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노동운동과 노동법, 그 이론과 역사
노동법 개정투쟁 10년, 그 의의와 한계
김 종 배 (전노협 백서․운동사 발간위원회)
1. 들어가는 말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민주노조운동의 재건과 발전의
시발점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올해로써 10년째를 맞고 있다. 이
기간은 과거 약 반세기 동안 안정되어 왔던 냉전체제가 일거에
무너짐으로써, 거의 전지구상이 자본주의라는 단일한
사회구성체로 완성된 시기이다. 또한 70, 80년대의 쇠퇴했던
노동조합운동도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고, 특히 남아프리카,
브라질, 남한처럼 보다 억압적인 정치체제하에 놓여 있던
노동자계급은 폭발적인 투쟁을 전개하면서, 전투적이고,
체제변혁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정착시켜 나간 기간이기도 하다.
외부의 적과 전개한 장기간 투쟁의 승자들이 아주 단기간에
자신의 숙명적 반대세력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 시기인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10년간을 살펴보면 남한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치체제는 군사집단에 의한 직접적 통치가
종식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지속적인 고성장이 이루어 졌으며,
경제력의 재벌편중은 한층 심화되었다. 노동자계급은 1987년
대투쟁 이후 전국회의와 전노협준비위를 거쳐 전노협을
건설했으며, 다시 전노협은 ILO공대위와 전노대,
민주노총준비위를 거쳐 마침내 민주노총이라는 민주노조의
확고한 조직체계로 뿌리내린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0년간의 변화는 종결되지 않고 있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은 그 어느 한 계급의 완전한
괴멸없이는 중단될 수 없는 것이고, 각 시기의 대립이 그 대립의
역관계에 의해 제도화되지 않는 한, 보다 엄밀히 말해 법률로써
일정시기의 휴전이 담보되지 않는 한, 변화가 끝난 것은 아니다.
물론 법률이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충돌하는 지점들을
지도위에 이어 놓은 것일 뿐이고, 그 전선은 법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신성불가침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으며, 상호간에
공정하지도 않다. 법률은 현실의 역관계에 대한 가장 냉정한
경계선이다. 이 10년간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진출을 법률로써
명확히 타결지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대립과
역학이 지속됨으로 변화의 한 종결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1987년은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자본 중심으로 재편한 노동법을
처음부터 무시함으로써, 그 법률의 개정을 강제했다는 점에서
‘노동법 개정투쟁 원년’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과 자본 사이의 역관계가 규정된 관행, 규범, 법률을
각각에게 유리하도록 유지, 또는 개선하려는 투쟁”이 10년 째
계속되고 있다.
이 글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을
노동법 개정투쟁을 중심으로 크게 세시기로 구분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그 첫시기는, 자본의 일방주도에 의한 노동법의 제정,
개악의 시기로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음의 시기는 장기간의 억압을 지탱시켜온 악법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극적 공격의 시기로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1989년
공안정국 이전까지를 이 시기로 구분한다. 마지막으로 89년
이후에서 현재까지는 노동자계급과 자본사이의 상호공격과
방어에 의해 어느 한 쪽도 완전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구분에 따라 각 시기 노동법 개정투쟁의 흐름을
점검하고, 특히 지난 10년간의 노동법 개정투쟁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 봄으로써 그 의의와 한계를 돌이켜 볼 것이다.
