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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마이크로전자(KMI) 노동조합 사수 지역연대투쟁

현장에서 미래를  제12호
강태수

현장통신



대한마이크로전자(KMI) 노동조합 사수 지역연대투쟁


강 태 수 (정책사업위원, 인천민중연합 의장)


지난 6월 12일 12년간 노동조합을 두번씩이나 해산시키며 노조탄압으로 악명을 떨치던 대한마이크로전자(주) 본관 건물에 ‘노조탄압 분쇄하고 위원장을 살려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는 마이크로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마이크로 노조탄압 분쇄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95년 6월 27일 해고되어 1년 동안 복직투쟁을 해오던 마이크로 노동조합 김명숙 위원장이 6월 11일 새벽에 음독 자살을 기도하면서 불붙은 마이크로 노조탄압 분쇄 투쟁은 인천지역 노조운동사에 길이 남을 연대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마이크로 정문앞 철야농성 투쟁 20일, 최소 100여 명에서 1,000여 명이 참가하는 마이크로 정문앞 지역 연대 집회 16차례, 마이크로 노조 간부 단식 농성 16일, 백병전을 방불케 하는 투쟁에서 연행된 총인원 117명, 구속 2명, 불구속 입건 8명, 22명이 즉결 처분 받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외형적인 탄압만 보더라도 이번 마이크로 노조탄압 분쇄 투쟁이 얼마나 힘겹고 치열한 투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대한마이크로전자(주) 노조탄압의 역사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 김명숙 위원장이 해고된 것은 95년 6월 27일. 1984년 설립된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을 공포스러운 노무관리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두번씩이나 해산시킨 회사는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위원장으로 내정된 김명숙 동지를 사무직으로 발령시키고 곧바로 해고시킴으로써 세 번째 노조사냥에 나섰다.
해고된 위원장을 중심으로 하여 상집 간부들은, 이번에는 노동조합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각오로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을 전개해 왔다. 3교대 사업장이라 새벽 6시, 오후 2시, 밤 10시로 나누어 하루 3번씩 출근투쟁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투쟁해 온 김명숙 위원장은 회사가 사우회와 불법적인 노사협의를 통해 96년 임금인상을 발표하면서 노동조합 교섭권조차 인정하지 않고 교섭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원직으로 복직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탄압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을 지키려던 김명숙 위원장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회사측 노조탄압은 이미 1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회사측은 1984년 4월 17일 109명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한 직후부터 비조합원에게 ‘노조반대’라고 쓴 붉은 완장을 강제로 착용하게 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탈퇴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당시에 노조 임원들은 감금상태에서 남자 관리자나 사원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며 조합활동을 해야 했다.
85년 6월 노동조합이 통근버스 제공을 요구하자 회사측은 정문을 폐쇄하고 관리직 사원을 동원하여 출근하는 조합원에게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회사 밖으로 내몰린 조합원 71명이 한국노총을 점거하며 농성 투쟁을 벌인 결과 ▲ 통근버스 운행 ▲ 조합간부와 조합원에 대한 징계 해제 ▲ 임금인상 ▲ 농성에 참가한 조합원에 보복 조치 중단 등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노동조합과 합의한 회사는 이때부터 파렴치한 노조해산 공작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국노총에서 농성을 풀고 나오던 조합원 71명을 기다린 것은 통근버스가 아니라 닭장차였다. 부평경찰서로 연행된 조합원 가운데 8명은 불구속 입건되고 10명이 5~7일간 즉결처분을 받고 나머지는 훈방되었다. 그나마 훈방된 45명의 조합원들은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자기숙사, 기계실, 공작실 등에 분산 수용되어 사직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결국 경찰과 회사는 곽순복 위원장 등 4명은 구속하고 즉결처분을 받은 조합원들을 무단 결근을 빌미로 자동사직 처리하는가 하면 강제사직에 불응하는 조합원은 강제 해고하여 86년 1월 노동조합을 해산시켰다.
87년 두 번째로 설립한 대한 마이크로 노동조합은 창립과 함께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연대 활동으로 자리를 잡아가는가 했는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회사는 89년 두 번째 노조사냥에 나섰다.
회사는 89년 11월 16, 17일 인노협 의장 구속에 항의하는 총회와 일일총파업에 참여한 것을 빌미로 위원장 등 간부 4명을 징계 해고하고 경찰은 장단을 맞추듯 병력을 동원해 출근투쟁을 하던 조합원 54명을 연행했다. 이때 연행된 조합원은 그후 두달 가까이 출근투쟁을 전개해 오다가 노조만은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끝에 회사측 요구에 따라 ▲ 인노협 탈퇴 ▲ 해고 4명 인정 ▲ 간부전원 사표 제출 ▲ 출근한 조합원에 대한 보복 금지 등 4개 조항에 눈물을 머금고 합의하여 출근을 하게 되었으나 회사는 또 다시 약속을 어기고 보복을 자행하였다.
회사는 출근한 조합원들을 생산라인에 투입시키지 않고 잡초 제거, 청소를 시키는 한편, “사고를 개조시켜야 한다”며 이른바 정신교육을 시키면서 매일 “조합은 공산주의”라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원 야유회에 데리고 가서는 유서를 쓰고 관속에 들어갔다가 나오게 한 다음 ‘새롭게 태어난 소감’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든지 거울을 보면서 “웃어라, 울어라”며 지옥같은 생활을 강요해 왔다. 결국 노조를 탈퇴한 사람만 생산라인으로 복귀시키고 마지막까지 버틴 조합원은 91년 5월 20일자로 강제 사직시켜 두 번째 노동조합도 해산시켰다.
회사가 이처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면서도 건재한 것은 대한마이크로전자(주) 최만립 회장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1961년 미국에 있는 알라이드 플라스틱회사 생산관리 부장을 지냈던 대한마이크로전자(주) 최만립 회장은 60년말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외국자본 유치 정책으로 미국 굴지의 반도체 회사인 AMI 한국지사인 대한마이크로전자(주) 사장으로 부임해 온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1958년 미국 남가주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최만립 회장은 미국 로스엔젤스 시립 트리폴리탄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한미친선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만만치 않은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1970년 사장으로 부임한 최만립 회장은 80년부터 체육계로 발을 뻗쳐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총무와 부위원장을 지냈고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을 맡았으며 아시아경기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집행위원, 대한소프트볼협회 회장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정․관계에 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최만립 회장은 이들의 비호를 받으며 12년 동안 노동조합 탄압을 일삼아 왔다.

