 놓았는가

한국합섬 투쟁의 성과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민주노총 상층부가 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데서 그 이유를 찾고 있으며 민주노총 상층부는 이것을 부인하는데,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어도 문제가 되고 참여하지 않았어도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합의안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다.
노사개혁위원회를 바라보는 사고를 접어 두더라도 민주노총이 책임 있게 이번 투쟁을 마무리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문제점을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첫째, 타결후 위원장의 사퇴와 노사화합 선언으로 인해 이번 투쟁의 정당성이 훼손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노조 사수투쟁과 살인․폭력경찰의 공권력 남용 규탄 그리고 노개위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전국적으로 전투적인 기풍을 높이고 반자본가 전선을 명확히 한 이번 투쟁에서 투쟁의 책임을 지고 위원장이 사퇴하고 노사화합선언을 한 것은 이를 빌미로 이번 투쟁이 잘못된 투쟁으로 선전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전혀 없는 지도부가 처음 생각보다 너무나 커진 상황에서 조급히 투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심정은 이해되지만 정권과 자본이 이 투쟁을 타결하고자 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는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

둘째, 이번 투쟁은 한국합섬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의 위상과 한국노총의 어용성을 명확히 경험할 수 있었던 투쟁으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차이성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서울지역 분신대책위를 노총과 공동구성하면서 노총의 상층교섭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마무리 타결시점에서는 민주노총보다 한국노총의 주도력이 관철됨으로써 투쟁의 성과를 그냥 내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결과정에서 그동안 지속적으로 결합한 지역대책위나 동지들이 배제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민주노총 산하 동지들이 지역과 전국투쟁을 전개하면서 정권과 자본을 압박했음에도 노총의 상층교섭력에 의존함으로써 투쟁의 성과가 노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셋째, 마지막 타결 시점에서 그동안 함께 연대투쟁을 해 온 동지들을 어떠한 논의구조도 없이 배제한 상태에서 투쟁을 마무리함으로써 그동안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동지들을 비주체적으로 만들었고, 그속에서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경험들을 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연대투쟁을 해온 동지들에 대한 신뢰성과 이후 사업에서 가질 수 있는 더 큰 연대의 고리가 원칙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서서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대구지역 섬유대책위는 한국합섬 투쟁 소식을 접하고 나름대로 어느 사업장 투쟁보다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지역 섬유대책위 산하 조합원까지 참가하는 나름대로의 연대활동을 전개하여 지역 섬유대책위의 위상과 사업의 지속성을 가지면서 성과 있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투쟁을 통해 민주노총 섬유연맹 건설이라는 과제를 두고 전국 섬유산업 노동조합 대표자회의(이하 전섬노대)조차 개최하지 못하고 이번 투쟁이 섬유 산업에서 가지는 성격과 의의에 대한 논의와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서울지역과 대구지역이 따로 분리된 투쟁만을 전개하였다. 결국 한국합섬노조의 투쟁 속에서 섬유연맹 건설에 필요한 조직적 전망을 세워 내지 못했고 투쟁의 주요한 내용과 경험을 함께 하지 못하는 문제를 남겼다. 그리고 지역간 동지적 애정과 신뢰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섯째, 한국합섬 투쟁이 마무리되고 나서도 정권에서는 한국합섬 동지들을 추가 구속하고 당시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한 구미지역 두 동지를 제3자 개입으로 구속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을 볼 때 또 한번 김영삼 정권이 표방하는 신노사관계의 허구적 본질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당면 투쟁이 마무리되고 이후 계속적인 자본의 침탈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 특히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이 현재 전개되는 노동자투쟁에 지속적이고 다양하게 대응해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상층과 단위노조의 고민이 분리되어 있으면서 신노사관계 구상에 대한 공동대응은 커녕 관점의 통일조차 이루어 내지 못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한국합섬투쟁의 합의문에 노동조합이 노사화합을 합의했고, 노사개혁차원에서 제3자 개입금지조항의 개정이 거론되고 있는 이 시점에 한국합섬투쟁으로 2명의 구미지역 동지가 구속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의 신노사개혁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96임단투가 진행되는 이 시기에 무수히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합섬 투쟁의 경과와 평가를 한 단위노조 위원장으로서 가까운 곳에서 경험하고 느낀 대로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현재 대구지역 섬유대책위에서는 한국합섬 투쟁의 평가가 다른 어떠한 투쟁평가보다 절실함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평가가 마무리 단계에 있는데, 앞에서 나열한 부분들은 섬유대책위에 참가하고 있는 대부분의 대표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들이다.
위와 같은 내용들에 대해 이 글을 읽는 많은 동지들이나 한국합섬 동지들 중에 서로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다 하더라도 변혁적 노동운동과 섬유연맹 건설의 과제를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어느 한 동지의 견해로 이 글을 봐주었으면 한다. 한/노/정/연

1996-06-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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