2. 지난 10년간의 노동법 개정투쟁의 시기별 경과
가. 자본의 일방적 주도에 의한 법률개악의 시기
우리나라 노동관계법은 1953년 3월에 제정되었다. 1952년
12월에서 다음해 4월 까지 이어진 피난 수도 부산에서의
조선방직 노동자 투쟁과 1952년 부두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미국과
이승만정권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도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노동관계법은
태평양전쟁의 패전국이자, 식민지배국이었던 일본에 비해 훨씬
뒤늦게 제정되었다. 일본에서는 “일본 민주화=일본제국주의의
배제”와 “일본 국제경쟁력 약화=경제적 예속”을 꿈꾼
승전국인 미국의 지시에 의해 노동조합법과 노동기본법,
노동관계조정법이 제정되었던 것에 비해, 남한에서는 처음부터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정책을 폈던데 기인한다. 주지하다시피
해방과 함께 빠른 속도로 조직을 건설한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곧이어 전평을 결성하고, 46년 메이데이 기념식에서는 4만여명이
수도 서울에서 집회를 갖고, 8시간 노동제 등의 요구를 전면에
내걸었다. 그러나 전평이 조선의 완전독립과 미군정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전국총파업을 전개하면서부터 미군정의 혹독한
탄압에 내몰리게 된다. 결국 자주적으로 출발한 남한
노동조합운동은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철저히
유린당하게 된다. 그 결과, 패전이후 일본에서는 미군정의
보호하에 노동운동의 급속한 성장이 이루어진 것에 반해,
남한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노동운동이
오히려 미군정에 의해 철저히 탄압당함으로써 침체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이러한 출발은 그 이후에도 되풀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4.19이후 폭발적으로 발전했던 노동운동이
박정희 군부정권에 의해 짓밟혔고, 1980년 민주화의 봄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던 노동운동은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유린되었다. 87년 이후 전노협으로 이어진 노동자들의 투쟁성은
바로 보호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역사적
자각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해방 이후 노동법이 제정된 1953년까지는 산업의
원시성만큼이나 노사관계는 봉건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헌법 밖에서, 법률 밖에서 원초적 폭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불만이 전쟁중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군수물자 생산과 전쟁수행에 없어서는 안될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제정된 노동법은 지금까지 수차례에 거쳐 개정되었다.
쟁의조정법의 경우 8차례의 개정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개악에
개악을 거듭했다. 한국전쟁 종전이후 더욱 강화된
반공이데올로기,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은
노동운동을 그 어떤 운동보다도 철저히 탄압함으로써 노동운동이
생겨나는 것 자체를 억눌렀다. 이러한 상태에서 악법으로나마
존재하던 노동관계 법령들은 사문서에 불과했고, 법률의 집행은
노동자들에게는 엄격하게, 자본가들에게는 아예 감시, 감독,
처벌이 없는 최대의 관대함을 베풀었다.
이 시기에는 아무도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또한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노동법의
개정은 이러한 역관계를 현실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개악에
개악을 거듭해 갔다. 법률은 실종되었고, 아무도 노동법의
존재를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청계피복의 청년
재단사가 근로기준법이 있었다는데 감격하고, 그리고 그
근로기준법이 휴지조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함께
불태워 버릴 때까지!
이 사건은 1953년 노동법이 제정된 이래 노동관계법에 대한
노동자의 첫 접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70년대와 80년대의
노동자들의 가장 훌륭한 의식화 서적은 ‘근로기준법’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근로기준법을 보면서 감격하고,
또한 감격한 노동자라면 누구나 그 근로기준법은 휴지조각이며,
휴지조각이 아닐 수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투쟁’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정된 노동관계법의 개정은 국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재정권의 비정상적인 기구에 의해서 강행되었다. 1963년의
개악은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1973년의 개악은 유신체제하의 ‘비상 국무회의’에서, 1980년의
개악은 전두환 군부쿠데타 후의 ‘국가보위 비상입법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노동관계법은 노동자들의 보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의 체제유지와 자본의 초과수탈에만 초점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노동자대투쟁이 있기 전까지의 노동자들은
노동관계법의 존재유무는 물론이요, 노동력 제공자로서의 자기
권리조차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던, 헌법에 우선하는
공장군율하에 놓여 있던, 말 그대로 “산업전사”였던
것이다.