스스로 무덤을 판 회사측의 고소고발

김명숙 위원장 음독 사실이 알려지자 민주노총 인천본부는 6월 12일 오후 2시에 규탄대회를 개최하였고 지역 노동자들은 속속 마이크로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규탄대회를 진행하던 중 회사측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는 뜻에서 ‘노조탄압 분쇄하고 위원장을 살려내라’는 현수막을 설치하던 민주노총 산하 노조 위원장이 회사 관리자로부터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회사 안으로 진입하면서 규탄집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역 노동자들이 심한 몸싸움을 벌인 끝에 회사 본관앞 잔디밭으로 자리를 옮겨 규탄집회가 계속되었고 마이크로가 창립한 이래 처음으로 회사 상무에게서 공개사과를 받아냈다. 그러나 마이크로가 어떤 회사인가?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난 회사는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인천지역 노동자들 앞에서 공개 사과를 하면서 뒤에서는 민주노총 간부를 포함한 4명에 대한 고소고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이와 같은 비열한 작태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라는 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회사가 준비한 고소고발은 불붙듯 번지는 투쟁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어 지역 연대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바로 다음날 대한마이크로 옆에 위치한 대원강업 부평지부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대한마이크로 노조탄압 분쇄 및 김명숙 위원장 원직복직 추진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대책위원 가운데 고소고발된 민주노총 간부를 전격적으로 연행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민주노총 간부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경찰병력과 대책위원 사이에 격렬한 육탄전이 벌어져 마이크로 정문앞 농성장 천막은 난장판이 되었고 경찰은 이 가운데 대책위원 18명이 부평경찰서로 연행했다. 이날 연행된 18명은 대부분 노동조합 위원장과 단체 대표들이었으니 사태가 확대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구나 조사과정에서 이미 회사 상무가 공개 사과까지 해 놓고도 민주노총 인천본부 정윤섭 의장, 조봉호 조직국장, 박인숙 총무국장, 인천해고노동자 협의회 조광호 위원장 4명을 주거침입으로 고소고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천지역 노동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13일 저녁 6시부터 부평경찰서 앞에서 항의 투쟁이 즉각 열렸으며 13일 밤 11시까지 대책위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하던 47명이 추가로 연행되었다. 이로써 악질 자본가 최만립과 이를 비호하는 경찰, 노동부 관계당국과 민주노총 인천지부를 필두로 노동운동 단체, 시민, 학생간의 대투쟁으로 싸움이 확대되면서 해 볼만한 투쟁으로 성격이 변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마침내 연대투쟁으로