나. 노동자들의 노동악법에 대한 적극적 공격의 시기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들의 노동관계법에 대한 첫 집단적
공격이었다. 현대엔진 노동조합 설립신고서의 반려로 시작된
87년 노동자대투쟁은 그 시작에서 끝까지 철저히 법률을
무시하였다. 1987년 7월 하순에서 같은 해 9월 하순까지 두달
동안 전국적으로 약 3,500여 개의 사업장에서 파업투쟁이
일어났는데, 이 가운데 쟁의조정법상의 파업절차를 밟은
합법쟁의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것은 독재정권의
자업자득이었고, 법의 신성함을 주장해 온 관변학자와 어용
판․검사에게는 참혹한 반란이었다. 처음부터 노동관계법은
노동자들의 머리속에는 없었다. 이론적으로만 가능했던 합법적
쟁의에 대한 파산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무법(?) 행위에 놀란 국가권력과 자본측은
노동자 대투쟁이 점차 전산업과 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던
1987년 11월 28일, 전격적으로 노동법 개정을 단행했다.
말하자면, 계속 확산되는 노동자들에게 이제 법률이
개정되었으니 그 틀안으로 돌아오라는 개량의 유혹이자,
더이상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는 최후 통첩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정된 법률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제기된 문제의식을
아주 부분적으로만 수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 내용도 1980년
‘국가보위 비상입법회의’가 개악했던 것의 일부분을 유신체제
이전의 노동관계법으로 환원시킨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미봉책이 가능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87년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자본과 정권의 과소평가가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87년 대투쟁의 기세를 통일된
노동진영의 요구로 조직하거나, 또는 그것을 주도할 조직체가
꾸려져 있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노동자들에 의한 조직적 노동법 개정투쟁은 1988년에서야
싹트기 시작했다. 88년 상반기에도 노조민주화투쟁과
노조설립투쟁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와중에서 임금인상투쟁도 그
이전의 어느 해보다 격렬히 전개되었다. 1988년 4월 26일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 졌고, 이어 1988년
5월부터 다시 ‘노조탄압저지 노동자공동대책협의회’가
주도하는 노동법 개정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어 1988년 7월
29일에는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야권 3당 합동공청회’가
열려 새로운 노동법 시안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 시안은
노총이나 정부쪽보다는 ‘공대협’의 요구를 집중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한편 뒤이어 구성된 ‘노동조합특별위원회’와 기존의 공대협이
합동으로 ‘전국노동법 개정투쟁본부’를 조직하였고, 1988년
10월 9일에는 북한산, 하왕산, 백운산에서 권역별로 ‘노동법
개정을 위한 등반대회’가 개최되어 약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였으며, 이어 이 조직의 주최로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에서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개최되어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악법철폐! 노동해방!”을 외치며 여의도로 행진해 갔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촉구
대회’,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이 날의 투쟁은 300여 명의 선봉대로 하여금 민주당을
점거농성케 했고, 결국 민주당으로부터 12월 정기국회에서
노동법을 개정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하게 했다.
노동법 개정투쟁의 거침없는 전진은 한국노총의
‘노동악법개정촉구 및 삼성규탄 전국노조대표자
궐기대회(12/9)’, 금속연맹 대표자 3,000명의 삼성본관 앞에서
이건희 화형식을 갖는 등 투쟁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강제력을 발휘했고, 심지어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조차
노동자들의 요구에 굴복하게 했던 것이다.
88년의 노동법 개정투쟁은 가장 성공적인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전국의 노동자들을 한 곳으로 집결시킴으로써 고립,
분산된 투쟁을 넘어 전국적 일체감을 불러 일으키게 하여, 다음
해에는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라는 전국회의의
전신을 만들어 내는 조직적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1989년 3월
9일 임시국회에서 노동법 개정안이 통과 이 국회에서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은 야 3당의 찬성으로, ‘근로기준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은 여야 3당의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결국 같은 해 3월 24일, 노태우의
거부권행사로 무산되고 말았다.
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다. 노동과 자본의 상호공격과 방어의 시기
1989년의 노동법 개정투쟁은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런데 상반기 투쟁을
임금인상과 노동법 개정을 병행하여 투쟁한다는 목표하에 시작된
1989년 노동법 개정투쟁은 국가권력측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부는 먼저 128일간 계속되어 온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을 투입하였고, 이어 지하철 파업을 이틀 앞둔 1989년 3월
24일에는 국회에서 통과된 노동법 개정안에 대해 노태우는
거부권을 행사하고, 3월 26일 지하철 군자기지에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공안정국은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계기로 민족민주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인천․부천총파업’, ‘성남지역 총파업’,
‘마산․창원지역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의 저항은 점차
집단화 되었고, 가두투쟁이 장기화되었으며, 이 와중에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구심건설이 전국회의에 의해 한층 구체화
되었다.
이제 노동법 개정 가능성은 멀어졌지만, 노동법 개정투쟁과
노동운동탄압 분쇄투쟁을 통해 성장한 노동운동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건설로 총매진해 갔다. 1989년 11월
12일, 경찰에 의해 관악산이 완전히 애워쌓인 속에서도 전국의
노동자 4,000여명이 서울대에 집결, 마침내 전노협 건설의
일정을 선포함으로써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국가권력 사이의 1회전이 막을 내리게 된다.
전국노동자대회 이후 전국회의는 한층 강화된 탄압속에서도
전노협 건설을 주도해 나갔고, 국가권력도 체제정비에 돌입하여
전노협이 건설되던 1990년 1월 22일, 3당을 민자당으로
통합함으로써 전노협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운동과 민자당
사이에, 노동운동과 국가권력 사이에 숙명의 2회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1990년은 자본측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전노협
창립대회장에 공권력의 투입, 전노협 가입노조에 대한 업무조사,
현대중공업에 대한 육해공작전에 의한 공권력 투입, KBS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 외에도 모든 쟁의현장에 물리력을
동원함으로써 노사관계를 87년 이전으로 후퇴시키려고 시도했다.
90년 5월 총파업과 5.9민자당해체 투쟁으로 국가권력에 대한
사활을 건 투쟁을 전개하여, 엄청난 탄압속에서 마침내 전노협을
사수하였다. 그러나 임금인상투쟁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결합하여
힘차게 진행하려 했던 상반기 투쟁은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으로, ‘전노협사수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되었고, 상대적으로 ‘노동법 개정투쟁’은
주요한 이슈로 떠오르지 못했다.
1990년 노동자대회는 KBS파업을 계기로 만들어진 업종회의와
공동으로 주최했다. 이 대회를 준비한 전노협에서는 최초의
업종과의 공동개최에 대해 국가권력이 침탈함으로써 폭력성을
유발, 전노협을 과격집단화하여 업종과 분리를 획책할 것에
대비하여 봉쇄와 침탈에 대비한 기동력을 갖춰 대회를
사수하겠다는 각오 ‘전태일열사 20주기 추모
90전국노동자대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사업보고 200쪽,
1990년
로 대회에 임했다. 그리하여 11월 10일 밤 10시를 기해 고려대에
약 7,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진입하는데 성공하였고, 11월 11일
본대회에서 “민주노조 총단결”과 “노동악법 철폐! 노동기본권
쟁취”를 주요 요구로 내걸었다. 1990년도의 이러한 투쟁은
노동법 개정에 대한 이슈를 부각시키지는 못했지만, 무자비한
탄압을 경험하면서 노동법 개정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확대되었고, 전노협 사수와 대회의 성공적 개최로 탄압에 대응한
투쟁의 자신감을 확인해 주었다.
1991년 또한 자본과 정권측의 도발로 시작되었다. 2월 10일
대공장 연대회의 간부를 불법연행 구속한데 이어, 5월에는 이
사건으로 구속된 한진중공업 노조 박창수위원장을 안양병원에서
살해함으로써 전노협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운동 진영과
국가권력간의 사활을 건 3회전 투쟁이 시작되었다. 민주노조
진영에서는 여섯차례에 걸쳐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면서 총력적인 투쟁을 전개했고, 국가권력은
이에 맞서 구속․수배의 칼날을 휘둘렀다.