연행된 동지들이 분산 수용된 세 개 경찰서 앞에서 14일 새벽 4시 30분까지 항의 철야농성을 전개한 인천지역 노동자들은 그 기세를 꺽지 않고 하나가 연행되면 열이 모이고 열이 연행되면 백이 모이는 완강한 투쟁으로 인천지역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는 연대투쟁을 일구어 냈다.
이러한 투쟁은 연일 계속되었다. 14일 저녁 6시 30분 부평경찰서 앞에 모인 500여 명은 당일 4시경 석방된 1차 연행자 18명과 함께 항의집회를 개최하였으며 대한마이크로까지 거리행진을 가졌다. 이날 오후 9시에 2차 연행자 전원이 석방되어 자진 해산한 대책위원회는 ▲ 위원장 음독 사태에 대한 공개사과 및 치료비 일체 지급 ▲ 위원장 원직복직 ▲ 노동조합 활동 보장(노조사무실 제공, 상근자 보장 등) ▲ 성실한 임금교섭 이행 ▲ 고소고발 취하를 요구조건으로 정하고 이 모든 요구조건이 일괄타결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책위원회는 급박하게 진행된 투쟁을 정비하는 한편, 각 산업․업종별로 일일 집회를 책임지도록 하고, 투쟁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마이크로 정문 앞에 천막을 설치하기로 하는 등 장기적인 투쟁에 대비하면서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6월 17일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300여 명의 지역노동자가 참석해 일일집회가 열렸는데, 대한마이크로 노조 김은영 사무장과 최정진 교육부장이 삭발 결의를 발표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등 결연한 의지를 보이면서 마이크로 노동조합이 이번 투쟁에서 선봉에 설 것을 다짐했다.
이날부터 이번 투쟁 승리에 또 다른 계기를 가져다 준 마이크로 정문앞 네거리에 천막을 설치하는 상징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집회를 마치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천막을 설치하던 과정에서 또 한 번 경찰 병력과 충돌한 노동자들은 천막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돌아가지 않고 각자 타고온 차량을 마이크로 정문앞에 대놓고 철야 농성을 이어갔다.
천막을 사이에 두고 투쟁 근거지를 점령하기 위한 뺏고 빼앗기는 일진 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어지는 연행사태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운 지역 노동자들의 기세는 최만립 회장의 사병으로 전락한 경찰도 막지 못했다.
6월 19일 집회 시작부터 천막을 설치하여 저녁 8시 집회가 끝나도 집회에 참석한 동지들이 해산하지 않고 천막을 지키겠다고 결의하면서 부평 4공단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 엄마가 된 1대, 2대 집행부까지 밤늦도록 남아 아이를 들쳐 엎고 선두에 서서 경찰에 맞서자 경찰은 해산 작전으로 나왔다. 그러나 결연한 각오로 싸우는 투쟁대오를 해산시킬 수는 없었다.
부슬부슬 비가 뿌리는 가운데 밤 10시 반까지 대치하던 경찰이 34명을 연행했지만 끌려가는 우리는 이미 승리를 확신했고 끌어가는 경찰은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6월 20일 부평경찰서 항의 투쟁 도중 또 다시 연행되어 남부경찰서로 이송된 18명을 포함하여 52명 전원은 진술을 거부하며 상황을 주도했고 이날 저녁 마이크로 정문앞 네거리에 텐트를 설치하면서 치열한 격전장은 이제 우리 차지가 되었다. 이제 전세는 우리 쪽으로 기울었고 승리를 확인하는 절차만 남았다.

하나된 인천지역 노동자, 승리가 눈앞에

이때부터 회사는 협상 테이블에 나와 우리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할 뜻을 비추었다. 그러나 회사 경영의 대부분을 쥐고 있는 상무이사가 계속 버티면서 협상은 좀체로 진전이 없었다. 대한마이크로 최만립 회장은 가업을 잇게 한답시고 미국에서 32년간 살면서 변호사 생활을 해오던 아들을 불러 회사 사장에 앉혔다. 그러나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사장이 회사 운영 전권을 휘두르는 상무이사 앞에서 실권을 잡지 못하자 공장장을 새로 영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회장 아들을 지원하면서 생긴 내부 알력이 이번 투쟁에서 노골화 되었다.
조합간부를 제외하고 그동안 잠잠했던 조합원은 물론 비조합원까지 가세하여 준법투쟁에 참여하고 투쟁 과정에서 새로 노동조합에 가입한 남자 사원을 중심으로 2시간 파업을 전개하는 등 쟁의행위에 돌입하면서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사장은 이를 계기로 상무이사를 제어하면서 협상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한편 마이크로 정문앞 연일 계속되는 규탄집회는 갈수록 열기를 더해가는 가운데 투쟁에 참가한 동지들 앞에 유독 눈에 띄는 동지가 있었다. 바로 1대 위원장을 지낸 곽순복씨다. 회사에서 해고된 뒤 가슴에 남모를 한을 품고 살아 왔다는 곽순복 1대 위원장은 아예 다니던 일마저 저버리고 마이크로 정문앞에 매일 나와서 투쟁하는 후배들을 독려하며 농성장을 지켰다.
설거지 하다가 생각해 낸 구호라며 ‘대를 이은 노조탄압 이번에는 끝장내자’를 열심히 외쳐대던 곽순복 전위원장은 어눌한 어투이지만 선동적인 연설로 규탄집회에 참가한 동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노동조합을 지키는 것은 양심을 지키는 것’이라는 유인물을 직접 손으로 써서 배포하면서 출퇴근하는 마이크로 노동자들을 붙잡고 설득하며 매달렸다.
이외에도 각 단위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이번 투쟁에서 또 다른 동력이 되었다. ‘만립이가 만번을 일어선다면 우리 노동자는 만한번을 찍어 눌러서 결국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며 흥분하던 노동조합 위원장이 있었는가 하면, 한 조합에서는 임투를 마무리하고 조인식이 있기 전날 위원장이 연행되고 잇따라 위임받을 간부까지 연행되어 오히려 회사쪽에서 조인식을 못할까봐 안절부절 했다고 한다. 또한 부평지역에 있는 전자회사 위원장은 교섭이 있을 때마다 연행되어 가뜩이나 지지부진한 교섭이 더 늦추어 졌다고 말하면서도 조합원을 대동하여 철야 농성에 참여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여기에 이번 투쟁에 민주노총과 단체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이나 아이를 맡기는 탁아소에서까지 가세하여 인천지역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마이크로 정문앞 규탄집회가 매일 저녁 8시까지 진행되자 오후 6시에 맡겼던 아이를 찾아야 하는 동지들이 많은 곤란을 겪었는데 탁아소 선생들은 열심히 투쟁하라며 이번 투쟁이 끝날 때까지 밤 아홉시까지는 아이를 봐주겠다고 자청하며 투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관심과 참여를 피부로 느끼면서 승리를 의심하는 동지들은 아무도 있을 수 없었다.