국가권력과의 전력 투쟁과정에서 노동법 개정투쟁은 수면위에
떠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와중에도 92년과 93년
노동법 개정투쟁의 중기적 목표를, 첫째 노동법 개악 및
전반적인 노동통제정책의 저지, 둘째 자주적 단결권 확보와
전노협, 업종연맹등의 합법성 쟁취, 셋째 민주노조총단결의
조직적 구심 확보, 넷째 단위노조의 조직력 강화로 잡고,
단기적으로는 하반기 노동법 시안이 국회에 상정되면 전면적인
대중투쟁을 통해 무력화시킬 것을 결의한다. “노동법
개정투쟁의 조건과 계획”,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사업보고 95쪽,
1991년
1992년 한국정부의 ILO가입과 더불어 노동법 개정에 대한 기대는
한층 높아졌다. ‘ILO가입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위한 정책
토론회’가 전노협의 주최로 이루어 졌고, 12개 업종 주최로
‘ILO가입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이어
이러한 토론회의 결실로서 ‘ILO 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이하 ILO공대위)가 결성되었고
그 해 11월 10일에는 ILO공대위 주최로 전국노동자대회가
개최되어 다시 한번 강력한 노동법 개정을 전개할 것임을 전체
노동자에게 천명하였다.
1992년 노동법 개정투쟁은 조합원의 대중동력을 끌어내고,
1993년 노동법개악에 대비한 다양한 조합원 의식화사업이
중점으로 배치되었다. ILO공대위 대표자들의 지역순회 간담회,
노동법 개정에 대한 공개질의서 서명운동, 노동법 개정을 위한
대표자 결의대회, 노동법 개정을 위한 각종 교육 등이 이어졌다.
이어 1992년 11월 8일 전국노동자대회에는 약 5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해서 노동법 개정을 요구했다. 이러한 성과는
90년 이래 노동법 개정에 대한 관심이 저하되던 조합원들에게
다시 한번 노동법 개정투쟁의 필요성이 상기됐다는 긍정성은
있으나, 전반적으로 노동법 개정을 공론화, 쟁점화시키지 못한
한계를 가졌다.
1993년 노개투는 예정되었던 정부의 노동법 개악을 연기하겠다는
발표(1993년 8월 24일)가 나면서 사실상 국가권력과
민주노조운동 사이에 벌어졌던 사생결단의 대립은 외면상으로는
중지된 것으로 보였다. 탄압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도, 국가권력의
본질이 변화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 이전의 직접적
대립을 현장통제와 신노동정책 등을 통한 점진적이고 우회적인
대립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와중에 전해투
동지들의 결사 단식투쟁, 원진레이온의 직업병투쟁,
근로자파견법 저지 투쟁이 전개되면서 93년도 노동법 개정투쟁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전국 단위노조대표자 수련회를
시작으로 전국순회 노동법 개정 강연회, 뺏지달기, 플랭카드
걸기, 꽃다지 순회공연 등 예년에 비해 훨씬 다양한 대중사업이
전개되었고, 단위사업장과 지역에서도 이전의 침체를 뚫고
전노협 결성 이후 가장 활발한 노동법 개정투쟁이
전개되었다.
1994년 노개투는 민주노총 건설의 과제와 결합되어
진행되었으나, 노동법 개정의 요구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체 노동자들의 참여 프로그램도 제대로
없어, 노동법 개정의 필요성은 의례적인 강조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후 1995년에는 사회개혁투쟁의 한 과제로서 노동법
개정투쟁을 설정하였으나 여타 사회개혁투쟁의 과제만큼도
공론화 되지 못했으며, 다만 임투시기 대표적인 악법무력화
전술로 진행된 제3자개입 실천운동이 그나마 성과를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공안정국 이후 이 시기는 국가권력과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격렬한 충돌을 통해 주도권쟁탈전을 벌여 온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 긴박성만큼이나 각자의 조직적 변화도 두드러진다.
먼저 노동운동진영은 전노협, 전노대를 거쳐 민주노총을
건설했고, 정권측은 3당합당을 거쳐 김영삼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제 노동법 개정투쟁은 새로운 국면에 처해 있다. 민주노총과
문민정권이라는 각자의 뚜렷한 역사를 지닌, 매우 질긴 생명력과
서로가 측정하게 어려운 힘을 지닌 이질적 존재가 마주 서 있다.
1996년의 승자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년째가 되는 이
행의 승자는 지난 10년간 자신의 역사에 보다 충실한 자가 될
것이다.