연대투쟁으로 일구어 낸 동력을 바탕으로
96 임․단협 투쟁을 승리로!

막바지에 몰린 회사는 협상 테이블에서 번복을 거듭하더니 민주노총 중앙 차원에서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최만립 회장 집앞 상경 투쟁을 준비한다는 소리를 듣고 드디어 사장이 협상 전면에 나서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28일 밤 사장으로부터 대책위원회 대표를 만나고 싶다는 제안이 나오면서 사태는 진전을 보였다. 29일 오전 민주노총 인천본부 정윤섭 의장이 회사 최동진 사장과 단독 면담에 나서면서 당일 예정된 집회를 치르는 가운데 회사와 노동조합은 실무접촉을 마무리하고 최종 협상을 앞두게 되었다.
그러나 최종 협상을 앞둔 회사는 당일 열린 수도권 집회를 중단하지 않으면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또 한번 변덕을 부려 빈축을 샀다. 이 소식을 들은 85년 당시 마이크로 노동조합 총무부장 조현숙씨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한자리에 앉아서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하는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최만립 회장이 고집을 피우는 것 같다며 ‘돈을 주기 싫어서’ 노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베풀면 베풀었지’ 노조와 교섭을 통하여 ‘내 주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기 싫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한 것이 아니겠냐고 분노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정윤섭 의장과 사장이 만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상무이사가 협상에 제동을 걸면서 최종 합의는 7월 1일 월요일로 넘어갔다. 수도권 집회에 참여한 동지들은 간염을 앓고 있으면서도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최정진 교육부장과 평소 몸이 약했던 김은영 사무장을 걱정하면서도 확실하게 승리할 때까지 노동자 깡다구로 싸우겠다고 입을 모았다.
드디어 7월 1일 위원장의 사무직 복직을 고집하며 버티던 회사는 ▲ 위원장 현장으로 원직복직과 3개월간 휴가보장, 치료비 지급 ▲ 노조사무실 신축, 상근자 1명 인정 ▲ 회사 게시판을 통한 공개 사과 ▲ 추석, 구정 특별 보너스 추가 지급 ▲ 민주노총 간부 고소고발 취하 및 간부와 조합원에 대한 보복 징계 없음 등에 합의했고 조합은 두 차례에 걸친 조합원 총회를 거쳐 조합 간부 단식 투쟁 16일째, 마이크로 노조탄압 분쇄 및 위원장 원직복직 투쟁 21일만인 7월 2일, 합의문에 도장을 찍었다.

민주노총 인천본부 출범 이후 첫 번째 투쟁이었던 대한마이크로 노조탄압 분쇄 투쟁은 산업, 업종을 넘어 지역 연대투쟁의 모범을 만들면서 인천지역 노동조합 운동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민주노총 인천본부는 이번 투쟁에서 직접 협상에 나서는 등 실질적인 상급단체 역할을 해냄으로써 그 권위를 한층 높였다.
근래 보기 드문 연대투쟁으로 악질적인 자본가를 굴복시킨 이번 투쟁의 성과는 최종 타결 내용 가운데 위원장이 조합원 자격으로 복직한 것이나 회사측이 제시한 임금인상액을 넘어서지는 못한 부족한 점을 덮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투쟁 성과를 바탕으로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이 굳건하게 자리잡는 것이다.
민주노총 또한 이러한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아직 임투가 진행중인 대우중공업, 한양공영, 롯데기공, 고니정밀 등의 파업투쟁을 지원하여 이번 투쟁의 열기를 이어내 투쟁의 마무리를 해야 할 것이다. 20일간 투쟁을 이끌었던 ‘대한마이크로 노조탄압 분쇄 및 김명숙 위원장 원직복직 추진 특별위원회’는 ‘대한마이크로 노조탄압 감시단’으로 전환하여 당분간 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던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도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를 쟁취한 대한마크로 노동조합 간부들과 조합원이 지역연대 투쟁에 선봉으로 나설 것을 기대한다. 한/노/정/연

1996-06-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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