3. 노동법 개정투쟁 10년의 의의와 한계
이상에서 우리는 세 시기로 구분하여 노동법 개정투쟁 10년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위에서 이미 충분히 서술했지만, 그 중
몇가지의 핵심내용을 뽑아 자문해 보고 싶다. 지난 10년간의
노동법 개정투쟁의 성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계는? 지금의
시기는 어떠한 노동법 개정투쟁을 필요로 하는가?
대체로 미흡한 대답이 되겠지만, 대답 그 자체가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대답해 보고자 한다. 우선 지난 10년간의 노동법
개정투쟁의 성과는 무엇인가? 나는 이 성과를 단연코
민주노총이라고 말하고 싶다. 노동법 개정투쟁은 87년 대투쟁을
계기로 성장해온 민주노조들을 묶어 온 가장 강력한 끈이었다.
그것은 그 이전의 어용노조들처럼 억압적 체제에 기생하지
않겠다는 민주노조들의 일관된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이행을 위해 민주노조가 총단결해 왔고, 그 약속위에서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민주노총 산하에
합법화된 연맹과 합법화 되지 않은 연맹이 함께 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약속을 좀 더 확대해석한다면,
민주노총은 합법화냐 아니냐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노동법
개정투쟁을 통해 부단히 민주노조를 확대재생산하고, 비억압적
체제를 거부하고, 자본에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때만이 그 성과의 한 축이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법 개악기도의 저지라는 성과는 그 약속의 한
부분일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노동법 개정투쟁의 한계는 무엇인가? 물론 다양한
대중사업을 배치하지 못하고, 매시기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지
못한 점, 노동법 개정을 쟁취하지 못한 점은 분명한 한계이고,
이 한계는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리하여 바둑대회니
장기자랑이니 노동조합 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대중사업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반짝 아이디어에 의해
지배되지는 않기에 아주 다양하고 폭넓게 주변을 검토한다면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한계점은 노동법
개정투쟁이 노동자 자신들을 정치적 주체로 형성시키는데 소홀해
왔다는 점을 들고 싶다. 즉, ‘노동법 개정을 위한 청원’,
‘노동법 개악 기도하는 민자당 항의방문’ 등으로 정치는
노동자에게 대상화되고, 노동자들은 국회의원을 늘
청부용역업자로 이용해 온 것이다. 노동법 개정이라는 극히
중대한 사안을 청부용역업자에게만 맡길 수는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시기에는 어떠한 노동법 개정투쟁을 필요로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민주노총에서 나온 노개투 지침서를
읽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다만 다음의 사실들을 상기하고
싶다. 지난 10년간 “노동법 개정에 유리한 국면”이라는
정세인식은 적어도 4~5회 이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ILO,
OECD가입, 선거국면 등은 양치기 소년의 단골메뉴였고,
지배세력의 이완등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1996년은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합쳐져 있다. ILO와 OECD에는 이미 가입했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으며, 지배블럭 내의 권력투쟁도 심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노동관계법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개정될
것인가? 불행하게도 나는 “그럴 수도 안그럴 수도 있다”는
대답밖에는 못한다. 둘 모두 비관적인 이유 때문인데, 이 땅의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럭비공처럼 튀어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
하나와 민주노조진영에서 93년 이래 노동법 개정투쟁을 거의
정치적으로 대응해 옴(노동법 개악에 대해서는 아니지만)으로써
럭비공이 자기 마음대로 튈 수 있게 내버려 두어 왔기
때문이다.
노동과 자본, 그리고 국가권력 사이에서 “개정되면 좋고”라는
순진함은 통하지 않는다. 노개위 참여를 놓고 갖는 기대나
우려보다는 노개위라는 빙산의 일각 그 밑의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분명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협상이란 투쟁의 결과를 약간 기술적으로 나누는
것이지, 머리싸움이 아니다. 나는 하반기 노동법 개정투쟁이
럭비공의 한쪽방면을 완전히 막아버릴 만큼 거대한
얼음덩어리같이 결빙된 대중투쟁이어야 하고, 협상이전에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는 맨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살길이 보이는게 아닐까? 한/노/정/연